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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6 23:11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 선생, 오랜만이에요. 아주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건강해 보여 다행이네요."
이연화가 방다병과 함께 천기산장을 찾았을 때, 하효혜는 얼른 나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했다. 이연화는 꾸밈 없이 예의바른 미소를 지은 채 예를 표했다. 하효혜는 공들이지 않아도 매우 존중하며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함께 자리에 앉자마자, 하효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래, 소보. 정말 그 잔당들을 깨끗하게 처리한 게 맞느냐?"
"아직 진행 중이에요, 백천원과 황궁이 협조해서 조사하고 있고요. 그래도 가장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그날 이연화가 참살하거나 점혈해 잡아두어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넌 대체 호위를 어떻게 섰기에 이 선생이 잡혀가도록 놔두었어? 별일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놈들이 악한 마음을 갖고 빠르게 손을 썼다면 네가 화봉초를 찾겠다고 고생한 것이 말짱 소용없게 될 뻔하지 않았느냐?"
하효혜가 방다병의 팔을 찰싹 때리며 짐짓 눈을 흘겼다. 방다병은 억울함과 수치심이 동시에 드러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건-." 이연화가 눈만 돌려 청년을 일별했다. 물론 그것은 방다병의 잘못이라기보다, 위험한 계획을 공유하지 않은 이연화의 탓이었다. 그러나 방다병의 머리는 아마도 '별일 없었기에 망정'이라는 대목에 붙들려 있을 터였다. 사실 별일은 있었고, 그 별일에는 일정 부분 방다병의 책임이 있었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청년이 어물거리는 사이, 이연화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당주, 방소보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방심한 제 잘못이지요. 그리고, 제가 끌려가지 않았다면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도 요원했을 겁니다."
"물론 소보가 최선을 다했을 거란 사실을 의심하진 않지요...그런데, 선생은 왜 방심하셨습니까?"
누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쉬던 하효혜는, 곧 미간을 좁힌 채 살짝 따지듯이 물었다. 엇. 이연화가 내심 흠칫하며 눈을 깜박였다. 하효혜가 우매한 조카를 타이르거나 야단치는 듯한 태도로 이었다.
"이 선생, 정말 천행이었어요. 물론 이 선생의 무공이 전처럼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스무 살의 이상이도 약했기에 표적이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심지어 동기가 어찌 되었든, 선생은 공개 혼사 중인 음인이었다고요. 그놈들이 선생을 흉악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상대에게 틈을 보이셨습니까?"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니면 제가 음인으로서의 명예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이연화의 목구멍에서 진심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하지만 그 두 문장 중 어느 것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난처한 기분에 휩싸여 방다병을 힐끗 보자, 청년은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난 눈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상황을 무마하고자 한껏 무해하고도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 이연화는 하효혜를 향해 얼버무렸다.
"자, 하 당주. 모두 잘 마무리된 일이지 않습니까.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했지요. 아직 체질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마음에 틈이 생겼던가 봅니다."
"이 선생, 그래서는 안 돼요. 이 선생이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리란 것쯤은 물론 이해하지만, 못된 놈들은 이 선생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그 지점을 노리려 들 수도 있어요. 경계심을 자칫 늦추기라도 하면, 언제 세상의 쓰레기 같은 놈들이 이 선생을 노려 함부로 각인하려 들지 모른단 말입니다."
하효혜가 안타까운 얼굴로 간곡히 말했다. 이연화가 힐끗 방다병의 눈치를 보았다. 비록 '쓰레기 같은 놈'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연화와 현재 각인을 유지하고 있는 바른 청년은, 어머니의 말에 푹 찔린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그 사정을 알 길 없던 하효혜는, 이연화에게 집중한 채 한탄하듯 이었다.
"내가 세상의 부당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는지 아십니까? 희락기에 든 양인은 보통 난폭해지지만, 음인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지요. 까딱하면 희락기에 동의 없이 각인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예요. 한 번 형성된 각인을 끊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 아주 파렴치한 데다 절제라곤 모르는 무뢰배들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혼인하는 음인들도 많다고요."
이연화가 다시 방다병의 눈치를 보았다. '동의 없이'부터 점점 쪼그라들던 방다병은, '무뢰배'에 다다랐을 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처럼 작아져 있었다. 이연화가 내심 끙 소리를 참으며 눈가를 살짝 만졌다. 한소리 듣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으나 상처입은 청년을 그저 두고 보자니 어쩐지 양심이 조금 따가워져, 이연화는 상대를 진정시키는 웃음과 함께 건넸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지요.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하 당주. 제가 비록 이상이의 이름을 버렸다 하나, 이연화 역시 누군가의 강제를 순순히 따를 사람은 아닙니다. 설령 원치 않게 민망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만일 그 상대가 파렴치한 무뢰배라면 결코 응하거나 감히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웃음기 띤 눈으로 잠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각인한 음인은 그 대상인 양인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통념이 있었으나, 이연화는 그 통념에 순순히 맞춰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상대가 법도를 모르는 악인이라면, 차라리 정신적으로 자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터였다. 하효혜가 심란한 눈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음인이 되었다 해도 이 선생은 사고문주였던 불세출의 영웅이지요. 웬만큼 간덩이가 부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감히 이 선생의 동의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아니, 소보. 너 왜 그러느냐? 차에 이상한 게 들었어?"
고개를 돌렸던 하효혜가 문득 놀라 물었다. 방다병이 풀죽은 얼굴로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었다. 한숨을 푹 쉰 청년이 찻잔을 술잔처럼 비웠다. 빈 잔을 바라보며, 방다병은 조금 우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뇨. 그냥...차가 쓰네요."
"쓰긴 뭐가 써, 미각이 어떻게 된 것 아니냐? 아, 혹시 네가 이 선생을 이런 처지에 빠뜨렸다고 생각해서 그래? 참,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어. 그리고 전에 이 선생도 말씀하셨잖아, 형질이 바뀐 것보다는 건강을 찾은 일이 더 중하다고. 자, 등 펴라. 책임감도 좋지만, 천기산장의 소장주가 이리 풀이 죽어서는 안 되지. 어쨌든 네가 현장에 이르게 도착하여 위험한 상황을 막았다면서."
하효혜가 방다병의 등을 두드리며 활달하게 격려했다. 그러나 '이르게 도착하여'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던 방다병은 바로 몸을 펴지 못했다. 그 딱한 꼴을 보다 못해, 이연화가 얼른 끼어들어 화제를 돌렸다.
"아, 하 당주. 그보다 서신에서 방다병과 저를 함께 부르셨던데, 무슨 변고라도 있었습니까?"
"방씨 집안의 변고라고 해야겠지요. 방금 전까지 하던 얘기와 아주 무관하지도 않고요."
하효혜가 근심 어린 낯빛으로 말했다. 의아한 얼굴의 두 남자를 향해, 당주는 그들을 부른 사정을 설명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방다병의 친가 쪽 사람으로, 방다병이 어린 시절 두어 번 얼굴을 보았던 당숙 방시문이었다. 중년인은 귀한 핏줄을 타고났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지방에서 학당을 운영하며 글공부를 했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과 달리 그 부인 채명홍은 사업에 꽤 수완이 있어, 작지만 탄탄한 표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떵떵거리며 남들을 호령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부부는 지역에서 나름대로 명성 있는 유지였다. 그런 부부에게는 음인으로 발현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옥면에 차분한 성품을 가져 구애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이 몇 차례 교류했던 명문 세가의 공자와 덜컥 각인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같이 계곡으로 유람을 갔던 차에, 방 공자에게 갑작스러운 희락기가 찾아온 탓이었다. 이에 세간에서는 방 공자가 신 공자에게 마음이 있어 꾸민 일이다, 그게 아니라 서로 연정을 품었던 양인과 음인이 둘만 있다 보니 생긴 사고이다 등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신 공자는 크게 유감스러워하며 방 공자와 혼인하겠다 했으나, 사건 이후 두문불출하던 방운일은 어느 날 유서 한 장을 남기고 목을 매어 자진하려 했다.
"유서에는, 이 모든 것이 신 공자의 계략이었을 거라고 적혀 있었단다.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이지."
"예? 그럼 그 공자는 신 공자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단둘이서 유람을 간 거예요?"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하효혜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가고 싶지 않았는데, 신 공자가 강권했다고 하더라. 지역에서 유명한 세가의 차남이니 거절하기 쉽지 않았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난처한 상황이겠네요. 당시에 바로 조사했다면 모를까, 시일이 꽤 지난 후이니...증좌를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방다병이 미간을 좁히고 심각하게 말했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뿐인 자식이 결국 목을 매어 자진하려 들 지경이 되었으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 혼인을 막고 싶겠지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아들을 잃는 것이 훨씬 끔찍한 일일 테니까요."
"맞아요. 당숙 어른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소보가 백천원의 형탐으로 여러 사람들을 도왔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서신을 보내셨다 합니다. 그리고 방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최근 그곳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몇 차례 있었다고 해요.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신고를 받아 관에서 철저히 조사한 경우에도 별다른 증좌가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약을 쓴 흔적도, 몸을 강제로 휘두른 흔적도 없었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어쩌면 사특한 술법이나 약물이 퍼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방다병이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하효혜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로 그 지역에서 그런 범죄가 유행하는 거라면, 관에 넘기든 188 감옥에 넘기든 철저히 단죄하도록 해라.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고 그런 식으로 각인을 강제하려 들다니, 사람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 사람이라 부를 수도 없는 놈들이야."
"걱정 마세요, 어머니. 철저히 조사해 볼게요. 사람이 아무런 억울함 없이 자진하려 들기야 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단호히 말했다. 잠시 생각하던 이연화가 덧붙였다.
"저희가 함께 가서 조사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워낙 큰 사건이 있던 직후라 이목이 지나치게 쏠릴까 걱정입니다. 과한 관심도 수사에는 독이 될 수 있지요. 방 선생께서 괜찮다면, 저희의 신분을 대외적으로 숨기고 방문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아, 알겠어요. 그럼 그편에 미리 서신을 넣어 두지요. 여정에 필요한 물품은 천기산장에서 챙겨드릴 테니 뭐든 말씀하세요, 이 선생."
하효혜가 얼른 수락했다. 이연화는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문주가 아닌 선생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하효혜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날 오후, 방다병과 이연화는 함께 말을 타고 방시문의 거처를 향해 출발했다. 편한 여정을 위해서라면야 마차가 나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을 다투는 일인 만큼 말을 달리는 편이 나았다. 발이 빠른 편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강아지인 불여우가 말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기에-또한 불여우는 이연화의 정체와 함께 세간에서 꽤 유명해져 있었다-이연화의 반려견은 천기산장에서 호화로운 식사와 간식을 누리며 주인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게 뭐람, 불여우가 우리보다 잘 먹고 있겠어."
허름한 객잔에 앉은 방다병이 이빨 빠진 국수 그릇을 보며 투덜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국물이 멀건 데다, 면이며 고기의 양도 적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발을 재촉하는 참이었으니 좋은 객잔을 골라 들어가기는 어렵지. 밤이슬이나 피할 정도면 족하지 않겠어. 도련님 티 내지 말고 먹기나 해. 강호 초출도 옛일인데 버릇을 못 버렸네." 흥 소리를 낸 방다병이 보란 듯이 국수 그릇을 들어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천기산장을 떠났을 때부터 줄곧 묘하게 흐려져 있어, 이연화는 살짝 삐딱한 미소를 띤 채 방다병을 보다 입을 열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어쨌든 각인한 상대가 코앞에서 처져 있으니 영 외면할 수가 없었다.
"왜 계속 죽을 상이야, 방 공자? 네 어머니한테 대놓고 욕을 먹은 것 같아서 슬퍼?"
일부러 놀리듯이 건넸지만, 방다병의 얼굴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은 조금 더 어두워져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내가 파렴치한 짓을 한 건 맞으니...설령 정말 나를 향해 욕을 하셨더라도 잠자코 듣는 게 맞지."
"됐어, 방소보. 넌 죽을 뻔한 나를 도와주려고 한 거잖아. 그 의도는 파렴치와 거리가 멀지. 널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내막을 다 알고 나면, 하 당주는 네가 아니라 나한테 욕을 퍼부을걸."
"이상한 소리 마,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결과까지 다 괜찮은 건 아니잖아. 네가 날 원망하면서 다시 안 보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는걸."
그때를 떠올리자 입맛까지 잃었는지, 방다병은 잘 먹던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이고, 이 녀석. 이연화가 내심 뒷목을 주물렀다. 적비성처럼 마냥 당당한 모습도 속이 들끓긴 했지만, 이렇게 땅굴을 깊이 파며 들어가려는 자세 역시 난감하기로는 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연화는 시무룩한 각인 상대와 함께 시무룩해질 마음이 없었다. 젓가락으로 국수 그릇을 휘저으며, 이연화가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다. 방다병은 고개를 탈탈 가로젓고는 다시 국수를 먹던 참이었다.
"말해 두겠는데, 하 당주에게 했던 얘기는 빈말이 아니야."
"응?"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눈썹을 까딱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양새가 평소보다 조금 더 귀여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각인의 영향일 터였다.
"내가 누군가의 강제를 순순히 따를 사람은 아니라고. 그 때에도, 다가온 게 너나 적비성이 아니었으면 아마 공격했을 거야."
방다병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이연화가 담담히 건넸다. 어조야 대수롭지 않았으나, 사실 선뜻 건네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강호를 떠돌 때부터, 솔직함은 이연화에게 매우 어려운 덕목이 되어 있었다. 그 주제가 신뢰라면 더욱 그랬다. 방다병은 휘둥그레진 눈을 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뺨이 씹다 만 국수로 불룩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픽 웃었다. "왜 그렇게 봐. 못 믿겠어?" 방다병이 입에 들었던 음식을 꿀꺽 삼켰다. 그 뺨과 귀가 은은히 붉어졌다.
"아냐, 널 믿어. 내가 처음 건드렸을 때...네가 칼을 찾았거든."
아, 그랬지. 이연화가 살짝 머쓱한 기분을 추스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날의 일이 자세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강렬한 장면 몇 개는 드문드문 기억났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을 때, 이연화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연검을 찾으려 바닥을 더듬거렸다. 당시에는 고통과 욕망보다 살심이 선명히 앞서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냄새를 맡자마자 모든 긴장이 풀려버리는 바람에-이연화는 회상을 억지로 멈추고는 태연한 소리를 냈다.
"그래, 그렇다니까. 뭐, 나도 그렇게까지 될 줄 모르긴 했지만...그러니까, 소용없이 자책하지 말란 뜻이야. 네가 하도 그러니까 내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당한 것 같잖아. 각인을 끊기 싫다고 징징거린 주제에, 어째 그런 부분에서 당당하질 못해."
이연화가 짐짓 타박하듯이 말했다.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었다. 국수 그릇을 들어 단숨에 꿀꺽꿀꺽 비워버리고, 방다병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람이라면 마냥 당당해질 수 없어, 당연하잖아.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고마워."
"왜 그럴 수 없어? 아비는 계속 당당하던데."
"이연화, 너 지금 마교의 대마두랑 나를 비교한 거야?"
방다병이 억울하게 외쳤다. 이제 좀 방다병 같네. 픽 웃은 이연화가 말했다.
"뭐, 그래도 아비가 대마두치곤 나쁘지 않아. 손속이 거침없다 뿐이지, 정말 인간의 도를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넌 정과 의를 숭상하는 사고문을 세웠으면서, 사람에 대한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니야? 그보다, 아비는 왜 계속 안 보여?"
"맹에 일이 생겼나 보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든 큰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이잖아. 내 주변을 맴돌 시간 따윈 없을걸."
이연화가 상식적으로 말하고는 차를 마셨다. 한창 사고문을 세워 유지할 때를 돌이켜보면, 적비성이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자신을 방문했던 것조차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방다병은 대번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그건 평소 얘기잖아. 지금은 그 녀석도 너랑...그런 상태인데, 분명히 가까이 있고 싶을 거라고. 넌 안 그래?"
이연화는 입에 들어왔던 찻물을 간신히 제대로 삼켰다. 천진하다 못해 맹한 질문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 이연화는 관하몽에게 각인에 대한 몇 가지 사실과 더불어 주의사항을 전해 들었다. 첫째, 각인 초기에는 상대에게 아주 강한 끌림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떨어지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둘째, 비슷한 맥락에서, 각인 초기에는 종종 성욕이 불시에 치밀 수가 있다. 감정기복과 함께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다. 셋째, 그렇다고 첫 각인 직후의 과도기에 두 번째, 세 번째 관계를 맺으면 각인이 더욱 공고해질 테니 알아서 하시라. 이연화 역시 대부분은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아무리 반쪽짜리라도 의원 노릇을 하고 다녔던 만큼, 인간의 몸에 대해 아주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여 이 상황이 덜 난감해지지는 않았다. 몸은 두 상대를 모두 원했는데, 머리로는 그 현상을 매끄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던 탓이었다. 혼자 침상에 누울 때마다, 이연화의 몸은 왜 각인한 상대가 곁에 없는지 의아해하며 허전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연화의 머리는 늘 그런 몸뚱이를 향해 윽박질렀다.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 앞날 창창한 어린애와 금원맹주를 어떻게 한 이불 안에 들여? 만에 하나라도 상대를 찾아 몽유하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이연화는 요새 몰래 침상에 팔을 매어두고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속사정을 티낼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기에, 이연화는 대놓고 상대를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타박했다.
"난 멀쩡해, 그런 데에 휘둘리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내가 한창 팔팔한 십대인 줄 알아?"
"아...그래. 그럼 다행이다."
방다병이 안도한 표정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이연화는 그 기저에 깔린 말을 애써 외면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너는 나처럼 안 힘들어서 다행이다. 이거, 내 마음이니 뭐니 하면서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을까? 그냥 빨리 선을 그어버린 다음, 각인을 끊는 약이라도 먹게 하는 편이 이 녀석한테 더 나은 거 아니야? 내심 갈등하면서도, 이연화는 겉으로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방다병과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아마 아비도 나랑 비슷할걸. 그 녀석이 산전수전을 얼마나 겪었는데, 이 정도로 뭘 그렇게 힘겨워하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이연화는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믿었다. 그가 알던 적비성은 때로 과히 맹목적일지언정,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강호의 여러 고난을 거쳐온 노련한 무림인이었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각인의 여파에서 아주 자유로우리라 여기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거기에 매여 어쩔 줄 모르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짐작은, 그로부터 대략 이틀 정도 후에 요란하게 깨져버렸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 선생, 오랜만이에요. 아주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건강해 보여 다행이네요."
이연화가 방다병과 함께 천기산장을 찾았을 때, 하효혜는 얼른 나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했다. 이연화는 꾸밈 없이 예의바른 미소를 지은 채 예를 표했다. 하효혜는 공들이지 않아도 매우 존중하며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함께 자리에 앉자마자, 하효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래, 소보. 정말 그 잔당들을 깨끗하게 처리한 게 맞느냐?"
"아직 진행 중이에요, 백천원과 황궁이 협조해서 조사하고 있고요. 그래도 가장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그날 이연화가 참살하거나 점혈해 잡아두어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넌 대체 호위를 어떻게 섰기에 이 선생이 잡혀가도록 놔두었어? 별일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놈들이 악한 마음을 갖고 빠르게 손을 썼다면 네가 화봉초를 찾겠다고 고생한 것이 말짱 소용없게 될 뻔하지 않았느냐?"
하효혜가 방다병의 팔을 찰싹 때리며 짐짓 눈을 흘겼다. 방다병은 억울함과 수치심이 동시에 드러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건-." 이연화가 눈만 돌려 청년을 일별했다. 물론 그것은 방다병의 잘못이라기보다, 위험한 계획을 공유하지 않은 이연화의 탓이었다. 그러나 방다병의 머리는 아마도 '별일 없었기에 망정'이라는 대목에 붙들려 있을 터였다. 사실 별일은 있었고, 그 별일에는 일정 부분 방다병의 책임이 있었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청년이 어물거리는 사이, 이연화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당주, 방소보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방심한 제 잘못이지요. 그리고, 제가 끌려가지 않았다면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도 요원했을 겁니다."
"물론 소보가 최선을 다했을 거란 사실을 의심하진 않지요...그런데, 선생은 왜 방심하셨습니까?"
누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쉬던 하효혜는, 곧 미간을 좁힌 채 살짝 따지듯이 물었다. 엇. 이연화가 내심 흠칫하며 눈을 깜박였다. 하효혜가 우매한 조카를 타이르거나 야단치는 듯한 태도로 이었다.
"이 선생, 정말 천행이었어요. 물론 이 선생의 무공이 전처럼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스무 살의 이상이도 약했기에 표적이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심지어 동기가 어찌 되었든, 선생은 공개 혼사 중인 음인이었다고요. 그놈들이 선생을 흉악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상대에게 틈을 보이셨습니까?"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니면 제가 음인으로서의 명예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이연화의 목구멍에서 진심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하지만 그 두 문장 중 어느 것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난처한 기분에 휩싸여 방다병을 힐끗 보자, 청년은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난 눈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상황을 무마하고자 한껏 무해하고도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 이연화는 하효혜를 향해 얼버무렸다.
"자, 하 당주. 모두 잘 마무리된 일이지 않습니까.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했지요. 아직 체질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마음에 틈이 생겼던가 봅니다."
"이 선생, 그래서는 안 돼요. 이 선생이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리란 것쯤은 물론 이해하지만, 못된 놈들은 이 선생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그 지점을 노리려 들 수도 있어요. 경계심을 자칫 늦추기라도 하면, 언제 세상의 쓰레기 같은 놈들이 이 선생을 노려 함부로 각인하려 들지 모른단 말입니다."
하효혜가 안타까운 얼굴로 간곡히 말했다. 이연화가 힐끗 방다병의 눈치를 보았다. 비록 '쓰레기 같은 놈'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연화와 현재 각인을 유지하고 있는 바른 청년은, 어머니의 말에 푹 찔린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그 사정을 알 길 없던 하효혜는, 이연화에게 집중한 채 한탄하듯 이었다.
"내가 세상의 부당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는지 아십니까? 희락기에 든 양인은 보통 난폭해지지만, 음인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지요. 까딱하면 희락기에 동의 없이 각인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예요. 한 번 형성된 각인을 끊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 아주 파렴치한 데다 절제라곤 모르는 무뢰배들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혼인하는 음인들도 많다고요."
이연화가 다시 방다병의 눈치를 보았다. '동의 없이'부터 점점 쪼그라들던 방다병은, '무뢰배'에 다다랐을 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처럼 작아져 있었다. 이연화가 내심 끙 소리를 참으며 눈가를 살짝 만졌다. 한소리 듣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으나 상처입은 청년을 그저 두고 보자니 어쩐지 양심이 조금 따가워져, 이연화는 상대를 진정시키는 웃음과 함께 건넸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지요.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하 당주. 제가 비록 이상이의 이름을 버렸다 하나, 이연화 역시 누군가의 강제를 순순히 따를 사람은 아닙니다. 설령 원치 않게 민망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만일 그 상대가 파렴치한 무뢰배라면 결코 응하거나 감히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웃음기 띤 눈으로 잠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각인한 음인은 그 대상인 양인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통념이 있었으나, 이연화는 그 통념에 순순히 맞춰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상대가 법도를 모르는 악인이라면, 차라리 정신적으로 자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터였다. 하효혜가 심란한 눈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음인이 되었다 해도 이 선생은 사고문주였던 불세출의 영웅이지요. 웬만큼 간덩이가 부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감히 이 선생의 동의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아니, 소보. 너 왜 그러느냐? 차에 이상한 게 들었어?"
고개를 돌렸던 하효혜가 문득 놀라 물었다. 방다병이 풀죽은 얼굴로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었다. 한숨을 푹 쉰 청년이 찻잔을 술잔처럼 비웠다. 빈 잔을 바라보며, 방다병은 조금 우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뇨. 그냥...차가 쓰네요."
"쓰긴 뭐가 써, 미각이 어떻게 된 것 아니냐? 아, 혹시 네가 이 선생을 이런 처지에 빠뜨렸다고 생각해서 그래? 참,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어. 그리고 전에 이 선생도 말씀하셨잖아, 형질이 바뀐 것보다는 건강을 찾은 일이 더 중하다고. 자, 등 펴라. 책임감도 좋지만, 천기산장의 소장주가 이리 풀이 죽어서는 안 되지. 어쨌든 네가 현장에 이르게 도착하여 위험한 상황을 막았다면서."
하효혜가 방다병의 등을 두드리며 활달하게 격려했다. 그러나 '이르게 도착하여'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던 방다병은 바로 몸을 펴지 못했다. 그 딱한 꼴을 보다 못해, 이연화가 얼른 끼어들어 화제를 돌렸다.
"아, 하 당주. 그보다 서신에서 방다병과 저를 함께 부르셨던데, 무슨 변고라도 있었습니까?"
"방씨 집안의 변고라고 해야겠지요. 방금 전까지 하던 얘기와 아주 무관하지도 않고요."
하효혜가 근심 어린 낯빛으로 말했다. 의아한 얼굴의 두 남자를 향해, 당주는 그들을 부른 사정을 설명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방다병의 친가 쪽 사람으로, 방다병이 어린 시절 두어 번 얼굴을 보았던 당숙 방시문이었다. 중년인은 귀한 핏줄을 타고났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지방에서 학당을 운영하며 글공부를 했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과 달리 그 부인 채명홍은 사업에 꽤 수완이 있어, 작지만 탄탄한 표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떵떵거리며 남들을 호령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부부는 지역에서 나름대로 명성 있는 유지였다. 그런 부부에게는 음인으로 발현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옥면에 차분한 성품을 가져 구애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이 몇 차례 교류했던 명문 세가의 공자와 덜컥 각인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같이 계곡으로 유람을 갔던 차에, 방 공자에게 갑작스러운 희락기가 찾아온 탓이었다. 이에 세간에서는 방 공자가 신 공자에게 마음이 있어 꾸민 일이다, 그게 아니라 서로 연정을 품었던 양인과 음인이 둘만 있다 보니 생긴 사고이다 등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신 공자는 크게 유감스러워하며 방 공자와 혼인하겠다 했으나, 사건 이후 두문불출하던 방운일은 어느 날 유서 한 장을 남기고 목을 매어 자진하려 했다.
"유서에는, 이 모든 것이 신 공자의 계략이었을 거라고 적혀 있었단다.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이지."
"예? 그럼 그 공자는 신 공자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단둘이서 유람을 간 거예요?"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하효혜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가고 싶지 않았는데, 신 공자가 강권했다고 하더라. 지역에서 유명한 세가의 차남이니 거절하기 쉽지 않았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난처한 상황이겠네요. 당시에 바로 조사했다면 모를까, 시일이 꽤 지난 후이니...증좌를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방다병이 미간을 좁히고 심각하게 말했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뿐인 자식이 결국 목을 매어 자진하려 들 지경이 되었으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 혼인을 막고 싶겠지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아들을 잃는 것이 훨씬 끔찍한 일일 테니까요."
"맞아요. 당숙 어른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소보가 백천원의 형탐으로 여러 사람들을 도왔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서신을 보내셨다 합니다. 그리고 방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최근 그곳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몇 차례 있었다고 해요.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신고를 받아 관에서 철저히 조사한 경우에도 별다른 증좌가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약을 쓴 흔적도, 몸을 강제로 휘두른 흔적도 없었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어쩌면 사특한 술법이나 약물이 퍼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방다병이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하효혜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로 그 지역에서 그런 범죄가 유행하는 거라면, 관에 넘기든 188 감옥에 넘기든 철저히 단죄하도록 해라.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고 그런 식으로 각인을 강제하려 들다니, 사람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 사람이라 부를 수도 없는 놈들이야."
"걱정 마세요, 어머니. 철저히 조사해 볼게요. 사람이 아무런 억울함 없이 자진하려 들기야 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단호히 말했다. 잠시 생각하던 이연화가 덧붙였다.
"저희가 함께 가서 조사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워낙 큰 사건이 있던 직후라 이목이 지나치게 쏠릴까 걱정입니다. 과한 관심도 수사에는 독이 될 수 있지요. 방 선생께서 괜찮다면, 저희의 신분을 대외적으로 숨기고 방문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아, 알겠어요. 그럼 그편에 미리 서신을 넣어 두지요. 여정에 필요한 물품은 천기산장에서 챙겨드릴 테니 뭐든 말씀하세요, 이 선생."
하효혜가 얼른 수락했다. 이연화는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문주가 아닌 선생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하효혜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날 오후, 방다병과 이연화는 함께 말을 타고 방시문의 거처를 향해 출발했다. 편한 여정을 위해서라면야 마차가 나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을 다투는 일인 만큼 말을 달리는 편이 나았다. 발이 빠른 편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강아지인 불여우가 말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기에-또한 불여우는 이연화의 정체와 함께 세간에서 꽤 유명해져 있었다-이연화의 반려견은 천기산장에서 호화로운 식사와 간식을 누리며 주인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게 뭐람, 불여우가 우리보다 잘 먹고 있겠어."
허름한 객잔에 앉은 방다병이 이빨 빠진 국수 그릇을 보며 투덜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국물이 멀건 데다, 면이며 고기의 양도 적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발을 재촉하는 참이었으니 좋은 객잔을 골라 들어가기는 어렵지. 밤이슬이나 피할 정도면 족하지 않겠어. 도련님 티 내지 말고 먹기나 해. 강호 초출도 옛일인데 버릇을 못 버렸네." 흥 소리를 낸 방다병이 보란 듯이 국수 그릇을 들어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천기산장을 떠났을 때부터 줄곧 묘하게 흐려져 있어, 이연화는 살짝 삐딱한 미소를 띤 채 방다병을 보다 입을 열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어쨌든 각인한 상대가 코앞에서 처져 있으니 영 외면할 수가 없었다.
"왜 계속 죽을 상이야, 방 공자? 네 어머니한테 대놓고 욕을 먹은 것 같아서 슬퍼?"
일부러 놀리듯이 건넸지만, 방다병의 얼굴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은 조금 더 어두워져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내가 파렴치한 짓을 한 건 맞으니...설령 정말 나를 향해 욕을 하셨더라도 잠자코 듣는 게 맞지."
"됐어, 방소보. 넌 죽을 뻔한 나를 도와주려고 한 거잖아. 그 의도는 파렴치와 거리가 멀지. 널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내막을 다 알고 나면, 하 당주는 네가 아니라 나한테 욕을 퍼부을걸."
"이상한 소리 마,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결과까지 다 괜찮은 건 아니잖아. 네가 날 원망하면서 다시 안 보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는걸."
그때를 떠올리자 입맛까지 잃었는지, 방다병은 잘 먹던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이고, 이 녀석. 이연화가 내심 뒷목을 주물렀다. 적비성처럼 마냥 당당한 모습도 속이 들끓긴 했지만, 이렇게 땅굴을 깊이 파며 들어가려는 자세 역시 난감하기로는 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연화는 시무룩한 각인 상대와 함께 시무룩해질 마음이 없었다. 젓가락으로 국수 그릇을 휘저으며, 이연화가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다. 방다병은 고개를 탈탈 가로젓고는 다시 국수를 먹던 참이었다.
"말해 두겠는데, 하 당주에게 했던 얘기는 빈말이 아니야."
"응?"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눈썹을 까딱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양새가 평소보다 조금 더 귀여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각인의 영향일 터였다.
"내가 누군가의 강제를 순순히 따를 사람은 아니라고. 그 때에도, 다가온 게 너나 적비성이 아니었으면 아마 공격했을 거야."
방다병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이연화가 담담히 건넸다. 어조야 대수롭지 않았으나, 사실 선뜻 건네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강호를 떠돌 때부터, 솔직함은 이연화에게 매우 어려운 덕목이 되어 있었다. 그 주제가 신뢰라면 더욱 그랬다. 방다병은 휘둥그레진 눈을 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뺨이 씹다 만 국수로 불룩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픽 웃었다. "왜 그렇게 봐. 못 믿겠어?" 방다병이 입에 들었던 음식을 꿀꺽 삼켰다. 그 뺨과 귀가 은은히 붉어졌다.
"아냐, 널 믿어. 내가 처음 건드렸을 때...네가 칼을 찾았거든."
아, 그랬지. 이연화가 살짝 머쓱한 기분을 추스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날의 일이 자세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강렬한 장면 몇 개는 드문드문 기억났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을 때, 이연화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연검을 찾으려 바닥을 더듬거렸다. 당시에는 고통과 욕망보다 살심이 선명히 앞서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냄새를 맡자마자 모든 긴장이 풀려버리는 바람에-이연화는 회상을 억지로 멈추고는 태연한 소리를 냈다.
"그래, 그렇다니까. 뭐, 나도 그렇게까지 될 줄 모르긴 했지만...그러니까, 소용없이 자책하지 말란 뜻이야. 네가 하도 그러니까 내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당한 것 같잖아. 각인을 끊기 싫다고 징징거린 주제에, 어째 그런 부분에서 당당하질 못해."
이연화가 짐짓 타박하듯이 말했다.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었다. 국수 그릇을 들어 단숨에 꿀꺽꿀꺽 비워버리고, 방다병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람이라면 마냥 당당해질 수 없어, 당연하잖아.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고마워."
"왜 그럴 수 없어? 아비는 계속 당당하던데."
"이연화, 너 지금 마교의 대마두랑 나를 비교한 거야?"
방다병이 억울하게 외쳤다. 이제 좀 방다병 같네. 픽 웃은 이연화가 말했다.
"뭐, 그래도 아비가 대마두치곤 나쁘지 않아. 손속이 거침없다 뿐이지, 정말 인간의 도를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넌 정과 의를 숭상하는 사고문을 세웠으면서, 사람에 대한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니야? 그보다, 아비는 왜 계속 안 보여?"
"맹에 일이 생겼나 보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든 큰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이잖아. 내 주변을 맴돌 시간 따윈 없을걸."
이연화가 상식적으로 말하고는 차를 마셨다. 한창 사고문을 세워 유지할 때를 돌이켜보면, 적비성이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자신을 방문했던 것조차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방다병은 대번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그건 평소 얘기잖아. 지금은 그 녀석도 너랑...그런 상태인데, 분명히 가까이 있고 싶을 거라고. 넌 안 그래?"
이연화는 입에 들어왔던 찻물을 간신히 제대로 삼켰다. 천진하다 못해 맹한 질문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 이연화는 관하몽에게 각인에 대한 몇 가지 사실과 더불어 주의사항을 전해 들었다. 첫째, 각인 초기에는 상대에게 아주 강한 끌림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떨어지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둘째, 비슷한 맥락에서, 각인 초기에는 종종 성욕이 불시에 치밀 수가 있다. 감정기복과 함께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다. 셋째, 그렇다고 첫 각인 직후의 과도기에 두 번째, 세 번째 관계를 맺으면 각인이 더욱 공고해질 테니 알아서 하시라. 이연화 역시 대부분은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아무리 반쪽짜리라도 의원 노릇을 하고 다녔던 만큼, 인간의 몸에 대해 아주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여 이 상황이 덜 난감해지지는 않았다. 몸은 두 상대를 모두 원했는데, 머리로는 그 현상을 매끄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던 탓이었다. 혼자 침상에 누울 때마다, 이연화의 몸은 왜 각인한 상대가 곁에 없는지 의아해하며 허전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연화의 머리는 늘 그런 몸뚱이를 향해 윽박질렀다.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 앞날 창창한 어린애와 금원맹주를 어떻게 한 이불 안에 들여? 만에 하나라도 상대를 찾아 몽유하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이연화는 요새 몰래 침상에 팔을 매어두고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속사정을 티낼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기에, 이연화는 대놓고 상대를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타박했다.
"난 멀쩡해, 그런 데에 휘둘리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내가 한창 팔팔한 십대인 줄 알아?"
"아...그래. 그럼 다행이다."
방다병이 안도한 표정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이연화는 그 기저에 깔린 말을 애써 외면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너는 나처럼 안 힘들어서 다행이다. 이거, 내 마음이니 뭐니 하면서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을까? 그냥 빨리 선을 그어버린 다음, 각인을 끊는 약이라도 먹게 하는 편이 이 녀석한테 더 나은 거 아니야? 내심 갈등하면서도, 이연화는 겉으로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방다병과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아마 아비도 나랑 비슷할걸. 그 녀석이 산전수전을 얼마나 겪었는데, 이 정도로 뭘 그렇게 힘겨워하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이연화는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믿었다. 그가 알던 적비성은 때로 과히 맹목적일지언정,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강호의 여러 고난을 거쳐온 노련한 무림인이었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각인의 여파에서 아주 자유로우리라 여기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거기에 매여 어쩔 줄 모르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짐작은, 그로부터 대략 이틀 정도 후에 요란하게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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