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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5 01:21
기사 서임을 받으러 수도로 간 북부 대공가의 후계자가 붉은 머리 소녀를 약혼자랍시고 데리고 오자 대공가는 물론이고 북부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음. 열일곱 나이로 딱 맞은 혼기에 생일이 지나자마자 북부 유력 가문이며 심지어 수도 쪽 큰 가문에서도 혼사를 엮어보겠다며 티파티며 무도회며 초대장을 보내왔지만 죄다 답장도 없이 쌓아두기만 하던 공자, 서태웅이었으니 그 파급이 어마어마하게 컸지. 단순히 열일곱 춘정이라 치부하기엔 대공가의 위세가 워낙 거대했고 태웅의 혼사에 북부 세력의 통합 혹은 수도 세력과의 결합이 걸려 있기에 풋사랑으로 시시덕거릴 문제는 아니었음. 그러나 정치적 결합 문제를 제외하고는 꽤나 맛있는 가십거리라는 건 북부의 양치기조차 인정할 것이었음. 얼음을 깎아만든듯한 외모며 잘난 태생이며 기사서임을 받으러 가서도 1등이었다는 그 공자는 이성에겐 한 톨의 관심도 주지않았기에 북부의 빙벽같은 공자가 사랑의 열병에 취했다는 이야기는 어느집 영애가 마굿간지기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가십보다 훨씬 재밌었음. 북부의 가문들은 아닌척 혹은 대놓고 대공가를 주시했음.

그러나 대공가의 반응은 미지근했음. 당장 이방인 소녀의 목이 성벽에 걸린다거나 대노한 대공부부가 소녀를 알몸으로 평원으로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대공의 분노라던가 가솔들의 추찹한 시선으로 보는 이방인 소녀의 모습이라던가 대공부부에게 반항한다는 공자의 이야기 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북부는 의구심을 품었음. 온갖 추측이 돌았지만 북부인들은 끝까지 이방인 소녀가 대공비가 될거라는 추측만큼은 내놓지않았음. 그건 상상할 가치도 없을 만큼 희귀한 일이었으니까. 대공비의 자리를 노리는 북부 연합이 가만두지 않을 뿐더러 그 이전에 북부 연합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음. 볼품없는 소녀의 처분은 대공가에서 끝낼 일이었지 북부 연합까지 올라온다면 그건 이미 망신이었음. 아무리 꿈같은 이야기를 꾼다지만 붉은머리 대공비의 상상은 상상조차 되지 못했음.

우습게도 대공가는 붉은 머리 소녀를 어떻게 쫓아낼지에 대한 의논이 아닌 소녀를 대공비로 들일 지 말 지에 대한 의논이 한창이었음. 출신성분조차 알 수 없는 집시 무리에서 태어난 붉은 머리의 소녀가 대공비 후보에 오른 것조차 이례적인 일이었음. 그러나 기실 문제는 그 붉은 머리 소녀가 아니라 대공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에게 있었음. 검술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취미도 없고 흥미도 없던 공자, 태웅이 처음 관심을 보인 존재였음. 그런 대상을 쫓아낸다? 거기서부터 뭔가 떨떠름했음. 태웅이 보일 반응도 두려웠지만 후일 후계 생산에 정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진실에 가까운 예감이 대공가 모두에게 떠올랐음. 워낙 순하긴 해도 대공가 특유의 지독한 고집은 그대로 타고난 공자인지라 남들은 첫애를 볼 나이까지 이성에게 무덤덤하다가 뒤늦게 빠진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얼마나 심할지 예상조차 가지않았음. 일각에서는 연정에 눈을 떴으니 다음도 있지 않겠냐고 했지만 부인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오는 걸로 유명한 대공가인지라 도저히 태웅이 지금의 사랑을 잊고 다음 사랑에 빠질 것 같지 않았음. 그러한 연유로 대공가는 파벌이 나뉘었음. 아무리 그래도 출신도 모르는 계집을 대공비로 세울 순 없다 와 대공가 후사는 이어야 할 것 아니냐 로 대공가는 시끌시끌했음.

대공부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음. 제 배로 낳아도 알쏭달쏭한 아들이었는데 이런 대형사고를 치다니. 아들의 고집을 잘 알아서 애매하게 넘기기도 힘들었음. 회의를 잠시 중단한 대공부부는 어지러운 머리를 조금이라도 식히려 복도를 걸었음. 그런데 바깥이 소란스러웠음. 대공부부는 놀라지도 않고 또? 라는 표정을 나란히 지었음. 성의 정원에서는 북부의 대공자 태웅과 붉은 머리 이방인 백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음. 태웅이 백호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 걸 보며 대공비가 혀를 쯧쯧 찼고 대공은 한숨을 푹 내쉬었음. 성 안과 정원의 거리가 있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음. 도망가려는 백호와 잡으려는 태웅으로 하루하루 대공가가 시끄러웠으니까.

애초에 백호는 태웅이 그렇게 대단한 가문의 아들인 줄 몰랐음. 수도에 도착했을 때 짐을 도둑맞아 꼬질꼬질한 태웅을 주운 게 백호였거든. 백호는 그냥 태웅이 시골뜨기인 줄로만 알았음. 도저히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가의 하나 뿐인 아들로는 보이지 않는 꼴이었으니까. 이건 태웅이 탓도 있었음. 건초 더미 위에서도 털썩털썩 누워서 잘만 잤고 거친 빵조각을 뜯어 끓은 스프도 별 불평없이 잘만 먹었거든. 집시 무리에서 칼춤을 추는 저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제 춤을 보고도 저속한 눈빛이 아니라 검무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태웅이라 도저히 거만한 귀족이라곤 생각조차 못했음. 그래서 백호는 태웅이 기사서임을 받으러 왔다고 했을 때 기껏해야 시골에 사는 몰락 귀족이라고 생각했음. 도대체 어느 공자가 헛간에서 쿨쿨 자느냔 말이야. 그러나 태웅이 데려온 곳은 어디 촌구석도 아니었고 북부의 대공가였지. 정말 상상도 못했어서 백호는 대공령에 들어갔을 때 마차가 대령되는 걸 보고도 대공가의 가솔들은 좋은 취급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지 대공자일거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음. 그랬는데 대공령의 중심에 있는 대공저로 가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우루루 와서 공자 오셨냐고 그러니 백호로서는 기절할 일이었음. 이미 몰락귀족이라고 생각했을 때부터 결혼은 힘들겠다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태웅의 말을 믿고 온 거였음. 근데 대공자라니, 백호는 절대 결혼 못한다고 뛰쳐나갔고 태웅은 그런 백호를 잡으러 뛰었음. 백호가 대공저에 온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괴랄한 술래잡기를 했지만 번번히 백호는 태웅에게 잡히고 말았음.

그-러-니-까- 나는 너랑 결혼 못 한다고!

왜 못해? 청혼 받아줬잖아. 약속했잖아.

그건 니가...에이씨, 니가 공자인 줄 몰랐으니까!

백호가 씩씩거리며 태웅의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그럴수록 잡힌 팔이 더 조여왔음.

내가 대공자인게 뭐가 어때서?

정말 의아하다는 듯한 태웅의 말에 백호가 발을 쿵쿵 굴렸음.

대공가에서 나같은 애를 받아주겠냐!

왜 못 받아줘. 내가 하자고 하면 다 할거야. 아무도 내 명령을 거역못해.

이제보니 완전 뼛속까지 도련님이라며 백호가 어이없어했음. 태웅은 백호의 팔을 잡아당겨 제 코앞까지 끌고왔음.

너 여기 있으면 네가 먹고싶어하던 고기랑 과자 다 먹을 수 있고 니가 예쁘다고 했던 옷들도 다 입혀줄 수 있어.

당당한 태웅의 말에 백호가 입술을 잘근 씹더니 힘으로 태웅의 팔을 뿌리쳤음.

그래! 너 잘났다!

그 말을 남기고 튀는 백호를 허망하게 보던 태웅도 다시 백호를 좇아 달리기 시작했음. 그 꼴을 다 보고 있던 대공부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음. 출신 성분만 아니었으면.... 아쉬움이 짙게 남은 한숨이었음.

태웅은 백호가 청혼도 받아놓고 왜 이제와 거부하는 지 몰라 답답했음. 청혼 했을 때도 조금 불안해하더니 결국은 받아줬는데, 작게 울먹이면서 너는 날 떠나면 안된다고 했으면서. 태웅은 어느새 사라진 백호에 주먹을 꽉 쥐었음. 아직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긴 했어도 강백호였음. 서태웅이 사랑한 강백호는 누구보다 강한 여자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음. 태웅은 경비병들에게 경비를 강화하라고 엄명을 내리고 다시 백호를 찾으러 갔음. 가솔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음.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거였음.

태웅이 반한 백호는 정말 강했기에 며칠 술래잡기를 하자 어느정도 성의 지리를 터득했음. 그 말은 곧 백호가 성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음. 성벽을 도대체 어떻게 타고 넘는 것인지, 경비병들을 닥달해도 그들 또한 억울한 눈빛으로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읍소했음. 백호와 종종 검무를 추거나 검을 맞댄 적이 있던 태웅은 백호의 스피드를 알기에 차마 경비병들을 더 탓할 수도 없었음. 대신 대공저 주변까지 백호의 존재를 알려 술래잡기의 범위를 늘려갔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태웅과 백호의 기묘한 술래잡기 이야기가 대공령 밖까지 퍼지기 시작했음. 대공저의 미적지근한 태도와 두 사람의 이상한 술래잡기 이야기에 북부 연합에선 설마... 했음. 상상조차 되지 못한 추측이 제 존재감을 불쑥 드러냈지. 북부 연합에서까지 말이 나오자 대공가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했음. 이대로 가면 사교계에서 개망신을 당할 것이었음.

대공부부는 백호를 찾아갔음. 부부는 정중한 태도로 백호에게 대공령을 떠나줄 것을 요청했음. 마차를 내어준다면 바로 대공령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터라고, 대공이 말했음. 태웅은 이쪽에서 막아보겠다는 대공 부부에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서글픈 표정이었음. 그런 백호를 보는 대공부부도 씁쓸했지. 제 아들이 사랑한 소녀고 참 좋은 아이라는게 느껴지는데 출신이 문제인지라... 잠시 울먹거리던 백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음. 눈치 못채게 당장 오늘 가겠다는 말에 대공부부가 놀란 표정을 지었음. 하지만 백호는 제 미련도 미련인지라 대공저에 더 오래 머물고 싶지않았음. 제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보내달라 말하는 백호에 결국 대공부부는 말을 꺼낸 그 날 새벽 백호를 마차에 태워 보냈고 태웅의 방문을 막으라 명했음.

백호는 수도로 가는 마차에서 내내 울었음. 나가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이제와 눈물이 나는 건 조금 우스웠지만 그래도 태웅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였으니까. 걔를 위해서라면 떠나는게 맞는 일이었지만 미련과 슬픔은 별개의 것이었음. 어찌나 우는지 보다못한 마부가 물을 몇 번이고 챙겨줄 지경이었음. 대공령을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으나 수도로 가는 길은 곱지 않았음. 하필이면 겨울철이라 때때로 눈폭풍이 들이닥쳤고 그 때마다 마을에서 며칠씩 묵어야했음. 며칠만 묵으면 다행이고 일주일 넘게 묵을 때도 많았음.
대공령을 벗어난 백호는 억지로 즐겁게 지냈음. 계속 우울하게 있을 순 없었으니까. 그새 친해진 마부가 백호를 안쓰럽게 봤지만 그래도 우는 것보단 낫지 않냐며 백호가 근처 마을에서 검무를 춘 값으로 술을 샀음. 또다시 눈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마부가 마차 바퀴를 점검하는 동안 마실을 나갔던 백호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음. 북부 대공자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이야기였음. 이야기가 흘러나온 술집의 야외 테이블에 달려간 백호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술에 취한 상인들이 줄줄이 불었음. 대공자가 몇 주 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겨울 독감에 걸려 죽기 직전이라더라, 대공가에서도 난리가 나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는데 그 약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난리도 아니라는 거였음. 사색이 된 백호가 그 약재가 뭐냐고 묻자 바로 곰의 쓸개라는 것이었음. 겨울철이라 곰은 죄다 겨울잠을 자러 갔고 성질도 포악해 사냥꾼들은 겨울잠을 자는 곰을 절대 건드리지않았음. 곰이 자는 겨울숲은 마물도 많아 위험천만하기도 해서 이 시기에 곰의 쓸개를 구하는 건 차라리 황제의 뺨을 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음. 상인들의 주절거림에 안색이 거의 하얀색이 된 백호가 어디론가 뛰어갔음.

대공가는 침통함에 휩싸여있었음. 붉은 머리 소녀가 떠난 뒤로 가둬두었던 태웅은 문을 부수기도 하고 창문을 깨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모두 삼엄한 감시 아래 번번히 실패했음. 점차 사람꼴이 아니게 되는 공자의 모습에 대공부부는 걱정스러워했지만 북부 연합에서 더 말이 나오지않자 이게 맞는거라고 생각했음. 하지만 대공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집념은 정말 지독했음. 태웅은 기어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터라 정원에 나오자마자 쓰러져버렸음. 하필이면 시간대가 밤이었고 눈이 내리는 정원에 쓰러진 태웅의 몸은 눈에 덮혀버렸음. 빨래하는 하녀가 조금이라도 늦게 나왔다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하녀에 의해 발견된 태웅은 곧바로 방으로 옮겨졌으나 끔찍한 독감에 걸렸음. 고열에 하루하루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니 대공가가 발칵 뒤집어졌음. 의원들은 별 짓을 다해봤지만 태웅은 정신이 들 때마다 낙담해 눈을 매번 감았고 그럴 때마다 상황은 악화되어갔음. 아무리해도 차도가 보이질 않자 대공부부가 의원들을 닥달했음. 무슨 약을 써도 안되니 의원들은 곰의 쓸개로 만든 약을 써보고자 했음. 하지만 모든 사냥꾼과 병사, 기사들을 동원해도 이 시기에 곰을 찾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 사실상 죽을 날을 받아둬라는 말과 같았지. 대공부부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소녀를 보내는게 아니었다고 후회했음. 지금이라도 데려와보려고 했지만 백호와 함께 보낸 마부는 대공령을 벗어난 뒤로 갑자기 사라졌다고 답했음.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백호마저 행방불명되자 대공부부는 모든 희망을 놓았음.

며칠 뒤 동틀녘, 대공저 정문에 곰이 나타났음. 정확하게는 누군가 곰을 짊어지고 온 것이었음. 소복히 쌓인 눈길 위에 핏방울을 떨어트리며 대공저 앞에 선 건 백호였음. 밤샘을 하던 경비병들은 저희들이 무언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음. 하지만 비릿한 피냄새와 곰이 땅에 쿵 하고 떨어지며 나는 진동과 소리는 꿈의 것이 아니었음. 급하게 부부 침실로 들어온 시종장에 대공부부는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붉은 머리 소녀가 곰을 잡아왔다는 말에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음. 설마했는데 대공저의 정원에 커다란 곰 한 마리와 몇 주 전 내보냈던 붉은 머리 소녀, 백호가 서 있었음. 백호가 대공부부를 보자 헐떡이며 물었음.

곰 있으면 그 녀석 살릴 수 있다면서요. 곰 잡아왔으니까 그 바보 여우 좀 살려주세요...

피칠갑을 하고 우는 백호의 울음이 대공저 정원에 울려퍼졌음. 대공은 당장 곰을 해체해 의원들에게 약을 만들라 했고 대공비는 백호를 데리고 태웅이 누워있는 방으로 갔음. 시체같은 태웅의 모습에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다시 백호의 눈에서 흐르기 시작했음. 백호가 태웅의 옆으로 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음.

너.. 왜 여기 누워있어, 바보야... 잘 살라고 떠난거란 말이야... 나보다 더 예쁘고 좋은 여자는 찾기 힘들겠지만..그래도 잘 살았어야지, 바보같은 여우야...

백호가 가늘어진 태웅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음. 그 모습을 착잡하게 보고 있던 대공비가 백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음. 그런데 대공비의 손에 닿은 백호의 등이 뭔가 이상해. 너무 뜨겁고 피가..피가 흐르는데. 그제야 찢어진 백호의 등이 보인 대공비가 아연실색하여 의원을 불렀음. 백호의 상태는 태웅보다 좋지않았음. 곰의 발톱이 등을 할퀴었고 몸 곳곳에 혈투를 벌인 흔적이 있었음. 그런 몸으로 곰을 끌고 왔으니 살아있는게 기적이었음. 아니나 다를까 치료중이던 백호는 그대로 쓰러졌고 그 대신 태웅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음. 백호가 곰을 가져온 지 일주일이 지나 태웅이 깨어났음.

제가 살아났다는 감각에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태웅은 백호가 왔다는 소식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음. 그러자 대공비가 단호하게 태웅을 막아섰음. 그 애는 절대안정이 필요하니 만나러 가는 건 불가하다는 말에 태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음. 죽다 살아난 건 난데 왜 걔가 절대안정이 필요하지? 그러나 곧 대공비가 해주는 제가 살아난 경위에 대해 들은 태웅이 사색이 되어 밖으로 뛰쳐나갔음. 의원들이 나오는 방을 찾은 태웅은 곧바로 뛰어들어갔고 약을 바른 지 얼마 되지않아 여전히 옷을 벗은 채인 백호와 마주했음. 갑자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벌거벗은 몸을 가린 백호는 침입자의 정체에 멍한 표정을 지었음.

너...여우...서태웅, 너 정신 차렸어?

등의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자국이 백호의 등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 태웅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백호에게 다가왔음. 백호는 태웅의 표정도 읽지 못하고 그저 그가 깨어난 것에 기뻐했음. 어디 아픈데는 없냐며 등에 커다란 상처를 달고도 백호는 태웅을 살피기 바빴음. 그 모습에 태웅이 무너지듯 주저앉아 백호를 껴안았음. 멍청이 라는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고 사랑스러운 녀석을 드디어 다시 제 품에 안자 빙벽같다는 소리를 듣던 공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음. 저를 껴안은 채 울음을 삼키는 태웅에 백호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음. 뒤늦게 아들을 따라온 대공비는 방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낌을 듣고 조용히 하녀들을 물리고 저 또한 자리를 떠났음.

태웅은 정신을 차린 직후부터 백호의 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음. 저도 갓 일어난 환자였으면서 백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생기는지 얼마 지나지않아 의원들에게서 완쾌했다는 판정을 받았음. 그러나 태웅이 완치되었어도 의원들은 여전히 바빴음. 백호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탓이었음. 백호는 자기는 괜찮다고 했지만 등의 상처가 워낙 심해서 자꾸만 열이 올랐고 밤마다 진통제를 찾느라 앓았음. 태웅은 빨리 낫게 해보라며 의원들을 닥달했지만 이건 아무는 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음. 태웅은 손수 백호의 식사를 살폈고 의원과 하녀를 물리고 등의 상처에 직접 약을 발랐음. 백호가 민망해하고 시녀장이 예법에 맞지않다 화를 냈지만 지금의 태웅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음. 태웅은 잠 잘 때를 제외하면 백호 옆에 있었음. 심지어 잠 잘 때도 가끔씩 백호 방을 찾아와 백호를 살피고 갔음. 이제 고비는 넘겼다고 해도 태웅은 한 번 자면 잘 안 깬다는 과거가 무색하게 새벽에 몇 번이고 깨서 백호의 방을 찾아갔음. 하인들이 난처해했지만 대공부부는 새벽에 도망쳤던 일 때문에 태웅이 불안해한다는 걸 알고 백호의 방을 태웅의 방 옆으로 옮겨주기로 했음.

몸의 상처가 어느정도 나은 백호는 제 처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음. 아무리 태웅의 목숨을 살렸대도 그 일이 저를 태웅과 나란히 세우지는 못할거라 생각했음. 백호는 틈을 타서 다시 도망가야하나 라고 생각했지만 옆 방으로 옮겨져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달려오는 태웅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음. 그럼 공식적으로 헤어지는 게 최선인데... 태웅이 과연 그걸 허락할지 모르겠음. 끙끙 앓던 백호는 결국 대공부부를 찾아가기로 했음. 이제 그만 나가려 하는데 좋은 수가 없겠냐는 백호의 물음에 대공부부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음. 백호를 빤히 보던 대공부부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백호를 내보냈음. 백호는 조금 애매하긴 해도 답을 듣긴 들었으니 남은 기간동안은 태웅과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쌓기로 했음.

한 달여가 지나 백호는 난데없이 치장을 당하기 시작했음. 하녀들의 말을 들어보니 무슨 무도회가 열린다나 뭐라나... 왜 군식구인 제가 치장을 해야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태웅의 탓이겠거니 싶었던 백호는 하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지. 백호는 붉은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보석을 몸에 둘렀음. 보석이란 건 무거운거구나. 백호가 무거운 몸을 끙끙거리자 하녀들이 가만히 좀 있으라고 타박했음. 백호가 입을 댓발 내밀자 그 틈을 타 붉은 연지가 입술 위에 얹어졌음. 해가 지고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음. 백호는 아마도 제가 나갈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음. 무도회는 귀족들이나 가는데니까. 아마 태웅이가 나중에 데리고 나가서..음..정원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백호는 하녀들이 가져다 준 과자를 냠냠 먹었음. 그 때 백호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음. 백호가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하녀가 냉큼 문을 열었음. 열린 문 너머에는 잘 차려입은 태웅이 있었음. 꼬질꼬질했던 첫만남 때가 생각도 나지않을 정도로 태웅은 그야말로 대공가의 후계자 같은 모습이었음. 과자를 먹던 백호가 멍하니 보느라 과자 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음. 잠시후 정신을 차린 백호가 웃으며 여우가 꼬까옷 입었냐고 놀렸음. 태웅이 삐죽거리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백호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음. 놀라 몸을 파드득 떠는 백호의 입가를 훔친 태웅이 백호의 손을 제 팔 위에 얹었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백호를 에스코트해 나갔음. 처음 겪어보는 일에 어리둥절한 채 끌려간 백호는 태웅이 저를 홀로 데려가자 기겁해 뒷걸음질을 쳤음.

나, 난 저런데 못 가.

네가 못 가는데는 이 성에서 아무데도 없어.

저런데는 귀족들이나 가는데잖아! 내가 왜 저길 가?

팔에 얹은 손을 내린 백호에 태웅이 뚱한 표정을 짓더니 백호의 손을 잡고 홀로 성큼성큼 들어갔음. 구두에 드레스를 입은 백호가 태웅의 힘을 이길 수 있진 않았고 결국 백호는 울상인 채 홀로 끌려갔음. 들어가자마자 쏠리는 시선에 백호가 잔뜩 움츠러들었음. 그러자 태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백호의 허리에 팔을 감았음.

무서워하지마.

너는 잘나신 공자님이라 이런 일에 익숙하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니가 뭐.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겠냐고 투덜거리는 백호의 귓가에 태웅이 속삭였음.

이제 익숙해질거야.

뭔 소리야 라고 말하기도 전에 태웅은 백호를 데리고 대공 부부 앞에 섰음. 대공부부는 두 사람을 향해 한 번 미소짓고 홀 안의 시선을 모았음. 그 때까지 어리둥절하던 백호의 얼굴은, 대공부부가 저를 태웅의 약혼녀로 소개하자 경악으로 물들었음.

당연히 북부 연합의 반대가 빗발쳤지. 그러나 대공부부는 단호하게 말했음. 이 자리에 내 아들을 위해 겨울곰을 잡아올 수 있는 영애가 있다면 이 아이의 약혼녀로 받아들이겠다고. 시끌시끌하던 북부 연합이 싸그리 입을 다물었음. 영애는 무슨, 건장한 기사나 사냥꾼도 못할 일이었음. 대공부부는 백호를 공식적으로 약혼녀로 선포했고 백호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홀의 한가운데서 태웅의 키스를 받아야했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호는 태웅의 손에 이끌려 댄스홀로 내려가고 있었음.

이래도 돼? 아니, 나한테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어떻게...

춤 몰라도 돼. 내 발등 위에 올라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백호가 화를 내려고 해도 댄스홀에 내려간 이상 크게 떠들 수 없었음. 결국 백호는 긴 치맛단 아래의 발을 얌전히 태웅의 발등 위에 올릴 수 밖에 없었음. 멍하니 태웅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백호가 중얼거렸음.

진짜? 나 진짜 너랑 결혼해?

멍청아. 청혼 받아준 거 자꾸 잊어먹을래?

그치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백호의 풀죽은 목소리에 태웅이 어이없어했음. 날 위해서 겨울곰도 잡아온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백호가 곰을 잡아온 이후로 대공가에서 백호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두 눈으로 목격했는데 그걸 어떻게 반대하겠어. 깐깐하기로 유명한 원로들조차 인정했는데, 멍청이랬지만 정말 멍청이다 싶었음. 태웅이 백호의 머리에 입을 댄 채 속삭였음.

또 도망가기만 해봐.

태웅이 이를 아득 갈았음. 가뜩이나 백호를 제가 데려온게 아니라 백호가 스스로 제 옆까지 올라온 게 자존심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음. 청혼할 때 제가 뭐든 다 해주겠다고 다짐한 맹세가 무색하게도 백호는 당당하게 제 옆에 있을 권리를 가져왔음. 자존심도 상하고 짜증도 나고 스스로가 부끄럽고 또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백호이기에 제가 반한 것이기도 했음. 태웅이 제 빛나는 소녀를 다시 한 번 껴안았음. 머뭇거리는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 등 위에 슬그머니 팔을 두르는 백호의 답에 태웅이 슬쩍 웃었음.

한동안 북부는 백호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음. 검술말고는 흥미없어하던 빙벽같은 대공자가 사랑에 빠져 그 천한 신분의 붉은 머리 소녀에게 어울리는 온갖 보석이며 비단을 사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사실 제일 가는 건 대공자를 위해 곰잡은 소녀의 이야기였음. 용맹한 걸 미덕으로 삼는 북부인지라 신분에도 불구하고 백호가 태웅의 옆자리를 차지한 데에 더이상 뒷말이 나오지않았음. 오히려 백호 인기가 하늘을 찔러대서 백호가 걱정한 건 하등 쓸모가 없어졌음. 그래도 이야기는 언젠가 사그라들기 마련이었고 점점 술집이나 빨랫터에서 붉은 머리 소녀의 모험담은 들리지않았음. 이제는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무렵, 곰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두른 대공자와 붉은 머리카락의 대공자비의 성대한 결혼식으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소식을 알려왔음. 결국 대공자비 자리에 오른 백호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었지만 정작 백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배부른 고양이 표정을 짓는 제 남편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겠지.






태웅백호
2023.06.05 01: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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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행복해지는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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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5 01:36
ㅇㅇ
센세 이런 문학작품을 내가 그냥 읽어도 되는걸까ㅠㅠㅠㅠㅠㅠㅠ대공자와 붉은 머리 소녀 사랑이야기 결말까지 완벽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f9f]
2023.06.05 01: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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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랑스럽고....동화같은 이야기에요.........
[Code: d865]
2023.06.05 01: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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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행복한 이야기야...... 쭉 행복해야해 애드라
[Code: b485]
2023.06.05 02: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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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내내 너무 좋아서 울었다 ㅠㅠㅠㅠ 너무 좋다 .....
[Code: 173e]
2023.06.05 0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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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Code: d841]
2023.06.05 03: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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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그 자체.... 너무 사랑스러움
[Code: 0e5b]
2023.06.05 03: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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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정말 아름다운 얘기야 해피리 에버 애프터 😹
[Code: 3cc8]
2023.06.05 03: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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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백호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딱인것같아...너무최고다 신분차이땜에 찌통올뻔했는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서 넘나 다행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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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5 04: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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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센세... 지금 내 눈물로 정수기 ㅆㄱㄴ
[Code: 0d10]
2023.06.05 04: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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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타시 메데타시........ 태웅백호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라........
[Code: b5cf]
2023.06.05 06: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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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 로판 한번 잘 봤다 센세 최고에오 ㅠㅠㅠ
[Code: 66ae]
2023.06.05 07: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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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작을....헉 너무 재밌다 ㅠㅠㅠㅠㅠㅠㅠㅜ센세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e0b]
2023.06.05 07: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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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네ㅠㅜ태웅백호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거 너무 잘어울린다ㅜㅜ
[Code: a79b]
2023.06.05 11: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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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재밌게 읽었다ㅠㅠㅠㅠㅠㅠㅠ 그렇지 백호가 곰까지 잡아왔는데 반대하는 놈은 곰굴로 보내야지ㅠㅠㅠㅋㅋㅋㅋㅋ
[Code: 6271]
2023.06.05 16: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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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달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아기 공작부부 영원히 행복해🥹
[Code: 3b72]
2023.06.05 20: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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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동화다 사랑스러워
[Code: 618d]
2023.06.11 00:4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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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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