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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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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끝내고 바로 만나러 오는 게 보통이었기에 스즈키는 늘 정장차림이었다. 주말 데이트에서만 볼 수 있는 사복차림은 꽤 수수했다. 꾸미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건지 이게 최대로 꾸민 건지는 몰라도 나이에 비해 수수한 스타일이었다. 그에 비해 마치다는 옷과 악세사리에 관심이 많았다. 늘 하얀 가운 차림만 보는 병원 직원들은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옷장은 매장 진열대에 가까웠다.

"어떻게 그렇게 항상 멀끔하게 하고 다녀요? 누가 보면 수의사가 아니라 모델인 줄 알겠어요."

"그냥 간단하게만 하는 건데."

"그게 간단히면 난 초초초간단이네요."

"너도 뭔가... 꾸미고 오는 거였어?"

재밌는 말을 한다며 웃어 젖히는 스즈키를 몰래 위아래로 훑어 봤다. 지난주에도 입었던 까만색 니트에 청바지, 물론 그렇게만 입어도 훤칠하니 멋지긴 하지만 꾸미는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 하는 연애에 들떠 혼자만 잔뜩 꾸민 것 같아 부끄러웠다.

"혹시 내가 옷 좀 골라줘도 될까?"

"쇼핑할 때 안 됐는데요?"

"쇼핑을 날짜 정해놓고 해?"

"그런 건 아니지만..."

끝내 마치다 손에 이끌려 들어간 편집샵엔 온갖 패션 아이템이 모여 있었다. 급하게 가까운 곳으로 온 거라 마치다 성엔 차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남자친구가 걸치고 있는 할아버지 니트 보단 나은 것들이었다. 통유리 앞에 세워 놓고 턱 밑에 여러 옷을 갖다 대봐도 정작 당사자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마치다는 베이지색 기본 니트와 오돌토돌 꽈배기 모양 자수가 들어간 회색 니트를 바구니에 넣었다. '넌 이런 색도 어울리는구나, 좋겠다.'라며 올리브색 반소매 셔츠도 넣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청바지와 몸에 적당히 맞아 떨어지는 슬랙스도, 도수 없는 안경을 집어들때야 스즈키는 이제 그만 사자고 마치다를 말렸다. 아직 악세사리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며 자기보다 한 뼘이나 큰 남자친구를 끌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옷 입히기 놀이를 당하는 인형이라도 된 듯 스즈키는 마치다가 시키는 대로 턱을 들고, 팔을 내밀고, 몇 바퀴든 빙그르르 돌았다. 협의 끝에 악세사리는 무난한 검은색 반지로 골랐다.

진료실에서 포장 음식이나 먹어 치운 뒤 헤어지기 바빴던 탓에 이런 본격적인 데이트가 오히려 어색했다.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데이트 경험이 거의 없는 마치다는 집에 갈 타이밍만 재고 있었지만 스즈키는 오늘 그를 집에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이 꼭 껴안고 붙어 있기를 바라는 듯이, 진눈깨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흩처져 있던 사람들 모두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날씨도 이런데... 그냥 오늘은 여기서 헤어질까?"

"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요. 밖에 있는 거 피곤하면 우리집으로 갈래요?"

"집...? 아... 글쎄. 너도 쉬어야지. 피곤하잖아."

"난 같이 있어야 피로가 풀릴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더 이상은 오해 받기 십상이었다. 결국 스즈키의 차를 얻어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뭐가 들어있고 얼마 전에 회사에서 선물 받은 와인이 있고 하는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긴급 수술할 동물이 있다고 연락이 오기만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한번만 그래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오피스텔 구조는 힘들었다. 옛날 그 맨션을 떠올리게 하는 길게 늘어진 복도와 다닥다닥 붙은 현관문들. 벌써 10년 훌쩍 지난 일인데도 두드려 맞았던 몸 구석구석이 뻐근해졌다. 처음으로 초대에 응해준 게 기쁜지 스즈키는 들뜬 모습으로 소파 위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다 치웠다.

"오늘도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청소 안 하고 나갔거든요. 그렇다고 평소에 늘 집이 더러운 건 아니고, 아침에 사실 좀 늦잠을 자서."

본인 집이라 그런지 한층 더 풀어진 얼굴엔 어떠한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욕을 퍼붓고 폭력을 일삼던 그들과 비슷한 기운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다는 두려웠다. 문은 자동으로 잠겼고,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다는 불안에 잡아 먹히기 시작했다. '아냐. 노부는 착해. 좋은 사람이야. 무서워할 필요 없어... 밖에선 잘 만났잖아...' 점점 스즈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부분부분 안 들리기도 하고, 그러다 끝내는 눈 앞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이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늘 스즈키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던 향과 비슷했다. 방은 어둑어둑했지만 커튼이 두꺼워서 그렇지 날이 아예 저문 것 같진 않았다. 살면서 기절을 해 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어릴 땐 맞다가도 기절했고, 곧 다가올 폭력에 지레 겁먹고 기절하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지옥 같았던 그 집을 벗어난 뒤로는 처음이었다. 거의 12년만에, 그것도 처음 사귄 남자친구 앞에서 대뜸 정신을 잃어 버린 것이다. 방 문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 뭐라고 생각 했을까.' 마치다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 깬 거예요?"

달라진 숨 소리 때문인지 스즈키가 말을 걸어왔다. 방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침대가 있는 자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맨바닥에 누워서 마치다가 깨기만을 기다린 모양이다.

"응. 미안해. 지금 몇 시야?"

"4시예요. 오래 안 누워있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놀랐겠다. 미안해."

스즈키는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침대 바로 옆까지 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다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난감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난감한 건 기절해 버린 당사자였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쓰러졌다고 둘러대려던 순간, 스즈키가 먼저 입을 뗐다.

"건강이 안 좋았던 거면 오늘 만났을 때부터 내가 눈치 챘을 거예요. 그런데 잘 놀다가 집에 가자고 한 순간부터 긴장했다는 걸 느꼈어요... 집에서 데이트 하자고 할 때마다 항상 거절 했었고... 내가 뭔가 케이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는 거예요?"

어쩌면 쉽게 툭 꺼낼 수도 있는 말이었다. 난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무섭다고.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혼자만 앓아오던 게 습관이 되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 대답이 없이 깜빡이기만 하는 눈꺼풀이 꽤 무거워 보였다. 스즈키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만 세워 눈두덩이에 입을 맞췄다. 두 번, 세 번, 대답을 재촉하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정도 모르고 건네는 위로 같은 건 어쩌면 건방지고 무례할 수 도 있으니까.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릴 때 집에서 좀... 학대 받고 자랐어... 덩치 큰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말 사이사이 마다 길게는 1분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스즈키는 전혀 보채지 않았다. 

"남들은 집이 안전하다고 하는데... 난 반대였어... 항상 얻어 맞고... 욕 먹고... 다쳐도 치료도 못 받고... 그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집이라는 공간 자체가 힘들더라고... 함께 있다는 생각보다는 갇혀 버렸다는, 도망갈 수 없게 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렇다고 네가 날 어떻게 할 것 같다고 의심하는 건 아닌데... 그냥 옛날에 그 공기와 냄새 같은 게 다 떠올라 버려서..."

스즈키가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는 둘째였다. 첫째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입 밖에 꺼냈다는 사실에 마치다는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아마 절반 이상의 확률로 이해 받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뭐 그런 다 지난 일 때문에 기절을 해요, 라는 말만 안 듣기를 바랐다. 진심이든 아니든 참 힘들었겠다고 입에 발린 위로라도 해주면 고맙고.

"그럼... 집이 문제인 거예요...? 내가 아니고?"

"응... 네가 문제일 리가 없잖아... 병원도 괜찮고 차도 괜찮고... 집, 특히 이런 맨션 구조는 어릴 때 살던 곳이 자꾸 떠올라..."

스즈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자기가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침대로 올라가 걸터 앉으니 마치다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무작정 집에 데리고 와서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지금도... 힘들어요?"

"모르겠어. 거실이 옛날 집이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방 밖에 나가면 힘들지도... 사, 사실 지금도 완전히 편하지는 않아. 미안해."

"집에 가고 싶어요?"

"응..."

말을 할 수록 빚이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다는 자기도 모르게 스즈키의 손 안에서 제 손을 빼냈다. 이렇게 밀어내기만 할 건데 계속 사랑을 받는 건 비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커다란 손은 다시 주인을 찾듯 마치다의 손을 되찾았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 가서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요. 어려운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그만큼 당신이랑 오래 갈 사람이란 거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그냥 도망치듯 우리 관계 끊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가 알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누군가에게 이해 받는 기분이란 건 이런 것이었다. 내가 조금 늦더라도, 많이 넘어지더라도 먼저 가지 않고 기다려주는 존재라는 건 이런 것이었다. 평생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이제서야 스즈키를 통해 알게 됐다.

"외투 가져다 줄게요. 집에 가서 쉬고, 내일 괜찮으면 또 밖에서 데이트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전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스즈키 몰래 눈을 슬며시 감고 거실을 지났다. 괜히 또 옛날 일이 떠올라 두 번 기절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내심 다시는 같은 일로 기절 할 일 없을 것 같단 확신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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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