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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3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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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는 의자에 앉아, 발진과 고열을 동시에 일으키면서 침대에 뻗어있는 환자들을 돌아보았다. 모든 발병자에게 하이포를 한 시간 전에 주사한 참이었고, 컴퓨터는 병원체 분석을 계속해서 느릿느릿 진행하고 있었다. 65% 분석 완료. 한 시간에 1%씩 채워져 가는듯한 로딩바를 그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잠시 찾아온 업무 간 공백을 이용해서 쉬어야 했지만, 혹시나 메디베이의 문을 열고 또 다른 환자가 들어올까 싶어서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그는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훈련에서 벗어나 지구를 다시 밟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지? 시간이 예상한 것보다 많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함선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달력을 확인할 틈이 없었어도 그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커크의 목소리가 메디베이의 정적을 가로질렀다.


[ Kirk in. ]


본즈는 번뜩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보았다.


[ … 제군들에게 알린다. 잘 알듯이 본 탐사대는 가우시안계의 유로타스 행성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목적지를 급히 변경하게 되었다. 현재 함선은 나미아계를 향해 비행하는 중이다. ]


잠시 커크가 목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 본 탐사대는 나미아계의 행성 위건, 자르돈, 오르파에서 자료 수집을 마친 뒤 지구로 귀항할 예정이다. 곧 워프 상태에 들어간다. 현재 유로타스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여 스타플리트 탐사대가 접근하기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는바, 예정에 대해 변경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알린다. 목적지를 변경한다……. ]


본즈는 선내 방송이 들려오는 지점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위건으로 간다고? 젠장. 버려진 행성 위건?'


그는 책에서 위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어느 스타플리트 탐사대가 찍은 것이 분명한 풍경. 그저 사진일 따름이었지만 본즈는 거기서 유형지 같은 광막함과 황량함을 생생하게 읽어냈다.


'얌마, 짐. 기왕 딴 데 가는 거 좀 유쾌한 곳으로 갈 순 없냐. 거긴 완전 사막이잖아. 우울증 도질 것 같은.' 허공에다 대고 짜증을 내는 것도 잠시, 환자 한 명이 방송 소리에 부스스 깨어나는 바람에 본즈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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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성 나미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6개의 행성이 있다. 이전 스타플리트 탐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 중 생명의 기척이 발견된 행성은 위건 뿐이다. 지구인보다 키가 작으며 발성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종족이 행성을 지배했다. 그곳의 자연과 대기는 모든 면에서 뉴질랜드 오지의 그것과 비슷했다. 광합성을 하는 거대한 동물들이 육지와 바다에서 서식했다.


그런 위건은 이제 과거 속에 갇힌 행성이다. (연방 역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스타플리트를 통해 연방과 접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위건에 알 수 없는 병이 스물스물 퍼졌다. 이 병은 행성 주민에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 병이 영향을 끼친 것은 위건의 식물이다. 어디서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수 없는 세균이 단 15년 만에 위건에 서식하던 모든 식물을 절멸시켰다. 행성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연방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뉴질랜드가 사하라 사막으로 변해버렸으며, 그들 자신도 개체 수가 어마어마하게 줄어든 다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급변한 환경 때문에 이전에 없던 대형 폭풍이 대륙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방은 부랴부랴 생존자들에 대한 구조를 실시했다. 소수였던 그들은 다양한 행성으로 퍼졌고, 곧 이주한 행성에서 도태되거나 그쪽 행성민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벌칸처럼 종족을 도모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던 행성민들은 그런 식으로 운명의 끝을 맞았다.


위건 사태 이후 스타플리트는 나미아계에 발길을 끊었다. 위건 이외의 나미아계 행성이 별 볼일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위건의 종말을 몰고 온 원인이 스타플리트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연방이 은근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40년 전부터 나미아계에 대한 데이터는 더 수집되지 않았다. 위의 사정을 잘 모르는 커크는 순전히 공란으로 남은 데이터에 흥미를 느끼고 나미아계로 향한 것뿐이다.


그는 딱 한 가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위건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의 진화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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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티는 ‘kirk out’을 끝으로 종료된 선내 방송을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그래, 깡촌으로 가는군.’ 그는 커크의 목소리가 한 번만 더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해 짜증을 느껴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불러온 그리움이 머릿속을 아프게 쑤셨다. 콕콕. 그는 결국 잠을 포기하고 마커스가 준 패널을 집어 들었다.


브릿지의 컴퓨터는 대단했다. 그냥 대단하다고밖에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경로 탐색 같은 건 몇 초 만에 가능하고, 20여 가지의 다른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도 아무런 딜레이가 생기지 않았다. 사용자가 요청하면 바로 천문 지도를 홀로그램으로 구현하면서 목적지까지의 최단거리 및 최소 소요 시간을 계산해주었다. 물론 모든 장애물과 자기장, 항성 사이의 중력장 등을 계산에 넣은 상태에서 결과를 내놓는다. 솔직히 말해서 조타수나 항해사 포지션이 따로 필요할까 싶을 만큼 완벽한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컴퓨터였고, 그래서 영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스코티는 엔터프라이즈가 그리웠다. 중상을 입었다가 이제는 마더쉽에서 천천히 아물어가는 그녀. 컨스털레이션만큼 똑똑하고 빠르지 않지만 견고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의 그녀. 엔터프라이즈호 안에 있으면 스코티는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실체 없는 부드러움이 그의 어깨를 감싸고 이렇게 묻는 듯 했다. 나는 괜찮은가요? 내가 괜찮은 만큼 당신도 괜찮은가요? 엔터프라이즈는 스코티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부어줄 처음이자 마지막 대상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바치는 사랑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므로.


컨스털레이션에는 그런 부드러움이 없었다. 이곳은 취지가 왜곡된 학문들의 무덤이었다. 어디에서나 군대식 효율성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전투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핵무기 같은 중압감이 대원들을 짓눌렀다. 어울리지 않는 함선이다. 커크, 스콧, 엔터프라이즈호와 운명을 같이하는 선원 그 누구에게도, 전혀. 스코티는 기쁨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 패널의 전원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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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서 있었다. 녹색과 누런색이 섞인 볏짚다발 같은 잔디가 발아래로 누워있고, 저 멀리 해안에서 작은 섬처럼 솟아오른 암벽 위로 회색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이 그 위를 위압적으로 뒤덮고 있었다. 저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될 정도로 바람이 험상궂었다. 젠장, 여긴 대체 어디야?


불현듯 스톤헤이븐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학생 때 일이 잘 안 풀릴때면 홀로 차를 몰고 스톤헤이븐으로 가서 아무 데나 걸터앉아 술을 마시고 오곤 했다. 그렇게 찌질대다 보면 가끔 자기가 찾던 답의 실마리가 생각날 때도 있었다. 이제 스코티는 자신이 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던노타 캐슬이다. 잊혀진 왕국처럼 바위 꼭대기에 홀로 떠올라 있는 그곳. 세상이 변화하는 동안 그곳은 지나간 17세기의 잔해 속에 홀로 머물렀다. 멀리서 허물어진 성벽을 보면서 스코티는 그것이 안겨주는 고립감으로부터 안정을 찾곤 했다.


“Hey.”


희미하게 들려오는 커크의 목소리에 스코티는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커크가 저 멀리 서 있었다. 그는 노란 스타플리트 유니폼 차림이었다. 녹색과 푸른색, 흙색밖에 없는 스톤헤이븐의 풍경 속에서 커크의 색깔은 매우 튀었다. 마치 혼자 다른 시공간에 싸여 있는 것 같다. 스코티는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여긴 기분 나빠.”


“… 그럼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스코티가 커크에게로 발을 내디뎠지만, 커크가 손짓으로 제지했다. 파도치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드럼을 두들기는 소리처럼 울려왔다.


“짐?”


“여긴 추워. 외로워. 세상하곤 동떨어진 유령 같은 곳이야. 완전 기분 나빠.”


“…….”


“그러니까 씨발 너랑 존나 잘 어울린다고.”


스코티가 뭐라고 받아치기도 전에 그들 옆에 있던 거대한 절벽이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하얀 엔터프라이즈호의 열린 해치가 위용을 드러냈다. 커크는 그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스코티를 돌아보며 말했다.


파도와 바람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코티는 입 모양을 똑똑히 읽었다.


‘계속 거기 처박혀있어.’


그 순간 절벽과 커크의 얼굴, 성곽과 파도가 모두 부서져 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스코티는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


그는 미친 듯이 침대 옆을 더듬어 나이트 스탠드를 찾았다. 센서가 그의 동작을 인식하자 스탠드에 바로 불이 들어왔다. 그는 스탠드의 밝기가 최대한 밝아질 때까지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고, 천장의 등을 켰을 때와 다름없이 침실 안이 환해지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 엎어졌다.


Shit, Shit, Shit, Shit, Shit, SHITTTTTTTT!! 아, 이 미친놈이 이젠 지구 밖에서도 못 자게 하냐, 대체 왜! 네가 뭐라고! 스코티는 머릿속의 잔상들을 가능한 한 빨리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아무 생각 없이 놀러가곤 했던 동네가 이렇게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니.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렇게 하면 성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하늘과, 땅을 날려버리려는 듯 불었던 바람과,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린 절벽,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속의 공허를 모조리 기억에서 지워낼 수 있다는 듯이. 그의 세계를 갈가리 찢어놓는 그 말 한마디를 깨끗이 잊을 수 있다는 듯이.


10분 정도 지나자 꿈은 기억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꿈이 불러왔던 공포심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쓸려나갔다. 다만 가슴 부근에서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남았다. 이런 건 괜찮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얼마 안 있어 떨어져 나갈 테지.


스코티는 침실 한 면을 채운 유리창 덮개를 열었다. 별들이 검은 종이 위에 뿌려진 소금 알갱이처럼 보였다. 그는 지금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던노타 캐슬로 발길을 돌리지 않은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덜미로 한기가 끼쳐들었다.


 




2017.06.23 01:50
ㅇㅇ
모바일
하 너무 재밌다... 계속 기다리고 있어 흑흑 빨리 담편 재업해조 너무너무 잼따
[Code: 7f36]
2017.06.23 02:57
ㅇㅇ
모바일
센세 너무 조아요 ㅠㅠㅠㅠㅠㅠㅠ
[Code: f1ea]
2017.06.23 10:13
ㅇㅇ
모바일
하 내 센세가 성실수인이라니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8aec]
2017.06.24 00:19
ㅇㅇ
모바일
아 센세의 표현이 너무 좋아요 기쁨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 패널이, 그토록 좋아하던 함선 안에서조차 기댈 곳 하나 없이 외로운 스콧을 딱 표현해주는것같아서ㅠㅠㅠㅠㅠ안쓰러워 죽겠지만 존잼이라 멈출수가없네요 센세가 성실수인이라 그저 행복할뿐...ㅠㅠ
[Code: 9d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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