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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1 19:48
드레스로자 본섬의 국민들은 매년 5월 개최되는 대회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식물원인 꽃밭을 주로 한 관광 수혜가 주수입원이었다. 때문에 본섬은 거의 전 구간이 상권이라 봐야 했으며 하루에도 수십개의 노점 및 가게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이제와 거리에서 풍선 아트를 선보이는 삐에로 분장의 남성이나 잡화점에 새로 들어온 알비생이나 운세를 봐주는 노점이 하나 더 생긴다 한들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특히 앞일을 봐주는 점성술사가 엉터리라 개업 삼일 만에 파리만 날린다 해도 말이다.

“골목 끝에 점술집이 새로 생겼길래 개시나 해주려고 천막 안에 들어갔더니 검은색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음침하게 앉아있더라고. 그 여자가 고개를 들어서 눈을 딱 부딪히는데 예사 눈빛이 아니더라니까? 그래서 나는 아 이사람 제대로 볼 줄 알겠구나. 내가 올해는 운수가 좀 붙으려나 싶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가 뭐랬는지 알아?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복권 당첨되는 부적 좀 써달라니까 그런 허황된 것에 의지하고 싶냐더라. 점이란 비과학적인 미신일 뿐이고 복권이란 아주 희박한 확률에 의지하는 사행성 게임이라면서 뇌가 도파민에 절여진 피폐한 삶을 원하냐는 말따위를 하더라니까? 에잇, 이것도 꽝이네. 빌어먹을!”

잡화점 한쪽에는 벽을 따라 놓인 스탠딩 테이블이 있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나무 막대로 스크래치를 낸 종이를 우그러트리며 거칠게 몸을 돌렸다. 테이블 밑에 놓인 쓰레기통에는 이미 수십장의 스크래치 난 종이들이 버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는 남자를 향한 친구의 목소리가 있었더랬다.

“뭐야, 너 또 하려고? 점쟁이 말 틀린 거 하나 없네! 즉석복권 좀 그만 긁어라! 너 오늘 심하다?”
“시끄러워 자식아! 넌 친구라는 놈이 점쟁이 편을 드냐? 내가 오늘 전재산 털어서라도 일등 된다. 이봐! 즉석복권 스무장 더!”
“죄송하지만 손님은 일일 구매 한도인 십만 베리를 다 채우셔서 복권 판매가 불가하세요.”
“팔라면 팔 것이지 점원 주제에 건방지게ㅡ!”
“저희 가게에서는요.”
“무, 뭐?”
“법적으로 인당 일일 상한선은 십만 베리지만 손님이 다른 가게에서 구입하시는 것까지는 저희도 알 도리가 없죠. 그리고 복권 판매는 길 건너편에 있는 담배가게에서도 하던데요? 또 여기, 여기, 여기도요.”

아예 카운터 위에서 본섬 관광지도를 꺼내 표시 해주던 귤색 머리 여자 점원에 초저녁부터 술을 한잔 걸친 남자도 어느새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못 말린다는 얼굴의 친구와 함께 관광지도를 손에 쥔 남자가 잡화점을 나설 때 문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부자되세요, 손님.”

카운터에서 여유롭게 손인사를 하는 귤색 머리 점원의 목소리도 함께.




지난밤, 진짜 삽입은 하지 않은 덕분인지 조로는 움직일 만했다. 평소보다 진이 빠진 건 있었지만 이정도는 괜찮았다. 단지 콘돔을 연달아 불러내면서 짜증 섞인 욕지기를 중얼대던 로우가 기억에 남을 뿐. 조로는 콘돔에 문제가 생겼는지 포장을 몇 개나 찢던 녀석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다섯개쯤 뜯고 나서야 겨우 손가락에 콘돔을 씌운 이를 떠올리며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로우는 인상쓴 얼굴도 귀엽고 예뻤다.

‘눈에 뭐가 씌였나. 별개 다 귀엽다니…….’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침소 앞 정원에서 장식용 넓적돌에 걸터앉은 조로가 멍하니 생각할 때였다. 그 옆에는 슈거와 워커가 연못가에 쪼그려앉아 대화 중이었다.

“야, 나귀 너 저 잉어 잡을 수 있냐?”
“제가요? 아니요?”
“거짓말하고 있네. 물고기보다 빨리 헤엄치면서. 그러지 말고 우리 저거 잡아다 장작불에 구워먹자.”
“…….”
“확 씨! 눈 안 까냐? 누가 주인을 그렇게 보래?”
“슈거랜드가 저보다 크니까 올려다본 것뿐입리다.”
“어쭈? 너 자꾸 나불거린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슈거랜드야말로 자꾸 동화책 보고 따라하려는 것 좀 고치십시오.”
“어제 큰나무에 올라가는 건 나보다 지가 더 좋다고 해놓고서는.”
“그래놓고 영감님한테 걸리니까 제가 하자고 한 거라면서 혼자 쏙 빠졌잖뜹니까. 덕분에 저만 영감님한테 배로 혼났고요.”
“그래서 뭐. 됐으니까 잉어나 잡아와, 얼른.”
“으악!”

슈거가 장갑낀 손으로 워커를 슬쩍 민 순간이다. 딴생각에 빠져 있는 줄 알고 있던 조로가 팔을 뻗어 워커를 낚아챘다. 덜미가 잡혀 대롱거리던 워커는 죽다 살아난 얼굴이었다.

“조로랜드!”
“뭐야, 염라. 불러도 대꾸도 없이 멍만 때렸으면서. ……도깨비도 아니고 눈이 옆에 달렸나. 칫.”
“다 들린다.”

슈거가 구시렁대니 조로는 워커를 땅에 안전히 내려주며 씩 웃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섬뜩한 미소에 슈거는 애써 태연한 척 굴며 눈을 굴렸고 워커는 천군만마를 얻은 양 가슴을 쫙 펴고 섰다. 흘겨보던 슈거의 눈빛에 금새 꼬리를 말았기는 해도 말이다. 조로가 그런 두 녀석을 흐뭇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아니되옵니다, 왕자님!”
“아니되옵니다!”
“부디 생각을 거둬주시옵소서!”
“거둬주시옵소서!”

왕의 대지와 비교하면 이천평 규모의 기와각은 앙증맞은 넓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왕자의 임시 집무실은 침실이 있는 거처와 근거리였다. 너른 정원과 연못, 돌담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특히 기와각 안 각각의 채를 구분짓는 내부 돌담은 성인 가슴 높이쯤 됐으니 큰 소리가 번지기도 좋았다. 안 그래도 슈거와 워커는 이른아침부터 목청 높여 읍소하는 궁정의들에 놀라 잠이 깬 터였다. 그 때문인지 잠시잠깐의 평화를 깨듯 들려온 소리에 슈거가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시끄러워 못 살겠네. 다 죽여…… 죽, 죽만 먹는 것처럼 비실비실해서는 목청은 왜 이렇게 큰 거야!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평소대로 악담을 퍼부으려던 슈거는 여전히 제게 꽂힌 시선을 느끼며 급히 말을 바꿨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존심이 상하지만 조로의 눈치를 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염라는 도피도 로우도 제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궁에서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슈거에게 유일하게 제지를 가하는 이였으니까. 내심은 그런 관심이 싫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하비하비 열매를 먹은 뒤 생의 대부분을 별궁에서 인형들과만 지냈던 슈거에게 조로는 어찌됐던 다시 세상과의 물꼬를 트게 해주지 않았나. 멍청해서 손이 많이 가는 게 여간 귀찮은 건 아니라지만 그 덕에 나귀를 얻기도 했고. 그러니 여기서 슈거의 진심은 조로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저기 계속 시끄러운데 뭐 때문인지 같이 알아보러 갈까?”

역시나 아닌 척 눈치보는 슈거에게 씩 웃어보인 조로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슈거는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인상을 썼다.

“거긴 반대쪽이라고, 염라! 나귀 너 얼른 염라 안 데려올래?”
“네, 나귀 갑니다요. 조로랜드! 왕자님 집무실은 반대방향입리다!”

슈거의 성화에 눈 깜짝할 새 사라진 워커는 조로의 어깨까지 올라가 있었다. 슈거도 합류해 조로의 손을 잡아 끌기까지는 금방이었다.




한번은 그럴 수 있다. 단순 불량품이라 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난밤, 섐블즈로 불러낸 콘돔 네 개가 연달아 길게 찢어지고 구멍이 났다는 건 그럴 수 없다. 다섯 개째에 멀쩡한 콘돔이 나왔다고 해도. 그러니 성기 삽입 없이 관계를 마친 뒤 기절하듯 잠든 조로의 몸과 주변을 직접 정리하고 나온 로우가 꼭두새벽부터 내의원 수장인 궁정의장을 비롯해 휘하 관리들을 불러들인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로 말미암아 한데 모인 그들은 수백개 콘돔을 일일이 확인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찢어지고 구멍난 것들이 부지기수라는 게 문제였다. 왕자의 엄명에 자다 말고 불려나온 이들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 뜯어보던 콘돔이 멀쩡해뵈는 포장과 달리 셋 중 하나 꼴로 찢어져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를 보고하러 가는 이른 아침, 궁정의장은 잠귀 밝은 시종장 영감이 콘돔 확인에 동참했다가 함께 걸음해주는 것에 위안받을 정도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는 내의원 책임이 맞았으니까. 보고하러 가는 길에 궁정의장이 얼마나 의기소침했던지 시종장 영감도 왕자님 화를 같이 받아주겠다며 위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막상 침실에서 나온 로우는 듣는 내내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이쯤에서 궁정의장과 영감은 로우가 짐작가는 게 있으면서도 부러 똥개훈련을 시켰다는 걸 눈치챘고. 충성 맹세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쓰며 목부터 치고 보는 현왕도 그렇지만 아랫사람 피 말리기로는 왕자도 만만치 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고를 마치고 명만 기다리던 두 사람에 로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콘돔 포장은 제대로 확인했나? 육안으로 구분키 힘든 허점이 있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로우는 침실에 들어가려 했다. 볼일은 이게 끝이라는 양. 하지만 평소라면 불량 콘돔과 함께 떨고 있을 사람들을 찾아가 말로 돌려깎이를 할 저 성격이 잠잠하니 더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도피가 왜 로우 옆에 딱 붙여두는지를 알리듯 빛을 발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시종장 영감이었고 말이다.

‘자, 잠시만! 왕자님 혹시 정말 묶으시려는ㅡ!!! 아니! 아니됩니다!!!’

본인보다 더 로우를 보고 듣고 살핀 이가 있다면 영감이지 않을까. 침실로 들어가려던 로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 영감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지난날 궁정의장이 구시렁댄 말과 함께 로우의 의중을 바로 눈치챈 거였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궁정의장은 눈앞에서 영감이 사라진 뒤에도 눈만 껌벅였을 정도다. 영감이 있던 자리에는 성냥갑만 한 비단 주머니가 떨어졌는데 한꼬집쯤 되는 머리털이 삐져나온 게 보였었다.

‘쯧.’

바닥에 떨어진 것을 함께 봤던 로우는 혀를 한번 차고는 미련없이 문을 닫아걸었고 말이다. 이어 멀리서 득달같이 내달리는 발소리가 들려오니 정체불명의 머리털이 누구의 것인지 궁정의장은 모를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입을 잘못 놀린 궁정의장 네놈 탓이다! 행여 우리 왕자님 귀한 씨물에 문제라도 생기면 네놈도 고자가 될 줄 알아라!”

오전 내 궁정의장과 함께 임시 편전 앞에서 간청하던 영감이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제 말이 씨가 된 걸 안 궁정의장도 이번만큼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오늘, 동이 막 터오던 시간을 생각하면 그는 쓸개즙이라도 올라온 양 목구멍이 영 씁쓸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볼 때 로우 왕자라면 친히 정관을 묶고도 남을 테니까.

“그짓거리를 안 하면 될 일… 어휴, 내가 말해 뭐해. 소 귀에 경 읽기지.”
“뭐야, 이놈아?!”
“죄송합니다, 영감님. 이번만큼은 정말 내가 대역죄인입니다.”

눈을 홉 뜨고 노려보는 영감에 궁정의장이 머리를 돌렸다. 밤새 파릇하게 수염이 올라온 얼굴은 하룻밤새 십년은 더 늙은 듯 추레했다. 그 모양새가 퍽 불쌍해보여 영감도 반대편으로 머리를 홱 돌릴 뿐이었다. 사실 이쯤에서 두 사람은 누가 콘돔에 장난질 했는지 눈치챈 뒤였으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젊은 왕의 농간에 더한 악수로 대응하는 게 왕자의 방식이었다. 이로써 속이 타들어가기는 영감이나 궁정의장이나 매한가지였다. 왕자에게는 아직 후사 하나 없지 않던가. 그러니 불안하기는 이들 뒤로 늘어선 내의원 상직자들도 마찬가지리라. 함께 콘돔 검수를 한 상직자들은 로우가 무엇을 결심했는지 귀띔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같이 지위며 가문이며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지금은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종장 영감, 정말 폐하께서 기와각에 없으신 게 맞습니까?”
“폐하께서는 새벽같이 기와각을 나서셨다네. 그런데 사람 참 못 쓰겠구만. 기밀사항인 페하의 운신을 두고 자꾸 입 밖에 내서야 쓰나.”
“이리 농성부리다 폐하 눈에 들어 자초지종이라도 물으시면 우리 다 죽을 것 같아 그럽니다.”
“베르고에게 직접 들은 정보니 쓰잘데 없는 소리 할 시간에 왕자님 마음 돌려놓을 생각이나 합세. 이러다 정말 폐하께서 아시게 되면 우리 목을 전부 내놔도 부족할걸세.”

이른 아침부터 편전 앞에서 간청하느라 목이 쉰 이들은 현재 잠시 숨돌리던 차였다. 그틈을 타 뒤에 선 이들 중 하나가 물으니 영감 역시 몸을 돌려 소근댔다. 이렇듯 로우의 정관수술 결심은 이들 사이의 비밀이었다. 젊은 왕이 제 몸보다 먼저 생각하는 게 왕자 아니던가. 정관수술이란 게 확률은 희박하지만 부작용에 난임 또는 불임이 붙는만큼 일이 알려지면 젊은 왕 손에 내의원 전부가 통으로 날아갈 판이었다. 그 불같은 성정을 잘 알아서 영감도 이리 두팔 걷고 도와주는 것 아니었나. 물론 그 속내야 로우가 마음을 돌리길 제일 간절히 바라겠지만 단지 이뿐이라면 도피에게 말하는 게 제일 빠르리라. 하지만 영감은 그러지 않았으니 한솥밥 먹는 식솔들을 아끼는 마음이었다. 지난날 쫓겨난 약방 신참도 미안함에 나름 좋은 직장을 찾아주지 않았나. 물론 이것이 과거의 잘못을 다 덮어줄 수는 없을지나 사람이 맹목적인 데가 있어 문제지 근본적으로 악한 이는 아니라는 소리다. 그래서 궁정의장은 영감을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했다.

“자, 그럼 쉴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하지. 내 선창하면 다들 제창하게.”

나이 지긋한 내의원 상직자들을 비롯해 그들의 수장인 궁정의장에 시종장까지 기와각 편전에 모인 이유를 아는 자는 없었다. 때문에 주위를 오가는 시종이며 호위대며 힐끗대는 시선을 던지건만 영감의 말에 각자 기합을 바짝 넣기 바빴다. 그렇게 우렁찬 소리가 또 한번 기와각에 울리려 했다.

“오른쪽으로 돌아야 합리다, 조로랜드! 여기서 오른쪽이란 숟가락 드는 손을 생각하면 됩리다!”
“나도 알아 인마!”
“숟가락 드는 손! 오른쪽! 염라 너 지금 술잔 드는 손 쪽으로 돌았잖아!!”

편전이 있는 건물 채를 감싼 돌담너머로 달구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면 성인 가슴만 한 높이의 내부 담장 위, 삐죽 솟은 잔디머리가 왕세자비라는 건 다들 알아보기 쉬웠다. 그 밑으로 털털대며 달구지 구르는 소리와 투닥이는 어린애 목소리 또한 익숙한 것이었고. 단지 그럼에도 의아한 건 저 셋이 왜 편전 주변에 있는가였다.

“아 귀찮아. 뭐하러 출구를 찾고 있어. 그냥 담 넘으면 되지. 둘 다 이리 와.”
“뭘 하려고 염라?!”
“잠깐만요, 조로랜, 으헉!”

한 팔에는 아이를, 다른 손에는 소인족을 쥐고 왕세자비는 담을 뛰어넘었다. 뒤로 물러났다 달려와 담장 벽을 차고 뛰어오른 솜씨는 날아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한 착지 또한 깔끔했으니 왕세자비는 온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가득이었다. 예고 없이 허공을 부유한 양쪽의 두 아이는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인데. 이는 편전 앞을 점거한 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오늘 중 가장 고요한 때가 찾아왔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왕세자비, 조로뿐인 듯했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자태를 하고.

“아침부터 시끄럽던데 무슨 일입니까?”
“…….”
“내가 외부인이라 말하기 곤란한 거면 얘한테라도 말해주는 건요? 꼬맹이가 걱정을 하던데.”
“걱정은 무슨! 난 그냥 시끄러워서 짜증 난 거야!”
“그래. 그렇다고 치자.”
“진짜라니까!!”

편전 앞마당에서 농성 중이던 무리에 다가선 조로는 태평스러웠다. 옆구리에 매달린 슈거가 눈을 치켜뜨고 반박하지만 대답 역시 아이 어르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막연히 편전 앞 무리가 로우를 괴롭히고 있나 생각한 슈거는 수틀리면 전부 인형으로 만들 셈이었다 해도 기저에 깔린 저의는 조로의 말과 다를 바 없었으니. 다만 슈거는 이런 속내를 표현하는 게 어색해서 더욱 퉁명스레 구는 거였다. 그 일환으로 이제 내려놓으라 몸부림치는 녀석에 방심한 조로는 손을 놓치고 말았다.

“어어? 야!”
“흥!”

다치기라도 할까 당황한 조로와 달리 가뿐히 바닥에 착지한 슈거는 콧방귀를 뀌었다. 팔짱을 낀 열살 남짓한 어린아이는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눈을 굴려 조로의 눈치를 봤다. 슈거는 여전히 염라가 무서웠으니까. 이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조로의 반대편 손에 안겨 있던 워커뿐인 듯했다. 결국 한숨을 쉰 워커는 저도 내려달라며 청한 뒤 슈거와 조로 사이에 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워커 역시 슈거를 챙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왜 조로를 무서워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는 동안 앞으로 나선 영감은 조로에게 바짝 붙어 소근거렸다.

“슈거님은 조로님의 먼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영감의 말에 조로도 아차 하는 표정을 했다. 영감은 방금 전 조로가 한 말을 에둘러 지적한 거였다. 궁이란 사방이 듣는 귀, 보는 눈 천지라 잘못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화를 불러오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말을 마친 영감은 한번 더 입을 벙긋하려다 물러났다. 조로의 뒤로 보이는 두 호위대원들 때문이었다. 거리를 두고 조로의 뒤에 붙어 따르던 분대원들은 담장너머에 버려둔 장난감 수레를 끌고 다가왔다. 그에 뒤로 물러난 영감 옆으로 궁정의장이 바짝 붙었다. 이때 조로는 저를 지적한 영감의 말에 오히려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우린 그만 갈까? 다들 바쁜 것 같은데.”

편전이 나랏일을 보는 곳이라는 건 조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 더 있어봐야 방해만 될 뿐임을 느낀 조로는 슈거와 워커를 달래 돌아가려 했다. 슈거는 이럴거면 뭐하러 왔느냐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따르는 모양새였다. 워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사이 작당이라도 하듯 머리를 맞대고 수근대던 영감과 궁정의장의 시선은 두 분대원들에게 닿았다. 자초지종을 터놓고 도와달라고픈 심정이 굴뚝같은데 로우가 조로에게 껌딱지처럼 붙여놓은 분대원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로우의 지시로 영감이나 궁정의장이 조로에게 잡소리를 늘어놓지 못하게 했다. 호위대 분대원들은 골수까지 왕과 왕자의 친위대나 다름없으니 이들은 받은 명을 칼같이 지켰다. 주도면밀한 왕자는 오늘 영감이나 궁정의장과 친한 베포나 펭귄 등을 대신해 이들과 친분이 없는 분대원을 조로 곁에 붙였다. 그러니 정에 읍소해본들 소용없음을 인지한 두 노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조로를 볼 뿐이었다.

“그럼 가볼테니 다들 일 보십쇼.”

애절한 눈빛에 무심코 올려다본 슈거와 워커마저 움찔했건만 조로만이 산뜻하기 그지없다. 환한 미소를 담은 인사를 끝으로 미련없이 돌아서는 왕세자비에 두 노인은 가슴이 꽉 막히는 걸 느꼈다. 슈거, 워커가 자꾸 한번씩 돌아보는데도 조로만이 거침없이 앞서가니 편전 앞에 덩그마니 남은 이들은 왕세자비가 눈치라도 좀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아주 간절한 바람을.




본인이 며칠 밤새워도 되고 형질 역시 상 중의 상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도 다 똑같은 줄 아나보다. 회의라는 말이 무색하게 모든 걸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지시하는 국왕도 힘들었지만 이를 토론 및 질책의 장으로 만드는 왕자는 괴로운 게 사실이다. 여기서 전자는 관료 및 귀족을 발톱의 때보다 못하게 여겼고 후자는 사람 갈아쓰기를 숨쉬듯 했으니 이러나저러나 앓는 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아침댓바람부터 불시에 편전으로 불려나왔다가 정오를 갓 넘기면서 풀려난 이들은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었다. 그들 중 절반은 불혹 또는 지천명에 준하는 연배로 각기 한 분야를 통달한 자들이건만 편전에 들고 날 때면 넋이 빠진 듯 굴었다. 그래도 이쪽은 나은 편이었다지만 말이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꽁지 빠져라 나온 자들 중에는 눈물을 훌쩍이거나 머리에 없던 혹이 생긴 이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드레스로자의 관료는 신분에 상관없이 시험을 보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절반과 귀족 출신으로 득세한 나머지 반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파벌이 나뉨은 당연했고 시험제를 도입한 젊은 왕은 두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왕권을 공고히 다져놨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가문의 관직을 세습할 뿐인 귀족들은 편전에 불려갈 때면 평생 부모에게도 안 맞아본 팔매질을 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평생을 공부한 학자들과의 토론도 기꺼워하는 왕자인데 어련하겠나. 그러니 이들에게는 하루 온종일도 가능한 회의가 정오를 조금 넘겨 끝난 것이 천운일 것이다. 실로 관료들에게는 로우가 알라바스터에 다녀온 지난해부터 숨통 트이는 날들이 많아진 게 사실이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네. 다들 많이 혼났는가?”
“말도 마시오, 영감. 귀족파 저 잡것들이 입으로 똥싸는 소리를 하도 해대서 우리까지 엮일 뻔했으니. 이래놓고 그것들 퇴청 소리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튀어나가는 꼬라지를 보면 없던 혈압도 생길 판이오.”

편전 안을 힐끗대던 영감은 로우가 없는 걸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대신 옆을 지나치던 이에게 인사말을 건내니 화를 꾹꾹 눌러담은 소리가 나왔다. 제일 늦게 편전을 나오던 이는 흰머리가 희끗하게 올라온 여성이었다. 현직 관료들 중 가장 나이가 많기도 했던 그는 이미터가 넘는 장신에 우람한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대장부와 같은 기개를 지녔으니 귀 밑으로 짧게 친 머리까지 하면 영락없는 무인상이다. 성격 또한 영락없는 여걸이어서 왕자가 집어던진 책등에 머리를 맞은 젊은 귀족 놈을 떠올리면서는 이내 실실거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귀족파란 가문 세습으로 관직을 받은 무리를 칭함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시험을 보고 들어온 무리는 이족파로 불렸고. 본디 이족이란 하급 관리직을 통칭하는 말로 귀족파들이 그들의 출신을 비하한 멸칭에 가까웠다. 막상 불림당한 쪽은 믿빠진 독처럼 대가리 텅텅 빈 놈들보다 낫다며 오히려 그 칭호를 반겼다지만 말이다. 여기서 영감이 말을 건 이는 이족파의 우두머리랄 수 있었다. 또한 영감은 이족파 수장이 능글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않소? 영감.”
“뭐가 말인가?”
“왕자님 오늘 기세가 온종일 편전에서 대거리를 해도 시원찮을 판이었는데 꼭 똥싸다 만 것처럼 끊으시더라니까? 내가 알던 왕자님은 하늘이 두쪽나도 회의는 끝을 보시던 분이셨는데.”
“자네는 다 알면서 물어보나? 폐하와 점심 약속이 있으니까 그러신 게지. 폐하가 가정적인 분이시잖나.”
“…….”
“사람을 뭐 그런 눈으로 봐? 내가 못할 말한 것도 아닌데?”
“…….”
“허! 거참! 이사람이 정말! 그런다고 내 몸에 구멍 하나 뚫리겠나?”
“진짜 뚫어줄 수는 있습니다만.”

이족파 수장은 로즈워드 통치 시절 민중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는 마리조아의 힘을 등에 업은 로즈워드가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운동권 사람이었으니 맷집이며 담력이며 보통이겠는가. 때문에 영감은 실실 웃으면서 하는 소리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점심식사에 조로님도 계시니 그런 걸 테지.”

결국 중얼대며 나온 진실에 이족파 수장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영감님이 방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한 건 잊어줄테니 다신 그런 소리 마시오. 폐하가 가정적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이번에는 영감이 반박 한번 못하고 입을 삐죽였다. 그이는 주름 자글자글한 영감이 폐하와 왕자 일이라면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구는 꼴이 퍽 우스웠지만 방금의 말은 들어주기 힘들 정도였다. 젊은 왕이라 함은 피 한방울이나 섞였을까 싶은 혈족까지 싸그리 죽인 천야차 아니던가.

“그래도 역시 소문의 왕세자비님이 대단하기는 하시네. 왕자께서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애지중지 하신다더니 역시 오메가랑 하는 그게 좋긴 좋은가 보오?”
“이, 이 사람이 미쳤나! 백주대낮에 별 상스러운 걸 다 보네!”

엄지 검지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손가락을 통과시키는 행위를 보여주던 이족파 수장에 영감은 질색팔색을 했다. 영감 놀리기에 재미들린 이가 한참 낄낄거리더니 웃느라 삐죽 나온 눈물을 훔치며 숨을 한번 골랐다.

“그런데 영감이랑 궁정의장에 내의원 상직자들까지 전부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진짜 궁금한 건 이것이었나 보다.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선 이가 한층 짙어진 눈빛으로 옹기종기 모인 내의원 인사들을 죽 훑는 것이 먹이감을 앞에 둔 맹수가 따로없었다.




지난밤, 루치 일행들과 만났을 때의 로우는 스스로 몸에 도청기를 달았다. 구름다리에 있던 크로커다일은 얘기를 다 들었음이니 이로써 도피도 카쿠의 일을 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나랏일은 흥하든 망하든 전부 손뗀 지 오래인 도피가 꽉 쥐고 있던 마물에 관련된 일에 여태 감감무소식이라는 건 로우를 신경쓰이게 했다. 평소라면 지난밤 일을 두고 무슨 말이든 했을 게 분명하니까. 때문에 시간에 맞춰 식사 자리에 나타났건만 로우를 맞이한 건 조로뿐이었다.

“왜 너 혼자야? 다른 사람은?”
“크로커다일 경은 좀 전에 왔다 갔어. 폐하께서는 일이 있으니 오늘은 우리끼리만 먹으라던데?”
“그랬어?”
“어, 그리고 크로커다일 경이 폐하 전언이라며 말해줬는데 어제 들인 건 전부 너 알아서 하래. 본보기는 보였으니 이젠 네 소관이래.”

어제 들인 것은 그린비트에 정박했던 CP9과 기와각에 가져온 기생충이었다. 네 소관이란 말은 둘 모두 로우에게 판단을 넘긴다는 것이었고. 로우는 암호같던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어차피 CP9은 도피의 의도대로 스팬담과 갈라서고 도망자 신세가 되지 않았나. 이러니 더 보일은 없는 셈이다. 카쿠의 몸에서 뽑아내 리 룸으로 보존 중인 기생충을 알아서 하라는 건 의외였지만.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려나 싶던 로우는 신경이 쓰이면서도 죽은 기생충을 두고 고민하기에 이른다. 놈을 제대로 연구하기에 제격인 능력을 지닌 건 로우 자신이지만 그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제르마에 도움을 요청할까…….’

마물에 관해서라면 이쪽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로우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단둘 뿐인 식탁 위로 음식들이 차려졌다. 입맛 돋울 샐러드에 전복, 새우, 가리비를 마늘 소스와 함께 익힌 해산물 요리를 비롯해 살이 두툼하게 오른 가자미 스테이크까지. 방금 막 완성된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진 끝에 조로의 앞에는 고동색을 띤 탕약 그릇이 하나 더 내밀어졌다. 로우가 딴생각에서 빠져나온 것도 이때로 옆에서 조로가 탕약을 쭉 들이키는 걸 지켜보는 눈빛에는 걱정과 애정이 담뿍 담겼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시종들을 물리는 거였다. 조로가 빈 그릇을 식탁에 내려두는 잠깐 사이에 조용히 문이 닫힌 공간에는 이제 로우와 조로 단둘 뿐이었다. 오로지 식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곳은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식탁과 벽 한쪽이 분합문 형태로 돼 있었다. 들어열개라고도 하는 분합문은 항시 열릴 준비가 됐음을 뜻하는데 지금도 정원 내 졸졸 흐르는 물과 조경수를 보여주려 모두 처마 밑에 걸어두지 않았나. 높은 내부 천장과 더불어 눈과 귀를 트이게 하는 풍경을 비롯해 마침맞게 들어오는 일조량까지 하면 이 집의 원주인은 신선놀음이라도 하려던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조로 너 여기는 혼자 온 거야? 슈거나 워커는?”
“그녀석들도 크로커다일 경이랑 같이 나가던데?”

음식이 앞에 있는데도 아예 몸을 조로 쪽으로 돌려앉은 로우는 턱을 괸 채였다. 옆에서도 쓴내가 올라오는 탕약을 눈 한번 움찔 않고 원샷한 조로는 샐러드부터 뒤적였다. 그리고는 너도 먹으라는 듯 말을 툭 던졌다.

“먹여주랴?”

농 섞인 말에 로우도 그제야 포크를 들지만 귓바퀴가 조금 붉어졌다. 오늘도 새벽부터 차려입은 로우는 앉은 자태도 늘씬하게 빠졌다. 행동 하나하나 기품이 느껴지니 보는 눈이 즐거울 따름이다. 조로는 주변인들이 로우를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베포를 비롯한 호위대가 왕자 팬클럽을 자처하는 이유까지도. 무엇보다 조로는 저 입에 먹을 게 들어가는 것이 좋았으니 도피가 왜 함께 식사하기를 종용하는지도 얼추 이해됐다.

“잘 먹어서 예쁘네.”
“ㅡ!!”
“야, 괜찮아? 조심해, 인마.”

돌연 잘못 삼킨 양 가슴을 치는 녀석에 조로가 물컵을 건냈다. 급히 물을 들이킨 로우가 빈 컵을 내려놓으며 큰 숨을 내쉬었다. 벌개진 얼굴로 바라보는 녀석에 조로가 킬킬댔다.

“그만 쳐다보고 먹기나 해. 무슨 말을 못하겠네.”
“조로야, 너 정말 내가 먹는 게 예쁘냐?”
“어. 넌 먹을 때도 예쁘고 잘생겼어.”

조로는 대체로 무심한 성격이었지만 로우에게는 한번이라도 말을 얹게 됐다. 특히 칭찬의 말을. 그 시작이 혼자 아등바등하던 모습을 향한 연민이었을지라도 이 또한 애정이었다. 이것을 과거에 로우는 동정이라 했지만 조로는 조금 달라졌음을 알 것 같았다. 칭찬 한번에 상기된 얼굴을 하는 로우를 보면서 애틋함을 느꼈으니까. 그리고 로우는 저 눈빛을 지난밤에도 보았던 걸 떠올렸다.

‘네가 기분 좋아서 다행이야.’

말에는 몸의 언어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난밤 조로가 흘린 말에 로우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를 향한 눈빛의 따스함이 꼭 같은 색을 띄는 건 아니어서다. 물론 로우는 값싼 동정일지라도 조로가 주는 것이라면 기꺼웠지만 자꾸 욕심이 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조로 곁에 자신 뿐이라는 것을 위안삼을 뿐이다. 조로에게는 어떤 강압적인 수도 쓰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 곁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언제든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마음이 충분했으니. 때문에 로우는 조로가 스스로 제게 남기를 택해준 것에 만족하는 바였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봤자 별수 있을까. 로우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식탁 위 빈 자리에 조로를 들어 앉혔다. 그 옆에는 반도 먹지 못한 음식이 있었다. 그때 무릎을 비집고 들어온 로우가 거칠게 입술을 부비니 조로가 뒤로 기우뚱했다. 조금의 떨어짐도 용납치 않겠다는 양 큰 손이 뒤통수를 움켜쥐고 허리를 바투 끌어당길 때는 조로에게서 짧은 웃음이 샜다. 맞붙은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온 웃음에도 로우는 보채듯 혀를 얽기 바빴다. 벽 한면이 훤히 열힌 방 안에서 한참을 물고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겨우 접붙은 입술이 떨어진 건 조로가 로우를 밀어냈을 때다. 나름 열심히 맞춘다고 했는데도 조로는 입맞추는 것부터 로우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숨도 못 쉬게 들이대니 별 수 없지 않은가.

“뭐야, 갑자기.”
“혹시 싫었어?”
“싫은 건 아닌데 밥 먹다 말고 덤비니까 놀랐잖냐.”

조로가 밀어내는 대로 물러난 로우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시야가 확보될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로우는 침범벅이 된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번, 두번 조로와 몸을 섞을수록 로우의 욕구불만은 커질 뿐이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한편에서는 온종일 조로와 뒹굴 생각만 드는 게 사실이다. 녀석이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 하루 온종일 조로에의 몸에 제것을 넣은 채 있고 싶다. 녀석의 몸 안팎으로 온통 제 흔적뿐이었으면 싶다. 이렇듯 꾹꾹 누르고 또 누른 로우의 밑바닥에는 절대 조로에게 들켜서는 안 될 심연이 있었다.

“입맞추는 건 심장에 무리 안 가잖아.”
“하?”

난데없이 덮침당한 조로는 시무룩해진 음성에 헛웃음이 나왔다. 왼쪽 가슴 위로 펼친 손은 정말 파고들기라도 하려는 듯 날이 서있었다. 조로는 그런 녀석을 기가 막혀서 쳐다볼 뿐이었다.

“심장만 괜찮았으면 너 여기서 나 잡아먹었겠다?”

로우는 이제 조로의 가슴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왼쪽이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는 놈을 보자니 조로는 제 심장이 고장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 그러니까 녀석이 최근 계속 잠자리에서 안 돼요를 일삼았던 게 순전히 심장 때문이라는 말이니까. 물론 조로는 몸만 정상이었다면 로우가 덤빈다 한들 이틀씩이나 나자빠질 일도 없었으리라 장담했다. 그는 여전히 알파의 성욕을 의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밥 먹으러 왔으면 얌전히 먹기나 하지 너는 진짜.”

그래도 기초대사가 높은만큼 생명유지를 위해 뭐든 챙겨먹을 걸 알기에 조로는 제가 져주기로 했다. 상기된 얼굴에 시무룩한 표정이 귀엽지 않은가. 조로가 로우에게 자꾸 져주는 데는 이런 이유가 컸다. 때문에 그는 본격적인 부분은 밤을 기약하며 지금은 성난 녀석을 달래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조로는 로우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스스로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조로야?!”
“가만있어. 시간 없잖아. 너 이러고 나가는 것도 범죄야.”

한쪽 허벅지 위로 불룩 솟은 것이 보였다. 딱 들어맞는 정장 바지에 가감없이 드러난 실루엣이란 볼 때마다 혀를 차게 된다. 저런 게 어떻게 들어갔지 싶어서. 그 한편으로는 저런 걸 감당하는 제 몸에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 헤실대는 입꼬리가 제법 말쑥하다. 단지 문제라면 발기한 남의 가랑이 앞에서 그런다는 게 로우를 더 곤란하게 한달까. 더 불편해지는 아랫도리 사정을 눈치채기란 조로도 어렵지 않았다.

“조로야.”

이젠 정말 난처해진 부름에 눈을 위로 굴리니 귀며 목이며 터질듯 붉어진 녀석이 들어왔다. 조로는 입꼬리를 끌어올린 뒤 허리춤을 풀었고 말이다. 거침없는 손길에 발기한 놈이 보이기도 금방이었다. 보기에 뽀얀 복숭아빛의 놈은 막상 쥐어보면 핏줄이 우둘투둘한 촉감과 한 손에 다 잡기 버거운 우람함을 자랑했다. 고우면서도 한성질하게 생긴 것이 주인과 꼭 같지 싶었다. 조로가 당기는 손 힘에 껍질 사이로 드러난 선단에서는 벌써 방울져 맺힌 것이 있었다. 그는 망설임없이 혀끝을 갖다댔다.

“그, 그냥 손만 해도 충분해!”
“음? 으음.”
“윽… 조로야, 입에 물고 말하지 마라.”
“으으음.”
“알았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혀끝이 선단을 훑고 동시에 입술이 귀두를 감싸니 로우의 몸이 휘청였다. 고꾸라지듯 숙인 몸은 식탁을 부여잡고 간신히 버텼다. 그 밑에서 조로는 나름 열심히 선단을 빨며 기둥은 손으로 훑었다. 기교랄 것도 없는 행위였지만 로우는 착실히 반응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아무리 감질나도 상대가 하고픈 대로 둬야 한다는 이성과 욕구로 치열한 내적 갈등을 벌이던 로우의 손이 조로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음? 읍!!”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은 로우에 조로가 의아해할 때 그는 목구멍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입 안을 드나드는 움직임은 조심스러우나 거침 없기도 하다. 예고 없이 짓쳐드는 녀석에 조로는 이마에 핏대가 오르고 눈가가 금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녀석이 삽입하기 쉽도로 최대한 힘을 풀어 맞춰주는 데는 별수 없음이었다.

“조로야… 아아… 조로야…….”

열에 달뜬 눈으로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그를 부르던 이가 있었으니까. 조로는 앞으로도 녀석이 이리 매달려오면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조각



읽어줘서 정말 너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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