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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20:42
전편 https://hygall.com/611810478
결국 수진계 전체가 합심하여 뒤를 캐자, 은밀하게 전쟁의 불씨를 지피려던 무리들의 꼬리가 잡혔다.
천신제를 지낸 산의 근처 숲 속에서 화살을 발사한 흔적을 찾아냈고, 그로부터 추적하여 연관된 자들이 기산에서 왔다는 정보까지 알아냈지만 그 후로는 실마리가 끊긴 채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강징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운몽 강씨가 누명을 벗기에는 충분했고, 대가문들 사이에서 싸움을 시켜 자멸시키려는 계략을 짰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략자들이 자체적으로 지닌 힘이 대단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연화오 습격 사건이 있고 약 3주 뒤.
운심부지처에서 대부분의 가문의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징은 섭명결을 비롯한 몇몇 고수들의 힘을 빌어 음철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후에 열린 연회에서 자못 거들먹거리는 금광선이 연화오에서 발생했던 기물 파손이나 사상자들의 보상을 일체 전담하여 갚아주겠노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여란이 외숙부를 그리워하니 곧 보내주겠다는 소리에는 강징도 그만 이맛살이 부드러워지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혐의를, 의심을 벗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운몽 강씨나 강징을 신뢰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걸.
대부분의 결정은 몇 개의 대가문이 주도하여 내린 것이었고, 나머지 중소 가문들은 다만 강징이 나쁘지 않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가만히 차를 마시던 강징은 쟁반 위에 놓인 마른 대추 몇 알을 집어서 깨물어 먹었다.
운심부지처의 귀빈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란 참 낯설고 이상했다.
톡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긴장했던 표정이 이내 풀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부인, 책을 좀 빌렸습니다만. 둘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 걱정이네요.”
잠시 볼일이 있다고 곁자리를 비웠던 남희신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다소 들뜬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는 아무런 불안감도, 불신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모든 일들이 다 끝난 지금, 남희신의 관심사는 오로지 강징의 비밀스런 병환 뿐이었다.
이번 청담회를 앞두고 강징이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출 때, 남희신은 한구석에서 운심부지처의 고명한 침술, 약술, 의술의 스승들에게서 해결할 궁금증들을 갈무리하느라고 바빴다.
마침내 청담회가 끝난 후 사람들을 만나 원했던 의문들을 해소한 남희신은 한수레 가득 의서를 빌렸다.
남계인은 조카가 왜 갑자기 의술에 집착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따지지 않고 순순히 내어주었다.
“걱정 마라. 운심부지처의 것 못지 않은 장서각을 지어 주마.”
그 말에 남희신이 마치 사탕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웃자, 강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뺨을 쓰다듬었다.
***
“참, 하늘이 무심하지 않나봅니다.”
고소 남씨의 청담회에서 돌아온 날. 부사가 기쁜 듯이 말했다.
강징이 떠날 때 그는 혹여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부사에게 절반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화오에서 대기하도록 명했다.
음철을 파괴했다는 소리를 들은 부사는 조금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의 적의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번 겪어 본 바였다.
아무튼 운몽 강씨의 강세에도 마음 편한 날이 없더니, 뜻밖에 전쟁을 치를 위기를 넘기고 화합적인 분위기로 넘어가는 듯하자 성격이 잘 드러나는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러나 강징은 대꾸도 없이 남의 일처럼 냉담한 얼굴이었다.
“운심부지처로부터 오고 있는 화물이 있다. 스무 명의 사람을 보내서 현재 화물을 호위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대하게 해라. 고소 남씨의 귀한 서적들이 실려 있으니.”
“예.”
그 화물의 주 내용은 고소 남씨가 다시 보내는 남희신의 예포였지만 강징은 괜히 말하기를 피했다.
그래도 뭔가 눈치를 챈 듯, 묘하게 웃는 낯을 한 부사가 이번에는 남희신을 향해 꾸벅 절을 했다.
연화오에서는 여러 날 동안 습격의 피해를 복구했는데, 강징이 고소에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요란하게 공사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남희신의 거처 바로 곁에다 서방을 짓기 위해 멀쩡한 건물 세 채를 밀어버렸지만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래부터 사람들에게 호의를 사던 남희신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
강징은 어쩐지 소꿉놀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지만, 몇 주 전부터 시작된 신변의 변화에 완전히 무감한 건 아니다.
연화오로 돌아오고, 남희신이 장서를 갈무리하느라고 떨어졌을 때 강징은 살짝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비어 있던 상자에 남희신의 하얀 말액을 갈무리했다.
해가 저문 다음에는 다시 한자리에 앉은 남희신과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남희신이 어느새 새롭게 달인 약탕을 건넸고, 인상을 찌푸리는 강징의 입에 사탕을 물려준 다음 바쁘게 금침을 꺼내 들었다.
강징은 한 손을 내민채 입 안에서 달콤한 사탕을 굴리며 진지한 얼굴로 침을 놓고 있는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만 쉬어라. 네 상처도 가벼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남희신은 맥만 짚어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운심부지처행도 따라오지 말랬더니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또한 연화오 사건 전후의 작은 변화였다. 마땅치 않은 소리를 들으면 입술을 꾹 닫으며 못들은 척하는 것.
강징은 어쩔 수 없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딴엔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어울리지 않게 입을 다물고 고집을 세우는 남희신의 모습이란, 무척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서 일부러 뿔이 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강징은 조용하게 머릿속으로 아까 낮에 부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아니.
하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그 옛날 죄없이 죽은 사제들과 운몽 강씨의 사람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사악한 온약한의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이번 일은 오로지 한 사람의 덕분이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까닥하면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몰랐던 건 오히려 나였다.
“부인, 걱정되십니까?”
자리에 들고도 강징이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자 다가온 남희신이 살포시 어깨를 안았다.
강징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따뜻하게 감아오는 팔을 더듬어 잡고, 머리를 부벼 넓은 품이 마치 침구나 되는 것마냥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호흡이 착 가라앉으며, 흘러드는 남희신의 향과 아낌없이 부어지는 애정과 관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음철은 파괴했다.
그 일에 대해 강징은 아무런 술수도 쓰지 않았고 깨끗하게 놓아주었다.
아마 사람들의 가슴에는 음철의 존재가 크게 박혀 있었을 것이다. 잇달아 지금까지 받았던 공물들을 고스란히 돌려주자 가문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징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의 무기는 무시무시한 음철 뿐만이 아니었다.
사일지정 중에 강징은 우연찮게 외지로 나갔다가 흉검 하나를 얻었고, 그로부터 막강한 사술을 뽑아내고 부리게 되었다.
그런 무기가 없었다면, 이제 막 약관이 된 강징이 어떻게 온약한을 죽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강징은 운몽 내에서 야렵을 갈 때에도 혼자 다녔고, 누구에게도 사기를 뿌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강징은 자신의 진짜 바탕이 되는 힘을 쭉 숨겨왔다.
온약한에게 당한 상처가 완치되지 않는 것도, 온약한을 뚫어버린 사술이 온약한이 입힌 상처로 파고들어 한데 엉켜버린 탓이었다.
강징의 가장 가까운 수하들마저도 종주의 막강한 힘은 음철에서 나오는 것이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우호를 맺고 평화를 이루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무리들이 사실은 교활하고 음험한 계획을 품고 배신을 하려는 거라면.
그들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사일지정조차 일으키지 말고 온약한의 발밑에 머리를 밟히면서 살아가도 좋았을 텐데, 하고 바랄 정도로.
강징은 서늘한 얼굴로 자신이 일으키겠지만 결코 원하지는 않는 전쟁을 그려보았다.
운몽 강씨 대, 나머지 모든 선문 백가들이 한데 뭉친 대군대.
아마 고양이 앞의 쥐 싸움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원기 있게 덤벼들어 오던 적들은 이내 무시무시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공포는 불씨에서 시작된 불처럼 번져나가, 점점 더 크게 타오르고 마지막에는 온 들판을, 산을 하늘을 다 집어삼킬 것이었다.
운몽 강씨가 죽든, 운몽 강씨 아닌 사람이 죽든. 시체는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 바로 흉시가 되어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롯이 강징의 사람들, 아니 시체들이 될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친구가, 형제가, 부모가 악귀로 변하여 덤벼들어오는 지옥도를 버틸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음철에 전멸당한다면 그런 지옥은 면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음철을 파괴해버린 지금은 그들이 정말로 마음을 돌린 것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강징은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하늘로부터 얻은 것도, 갚을 것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순수하고 선량한 이 아이는 하늘이 마땅히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의 환의 눈앞에 부디 그런 지옥을 펼치지는 말아 달라고, 강징은 마음 깊이 빌며 어린 신랑의 손을 꼭 쥐었다.
결국 수진계 전체가 합심하여 뒤를 캐자, 은밀하게 전쟁의 불씨를 지피려던 무리들의 꼬리가 잡혔다.
천신제를 지낸 산의 근처 숲 속에서 화살을 발사한 흔적을 찾아냈고, 그로부터 추적하여 연관된 자들이 기산에서 왔다는 정보까지 알아냈지만 그 후로는 실마리가 끊긴 채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강징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운몽 강씨가 누명을 벗기에는 충분했고, 대가문들 사이에서 싸움을 시켜 자멸시키려는 계략을 짰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략자들이 자체적으로 지닌 힘이 대단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연화오 습격 사건이 있고 약 3주 뒤.
운심부지처에서 대부분의 가문의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징은 섭명결을 비롯한 몇몇 고수들의 힘을 빌어 음철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후에 열린 연회에서 자못 거들먹거리는 금광선이 연화오에서 발생했던 기물 파손이나 사상자들의 보상을 일체 전담하여 갚아주겠노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여란이 외숙부를 그리워하니 곧 보내주겠다는 소리에는 강징도 그만 이맛살이 부드러워지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혐의를, 의심을 벗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운몽 강씨나 강징을 신뢰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걸.
대부분의 결정은 몇 개의 대가문이 주도하여 내린 것이었고, 나머지 중소 가문들은 다만 강징이 나쁘지 않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가만히 차를 마시던 강징은 쟁반 위에 놓인 마른 대추 몇 알을 집어서 깨물어 먹었다.
운심부지처의 귀빈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란 참 낯설고 이상했다.
톡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긴장했던 표정이 이내 풀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부인, 책을 좀 빌렸습니다만. 둘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 걱정이네요.”
잠시 볼일이 있다고 곁자리를 비웠던 남희신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다소 들뜬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는 아무런 불안감도, 불신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모든 일들이 다 끝난 지금, 남희신의 관심사는 오로지 강징의 비밀스런 병환 뿐이었다.
이번 청담회를 앞두고 강징이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출 때, 남희신은 한구석에서 운심부지처의 고명한 침술, 약술, 의술의 스승들에게서 해결할 궁금증들을 갈무리하느라고 바빴다.
마침내 청담회가 끝난 후 사람들을 만나 원했던 의문들을 해소한 남희신은 한수레 가득 의서를 빌렸다.
남계인은 조카가 왜 갑자기 의술에 집착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따지지 않고 순순히 내어주었다.
“걱정 마라. 운심부지처의 것 못지 않은 장서각을 지어 주마.”
그 말에 남희신이 마치 사탕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웃자, 강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뺨을 쓰다듬었다.
***
“참, 하늘이 무심하지 않나봅니다.”
고소 남씨의 청담회에서 돌아온 날. 부사가 기쁜 듯이 말했다.
강징이 떠날 때 그는 혹여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부사에게 절반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화오에서 대기하도록 명했다.
음철을 파괴했다는 소리를 들은 부사는 조금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의 적의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번 겪어 본 바였다.
아무튼 운몽 강씨의 강세에도 마음 편한 날이 없더니, 뜻밖에 전쟁을 치를 위기를 넘기고 화합적인 분위기로 넘어가는 듯하자 성격이 잘 드러나는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러나 강징은 대꾸도 없이 남의 일처럼 냉담한 얼굴이었다.
“운심부지처로부터 오고 있는 화물이 있다. 스무 명의 사람을 보내서 현재 화물을 호위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대하게 해라. 고소 남씨의 귀한 서적들이 실려 있으니.”
“예.”
그 화물의 주 내용은 고소 남씨가 다시 보내는 남희신의 예포였지만 강징은 괜히 말하기를 피했다.
그래도 뭔가 눈치를 챈 듯, 묘하게 웃는 낯을 한 부사가 이번에는 남희신을 향해 꾸벅 절을 했다.
연화오에서는 여러 날 동안 습격의 피해를 복구했는데, 강징이 고소에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요란하게 공사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남희신의 거처 바로 곁에다 서방을 짓기 위해 멀쩡한 건물 세 채를 밀어버렸지만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래부터 사람들에게 호의를 사던 남희신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
강징은 어쩐지 소꿉놀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지만, 몇 주 전부터 시작된 신변의 변화에 완전히 무감한 건 아니다.
연화오로 돌아오고, 남희신이 장서를 갈무리하느라고 떨어졌을 때 강징은 살짝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비어 있던 상자에 남희신의 하얀 말액을 갈무리했다.
해가 저문 다음에는 다시 한자리에 앉은 남희신과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남희신이 어느새 새롭게 달인 약탕을 건넸고, 인상을 찌푸리는 강징의 입에 사탕을 물려준 다음 바쁘게 금침을 꺼내 들었다.
강징은 한 손을 내민채 입 안에서 달콤한 사탕을 굴리며 진지한 얼굴로 침을 놓고 있는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만 쉬어라. 네 상처도 가벼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남희신은 맥만 짚어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운심부지처행도 따라오지 말랬더니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또한 연화오 사건 전후의 작은 변화였다. 마땅치 않은 소리를 들으면 입술을 꾹 닫으며 못들은 척하는 것.
강징은 어쩔 수 없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딴엔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어울리지 않게 입을 다물고 고집을 세우는 남희신의 모습이란, 무척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서 일부러 뿔이 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강징은 조용하게 머릿속으로 아까 낮에 부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아니.
하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그 옛날 죄없이 죽은 사제들과 운몽 강씨의 사람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사악한 온약한의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이번 일은 오로지 한 사람의 덕분이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까닥하면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몰랐던 건 오히려 나였다.
“부인, 걱정되십니까?”
자리에 들고도 강징이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자 다가온 남희신이 살포시 어깨를 안았다.
강징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따뜻하게 감아오는 팔을 더듬어 잡고, 머리를 부벼 넓은 품이 마치 침구나 되는 것마냥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호흡이 착 가라앉으며, 흘러드는 남희신의 향과 아낌없이 부어지는 애정과 관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음철은 파괴했다.
그 일에 대해 강징은 아무런 술수도 쓰지 않았고 깨끗하게 놓아주었다.
아마 사람들의 가슴에는 음철의 존재가 크게 박혀 있었을 것이다. 잇달아 지금까지 받았던 공물들을 고스란히 돌려주자 가문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징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의 무기는 무시무시한 음철 뿐만이 아니었다.
사일지정 중에 강징은 우연찮게 외지로 나갔다가 흉검 하나를 얻었고, 그로부터 막강한 사술을 뽑아내고 부리게 되었다.
그런 무기가 없었다면, 이제 막 약관이 된 강징이 어떻게 온약한을 죽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강징은 운몽 내에서 야렵을 갈 때에도 혼자 다녔고, 누구에게도 사기를 뿌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강징은 자신의 진짜 바탕이 되는 힘을 쭉 숨겨왔다.
온약한에게 당한 상처가 완치되지 않는 것도, 온약한을 뚫어버린 사술이 온약한이 입힌 상처로 파고들어 한데 엉켜버린 탓이었다.
강징의 가장 가까운 수하들마저도 종주의 막강한 힘은 음철에서 나오는 것이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우호를 맺고 평화를 이루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무리들이 사실은 교활하고 음험한 계획을 품고 배신을 하려는 거라면.
그들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사일지정조차 일으키지 말고 온약한의 발밑에 머리를 밟히면서 살아가도 좋았을 텐데, 하고 바랄 정도로.
강징은 서늘한 얼굴로 자신이 일으키겠지만 결코 원하지는 않는 전쟁을 그려보았다.
운몽 강씨 대, 나머지 모든 선문 백가들이 한데 뭉친 대군대.
아마 고양이 앞의 쥐 싸움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원기 있게 덤벼들어 오던 적들은 이내 무시무시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공포는 불씨에서 시작된 불처럼 번져나가, 점점 더 크게 타오르고 마지막에는 온 들판을, 산을 하늘을 다 집어삼킬 것이었다.
운몽 강씨가 죽든, 운몽 강씨 아닌 사람이 죽든. 시체는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 바로 흉시가 되어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롯이 강징의 사람들, 아니 시체들이 될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친구가, 형제가, 부모가 악귀로 변하여 덤벼들어오는 지옥도를 버틸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음철에 전멸당한다면 그런 지옥은 면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음철을 파괴해버린 지금은 그들이 정말로 마음을 돌린 것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강징은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하늘로부터 얻은 것도, 갚을 것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순수하고 선량한 이 아이는 하늘이 마땅히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의 환의 눈앞에 부디 그런 지옥을 펼치지는 말아 달라고, 강징은 마음 깊이 빌며 어린 신랑의 손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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