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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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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문이 쿵 닫히는 동시에 이연화를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검붉은 피를 한웅큼 왈칵 토해냈어. 손등위로 검은 핏줄이 스멀스멀 번져가다 잠시 내력을 돌리니 곧 희미하게 사라졌어. 이연화는 숨을 길게 내쉬다 곁에서 낑낑거리며 걱정스러운듯 콧등으로 저를 비비적이는 불여우를 토닥였어. 입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아 잠시 목을 가다듬었어.
-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세게 친것도 아니야.
아닌게 아니라 적비성은 살초를 펼친것도 아니었고 수가 좀 매서웠을뿐이지. 전장에서 무조건 검을 먼저 꺼내들던걸 생각하면 많이 봐주긴 한건가, 그래도 성격 어디 안갔군. 적비성과 혹시라도 얼굴을 마주치면 얼마나 어색할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별 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어. 되려 조금은 반갑기까지도 했고. 늘 자신을 우러러 보거나 적대하는 시선과 달리 일단 정직하게 직선적인걸 보니 그 한결같음이 달가운거 있지. 이연화는 히죽 웃고 말았어. 가장 가깝다고 여겼던 이는 등뒤에서 비수를 꽂았고 가장 멀리 있는 이는 보자마자 달려들고, 아이고 팔자가 사났구만. 별 시답지 않은 농짓거리를 생각하며 이연화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어.
어깨 부근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는것이 멍이 심하게 들었다는걸 보지 않아도 잘 알수 있었어. 팔을 살살 움직여보니 근육이 다치진 않았고 외상만 생긴것 같아 다행있어. 전에 받아놨던 고약 남은게 있나, 옷에 붙은 마른 풀을 툭툭 털어내며 팔을 살살 움직여봤어. 벽차지독으로 내력이 많이 줄었어도 적비성의 공격을 못받아칠정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이제 자신은 적비성과 대결해야하는 적국의 장수 이상이가 아니라 그를 받들어 모셔야하는 측비 이연화가 아닌가.
국가를 이어주는 정략혼에 매인 몸이라 더더욱 적비성에게 반하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니 반사적으로 초식을 받아내다 손을 놔버린거지. 이런 상태로 오래 싸우면 어차피 질것도 뻔하고 말이야. 적비성은 이연화의 주인이야. 쓸때없는 일에 힘을 빼느니 저녁때 뭐 먹을지 고민하는게 더 생산적이잖아? 아무튼 딴에는 적비성에게 고분고분하려고 했던것 뿐인데 그 날카로운 시선을 떠올리니 결국 신경을 거슬리게 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어.
이연화는 적비성을 한번쯤은 만날거라고 막역히 생각했는데 만나고 나니 뭔가 크게 한시름을 덜었어. 이제 두번 다시 적비성을 볼 일은 없겠지. 볼품없는데다가 병약하고 어떤 속셈이 있을지도 모르는 적국에서 온 측비따위 신경 쓸일이 뭐 있겠어. 희한하게 꼬인 인연이지만 그냥 그것뿐인거지. 장수는 죽었고 검은 녹슬고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은 다 지나간 옛 이야기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며 이연화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어. 불여우가 주변을 뱅뱅 돌며 따라다녔어. 피 묻은 소매가 펄럭였지만 이연화는 그저 차를 쏟아 얼룩이 묻은것처럼 무심하게 소매를 걷으며 빗자루를 들었어.
- 밥 뭐 해먹을까, 나물 말린거에다 전에 받은 육포 넣고 죽을 끓일까? 뭐? 고기만 먹고 싶다고? 에헤이 편식은 안좋은거야 불여우 이녀석.
한바탕 흐트러진 마당을 일단 청소하자, 쌀은 좀 아껴야 하니까 좁쌀 넣고 죽을 끓이고 아 장작을 패놨던가? 이 팔로는 당분가 팔에 힘주는 일은 무리일텐데. 물동이는 다 채워놨고...참, 고약 어디다가 뒀지? 빗자루를 들고 느릿하게 바닥을 쓸며 이연화는 불여우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며 머리속으로 해야할 일을 하나하나 꼽아봤어.
이연화의 하루는 여느때와 다르지 않았어.
***
왕부로 돌아온 적비성은 바로 무안을 소환했어.
- 이사ㅇ.. 이연화가 왜 저기에 있지?
- 작년쯤에 려측비께서 연측비가 몸이 좋지 않은것 같은니 시골에서 요양하는것이 좋다고 해서 장원으로 가셨습니다. 왕야께서 허가 하셨습니다.
적비성에게는 이연화 이전에 각려초라는 측비가 하나 있어.각려초는 대장공주의 친손녀로 황족이라 원래는 정왕비로 시집올수 있는 신분이었어. 적비성은 각력초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각력초가 적비성을 한번 보고 한눈에 반해 대장공주와 황제를 졸라 무왕과 혼담을 오고 가고 있었지. 그런데 대장공주의 아들, 즉 각력초의 아버지가 삼황야의 반란에 연류되는 바람에 가문이 서인으로 강등당한거야. 대장공주는 아들이 지은 죄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손녀의 혼사가 물건너 가게 되버렸으니 황제에게 눈물로 읍소했어. 대장공주는 선황제가 각별하게 여기는 누이였고 후덕한 성품에 인망이 높기로 정평이 나 황제는 대장공주의 체면을 봐주었지. 그래서 각려초는 측비로나마 적비성에게 시집갈수 있게 된거지.
아무튼 적비성은 어렴풋이 전에 각려초가 누굴 장원에 보내도 되겠냐고 물었던게 기억이 나긴했어. 집안일은 거의 각려초에게 맡겼기때문에 알아서 하라고 했던것같아. 적비성은 미간을 찡그리며 책상을 톡톡 두들겼어.
- 무안, 이연화에 대해 조사하라.
존명, 무안은 바로 서재를 나섰어. 적비성은 이상이가 살아있길 바랬었지만 이런식일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황제가 명한 정략혼이었기에 여기에 아무 꿍꿍이가 없진 않을거라 생각은 했었어. 하지만 그 당사자가 십년전에 갑자기 사라진 존재일줄이야. 적비성은 뒤에서 수를 부리는걸 제일 경멸했어.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이상이의 정정당당한 풍모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기때문에 지금은 배신감마저 느껴질 정도였어. 적비성의 얼굴은 한층 더 굳어졌어.
이연화라고?
소사를 휘두르며 두려움없이 전장을 날아다녔던 패기만만한 소년장수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한데 적비성의 머릿속에는 두터운 대문 사이로 보이던 말간 얼굴이 계속 떠올랐어.
연화루 비성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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