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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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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게 덱스의 집착때문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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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을 가진 지옥의 사나이, 뉴욕의 미래를 약속하다?
윌슨 그랜트 피스크, 시장 후보 출마설 단독 취재



허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뉴욕 불레틴의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얼마 전 출소한 피스크가 뉴욕 시장으로 출마한다는 소문에, 날이 갈수록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당사자인 피스크는 오늘자 기사 속에서 입후보 의지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지만, 명백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헬스 키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범죄가 그와 관련되어 있었어도 그걸 알 리가 없는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벌써 그를 지지하는, 좋지 않은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가 모호한 태도를 취할수록 그의 겸손함과 자기 반성을 칭찬하는 여론이 강해졌고, 신문과 뉴스에는 매일 그의 소식이 그럴싸하게 실렸다. 너무나 어이없게도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옛 말이 악인인 피스크를 위한 말인냥,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수호하는 자경단들이 흘린 피 위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 대신, 그들의 숙적인 피스크의 이름이 새겨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인정함과 동시에, 아주 교묘하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다. 한 수 더 나아가 범죄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어 어둠의 생태를 아는 자신이, 어쩌면 헬스 키친의 범죄를 뿌리채 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대중에게 알려진 자신의 악행이 여러번 꾸며내진, 극히 순한 맛의 일부라는 점과 그동안 자선가이자 사업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한 덕을 정말 톡톡히 보고 있었다. 기사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를 떠받든다.


윌슨 피스크는 지금 뉴욕에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올곧으며, 능력있는 민중의 심부름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현재 뉴욕 정치판에 대해 비평을 하는 척, 그는 부와 힘을 모두 가진 자신이야말로 시장의 자격이 있다고 어필하고 있다. 화려한 언변과 피스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적절한 상황들을 언론은 열심히 주워 담으며, 함께 시민들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나이, 인종, 성별, 직업, 재산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한, 번영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헌신할 것. 이라는 대목을 읽을 때, 허니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문장인지는 몰라도, 피스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리타분하고 끔찍한 문장이었다. 

허니가 피스크에 대한 기사를 다 읽어갈 때 즈음, 샤워를 마친 덱스가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이미 욕실 안에서 옷까지 꼼꼼히 챙겨입은 그는, 수증기를 두르고 허니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허니가 다시 입맞춤으로 되갚아주면 덱스는 기분 좋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 한 고작 며칠 사이, 시체같던 그의 얼굴에 벌써 생기가 돌고 있었다. 쳐진 채로 굳게 다물려있던 입꼬리가 수시로 올라간다.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여전히 그녀와 스킨쉽을 할 수 있는 사이가 유지된 것에 매일 아침 다행이라 생각한다. 덱스는 그녀가 내린 따뜻한 인스턴트 블랙 커피를 잔에 따르고, 맞은 편에 앉았다. 장소와 둘의 처지만 아니었다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부부같아 보였을 풍경. 커다란 신문에 가려 허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덱스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테이블 밑으로 드러난 다리. 신문의 양 옆을 가볍게 쥔 손. 그녀의 입술로 넘어간 커피가 잔 끝에 남긴 얼룩. 몸짓에 맞춰 바스락거리는 신문지의 마찰 소리. 모든 것이 완벽하다. 허니와 함께하며 제공받는 심리적 안정감은 너무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허니 비라는 여자의 존재 자체는 덱스에게 숨이 막히고 치명적일만큼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었다. 덱스처럼 선천적으로 불안하지만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해야하는 뇌를 가진 사람들이 평생 갈망하는 두 가지의 대조적인 능력. 그걸 모두 가지고 있는 여자가 허니였고, 재주 좋게 자신이 알아봤다고 착각하는 덱스였다. 허니는 세상에 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저 그녀답게 살아왔을 뿐이었고 그런 허니가 우연히 덱스의 취향에 맞아 떨어질 뿐이었지만, 덱스는 완벽한 이 여자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세상에 내려온, 자신의 운명일거라 굳게 믿고 있다. 둘의 사이는 아무도 갈라 놓을 수 없고, 어제처럼 오늘도 자신이 그렇게 만들거라 다짐하며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그녀없는 절망 속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태우며 했던 수 많은 다짐처럼, 허니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착하게 기다리는 덱스에게 허니가 질문을 날렸다. 덱스, 우리는 얼마나 악한 사람들일까? 그 말에 덱스의 몸이 좀 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쏠렸다. 허니의 말을 좀 더 경청해서 들으려는 의도였다. 자신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허니의 집에서 덱스가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때, 둘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중엔 선과 악에 대한 주제도 있었다. 머서 박사가 덱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도덕적 기준을 잡기 힘들 그를 위한 허니의 노력이, 그 곳에 있었다. 현실 세상엔 동화같이 완벽한 권선징악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하게 살며, 선이 승리하길 바라는 이유를 조금씩 배워 나갔다. 허니는 끝까지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그만큼 대단하고 강한 사람들이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근본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추구되었을 그 추상적인 개념들을 다 이해하진 못해도, 주변의 방해에도 흔들림 없이 목표에 매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덱스도 알고 있었다. 그는 허니의 곁에 남고 싶은 만큼,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그녀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정해진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것. 덱스가 평생을 해 왔던 일이었고, 허니는 덱스의 세상 그 자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북극성이 가진, 자신이 따라야 하는 그 생각들을 받아들인다. 그 배움으로 이 순간 갑작스럽게 받은 허니의 질문 역시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덱스가 말했다. 그동안 배운대로 정리한 내용에 자신의 신념을 조금 첨가했다. 그는 세상의 기준에 자신은 자격 미달일 수 있지만, 허니는 완전 무결하고 선한 존재라 답했다. 그 말에 허니의 눈썹이 잠깐 꿈틀댔다. 그녀가 신문을 접고,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감상하던 덱스와 눈을 맞췄다. 

기사를 읽다보니 스스로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는, 거의 무한에 가까워 보이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피스크에게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데어데블같은 자경단이 법을 어기며 도시의 정의를 지키는 것을, 범죄에 빗대고 있었다. 그의 의도와 그가 만들어낸 결과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과정이 잘못되었다며 꼬투리를 잡는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혼란을 일으키는 자가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 뒤로 몸을 감추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괴론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매일 바뀌는 언론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 도시를 해치는 계략과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워진 도시 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이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기에, 이런 중요한 순간에 궤변에 나서서 대신 목소리를 내 주는 자가 없었다. 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정말 외로운 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가 지키고 싶어했던 정의를 이어가고자 FBI에 지원했던 자신은, 이제 원래 가려했던 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 여전히 나는 선한 사람인가? 감히 선함을 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어디까지 더 악해질 수 있을까? 내 앞에 있는  남자와 함께 하려면 결국 어느 편에 서야 하는 것인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여러 잡념들로 인한 것이었다. 뭔가 생각이 정리될만한 답이 나오길 바랐지만, 돌아온 것은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광기에 사로 잡힌 말이었다. 이 남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을 깨달았다. 질문의 끝에는 한 때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살던 남자가 숭배하듯이 자신을 섬기고 있었다. 온갖 법을 어기다 못해 눈 앞에서 동료들이 다치고 죽는 것을 방관하고, 범죄자를 감싸고 도는 자신이어도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자, 허니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피스크도 스스로를 이런 시선으로 보는 것일까? 허니는 그를 향해 웃어보였고, 자신의 답이 맘에 드는 줄 안 덱스는 같이 미소지었다. 허니는 당분간 덱스의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을 모두 받아들이고 교정하기엔 지금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필요에 의해 선을 택하는 덱스와 자신같은 사람에겐 너무 어려운 인생이었다.

허니가 신문을 잘 접어 옆으로 치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덱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춘다. 입술을 열고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는 집요한 혀놀림만 봐도, 말없이 다가와 이런 진한 스킨쉽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덱스는 허니를 기다린 그 잠깐조차도 보상을 받고 싶었고, 허니는 그걸 못 알아차릴만큼 순진한 여자가 아니었다. 남들의 시선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기에 외출을 자제하다보니, 최소한의 생활만 할 수 있는 지루한 모텔 방 안에서 혈기왕성한 성인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긴장을 놓치지 말자던 처음의 다짐은 이제 꽤나 희미해졌다. 덱스는 허니를 바라보기만 해도 열이 올랐고, 허니는 여전히 덱스에게 너그러웠다. 지금처럼 너무 이른 아침시간에는 헬스 키친도 고요하고 게으르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에, 덱스는 욕심을 부렸다. 그에게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된 허니는 언제든 그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지 않는다. 그녀 역시 언젠가부터 그의 충동에 전염된 사람처럼 굴 때가 많아졌다.

덱스의 엄지 손가락이 허니의 몸 중 가장 높게 솟아 오른 곳을 찾아 티셔츠 위로 원을 그리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부드러운 덩어리를 움켜 쥔다. 그녀의 몸 깊숙히 파고 들어갈 때 덱스가 느끼는 만족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덱스는 고통대신 쾌락을 주는 방법만으로, 그녀의 몸 속 제일 깊숙히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이 집요하게 주입하는 쾌락으로 인해 허니가 절정의 지옥에 허덕이는 건 고통으로 치지 않고 있었다. 몸을 섞는 행위로는 성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허니에 대한 소유권을 직접 그녀에게 확인 받는다는 것이 좋았기에, 덱스는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자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역시 허니가 밀어 낸다면 기꺼이 따르겠지만, 공을 들여 열심히 길들인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교활하게 이용하는 부분도 있었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약간의 일탈조차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덱스는, 남녀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동안 터득한 지식과 본능의 조화가 그를 실전에 노련해 보이는 수컷으로 만들었다. 허니와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녀에게 최적화된 남자가 되어간다.

허니의 체온이 서서히 올랐고, 그녀가 반사적으로 다리를 베베 꼬기 시작했다. 자신으로 인한 그녀의 변화에 덱스가 티나지 않게 기뻐하며 그녀를 안아 올리려고 할 때, 조용했던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이 굴며, 허니를 팔로 안아 올려 침대에 내려 놓는데에 집중한다. 그녀의 위에 올라타 애무를 이어가려하자 허니가 그제서야 그를 잠시 진정시켰다. 덱스는 마지못해 전화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간다.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고 뜨는 액정을 성의없이 내려다보며 바로 붉은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여태까지 그가 무시한 내역에는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전화만 수 십건이었다. 아예 전원을 꺼버리기까지 한 덱스는 휴대 전화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바로 그녀가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누구 전화였냐는 허니의 물음에 스팸이라며 거짓으로 대답한다. 그녀가 알기엔 너무 하찮은 사람이었고, 쓸데없는 일이었다. 덱스는 그녀가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샘이 나자, 자신만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입술로 그녀의 입을 틀어 막았다. 




*

 


허니는 곤히 잠든 덱스의 품에서 조심히 빠져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나눈 땀과 체액을 씻어내고 덱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머리를 말렸다. 테이블에는 자신이 편히 잠든 밤동안, 덱스가 무전을 도청하고 적은 메모가 있었다. 여전히 워싱턴과 헬스 키친의 FBI는 협업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암묵적인 지원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날이 지날수록 검문과 순찰은 강화되었다. 시장 선거를 목전에 두고 보안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단순히 그 때문만이 아닌 것을 안다. 허니는 구석에 쌓인 세탁물들을 챙겨 객실을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옷을 최소한으로 갈아입는다 해도, 24시간 덱스와 방에만 틀어박혀 나체로 지낼 수만은 없으니 빨랫감이 생기는건 당연했다. 덱스가 자신은 지성인을 포기하고 전라의 상태로 하루종일 허니와 방 안에 있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농담까지 했을 때, 허니의 귀는 보기 드물게 달아 올랐었다.

허니는 정문이 있는 로비쪽으로 걸어가다 카운터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모텔의 주인과의 대화에 열중하던 그들은 전혀 투숙객처럼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고, 다행히 남자들은 그녀의 수상한 행동을 인지하지 못했다. 편한 사복 차림이었지만 반듯하게 정리한 머리와 각잡힌 제스쳐가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허니는 눈썰미 좋게 두 남자 중 나이가 좀 더 많은 중년의 남성 오른쪽 손목에, 나라에 공을 세우면 국가에서 제공하는 시계가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정말 여행객이나 어쩌면 커플일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도망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한 매사에 예민해져야만 했다. 헬스 키친 변방의 허름한 모텔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의 남자들을 피하라고 본능이 말한다. 그들이 뒤돌아 나가는 것을 확인한 허니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입구에 세워져있는 검은색 밴에 함께 탑승한 남자들. 그들을 실은 밴은 얼마 뒤 소리없이 출발했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자신이 과민반응을 하는 것인진 몰라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커다란 드럼 속에서 돌아가는 세탁물들을 바라보며 허니는 생각에 잠겼다. 검문이 강화되며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목은 진작에 모두 막혔다.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무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덱스에 대한 언급은 아직까지 무전에 없었지만, 자신은 헬스 키친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덱스도 공식적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문제가 조금이라도 될만한 일을 모두 피해야 했다. 허니는 이틀 뒤, 일부 시장 후보들의 연설이 있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 곳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헬스 키친이다. 유력한 차기 시장 후보들의 경호가 삼엄해질 그 때를 노리면, 어쩌면 검문을 통과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덱스와 허니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뉴욕 시장 선거가 끝나기 전,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 도시에는 적으로 삼아야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고, 만일 피스크가 선거에 출마하고 뉴욕 시장이 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허니는 세탁물들을 건조기에 집어넣고, 건조가 끝나기 전 시리얼을 사기 위해 근처 마트에 들렸다. 가끔 예전처럼 덱스에게 따뜻한 요리를 해주고 싶다는 사치스러운 욕심이 요즘 자주 고개를 들었다. 물론 이 가짜 보니 앤 클라이드 놀음이 끝나는 날이 온다면 몰라도, 취사도구가 없는 모텔 방에서 그게 가능할리가 없었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그들을 생각하면 그저 허니와 덱스인 것에 감사해야겠단 실 없는 생각까지 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덱스가 좀 더 선호하는 맛의 시리얼을 찾아 집으며 몸을 돌리던 허니는 곁눈질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방금 모텔 로비에서 봤던 백인 남자 한 명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 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길 바라며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척 자리를 떴다. 그녀의 바람을 비웃듯 남자는 거리를 좁히고 있었고, 허니는 일부러 선반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며 진로에 혼선을 주었다. 천장 모서리의 반사경으로 훔쳐본 남자는 옷깃을 쥐고 입에 가까이 가져가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남자와 허니 모두 상대에 대한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확신을 가졌다. 계속해서 브리핑을 하는 모습과 그가 아까 차에 올라타던 때를 생각하면 최소 일행이 둘 내지 셋 이상은 더 있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허니는 들고 있던 시리얼을 아무 선반에 끼워 두고, 몇 안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출구로 나갔다. 대충 훑은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을 쫓는 사람은 못해도 예닐곱은 되어 보였다. 허니는 마트에서 나오자마자 전력 질주를 해서 세탁소로 들어갔다. 다른 옷을 갈아 입으려했으나 자신이 세탁한 옷이 모두 지금 입은 것과 같은 어두운 색뿐이었다. 머리를 굴리던 허니는 옆 건조기에 이목을 끄는 색의 옷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디 이 옷이 원래 주인이 제일 아끼는 옷이라 속상해하지 않길 바라며, 망설임 없이 다른 사람의 건조대를 열고 화려한 프린팅의 후디와 레깅스를 꺼낸다. 속옷만 남기고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은 후, 이름 모를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상자에 모든 옷들을 쑤셔넣고 세탁소를 나선다. 몇 걸음 내딛자 그새 코앞까지 쫓아온 수상한 남자들이 보였다. 허니는 고개를 좀 더 숙이고 그들 곁을 태연하게 지나갔다. 남자들은 방금까지 허니가 입었던 인상착의를 연신 외치며 두리번 거리고 있었고, 허니는 그대로 발걸음을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객실의 문을 닫고 나서야 모든 긴장이 풀렸고, 그제서야 한 시름 놓았다. 그새 잠에서 깨 허니를 기다리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온 덱스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옷을 입고 거친 숨을 쉬는 허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말 없이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작은 평화가 깨질 시간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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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낮에 허니를 쫓던 남자들이 객실 앞에 서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한 그들은 벽에 2열로 바짝 붙는다. 객실 문을 몇 번 두드리자, 밖에 대기 중인 팀이 객실의 불이 소등되었다는 무전을 한다. 텀을 두고 한 차례 다시 문을 두드렸음에도 인기척이 없자, 낮에 허니와 마주쳤던 남자가 신호를 했다. 그가 내린 신호와 함께 거실 창문의 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외부의 팀은 창으로 연막탄을 던졌고, 수 초가 지난 뒤 내부 팀이 문을 부수고 객실로 진입한다. 연기로 시야가 불확실한 방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적막 속에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일행이 쓰러져 신음했다. 뿌연 시야 속에서 몇 발의 총성과 몸싸움의 소리가 들렸고, 이내 밖으로 뛰쳐 나가는 발소리를 따라 남자들이 밖으로 따라 나갔다. 방에 진입하는 사람이 깊숙하게 들어와야만 볼 수 있는 사각 지대에서, 덱스와 허니는 물에 젖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문 쪽이 진작에 포위된 것을 알았기에, 추격자들의 일부가 문으로 들어오면, 그 허점을 노리고 문으로 나가고자 세운 계획이었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은 포기하고, 허니와 덱스는 혹시 떨어지더라도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면 주차해둔 차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청객들을 제압하며 반대로 달렸다.

모텔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성이 빗발치고 벽과 유리가 깨지며 파편 튀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마주치는 자들을 제압하며 밖으로 빠져나온 허니는,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 쳐졌고 이내 복부로 날아오는 주먹을 팔로 겨우 막았다. 팔의 통증을 버텨내며 제 눈 앞에 있는 거구의 사내 위로 뛰어 올라탔다. 그리고 쥐고 있던 총을 고쳐 잡으며 그의 팔과 다리를 쐈다. 고통에 나뒹구는 남자를 뒤로하자마자 로비와 마트에서 마주쳤던 중년 남자가 허니를 제압했다. 숨을 돌릴 새도 없었던 허니의 손에서 남자는 총을 멀리 날려 보냈고, 그녀의 얼굴을 아스팔트 바닥에 깔아 뭉개려 했다. 허니는 기를 쓰고 몸이 뒤집히지 않도록 버텼다. 남자는 그녀의 위에 올라타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제 아버지뻘 쯔음 되어보였다. 낮까지만 해도 깔끔했던 남자의 머리는 그가 그녀를 잡기 위해 난장판에 얼마나 진심으로 굴렀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성별에 의한 신체적 완력의 차이로 힘 겨루기가 오래될수록 허니가 불리했고,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힘과 노련함에서 밀릴지언정 반응 속도는 좀 더 자신있었던 허니는 무릎을 세워 남자를 있는 힘껏 밀며, 품에 있던 휴대용 칼을 꺼냈다. 전투로 인한 긴장때문에 본능적으로 칼을 꺼내자마자 칼을 쥔 손이 그의 목으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 남자의 얼굴에 죽음을 감지한 당황스러운 기력이 보였고, 그걸 보고 정신이 든 허니는 칼날이 그의 목을 관통하기 전에, 재빨리 손을 돌려 손잡이의 뭉툭한 바닥으로 그의 목을 쳤다. 남자가 컥하고 숨을 토해 내는 소리와 함께 잠시 나가 떨어지자, 허니는 재빨리 칼로 그의 허벅지와 손을 그어 남자를 무력화시켰다. 기력을 다한 그녀는 바로 도망가지 못했고, 무릎 꿇은 채로 끙끙 앓는 중년의 남자와 마주 본 상태로 앉아 있었다. 정확한 소속은 몰라도 이들은 모두 FBI에서 보낸 자들인게 분명했다. 하는 짓이나 전투 방식이 딱 그랬다. 허니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다행히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총에 맞은 거구의 남자는 여전히 끅끅대며 드러 누워 있었고, 중년의 남자는 지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를 제법 흘렸으니 아마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허니는 남자에게 칼을 보이며 다음 번엔 봐주지 않을 것이니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강하게 말했지만 진심으로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포기하길 바랐다. 아마 같은 상사를 두었을 충직한 개로서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알지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덱스와 머리를 맞대던 허니는 고작 한낱 요원인 자신을 잡기 위해 상부의 명령에 따르는 이들을 도저히 해할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이 자신을 사살하란 지시를 받았더라도, 그게 자신의 욕심으로 커져버린 일에 휘말린 자들을 죽일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덱스를 지키기 위해서는 분명 맞서야 했지만 좀 더 온화한 방법이 있다면 최대한 그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다. 더 많은 희생은 자신과 덱스의 숨통을 조일 뿐이었다.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고 그들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가는 것을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덱스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허니는 그들의 공격을 대비하며 덱스에게 부탁을 했다. 만약 자신들을 찾아온 사람들이 FBI 소속이라면 가능한 살생은 피하자고. 허니는 무엇이 불안한지 애꿎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고, 덱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걱정말라 말했다. 그 답에 허니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자 덱스는 희열을 느낀다.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안정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허니의 부탁은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이상한 발상이었지만, 그녀의 부탁을 기꺼이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은 법이고 진리이며,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기 때문에.




*




허니는 제 앞의 두 사내가 전투불능이 되었다고 판단했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일어나려 했다. 동시에 총을 맞은 남자도 고통을 이겨내며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그녀의 뒤에서 소음기에서 발사되는 총알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려던 남자는 다시 힘없이 고꾸라졌고, 바닥에 꾸덕한 혈액이 퍼지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앓던 소리도 내지 않고, 미동조차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허니가 베풀었던 자비가 허무하게 증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등 뒤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를 알아챘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절여진 눈으로 제 뒤를 보고 있는 중년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모래 바닥을 짓밟는, 어울리지 않는 구두 소리. 그 소리가 바로 허니의 등 뒤까지 다가왔고, 가까운 곳에서 다시 소음기를 통한 경쾌한 격발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앞에 있던 중년의 백인 남자가 이마에 구멍을 얻은 채 쓰러진다. 그녀를 향해 부릅 뜬 눈의 초점이, 빠져 나가는 그의 마지막 숨처럼 점점 흐려진다. 등골이 서늘해진 허니는 본능적으로 얼어붙었다.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 올린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허니는 처음에 덱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그가 자신이 위험하다 판단하여 공격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하지만 이마 중앙에서 살짝 벗어난 사격 솜씨와, 아무런 배려없이 거칠게 자신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손길은 그 일리가 없었다. 뒷목에 서늘하게 스치는 가죽 질감으로 상대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시선을 돌리자 제 목덜미를 쥐고 있는 자의 얼굴이 보였다. 낮에 본 저들처럼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 차려 입은 티가 나는 쓰리 피스의 수트에 검은 가죽장갑을 낀 이상한 남자였다. 신경질적이고 피곤해 보이는 눈 위에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긴 남자.


이 남자,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화약 냄새를 덮어버릴 정도로 강한 그의 향수 냄새가 허니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풍기는 향과 옷을 입은 모양새는 제법 우아했으나, 행동과 인상에서 공격적인 섬뜩함이 느껴진다. 분명 초면인데 어디서 본 듯한, 말도 안되는 기분에, 멈췄던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스크가 자신을 협박하며 보여줬던 리스트. 덱스와 함께 일을 벌이는 일행에 대한 신상이 담겼던 그 파일. 거기서 덱스보다 위에 있던 사진 속 남자. 이 남자는 덱스와 같은 조직원이었다.

허니는 침대에 누워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자신을 찾으러 왔다던 덱스의 말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가 근래에 보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덱스는 더 이상 뜻을 함께하는 자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마지막으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그녀의 말에 덱스가 덧붙인 말도 뇌리를 스쳤다. 만약 자신과 관련된 사람인 것 같다면 망설이지 말고 죽이거나 도망치라던 말. 그건 자신 앞에 있는 이 남자는 피해야만 하는 위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허니가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칼을 쥔 손을 돌리려 했으나, 이미 몇 차례의 전투로 힘이 많이 빠진 탓도 있었고, 의도를 간파당한 덕분에 남자가 휘두른 손짓에 칼을 놓쳐버렸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켓 안쪽에서 수상한 주사기를 꺼내더니 그대로 그녀의 목에 꽂아 넣었다. 배럴 안에 있던 액체가 고무 패킹에 밀리며 허니의 몸 속으로 들어갔고,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의식이 천천히 흐려졌다. 허니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자 남자는 팔로 그녀의 몸뚱이를 받쳤다. 목표물 획득, 주변 정리하고 복귀한다. 남자의 마지막 말이 웅웅거리게 들리는 것을 느끼며, 허니는 덱스를 걱정할 새도 없이 눈을 감았다.




*



덱스는 착실하게 제 능력을 백분 활용해 허니의 명을 받들고 있었다. 힘줄과 인대를 끊어 그들이 일어나거나 반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적들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무차별로 발포해도 소용 없었다. 사격에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이상, 모든 상황에서 덱스는 항상 그들보다 유리했다. 건물을 나와 밖에서 자신의 여자를 찾고 있던 그 때, 엄청난 폭음과 함께 모텔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자신이 무력화시킨 남자들이 산채로 타고 있을 터였다. 덱스는 몸에 불이 붙은 채로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자들과, 그들의 불을 꺼주기 위해 달라붙는 일행을 소총으로 연사하고 자리를 뜨는 자들을 목격했다. 불이 번지는 소리를 제외하고, 지나치게 조용해진 주변을 이상히 여긴 덱스는, 자신이 허니의 명대로 쌓은 모래성을 무참히 무너뜨리고 떠나는 그 괴한들을 쫓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뒷통수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두운 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택배 회사 로고가 그려진 하얀 밴에 올라탔다. 그들 다음으로 차에 올라타는 이의 얼굴을 본 덱스의 표정이 사납게 굳기 시작했다. 전혀 반가울 리 없는 사람이 또렷히 보인다. 덱스는 제 눈 앞에 있는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 곳에 M이 있었고, 그의 품에는 의식이 없어 보이는 허니가 안겨있었다. 덱스가 재빨리 총을 쐈지만, 마지막으로 타려던 남자만 뒷통수가 뚫린 채로 낙오되고 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방탄인 차체는 덱스가 쏜 총알들을 튕겨냈고, 에어리스 타이어 역시 총알을 정확히 맞아도 버텨내며 유유히 굴러갔다. 덱스가 전속력으로 차를 따라 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허니를 눈 앞에서 뺏긴 수치심과 분노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꺼놨던 휴대 전화를 킨다. 휴대전화가 꺼져있는 동안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얼마나 더 왔었는지 알림이 떴고, 아무것도 없던 문자 수신함에 갑자기 1이 떴다. 여전히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떠 있지만 덱스는 이 모든 연락이 한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안다. 문자에는 어딘가의 주소와 함께 몇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


내일 이 시간, 무기 없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올 것.


덱스는 여태까지 M이 집요하게 자신과 연락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누군가와 한 거래가, 아직 유효하다는 의미였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죽음. 지금까지 덱스가 손을 더럽히며 지탱했던 세상의 칼날이, 이젠 그를 향했다. 그들을 등진 이후에도 이 불합리한 대우에 대한 응징을 하고 싶었지만, 이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생긴 덱스는 참고 또 참았다. 누구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처한다면 이렇게 행동했으리라. 자신만의 북극성은 여기 있었고, 어렵게 얻은 그 곁을 떠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뻔뻔하게 제 발로 무덤 앞까지 걸어오라고 말한다. 덱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그 자리를 광기에 가까운 폭력성와 분노가 채운다. 이성을 잃은 덱스는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감정들에 먹혀 들어갔다. 눈 앞에서 북극성을 뺏겼다는 사실에, 살기 가득한 광기가 그들뿐만아니라,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도 향한다. 덱스는 액정이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꽉 쥔 주먹때문에 바짝 자른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 피가 맺혔고, 굳게 다문 입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허니를 무사히 되찾은 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모든 자들은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만 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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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은 이미 여러번 들어 익숙한 통화 거부 안내 음성을 들으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다수를 위해 바치려던 제물만이 잠시나마 자유를 되찾았다. 여전히 자신과 일행에게 이빨을 드러낸 악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것에게 잡아 먹히지 않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미 손에서 멀리 떠난 덱스를 잡아와 직접 목을 비틀어 바쳐야만 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나마 같은 목표를 바라봤던 동료로서, 여러번의 오판으로 그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좀 더 신사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M은 그런 이유로 시간이 날 때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제 발로 자신을 찾아와 벤자민 포인덱스터 단 한 명의 희생으로 모두가 사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깊은 속을 알 리가 없는 이 고집불통은 계속해서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M에게는 이제 덱스가 죽지 않는다는 경우의 수가 없었기에, 제안을 회피하며 반감을 표시하는 그를 어리석다 생각하고 있었다. 덱스가 얼마나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가 마음에 품은 여자도 보통의 인물은 아니었기에, 자신이 그를 쫓는 것처럼 그녀 역시 쫓는 자들이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운 좋게 포착한 M은 과감하게 계획을 변경했다. 그들이 멈추는 곳에 그의 여자가 있을 것이고, 그 옆에 덱스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외지의 사냥꾼들이 길을 닦으며 그들을 추적하고 있으니 그 뒤를 따라가기만하면 됐다. 올가미는 점점 조여지고 있었고, 꼬리가 밟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M은 쓸데없는 힘 낭비 대신,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다 덱스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강제로 그를 만나야 했다.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 그를 밖으로 끄집어내기에는, 그의 여자만큼 좋은 미끼가 없었다.

이제 M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피스크는 그의 계획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M은 아무도 노리지 못했던 눈엣가시같던 두 사람을 곧 제 앞에 대령해 줄 복덩이였다. 피스크는 덱스를 죽이고 싶어하는 만큼이나 허니에게도 진심이었다. 결국 자신이 뿌린 씨앗을 거둔 것 뿐인데 왜 그리 그녀에게 노여워하는 것인지, M은 이해하지 못했다. M은 피스크에게 적당히 어울려 주었고, 시장 놀음에 진심인 피스크가 M을 믿고 전적으로 그에게 덱스에 관한 모든 것을 일임했을 때, 비로소 그는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피스크는 M이 자신의 명을 수행할 때 마다 확실하게 보상을 제공했다. 그리고 벤자민 포인덱스터와 허니 비를 제거하면 더한 보상을 제공하겠다 약속한다. 차기 시장이 될 사람이 할 말치고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적절치 못했지만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다. 

M은 피스크와 함께 차로 이동하며 다음 지시를 받았다. 피스크는 얼마 뒤 있을 후보 연설에서 그의 경쟁자 중 가장 당선이 유력한 후보를 덱스의 손을 빌려 제거하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선 덱스가 필요했다. 그는 건방진 포인덱스터를 최대한 외롭고 굴복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지우고 싶어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존재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 줄 것이다. 덱스의 탈옥을 밝히면 추적이 쉬워지고 그를 궁지에 몰기 용이했겠지만, 피스크는 그러지 않았다. 포인덱스터는 헬스 키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어가야만 한다. 증오하는 자신을 위해 경쟁자를 죽이게 되겠지만 암살 이유는 볼품없는 그에 걸맞게 짜여질 것이다. 남의 인정을 갈망하지만 얻을 능력이 없고, 나약하게 평생을 살아온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 흉포하고 한심한 범죄자로 남게 될 것이고, 죽은 뒤엔 모두가 그의 무덤에 침을 뱉을 것이다. 성실하게 징역을 마친 자신과 대조되는 희대의 사이코패스 악당. 그것이야말로 포인덱스터에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탈옥이 자신을 시장의 자리에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들어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윌슨 피스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적이고, 심리전에 능한 인물이었다. 출마를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며, 언론 공작을 통해 이미지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구축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민들이 자신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입후보 등록을 최대한 천천히 미루고 있었다. 다급해진 인간에겐 눈 앞의 것이 배로 좋아 보이게 되는 원리와 비슷했다. 숨조차 계산적으로 쉴 것 같은 이 무자비한 미치광이 폭군은, 이제 시간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고 하고 있었다. 수족들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손에 피를 묻히고 있을 때, 피스크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우아하게 광대놀음을 즐긴다. 피날레가 얼마 남지 않았다.

M이 계획대로 덱스의 약점을 얻었으니, 단 한 조각만 맞추면 피스크를 위한 퍼즐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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