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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6 08:55



요즘 왜 이렇게 그의 뒤를 쫓는 일이 잦은 걸까?
과거에 나를 쫓아오게 만들었던 벌을 받는 걸까?
이연화는 정신없이 날아가면서도 한숨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이었음.
적비성과는 분명 호각의 실력일 텐데, 사람 하나를 들고도 어찌나 무서운 기세로 숲을 뚫고 가는지 좀체 붙잡을 수가 없었음.



단순해보이는 사건이라서인지 오히려 이연화와 방다병의 수사는 더뎠어. 
유씨 집안도 결백을 보장할 수는 없는데 두 집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가며 살펴보기 힘든 것도 문제였지.
아무튼 두 사람의 노력은 다 소용이 없게 되고 말았어.
적비성이 떠나고 바로 다음 날 오후.
이연화와 방다병은 큰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의 발자취에 의문인 부분이 생겨서 표국으로 돌아왔음.
대문을 넘으면 나타나는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총표두의 둘째 아들이 보였음. 그는 연못가의 바위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 때 갑자기 적비성이 날아오더니 그의 앞에 뛰어내렸음.  
청년은 눈을 깜박거리며 바로 코앞까지 밀려온 재앙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음. 그러나 적비성이 기세등등하게 손을 뻗어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피하려고 했음.
꽤나 기민한 동작이라고 이연화가 생각하는 찰나, 첫타보다 더 빠르고 깊게 뻗어진 적비성의 손이 청년의 멱살을 휘어잡는 동시에 다른 주먹을 명치에 꽂아넣었음.
순식간에 벌어진 흉행에 그 편을 바라보던 표국 사람들이 숨을 내뱉으며 일어서거나 무기를 쥐었음.
그러나 적비성의 행동은 거침이 없는데다 매우 빠르기도 하여, 그대로 표두의 아들을 들쳐메고 왔던 경로를 되돌아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을 때까지 아무도 손을 쓸 수가 없었음.
“뭐야, 미쳤어?!”
아연한 방다병이 부르짖었지만 그것도 적비성이 사라지고 일각은 지난 뒤였지.
이연화도 놀란 눈으로 이미 그가 사라지고 없는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어.
“방소보, 내가 따라갈테니까 너는 여기에 남아서 뒤처리 좀 하고 있어.”
“뭐, 뭔 처리?!”
말을 마치자마자 이연화도 적비성과 마찬가지로 훌훌 뛰어올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혼자 남은 방다병이 입을 벌리며 양 팔을 들어올렸음.
그가 돌아보자 표국 사람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몰려드는데 손에 든 갖가지 무기들이 햇빛에 반사되는 빛이 무수하게 번쩍거리며 왁왁거리겠지.
“야... 이연화...!!!”
비명같은 방다병의 외침이 쨍쨍한 하늘 아래 울려퍼졌음.



삽시간에 마을을 건너뛰어 산으로 이어지는 숲에 뛰어든 적비성은 이연화가 몇 번 불러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경공을 펼치며 날아갔음.
숲에 들어간 후 밥 한공기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갔을까. 
차츰차츰 거리를 좁혀 적당히 가까워졌다고 판단했을 때 이연화가 검기를 날렸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적비성은 유리한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몸을 굽혀 검기를 피하다가 균형을 잃고 지상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음.

표국의 둘째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몸부림을 쳤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딴판으로 두 손을 맹호처럼 휘두르며 무공을 펼치는데,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행동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뿐이었지.
적비성이 인정사정없이 장을 휘두르자 곧바로 어깨가 탈골이 되어버린 청년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올렸음.
“아비!!”
“이 놈이 범인이다!”
땅으로 내려와 달려오며 나무라듯 외치는 이연화에게, 적비성이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음. 


표국을 처음 방문했을때, 적비성이 비틀거리는 아들들을 부축해줬던 건 결코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음.
일찍부터 적비성은 그들의 무공을 가늠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그때 좋은 기회가 오자 놓치지 않은 것뿐이었어.
둘째 아들의 허리를 받쳐주던 짧은 순간에 적비성은 작게 내력을 주입하며 밀쳤음. 본디 내력은 근육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자극을 느끼면 자동적인 반응을 하게 되어 있었어. 그런데 그의 몸 속에 내재한 기운이 상당한 탄력을 지니고 있는 걸 알아보았지.
둘째 아들은 양부의 집에서 겉돌며 자신을 나타내기를 싫어했음. 그래서 수련도 표국에서는 동떨어진 곳에서 혼자 연마하며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어. 이 때도 무공이 들통나면 큰일이겠다 싶어 약한 척을 하려고 큰형이 부딪혀 오자 무지렁이처럼 비틀거렸음. 그리고 적비성이 가볍게 손을 대어 도와주자 잘 해치웠다고 생각했지.
그로서는 이만한 접촉으로 실력을 꿰뚫어볼 수 있는 고수가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임.
물론 그것만으로 그를 의심할 순 없겠지만, 아무튼 머릿속이 분노로 얼룩져서 수사에도 끼어들지 않고 혼자 궁리하던 적비성은 이윽고 표국을 조사해야겠다는 말에 나서서 유씨의 마을로 이동해 감. 
금원맹은 갑자기 백여명의 고수들을 불러대는 맹주의 명에도 사력을 다해 응했음. 한나절도 못되어 맹의 고수들이 유마을의 표국에서 며칠간 보내어진 짐들을 동시에 추적하기 시작했음.
“어떤 화물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수레 두 대가 갈라져서 다른 길로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종과 일가를 찾아냈다는 전갈을 받았지.”
둘째 아들은 빠진 어깨를 늘어뜨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적비성을 노려보고 있었음. 차츰차츰 목이 죄어들어오는 듯 자신의 행적이 밝혀지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두려움은 옅어지는 듯한 모습이었음.
이연화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수사가 어렴풋이 둘째아들의 부근에 안개를 드리우는 것만은 느끼고 있던 참이었어. 
그래서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물었음.
“그 소저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도... 당신이었나?”
“그래!”
둘째 아들이 표독하게 이를 드러내며 소리질렀음.
“그리고 그녀를 죽였어?”
“그래, 나다! 내가 죽였어!”
“어째서지?”
“하하, 하하!”
이연화가 묻자, 그가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웃었음. 진땀을 흐르게 하는 어깨의 통증도 일시에 잊은 듯했음.
흐트러진 머리가 땀에 젖어 달라붙은 형상으로 눈알을 붉히며 웃자, 갑자기 미친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어.
“우린 진작부터 만났고, 사랑했다고!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형님과 혼인을 시킨다는거야! 그게 말이 돼? 두 집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고! 단지 신분을 보고 매파가 연결시켜준 것뿐인데... 왜 하필 형이고, 그녀였던 거냐고!!”
자포자기한 그는 오히려 공감을 구하고 싶은 듯 낱낱이 털어놓았음. 사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이었으니, 이렇게라도 남에게 털어놓게 된 것이 어쩌면 푸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어. 
그렇지만...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다고 해도, 연인을 살해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
둘째 아들이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음.
“나는 그녀에게 멀리 도망가자고 했어! 하지만 그녀는 죽어도 형님과 결혼하겠다는거야! 부친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다고!”
“그래서, 그녀를... 죽였다고?”
“그녀는 이미 내 것이 되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녀가 몸을 더럽히는 걸 막아야 했어!”
어처구니가 없는 헛소리, 그러나 피가 뿜어져나오는 듯 대단한 광기 앞에서 이연화는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음.
하지만 그의 외침에 시시각각 눈빛의 어둠이 짙어가던 적비성의 눈에서 불꽃이 튀자, 이연화는 막 갈고리처럼 만든 손을 청년에게 뻗으려 하는 움직임을 단호하게 막아내었음.
“아비, 그만!”
적비성은 마치 둘째 아들과 똑같이 미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았음. 그러나 이연화가 막아서자 손을 물리며 외쳤어.
“비켜라, 이상이!”
이연화는 끈질기게 그의 앞을 막아섰음.
“그래 그가 범인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서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거야!”
“늑대굴에 처넣고 뜯어먹히는 꼴을 봐야겠다!!”
적비성이 으르렁대며 끝내 손을 멈추지 않자, 이연화는 건성으로 상대해선 안 되겠다 싶어 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음.
둘째 아들은 부상에 더해 심리적인 충격을 받아 더 버티지 못하겠는지 무릎을 꿇으며 축 늘어져버렸음. 이연화는 한결같이 그 앞을 방어하며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어. 적비성이 도를 뽑지 않으므로 이연화도 검을 쓰지는 않았음. 두 사람은 다만 맨손으로 내력을 뿌리고 공격을 미끄러뜨리며 치열하게 다투었음.
적비성은 이연화를 상대로 살수를 쓸 수는 없는데다, 몹시 흥분해 있었음. 어떤 때에도 냉철함을 잃어본 적 없는 그에게는 생소하고 절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덕분에 작은 틈을 잡게 되자, 이연화는 가차없이 손을 써서 그를 밀쳐버렸음.
쿵 소리를 내면서 적비성의 등이 나무에 부딪혔고, 곧장 그의 목줄기를 눌러 압박한 이연화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꾸짖었음.
“아비, 이미 세간에 알려진 사건이야.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
적비성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하는 이연화를 내려다보면서 씨근거렸음. 반격할 여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차츰 숨을 가라앉혔음.
“여종은 어디에 있어?”
이연화가 묻자, 겨우 이성이 돌아온 적비성이 낮게 말했음.
“이쪽으로 압송해 오라고 일렀다. 산을 넘어 와야 하니 시간이 걸릴 거야.”





겨우 표국으로 돌아온 이연화는 심각한 중에도 웃음을 터뜨릴 뻔했음.
한참 전에 적비성이 불을 놓은 광장의 중앙에는 방다병이 검을 끼고 앉아 있었고, 구름같은 장정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음.
이연화와 둘째아들을 결박하여 들쳐멘 적비성이 나타나자, 방다병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경계와 인상은 더욱 험악해졌음.
그러나 방다병은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벌떡 일어나며, 주변은 안중에도 없이 삿대질을 하며 뛰쳐나왔음.
“야, 너희 장난해?!”
이연화는 자신을 스쳐 적비성에게 검집을 들이대며 소리를 지르는 방다병을 붙잡아 당겼음.
“자자, 잘 데려왔어. 나중에 얘기해, 응?”
하지만 그런 두루뭉술한 말로 분이 가라앉을 리 없어, 방다병이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뜨렸음.
“이연화. 사람들이 닭쫓는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가지 못하게 막느라고 네가 전 사고문 문주 이상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나는 이때까지 인질이 되어서 앉아 있었다고!”
“아비의 정체도 말했어?”
곧장 이 편으로 오고 있는 총표두 여씨를 곁눈질하며 이연화가 낮고 빠르게 물었음.
“내가 바보야? 그랬다간 무덤의 조상들까지 깨워서 쫓아가게!”
“잘했어, 잘했어.”
총표두는 갑자기 반 시체가 되어버린 아들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지만, 일단 스스로를 억누르고 이연화를 향해 물었음.
“당신이 정말로 상이태검 이상이요?”
이연화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모으며 대답했음.
“그렇습니다.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주변이 번거로워질 것 같아 숨긴 것뿐이니, 표두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표두는 무척이나 복잡한 얼굴로 그들을 훑어보며 입을 다물었음.
이상이의 실력을 보진 못했지만, 방다병이 함께 있는데다 일전에 적비성의 기괴한 출수를 본 적도 있어서 의심하기 어려웠지.
“그래서, 이게 무슨 짓인지 설명해 주시겠소?”
‘무슨 짓’이라는 말에 그의 양미간이 찌푸려지며 공격적인 긴장감이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온 표국 사람들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음.
하지만 이연화는 온화하게 늘어뜨린 양손을 맞잡고 말했음.
“그가 바로 유소저를 죽인 범인입니다. 모든 내막은 제가 당신에게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부탁입니다.”




이후로 세 사람은 약 열흘이나 두 마을을 오가며 사건을 마무리했음. 단속을 해도 소용이 없어 양쪽의 마을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시끄러워졌음.
일은 주로 유씨 마을의 관아에서 이루어졌음. 거기서 백천원 사람들이 다소 관여하며 사건을 정리했는데 범인이 잡혔고 순순히 자백을 했기 때문에 백천원 사람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되었어.

표두의 둘째 아들은 몇 달 전 우연히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온 유소저를 보고 반해서 눈이 맞았음.
순진했던 소녀는 성격이 남다르며 섬세한 둘째 아들에게 쉽게 반해 몸까지 주어버리고 말았지.
그런데 미처 둘째 아들이 부친에게 이 이야기를 실토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그의 형과 유소저의 혼사가 정해졌음.
그의 말대로 두 집안은 유달리 친했던 것도 아니고 매파가 어울리는 집안을 알아보다가 성사된 혼사라 그야말로 악연의 우연이었지.
양측 다 이름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깊은 친분이 없는 혼사라 해도 되물린다는게 보통 일은 아니었음. 심지어 여자가 혼사가 오갔던 사람의 동생과 정을 통했다고 하면 두 집안의 명예가 한꺼번에 파탄이 날 일이었지.
소저는 어쩔 줄을 몰랐지만 결국 시집을 가기로 마음먹었어. 어느 쪽도 괴롭지만 엄한 질서 안에서 자라온 그녀는 차마 집안에 누를 끼칠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음. 남자가 함께 도망치자고 했지만 그것도 그녀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 
여자에게 거절을 당하자, 둘째 아들은 끝내 그녀가 형님과 혼인하는 꼴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미쳐서 그만 한밤중에 여자의 방에 잠입하여 찔러죽이고 말았음.
남몰래 무공을 쌓았던 그가 여자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둘 사이를 유일하게 알고 있던 여자의 몸종이 문제였음.
귀한 집 여식을 항시 감시하듯 따라다녀야 하는 몸종은 족쇄도 될 수 있고 조력자도 될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순종적인 어린 소녀였기 때문에 주인이 시키는대로 다 해 왔었어. 
남자는 사랑에 미쳐서 살인을 했지만 근본이 흉악한 자는 아니었던지라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몸종을 살해할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음. 그래서 그는 뒤늦게 몸종을 빼내고 그녀와 가족에게 단단히 입막음을 시킨 다음 표국이 나르는 짐수레에 숨겨서 도주시키기에 이르렀음.




***




원래 살인사건을 조사한다는게 흥미로울 순 있어도 즐거운 일은 아님.
특히 이번 사건은 이래저래 불쾌했음.
둘째 아들의 죄를 밝히고 유씨 마을의 관아로 보낸 뒤 세 사람은 연화루가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음.
이연화는 분주하게 절차를 밟는 방다병을 따라다니며 재미없는 일에 손을 빌려 주었음. 그리고 밤이 될때까지 적비성은 한 번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었음.
이연화가 여관의 별채로 돌아와 방다병을 대신하여 백천원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마침내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도 요지부동이었어.
혹시나 하고 이연화가 침상으로 들어가는 시늉까지 했지만 적비성은 몇 시진 내내 찻주전자와 찻잔을 장식품처럼 얹어 놓은 다탁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지.
천천히 되돌아온 이연화가 적비성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음.
“아비.”
마치 연공이라도 하는 것처럼 꼼짝도 않던 몸이 이연화의 음성을 듣고 감촉을 느끼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처럼 움직였음.
커다란 손이 생각에 잠긴 듯 이연화의 손을 더듬었어. 그러다 별안간 확 당겨서 품 안으로 끌어갔음.
이연화가 휘청하며 적비성의 다리 위에 올라앉자, 적비성이 얼굴을 그의 목에 푹 파묻고 무거운 숨을 흘렸음.
이연화가 그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음.
“너는, 마구 날뛰며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었잖아.”
“......”
“대체 왜 그래?”
잠시의 정적 후. 나직한 목소리가 이연화의 목덜미 아래에서 흘러나왔음.
“용서할 수 없어.”
“...?”
“누군가 너를 해친다면. 설령 그것이 나라고 해도 용서 못한다.”
고개를 들자, 적비성의 눈빛이 이연화 너머의 무엇을 쏘아보는 듯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음.
이연화가 말했음.
“나를 죽이는 상상이라도 한 거야?”
멈칫한 적비성이 낮게 말했음.
“나는 실제로 너를 죽이려고 했었다.”
이연화는 그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음.
과거에 적비성은 여러번 이연화에게 싸움을 걸거나 위협도 했지만, 원한이나 살심을 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음. 그래서인지 이연화는 적비성이 말하는 일을 바로 기억해낼 수가 없었지.
“아...”
그가 뭘 가리키는건지 겨우 짚어낸 이연화가 탄성을 흘리자 적비성이 어둑한 말투로 말을 이었음.
“그 때는. 다시 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연화가 훗 하고 웃었음.
그는 가볍게 적비성을 떨치고 일어나 뒷짐을 지고 섰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
활짝 열린 커다란 창을 통해 미지근한 바람이 들이쳤음. 
“나는...”
적비성은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람이 휘감는 이연화의 모습을 바라보았음.
“나는 몰랐다.”
동해대전에서 맞섰던 상대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올랐음. 기억이 흐려서가 아니라, 그 때는 달빛이 옅었기 때문에 귀신처럼 움직이는 이상이의 모습이 더욱 환영에 가깝게 보였었지.
하지만 오늘의 달은 하얀 옷을 입은 이연화의 모습을 화사하게 빛내고 있었어.
“너와 싸워 이기고 싶은 게 아니라. 너의 모습을 보고, 흩뿌리는 너의 존재를 이 손으로 맞받아 느끼고 싶었던 거라는 걸.”
순간 이연화는 화틋하게 귀 밑을 달구는 열을 느꼈어.
분명 저 마음 속에는 부드럽거나 애틋한 감정이라곤 없을 테지. 입에서 나오는대로, 거친 가슴에서 솟는대로 정직하게 내뱉아버리는 것일 터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달콤한 고백보다도 백배는 민망한 느낌이었어.
“...그래서 사과하는 거야?”
거북해진 이연화가 슬쩍 얼버무리려고 하자 적비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꾸했음.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너에게 사과해야 하나?”
이연화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어.
다시 그에게 다가간 이연화가 그리듯이 적비성의 옆얼굴을 쓰다듬었음.
“...아니.”
이연화는 적비성의 머리를 안고, 꽤 오랫동안 가까이하지 못했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음. 생전 처음 당하는 번뇌 중에도 올곧은 눈빛, 굳게 아물린 입술로 시선을 흘리다가는.
그대로 몸을 굽혀 보드랍게 입을 맞추었음.
그런 다음에는 드디어 적비성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돌아와 있겠지.
“이상이. 싸우자.”
그 입에서 그야말로 적비성다운 말이 튀어나오자, 이연화가 야릇한 눈웃음을 치며 도발하듯 말했음.
“오? 이젠 싸울 수 있다는 거야?”
두 사람은 몸이 맞닿은 채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음. 그리고는 한순간 답을 주고받은 듯 동시에 땅을 차고 창 밖으로 날아올랐음.
별채의 바깥은 담벼락에 면해 있었고, 그 밖은 고목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숲이었어. 
단숨에 담을 넘어 숲으로 뛰어들어간 두 사람이 곧장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음.
둘다 맨손이었지만 적비성의 소매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은 바위처럼 크고 웅장했으며, 이연화의 손끝으로 뿌려지는 내력은 마치 검에서 뻗어나간 검기처럼 길고 매서웠음.
적비성의 비풍백양이 광풍을 일으키면 이연화의 상이태검은 팔랑거리는 꽃잎처럼 휘몰아치며 파고들었어.
이연화가 펼치는 날카로운 검기를 적비성은 일일이 다 받아내며 하나도 허공에 흘리지 않았지.
마치 꾀어내고 피하고, 또 피하는 듯 되돌아오는 공방이 끊임없이 이어졌음.
적비성이 일으키는 광풍은 이연화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죄다 지배하려는 것 같았음. 그 속에서 이연화는 자유롭게 춤을 추며 서서히 끌려들어가는 듯했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천천히 오르는 긴장감을 느끼게 했고, 마침내 관계속에서 절정에 이를 때 같은 고점에 도달하는 순간에는 달빛이 새파랗게 밝히는 공간이 그만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음.
그 때, 적비성이 손을 뻗어왔음. 
철갑처럼 두르고 있던 내력도 벗어버렸고 교묘한 초술도 없는, 단순히 부드럽게 내밀어진 손이었어. 이연화가 반항 없이 그 손을 잡고 단단한 팔에 감겨 들어가자, 적비성은 이연화를 안고 되돌아와 순식간에 침상까지 데려갔음.
굉장한 공방을 주고받은 뒤였지만 침상 위로 쓰러진 두 사람의 육신은 다른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음.
이연화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적비성을 바라보기만 했지만 눈빛이 아주 깊은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어.
“오늘은. 평소와 달라 보인다. 이상이.”
그의 말에 이연화가 적비성의 귀를 잡고 천천히 잡아당겼음.
웃으며 다가온 적비성에게 이연화가 속삭였어.
“나 엄청... 너를 먹고 싶어.”




비성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