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 애니
https://hygall.com/604006919
view 623
2024.09.08 16:25
모양과 능력이 알려진 악마의 열매는 극히 일부분이다. 대다수 악마의 열매는 먹은 직후 능력이 나타나야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하비하비 열매를 원하는 이들의 노림수는 조금 달랐다.
터치 한번으로 한 사람을 완전히 세상에서 지운다는 것과 손댄 이를 종으로 부릴 수도 있다는 점은 굉장한 능력이지만 하비하비 열매에는 그만한 대가도 따랐다. 하나는 능력자가 어떤 육체적 강함도 얻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을 먹은 순간 신체 나이가 멈춘다는 것. 특히 두번째 조건은 열매의 생김새가 알려지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적당한 나이 선택을 불가하게 하니 확실한 핸디캡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타파할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번째는 능력자가 죽은 장소 주변에서 악마의 열매가 재생성 된다는 얘기를 따른다. 이는 해당 능력자를 죽인 뒤 열매를 찾는 방법이지만 불확실성이 크며 빼앗길 위험도 무시 못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능력자를 죽이고 그 육신을 먹는다. 식인은 매우 엽기적인 방법이지만 뒷세계에서는 이런식으로 악마의 열매 능력을 빼앗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돌았다. 또한 이 두번째 방법은 열매가 생기기를 기다린다거나 다른 경쟁자에게 빼앗긴다는 위험도 거의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다 정론은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소문이란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볼만 한 가치는 있지 않던가. 악마의 열매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각기 그만한 욕망이 있는 법이니 이를 위해 못할 것도 없음이다. 일례로 도피 또한 과거 수술수술 열매를 얻고자 공국 규모에 준하는 인명피해를 냈지 않던가. 때문에 마리조아의 밀정도 열매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으리라. 다만 문제라면 사선에서 구사일생한 청년의 조바심이 일을 그르쳤다는 것일까. 코끼리 장난감으로 변한 뒤 행해진 강제노역과 사람들에게 당할 멸시,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청년은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였으나 몸은 전혀 의지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보다 더한 절망이 어디 있을까. 장난감으로 변한 몸도 맞으면 아팠고 피로감은 느꼈다. 하지만 이미 종속된 장난감은 마지막 한방울의 기력까지 짜내 출근, 노동, 퇴근을 반복했다. 단 하루 쉬는 날도 없이 매일매일을 노예보다 못한 취급 받으면서.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장난감이 진짜 살아있음을 몰랐다. 그저 돈키호테 왕이 국민을 위해 장난감이 움직이도록 수를 쓴 것이라 생각할 뿐. 실제 10월 말에 열리는 행사에서 이 장난감들은 다트나 사격의 과녁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이를 전부 지켜본 청년은 절대 두번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 절박함으로 청년은 드레스로자 지부에서 마리조아와 내통하던 해군을 찾기 무섭게 매달린 거였다.
‘악마! 악마가 있어! 하비하비 열매 능력자가ㅡ!’
‘이봐! 당신 뭐야?!’
‘그 애는 악마! 아니, 진짜 악마는 돈키호테 왕이야! 여긴 악의 소굴이라고! 제발 살려줘!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신 장난감으로는… 으흐흑!’
당시 청년에게 붙잡힌 해군도 내통자라는 정체는 비밀이었다. 이 모든 건 은밀함이 생명이건만 거지꼴을 하고 침입한 청년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한동안 소식이 없기에 정체를 들켜 제거된 줄로 알았던 밀정의 등장은 이렇듯 요란스러웠다. 덕분에 하비하비 열매에 관한 얘기가 윗선에까지 들어가고 이는 결국 드레스로자 해군 지부에서 진위여부를 밝히기로 했다. 본래라면 사보가 처리했어야 할 일이다. 신문에 에이스의 바다열차 습격 사건만 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마물 신체와 하비하비 열매의 수습이 마리조아와 해군측으로 갈리게 되고 늙은 왕은 둘 다 손에 쥘 수 있던 기회를 놓친 걸 용서치 않았다. 청년이 나름 큰 공을 세우고 다시 사지로 내몰린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음이다.
“야, 너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으읍! 으으읍!”
로우의 폭주로 생긴 틈에 납치된 청년을 최종적으로 궁에서 빼낸 건 톤타타족이었다. 앞서 슈거는 지하 선착장 수로와 연결된 바다를 통해 왕의 대지를 빠져나왔는데 이를 도운 건 워커였다. 악마의 열매 능력자는 바닷속에서 꼼짝할 수 없었으니 몸을 끈으로 연결한 워커가 잠영으로 슈거를 수로 끝까지 데려간 거였다. 그런 뒤 수로 밖을 돌아나와 육로로 꽃밭까지 직행, 이후에는 전용 통로를 이용해 그린비트 지하에 위치한 톤타타족 왕국에 도착했으니 슈거는 상황이 일단락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약 반나절만에 소인국의 왕이나 진배없는 위치로 군림했다. 슈거에게 천성이 순박한 톤타타족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너 전에 진짜 도망 잘 가더라? 아주 잽싸던데?”
레오 무리에게 붙잡혀 톤타타족 왕국까지 실려온 청년은 풀밭에 대자로 뻗어 묶여 있었다. 땅에 박힌 말뚝과 연결된 끈이 청년의 몸을 칭칭 감았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그가 발치에 등장한 소녀를 보고 겁에 질려 덜덜 떨어댔다. 팔짱을 낀 슈거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장난감으로 변했을 때는 굼뱅이가 따로없었는데 말이야. 이제 보니 그게 다 꾀부린 거였단 소리지?”
“으으읍! 읍!”
“으헉!”
슈거가 손을 풀어 한쪽 장갑을 빼든 순간이었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청년과 주변에 유일하게 자리한 워커의 신음이 흐른다. 워커는 다른 앞으로 벌어질 일의 끔찍함을 토로하며 진작 동족들을 피신시킨 참이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참상을 겪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하다면서. 이때 슈거는 눈물콧물 짜며 호소하던 워커와 그에 동화된 동족들을 보며 꼴깝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속내가 여실했던 시선의 냉기는 도리어 다른 소인족들이 워커의 말을 믿는데 쐐기를 박았다지만. 그래도 덕분에 톤타타족 왕국의 너른 풀밭 공터에는 슈거와 잡혀온 청년, 워커 이 셋뿐이었다. 이때 청년은 장갑을 벗어내리는 소녀를 보며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이박 삼일간의 항해 일정이 끝나고 플라밍고 호가 섬에 정박할 때가 왔다. 이곳은 각종 피부질환을 치료해주는 온천이 유명한 관광 섬으로 바다열차의 보편적인 종착지였다. 온천의 치료 효과가 영험해 매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넘쳐났는데 사실 바다열차의 진짜 종착지는 이 뒤에 레일로 연결된 또 다른 섬이었다. 그곳이 바로 사법 섬이라 불리는 에니에스 로비인 셈이다. 하지만 바다 열차가 진짜 종착지에 도착하는 건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였다. 중죄인을 사법 섬까지 실어나르거나 관련된 직업군이 타거나 아니면 이번처럼 특이한 경우가 수반된다거나.
임명식에 맞춰 재판소장을 비롯한 재판관들에게 전달된 익명의 협박편지는 사법 섬의 보안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최근 십수년간 유독 불의의 사망사고가 많던 재판소장에 신문에서까지 마가 끼었다는 둥, 저주가 씌었다는 둥의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새 재판소장이 임명되기까지 사소한 사건사고도 용납할 수 없던 세계정부는 에니에스 로비를 찾는 왕족 및 귀빈의 배를 온천 섬에 모두 정박토록 했다. 여기서부터는 바다열차를 타고 사법 섬까지 움직이는데 열차에 타는 인원은 미리 명단을 받은 자들에 한하며 호위에 동원되는 머릿수는 해군과 사이퍼 폴이 책임지기로 하고 말이다. 이는 이번 행사 경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스팬담 지령장관의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인원수에 제한을 둬 테러범이 기어들어올 물꼬를 조이겠다는. 해군과 협업하더라도 대장이 없다면 지령장관이 더 윗 계급이었으니 그가 총책임을 맡는 게 맞았다. 그렇게 이박 삼일 간의 항해를 마친 뒤 온천 섬에 도착한 도피 일행이 바다열차로 안내됐을 때였다.
‘아… 마리모 자식 끝까지 애먹이는구만!’
상디가 도피의 품에 안긴 조로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도피와 크로커다일의 뒤에 있었다. 이들 일행은 도피, 크로커다일, 조로와 상디 단 넷이라는 지극히 단촐한 인원으로 눈에 띄었다. 열차에 입실하기 전 각 칸의 입구에서 명단을 손에 쥐고 선 해군 병사는 머리 위로 지는 거대한 그림자에 잔뜩 긴장한 거수경례를 붙인 참이다. 그리고는 연신 명단과 앞의 네 사람을 번갈아보지만 이런다고 없는 두 명분의 이름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었다.
“외람되오나 폐하, 다른 두 분은……!”
“내 정부와 그 시종이다. 보시다시피 상태가 이래서 배에 두고 올 수가 없더군.”
“그래도 규정상 명단에 오른 분들만 열차에 오를 수 있는지라…….”
조로는 도피의 깃털코트에 둘러싸여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았다. 이때 상디는 ‘마리모’의 시종이라는 말에 발끈했으나 담배를 피워대는 것으로 화를 삭혔다. 역시 시가를 입에 물고 있던 크로커다일도 쓸데없이 입을 터는 도피에 얼굴 근육이 꿈틀댔지만 가까스로 참았고 말이다. 그 사이로 혼자 입이 찢어져라 웃는 젊은 왕의 모습이 가장 기괴해서 병사는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를 느꼈음인지 역 내에서 상황을 살피던 해군 중사 하나가 손짓으로 다급한 사인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폐하! 들어가셔도 됩니다!”
“문제 없는 건가?”
“예? 예, 예! 문제 없습니다!”
머리 위로 낙하하는 젊은 왕의 음성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도 온몸을 에는 공포가 서림에 병사는 천야차란 별명을 새삼 실감했다. 그렇게 젊은 왕의 일행이 열차 안으로 사라진 뒤에야 곁으로 다가온 중사가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과도한 긴장에 병사가 크게 놀라지만 상관은 열차 창문을 통해 자리잡는 왕의 일행을 힐끗대기 바빴다. 젊은 왕은 깃털 코트에 꽁꽁 싸맨 존재를 한시도 품에서 놓지 않았다.
“돈키호테 국왕이 품안의 상대를 뭐라했지?”
“예?! 예, 그게ㅡ!”
“쉬잇! 목소리가 크다, 병사. 진정하고 말해.”
“아아, 네, 중사님. 그게 정부라고…….”
“역시. 얘기가 들어맞는군.”
혼잣말 같은 소리에 병사는 궁금한 얼굴이지만 중사는 입을 다물었다. 온종일 한자리에서 대기했던 병사는 모를 사실이지만 소문은 이미 온천 섬 전역에 퍼진 상태다. 야사에 밤의 황태자 또는 저물지 않는 태양이자 희대의 절륜남이라고도 불리는 젊은 왕이 행차했다고. 배에서 이곳까지 사람 하나를 트레이드 마크인 분홍 깃털 코트에 숨긴 채 안고 왔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며 자중하기는 했지만 돈키호테 왕이 젊은 시절 보인 밤 중 행보는 전설과도 같았다. 그와 하룻밤 잠자리를 한 이는 삼일 밤낮을 앓아누웠다고. 또한 절대 그보다 더한 절정은 오르지 못하니 평생 젊은 왕과의 하룻밤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이가 배에서부터 사람 하나를 품에 안고 나타났으니 어찌 눈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냥 있어도 튀는 인간인 것을. 여기 더해 병사가 말을 전함으로써 소문을 사실화시키니 조로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 채 넘어간 것 또한 도피의 의도대로였다.
알파의 발정기를 삼일이나 받아낸 몸이 정상일 리 없다. 루피의 일을 들은 직후에는 필사의 각오가 몸을 움직이게 했을지나 배에 오르고 상황이 일단락된 뒤의 조로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맥을 못췄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는 듯했는데 당연했다. 형질편차가 클수록 유도되는 호르몬의 결과가 다르다. 보통 호르몬이란 뇌하수체에 위치한 중추기관에 의해 조절되는데 형질인자는 여기에 알파, 오메가 성염색체와 함께 호르몬이 더해졌다. 더 나아가 몸에서 자연스레 생산되는 호르몬양에 따라 형질의 강함과 약함이 수치화되는데 알파는 이에 따른 신체적 강함에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오메가는 그런 알파를 핸들링하는 데의 편차가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가장 단순하게 보면 강한 형질에게 끌리는 게 정석이지만 사람이란 본디 복잡한 생물 아니던가. 주변 환경이나 상황 등에 따라 타고난 유전자에 위배되는 선택이 있을지니 형질 편차에도 불구한 이끌림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약한 쪽에 무리가 오는 건 당연했고. 그러니까 상디가 말한 성교육에는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포함된다는 소리다.
‘로우 왕자도 어린애 같은 독점욕인지 아니면 애정관이 비틀린 건지 모르지만 이래서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자기 입맛대로 가지고 노는 거 같잖아.’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은 상디는 대각선 자리의 조로를 보며 생각했다. 조로는 도피의 무릎 위에서 코트에 푹 싸인 채 있었는데 이렇듯 철통방어를 하니 상디도 말 한마디 붙일 새가 없었다.
‘밀짚모자를 구할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방해하지 않겠다.’
약 삼일 전 밤에 도피는 상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믿을 만한 정보원에 대해 털어놓은 다음이었다. 그때 조로는 로우와 통화한 뒤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열에 달떠 허덕이고 있었다. 크로커다일 역시 무언으로 도피에게 동조할 때 행동은 무얼 하고 있었나. 그는 침대 옆 협탁에서 꺼낸 약병을 들고 조로의 옆에 앉았었다.
‘쉴 때 쉬더라도 약은 먹고 자라. 몸이 한결 편해질 거다.’
열과 근육통으로 고통받던 조로는 나긋한 중저음에 순순히 약을 삼키고 잠들었다. 직후 한결 편해진 숨소리를 들으면서 그때만 해도 상디 역시 그것이 단순한 진통제라는 데 의심을 두지 않았다.
“약 먹을 시간이다.”
통로를 사이에 둔 상디의 옆자리에서 손목시계를 확인한 크로커다일이 코트 속 주머니의 약병을 꺼냈다. 그것을 건내받은 도피가 드물게도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에 낮은 웃음을 흘린 상대는 알약 하나를 제 입에 넣는데 거침이 없다. 그리고는 깃털 속 녀석의 턱을 움켜쥐고 얼굴을 묻었다.
“읍……!”
유난히 길고 뾰족한 혀끝이 멋대로 알약을 식도까지 밀어넣으매 거부의 움직임이 일지만 소용없었다. 아직 출발 전인 열차에 밖에서 안을 힐끔대던 중사도 또 한번 소리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풍성한 깃털 코트 사이로 도피의 팔을 부여잡은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약을 먹이고 남을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얼굴을 들 줄 모르는 도피에 크로커다일이 정강이를 걷어찬 것 또한 금방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도피는 퍽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질투인가?”
“헛소리 마라.”
도피는 내로남불의 대명사로 정도 없기가 한결같다. 그런 놈인지라 지금 같은 때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거다. 삼일간 뒹군 덕분에 로우의 페로몬이 온몸에 치덕치덕 발린 조로를 앞에 두고서는 더더욱. 로우의 페로몬은 같은 알파인 도피마저 군침돌아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로 도피는 녀석의 첫 발정기에 이 몸이 동침해주겠다며 로우의 침실에 난입하려 들었고 크로커다일은 막아주다가 도리어 제가 먹히는 참사를 낳았다. 이것이 도피와의 악연같은 운우지정의 시작이었다. 로우의 페로몬 향에 흥분한 도피와 개같이 몸싸움을 벌이다 잡아먹혔던 그날의 참상은 지금도 크로커다일에게 종종 악몽으로 나타났으니까. 때문에 그는 도피에게서 조로를 지키느라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저 홍학놈은 방종한 아랫도리마저 정치적으로 써먹는 철두철미함이 있다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절제도 안 할 게 뻔했으니까. 이렇듯 각자의 생각으로 크로커다일과 상디 모두 긴장의 끈을 조일 때였다. 등 뒤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레이주님 아니었으면 열차도 못 탈 뻔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레이디!!’
유전자에 각인된 듯 레이디에 반응하는 상디의 머리가 돌아갔다. 그순간 보인 건 군복이 아닌 하늘한 드레스 차림의 나미였다. 풍성한 귤색 머리가 매력적인.
“오오, 나미씨!!!”
상디는 사랑이 넘치는 눈을 하고서 이미 열차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조로는 내팽겨둔 채로.
약 삼일 전, 조로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된 플라밍고 호에서의 통신을 엿듣는 자가 있었으니 이 모든 건 우연이었다. 발단은 대략 한달여 전에 츠루 참모의 정보원 붉은머리로부터 전달된 새 물주였다. 붉은머리는 라프텔 탐사팀의 잔고가 바닥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마침맞게 정보를 주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신문 보기를 하루도 게을리한 적 없던 나미는 독이 잔뜩 올라 드레스로자 행을 선택한 거였다. 나미, 우솝은 일찍이 루피와 훈련병 동기를 거쳤고 이후 로빈이 포함된 츠루 중장 휘하 부대는 과거 거프를 도와 십년 내란에 참전했으니 조로와 비비까지 전쟁터에서 쌓은 아이들의 우정은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만큼 생생하기만 했다. 그런고로 신문에서 드레스로자 왕세자비로 발탁된 조로의 사진을 본 날의 나미가 얼마나 분개했던가. 나라 정세에 훤했던 그녀는 조로가 나라를 대신해 팔렸음을 쉽게 유추함이다. 비록 붉은머리의 정보로 드레스로자의 재화가 얼마만한 지를 알아버린 뒤에는 조로를 내세워 한탕 진하게 뽑아먹을 생각으로 바뀌었다지만. 그도 그럴 게 생지옥이라 불리는 라프텔 해역 탐사는 정말 돈이 많이 들었다. 그 일대 전부가 최후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대전 이후 말도 안 될 정도의 자기장을 생성했고 라프텔 너머의 접근불가 구역에서는 초대형 해왕류와 괴수 등의 출현도 심심찾았다. 해저 깊은 곳에 잠든 고대 문명을 탐사하고 포네그리프의 문자를 해석하려면 이런 난관을 수없이 넘겨야 하는 것이다. 또한 라프텔 탐사에는 예나 지금이나 마리조아의 지원이 가장 크다지만 천문학적 액수를 쏟아붓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빈이 8살에 고고학 박사 학위를 딴 천재라는 것은 츠루를 비롯해 극히 일부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말인즉 츠루의 판단 하에 군 상부 누구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와 달리 비밀을 아는 극소수에 속한 나미는 동료인 로빈의 꿈을 이뤄주고자 라프텔 탐사에 가장 혈안이었으니 츠루조차 혀부터 내두르고 마는 돈의 화신이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빈은 이런 친구들의 절대적인 지지 덕분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이유 말인데… 칙… 아마 그건… 치직…….”
“어? 누가 이 근처에서 통신 중인가?”
양 머리 형태의 선수상이 특징인 고잉 메리 호는 우솝의 자랑이었다. 이는 고향에 있는 여자친구가 그와 친구들을 위해 선물해준 캐러벨급 범선이었다. 캐러벨은 크기가 작아 조타성능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열살도 되기 전에 해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항해사로서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을 지닌 나미와 고잉 메리 호의 궁합은 배의 주인보다 더 잘 맞았다. 평범한 범선임에도 그 위험한 라프텔 해역을 용맹무쌍하게 휘젓고 다니는 이유는 여기 있었다. 손재주에 일가견이 있던 우솝 역시 평범한 범선이던 고잉 메리 호에 다양한 무기를 추가해 변형을 주기도 했고 말이다. 때문에 츠루 참모의 허락을 받아 물주를 탈탈 털어내 로빈에게 새 잠수함을 장만해주겠다며 큰소리 친 나미를 필두로 항해에 나선 우솝은 범용성 통신기의 주파수를 조정하던 중 우연찮게 혼선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고잉 메리 호가 전파가 지나는 길목에 선 모양이었다.
“…아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우리 사이에… 뻣뻣하게 구는 것도… 섹시… 칙!”
혼선된 통신은 일방적이었다. 다른 쪽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잠시 뒤 우솝은 나미를 찾아 선 내를 뛰어다녀야 했다. 루피에 대한 단서를 혼선된 통신에서 들었으므로. 이는 마침 당일자 신문에 난 에이스의 바다열차 습격 사건 기사를 보느라 항해를 멈췄던 나미에게도 예상치 못한 쾌거였다.
한편 드레스로자에도 예상치 못하게 발목 잡힌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해군 대장 볼사리노였다. 키자루라는 이명을 지닌 그는 애매하게 가는 정의를 내세운지라 철저한 정의를 원칙으로 삼은 붉은 개, 사카즈키 대장에게 종종 잔소리를 들었다.
“일처리 다 했으면 복귀나 할 것이지 왜 여태 거기 있는 거냐? 볼사리노! 너 혹시 또 농땡이부리는 거 아니야?”
“그래서 너한테는 말한 거잖아, 사카즈키.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라고.”
“그런 이유로 삼일씩이나 드레스로자에 체류 중인 걸 나보고 납득하라고? 이제 됐으니까 본부로 돌아와!”
“흐음~ 그게 이젠 곤란하게 됐지 뭐야. 저것들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어? 나도 명색이 해군 대장인데~.”
“해군 대장의 도움따위 필요없다. 무서우면 도망쳐도 좋아.”
성루에서 함께 하늘을 뒤덮은 검은 무리를 지켜보던 로우가 끼어드니 같은 편이 보기에도 퍽 얄밉지 싶다.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얼굴로 눈을 홉 뜬 전보벌레와 볼사리노까지 조용했다. 그 침묵 가운데서 벌써 지친듯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로우만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짓고 있었다.
하비하비 열매의 진짜 무서움이란 이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슈거의 수중에 떨어지면 그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청년 역시 슈거에 의해 처리된 순간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의 기억이 삭제 또는 변형되지 않았나. 때문에 다른 해군들은 마물의 팔이 없음이 판명되자 바로 왕의 대지를 떠났다. 한 나라의 왕의 머무는 공간이다. 그 땅을 증거도 없이 언제까지고 점거할 수는 없지 않던가. 그럼에도 볼사리노는 의식을 잃은 로우를 핑계 삼아 오늘까지 남아있었다. 왕자의 폭주와 베르고의 부상에 책임을 느낀다면서. 이는 왕이 크로커다일과 함께 자리를 비운 마당에 결과적으로 국력의 핵심인 넷의 부재가 생겼으니 나라의 안보도 불안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거였다. 그 구멍을 해군 대장인 자신은 메울 수 있다는 자신감 역시도. 물론 볼사리노의 자신감은 조금의 허언도 없는 사실이었으나 진짜 속내가 지금 드러나지 않았나. 슈거로 인해 청년의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졌어도 볼사리노는 일말의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때문에 전보벌레를 통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마물 팔의 정보를 얻었으나 그 실체가 없음을 보고한 뒤에도 쉬이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다시 별궁에 박혀 남은 발정기를 견뎠던 로우가 오늘 드디어 제 발로 걸어나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나타난 마물 무리에 대한 보고였다. 이에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성루로 나온 로우에 의해 펼쳐진 왕국의 모습은 잘 정돈된 거리마다 튀어나온 무쇠 기둥에 의해 생성된 창살같은 감옥이 일정 구역을 감쌌다는 거다. 그에 앞서 묵직한 나팔 소리가 전역에 울려퍼지니 사람들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로우가 움직인 건 이후로 성루에 선 그의 손바닥에서 순식간에 불어난 룸이 드레스로자 전역을 감싸니 본섬을 비롯한 동서남북의 모든 섬이 일정 구역으로 묶여 촘촘한 창살에 갇힌 것이다. 이는 젊은 왕의 새장을 로우의 방식으로 변형시킨 버전이었다. 그 결과 탈진해버린 로우는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지만 볼사리노는 조금 전 눈앞에서 본 광경에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는 태양을 가리듯 머리 위로 진 검은 그림자보다 더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오메가를… 받으러 왔다… 끅끅끅끅. ”
드레스로자 본섬 위로 몰려든 놈들 제일 앞에 가장 덩치 큰 마물이 있었다. 녀석이 손을 들어 로우를 가리킬 때, 억지로 쥐어짠 목소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태양을 가린 먹구름에 세상은 온통 어둠이었다.
한조각
터치 한번으로 한 사람을 완전히 세상에서 지운다는 것과 손댄 이를 종으로 부릴 수도 있다는 점은 굉장한 능력이지만 하비하비 열매에는 그만한 대가도 따랐다. 하나는 능력자가 어떤 육체적 강함도 얻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을 먹은 순간 신체 나이가 멈춘다는 것. 특히 두번째 조건은 열매의 생김새가 알려지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적당한 나이 선택을 불가하게 하니 확실한 핸디캡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타파할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번째는 능력자가 죽은 장소 주변에서 악마의 열매가 재생성 된다는 얘기를 따른다. 이는 해당 능력자를 죽인 뒤 열매를 찾는 방법이지만 불확실성이 크며 빼앗길 위험도 무시 못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능력자를 죽이고 그 육신을 먹는다. 식인은 매우 엽기적인 방법이지만 뒷세계에서는 이런식으로 악마의 열매 능력을 빼앗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돌았다. 또한 이 두번째 방법은 열매가 생기기를 기다린다거나 다른 경쟁자에게 빼앗긴다는 위험도 거의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다 정론은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소문이란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볼만 한 가치는 있지 않던가. 악마의 열매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각기 그만한 욕망이 있는 법이니 이를 위해 못할 것도 없음이다. 일례로 도피 또한 과거 수술수술 열매를 얻고자 공국 규모에 준하는 인명피해를 냈지 않던가. 때문에 마리조아의 밀정도 열매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으리라. 다만 문제라면 사선에서 구사일생한 청년의 조바심이 일을 그르쳤다는 것일까. 코끼리 장난감으로 변한 뒤 행해진 강제노역과 사람들에게 당할 멸시,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청년은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였으나 몸은 전혀 의지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보다 더한 절망이 어디 있을까. 장난감으로 변한 몸도 맞으면 아팠고 피로감은 느꼈다. 하지만 이미 종속된 장난감은 마지막 한방울의 기력까지 짜내 출근, 노동, 퇴근을 반복했다. 단 하루 쉬는 날도 없이 매일매일을 노예보다 못한 취급 받으면서.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장난감이 진짜 살아있음을 몰랐다. 그저 돈키호테 왕이 국민을 위해 장난감이 움직이도록 수를 쓴 것이라 생각할 뿐. 실제 10월 말에 열리는 행사에서 이 장난감들은 다트나 사격의 과녁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이를 전부 지켜본 청년은 절대 두번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 절박함으로 청년은 드레스로자 지부에서 마리조아와 내통하던 해군을 찾기 무섭게 매달린 거였다.
‘악마! 악마가 있어! 하비하비 열매 능력자가ㅡ!’
‘이봐! 당신 뭐야?!’
‘그 애는 악마! 아니, 진짜 악마는 돈키호테 왕이야! 여긴 악의 소굴이라고! 제발 살려줘!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신 장난감으로는… 으흐흑!’
당시 청년에게 붙잡힌 해군도 내통자라는 정체는 비밀이었다. 이 모든 건 은밀함이 생명이건만 거지꼴을 하고 침입한 청년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한동안 소식이 없기에 정체를 들켜 제거된 줄로 알았던 밀정의 등장은 이렇듯 요란스러웠다. 덕분에 하비하비 열매에 관한 얘기가 윗선에까지 들어가고 이는 결국 드레스로자 해군 지부에서 진위여부를 밝히기로 했다. 본래라면 사보가 처리했어야 할 일이다. 신문에 에이스의 바다열차 습격 사건만 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마물 신체와 하비하비 열매의 수습이 마리조아와 해군측으로 갈리게 되고 늙은 왕은 둘 다 손에 쥘 수 있던 기회를 놓친 걸 용서치 않았다. 청년이 나름 큰 공을 세우고 다시 사지로 내몰린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음이다.
“야, 너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으읍! 으으읍!”
로우의 폭주로 생긴 틈에 납치된 청년을 최종적으로 궁에서 빼낸 건 톤타타족이었다. 앞서 슈거는 지하 선착장 수로와 연결된 바다를 통해 왕의 대지를 빠져나왔는데 이를 도운 건 워커였다. 악마의 열매 능력자는 바닷속에서 꼼짝할 수 없었으니 몸을 끈으로 연결한 워커가 잠영으로 슈거를 수로 끝까지 데려간 거였다. 그런 뒤 수로 밖을 돌아나와 육로로 꽃밭까지 직행, 이후에는 전용 통로를 이용해 그린비트 지하에 위치한 톤타타족 왕국에 도착했으니 슈거는 상황이 일단락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약 반나절만에 소인국의 왕이나 진배없는 위치로 군림했다. 슈거에게 천성이 순박한 톤타타족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너 전에 진짜 도망 잘 가더라? 아주 잽싸던데?”
레오 무리에게 붙잡혀 톤타타족 왕국까지 실려온 청년은 풀밭에 대자로 뻗어 묶여 있었다. 땅에 박힌 말뚝과 연결된 끈이 청년의 몸을 칭칭 감았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그가 발치에 등장한 소녀를 보고 겁에 질려 덜덜 떨어댔다. 팔짱을 낀 슈거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장난감으로 변했을 때는 굼뱅이가 따로없었는데 말이야. 이제 보니 그게 다 꾀부린 거였단 소리지?”
“으으읍! 읍!”
“으헉!”
슈거가 손을 풀어 한쪽 장갑을 빼든 순간이었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청년과 주변에 유일하게 자리한 워커의 신음이 흐른다. 워커는 다른 앞으로 벌어질 일의 끔찍함을 토로하며 진작 동족들을 피신시킨 참이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참상을 겪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하다면서. 이때 슈거는 눈물콧물 짜며 호소하던 워커와 그에 동화된 동족들을 보며 꼴깝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속내가 여실했던 시선의 냉기는 도리어 다른 소인족들이 워커의 말을 믿는데 쐐기를 박았다지만. 그래도 덕분에 톤타타족 왕국의 너른 풀밭 공터에는 슈거와 잡혀온 청년, 워커 이 셋뿐이었다. 이때 청년은 장갑을 벗어내리는 소녀를 보며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이박 삼일간의 항해 일정이 끝나고 플라밍고 호가 섬에 정박할 때가 왔다. 이곳은 각종 피부질환을 치료해주는 온천이 유명한 관광 섬으로 바다열차의 보편적인 종착지였다. 온천의 치료 효과가 영험해 매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넘쳐났는데 사실 바다열차의 진짜 종착지는 이 뒤에 레일로 연결된 또 다른 섬이었다. 그곳이 바로 사법 섬이라 불리는 에니에스 로비인 셈이다. 하지만 바다 열차가 진짜 종착지에 도착하는 건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였다. 중죄인을 사법 섬까지 실어나르거나 관련된 직업군이 타거나 아니면 이번처럼 특이한 경우가 수반된다거나.
임명식에 맞춰 재판소장을 비롯한 재판관들에게 전달된 익명의 협박편지는 사법 섬의 보안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최근 십수년간 유독 불의의 사망사고가 많던 재판소장에 신문에서까지 마가 끼었다는 둥, 저주가 씌었다는 둥의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새 재판소장이 임명되기까지 사소한 사건사고도 용납할 수 없던 세계정부는 에니에스 로비를 찾는 왕족 및 귀빈의 배를 온천 섬에 모두 정박토록 했다. 여기서부터는 바다열차를 타고 사법 섬까지 움직이는데 열차에 타는 인원은 미리 명단을 받은 자들에 한하며 호위에 동원되는 머릿수는 해군과 사이퍼 폴이 책임지기로 하고 말이다. 이는 이번 행사 경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스팬담 지령장관의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인원수에 제한을 둬 테러범이 기어들어올 물꼬를 조이겠다는. 해군과 협업하더라도 대장이 없다면 지령장관이 더 윗 계급이었으니 그가 총책임을 맡는 게 맞았다. 그렇게 이박 삼일 간의 항해를 마친 뒤 온천 섬에 도착한 도피 일행이 바다열차로 안내됐을 때였다.
‘아… 마리모 자식 끝까지 애먹이는구만!’
상디가 도피의 품에 안긴 조로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도피와 크로커다일의 뒤에 있었다. 이들 일행은 도피, 크로커다일, 조로와 상디 단 넷이라는 지극히 단촐한 인원으로 눈에 띄었다. 열차에 입실하기 전 각 칸의 입구에서 명단을 손에 쥐고 선 해군 병사는 머리 위로 지는 거대한 그림자에 잔뜩 긴장한 거수경례를 붙인 참이다. 그리고는 연신 명단과 앞의 네 사람을 번갈아보지만 이런다고 없는 두 명분의 이름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었다.
“외람되오나 폐하, 다른 두 분은……!”
“내 정부와 그 시종이다. 보시다시피 상태가 이래서 배에 두고 올 수가 없더군.”
“그래도 규정상 명단에 오른 분들만 열차에 오를 수 있는지라…….”
조로는 도피의 깃털코트에 둘러싸여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았다. 이때 상디는 ‘마리모’의 시종이라는 말에 발끈했으나 담배를 피워대는 것으로 화를 삭혔다. 역시 시가를 입에 물고 있던 크로커다일도 쓸데없이 입을 터는 도피에 얼굴 근육이 꿈틀댔지만 가까스로 참았고 말이다. 그 사이로 혼자 입이 찢어져라 웃는 젊은 왕의 모습이 가장 기괴해서 병사는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를 느꼈음인지 역 내에서 상황을 살피던 해군 중사 하나가 손짓으로 다급한 사인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폐하! 들어가셔도 됩니다!”
“문제 없는 건가?”
“예? 예, 예! 문제 없습니다!”
머리 위로 낙하하는 젊은 왕의 음성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도 온몸을 에는 공포가 서림에 병사는 천야차란 별명을 새삼 실감했다. 그렇게 젊은 왕의 일행이 열차 안으로 사라진 뒤에야 곁으로 다가온 중사가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과도한 긴장에 병사가 크게 놀라지만 상관은 열차 창문을 통해 자리잡는 왕의 일행을 힐끗대기 바빴다. 젊은 왕은 깃털 코트에 꽁꽁 싸맨 존재를 한시도 품에서 놓지 않았다.
“돈키호테 국왕이 품안의 상대를 뭐라했지?”
“예?! 예, 그게ㅡ!”
“쉬잇! 목소리가 크다, 병사. 진정하고 말해.”
“아아, 네, 중사님. 그게 정부라고…….”
“역시. 얘기가 들어맞는군.”
혼잣말 같은 소리에 병사는 궁금한 얼굴이지만 중사는 입을 다물었다. 온종일 한자리에서 대기했던 병사는 모를 사실이지만 소문은 이미 온천 섬 전역에 퍼진 상태다. 야사에 밤의 황태자 또는 저물지 않는 태양이자 희대의 절륜남이라고도 불리는 젊은 왕이 행차했다고. 배에서 이곳까지 사람 하나를 트레이드 마크인 분홍 깃털 코트에 숨긴 채 안고 왔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며 자중하기는 했지만 돈키호테 왕이 젊은 시절 보인 밤 중 행보는 전설과도 같았다. 그와 하룻밤 잠자리를 한 이는 삼일 밤낮을 앓아누웠다고. 또한 절대 그보다 더한 절정은 오르지 못하니 평생 젊은 왕과의 하룻밤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이가 배에서부터 사람 하나를 품에 안고 나타났으니 어찌 눈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냥 있어도 튀는 인간인 것을. 여기 더해 병사가 말을 전함으로써 소문을 사실화시키니 조로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 채 넘어간 것 또한 도피의 의도대로였다.
알파의 발정기를 삼일이나 받아낸 몸이 정상일 리 없다. 루피의 일을 들은 직후에는 필사의 각오가 몸을 움직이게 했을지나 배에 오르고 상황이 일단락된 뒤의 조로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맥을 못췄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는 듯했는데 당연했다. 형질편차가 클수록 유도되는 호르몬의 결과가 다르다. 보통 호르몬이란 뇌하수체에 위치한 중추기관에 의해 조절되는데 형질인자는 여기에 알파, 오메가 성염색체와 함께 호르몬이 더해졌다. 더 나아가 몸에서 자연스레 생산되는 호르몬양에 따라 형질의 강함과 약함이 수치화되는데 알파는 이에 따른 신체적 강함에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오메가는 그런 알파를 핸들링하는 데의 편차가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가장 단순하게 보면 강한 형질에게 끌리는 게 정석이지만 사람이란 본디 복잡한 생물 아니던가. 주변 환경이나 상황 등에 따라 타고난 유전자에 위배되는 선택이 있을지니 형질 편차에도 불구한 이끌림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약한 쪽에 무리가 오는 건 당연했고. 그러니까 상디가 말한 성교육에는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포함된다는 소리다.
‘로우 왕자도 어린애 같은 독점욕인지 아니면 애정관이 비틀린 건지 모르지만 이래서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자기 입맛대로 가지고 노는 거 같잖아.’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은 상디는 대각선 자리의 조로를 보며 생각했다. 조로는 도피의 무릎 위에서 코트에 푹 싸인 채 있었는데 이렇듯 철통방어를 하니 상디도 말 한마디 붙일 새가 없었다.
‘밀짚모자를 구할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방해하지 않겠다.’
약 삼일 전 밤에 도피는 상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믿을 만한 정보원에 대해 털어놓은 다음이었다. 그때 조로는 로우와 통화한 뒤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열에 달떠 허덕이고 있었다. 크로커다일 역시 무언으로 도피에게 동조할 때 행동은 무얼 하고 있었나. 그는 침대 옆 협탁에서 꺼낸 약병을 들고 조로의 옆에 앉았었다.
‘쉴 때 쉬더라도 약은 먹고 자라. 몸이 한결 편해질 거다.’
열과 근육통으로 고통받던 조로는 나긋한 중저음에 순순히 약을 삼키고 잠들었다. 직후 한결 편해진 숨소리를 들으면서 그때만 해도 상디 역시 그것이 단순한 진통제라는 데 의심을 두지 않았다.
“약 먹을 시간이다.”
통로를 사이에 둔 상디의 옆자리에서 손목시계를 확인한 크로커다일이 코트 속 주머니의 약병을 꺼냈다. 그것을 건내받은 도피가 드물게도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에 낮은 웃음을 흘린 상대는 알약 하나를 제 입에 넣는데 거침이 없다. 그리고는 깃털 속 녀석의 턱을 움켜쥐고 얼굴을 묻었다.
“읍……!”
유난히 길고 뾰족한 혀끝이 멋대로 알약을 식도까지 밀어넣으매 거부의 움직임이 일지만 소용없었다. 아직 출발 전인 열차에 밖에서 안을 힐끔대던 중사도 또 한번 소리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풍성한 깃털 코트 사이로 도피의 팔을 부여잡은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약을 먹이고 남을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얼굴을 들 줄 모르는 도피에 크로커다일이 정강이를 걷어찬 것 또한 금방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도피는 퍽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질투인가?”
“헛소리 마라.”
도피는 내로남불의 대명사로 정도 없기가 한결같다. 그런 놈인지라 지금 같은 때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거다. 삼일간 뒹군 덕분에 로우의 페로몬이 온몸에 치덕치덕 발린 조로를 앞에 두고서는 더더욱. 로우의 페로몬은 같은 알파인 도피마저 군침돌아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로 도피는 녀석의 첫 발정기에 이 몸이 동침해주겠다며 로우의 침실에 난입하려 들었고 크로커다일은 막아주다가 도리어 제가 먹히는 참사를 낳았다. 이것이 도피와의 악연같은 운우지정의 시작이었다. 로우의 페로몬 향에 흥분한 도피와 개같이 몸싸움을 벌이다 잡아먹혔던 그날의 참상은 지금도 크로커다일에게 종종 악몽으로 나타났으니까. 때문에 그는 도피에게서 조로를 지키느라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저 홍학놈은 방종한 아랫도리마저 정치적으로 써먹는 철두철미함이 있다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절제도 안 할 게 뻔했으니까. 이렇듯 각자의 생각으로 크로커다일과 상디 모두 긴장의 끈을 조일 때였다. 등 뒤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레이주님 아니었으면 열차도 못 탈 뻔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레이디!!’
유전자에 각인된 듯 레이디에 반응하는 상디의 머리가 돌아갔다. 그순간 보인 건 군복이 아닌 하늘한 드레스 차림의 나미였다. 풍성한 귤색 머리가 매력적인.
“오오, 나미씨!!!”
상디는 사랑이 넘치는 눈을 하고서 이미 열차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조로는 내팽겨둔 채로.
약 삼일 전, 조로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된 플라밍고 호에서의 통신을 엿듣는 자가 있었으니 이 모든 건 우연이었다. 발단은 대략 한달여 전에 츠루 참모의 정보원 붉은머리로부터 전달된 새 물주였다. 붉은머리는 라프텔 탐사팀의 잔고가 바닥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마침맞게 정보를 주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신문 보기를 하루도 게을리한 적 없던 나미는 독이 잔뜩 올라 드레스로자 행을 선택한 거였다. 나미, 우솝은 일찍이 루피와 훈련병 동기를 거쳤고 이후 로빈이 포함된 츠루 중장 휘하 부대는 과거 거프를 도와 십년 내란에 참전했으니 조로와 비비까지 전쟁터에서 쌓은 아이들의 우정은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만큼 생생하기만 했다. 그런고로 신문에서 드레스로자 왕세자비로 발탁된 조로의 사진을 본 날의 나미가 얼마나 분개했던가. 나라 정세에 훤했던 그녀는 조로가 나라를 대신해 팔렸음을 쉽게 유추함이다. 비록 붉은머리의 정보로 드레스로자의 재화가 얼마만한 지를 알아버린 뒤에는 조로를 내세워 한탕 진하게 뽑아먹을 생각으로 바뀌었다지만. 그도 그럴 게 생지옥이라 불리는 라프텔 해역 탐사는 정말 돈이 많이 들었다. 그 일대 전부가 최후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대전 이후 말도 안 될 정도의 자기장을 생성했고 라프텔 너머의 접근불가 구역에서는 초대형 해왕류와 괴수 등의 출현도 심심찾았다. 해저 깊은 곳에 잠든 고대 문명을 탐사하고 포네그리프의 문자를 해석하려면 이런 난관을 수없이 넘겨야 하는 것이다. 또한 라프텔 탐사에는 예나 지금이나 마리조아의 지원이 가장 크다지만 천문학적 액수를 쏟아붓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빈이 8살에 고고학 박사 학위를 딴 천재라는 것은 츠루를 비롯해 극히 일부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말인즉 츠루의 판단 하에 군 상부 누구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와 달리 비밀을 아는 극소수에 속한 나미는 동료인 로빈의 꿈을 이뤄주고자 라프텔 탐사에 가장 혈안이었으니 츠루조차 혀부터 내두르고 마는 돈의 화신이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빈은 이런 친구들의 절대적인 지지 덕분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이유 말인데… 칙… 아마 그건… 치직…….”
“어? 누가 이 근처에서 통신 중인가?”
양 머리 형태의 선수상이 특징인 고잉 메리 호는 우솝의 자랑이었다. 이는 고향에 있는 여자친구가 그와 친구들을 위해 선물해준 캐러벨급 범선이었다. 캐러벨은 크기가 작아 조타성능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열살도 되기 전에 해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항해사로서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을 지닌 나미와 고잉 메리 호의 궁합은 배의 주인보다 더 잘 맞았다. 평범한 범선임에도 그 위험한 라프텔 해역을 용맹무쌍하게 휘젓고 다니는 이유는 여기 있었다. 손재주에 일가견이 있던 우솝 역시 평범한 범선이던 고잉 메리 호에 다양한 무기를 추가해 변형을 주기도 했고 말이다. 때문에 츠루 참모의 허락을 받아 물주를 탈탈 털어내 로빈에게 새 잠수함을 장만해주겠다며 큰소리 친 나미를 필두로 항해에 나선 우솝은 범용성 통신기의 주파수를 조정하던 중 우연찮게 혼선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고잉 메리 호가 전파가 지나는 길목에 선 모양이었다.
“…아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우리 사이에… 뻣뻣하게 구는 것도… 섹시… 칙!”
혼선된 통신은 일방적이었다. 다른 쪽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잠시 뒤 우솝은 나미를 찾아 선 내를 뛰어다녀야 했다. 루피에 대한 단서를 혼선된 통신에서 들었으므로. 이는 마침 당일자 신문에 난 에이스의 바다열차 습격 사건 기사를 보느라 항해를 멈췄던 나미에게도 예상치 못한 쾌거였다.
한편 드레스로자에도 예상치 못하게 발목 잡힌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해군 대장 볼사리노였다. 키자루라는 이명을 지닌 그는 애매하게 가는 정의를 내세운지라 철저한 정의를 원칙으로 삼은 붉은 개, 사카즈키 대장에게 종종 잔소리를 들었다.
“일처리 다 했으면 복귀나 할 것이지 왜 여태 거기 있는 거냐? 볼사리노! 너 혹시 또 농땡이부리는 거 아니야?”
“그래서 너한테는 말한 거잖아, 사카즈키.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라고.”
“그런 이유로 삼일씩이나 드레스로자에 체류 중인 걸 나보고 납득하라고? 이제 됐으니까 본부로 돌아와!”
“흐음~ 그게 이젠 곤란하게 됐지 뭐야. 저것들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어? 나도 명색이 해군 대장인데~.”
“해군 대장의 도움따위 필요없다. 무서우면 도망쳐도 좋아.”
성루에서 함께 하늘을 뒤덮은 검은 무리를 지켜보던 로우가 끼어드니 같은 편이 보기에도 퍽 얄밉지 싶다.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얼굴로 눈을 홉 뜬 전보벌레와 볼사리노까지 조용했다. 그 침묵 가운데서 벌써 지친듯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로우만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짓고 있었다.
하비하비 열매의 진짜 무서움이란 이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슈거의 수중에 떨어지면 그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청년 역시 슈거에 의해 처리된 순간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의 기억이 삭제 또는 변형되지 않았나. 때문에 다른 해군들은 마물의 팔이 없음이 판명되자 바로 왕의 대지를 떠났다. 한 나라의 왕의 머무는 공간이다. 그 땅을 증거도 없이 언제까지고 점거할 수는 없지 않던가. 그럼에도 볼사리노는 의식을 잃은 로우를 핑계 삼아 오늘까지 남아있었다. 왕자의 폭주와 베르고의 부상에 책임을 느낀다면서. 이는 왕이 크로커다일과 함께 자리를 비운 마당에 결과적으로 국력의 핵심인 넷의 부재가 생겼으니 나라의 안보도 불안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거였다. 그 구멍을 해군 대장인 자신은 메울 수 있다는 자신감 역시도. 물론 볼사리노의 자신감은 조금의 허언도 없는 사실이었으나 진짜 속내가 지금 드러나지 않았나. 슈거로 인해 청년의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졌어도 볼사리노는 일말의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때문에 전보벌레를 통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마물 팔의 정보를 얻었으나 그 실체가 없음을 보고한 뒤에도 쉬이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다시 별궁에 박혀 남은 발정기를 견뎠던 로우가 오늘 드디어 제 발로 걸어나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나타난 마물 무리에 대한 보고였다. 이에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성루로 나온 로우에 의해 펼쳐진 왕국의 모습은 잘 정돈된 거리마다 튀어나온 무쇠 기둥에 의해 생성된 창살같은 감옥이 일정 구역을 감쌌다는 거다. 그에 앞서 묵직한 나팔 소리가 전역에 울려퍼지니 사람들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로우가 움직인 건 이후로 성루에 선 그의 손바닥에서 순식간에 불어난 룸이 드레스로자 전역을 감싸니 본섬을 비롯한 동서남북의 모든 섬이 일정 구역으로 묶여 촘촘한 창살에 갇힌 것이다. 이는 젊은 왕의 새장을 로우의 방식으로 변형시킨 버전이었다. 그 결과 탈진해버린 로우는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지만 볼사리노는 조금 전 눈앞에서 본 광경에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는 태양을 가리듯 머리 위로 진 검은 그림자보다 더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오메가를… 받으러 왔다… 끅끅끅끅. ”
드레스로자 본섬 위로 몰려든 놈들 제일 앞에 가장 덩치 큰 마물이 있었다. 녀석이 손을 들어 로우를 가리킬 때, 억지로 쥐어짠 목소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태양을 가린 먹구름에 세상은 온통 어둠이었다.
한조각
https://hygall.com/604006919
[Code: e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