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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11:38
전편 https://hygall.com/598110825
“남잠, 뭐해?”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엄해 보이는 얼굴에 따스한 기운이 스쳤다.
“택무군이신가...?”
금방 남망기가 바라보고 서 있던 하얀 형체는 너무 멀어져서 분간하기 힘들었다.
“배고프네. 나 밥 먹어야겠어. 같이 가자!”
곧장 위무선이 조르는대로 두 사람은 길을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사설을 늘어놓는 위무선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이 그지없이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심은 속이 달랐다.
남희신이 하루 일찍 출발한다는 말에 남망기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달포 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가깝지도 않은 운몽에서 의논할 일이 뭐그리 많다는 건지.
고소 남씨는 두 형제가 함께 이끄는 집안이라 남망기가 모를 일이란 없을 텐데 영 수상했다.
게다가 상대가 강만음이고 보니.
겉으로 표현하거나 설왕설래하는 일은 없지만, 남망기는 위무선을 속속들이 잘 알았다.
위무선이 강만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절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내일이 운몽 강씨 주최의 사냥대회이며 남희신의 목적지가 바로 그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말하기를 피한다는 것.
남망기와 위무선은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주로 말하는 사람은 위무선이다. 그렇게 말 많은 위무선이, 어릴 적의 얘기만큼은 잘 하지 않는다는 걸 남망기는 눈치채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다면 일부러 말을 피할 리 없다.
언젠가는 위무선이 의뭉스럽게 말을 돌리길래 캐어 묻자. -나 죽었었던 걸 몰라? 전생이나 마찬가지라니까. 기억 안 나. 라며 웃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던가.
남망기는 옅어지고 있는 관음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전생같다며 외면하고 과거를 다 없던 일로 하려는 소리에, 이 가슴도 시큰한 감정을 느꼈는데.
반평생을 같이 살았던 형제는 대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날이 그와 한 몸처럼 되어가며, 위무선이 피하는 부분은 오히려 남망기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더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고, 세상도 이 이상 평화로울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따금씩 자기주장을 하며 찔러대는 작은 가시에. 남망기는 현재의 평화를 완전하게 느끼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운몽으로 날아가고 있는 남희신도 의문스럽게 여기는 중이었다.
강징이 사냥회를 열면서 하루 일찍 오라는 기별을 보냈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일찍 갔을 텐데, 왜 굳이 확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희신은 아침부터 출발했다.
대사냥 전일이라 그런지 연화오는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풍이 휘몰아치듯 바삐 움직이고 있으니, 그 가운데 서서 이리저리 명령을 내리는 강징을 찾기는 쉬웠다.
남희신은 온 것을 알리지 않은 채 잠시 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기가 센 성격의 일환이랄지, 강종주는 참 멋쟁이였다.
가을의 강한 광선에 반사된 금관의 빛이 눈부셨다. 매끄러운 보랏빛 장포에도 금실의 수가 놓여 반짝반짝 빛난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친밀하게 부를 수 있게 된 순간이 무엇보다 기분 좋았다.
“오셨습니까, 택무군.”
무슨 일인지 잔뜩 줄이 가 있던 이마가 남희신을 보자마자 옅어지며 미소마저 띠었다.
그런 변화도 무척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안팎으로 시끄러우니 잠시 나가자고 말하는 강징을 따라 연화오를 나섰다.
낯선 장소에서 만나 유람하듯 돌아다닐 때도 제법 있어 산책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희신과 나란히 서서 걷는 강징은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몇 달 전 남희신이 서두를 꺼내었던 일은 긁어부스럼 같아서 그가 언급하지 않자 그냥 흐지부지 되려는가 보다고 강징은 다행스럽게 여겼다.
솔직히 강징은 지금도 남희신을 너무 많이 믿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마음을 너무 놓아버리는 바람에 어떤 때에는 급한 성격에 말이 함부로 나가서 뜨끔할 때도 있는데, 그래도 남희신은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본 것처럼 웃어넘겼다.
그럴 때면 정말로 말썽을 피우는 동생이 된 것 같아서 부끄러운데,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싫기는 커녕...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한참을 걸어 호수를 벗어나고 숲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어도 남희신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가는대로 따르겠다는 듯 한담만 이어갔다.
그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동요하는 일이 드문 남희신이었지만. 숲나무가 옅어지고 넓은 들판에 다다르자 걸음이 우뚝 멈추며 새로운 표정이 스쳤다.
맞은편 산이 넘겨다보이는 너른 지역에, 수룡화가 가득 피어 있었다.
수룡화의 끄트머리는 화살촉 모양으로 솟았는데 부드럽고 높았다. 그보다 아래에 달린 꽃망울들은 짙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바람이 불면 마치 새파랗게 잠긴 물 위에서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하얀 화살촉들이 춤을 추었다.
마침 살랑살랑 꽃을 움직이던 바람을 덮치듯 커다란 돌풍이 불어오자, 미세하게 귓속을 터뜨리는 듯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이 저 너머까지 퍼져나가며 흰 빛이 푸른빛을 일제히 덮어버렸다.
꿈과 같이 신기한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해마다 운몽 강씨가 이 곳에서 사냥회를 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줄은 몰랐군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하는 남희신의 목소리도 꿈 속인듯 나직하고 조용조용했다.
“금방 하신 말씀이 이유입니다. 자리를 마련하려고 사냥회 전에 풀을 다 베어버리거든요.”
“그렇다면 올해는 장소를 바꾸었습니까?”
강징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아뇨, 이제 베어야지요.”
사냥회를 열겠다고 마음 먹었을때, 문득 남희신이 읊었던 고시에 수룡화가 등장했던 것이 떠오른 강징은 꽃을 베기 전에 그에게 보이자 싶었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의 호의가 부끄러워져 그만 돌아가자는 듯 외로 꼬고 서서 무언으로 재촉하는데.
남희신은 물끄러미 저편을 바라보며 말도 없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무겁게 돌린 시선이 강징에게 향해, 이번에는 강징에게 못이 박혀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엇에 취하거나 즐거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눈이 오래도록 주시하자 강징은 영문을 모른채 조금씩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 때 불야천에서.”
긴장했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불야천이라니. 하지만 똑똑하게 울리는 발음은 두 번 확인할만치 불분명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대열도 없이 퍼부어지는 적들에 마치 지옥도가 펼쳐진 듯했지요. 저쪽쯤에 자색 무리들이 보였으니, 아마 강종주도 그 편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흑단같은 눈알이 앞을 주시하는채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키자 강징은 마치 그가 말하는 불야천으로 옮겨간 듯 오소소한 느낌이 들었다.
남희신이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이 되어 적도 아군도 무시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더랬습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명결 형님을 구해 나오는 광요와 마주쳤지요.”
강징은 그의 말을 들으며 연유를 몰라도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남희신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일은. 저도 건너건너 듣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압기를 견디다못해 입을 연 강징을 가로막으며 그가 말했다.
강징의 곁에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뚫어져라 주시하며, 그 입술에서 건조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그 때, 광요가 진심으로 형님을 구해내려 했다는 말을 다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강징을 외면하고 남희신은 광활하게 펼쳐진 꽃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무나도 용의주도하게 잘 해냈지.
-보통 사람은 감히 시도도 할 수 없는 일들인데.
강징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서 있었다. 파랗고 하얀 안개 옆에 선 남희신의 모습이 아름답고도 덧없게 느껴져서, 무척 먼 느낌이라서. 안타까운 마음에 자칫 손을 내밀 뻔한 것을 참았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한 착각을 덮으며 다시금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이 종식된 후, 저는 두 사람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의형제를 맺고, 한편으로는 가문에서 자리잡는 그를 돕기도 하고.
그리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면서 그 의심을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광요가 제가 아는 사람이길 바랬고.
계속 저의 친우로 남아 주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모든 사람들이 속아넘어간 일이잖습니까...”
어두운 파도처럼 밀려오는 말들에 대항해보려 조그맣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을 거란 걸 알 것 같았다.
그가 얼마나 교활했든.
그가 얼마나 사악했든.
“저의 죄입니다.”
조용하게 말하는 남희신의 눈빛은 담담해 보였고, 말투도 그러했다. 강징을 쳐다보지도 않는 채로.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그가 저를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무엇 때문일지.
“아직도 그를, 친구로 생각하십니까?”
참다 못해 직설적으로 퍼부어버리는 강징의 말에 남희신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아무리 부정직한 사람이라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전부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관계의 전부가 거짓이 될 수도 없는 겁니다.”
“......”
“예. 광요는 저의 친구입니다.”
강징은 묵묵했다. 무척 무거운 한 마디가. 허공에 닿자 아무 무게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듯한 허망함이 가슴을 쳤다.
그리고.
비로소 남희신이 이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의미를 깨달은 강징은 갑작스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금방은 시렸던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서늘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겁고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도 끝내, 싫지는 않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응어리가 점점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강징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부사가 달려들었다.
“종주, 이제 제초를 시작해도 됩니까? 아직 마구간지기들이랑 요리사들도 움직이질 못해서...”
그가 숨이 막힐 듯 쏟아내는 말을 듣자마자 강징은 안색이 변하며 저 쪽으로 끌어갔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뭐라뭐라 말을 주고받고 짜증도 내는 강징을 지켜보는 남희신의 얼굴에 마치 병자에게 핏기가 돌아오는 듯 은은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윽고 곁으로 돌아온 강징에게 그가 말했다.
“강종주. 다음에는 그냥 수룡화가 만개했을 때 저를 부르십시오.”
그의 말에 역시 열적어진 강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희신이 웃는 낯을 보이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강징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는 남희신은 생각했다.
다음이라.
다음이란 게 있을런지.
강만음이 음인으로서 완전히 개화하게 되면, 양인인 자신은 더이상 그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된다.
차라리 강종주가 이대로 반각성 상태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이기적인 희망을 품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희신강징
“남잠, 뭐해?”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엄해 보이는 얼굴에 따스한 기운이 스쳤다.
“택무군이신가...?”
금방 남망기가 바라보고 서 있던 하얀 형체는 너무 멀어져서 분간하기 힘들었다.
“배고프네. 나 밥 먹어야겠어. 같이 가자!”
곧장 위무선이 조르는대로 두 사람은 길을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사설을 늘어놓는 위무선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이 그지없이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심은 속이 달랐다.
남희신이 하루 일찍 출발한다는 말에 남망기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달포 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가깝지도 않은 운몽에서 의논할 일이 뭐그리 많다는 건지.
고소 남씨는 두 형제가 함께 이끄는 집안이라 남망기가 모를 일이란 없을 텐데 영 수상했다.
게다가 상대가 강만음이고 보니.
겉으로 표현하거나 설왕설래하는 일은 없지만, 남망기는 위무선을 속속들이 잘 알았다.
위무선이 강만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절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내일이 운몽 강씨 주최의 사냥대회이며 남희신의 목적지가 바로 그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말하기를 피한다는 것.
남망기와 위무선은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주로 말하는 사람은 위무선이다. 그렇게 말 많은 위무선이, 어릴 적의 얘기만큼은 잘 하지 않는다는 걸 남망기는 눈치채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다면 일부러 말을 피할 리 없다.
언젠가는 위무선이 의뭉스럽게 말을 돌리길래 캐어 묻자. -나 죽었었던 걸 몰라? 전생이나 마찬가지라니까. 기억 안 나. 라며 웃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던가.
남망기는 옅어지고 있는 관음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전생같다며 외면하고 과거를 다 없던 일로 하려는 소리에, 이 가슴도 시큰한 감정을 느꼈는데.
반평생을 같이 살았던 형제는 대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날이 그와 한 몸처럼 되어가며, 위무선이 피하는 부분은 오히려 남망기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더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고, 세상도 이 이상 평화로울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따금씩 자기주장을 하며 찔러대는 작은 가시에. 남망기는 현재의 평화를 완전하게 느끼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운몽으로 날아가고 있는 남희신도 의문스럽게 여기는 중이었다.
강징이 사냥회를 열면서 하루 일찍 오라는 기별을 보냈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일찍 갔을 텐데, 왜 굳이 확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희신은 아침부터 출발했다.
대사냥 전일이라 그런지 연화오는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풍이 휘몰아치듯 바삐 움직이고 있으니, 그 가운데 서서 이리저리 명령을 내리는 강징을 찾기는 쉬웠다.
남희신은 온 것을 알리지 않은 채 잠시 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기가 센 성격의 일환이랄지, 강종주는 참 멋쟁이였다.
가을의 강한 광선에 반사된 금관의 빛이 눈부셨다. 매끄러운 보랏빛 장포에도 금실의 수가 놓여 반짝반짝 빛난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친밀하게 부를 수 있게 된 순간이 무엇보다 기분 좋았다.
“오셨습니까, 택무군.”
무슨 일인지 잔뜩 줄이 가 있던 이마가 남희신을 보자마자 옅어지며 미소마저 띠었다.
그런 변화도 무척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안팎으로 시끄러우니 잠시 나가자고 말하는 강징을 따라 연화오를 나섰다.
낯선 장소에서 만나 유람하듯 돌아다닐 때도 제법 있어 산책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희신과 나란히 서서 걷는 강징은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몇 달 전 남희신이 서두를 꺼내었던 일은 긁어부스럼 같아서 그가 언급하지 않자 그냥 흐지부지 되려는가 보다고 강징은 다행스럽게 여겼다.
솔직히 강징은 지금도 남희신을 너무 많이 믿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마음을 너무 놓아버리는 바람에 어떤 때에는 급한 성격에 말이 함부로 나가서 뜨끔할 때도 있는데, 그래도 남희신은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본 것처럼 웃어넘겼다.
그럴 때면 정말로 말썽을 피우는 동생이 된 것 같아서 부끄러운데,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싫기는 커녕...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한참을 걸어 호수를 벗어나고 숲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어도 남희신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가는대로 따르겠다는 듯 한담만 이어갔다.
그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동요하는 일이 드문 남희신이었지만. 숲나무가 옅어지고 넓은 들판에 다다르자 걸음이 우뚝 멈추며 새로운 표정이 스쳤다.
맞은편 산이 넘겨다보이는 너른 지역에, 수룡화가 가득 피어 있었다.
수룡화의 끄트머리는 화살촉 모양으로 솟았는데 부드럽고 높았다. 그보다 아래에 달린 꽃망울들은 짙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바람이 불면 마치 새파랗게 잠긴 물 위에서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하얀 화살촉들이 춤을 추었다.
마침 살랑살랑 꽃을 움직이던 바람을 덮치듯 커다란 돌풍이 불어오자, 미세하게 귓속을 터뜨리는 듯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이 저 너머까지 퍼져나가며 흰 빛이 푸른빛을 일제히 덮어버렸다.
꿈과 같이 신기한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해마다 운몽 강씨가 이 곳에서 사냥회를 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줄은 몰랐군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하는 남희신의 목소리도 꿈 속인듯 나직하고 조용조용했다.
“금방 하신 말씀이 이유입니다. 자리를 마련하려고 사냥회 전에 풀을 다 베어버리거든요.”
“그렇다면 올해는 장소를 바꾸었습니까?”
강징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아뇨, 이제 베어야지요.”
사냥회를 열겠다고 마음 먹었을때, 문득 남희신이 읊었던 고시에 수룡화가 등장했던 것이 떠오른 강징은 꽃을 베기 전에 그에게 보이자 싶었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의 호의가 부끄러워져 그만 돌아가자는 듯 외로 꼬고 서서 무언으로 재촉하는데.
남희신은 물끄러미 저편을 바라보며 말도 없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무겁게 돌린 시선이 강징에게 향해, 이번에는 강징에게 못이 박혀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엇에 취하거나 즐거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눈이 오래도록 주시하자 강징은 영문을 모른채 조금씩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 때 불야천에서.”
긴장했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불야천이라니. 하지만 똑똑하게 울리는 발음은 두 번 확인할만치 불분명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대열도 없이 퍼부어지는 적들에 마치 지옥도가 펼쳐진 듯했지요. 저쪽쯤에 자색 무리들이 보였으니, 아마 강종주도 그 편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흑단같은 눈알이 앞을 주시하는채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키자 강징은 마치 그가 말하는 불야천으로 옮겨간 듯 오소소한 느낌이 들었다.
남희신이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이 되어 적도 아군도 무시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더랬습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명결 형님을 구해 나오는 광요와 마주쳤지요.”
강징은 그의 말을 들으며 연유를 몰라도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남희신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일은. 저도 건너건너 듣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압기를 견디다못해 입을 연 강징을 가로막으며 그가 말했다.
강징의 곁에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뚫어져라 주시하며, 그 입술에서 건조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그 때, 광요가 진심으로 형님을 구해내려 했다는 말을 다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강징을 외면하고 남희신은 광활하게 펼쳐진 꽃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무나도 용의주도하게 잘 해냈지.
-보통 사람은 감히 시도도 할 수 없는 일들인데.
강징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서 있었다. 파랗고 하얀 안개 옆에 선 남희신의 모습이 아름답고도 덧없게 느껴져서, 무척 먼 느낌이라서. 안타까운 마음에 자칫 손을 내밀 뻔한 것을 참았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한 착각을 덮으며 다시금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이 종식된 후, 저는 두 사람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의형제를 맺고, 한편으로는 가문에서 자리잡는 그를 돕기도 하고.
그리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면서 그 의심을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광요가 제가 아는 사람이길 바랬고.
계속 저의 친우로 남아 주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모든 사람들이 속아넘어간 일이잖습니까...”
어두운 파도처럼 밀려오는 말들에 대항해보려 조그맣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을 거란 걸 알 것 같았다.
그가 얼마나 교활했든.
그가 얼마나 사악했든.
“저의 죄입니다.”
조용하게 말하는 남희신의 눈빛은 담담해 보였고, 말투도 그러했다. 강징을 쳐다보지도 않는 채로.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그가 저를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무엇 때문일지.
“아직도 그를, 친구로 생각하십니까?”
참다 못해 직설적으로 퍼부어버리는 강징의 말에 남희신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아무리 부정직한 사람이라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전부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관계의 전부가 거짓이 될 수도 없는 겁니다.”
“......”
“예. 광요는 저의 친구입니다.”
강징은 묵묵했다. 무척 무거운 한 마디가. 허공에 닿자 아무 무게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듯한 허망함이 가슴을 쳤다.
그리고.
비로소 남희신이 이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의미를 깨달은 강징은 갑작스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금방은 시렸던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서늘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겁고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도 끝내, 싫지는 않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응어리가 점점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강징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부사가 달려들었다.
“종주, 이제 제초를 시작해도 됩니까? 아직 마구간지기들이랑 요리사들도 움직이질 못해서...”
그가 숨이 막힐 듯 쏟아내는 말을 듣자마자 강징은 안색이 변하며 저 쪽으로 끌어갔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뭐라뭐라 말을 주고받고 짜증도 내는 강징을 지켜보는 남희신의 얼굴에 마치 병자에게 핏기가 돌아오는 듯 은은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윽고 곁으로 돌아온 강징에게 그가 말했다.
“강종주. 다음에는 그냥 수룡화가 만개했을 때 저를 부르십시오.”
그의 말에 역시 열적어진 강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희신이 웃는 낯을 보이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강징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는 남희신은 생각했다.
다음이라.
다음이란 게 있을런지.
강만음이 음인으로서 완전히 개화하게 되면, 양인인 자신은 더이상 그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된다.
차라리 강종주가 이대로 반각성 상태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이기적인 희망을 품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희신강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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