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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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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시간이 흘러, 슬슬 더워지는 계절이 왔다.
운몽에서는 낮기온이 제법 올랐지만 녹음에 짙게 싸인 운심부지처는 아직 반 계절이 덜 온듯 서늘했다.
반쯤 창을 가린 발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수염을 간질거리자 강징이 잠결에 입을 오물거렸다.
청량한 공기에, 사방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몸을 얹고 있는 바닥을 통해 희미하게 끼치는 고동이 또한 믿음직하게 지켜주는 느낌이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안락감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그때 돌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징은 깜짝 놀라며 단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정말로 눈 앞에 낯선 사내가 보이자 강징은 경악을 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쿵쾅거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휴, 귀엽구먼.”
심지어 사내가 몸을 가까이 숙이며 손가락으로 건드리려고 하자, 아직 머리가 돌지 않은채 신경이 바짝 곤두선 강징은 마구 하악질을 하며 작은 발로 위협을 해댔다.
“죄송합니다만, 많이 예민한 상태라.”
남희신이 강징을 안은 팔을 뒤로 물리자, 사내는 대수롭잖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 후 남희신이 사내와 이야기를 나눌 동안 다독다독하는 손길이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내내 가슴이 들먹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사람으로 돌아온 뒤, 강징이 곧바로 화를 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택무군!”
가만히 강징을 쳐다보던 남희신이 대꾸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일부러 그런 거니까.”
“뭐가 어째요? 일부러라고요?! 그따위 허약한 수인을 타고 난 것이 얼마나 큰 약점인데, 당신은! 당신... 당신에게 말할 때도 반각성 때문이 아니라 수인이 알려질 것이 싫어서 망설였던 걸 모르십니까!”
“잘 압니다. 바로 그래서입니다.”
“......!”
아무리 험상궂게 노려보아도, 남희신은 털끝만큼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 날 이때까지 강징은 난폭하게 굴면서도 그에게는 함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본디 고지식하여 윗사람에게 약한 성격인데다, 남희신은 동년배임에도 한참 손윗사람처럼 느껴지게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희신은 변명할 이유조차 없다는 듯 담담했다.
사람은 상대가 기대한 만큼 반응하지 않으면 맥이 풀리는 법이었다. 남희신이 열화같은 분노에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강징도 기세가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사실은 남희신의 실수가 맞았다.
강징의 수인화가 워낙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데다, 그도 잠자는 강징을 팔에 얹어두고 서적을 뒤적이거나 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누군가 찾아왔다는 말에 그만 들어오라고 대답해버린 것이었다.
별 것 아닌 실수였고, 실제로는 이 작은 고양이가 강징이라는 사실을 상대가 알아챌 리도 없었다.
하지만 남희신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강징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짓이었다.
남희신의 치료법은 단순히 강징을 편한 상태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강징이 몸을 맡기고 타인에게 밀착해 있는 이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를 한점 의심도 들지 않는 안식처로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남희신은 강징에게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태산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한편으로 강종주에게는 뻔뻔하게 구는 것이 오히려 먹히는 수라는 사실을 남희신은 잘 알고 있었다.
“강종주. 어떤 상황이 닥쳐도 저는 당신의 비밀을 지킬 것이고, 보호해 드릴 겁니다.”
여전히 씩씩대고 있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말했다.
“예전에 했던 무례한 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만, 그것도 당신을 걱정해서 그랬던 겁니다. 저는 당신의 각성을 위한 매개체입니다. 그러니 저를 믿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를 믿지 못하면, 반각성을 벗어나기는 힘들 겁니다.”
남희신은 끈기있게 말을 이으며 강징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과연 의도한대로 강징의 분노가 서서히 걷혀가는 것 같았다.
그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남희신의 마음 속에서는 안심을 하면서도 어딘지 못마땅하게 느끼는 감정이 일었다.
억지로 흥분을 억누른 강징이 웅얼거리며 불평했다.
“...말이 쉽지. 그게 사람 맘대로 되는 겁니까.”
벌컥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는 느낌 외에도, 내가 뭘 보고 당신을 믿어야 하느냐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남희신이 살풋 웃었다.
“어떻게 하면 저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
“숙제입니다. 방법을 생각해 오십시오.”
“...!!!”
아직 화가 났던 흥분도 다 가시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느낌이 든 강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이 나이에, 남의 품에 애완동물처럼 마구 안기더니, 이제는 숙제까지 하라고!!!
“오늘은 저도 일이 있어서 일찍 실례하겠습니다. 숙수에게 말해 놓았으니 금일의 식사는 괴롭지 않을 겁니다. 그럼.”
심경이 복잡해진 강징이 어물어물 하는 사이 남희신은 휙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갑자기 혼자가 되고 보니 강징은 썰렁하고 얼떨떨한 느낌이 들었다.
억지로 누르고 있던 흥분이 서서히 퍼지며, 성가신 생각에 짜증도 솟았다.
그러나 난제는 난제였다.
홧증을 삭히듯 식은 차를 거푸 들이키던 강징은 다시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생각이 깊어졌다.
믿는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우선은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떠올려보았다.
먼저 핏줄이 이어진 사람들.
물론 강징은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믿는다는 건 사랑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부친, 모친은 물론이고. 심지어 상냥했던 누님조차 믿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강징은 심장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녀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 하나가 박혀 있었다.
누님이 저를 사랑해주긴 했지만, -누구나 그렇듯-위무선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 같았기에. 혹시나 그것을 현실로 보게 될까 두려워, 그와 똑같은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이후에 새롭게 만난 인연들, 함께 동고동락하며 운몽 강씨를 이끌고 성처럼 우뚝 세우기에 이르렀던 사람들, 목숨을 걸고 충심을 바치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마저도 강징은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여태 아무도 믿었던 적이 없다는 말인가?
강징은 멍해진 채 습관적으로 툭툭 다탁을 두들겼다.
현재 유일한 핏줄이며 가장 가까운 존재인 금여란은, 믿는다기보다는 그 편에서 자기를 믿게 하고 지켜줘야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끝내 생각의 끝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대에 이르자 강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부정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절대로 그를 믿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동조해줄 거라 믿지 않았고, 함께 해줄 거라고도 믿지 않았다.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그가 난장강으로 가버렸을 때에도, 예상대로 당연하게 배신해버렸다는 생각에 화가 났던 거였다.
역시 너는 나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죽도록 분노했던 거라고.
하지만 그를 믿지 않았던 것이 틀린 일은 아니지 않는가.
금단을 떼어 준 건 키워준 이 집안에 빚을 갚으려고 한 행위일 뿐이었고. 
죽음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도 저를 찾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다.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할 뻔한 마음을, 이성적인 다른 마음이 잔인하게 짓눌렀다.
자업자득인 게 아니냐고.
내가 누구도 믿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믿었겠냐고.
너무도 깊게 파고든 생각을 끌고 남희신이 있는 현실로 돌아오자, 한없이 우울하고 막막했다.
심지어 그는 나와 아예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그를 믿게 될 수 있단 말인가?...




***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강징의 갈등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임시로 막아둔 둑이 터진 것과 같았다.
몇 년 간 아주 가끔 우연히 스칠 기회가 있을 뿐, 살갑게 대화 한 번 해보지 못했던 사람을 떠올리자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없었다.
아이를 갖는다고 이 고독감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나.
다 집어치우자. 부질없는 짓이다. 끝내버리자.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결단을 내렸더니, 강징은 차라리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자, 매일 시작되는 날들이 더이상 예전같지 않았다.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임에도 잠자리에 들면 금세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생각만큼 우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문득 남희신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느끼고, 강징은 화가 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이 머릿속에 든 지옥도야 어디를 가리키던지 그를 만나고 싶고. 그의 품 속에서 자그맣게 몸을 말고 쉬는 안식을 맛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어딜 가는 거냐?”
큰걸음으로 바삐 움직여 가던 부사가 얼른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기산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내일 정오에 출발할까 합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예...? 그러시면...”
“내가 갈테니, 너와 부총령이 남거라. 그리고 호수 감시탑에 보냈던 분대를 도로 불러들여 합류시켜.”
“예!”
강징이 갑자기 말을 바꾸어 조목조목 지시해도 부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칼같이 받들고는 바로 전서조를 보내러 달려갔다.
결국에 마음을 돌린 강징이었지만, 다음으로는 남희신이 던졌던 질문으로 골이 아파왔다. 
숙제라 하니, 성격상 답을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이 짓눌렀다.
높은 마루에 앉아 광활하게 호수가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도 답답하기만 했다.




희신강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