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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07:36
전편 https://hygall.com/597527385
햇빛이 쨍쨍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들은 희부연 빛그림자 뒤에 있던 남희신을 보지 못하고 우르르 달려갔다.
소년 수사들이 저렇게 즐거워하며 떼로 몰려가면, 아마 그 끝에는 위공자가 있기 십상이었다.
괜시리 소년들이 놀라 자빠지지 않도록, 남희신은 그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간 후에야 나무 뒤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갔다.
금일 강종주가 다시 찾아올 예정이었다.
전에는 가능한 멀리하려고 노력하던 사람을 지금은 하루도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강징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안고 찾아온 뒤로 얼마나 고뇌했는지.
용기 없는 마음을 숨기고, 단지 그와 가까이 있기 위해 이용하게 되는 건 아닐까 숱하게 고민했지만.
역시 그가 잘못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강징의 언동으로 보아 자신이 거절하면 어디서든 약을 구해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죄책감은 깊숙이 밀어두고, 대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전하게 각성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불사하겠다는 결심대로, 남희신은 벌써 몇 차례나 규훈를 어기는 거짓말을 했다.
가장 큰 거짓말은 제일 처음에 나왔다.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약 없이 반각성을 벗어나게 할 방법이 있다는 말은 남희신의 독단이었다.
그가 시도하는 방법, 이론이 터무니없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이런 식으로 치료해낸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반각성의 원인에 기대어 추측한 실험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강징에게 대답했던 말들도 거짓이었다.
과거에 그가 겪었던 재난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긍정했다간, 그의 가족들의 죽음을 포함하여 위무선의 존재까지 물위로 떠오르며 심경이 더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부정했다.
이런 정신의 병은 머릿속이 복잡해져봐야 하등 좋을 게 없다는 이유였다.
금단을 일깨우는 수련처럼, 차라리 마음을 일심으로 모아 다스리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판단해서 냉철하게 거짓말을 했다.
앞으로도 숱하게 속여야 할 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친우도, 형제도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의 의원이니까.
둘 사이에 진실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누군가를 핏줄처럼 편히 느끼고, 존재계에 받아들여지는 듯한 안락감을 ‘의식’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반각성이 풀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깊은 이완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상하고서, 매우 떨떠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작은 짐승을 남희신은 역시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어 올렸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체념한 듯 대롱대롱 달려 올라오는 강징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귀여워서 깊게 묻어둔 감정이 지끈거렸다.
넓은 소매 위에다 소중하게 안고 다독거리자, 강징은 나름 애를 쓰는 듯 머리를 낮추고 엎드렸다. 하지만 앞발은 긴장한 채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남희신은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살짝살짝 쓰다듬으며 몸짓으로 안심시켰다.
이번에는 목덜미를 꼬집는 대신 가볍게 털결을 쓸어주기만 하며 긴장이 풀어지기를 기다렸다.
외곽 쪽에 위치한 객실 안은 고요했다. 벽을 사이에 두고 한겹 불투명해진 새소리만 먹먹하게 들려왔다.
작은 고양이의 코가 경계하듯 움찔움찔하며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폭 감싸인 남희신의 품이 넓어서 품위 있는 목향만 진하게 느껴지자. 전신에 퍼졌던 긴장감이 눅어들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남희신은 그를 받치고 있는 팔을 돌덩이처럼 유지한 채 살짝 엿보았다. 강징은 눈을 꼭 감고 있었고, 분홍빛 코 아래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후 남희신은 움직이지 않는 채로 두 시진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을 것 같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벌써 타인의 품 안에서 잠이 들다니, 좋은 징조였다. 더 깊게, 더 오래 잘수록 좋은 일이었다.
곤히 잠이 든 강징을 안고 바라보며, 남희신은 두 팔이 좀 더 무겁게 느껴졌으면 하는 막연한 욕망을 느꼈다. 좀 더 묵직하게 그를 느낄 수 있으면, 시린 가슴이 달래질 지 몰랐다.
그의 팔에 얹어진 몸은 그토록 덧없이 느껴질 정도로 가볍고 작았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광선이 낮아지고 색감이 바뀔 때가 되어서야 강징은 깨어났다.
깜박 눈을 뜬 다음에는, 어디 있는지도 잊었는지 판판한 옷자락 위에서 쭈욱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 나서 화들짝 놀란 고양이가 눈을 치뜨며 쳐다보자, 남희신은 사람 좋게 웃어줄 도리밖에는 없었다.
“정말... 이런 방법이 먹히는 겁니까?”
옷을 입은 후, 곧장 남희신이 저녁상을 들여오게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겸상으로 밥까지 먹게 된 강징이 투덜거렸다. 오늘은 참을 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나절이나 퍼질러 자버리다니. 너무 민망해서 화가 났다.
“의술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몇 번이나 해야...”
“반응을 보아 가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니, 뭐라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느 천년에 각성할 수 있겠냐고, 강징은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밥을 콱콱 씹었다.
먹다 보니 기분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찬이 심심해서 맛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맛도 똑 떨어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회담이니 뭐니 우연히 만날 날만 기다려서야 언제쯤 되겠습니까?”
“강종주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한가할 때 연화오를 방문하지요.”
듣는지 마는지 찬찬히 밥만 씹던 남희신이 그렇게 말하자, 강징은 욱 하고 음식이 목에 막히는 것 같았다.
“아니, 당신을 귀찮게 하자는 얘긴 아니었고요...”
남희신이 살풋 웃었다.
“저 많이 한가합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니, 정말로...”
강징이 곤란한 듯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비틀었다.
고소 남씨가 청담회 자리를 마련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봄 다과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한 것이 저 때문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하지도 않은데, 갑자기 방문이 잦아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겁니다.”
남희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렇군요.”
“차라리 밖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호를 정해서, 누구인지 모르게 연통을 넣죠.”
“괜찮은 방법이군요.”
남이 뭐라든 상관없다느니 하고 잘라버리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했던 강징은 그가 선선히 동의하자 낯빛이 밝아졌다.
고소에서 약속을 잡으면 그에게 끼치는 민폐를 줄일 수 있겠지.
거대 세가의 주인을 안방까지 불러다가 침대삼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역시 생긴대로 살 걸 그랬다고 강징은 괜한 욕심을 냈던 걸 후회했다.
***
고소 남씨의 주인이 틈만 나면 장서각에 묻히는 모습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남희신은 비는 시간을 반각성과 유사한 심환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몽땅 소모했다. 그러면서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근심했으며,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마음도 몹시 어지러웠다.
언젠가부터 무척 성을 잘 내는 어떤 지인이 눈에 밟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남희신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와 남희신의 사이에는 뾰족뾰족 건너기 힘든 가시가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각자가 지금은 네 개의 탑처럼 솟은 권세가의 주인들이며, 양쪽 다 손이 부족한 집안이었다.
남희신은 선도를 닦는다는 핑계로 혼인을 미루고 있었지만, 강종주의 사정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음인이고, 손이 부족함에도 무수한 혼담을 거절하는 강징이 사실은 위공자에게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다.
위무선이 돌아온 후에는 의심이 풀렸지만, 그렇다고 강징이 한치라도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지기가 그의 불행에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에 남희신은 뼈아픈 죄책감 하나를 더 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묻어 버리려고 했다.
강징에게 아무 일 없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다 해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사건은 하늘이 괴롭히려는 건지. 아니면 속죄할 기회라도 주려는 건지 몰랐다.
강징이 개인적인 일 때문에 혼자 있는 방으로 걸어들어오면 남희신은 마치 침으로 찔린 듯이 아픈 희열이 돋았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그와 가깝게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가슴에 안으면 못처럼 고요했던 내면에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일어났다.
만약, 만약에.
강징을 반각성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성공하고, 그가 순조롭게 다른 누군가와 혼인하게 된다면.
친근하게 말 한 마디 섞어본 적도 없을 때, 손 끝 하나 대 본 적도 없이 스치기만 할 때에는 아슬아슬하게 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창처럼 무참하게 가슴을 저며대었다.
그래서 나중 일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남희신은 무던히도 인내했다.
한편,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하면.
강징은 부담스러움과 민망함에 삶기면서도, 의심하지는 않았다.
남희신의 호언장담만은 매우 성공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강징은 아무리 거북하거나 힘든 과정을 거칠지라도 그가 반드시 각성하게 해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 시점에서 강징의 문제는, 남희신이 시간이 빈다는 연통을 너무 자주 넣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사실은 강징도 수확철만 아니면 바쁘지 않았지만.
달도 가기 전에 몇 번씩이나 그를 오라가라 하는 것이 불편했다. 하긴, 가능한 자주 만나 얼른 반각성을 탈출하는게 그를 돕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자꾸 운몽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도 골치거리였다.
이번에도 선공을 때리는 것처럼 근방에 볼일이 있어 들르겠다고 알려 왔으니, 다시 연통을 보내 따지는 것도 거북하여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희신강징
햇빛이 쨍쨍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들은 희부연 빛그림자 뒤에 있던 남희신을 보지 못하고 우르르 달려갔다.
소년 수사들이 저렇게 즐거워하며 떼로 몰려가면, 아마 그 끝에는 위공자가 있기 십상이었다.
괜시리 소년들이 놀라 자빠지지 않도록, 남희신은 그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간 후에야 나무 뒤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갔다.
금일 강종주가 다시 찾아올 예정이었다.
전에는 가능한 멀리하려고 노력하던 사람을 지금은 하루도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강징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안고 찾아온 뒤로 얼마나 고뇌했는지.
용기 없는 마음을 숨기고, 단지 그와 가까이 있기 위해 이용하게 되는 건 아닐까 숱하게 고민했지만.
역시 그가 잘못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강징의 언동으로 보아 자신이 거절하면 어디서든 약을 구해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죄책감은 깊숙이 밀어두고, 대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전하게 각성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불사하겠다는 결심대로, 남희신은 벌써 몇 차례나 규훈를 어기는 거짓말을 했다.
가장 큰 거짓말은 제일 처음에 나왔다.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약 없이 반각성을 벗어나게 할 방법이 있다는 말은 남희신의 독단이었다.
그가 시도하는 방법, 이론이 터무니없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이런 식으로 치료해낸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반각성의 원인에 기대어 추측한 실험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강징에게 대답했던 말들도 거짓이었다.
과거에 그가 겪었던 재난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긍정했다간, 그의 가족들의 죽음을 포함하여 위무선의 존재까지 물위로 떠오르며 심경이 더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부정했다.
이런 정신의 병은 머릿속이 복잡해져봐야 하등 좋을 게 없다는 이유였다.
금단을 일깨우는 수련처럼, 차라리 마음을 일심으로 모아 다스리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판단해서 냉철하게 거짓말을 했다.
앞으로도 숱하게 속여야 할 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친우도, 형제도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의 의원이니까.
둘 사이에 진실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누군가를 핏줄처럼 편히 느끼고, 존재계에 받아들여지는 듯한 안락감을 ‘의식’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반각성이 풀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깊은 이완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상하고서, 매우 떨떠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작은 짐승을 남희신은 역시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어 올렸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체념한 듯 대롱대롱 달려 올라오는 강징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귀여워서 깊게 묻어둔 감정이 지끈거렸다.
넓은 소매 위에다 소중하게 안고 다독거리자, 강징은 나름 애를 쓰는 듯 머리를 낮추고 엎드렸다. 하지만 앞발은 긴장한 채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남희신은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살짝살짝 쓰다듬으며 몸짓으로 안심시켰다.
이번에는 목덜미를 꼬집는 대신 가볍게 털결을 쓸어주기만 하며 긴장이 풀어지기를 기다렸다.
외곽 쪽에 위치한 객실 안은 고요했다. 벽을 사이에 두고 한겹 불투명해진 새소리만 먹먹하게 들려왔다.
작은 고양이의 코가 경계하듯 움찔움찔하며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폭 감싸인 남희신의 품이 넓어서 품위 있는 목향만 진하게 느껴지자. 전신에 퍼졌던 긴장감이 눅어들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남희신은 그를 받치고 있는 팔을 돌덩이처럼 유지한 채 살짝 엿보았다. 강징은 눈을 꼭 감고 있었고, 분홍빛 코 아래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후 남희신은 움직이지 않는 채로 두 시진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을 것 같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벌써 타인의 품 안에서 잠이 들다니, 좋은 징조였다. 더 깊게, 더 오래 잘수록 좋은 일이었다.
곤히 잠이 든 강징을 안고 바라보며, 남희신은 두 팔이 좀 더 무겁게 느껴졌으면 하는 막연한 욕망을 느꼈다. 좀 더 묵직하게 그를 느낄 수 있으면, 시린 가슴이 달래질 지 몰랐다.
그의 팔에 얹어진 몸은 그토록 덧없이 느껴질 정도로 가볍고 작았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광선이 낮아지고 색감이 바뀔 때가 되어서야 강징은 깨어났다.
깜박 눈을 뜬 다음에는, 어디 있는지도 잊었는지 판판한 옷자락 위에서 쭈욱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 나서 화들짝 놀란 고양이가 눈을 치뜨며 쳐다보자, 남희신은 사람 좋게 웃어줄 도리밖에는 없었다.
“정말... 이런 방법이 먹히는 겁니까?”
옷을 입은 후, 곧장 남희신이 저녁상을 들여오게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겸상으로 밥까지 먹게 된 강징이 투덜거렸다. 오늘은 참을 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나절이나 퍼질러 자버리다니. 너무 민망해서 화가 났다.
“의술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몇 번이나 해야...”
“반응을 보아 가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니, 뭐라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느 천년에 각성할 수 있겠냐고, 강징은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밥을 콱콱 씹었다.
먹다 보니 기분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찬이 심심해서 맛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맛도 똑 떨어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회담이니 뭐니 우연히 만날 날만 기다려서야 언제쯤 되겠습니까?”
“강종주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한가할 때 연화오를 방문하지요.”
듣는지 마는지 찬찬히 밥만 씹던 남희신이 그렇게 말하자, 강징은 욱 하고 음식이 목에 막히는 것 같았다.
“아니, 당신을 귀찮게 하자는 얘긴 아니었고요...”
남희신이 살풋 웃었다.
“저 많이 한가합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니, 정말로...”
강징이 곤란한 듯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비틀었다.
고소 남씨가 청담회 자리를 마련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봄 다과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한 것이 저 때문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하지도 않은데, 갑자기 방문이 잦아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겁니다.”
남희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렇군요.”
“차라리 밖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호를 정해서, 누구인지 모르게 연통을 넣죠.”
“괜찮은 방법이군요.”
남이 뭐라든 상관없다느니 하고 잘라버리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했던 강징은 그가 선선히 동의하자 낯빛이 밝아졌다.
고소에서 약속을 잡으면 그에게 끼치는 민폐를 줄일 수 있겠지.
거대 세가의 주인을 안방까지 불러다가 침대삼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역시 생긴대로 살 걸 그랬다고 강징은 괜한 욕심을 냈던 걸 후회했다.
***
고소 남씨의 주인이 틈만 나면 장서각에 묻히는 모습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남희신은 비는 시간을 반각성과 유사한 심환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몽땅 소모했다. 그러면서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근심했으며,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마음도 몹시 어지러웠다.
언젠가부터 무척 성을 잘 내는 어떤 지인이 눈에 밟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남희신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와 남희신의 사이에는 뾰족뾰족 건너기 힘든 가시가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각자가 지금은 네 개의 탑처럼 솟은 권세가의 주인들이며, 양쪽 다 손이 부족한 집안이었다.
남희신은 선도를 닦는다는 핑계로 혼인을 미루고 있었지만, 강종주의 사정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음인이고, 손이 부족함에도 무수한 혼담을 거절하는 강징이 사실은 위공자에게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다.
위무선이 돌아온 후에는 의심이 풀렸지만, 그렇다고 강징이 한치라도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지기가 그의 불행에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에 남희신은 뼈아픈 죄책감 하나를 더 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묻어 버리려고 했다.
강징에게 아무 일 없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다 해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사건은 하늘이 괴롭히려는 건지. 아니면 속죄할 기회라도 주려는 건지 몰랐다.
강징이 개인적인 일 때문에 혼자 있는 방으로 걸어들어오면 남희신은 마치 침으로 찔린 듯이 아픈 희열이 돋았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그와 가깝게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가슴에 안으면 못처럼 고요했던 내면에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일어났다.
만약, 만약에.
강징을 반각성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성공하고, 그가 순조롭게 다른 누군가와 혼인하게 된다면.
친근하게 말 한 마디 섞어본 적도 없을 때, 손 끝 하나 대 본 적도 없이 스치기만 할 때에는 아슬아슬하게 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창처럼 무참하게 가슴을 저며대었다.
그래서 나중 일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남희신은 무던히도 인내했다.
한편,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하면.
강징은 부담스러움과 민망함에 삶기면서도, 의심하지는 않았다.
남희신의 호언장담만은 매우 성공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강징은 아무리 거북하거나 힘든 과정을 거칠지라도 그가 반드시 각성하게 해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 시점에서 강징의 문제는, 남희신이 시간이 빈다는 연통을 너무 자주 넣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사실은 강징도 수확철만 아니면 바쁘지 않았지만.
달도 가기 전에 몇 번씩이나 그를 오라가라 하는 것이 불편했다. 하긴, 가능한 자주 만나 얼른 반각성을 탈출하는게 그를 돕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자꾸 운몽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도 골치거리였다.
이번에도 선공을 때리는 것처럼 근방에 볼일이 있어 들르겠다고 알려 왔으니, 다시 연통을 보내 따지는 것도 거북하여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희신강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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