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2157934
view 1158
2024.04.27 09:19
1부 끝!


Baldur's Gate 3_20240414093324.png



 

살아있는 악몽을 마주한 탓인지 오늘 네 꿈자리가 유독 사납다. 


 

네 뺨에서 흙바닥의 눅눅한 감촉이 느껴진다. 진탕은 희끄무레한 먼지를 피어올리지도 않고 벌어지는 살육극을 목도하게 만들 뿐이다. 네 시야에 고함을 내지르며 지시를 내리는 대장과 필사적으로 대열을 수복하는 대원들이 보인다. 그들이 비홀더의 광선에 한 명씩 허물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도. 마비 광선이 그들을 무력화하고 살상 광선이 그들의 숨을 육신에서 뜯어낸다. 수십개로 겹을 이루는 이빨이 광포하게 입질하며 허기를 채우자, 네 주위에는 사지가 뜯겨나간 시신이 즐비해 있다. 뜨거운 피가 연신 너를 덮쳐 네 몸이 식을 새가 없다.


 

너는 건너편에 누워있는 친구의 눈을 본다. 활짝 열린 검은 동공이 네게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다: 허튼 짓 하지 마. 그대로 누워있어. 나선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기껏해봤자 놈의 위장 한켠을 채워주는 역할이나 하게 되겠지. 저 쓰러져가는 놈들은 죽어 마땅한 것들이었어. 물건 하나 나르자고 사람을 서슴없이 속이고, 죽이고, 갈취하던 개자식들이라고. 그 죗값을 받고 있는 것뿐이잖아. 전부 쓰레기들이야.


 

아니, 혹은, 그것이 진정으로 친구가 호소하는 바였을까? 어쩌면 그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운이 좋으면 우리가 놈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길지도 모르잖아. 남아있는 대원들의 목숨을 구하고, 어쩌면 뒤이어 이 길목을 지날 여행자들을 살릴 수도 있겠지. 아무리 비열한 악행을 저질러왔다 한들 저들은 우리의 가족이야. 그중에는 네 스승도 있잖아. 정말 이대로 모두를 외면할 셈이야?


 

어느 것이 친구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인지 너는 알 길이 없다. 혹은 그들 전부가 광증에 잠긴 네 머리가 제멋대로 지어낸 망상일 수도. 네가 현실과 상상의 길목에서 미적거리며 인식을 유예하고 있는 동안 수가 한정된 죽음이 마지막 순번에 달한다. 코앞으로 단검 예찬론자의 텅 빈 눈동자가 쏟아져내릴 적에, 너는 망연히 떠올린다: 만약 저들이 쓰레기라면, 그 쓰레기들이 전부 죽어갈 때까지 방관하고 있던 너는 무엇일까.


 

너는 눈을 감지만, 검은 눈꺼풀이 단검 예찬론자의 육신을 씹어먹는 소리까지는 막아내지 못한다. 육중한 거죽덩어리가 살점을 씹고 뼈대를 바수어뜨리는 소음이 천둥처럼 네 온몸을 울린다. 아드득, 까드득.


 

비명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이로 혀를 깨무는 수밖에 없다.


 


 

너는 식은 땀에 범벅이 된 채로 눈을 뜬다. 경기를 일으키듯 상체를 세우느라 이불 삼던 모포가 저멀리 떨어져있다. 너는 다리 사이에 이목을 파묻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귀힘에 머리카락이 죄다 뜯어져나가도 좋다. 통증으로 꿈의 잔상을 씻어낼 수만 있다면 너는 손가락 한두 개라도 기꺼이 잘라낼 수 있다.


 

씨발, 씨발, 씨발! 염병할!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든 잊었어야 했는데! 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마른 흐느낌이 증오에 찬 하피의 숨소리처럼 역겹다. 자기혐오에 호흡이 졸아들고 기도가 턱 막힐 것 같다. 개같은 꿈이 너를 습격할 때마다 너는 거대한 손에 갈래갈래로 찢겨나가는 벌레 새끼가 되는 느낌이다. 너는 신경질적으로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낸다. 그게 턱으로 흘러내리는 순간의 끔찍한 위선을 너는 참을 수가 없게 될 것 같다.


 

너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희붐한 시야를 닦고 허리를 펴자 뒤늦게 천장의 색이 보인다. 천장. 그것은 어색한 표현이다. 너희는 언더다크의 으슥한 어둠을 배경삼아 잠들었으므로. 자연이 만들어낸 그 빛깔은 아득할 정도로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그 범위는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활했다. 그러나 이제는 만발한 유채처럼 샛노란 역장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너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제라드와 대니를 훑다가 게일이 보이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오늘 불침번을 서는 담당이다. 자리를 비운다고 무적 구체를 깔아놓고 가는 그의 도량이 너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이만한 고위 주문을 시전하기가 얼마나 수월하면 야영지에 천막 하나 쳐주듯 두고 간단 말인가. 너는 그 밤에 운수가 좋았던 것은 게일이 아니라 너였다며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는 동안 꿈의 고역스러운 잔재가 천천히 네 몸에서 빠져나간다.


 

언더다크에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다. 잠에 드는 인간에게는 그 시간이 밤이기에 네가 가로지르는 이곳도 밤의 숲이 된다. 암흑이 무섭도록 짙지만 버섯들이 희미한 빛을 내는 덕분에 너는 어렵지 않게 풀잎을 밟아나간다. 지상의 숲과 달리 이곳은 더 깊은 지하에서 꿈틀대는 생명체들의 역동이 발밑으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하다. 설마 어디서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 튀어나오진 않겠지. 너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홀로 있는 게일의 신변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네 예민한 귀는 상당한 거리에서도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포착한다. 저건 네가 찾는 사람이 혼잣말을 하는 소리일까? 허나 게일이 아무리 장문의 설교를 늘어뜨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들 혼자 있을 때까지 말을 주절거리는 성미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혼자됨에 있어 침묵을 선호하는 편이다(라고 적어도 너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너와 용건이 달라져 잠시 개인 행동을 할 적의 그를 보면 오히려 정적의 미학을 고수하는 사람인 듯이 보였던 것이다. 너는 혹여 언더다크에 너희 아닌 다른 여행자가 있을까 조심스럽게 소리의 중심으로 접근한다.


 

"……떤 것 같아?"


 

너는 소리 죽여 멀리 떨어진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긴다. 어둠이 너를 가려주는 장막이 되길 바라며 고개를 틀자, 풀잎의 고즈넉한 이불 위로 게일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다. 너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인영에 놀라서 발소리를 낼 뻔한다. 천만다행으로 게일은 상대와의 대화에 심취해있는 듯하다. 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좋아, 완벽하군. 페트라에게 주문 제작을 맡긴 보람이 있었어. 붉은색과 금색의 자수가 들어간 원단이 아주 잘 어울려. 무릇 무도회의 주최자라면 회장에서 가장 돋보여야 하는 법이지."


"나 알잖아, 자기야. 난 먼지 낀 거적을 걸쳐도 그 안에서 가장 빛날 거야. 하지만 이 막 흘러나온 선혈같은 빛깔의 벨벳은…" 게일의 대화 상대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아름답군. 네 안목은 늘 나를 놀라게 해, 내 사랑."


"생색을 좀 내보자면, 네 외모를 가장 돋보이게 할 원단을 찾기 위해 2주를 내리 고심해봤지. 마지막에 가서는 시길이 넌더리를 낼 정도였어. 눈을 부릅 뜨고 본다한들 다 같은 색처럼 보이는데 대체 뭐가 다른 것이냐고."


"그 덜떨어진 아이가 감히 네게 불평을 내뱉나?"


"오, 불평이라니! 그의 진솔함과 단호함은 내 분별력에 큰 도움을 준다고. 실제로, 최후의 선택지에서 그가 건넨 조언이 눈앞의 결정에 다다르게 했지. 여기에는 시길의 안목도 섞여있는 셈이야. 참 영특한 친구지 않아?"


상대는 나른한 한숨을 내고는 말한다. "넌 그 아이를 감싸고 도는 경향이 있어, 알고 있지?"


"너무 그러지 마. 그가 번번히 네 관심을 받고자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인걸."


"네 시종으로 격을 높여준 것만으로도 분수에 맞지 않는 총애를 받는 거야. 그걸 저 혼자만 모르고 있으니 멍청한 놈이지."


 

너는 게일의 앞에 선 자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다. 어디선가 뛰어난 주문 시전자들은 혈색이 도는 얼굴을 가진 투영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들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이 만들어낸 형태는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너는 먼발치에서도 그의 화려한 야회복 안에 깃들어있는 가죽과 벨벳의 윤기를 읽어낼 수 있다. 따뜻한 날숨을 뱉는 사람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곳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보기 좋게 각이 잡힌 콧대, 비스듬히 기울어진 미소, 가느다랗게 접힌 홍옥색의 눈동자, 겨울에 첫 내린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찰나의 포착으로도 잊을 수 없을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다.


 

"내가 워터딥에서 유행하는 사교춤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던가?"
 

"그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정중하고 나긋한 춤 말이야? 기억하고말고." 아름다운 사람이 게일의 손을 맞잡고 그의 허리에 손을 얹는다. 그 접촉이 수백번의 시도로 연마된 것처럼 몹시 익숙해 보인다. "네게 강습을 받으면 누구라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걸."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이군. 가엾은 시길은 아직도 내 발을 밟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울상을 짓곤 하거든. 워낙 동작이 체계화된 춤이다보니 순서를 외우는 게 어려울만도 하겠지만…."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남과 춤추지 마. 질투나잖아." 그는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고 유혹적으로 속삭인다. "아니면, 일부러 그런 말로 질투나게 하는 걸까?"


"널 익애하다보니 네 방식을 닮아가나보지, 내 사랑."


 

두 사람은 웃음소리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네가 알기로 투영체에게는 질량이 없어, 그것은 붙잡을 수도 붙잡힐 수도 없는 허상의 객체에 불과하다. 너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두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저것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기억이다: 네가 보고 있는 춤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게일 홀로 모든 동작을 기억속에서 불러내 되풀이하고 있는, 일종의 재연극인 것이다. 붙잡힌 손이 당겨질 때의 강세, 허리를 잡은 손이 방향을 바꿀 때의 미세한 회전,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 적의 절도있는 리듬감, 서로의 동작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의 파안같은 것들을. 그는 지나치게 많이 읽은 구절을 빈 종이에 필사하는 것처럼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다.


 

이윽고 춤이 마무리되고 두 사람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아름다운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게일의 턱을 짚고 그의 입술에 키스한다. 그는 입술 끝이 짙게 패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회장의 모두가 우리를 우러러보며 감탄하겠지." 남자의 손가락이 게일의 뺨을 쓸어내린다. 몹시 귀한 것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 등이 느른하게 상대의 피부를 훑는 것이 보인다. "헌데 어쩐지… 모순적인 마음이 들어. 내 보물을 세상에 내놓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보이지 않을 곳에 가둬두고 나 홀로 감상하고 싶기도 하군. 어느 쪽의 만족감이 더 클까 하는데."


"글쎄, 내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냈다보니 내가 회장에 얼굴을 비치지 않으면 다들 어리둥절해 할 것 같긴 하지만." 게일의 음색은 난처라기보다 절제된 즐거움에 가깝다. "네 뜻을 따르겠어. 내게는 후자가 더 만족스러울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해야겠는걸…."

 

아름다운 남자의 폭소가 네가 서 있는 곳까지 뚜렷하게 들린다. "역시 한 번도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니까! 적어도 무도회가 막을 내린 다음에 무얼 해야 할지는 정해진 셈이군."


 

그 직후 네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가 벌어진다. 남자의 손끝이 게일의 목깃을 걷어내듯 움직인다. 그런 다음 그가 그곳, 즉 그의 손가락에 실체가 있어 깃이 걷혔더라면 필경 살갗이 드러났을 그 부위에 입을 맞추는 것이다. 평소에는 옷으로 단단히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부위다. 의식의 한 구간을 집행하는 것처럼 경건하다.


 

"늦지 않게 환복하고 나와, 자기야. 입히는 즐거움은 네게 양보하겠지만, 벗기는 즐거움은 내 몫이 될 거야."


 

그가 뒷짐을 지며 자세를 바르게 한다. 재생은 거기서 종료된 듯하다. 게일의 손짓이 정겨운 재연극의 끝을 알린다. 환영체가 사라지자 그의 주변에 남은 것은 지고의 고독뿐이다. 공허한 어둠 너머로 바람이 풀잎을 훑는 소리가 들린다.


 

정적. 그는 여전히 광막을 응시하며 제자리에 서 있다. 너는 밤의 골짜기 사이로 네 소리가 반향하지 않길 바라면서 뒷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온다. 


 

벗어난 곳에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너는 더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걸음은 점차 달음박질로 변한다. 어느 순간 깨달음이 네 뒷목을 강타해 너를 비틀거리게 만든다. 너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무 덩굴을 지지대 삼아 버티고 선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아보지만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도 아니고 '억'도 아닌 기괴한 탁음일 뿐이다. 너는 기침을 하는 것처럼 죽어버린 숨소리를 한 움큼 토해낸다.


 

 

내 배우자가 그의 대사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거든.

네 안목은 늘 나를 놀라게 해, 내 사랑.

풍성한 백색의 곱슬머리, 그보다 창백한 비단결의 피부, 선명한 핏빛 눈동자.

별의 이름을 가진 뱀파이어를 한 명 알고 있지.

검은 태양의 주인 아스타리온입니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는 턱을 잡은 채로 희미한 빛이 어룽지는 숲을 노려본다. 귀 밑에서 피가 드글드글 끓는 느낌이다. 게일. 성이 없는 그저 게일. 그는 매일 너희와 똑같이 식사를 했다. 흐르는 물을 밟아 건넜고 볕이 강한 한낮의 햇살 아래를 거닐었다. 초대받지 않은 집의 문을 열어젖혔고 거울이 그의 형체를 낱낱이 담아냈다. 그러나 너는 게일의 목깃 너머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의 배우자가 누구였는지 물어본 적은? 어떻게 눈치채지 못했지? 네가 그렇게나 둔감한 놈이었나?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었을까? 뱀파이어들이란 햇빛 아래서 불똥이 튄 짚더미보다도 빠르게 타들어가는 존재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의심할 수는 있었다. 너는 개인적인 조사를 통해 그렇지 않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일 그가……


 

뱀파이어 초월체라면. 혹은, 그의 피를 나눠받은 스폰이라면.


 

피가 식으면서 네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나흘 동안 숙식을 함께한 동료가 뱀파이어-한술 더 떠 그는 뱀파이어 군주의 반려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비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침착해진 셈이다. 어차피 게일이 너를 죽이려 했다면 너는 진작 썩어빠진 백골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테다. 그가 너라는 무가치한 일행과 불가사의한 목적으로 동행하고 있음을 깨달은 지금, 그의 정체를 두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소모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너는 삼일쯤 늦게 찾아온 공포심을 치워두고 출구 없는 암흑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곳에 마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해답이라도 자리하고 있는 양. 가령 이런 것이다.


 

게일은 어째서 뱀파이어 군주로부터 달아난 것일까.


 

네가 지켜본 그들의 모습은 애틋하게 보일 정도로 다정했다. 적어도 네가 목격한 것이 그들 관계의 민낯이라면, 게일에게는 끔찍이 사랑하는 배우자를 떠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혹 뱀파이어 군주에게 불의의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그들 사이를 파탄낸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까? 게일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영영 벗어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연유로? 


 

네가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는, 네가 그 의혹을 해결하기 전까지 질문이 꼬리를 무는 밤이 계속될 거란 사실이다. 게일은 네게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테다. 지금까지의 낮과 밤이 그러했듯이. 그의 침묵에는 훌륭한 당위성이 있다: 당장 야영지에 뱀파이어 군주의 심장에 말뚝을 박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동료들이 있을 뿐더러, 정체를 밝힌다면 그 자신의 안위도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가 너를 전적으로 신뢰할 이유도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해답에 가까워지기 위해 말로 캐묻는 것은 그의 마음의 문을 닫고 비전 마법으로 걸쇠를 걸어 잠그게 하는 최적의 접근법이 되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언젠가 도달할 진실을 네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 되는 것이다.


 

미지의 끄트머리를 맛본 흥분으로 네 발끝이 초조하게 넝쿨더미를 두들긴다. 이 건은 자료조사의 범주 따위를 아득히 벗어나 버렸다. 네가 접근하고자 했던-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리할 수 없었던-세상의 이면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뱀파이어 군주와 그의 반려가 주연을 차지하고 있는 미스터리라니. 뱀파이어와 관련된 공상을 쓰면서 뱀파이어를 피상적인 존재로만 지각하고 있던 네가, 이만한 대사건과 얽힐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차원문 너머로 손을 뻗고 있던 게일을 마주친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났어야 하는 수순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그러한 우연을 일컫어 운명이라고 표현하지 않던가?


 

네 고삐를 잡아당기는 주인의 손길을 느끼자 네 기분이 자기혐오의 빛깔로 푸르게 물든다. 네 안에서, 호기심이란 네 양심을 표나지 않는 두께로 한겹씩 저며내는 예리한 날붙이인지도 모른다. 너는 막연한 눈으로 너 자신을 바라본다. 고작해야 개인적인 궁금증을 충족시키자고 타인의 중대사를 관망하려 들다니, 도대체 이 인격체는 어디까지 이기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일까.


 

허나 결정의 칼이 양심의 목을 쳤다. 너는 네 몫의 침낭으로 돌아가 누울 때까지 끊임없이 네 목숨의 무게와 욕망의 무게를 저울질하지만, 실상 그것은 일생일대의 머저리같은 결단을 내려놓고 거기에 논리적으로 그럴싸한 사유를 가져다 붙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아, 차라리 그 밤의 춤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는 게일이 야영지로 돌아와 대니와 불침번을 교대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그대로 뜬 눈으로 새벽을 지새운다.



 

 

아침. 너는 밤새 뒤척이느라 까치집이 된 머리로 몸을 일으킨다. 싸늘하게 식은 모닥불 주위로는 아침 기도 중인 대니와 무구를 걸치느라 분주한 제라드가 있고, 평소와 같은 낯으로 아침 식사에 활용할 식재료를 선별 중인 게일이 보인다. 너는 게일에게 한번 시선을 돌렸다가, 더는 망설이지 않고 팔라딘에게로 다가간다. 정신이 제대로 돌기도 전에 무기부터 손에 쥐는 전사로서의 습관인지 그의 눈에는 아직도 졸음기가 그득하다.


 

"아,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이 땅은 밤낮없이 어두침침해 잠기운이 쉽게 가시질 않는군요.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포박 주문에서 벗어나기보다 어려운 듯이 느껴집니다."


"같이 가자."


 

머리와 허리가 동강난 말은 대화의 불통을 부른다. 제라드는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너를 보고 있다.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는 것을 보아하니 꿈결에 보는 광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도 하다. 너는 네 결단이 꺾일 새라 다시금 명확한 어조로 내뱉는다.


 

"발더스 게이트로 가자. 뱀파이어 군주를 향해서."


 

이제 야영지의 모두가 너를 향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뒤통수로 와닿는 대니의 시선이 따갑고, 옆얼굴로 직결하는 게일의 시선이 의미심장하다.

제라드는 잠기운이 대번에 날아간 얼굴이다. 그는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예? 하지만…, ……진심이십니까?"


"그래. 대단한 전력으로 기대하진 말아줬음 싶지만, 그래도 너희와 여정을 함께 하고 싶어. 어젯밤에 확실히 마음을 정했어."


"…공작송이 버섯은요? 당신이 이 어두운 땅까지 발걸음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잊어버려. 그깟 버섯, 나중에 와서 따지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렇다면…," 제라드는 여전히 혼란한 눈으로 너를 보고 있다. "그 결정에 관해 당신과 게일 모두 합의한 것인지요? 아니면 당신만 합류해주시는 것입니까?"

 


너는 게일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친 순간, 너와 그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침묵이 둘 사이로 흐른다. 그때 네가 고릿적부터 지니고 있던 통찰력인지 아니면 순전한 기적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너는 중요한 진실을 몇 가지 깨닫는다: 게일은 네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네가 어젯밤의 춤을 엿봤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네 목숨을 앗아갈 의향이 없는 것이다. 그가 바랐다면 너는 밤의 숲에서 진작 생을 마감하고도 남았을 터다. 나흘의 낮과 밤 동안 네게 그럴 기회가 차고 넘쳤던 것과 같이.


 

너는 확신이 가중된 음성으로 대답한다. "게일도 함께 갈 거야. 그렇지?"


 

제라드가 간절함이 여실한 눈으로 게일을 바라본다. 게일은 표정을 알 수 없는 낯을 하고 있다. 경계일까? 당혹일까? 불쾌일까? 놀람일까? 체념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무상감일 뿐일까? 찰나에 그가 거절의 의사를 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네 짐작은 그저 상황의 흥미로움을 서사적으로 재조립한 망상에 불과할 뿐이고, 게일에게는 앞으로도 너희와 동행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순전히 여흥 삼아 언더다크까지 함께 어울려주었던 것인지도. 아니면 답이 없는 네 생존력에 어떠한 책임감을 느껴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가능한 한 뱀파이어 군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아나기 위해 깊은 지하로 걸어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아." 그가 한숨을 쉬며 네 말을 긍정했을 때, 너는 이 이야기가 아직 끝에 도달하지 않았음에 안도하게 된다.


 

게일은 제라드에게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마침내 그의 입술에는 일상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다. 제라드가 엉겁결에 손을 잡자 그는 가볍게 두 손을 흔든다. "어제 저 친구와 의논해 뜻을 결정했지. 지금 이 순간부터 내 힘은 자네와 우리 모두의 것이야, 제라드. 자네가 바란다면 언제든지 내 마법으로 전력으로서 가치를 입증해주지. 장담컨대, 우린 좋은 팀이 될 거야."


 

그렇다면 게일이 이 합류에 바라는 바는 무얼까. 일반적인 뱀파이어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자주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쪽을 염탐하여 뱀파이어 군주에게 약점을 흘리거나 최후의 순간에 너희에게서 등을 돌려 적수를 박멸하고자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 길을 걷게 된다면 일부러 빠져나온 그곳을 제 발로 돌아가는 셈이 될 텐데, 그는 어떤 각오를 마치고 동행을 자처하는 것일까.


 

너는 떠도는 상념들을 손바닥으로 덮어 누른다. 이제껏 수도 없이 그러했듯이, 네 짐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는 훗날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네가 게일의 비밀을 함구하고 있기에 너나 동료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죽음보다 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생의 목적이 그토록 간절했기에 고작 딱 한 번의 전투를 함께한 여행자들에게 조력을 요청했던, 오십년만에 거머쥔 첫 희망으로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는 저 강건한 전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안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네 짐작은 무의미하다. 네가 결심한 역할은 이 이야기의 목격자이며, 이 여정의 끝을 네 눈에 담기로 결정한 이상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비참한 결말로 끝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무릇 앞날의 일이란 순간과 순간에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던가. 너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매 순간 운명의 주사위를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있다.  


 

네 안의 대책없는 낙관성이 속삭인다: 어쩌면 전부 괜찮게 끝날지도 몰라. 늘 그래왔잖아. 일단 해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이 길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테니 말이야.


 

제라드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다. 그는 너와 게일과 대니를 번갈아 바라보고, 이윽고 완전히 그의 일행이 된 모두를 향해 결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발더스 게이트로."

 

 





아스게일 블러드위브
2024.04.27 10:46
ㅇㅇ
모바일
문학이다...
[Code: 0977]
2024.04.27 12:44
ㅇㅇ
모바일
하... 진짜 좋다
[Code: 6a40]
2024.04.27 15:32
ㅇㅇ
모바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스스로 나왔는지 무슨 생각으로 다시 돌아가는건지 넘 궁금해...
[Code: ffa5]
2024.04.27 17:28
ㅇㅇ
모바일
꾸준히 이어줘서 고마워 센세 드디어 아스와 (물리적으로) 가까워져가겠네
[Code: e3ff]
2024.04.28 04:33
ㅇㅇ
모바일
센세에에에에에ㅔㅔㅔ사랑ㅎ해ㅐㅐㅐㅐㅐ아니 어떻게되고있는거야어아우어아ㅓ아ㅏㅏ
[Code: 8aa1]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