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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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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ㅈ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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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편.


풍림촌을 나서는 네 사람은 말이 없었다. 입구까지 곧게 이어진 길이 유난히 멀었다. 의외로 숙면을 취한 이연화는 본인 낯빛은 맑았으나 나머지 세 사람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눈치 아닌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제 연형제의 독을 뒤늦게 알게 된 방다병은 안색이 거무죽죽했고, 적비성은 평소같은 표정이었으나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모한은 자기한테 보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니 필요없다며 건넨 장포를 받은 후로 내내 저 모양이었다. 이연화는 대관절 제 주변의 사내들이 왜 이리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에 연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질같아서는 이렇게 속좁게 굴거면 혼자 가겠다 선언한 후 다 떼놓고 선기탑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방다병은 생각에 잠겨 말에 실을 봇짐이 늘어지는 것도 모르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지난 밤 방다병이 밤늦게나마 이연화의 잠자리를 봐주러 갔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튀어나온 모한이 팔을 들어 문 앞을 가로 막았었다. 방다병은 모한이 이연화를 싸고 도는 태도가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선생은 내가 잘 재웠으니 깨우지 마시지요."

방다병은 이연화가 걱정되어 독에 대해 잘 안다는 실력있는 비술사에 의지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거부감이 일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보다 더 이연화를 잘 안다는 듯 행세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제 모난 마음보다 이연화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모자란 내력으로 독을 누르느라 기가 쇠했습니다. 연형제들에게 내력을 주느라 자기 독을 막을 힘이 모자라더군요. 벽차지독이 머리까지 뻗치면 몹시 위험합니다. 어쩌자고 이런 사람과 경맥을 통해 몸을 힘들게들 하십니까."

모한이 책망하는 어투로 물었다. 게다가 한 사람도 아니고 둘이 옆에 붙으니 남아나지가 않지요, 모한이 눈썹을 올려 방다병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이제 그만 물러나라는 것으로 보여 방다병은 적잖이 놀랐다.

"연형제는 그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모공자는 마치 저나 적맹주가 강제로 이연화의 내력을 취하기라도 하는 듯 말씀하시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경맥이 감응한 이상 통하지 않으면 몸이 괴롭습니다. 우리는 이연화를 걱정하고 있다고요."

힘을 주어 말하면서도 방다병은 속으로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멀리 떨어졌더라면, 이연화는 제 독을 여유로이 다루어 괜찮았을까? 한 줌도 안되는 내력을 자신이 빼앗고 있었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머리를 채웠다. 그렇다면 이연화는 왜 제 몸을 깎아내면서까지 경맥을 통했단 말인가. 처음부터 이연화는 연형제가 되길 거부했지만, 제 고집으로 이렇게 된게 아닌가 하여 방다병의 마음 한 켠이 묵직했다.

"천기당의 소당주, 지금의 이연화는 당신들에게서 떨어져 있는 편이 더 편안할겁니다. 한 사람도 버거운데 둘이서 경맥을 자극하고 내력을 가져가니 편할 턱이 없지요. 당신들이 주는 내력은 독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해요. 이선생의 내력을 보조할 수는 있겠지만 직접적으로 독과 싸울 내력으로 바뀌진 않으니까요."

모한은 차갑게 말했다. 반면 자신의 요력은 달랐다. 이연화의 요력은 곧 제 요력과 동일했기에 요력이 날뛸 때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연화는 오랜 시간을 제 내력으로 독과 싸워왔지만 요력을 익숙하게 운용하면 요력으로 독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모한, 즉 현야의 요력만 있다면 이연화에게는 독과 싸울 무한한 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현야는 언제든 이연화에게 제 요력을 차고 넘치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로 될 것 같으냐.

모한은 방다병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몸이 동하는 찰나의 감각으로 한 편의 극을 써내는 인간의 꼴이 우스웠다.

너는 이상이에 대해 무얼 아느냐, 그리고 이연화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모공자, 이연화를 돌봐주어 고맙습니다."

더는 듣기 어려워진 방다병은 굳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이연화를 돌봐주어 고맙습니다, 방다병은 그 인사에 어째서 굴욕감이 밀려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이 자 앞에서는 저 혼자 이연화를 제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는 듯한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제 겨우 두 번 안면을 텄을 뿐인 남자는 어딘지 모를 위압감으로 이연화를 거대하게 감싸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방다병은 이연화의 방으로 향하는 제 마음을 억지로 끌어내리기라도 하듯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다리를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자마자 마주친 객잔 종업원에게 방다병은 충동적으로 술을 청했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종업원은 연신 굽신대며 마을을 구한 귀한 손님에게 가장 좋은 술을 내왔다.

"대협, 방으로 안주상을 내어드릴까요?"

존경과 호의가 가득 담긴 얼굴을 한 종업원에게 방다병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웃어보였다. 평소보다 떫은 미소였다.

"술 한 병이면 됩니다."

방다병은 건네 받은 술병을 들고 다시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적비성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적비성은 마른 수건으로 검집에 묻은 흙을 털어 닦아내던 참이었다. 방다병의 등장에 눈썹을 치켜올린 금원맹 맹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술병을 든 천기당 차기 당주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고는 다시 검을 닦는 일로 돌아갔다 . 방다병이 탁자에 술병을 탁 내려놓았다.

"오늘은 좀 봐줘."

방다병이 나무로 된 투박한 술잔에 이름도 모를 고급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적비성은 다 닦은 검을 철그럭 소리를 내며 침상 옆에 내리고는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우는 소리를 할 작정이면 가서 자라."

적비성의 냉대에 방다병이 입을 비죽댔다.

"너는 그 성질머리 좀 어떻게 해봐. 명색이 동료가 심란해하는데 가서 잠이나 자라니. 게다가 너도 이연화의 연형제잖아. 언제까지 혼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일전에도 못 참았잖아."

두 사람의 머리 속에 일전의 장면이 스쳐갔다. 삵의 공격을 받은 날, 이연화가 저들 품으로 쓰러지면서 셋이 어지러이 얽혀서 난감했던 일이 떠올랐다. 마음과 달리 몸이 멋대로 반응해서 결국 이연화를 찾을 수 밖에 없어 연형제간의 감응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모두가 실감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심해질지도 몰라 말만 안할 뿐 사실은 난처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수록 빨리 곤란해지긴 하지."

적비성이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방다병은 한숨을 쉬었다.

"모한이 그랬어. 이연화의 내력이 독을 막기에도 모자란데 두 명한테 내력을 주느라 버겁다고. 연형제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더 편할거라고 했어. 게다가 내 상처까지 가져가버리잖아."

모한의 말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술이 땡겼다. 방다병은 연거푸 술을 마셨다. 처진 기분에 쉬지 않고 위장에 술을 들이 부어서인지 너댓 잔만에 눈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자기가 병때문에 쓸모가 없을거라 했어."

방다병이 회상하듯 말했다. 자신이 경맥을 통하자며 간곡히 부탁을 했고, 이연화는 내내 거절해오다가 소주쾌라 불리는 내공심법을 하나 익히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다. 그 전에 별다른 일이 있었냐하면, 보옥을 빼앗겨 천마왕이 결계를 깨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일 외에는 딱히 없었다.

"천마왕이 결계를 깨려고 보옥을 훔쳐간 후에 이연화가 허락했어. 이연화도 천마왕을 막는 일에 뜻을 같이 한거라고 여겼고."

"그럼 뭐가 문제지? 이연화는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선기탑에 같이 가고 있잖냐. 이연화는 어린애가 아니야. 자기 뜻으로 결정한거다."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알아. 내가 졸랐다고 이연화가 덥썩 들어줬겠어? 문제는 그 이후야. 알고보니 독을 막기도 버거워 몸이 힘들고, 내 상처까지 대신 지고. 이연화라고 이럴 줄 알았겠냐고."

"그럼 나한테 보내라."

"너!"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은 울컥 치밀어 올라 삿대질을 했다. 제 상처를 이연화가 가져가지만 않았더라도, 이연화가 적비성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내력으로 조금 더 편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제 사심을 얹어 각인을 기대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연화가 다친다는 것을 안 이상 몸이 굳고 겁이 나 방다병은 더는 무얼 요구할 수가 없었다. 둘의 마음이 가까워져 뭐든 감수할 사이라 확신하면 모를까 일방적인 마음으로는 더는 말을 얹기 어려웠다. 차라리 적비성과 경맥을 통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방다병의 심정은 더욱 참담했다.

"솔직하지 못하군. 이연화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네가 전전긍긍할 뿐이잖아. 몸을 생각하고 전력을 강화해야할 상황을 고려하면 이연화와 내가 연합하는 편이 나아.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둘 다 빌빌대면 제압하는 수 밖에."

적비성의 흔치 않은 긴 말에 방다병이 무어라 하려던 말을 삼켰다. 결국 자기만큼 마음을 열지 않아 서운했던거면서 말이 길었다. 적비성의 말대로 자신은 그저 애송이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이렇게도 일방적이라니. 적비성에게는 천마왕에 대적하기위해 유리하게 전력을 구축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자신은 달랐다. 방다병으로서는 이연화와 각별한 사이가 되고픈 사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여누님과 진사형이 부러움을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의사에 반해 몸이 동하는 연형제의 부자연스러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애틋한 심정을 갖고 감응하는 몸을 자연스레 달랠 수 있을만큼 마음이 통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가 새삼 와닿았다.

"알아. 안다고."

방다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연화를 보내고 싶지 않아. 방다병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씹었다.



*



풍림촌을 뒤로 한 일행은 모한을 따라 마을 어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굳이 갈 길의 반대편으로 왜 오라했나 싶어 어리둥절해 하던 세 사람은 곧 모한의 손짓을 따라 빛줄기를 그려내며 나타나는 무언가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결계를 지어 숨겨둔 마차와 비마가 눈 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연화루만큼은 아니었으나 제법 큰 마차는 복층으로 되어 있어 한 층에 사람 둘이 여유있게 눕고도 짐을 실을만큼 널찍해 보였다. 허벅지가 튼튼하고 빛이 일렁이는 갈기를 한 비마들은 콧김을 훙 내뿜었다. 그럴 때마다 눈꼬리에서 불이 이는 양 붉은 빛이 이글대고 불티가 튀듯 사방으로 주황빛 파편이 흩어졌다.

"과연 모공자의 비술실력은 굉장하군요."

이연화가 비마를 처음 보는 양 놀라는 척 했다. 고수인 비술사치고도 실력이 보통이 아닌게 분명했다. 이연화도 중원에서는 비마로 연화루를 끌곤 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준마를 네 마리나 불러내긴 어려워 멀리 이동할 때엔 말을 빌리곤 했다.

"명색이 비술사니까요. 제 말은 제일 뒤에 둘테니 여러분의 말을 앞에 두지요. 말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모한은 말 네 마리 중 셋을 손짓으로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남은 말 하나에 비술을 걸어 보통의 말만큼은 아니어도 덜 빛나고, 덜 이글대는 수수한 말로 모습을 바꾸었다.

방다병은 야영보다 낫겠다 싶어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일행에게 착착 도움이 되는 유능한 사내라면 어제 한 말도 허투르게 넘기지 않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 정도면 물을 더 실을 수 있겠는데."

적비성이 마차의 크기를 가늠해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는 말을 묶어라."

적비성이 방다병과 이연화에게 말고삐를 내밀었다. 그리고 일행과 조금 떨어져 서있는 모한을 보며 말했다.

“나와 물을 가지러 가지.”

모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멈칫한 그는 자신에게 물을 가지러 가자고 한 금원맹 맹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적비성은 뭐 할 말 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똑같이 시선을 되돌려주었다. 모한은 재밌다는 듯 미세하게 한쪽 입을 올렸지만 곧 이를 내리고 눈빛을 부드러이 바꾸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 몸을 돌린 적비성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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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다병은 적비성이 자신을 생각해 모한을 데려갔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저 인간이 이런 주변머리가 있었던가? 이연화도 방다병과 자기만 남게 한 적비성이 의외라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방다병은 어색한 침묵을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바지런히 몸을 움직여 말을 묶고 봇짐을 내려 마차 안으로 옮겼다.

"이연화, 이리와 봐. 여기가 편하겠어."

마차에 오른 방다병이 무심한 듯 저를 부르자 이연화는 순순히 뒤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어젯 밤부터 심기 불편이라 써붙인 그의 얼굴이 신경 쓰였으나 평소와 달리 따지고 들지 않아 의아하던 참이었다.

"보기 보다도 크네."

짐을 놓고도 두 사람이 사이에 공간을 두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만한 너비에 이연화가 감탄했다. 방다병은 말없이 담요를 바닥에 깔아 자리를 마련하고는 구석구석 펼치기 시작했다. 어제 챙기지 못한 몫을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손길이 성실하고 조심스러웠다. 이연화는 그런 방다병의 곁으로 슬쩍 갔다.

"방소보, 어제는."

"몸은 좀 어때? 모공자가 잘 봐줬다는데 지금은 좀 나아?"

담요를 매만지느라 몸도 돌리지 않은 채 방다병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방소보답지 않네, 어색해하고 있잖아. 이연화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폭 쉬었다.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걱정하지 않길 바라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방다병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 제 어깨를 부여잡는 바람에 이연화는 몸이 흔들려 급히 균형을 잡아야 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 말이 돼? 남들은 다 아는걸 나만 몰랐는데, 이젠 걱정도 하지 말라고?”

“방소보, 화내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난 의원이잖아. 사실 네게 소주쾌를 알려준건 나를 위해서야. 네가 소주쾌로 내력을 넣어주면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하지만 중독되었다고 했으면 네가 내 걱정에 경맥을 통하려고나 했겠어?”

이연화의 말에 방다병이 머뭇거렸다. 확실히 자기라면 중독된 몸에 무슨 영향이 있을지 몰라 저어했을 것이었다. 지병이니 허약체질이니 하는 것과 맹독에 중독된 몸은 그 체질도 기혈의 순환도 달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도 모르고 경맥을 통했다니 소주쾌가 없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는 소리인가? 방다병은 더 기가 찼다.

“너 내가 소주쾌를 제대로 못 익히면 어쩔 뻔했어? 처음부터 중독이라고 말했으면 내가, 내가 귀찮게 하지도 않았을텐데.”

방다병이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치는지 말을 뚝 끊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진정하려는 듯 다른 곳을 보며 숨을 고르는 방다병의 모습에 이연화는 새삼 놀랐다. 이 정도로 화낼 줄은 몰랐는데. 열아홉 젊은이의 연심이 어땠는지 이연화는 옛적에 잊어버렸다. 그저 아이를 달래듯 할 뿐이었다.

“귀찮지 않았어, 방소보. 그저 곤란했을 뿐이야. 네 앞길을 막고 싶지도 않았고. 그건 사실이야."

방다병은 이연화의 말에 눈을 껌뻑였다. 뾰루퉁한 마음이 어느새 잦아든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언뜻 텃밭의 배추를 뜯어 한 대 맞고는 구석진 곳에서 삐져있는 불여우와 겹쳐 보여 이연화는 심각한 와중에 풋 웃을 뻔 했다. 결국 주인이 부르면 절로 흔들리는 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슬핏 튀어나오는 불여우처럼, 방다병도 이연화를 흘끔 바라보았다.

"너 정말."

방다병은 손가락을 들어 이연화에게 들이댔다가 한숨과 함께 아래로 내렸다. 이 얼굴을 보면 참을 수 밖에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이었다.

"네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건 알아."

방다병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표정이 딱 비 맞고 기죽은 강아지같아 이연화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난 연형제로서 널 걱정할거고, 널 아낄거야.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마저도 안하면 못 견딜테니까. 네가 적비성에게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연형제는 다시 맺을 수 있으니. 나도..나도 네가 나때문에 아픈건 절대 싫어."

방다병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이를 본 이연화는 눈썹을 올렸다.

"적비성에게 간다니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적어도 적비성과 연형제를 맺으면 대신 상처를 입지는 않을테니까. 전투력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 같으니, 너희 둘."

"아, 그거."

이연화는 무어라 대꾸해야할지 몰라 말을 얼버무렸다. 방다병은 제 상처를 이연화가 모두 가져간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연화가 입는 상처를 저 역시 나눠가진다는 생각은 못하는 듯 했다. 이연화가 이상이로서 싸운다면 몸을 사리지 않는 탓에 방다병이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이상이와 방다병은 생사를 같이 하며 등 뒤를 맡기고 싸우는 연형제일 터였다. 지금은 상처를 대신 가져가는 허약한 의원과 그의 내력으로 상처를 회복하는 천사로 보일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무공을 내보이면 칠십 년전부터 전설처럼 회자된 상이태검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어 일이 복잡해졌다. 꼭 필요한 때, 목숨을 내놓을 최후의 결전일 때에나 이상이로 싸울 생각이었던 이연화로서는 저런 오해를 그저 내버려 둘 뿐이었다.

"더 숨기는게 있어?"

방다병의 말에 이연화는 또 곤란해졌다. 없다고 하면 나중에 정말 화내겠지, 방소보. 이연화는 명확히 답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줘, 방소보. 그리고 난 적비성에게 가지 않아. 괜한 생각은 하지 말아."

그 말에 놀랐는지 방다병이 고개를 번쩍 들어 이연화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이 순진해보였다. 이연화는 잠시 눈앞의 선하고 앳된 청년을 다정하게 보고는 다시 여유를 찾아 평소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돌아갔다.

"적맹주야 연형제 없이도 요마를 잘만 잡잖아. 무공은 천하 고수가 부럽지 않다는 천기당 소당주가 연형제가 없이는 요기도 잘 못 느껴 천사로 나서지도 못한다는데 이 손실을 메꿔야지 않겠어? 천기당에 날 평생 먹여 살리라고 청구서를 보낼테니 제대로 지불해야 해, 방소보."

방다병은 제 입매가 풀리려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농담인 줄은 알지만 평생이란 말에 마음이 몽글하게 녹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 잡아 누르느라 애를 써야했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다 생각하면서도 방다병은 표정이 느슨해지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머쓱해져 제 풀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방다병은 이연화를 얼른 지나쳐갔다.

"청구서 잊지나 마."

잽싸게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는 방다병을 보며, 이연화는 방소보야, 방소보-를 중얼거리고는 종국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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