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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3:01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6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5년 전의 업무 당번표 말입니까?"
생정이 휘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남자는 천기당에서 사업장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 어째서 옛날 객잔의 당번표 따위를 찾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생정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게...너무 오래 전인지라. 당시의 화재 때문에, 종이나 나무로 된 문건들은 대부분 타버렸습니다. 화재가 아니었더라도, 폐업한 후에는 관련된 물건들을 처분했으니...."
"하지만 당신은 그때의 지배인이었지요. 누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세세한 명단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구역 당 한둘 정도라면...그런데, 갑자기 그때 일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연화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생정은 당혹과 의혹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방다병은 곧 심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이 마치 황제의 명을 전하는 전령처럼 진지했다.
"솔직히 말하지요. 이곳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 소문이라니...."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소, 그대나 다른 사람들을 추궁할 생각은 없으니. 하지만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안일하게 경시할 수도 없어, 동료들과 함께 나름대로 그 건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정보이니, 협력해 준다면 이곳 사람들에게 손해가 생기지 않도록 할 거요."
방다병이 적절한 권위가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정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연륜이 있는 객잔 지배인답게, 그는 자신의 동요를 잘 감춘 다음 양손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곧 낮은 한숨과 함께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저, 대협들. 제가 생각하는 그 소문이 맞다면...장담컨대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친 적도 없고, 그냥 흉한 소문이 알음알음 떠도는 것뿐이니까요."
"압니다. 하지만 경험이 많으시니, 새로운 사업에는 초반의 입소문이 중요하단 사실도 잘 아실 테지요. 많은 이가 몇 달 동안 애를 써가며 이곳을 새단장하였는데, 괜한 구설수로 객이 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억울하고 슬픈 일입니다. 꺼림칙한 구석을 명확히 짚고 넘어간다면, 천기당주뿐 아니라 여러분께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좋은 일자리를 오래도록 보전하는 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연화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매끄럽게 건넸다. 적비성이 귀찮은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금원맹주는 예나 지금이나 시간낭비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관련자들을 일단 거꾸로 매달아놓은 다음 질문하고 싶었으나, 이연화와 방다병이 함께 있으니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심란한 표정을 지었던 생정이 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5년 전의 업무 당번표가 무슨 도움이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천기당주께서 믿고 보내신 분들이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당번의 어떤 부분이 궁금하십니까?"
"그 전에 한 가지 질문드리지요. 오늘 오면서 다시 확인해 보았는데, 온천 근처에는 모두 건물들이 지어져 있더군요. 객잔 내의 시설들은 대부분 복구되었을 뿐 이전과 그 역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건물들은 모두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는 일에 쓰던 곳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개중 두어 군데는 손님들이 묵는 곳이었어요. 탕에서만 즐기기는 아쉬울 만큼 빼어난 풍경을 지닌 곳들이 있지 않습니까? 부유하신 분들은 조금 더 비싸게 주고서라도 그런 숙소에서 묵길 원하셨지요."
"그렇군요. 그런 건물은 몇 개나 있습니까?"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죽매탕 옆에, 하나는 취화탕 옆에 있지요."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꾸 등장하는 취화탕의 이름이 영 거슬렸다. 고개를 끄덕한 이연화가 이었다.
"화재가 일어났던 날, 이곳에서 혼례가 치러졌다 들었습니다. 그날 죽매탕과 취화탕 근처에서 청소하거나 일하던 이가 누구였습니까?"
"그땐 혼례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터라...한둘 정도만 보냈을 겁니다. 그날 자리에 없던 사람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생정은 곧 입을 열어 두세 개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적비성을 비롯한 세 사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연화의 입가로, 다소 차가워 미소처럼 보이지 않는 표정이 감돌았다. 이연화가 담담히 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찾는 구역을 맡겼다니, 꽤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생정이 이연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와 오래 일한 이들이니까요. 저...혹시 그 사람들이 뭔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 의심하십니까?"
"아직은 모를 일이지요. 아, 어르신. 하나만 더 부탁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질문을 건넸다는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주시고, 이곳 사용인들에게 한 가지 말을 퍼뜨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연화가 계략을 꾸미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말의 형태야 부탁이었으나, 천기당에서 나왔다는 셋이 함께하니 아무래도 요구에 가까웠다. 이연화의 귓속말을 들은 생정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예? 설령 탕을 쓰지 않을 작정이라 해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냥 메울 방법이 있습니다만...." 적비성이 미간과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정말로, 사람들의 사정을 보아주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싫었다. 이 사건에 조금의 흥미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가능하면 빨리 해결한 다음 혼례 준비에 집중하고 싶었다. 선뜩한 기운을 감지한 생정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생정과 헤어져, 세 사람은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비영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비영이 얼른 이연화에게 다가서 물었다.
"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으신다던 말씀은...."
"일단 취화탕을 확인해 보지요. 범인이 그곳을 없애길 원하는 까닭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범인이 취화탕을 없애길 원한다고요? 그게 무슨...일전에 알려주신, 탕의 색깔이 변하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말씀입니까?"
"그건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현상입니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다면, 흉한 소문으로 인해 취화탕이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이겠지요. 부인의 사건과 직결된 일이라 확언할 수는 없으나, 아무래도 수상하니 일단 그곳을 샅샅이 뒤져 이유를 알아내야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며, 이연화는 취화탕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비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그 소문이 양연의 일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소문을 퍼뜨린 사람과 양연을 해친 사람이 같은 자라 여기시는 겁니까?"
"가능성은 있습니다. 당시 알려지기로, 부인은 손님들의 짐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지요. 실제로 그 몸에서 나온 물건들은 당시에 묵던 손님들의 것이었고요. 그렇다면 부유한 사람들의 숙소에서 사건이 벌어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죽매탕과 취화탕 근처에 그런 손님들이 묵었다 하니, 한번 확인해 볼 가치가 있지요."
방다병이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 적비성은 역시 정파의 방식이 조금 피로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걸었다. 생정에 의해 아주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난 마당이니, 그 사람을 매달거나 묶어놓고 한 대씩 두들기면서 진실을 물으면 될 일이 아닌가? 직접적인 폭력이 꺼려진다면 약마의 방법을 빌릴 수도 있었다. 조금 기다려 보고, 또 시간낭비가 될 것 같으면 내가 몰래 그놈을 잡아와야겠군. 방다병이나 이연화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면서, 적비성은 꽃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음. 아무래도 부숴야겠어."
팔짱을 낀 채 뿌연 탕을 바라보던 이연화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적비성은 어쩐지 반가운 기분에 사로잡혀 돌아보았다(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으나, 적비성은 이연화가 저돌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묘한 후련함을 느꼈다). 마침 이연화 역시 이편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이연화가 탕을 슬쩍 고갯짓하며 건넸다.
"뭐 해? 물 속이라 안 되겠어?"
"뭘 부수란 말이냐? 탕 전체를 쪼개면 되나?"
"과격하기는. 일단 의심스러운 부분부터 확인해 보자고. 우리가 여기서 뽑지 못했던 게 있는데, 기억해?"
이연화가 혀를 차며 슬쩍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한 적비성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오른손에 내력을 잔뜩 집중시키자, 긴 머리칼이 살짝 떠올라 흔들렸다.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고!" 한 손을 입가에 댄 채, 이연화는 쓸데없이 물장구를 치려는 아이를 타박하듯 외쳤다. 미간을 좁힌 적비성이 오른손을 내질렀다. 그 손끝은 마치 창날처럼 물을 푹 파고들어가, 돌과 흙에 닿았을 때 벼락 같은 힘을 발휘했다. 쩍! 손가락 끝에 첨예하게 모인 내력이 단단한 조직을 무정히 갈라냈다. "괜찮을까? 아비는 좀...무대포잖아. 박힌 것까지 다 부숴버리는 거 아니야?" 등 뒤에서 방다병이 걱정스레 소곤거렸다.
자신의 조절력을 의심하는 청년을 험한 눈으로 돌아보며, 적비성은 오른손에 잡힌 물체를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들이 뽑으려다 뽑지 못했던, 길쭉하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이연화는 심란하고도 무거운 표정을 지었으며 비영은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장식은 어딘가로 모두 사라져버렸고, 세월의 흔적이 덧씌워져 다소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비녀였다. "그건...." 비영이 더듬거리며 발을 옮겼다. 적비성이 그 물체를 건네주자, 비영은 양손 위에 그 비녀를 받치고는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한동안 살펴보았다. "이건...이건." 벌겋게 변한 눈동자에 곧 눈물이 어렸다.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는 비영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조용히 물었다.
"이게 부인에게 주었던 비녀입니까?"
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덜덜 떨면서 비녀와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왜...이게 왜 이곳에 있습니까? 왜...대체 어쩌다가...."
"예상대로, 부인이 죽은 곳은 온천이었던 듯합니다. 아마도 이 탕이었겠지요."
이연화가 유감스러운 얼굴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건네도 끔찍한 내용이었으므로, 비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녀를 양손으로 꽉 끌어안듯이 쥐었다. 해일마냥 밀려든 기억들에 짓눌린 사람처럼, 여자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큰 몸을 웅크리고는 한참을 꺽꺽거리며 울었다. 그 모습을 탄식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연화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나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속삭였다.
"이걸로 거의 확실해졌군. 범인은 당시에 이곳을 담당했던 자야. 양연을 죽일 때 어떤 연유로든 비녀가 이곳에 깊숙이 박혀버린 듯한데, 아비처럼 무공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빼기 어려웠겠지. 손님이 끊기고 객잔이 폐업한 뒤로 잊힐 줄 알았는데, 하 당주가 이곳을 사들여 재단장한다고 하자 마음이 불안해졌을 거야. 만일 이 물건이 발견되면 정황상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자신이니, 취화탕이 그대로 사라지길 원했을 테지."
"하지만...대체 어째서? 정말 양연이 물건을 훔치던 순간을 봤기 때문에, 몸싸움 끝에 목을 졸라 죽인 걸까? 그렇다면 정당한 구석이 있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런 기묘한 방법까지 쓰면서 증거를 은폐하려 드는 거지?"
방다병이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목놓아 우는 비영을 힐끗 본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알 수 없지. 더 중요한 건, 어찌됐든 이 사건이 5년 전의 일이라는 거야. 설령 정황으로 그 자를 지목하더라도, 정확한 증거를 찾지 못할 경우...사적인 복수라면 모를까, 이미 종결된 사건을 다시 고발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죽은 사람에게 소매치기라는 전과가 있다면 더욱 그렇지. 양연이 개과천선했다고 주장해 봐야, 그건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니. 세상은 낙인이 찍혔던 자의 억울함에 신경 쓰지 않아."
"그건 맞아. 물론 죄책감을 가졌거나 심약한 자라면 정황으로 몰아세웠을 때 자백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고려해야 해. 그 사람이 귀신 소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더라도, 양연에게 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어?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사람이 왜 양연을 죽였는지도 몰라. 둘 중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도 모르고."
방다병이 안타깝고도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비영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이제야 비탄을 한풀 추스르고는, 기진맥진한 몸에 억지로 힘을 주어 일어나려 애쓰던 참이었다. 그 낯빛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을 겨우 세운 후에도, 비영은 차마 걸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후들후들 떨었다. 반려의 유품을 꽉 쥔 채 비틀거리는 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적비성은 이연화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으로 건넸다.
"그냥 무력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저 여자가 복수하는 걸 도우면 안 되는 거냐?"
"그런 편법을 쓰면 진상을 당당히 밝히기가 어려워져. 진실이 뭐든, 양연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다가 운이 나빠 죽은 여자로 기억되겠지."
"5년 전 일이니 아비의 말대로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찾으려고 애써 봐야지. 본인이 스스로 죄를 실토하거나, 숨겨둔 물증 따위를 드러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좋겠는데...."
방다병이 말끝을 흐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련을 놓지 못하고, 적비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 고문도 많다." 당장이라도 군자의 도를 읊을 것처럼 커다란 눈을 부라리는 방다병을 향해, 적비성이 오히려 냉랭한 시선을 쏘아붙였다. "내가 저 여자의 입장이었다면, 이미 그놈을 잡아 매달아놓고 고문부터 시작했을 거다. 너라고 다를 것 같나?" 방다병이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은 반박하길 원하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는 금방 반박의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연화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이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관둬. 어린애한테 무슨 상상을 하도록 만드는 거야."
"어린애라니, 이연화-."
"방다병이 애송이이긴 하다만, 대체 얼마나 어리게 보는 거냐. 곧 혼례를 치를 녀석인데."
적비성이 코웃음과 함께 받아치자, 흠칫한 이연화가 쯧 소리를 내며 적비성을 삿대질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초점을 흐리지 말라고." "이게 왜 초점을 흐리는 거야? 어린애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적비성의 말에 오히려 발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방다병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웅얼거렸다. 재차 코웃음을 친 적비성의 앞에서, 이연화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어쨌든, 방소보의 말에 일리가 있어. 굳이 고문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제발로 진실을 드러내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어?"
"어떻게?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방다병의 눈이 둥그레졌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연화는 일행을 향해 터덜터덜 다가오는 비영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단호해 보이기도 했다. 세게 깨물어 피가 터진 입술로, 비영은 이연화를 향해 물었다. 그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대협. 대협께서는 누가, 왜 양연을 해쳤는지 짐작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막연히 짐작하는 바는 있습니다. 생정 어르신께 한 가지 언질을 해두었으니, 오늘이나 내일 밤이면 정체가 드러나겠지요. 다만 그 연유에 대한 확신은 없는 터라, 한 가지 수를 써보고자 합니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인데...아마 마음이 힘들 것입니다."
이연화가 위로하는 목소리로 건넸다. 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염려하지 마시고, 필요하신 것은 뭐든 시켜주십시오. 어떤 수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이연화의 입가로, 미소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가 엷게 떠올랐다.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과거 소사검을 들고 적들을 마주하던 이상이와, 소인배를 등쳐먹을 계획을 세우던 이연화의 인상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이연화의 입에서 차갑게 놀리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죄인이 스스로 켕기는 구석을 없애고자 감히 귀신을 끌어들였으니, 우리도 귀신을 이용해 수풀을 흔들어 봅시다."
-
"큰일이야."
방다병이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건넨 말에, 취화탕 한편의 꽃나무에 기대 서신을 작성하던 적비성이 확 몸을 물렸다. 방다병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한 손에 전서매의 쪽지를 들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 새가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날아갔다. 금원맹주가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뭐냐."
"혼례 때 이연화가 쓸 관을 주문해 뒀는데, 운반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장식이 망가진 모양이야. 보수해서 다시 가져오기에는 시일이 촉박해."
방다병이 퍽 전전긍긍하는 얼굴로 말했다. 적비성은 그 초조함에 동조하지 못한 채 미간을 더 찌푸렸다.
"새로 사면 되잖나."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주문 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주어야 하고, 당연히 실력도 아주 뛰어나야 해. 젊은이의 감각에 원로의 손길을 가진 사람이면 딱 좋은데, 그런 사람은 얼마 없다고. 설령 있더라도 보통은 아주 유명해서, 그런 데다 의뢰하면 소문 나지 않기가 어려워. 어머니가 대체품을 구하려 애쓰고 계시다는데...마땅한 장인과 물건을 찾기가 어려우신가 봐."
"하루 쓰고 말 관에 뭐 그리 신경을 쓰는 거냐? 어차피 이연화는 관을 나무로 만들든 보석으로 치장하든 별 관심도 없을 텐데."
"내가 관심이 있다고, 내가! 여기서 혼례에 진심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니까."
답답한 얼굴로 가슴을 탕탕 두드린 방다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잘 돼간다 싶으면 꼭 자잘한 문제가 터지는 거야? 관도 관이지만, 제발 예물에는 별 문제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 침울한 투덜거림에,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비록 간소하다 못해 단출하게 치르는 혼례였으나, 방다병은 결혼 예물만큼은 하나라도 주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연화는 '형식을 차리는 일일 뿐인데 뭣하러 그런 데에 신경을 쓰느냐, 그냥 집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인하겠다 약조하고 신방에 들면 그만이다.' 따위의 말을 주절거렸으나, 방다병은 그 부분에서 매우 강경했다. 방다병을 이기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하는 이연화는 꽤 좋은 볼거리였기에, 적비성 역시 방다병의 의지를 굳이 꺾으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형식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뭘 그리 깊이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관이든 예물이든 적당히 하면 될 일을."
적비성이 반만 진심인 소리를 툭 던졌다. 자신이 그 예물을 '적당히' 고르기 위해 어떤 노력까지 했는지 구구절절 알려주고픈 생각은 없었다. 방다병의 얼굴이 팍 우그러졌다. 그 눈이 험한 빛을 띤 채 금원맹주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형식이라도, 살면서 한 번뿐인 혼례잖아. 당연히 고민해야 할 일이지! 이연화의 그...부군이 되는 날인데, 어떻게 적당히 준비할 수 있겠어? 마음 같아서는 모든 예를 다 지켜서 가장 좋은 것들을 갖춰주고 싶지만, 상황이 특수하니 많이 절충한 거라고."
방다병이 뺨을 붉히며 늘어놓은 말에, 적비성이 눈을 깜박였다. 머리로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방다병의 입으로 들으니 어쩐지 새삼스러웠다.
부군이라.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사지가 끊긴 채 묶였던 시절, 각려초에게서 참 많이도 들었던 호칭이었다. 여자는 늘 자신의 부군이 되어달라 강요하거나 간청하며 홀로 웃거나 울어댔다. 상대가 아무리 아름답고 처연한 얼굴로 자신을 부군이라 불러도, 마음이 동하기는커녕 더욱 차게 굳어져 살의가 피어올랐다. 당시의 적비성이 가장 싫어하던 단어를 몇 가지 꼽으라면, 그 안에 분명 부군이란 말이 포함되었을 터였다.
당연하게도, 적비성은 지금껏 부군이라는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머릿속은 늘 힘과 무공, 경계와 복수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틈새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비집고 들어와 하루가 다르게 그 몸집을 키워나갔다. 생소하다 못해 당황스러웠으나 그렇다고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단순한 수용을 넘어, 금원맹주는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갈망에 적극적으로 발을 맞추었다. 그 격변의 결과물로, 적비성은 무려 혼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비록 일반적인 혼사라 일컬을 수는 없었으나, 그는 분명 누군가의 반려가 되려는 참이었다.
이연화에게 자신을 부군이란 말로 부르라 요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고 보니, 동굴에서 제 발로 납치당하기 직전에도 내게 그렇게 서방 소리가 듣고 싶으냐 물었더랬지. 당시에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어쩐지 폐부에서 생경하고도 간지러운 느낌이 올라왔다. 옛일을 회상하던 적비성이 피식 웃자, 방다병이 뚱하게 말했다.
"뭐야, 왜 기분 나쁘게 웃는데."
"넌 신방에 드는 게 처음이겠군. 나는 이미 이연화와 들어간 적이 있다만."
"뭐?"
방다병이 대뜸 이상한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적비성이 더욱 뚜렷한 웃음을 띤 채 이었다.
"사실이다. 같이 합환주도 나눠 마셨지."
"거짓말하지 마."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한단 말이냐."
"거짓말이 아니라면 무슨 사건을 해결하거나, 적에게서 도망치려다 숨어든 거겠지. 날 골탕먹이고 싶으면 더 그럴듯하게 해."
방다병이 흥 소리를 내며 대꾸한 말에, 적비성은 그만 김이 새버린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란 게 얼마 안 되는 장점이었는데, 갈수록 그것도 덜해지는군.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금원맹주는 취화탕 옆의 건물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체구에 녹색 옷을 두르고, 얼굴에도 녹색 면사를 드리운 이였다. 그 사람은 방다병이 설치한 기관을 슥 보고는, 곧 가벼운 걸음걸이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어."
그렇게 건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높게 울려, 언뜻 들어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얼굴에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 눈가에는 온통 진한 빨간빛을 발라두니, 언뜻 보면 꽤 소름끼치는 꼴이 되었다. 제대로 묶지 않고 풀어헤친 머리칼도 한몫을 했다. 방다병이 신기한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이 사람은 축골공과 비영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5년 전의 양연과 비슷한 모습을 갖춘 이연화였다.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눈매를 제외하면, 이연화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방다병이 오른손을 들어 이연화의 뺨을 콕 찔러보았다.
"정말 기이하네. 축골공을 쓰는 사람은 아비 이후로 처음 봤어."
"원리만 알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줄어들고 늘어날 때 조금...껄끄러운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이연화가 가볍게 팔을 돌렸다. 아무래도 몸의 움직임이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은지, 그 표정이 살짝 떨떠름했다. 방다병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이연화,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축골공까지 쓰지 않더라도, 비슷한 체구의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되잖아."
"이런 일은 확실해지기 전까진 새어나가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상대에게 섣불리 잡히지 않아야 하니, 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해. 너는 축골공을 쓸 줄 모르고, 아비를 시켰다가는 진실을 캐내기도 전에 정체가 탄로날 게 분명한데 어쩌겠어?"
"하긴...아비가 박서산에서 정말 연기를 못하긴 했지."
방다병이 별 악의도 없는 얼굴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협적인 눈으로 노려보자, 청년이 억울한 투로 대꾸했다. "뭘? 그때 내가 네 정체를 몰라서 그랬지, 널 아는 채로 봤다면 겉모습이 어린애든 노인이든 절대 헷갈리지 않았을 거야." 적비성의 눈동자로 한층 힘이 들어갔다. 입을 삐죽 내민 방다병이 뭐라 대꾸하기 전, 이연화가 그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됐어, 방소보. 괜히 다투지 말고, 이리 와서 네 기관에 대한 설명이나 좀 해줘."
대놓고 달래는 말이었으나 어쨌든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여겼는지, 방다병은 적비성을 향해 턱을 살짝 내밀고는 흥 소리를 냈다. 그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생각하다가-전적을 고려해볼 때, 금원맹주의 '쥐어박음'은 보통 생사와 관련이 있었다-적비성은 이내 조그맣게 들려온 질문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데...저기, 이연화. 예전에 아비랑 정말로 신방에 들어간 적이 있어?" 이래저래 건방진 데다 신경을 긁는 구석이 있는 꼬마였지만, 아주 가끔씩은 두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5년 전의 업무 당번표 말입니까?"
생정이 휘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남자는 천기당에서 사업장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 어째서 옛날 객잔의 당번표 따위를 찾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생정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게...너무 오래 전인지라. 당시의 화재 때문에, 종이나 나무로 된 문건들은 대부분 타버렸습니다. 화재가 아니었더라도, 폐업한 후에는 관련된 물건들을 처분했으니...."
"하지만 당신은 그때의 지배인이었지요. 누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세세한 명단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구역 당 한둘 정도라면...그런데, 갑자기 그때 일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연화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생정은 당혹과 의혹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방다병은 곧 심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이 마치 황제의 명을 전하는 전령처럼 진지했다.
"솔직히 말하지요. 이곳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 소문이라니...."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소, 그대나 다른 사람들을 추궁할 생각은 없으니. 하지만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안일하게 경시할 수도 없어, 동료들과 함께 나름대로 그 건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정보이니, 협력해 준다면 이곳 사람들에게 손해가 생기지 않도록 할 거요."
방다병이 적절한 권위가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정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연륜이 있는 객잔 지배인답게, 그는 자신의 동요를 잘 감춘 다음 양손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곧 낮은 한숨과 함께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저, 대협들. 제가 생각하는 그 소문이 맞다면...장담컨대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친 적도 없고, 그냥 흉한 소문이 알음알음 떠도는 것뿐이니까요."
"압니다. 하지만 경험이 많으시니, 새로운 사업에는 초반의 입소문이 중요하단 사실도 잘 아실 테지요. 많은 이가 몇 달 동안 애를 써가며 이곳을 새단장하였는데, 괜한 구설수로 객이 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억울하고 슬픈 일입니다. 꺼림칙한 구석을 명확히 짚고 넘어간다면, 천기당주뿐 아니라 여러분께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좋은 일자리를 오래도록 보전하는 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연화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매끄럽게 건넸다. 적비성이 귀찮은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금원맹주는 예나 지금이나 시간낭비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관련자들을 일단 거꾸로 매달아놓은 다음 질문하고 싶었으나, 이연화와 방다병이 함께 있으니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심란한 표정을 지었던 생정이 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5년 전의 업무 당번표가 무슨 도움이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천기당주께서 믿고 보내신 분들이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당번의 어떤 부분이 궁금하십니까?"
"그 전에 한 가지 질문드리지요. 오늘 오면서 다시 확인해 보았는데, 온천 근처에는 모두 건물들이 지어져 있더군요. 객잔 내의 시설들은 대부분 복구되었을 뿐 이전과 그 역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건물들은 모두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는 일에 쓰던 곳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개중 두어 군데는 손님들이 묵는 곳이었어요. 탕에서만 즐기기는 아쉬울 만큼 빼어난 풍경을 지닌 곳들이 있지 않습니까? 부유하신 분들은 조금 더 비싸게 주고서라도 그런 숙소에서 묵길 원하셨지요."
"그렇군요. 그런 건물은 몇 개나 있습니까?"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죽매탕 옆에, 하나는 취화탕 옆에 있지요."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꾸 등장하는 취화탕의 이름이 영 거슬렸다. 고개를 끄덕한 이연화가 이었다.
"화재가 일어났던 날, 이곳에서 혼례가 치러졌다 들었습니다. 그날 죽매탕과 취화탕 근처에서 청소하거나 일하던 이가 누구였습니까?"
"그땐 혼례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터라...한둘 정도만 보냈을 겁니다. 그날 자리에 없던 사람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생정은 곧 입을 열어 두세 개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적비성을 비롯한 세 사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연화의 입가로, 다소 차가워 미소처럼 보이지 않는 표정이 감돌았다. 이연화가 담담히 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찾는 구역을 맡겼다니, 꽤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생정이 이연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와 오래 일한 이들이니까요. 저...혹시 그 사람들이 뭔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 의심하십니까?"
"아직은 모를 일이지요. 아, 어르신. 하나만 더 부탁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질문을 건넸다는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주시고, 이곳 사용인들에게 한 가지 말을 퍼뜨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연화가 계략을 꾸미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말의 형태야 부탁이었으나, 천기당에서 나왔다는 셋이 함께하니 아무래도 요구에 가까웠다. 이연화의 귓속말을 들은 생정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예? 설령 탕을 쓰지 않을 작정이라 해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냥 메울 방법이 있습니다만...." 적비성이 미간과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정말로, 사람들의 사정을 보아주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싫었다. 이 사건에 조금의 흥미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가능하면 빨리 해결한 다음 혼례 준비에 집중하고 싶었다. 선뜩한 기운을 감지한 생정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생정과 헤어져, 세 사람은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비영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비영이 얼른 이연화에게 다가서 물었다.
"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으신다던 말씀은...."
"일단 취화탕을 확인해 보지요. 범인이 그곳을 없애길 원하는 까닭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범인이 취화탕을 없애길 원한다고요? 그게 무슨...일전에 알려주신, 탕의 색깔이 변하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말씀입니까?"
"그건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현상입니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다면, 흉한 소문으로 인해 취화탕이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이겠지요. 부인의 사건과 직결된 일이라 확언할 수는 없으나, 아무래도 수상하니 일단 그곳을 샅샅이 뒤져 이유를 알아내야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며, 이연화는 취화탕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비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그 소문이 양연의 일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소문을 퍼뜨린 사람과 양연을 해친 사람이 같은 자라 여기시는 겁니까?"
"가능성은 있습니다. 당시 알려지기로, 부인은 손님들의 짐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지요. 실제로 그 몸에서 나온 물건들은 당시에 묵던 손님들의 것이었고요. 그렇다면 부유한 사람들의 숙소에서 사건이 벌어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죽매탕과 취화탕 근처에 그런 손님들이 묵었다 하니, 한번 확인해 볼 가치가 있지요."
방다병이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 적비성은 역시 정파의 방식이 조금 피로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걸었다. 생정에 의해 아주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난 마당이니, 그 사람을 매달거나 묶어놓고 한 대씩 두들기면서 진실을 물으면 될 일이 아닌가? 직접적인 폭력이 꺼려진다면 약마의 방법을 빌릴 수도 있었다. 조금 기다려 보고, 또 시간낭비가 될 것 같으면 내가 몰래 그놈을 잡아와야겠군. 방다병이나 이연화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면서, 적비성은 꽃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음. 아무래도 부숴야겠어."
팔짱을 낀 채 뿌연 탕을 바라보던 이연화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적비성은 어쩐지 반가운 기분에 사로잡혀 돌아보았다(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으나, 적비성은 이연화가 저돌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묘한 후련함을 느꼈다). 마침 이연화 역시 이편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이연화가 탕을 슬쩍 고갯짓하며 건넸다.
"뭐 해? 물 속이라 안 되겠어?"
"뭘 부수란 말이냐? 탕 전체를 쪼개면 되나?"
"과격하기는. 일단 의심스러운 부분부터 확인해 보자고. 우리가 여기서 뽑지 못했던 게 있는데, 기억해?"
이연화가 혀를 차며 슬쩍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한 적비성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오른손에 내력을 잔뜩 집중시키자, 긴 머리칼이 살짝 떠올라 흔들렸다.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고!" 한 손을 입가에 댄 채, 이연화는 쓸데없이 물장구를 치려는 아이를 타박하듯 외쳤다. 미간을 좁힌 적비성이 오른손을 내질렀다. 그 손끝은 마치 창날처럼 물을 푹 파고들어가, 돌과 흙에 닿았을 때 벼락 같은 힘을 발휘했다. 쩍! 손가락 끝에 첨예하게 모인 내력이 단단한 조직을 무정히 갈라냈다. "괜찮을까? 아비는 좀...무대포잖아. 박힌 것까지 다 부숴버리는 거 아니야?" 등 뒤에서 방다병이 걱정스레 소곤거렸다.
자신의 조절력을 의심하는 청년을 험한 눈으로 돌아보며, 적비성은 오른손에 잡힌 물체를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들이 뽑으려다 뽑지 못했던, 길쭉하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이연화는 심란하고도 무거운 표정을 지었으며 비영은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장식은 어딘가로 모두 사라져버렸고, 세월의 흔적이 덧씌워져 다소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비녀였다. "그건...." 비영이 더듬거리며 발을 옮겼다. 적비성이 그 물체를 건네주자, 비영은 양손 위에 그 비녀를 받치고는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한동안 살펴보았다. "이건...이건." 벌겋게 변한 눈동자에 곧 눈물이 어렸다.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는 비영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조용히 물었다.
"이게 부인에게 주었던 비녀입니까?"
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덜덜 떨면서 비녀와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왜...이게 왜 이곳에 있습니까? 왜...대체 어쩌다가...."
"예상대로, 부인이 죽은 곳은 온천이었던 듯합니다. 아마도 이 탕이었겠지요."
이연화가 유감스러운 얼굴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건네도 끔찍한 내용이었으므로, 비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녀를 양손으로 꽉 끌어안듯이 쥐었다. 해일마냥 밀려든 기억들에 짓눌린 사람처럼, 여자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큰 몸을 웅크리고는 한참을 꺽꺽거리며 울었다. 그 모습을 탄식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연화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나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속삭였다.
"이걸로 거의 확실해졌군. 범인은 당시에 이곳을 담당했던 자야. 양연을 죽일 때 어떤 연유로든 비녀가 이곳에 깊숙이 박혀버린 듯한데, 아비처럼 무공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빼기 어려웠겠지. 손님이 끊기고 객잔이 폐업한 뒤로 잊힐 줄 알았는데, 하 당주가 이곳을 사들여 재단장한다고 하자 마음이 불안해졌을 거야. 만일 이 물건이 발견되면 정황상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자신이니, 취화탕이 그대로 사라지길 원했을 테지."
"하지만...대체 어째서? 정말 양연이 물건을 훔치던 순간을 봤기 때문에, 몸싸움 끝에 목을 졸라 죽인 걸까? 그렇다면 정당한 구석이 있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런 기묘한 방법까지 쓰면서 증거를 은폐하려 드는 거지?"
방다병이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목놓아 우는 비영을 힐끗 본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알 수 없지. 더 중요한 건, 어찌됐든 이 사건이 5년 전의 일이라는 거야. 설령 정황으로 그 자를 지목하더라도, 정확한 증거를 찾지 못할 경우...사적인 복수라면 모를까, 이미 종결된 사건을 다시 고발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죽은 사람에게 소매치기라는 전과가 있다면 더욱 그렇지. 양연이 개과천선했다고 주장해 봐야, 그건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니. 세상은 낙인이 찍혔던 자의 억울함에 신경 쓰지 않아."
"그건 맞아. 물론 죄책감을 가졌거나 심약한 자라면 정황으로 몰아세웠을 때 자백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고려해야 해. 그 사람이 귀신 소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더라도, 양연에게 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어?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사람이 왜 양연을 죽였는지도 몰라. 둘 중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도 모르고."
방다병이 안타깝고도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비영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이제야 비탄을 한풀 추스르고는, 기진맥진한 몸에 억지로 힘을 주어 일어나려 애쓰던 참이었다. 그 낯빛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을 겨우 세운 후에도, 비영은 차마 걸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후들후들 떨었다. 반려의 유품을 꽉 쥔 채 비틀거리는 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적비성은 이연화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으로 건넸다.
"그냥 무력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저 여자가 복수하는 걸 도우면 안 되는 거냐?"
"그런 편법을 쓰면 진상을 당당히 밝히기가 어려워져. 진실이 뭐든, 양연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다가 운이 나빠 죽은 여자로 기억되겠지."
"5년 전 일이니 아비의 말대로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찾으려고 애써 봐야지. 본인이 스스로 죄를 실토하거나, 숨겨둔 물증 따위를 드러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좋겠는데...."
방다병이 말끝을 흐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련을 놓지 못하고, 적비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 고문도 많다." 당장이라도 군자의 도를 읊을 것처럼 커다란 눈을 부라리는 방다병을 향해, 적비성이 오히려 냉랭한 시선을 쏘아붙였다. "내가 저 여자의 입장이었다면, 이미 그놈을 잡아 매달아놓고 고문부터 시작했을 거다. 너라고 다를 것 같나?" 방다병이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은 반박하길 원하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는 금방 반박의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연화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이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관둬. 어린애한테 무슨 상상을 하도록 만드는 거야."
"어린애라니, 이연화-."
"방다병이 애송이이긴 하다만, 대체 얼마나 어리게 보는 거냐. 곧 혼례를 치를 녀석인데."
적비성이 코웃음과 함께 받아치자, 흠칫한 이연화가 쯧 소리를 내며 적비성을 삿대질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초점을 흐리지 말라고." "이게 왜 초점을 흐리는 거야? 어린애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적비성의 말에 오히려 발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방다병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웅얼거렸다. 재차 코웃음을 친 적비성의 앞에서, 이연화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어쨌든, 방소보의 말에 일리가 있어. 굳이 고문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제발로 진실을 드러내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어?"
"어떻게?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방다병의 눈이 둥그레졌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연화는 일행을 향해 터덜터덜 다가오는 비영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단호해 보이기도 했다. 세게 깨물어 피가 터진 입술로, 비영은 이연화를 향해 물었다. 그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대협. 대협께서는 누가, 왜 양연을 해쳤는지 짐작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막연히 짐작하는 바는 있습니다. 생정 어르신께 한 가지 언질을 해두었으니, 오늘이나 내일 밤이면 정체가 드러나겠지요. 다만 그 연유에 대한 확신은 없는 터라, 한 가지 수를 써보고자 합니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인데...아마 마음이 힘들 것입니다."
이연화가 위로하는 목소리로 건넸다. 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염려하지 마시고, 필요하신 것은 뭐든 시켜주십시오. 어떤 수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이연화의 입가로, 미소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가 엷게 떠올랐다.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과거 소사검을 들고 적들을 마주하던 이상이와, 소인배를 등쳐먹을 계획을 세우던 이연화의 인상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이연화의 입에서 차갑게 놀리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죄인이 스스로 켕기는 구석을 없애고자 감히 귀신을 끌어들였으니, 우리도 귀신을 이용해 수풀을 흔들어 봅시다."
-
"큰일이야."
방다병이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건넨 말에, 취화탕 한편의 꽃나무에 기대 서신을 작성하던 적비성이 확 몸을 물렸다. 방다병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한 손에 전서매의 쪽지를 들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 새가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날아갔다. 금원맹주가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뭐냐."
"혼례 때 이연화가 쓸 관을 주문해 뒀는데, 운반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장식이 망가진 모양이야. 보수해서 다시 가져오기에는 시일이 촉박해."
방다병이 퍽 전전긍긍하는 얼굴로 말했다. 적비성은 그 초조함에 동조하지 못한 채 미간을 더 찌푸렸다.
"새로 사면 되잖나."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주문 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주어야 하고, 당연히 실력도 아주 뛰어나야 해. 젊은이의 감각에 원로의 손길을 가진 사람이면 딱 좋은데, 그런 사람은 얼마 없다고. 설령 있더라도 보통은 아주 유명해서, 그런 데다 의뢰하면 소문 나지 않기가 어려워. 어머니가 대체품을 구하려 애쓰고 계시다는데...마땅한 장인과 물건을 찾기가 어려우신가 봐."
"하루 쓰고 말 관에 뭐 그리 신경을 쓰는 거냐? 어차피 이연화는 관을 나무로 만들든 보석으로 치장하든 별 관심도 없을 텐데."
"내가 관심이 있다고, 내가! 여기서 혼례에 진심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니까."
답답한 얼굴로 가슴을 탕탕 두드린 방다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잘 돼간다 싶으면 꼭 자잘한 문제가 터지는 거야? 관도 관이지만, 제발 예물에는 별 문제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 침울한 투덜거림에,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비록 간소하다 못해 단출하게 치르는 혼례였으나, 방다병은 결혼 예물만큼은 하나라도 주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연화는 '형식을 차리는 일일 뿐인데 뭣하러 그런 데에 신경을 쓰느냐, 그냥 집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인하겠다 약조하고 신방에 들면 그만이다.' 따위의 말을 주절거렸으나, 방다병은 그 부분에서 매우 강경했다. 방다병을 이기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하는 이연화는 꽤 좋은 볼거리였기에, 적비성 역시 방다병의 의지를 굳이 꺾으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형식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뭘 그리 깊이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관이든 예물이든 적당히 하면 될 일을."
적비성이 반만 진심인 소리를 툭 던졌다. 자신이 그 예물을 '적당히' 고르기 위해 어떤 노력까지 했는지 구구절절 알려주고픈 생각은 없었다. 방다병의 얼굴이 팍 우그러졌다. 그 눈이 험한 빛을 띤 채 금원맹주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형식이라도, 살면서 한 번뿐인 혼례잖아. 당연히 고민해야 할 일이지! 이연화의 그...부군이 되는 날인데, 어떻게 적당히 준비할 수 있겠어? 마음 같아서는 모든 예를 다 지켜서 가장 좋은 것들을 갖춰주고 싶지만, 상황이 특수하니 많이 절충한 거라고."
방다병이 뺨을 붉히며 늘어놓은 말에, 적비성이 눈을 깜박였다. 머리로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방다병의 입으로 들으니 어쩐지 새삼스러웠다.
부군이라.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사지가 끊긴 채 묶였던 시절, 각려초에게서 참 많이도 들었던 호칭이었다. 여자는 늘 자신의 부군이 되어달라 강요하거나 간청하며 홀로 웃거나 울어댔다. 상대가 아무리 아름답고 처연한 얼굴로 자신을 부군이라 불러도, 마음이 동하기는커녕 더욱 차게 굳어져 살의가 피어올랐다. 당시의 적비성이 가장 싫어하던 단어를 몇 가지 꼽으라면, 그 안에 분명 부군이란 말이 포함되었을 터였다.
당연하게도, 적비성은 지금껏 부군이라는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머릿속은 늘 힘과 무공, 경계와 복수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틈새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비집고 들어와 하루가 다르게 그 몸집을 키워나갔다. 생소하다 못해 당황스러웠으나 그렇다고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단순한 수용을 넘어, 금원맹주는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갈망에 적극적으로 발을 맞추었다. 그 격변의 결과물로, 적비성은 무려 혼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비록 일반적인 혼사라 일컬을 수는 없었으나, 그는 분명 누군가의 반려가 되려는 참이었다.
이연화에게 자신을 부군이란 말로 부르라 요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고 보니, 동굴에서 제 발로 납치당하기 직전에도 내게 그렇게 서방 소리가 듣고 싶으냐 물었더랬지. 당시에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어쩐지 폐부에서 생경하고도 간지러운 느낌이 올라왔다. 옛일을 회상하던 적비성이 피식 웃자, 방다병이 뚱하게 말했다.
"뭐야, 왜 기분 나쁘게 웃는데."
"넌 신방에 드는 게 처음이겠군. 나는 이미 이연화와 들어간 적이 있다만."
"뭐?"
방다병이 대뜸 이상한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적비성이 더욱 뚜렷한 웃음을 띤 채 이었다.
"사실이다. 같이 합환주도 나눠 마셨지."
"거짓말하지 마."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한단 말이냐."
"거짓말이 아니라면 무슨 사건을 해결하거나, 적에게서 도망치려다 숨어든 거겠지. 날 골탕먹이고 싶으면 더 그럴듯하게 해."
방다병이 흥 소리를 내며 대꾸한 말에, 적비성은 그만 김이 새버린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란 게 얼마 안 되는 장점이었는데, 갈수록 그것도 덜해지는군.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금원맹주는 취화탕 옆의 건물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체구에 녹색 옷을 두르고, 얼굴에도 녹색 면사를 드리운 이였다. 그 사람은 방다병이 설치한 기관을 슥 보고는, 곧 가벼운 걸음걸이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어."
그렇게 건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높게 울려, 언뜻 들어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얼굴에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 눈가에는 온통 진한 빨간빛을 발라두니, 언뜻 보면 꽤 소름끼치는 꼴이 되었다. 제대로 묶지 않고 풀어헤친 머리칼도 한몫을 했다. 방다병이 신기한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이 사람은 축골공과 비영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5년 전의 양연과 비슷한 모습을 갖춘 이연화였다.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눈매를 제외하면, 이연화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방다병이 오른손을 들어 이연화의 뺨을 콕 찔러보았다.
"정말 기이하네. 축골공을 쓰는 사람은 아비 이후로 처음 봤어."
"원리만 알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줄어들고 늘어날 때 조금...껄끄러운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이연화가 가볍게 팔을 돌렸다. 아무래도 몸의 움직임이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은지, 그 표정이 살짝 떨떠름했다. 방다병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이연화,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축골공까지 쓰지 않더라도, 비슷한 체구의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되잖아."
"이런 일은 확실해지기 전까진 새어나가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상대에게 섣불리 잡히지 않아야 하니, 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해. 너는 축골공을 쓸 줄 모르고, 아비를 시켰다가는 진실을 캐내기도 전에 정체가 탄로날 게 분명한데 어쩌겠어?"
"하긴...아비가 박서산에서 정말 연기를 못하긴 했지."
방다병이 별 악의도 없는 얼굴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협적인 눈으로 노려보자, 청년이 억울한 투로 대꾸했다. "뭘? 그때 내가 네 정체를 몰라서 그랬지, 널 아는 채로 봤다면 겉모습이 어린애든 노인이든 절대 헷갈리지 않았을 거야." 적비성의 눈동자로 한층 힘이 들어갔다. 입을 삐죽 내민 방다병이 뭐라 대꾸하기 전, 이연화가 그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됐어, 방소보. 괜히 다투지 말고, 이리 와서 네 기관에 대한 설명이나 좀 해줘."
대놓고 달래는 말이었으나 어쨌든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여겼는지, 방다병은 적비성을 향해 턱을 살짝 내밀고는 흥 소리를 냈다. 그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생각하다가-전적을 고려해볼 때, 금원맹주의 '쥐어박음'은 보통 생사와 관련이 있었다-적비성은 이내 조그맣게 들려온 질문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데...저기, 이연화. 예전에 아비랑 정말로 신방에 들어간 적이 있어?" 이래저래 건방진 데다 신경을 긁는 구석이 있는 꼬마였지만, 아주 가끔씩은 두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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