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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2 01:0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5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다음날, 세 사람은 약속한 시간에 저자를 향했다. 비영의 집은 작업장 한편에 붙어 있었는데, 그 겉모습이 허름할 정도로 단출했지만 깔끔했다. 비영은 수아에게 말을 전해두었으니 곧 올 것이라 말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의 어린아이가, 침상에 앉아 작은 공을 던지고 받으며 놀다가 놀란 얼굴을 했다. 갑작스러운 손님들에 겁을 먹었는지, 꼬마는 허둥지둥 내려와 비영의 뒤로 몸을 숨겼다. 어린아이들에게 쉬이 친절해지는 방다병이 꼬마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비영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머쓱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요. 그건 절 닮지 않길 바랐는데...."
"수줍음은 신중함의 일면이기도 하지요. 저희야 괜찮습니다만, 아이의 귀엔 좋지 못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잠시 옆방에 있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연화의 말에, 비영은 고개를 끄덕하고는 아이에게 뭐라 속삭였다. 꼬마는 이내 공을 꼭 껴안은 채 안쪽의 작은 방을 향했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비영은 굳은 얼굴로 탁자 아래편을 뒤졌다. 어두운 빛깔의 목함 하나가 그 손에 들려 나왔다. "이게 그날 양연이 지녔던 물건들입니다." 비영이 상자 뚜껑을 열며 말했다. 세 쌍의 시선이 그 내용물을 살폈다. 모든 물건에 그을음이 가득하여, 흔적만으로도 그날의 불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귀걸이와 목걸이, 손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연고통과 대부분 타버린 옷가지 따위를 살피던 이연화가 물었다.
"당시에 마굿간이 어느 정도로 탔습니까?"
"어, 완벽하게 다 타지는 않았지만 꽤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특히 양연이 누웠던 쪽이 그랬지요. 그쪽은 거의 전소되어 들보가 내려앉았으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옷의 모양새가 보존되어 있네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말하며, 방다병이 오래된 옷감을 만져보았다. 전체적으로 불탄 누더기가 된 꼴이 끔찍했으나, 소매나 밑단 일부는 아직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장신구 몇 가지를 뒤집어보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비녀는 어디 있습니까?"
"예?"
"비녀를 주면서 청혼하셨다 했지요. 직접 만들어준 장신구를 잘 착용한다 했는데, 그 비녀를 평소에 쓰지는 않았습니까?"
"그 날도 썼을 겁니다. 일을 하러 나갈 때에는 늘 그걸 꽂았거든요. 제일 멋지게 보여야 한다고요."
비영이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그 손이 탁자를 움켜쥐었다. "저도 비녀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관의 분들은 몸싸움을 심하게 하다 보면 당연히 빠질 수도 있다 하더군요. 사건을 해결하는 전문가들은 본인이라고...." 흐려진 말끝에, 방다병이 대뜸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건성으로 처리한 것만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유족을 하찮게 보아 무시하기까지 했다니 더더욱 거슬린 모양이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비녀로 상대를 공격하려 했을 수도 있겠군. 그러다 역으로 빼앗겼거나, 상대의 몸에 꽂혔을 가능성도 있다."
"양연이 누구를요? 그럴 리가...작은 동물 하나도 제대로 잡기 힘들어했어요. 피를 많이 무서워했거든요."
비영이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비성이 무심히 상대를 보았다. "상대를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의 성품이나 마음을 바닥까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아." 이죽거리는 말은 아니었으나 자극받기에는 충분했는지, 비영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뭐라 말하기 전에, 이연화가 목을 가다듬으며 주의를 끌었다. 세 명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목소리를 낮추어 건넸다.
"부인의 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양연의 묘요? 객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죽매탕 바깥쪽의 오솔길을 쭉 따라 뒷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몇 개의 봉분이 모인 땅이 보이는데, 그 중 가장 안쪽에 묻었지요. 왜 그러십니까?"
"이런 말을 꺼내기 참으로 조심스럽고 외람되지만, 혹시 부인의 시신을 한번 확인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예? 양연의...양연의 시신을 말입니까?"
비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했다. "비록 그 살은 불에 타고 썩었다 하나, 고인의 몸에 남은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이곳의 관 사람들이 부인의 일에 그리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뻔하지만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합리적이고 차분한 말이었으나, 비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그 속눈썹이 정신없이 떨렸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비영이 더듬더듬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게 양연에게 도움이 된다면...양연도 이해해줄 겁니다. 하지만...하지만 저는, 전 그 모습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요. 당시에도...당시에도, 죽어가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은 생각에 도무지...도저히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위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무리해서 함께 가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부인의 묘는 여기 방 공자가 책임지고 원래대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뭐야, 너는 같이 안 가?"
"시신을 확인하는 일이니, 셋이 반드시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지. 너도 부검 경험이라면 여러 차례 있잖아. 나는 여기서 수아 낭자를 기다리다가 이야기를 들을 테니, 너희 둘은 가서 시신을 확인해 줘. 만일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물으면, 망자의 관에 넣어주고픈 귀물이 있다고 둘러대든가 해."
이연화가 건성으로 맺으며 한 손을 내저었다. 방다병은 잠깐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래, 아무리 너라도 이런 데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까." 그 중얼거림에, 이연화가 혀를 차며 상대를 슥 흘겨보았다. 억울한 마음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귀찮은 듯한 기색을 잠깐 풍겼지만, 적비성 역시 길게 지체하지 않고 방다병과 함께 집을 나섰다.
손님들이 떠났다고 생각했는지, 안쪽의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아이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이연화를 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아이를 향해,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괜찮다, 나와 있어도 돼." 아경에게 말하면서, 이연화는 열려 있던 목함을 정리해 다시 닫아두었다. 슬금슬금 다가온 아경은, 이연화의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얼른 양팔을 벌린 채 비영에게 안겨들었다. 익숙한 토닥임에 몸을 맡긴 아이를 미소와 함께 바라보자니, 비영이 별 타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대협은 아이가 있으십니까?"
이연화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 그는 아경에게서 잠시 눈길을 떼고 쓴웃음을 띠었다.
"저는 아직 혼인하기 전입니다. 음인이기는 합니다만, 설령 혼인했다 한들 아이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연화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결과만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어제 만난 사람에게 '나는 남윤 황족과 대희국 황족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이자, 사고문을 세워 여러 사파 및 금원맹과 오래도록 혈투를 벌였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평생 끊이지 않을 치열한 견제와 관심을 여러 군데에서 받게 되었으므로, 후사는 고사하고 각인이나 혼인에 대한 사실조차 남들에게 알릴 마음이 전혀 없다. 또한 나는 아직 음인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따위의 사연을 구구절절히 알려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비영은 당혹한 얼굴로 쩔쩔매다가 곧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인연을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지요. 대협은 성품이 정의롭고 청아하시니, 분명 좋은 인연을 만나실 겁니다. 저, 저도 양연과 아이를 가질 순 없을 거라 여겼는걸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두 사람에게는 괜찮았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느리게 물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과 별개로, 대부분의 양인들은 각인에서 자손을 원했다. 혼인은 단순히 마음이 있는 두 사람의 결합을 넘어, 자손을 생산하고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비영이 아경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물론 아경은 우리의 보물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우리 둘의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아이는 생길지 아닐지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설령 생긴다 한들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서로뿐이었으니, 저는 그저 죽는 날까지 양연의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여겼습니다. 전 그것 하나면 충분했고, 다행히 양연도 그리 여겨주었지요."
"부인과 맺어진 일을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무심코 물어 놓고, 이연화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 건네기에는 지나치게 무신경하고 무례한 말이었다. 심지어 비영의 팔에는 아이까지 안겨 있었다. 얼른 사과하려 드는 이연화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비영은 곧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 눈으로 엷게 눈물이 고였다.
"어찌 그런 일을 후회하겠습니까? 해가 비치다가 사라졌다 해서, 해가 주었던 온기를 원망할 수는 없지요. 오히려 제가 스스로의 초라함을 두려워하여 끝까지 양연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지 못했던 것들과 하지 못했던 말들이 훨씬 지독한 후회가 되어 저를 무너뜨렸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의 제게는...양연과의 추억이라도 남아 있으니까요."
비영이 아이를 꼭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연화는 묘하게도 하효혜를 향해 고개를 숙이던 자신을 떠올렸다. 비록 처한 입장은 너무나 달랐지만, 자신 또한 스스로를 실속 없는 결함품으로 보아 각인하기에는 영 모자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으라 이야기하던 하효혜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이연화의 입가로 미소라기엔 너무 쓴 표정이 떠올랐다. 눈앞의 여자가 갑작스레 커 보였다. "그대는 강인한 사람이로군요.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손을 내밀었으니 말입니다." 이연화의 나직한 말에, 비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예? 아닙니다, 전 이겨내지 못했어요. 그냥 덜덜 떨면서 청혼한 겁니다. 되게 못나게 했어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비녀는 떨어뜨리고...양연과 혼인한 후에도 한동안은 계속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양연이 언제든 절 떠나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냥, 그냥 무서워하면서 계속 살았을 뿐입니다. 1년쯤 지나니까 많이 나아졌지요."
비영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맺었다. 이만 이 화제를 마무리할까 하다가, 이연화는 그만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눈가를 만지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반려자를 잃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건넬 말은 아니다 싶었으나, 주위에 평범하게 혼인해 살아가는 이가 거의 없었던지라-자신의 지인이라고 해봐야 거진 무림인들이었는데, 강호인들은 평화로운 결혼 생활과 거리가 먼 삶을 살기 일쑤였다-이런 일을 물어보기에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그...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기는 합니까?"
"예? 예에, 그렇기는 했습니다. 처음엔 금방이라도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양연의 마음이 금세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그저 하루하루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안위를 챙겨주고, 같이 잠드는 날이 반복되니...그런 일상에 익숙해지더군요."
비영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 마음이 순간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신혼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연화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긴, 나도 각인하겠다 마음먹으면 당장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전전긍긍했었지. 심악의 약 때문에 꾸었던 악몽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밤의 이연화는, 상대를 자신의 안에 깊이 들여놓으면 장차 다시 심장이 부서지리라 거의 확신하며 몸서리쳤다. 지금도 그의 일부는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상은 험난하고도 난데없는지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셋이 함께 누웠을 때의 온기와 놀리듯 주고받는 말들이 좋았지만, 그 행복에 잠겨 안주하는 것은 막연하고 안일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이연화의 미간이 자기도 모르게 슬쩍 좁혀졌다. 하지만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비극 때문에 현재를 포기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 또한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선택으로도 고통을 완벽히 피할 수 없다면, 설령 언젠가 깨질지라도 행복이 존재하는 길을 걷는 편이 낫지 않은가? 이연화가 내적 한숨을 푹 쉬며 팔짱을 끼었다. 이런 고민은 여현에서 승낙 아닌 승낙을 건넬 때 대충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해묵고도 복잡한 문제이다 보니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곤 했다.
홀로 생각하는 꼴이 어떻게 보였는지, 이연화의 얼굴을 살피던 비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대협도 마음에 두신 분이 있습니까? 각인하셨거나...."
각인을 넘어, 당장 얼마 후에 혼례까지 치르겠다고 버틴 놈들이 있습니다. 이연화는 어쩐지 아련한 두통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신음하듯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다, 사고문주는 보도사의 주지승을 대할 때처럼 스리슬쩍 둘러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대는 무료 대사만큼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데다 훨씬 순박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웬만해서는 이연화를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제 일은 아닙니다만...제 가까운 친우 중 하나가, 혼례를 앞두고 이래저래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혼인은 대사 중의 대사가 아닙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아, 이해합니다. 저도 막상 혼인할 무렵이 되자 마음이 복잡해져,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요."
비영이 잔뜩 동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선한 고백에, 이연화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렇게 서로 좋아했는데도 말입니까?" 비영이 아경의 등을 쓸어내리며 낮게 웃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혼인은 대협의 말씀대로 대사 중의 대사이니까요. 저는 스스로가 혼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 더했지요. 혼인 준비로 바쁜 와중에 괜히 침울해지기도 하고, 신경이 곤두서서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기도 하고, 서로를 위해 이제라도 물러야 하나 싶기도 하고...아주 정신이 없었습니다."
비영이 말도 말라는 듯 혀를 내두르며 웃었다. 이연화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며칠 동안 크게 괴롭히던 문제를, 상대는 퍽 소탈한 방식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비영이 아경을 추슬러 안고는 미소했다. "혼인을 너무나 큰 일로 여겨 무서워했지만, 사실 혼인이란 상대의 숟가락에 찬 하나 얹어주는 일상이 계속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더 이상 제게는 그런 기회가 없게 되었으나...그래도 그런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 분도 마음을 잘 추스르셨으면 좋겠네요." 사려 깊은 말에, 이연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의 말을 표했다.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진 것인지, 조금쯤 잠잠해진 것인지 금방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양연의 친구라던 수아가 도착하기까지는 반 시진 정도가 더 걸렸다. 그 동안 이연화는 비영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경의 부서진 장난감을 고쳐주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이연화의 친절한 태도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가끔씩 쑥스럽게나마 미소를 보여주었다. 고친 장난감을 받았을 때에는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하기도 했다. 열린 문으로 수아의 모습이 보이자, 아경은 장난감을 자랑하려는 듯 그편으로 달려갔다. 평소에도 오며가며 친분을 쌓은 모양이었다. 집 안을 들여다본 수아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글동글한 생김의, 퍽 친근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비영과 약속이 되어서,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비영을 돕기 위해 잠깐 들른 나그네로, 과거의 일을 물으려 낭자를 불러달라 청한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아, 비영이 얘기했던...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민망한 오해를 했네요."
수아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낯이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영이 다시 아경을 방에 들여보내자, 자리에 앉은 수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양연의 일로 제게 물으실 것이 있다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려 볼게요. 양연은...비록 그 아이가 거리에서 자라 소매치기로 살아간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마음씨를 지닌 아이였거든요." 그 얼굴로 반사적인 안타까움이 스쳤다. 고개를 끄덕하며 고맙다 건네고, 이연화는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당시에 양연을 발견하고 밖에 알린 사람이 수아 낭자라 들었습니다. 앞뒤 상황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아, 네. 사실 그때 마굿간을 지날 일은 없었어요. 그때는 객잔을 빌린 혼례가 한창이어서, 대부분 그쪽에 몰려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손님들 중 한 분이, 자기 말에서 미처 내리지 못한 짐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마굿간에 갔는데...뭔가, 못 보던 거적이 하나 나와 있었어요. 그냥 지나가려는데 거적 아래로 발끝이 삐죽 보여서...처음엔 술에 취한 사람이 잠을 자나 싶었지요. 그런데, 깨우려고 가까이 가 보니...."
수아가 말을 흐리며 입을 가렸다.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풍경을 묻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건넸다.
"시신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너, 너무 무서워서 자세히 보지도 못했어요. 양연이 눈을, 눈을 채 못 감고 있었거든요. 목에 선명히 손자국이 나 있어서, 거적을 걷어보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이 죽었다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지요. 그 뒤에 일각도 되지 않아 불길이 올랐고요."
수아가 정신없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 손이 연신 자신의 어깨를 감싸 쓸어내렸다. 고개를 끄덕인 이연화가 물었다.
"그때 양연의 몸에서 훔친 물건이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수아 낭자도 그것을 보았습니까?"
"아, 아니요. 하지만 거적을 다 내려보지는 못했으니까, 옷 아래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시신 주변에 발자국이나, 끌린 자국은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니 발자국은 있었지요. 하지만 끌린 자국 같은 건 못 봤어요."
수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맺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이연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몇 가지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몇 가지의 가설들이 힘을 얻었다. 벌건 눈으로 수아의 이야기를 듣던 비영이 입을 열었다. "대협, 이 이야기에서 무슨 실마리라도-." 그 말이 끝나기 전, 집으로 드는 문이 벌컥 열렸다. 곧 방다병과 적비성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 바짓단이며 소매에 흙과 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방다병이 어쩐지 비장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연화의 의혹 어린 시선 앞에서, 청년은 매우 무안하고도 죄스러운 얼굴로 양손을 포갰다.
"일단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시신의 손이 주먹 모양으로 닫혀 있어, 혹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확인하려 했는데...그만 오래된 유골이-."
"손을 펴려다 손이 부서졌다. 최대한 잘 맞추어두고 왔다만,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겠지."
적비성이 아무렇지 않게 이은 말에, 이연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좁혔다. "제발, 그 손 안에 뭔가 단서가 있었다고 해줘." 침음처럼 이야기하자,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에 홍옥 구슬이 두어 개 올라가 있었다. 붉은 쌀알처럼 보일 만큼 작은 크기였다.
"그 손 안에 이게 남아 있었어. 뭔지 아시겠습니까?"
"이건...이건, 제가 양연의 비녀를 장식할 때 썼던 홍옥입니다."
비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장인의 눈이 재빠르게 구슬을 훑었다. "틀림없습니다, 제가 직접 깎은 겁니다. 이게 왜...." 얼빠진 중얼거림에,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역시, 비녀를 잡은 채 누군가를 향해 휘두른 것이지. 날카로운 쪽을 상대에게 향하려면, 장식이 달린 쪽을 손에 쥐게 된다."
"하지만, 대체 누구를 향해...누가 양연에게 그런 피해를 입었다면 말을 했을 텐데...."
"만일 몸싸움을 하다가 상대를 죽게 만들었다면, 설령 먼저 공격당했더라도 입을 다물었겠지요."
방다병이 말했다. 비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 안의 홍옥 구슬을 바라보았다. 불안에 떠는 비영을 연민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방다병은 곧 이연화를 향해 건넸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양연의 머리카락이 조금 남아 있었어."
"머리칼이 남았다고?"
"응. 기이하지 않아? 마굿간의 반이 전소되었는데, 그 아래 있던 시신에서 제일 타기 쉬운 부분이 일부나마 남았다는 게 말이야."
"그렇다면, 양연의 머리칼이 죄다 타기 어려운 상황이었던가 보지. 옷가지도 그렇고."
이연화의 태연한 말에, 비영이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연화는 수아를 돌아보았다. 수아는 비영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갑자기 나타난 두 남자와 이연화를 번갈아 보던 참이었다.
"수아 낭자. 당시에 양연을 발견했을 때, 혹시 그 몸이 젖어 있었습니까?"
"예? 그건...글쎄요. 제가 본 건 얼굴 정도인데, 그 눈을 마주치자마자 너무 정신이 없어서...일어나려다 고꾸라졌어요. 그래서 거적 끝을 짚고...."
그날을 재현하듯, 수아가 엉거주춤하게 오른손으로 허공을 짚어 보였다. 그 얼굴이 문득 멍해졌다. "거적 끝을 짚고...." 수아가 그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맞아요. 그때...넘어졌을 때 손이 젖었어요. 축축하고 기분이 나빠서...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나요. 바로 일어나 도망쳤지요. 맞아요." 말을 맺은 수아가 급히 양손을 맞잡아 주물렀다. 몸에 남은 기억을 없애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연화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비가 왔다면 불이 그렇게 번질 리 없었을 테니, 하늘에서 내린 물은 아니었겠지요."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졌다면, 양연이 죽은 곳은 마굿간이 아니었을 거야. 거기 있는 온천들 중 하나였겠지."
"양연이 살해당한 곳이 온천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왜...왜 이미 죽은 양연을 마굿간까지 옮겼단 말입니까?"
방다병의 단언에, 비영이 황망히 말했다. 쩔쩔매는 비영을 앞에 둔 채 잠시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곧 소매를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면객잔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사람이 있어."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다음날, 세 사람은 약속한 시간에 저자를 향했다. 비영의 집은 작업장 한편에 붙어 있었는데, 그 겉모습이 허름할 정도로 단출했지만 깔끔했다. 비영은 수아에게 말을 전해두었으니 곧 올 것이라 말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의 어린아이가, 침상에 앉아 작은 공을 던지고 받으며 놀다가 놀란 얼굴을 했다. 갑작스러운 손님들에 겁을 먹었는지, 꼬마는 허둥지둥 내려와 비영의 뒤로 몸을 숨겼다. 어린아이들에게 쉬이 친절해지는 방다병이 꼬마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비영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머쓱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요. 그건 절 닮지 않길 바랐는데...."
"수줍음은 신중함의 일면이기도 하지요. 저희야 괜찮습니다만, 아이의 귀엔 좋지 못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잠시 옆방에 있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연화의 말에, 비영은 고개를 끄덕하고는 아이에게 뭐라 속삭였다. 꼬마는 이내 공을 꼭 껴안은 채 안쪽의 작은 방을 향했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비영은 굳은 얼굴로 탁자 아래편을 뒤졌다. 어두운 빛깔의 목함 하나가 그 손에 들려 나왔다. "이게 그날 양연이 지녔던 물건들입니다." 비영이 상자 뚜껑을 열며 말했다. 세 쌍의 시선이 그 내용물을 살폈다. 모든 물건에 그을음이 가득하여, 흔적만으로도 그날의 불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귀걸이와 목걸이, 손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연고통과 대부분 타버린 옷가지 따위를 살피던 이연화가 물었다.
"당시에 마굿간이 어느 정도로 탔습니까?"
"어, 완벽하게 다 타지는 않았지만 꽤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특히 양연이 누웠던 쪽이 그랬지요. 그쪽은 거의 전소되어 들보가 내려앉았으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옷의 모양새가 보존되어 있네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말하며, 방다병이 오래된 옷감을 만져보았다. 전체적으로 불탄 누더기가 된 꼴이 끔찍했으나, 소매나 밑단 일부는 아직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장신구 몇 가지를 뒤집어보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비녀는 어디 있습니까?"
"예?"
"비녀를 주면서 청혼하셨다 했지요. 직접 만들어준 장신구를 잘 착용한다 했는데, 그 비녀를 평소에 쓰지는 않았습니까?"
"그 날도 썼을 겁니다. 일을 하러 나갈 때에는 늘 그걸 꽂았거든요. 제일 멋지게 보여야 한다고요."
비영이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그 손이 탁자를 움켜쥐었다. "저도 비녀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관의 분들은 몸싸움을 심하게 하다 보면 당연히 빠질 수도 있다 하더군요. 사건을 해결하는 전문가들은 본인이라고...." 흐려진 말끝에, 방다병이 대뜸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건성으로 처리한 것만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유족을 하찮게 보아 무시하기까지 했다니 더더욱 거슬린 모양이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비녀로 상대를 공격하려 했을 수도 있겠군. 그러다 역으로 빼앗겼거나, 상대의 몸에 꽂혔을 가능성도 있다."
"양연이 누구를요? 그럴 리가...작은 동물 하나도 제대로 잡기 힘들어했어요. 피를 많이 무서워했거든요."
비영이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비성이 무심히 상대를 보았다. "상대를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의 성품이나 마음을 바닥까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아." 이죽거리는 말은 아니었으나 자극받기에는 충분했는지, 비영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뭐라 말하기 전에, 이연화가 목을 가다듬으며 주의를 끌었다. 세 명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목소리를 낮추어 건넸다.
"부인의 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양연의 묘요? 객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죽매탕 바깥쪽의 오솔길을 쭉 따라 뒷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몇 개의 봉분이 모인 땅이 보이는데, 그 중 가장 안쪽에 묻었지요. 왜 그러십니까?"
"이런 말을 꺼내기 참으로 조심스럽고 외람되지만, 혹시 부인의 시신을 한번 확인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예? 양연의...양연의 시신을 말입니까?"
비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했다. "비록 그 살은 불에 타고 썩었다 하나, 고인의 몸에 남은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이곳의 관 사람들이 부인의 일에 그리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뻔하지만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합리적이고 차분한 말이었으나, 비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그 속눈썹이 정신없이 떨렸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비영이 더듬더듬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게 양연에게 도움이 된다면...양연도 이해해줄 겁니다. 하지만...하지만 저는, 전 그 모습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요. 당시에도...당시에도, 죽어가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은 생각에 도무지...도저히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위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무리해서 함께 가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부인의 묘는 여기 방 공자가 책임지고 원래대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뭐야, 너는 같이 안 가?"
"시신을 확인하는 일이니, 셋이 반드시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지. 너도 부검 경험이라면 여러 차례 있잖아. 나는 여기서 수아 낭자를 기다리다가 이야기를 들을 테니, 너희 둘은 가서 시신을 확인해 줘. 만일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물으면, 망자의 관에 넣어주고픈 귀물이 있다고 둘러대든가 해."
이연화가 건성으로 맺으며 한 손을 내저었다. 방다병은 잠깐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래, 아무리 너라도 이런 데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까." 그 중얼거림에, 이연화가 혀를 차며 상대를 슥 흘겨보았다. 억울한 마음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귀찮은 듯한 기색을 잠깐 풍겼지만, 적비성 역시 길게 지체하지 않고 방다병과 함께 집을 나섰다.
손님들이 떠났다고 생각했는지, 안쪽의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아이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이연화를 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아이를 향해,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괜찮다, 나와 있어도 돼." 아경에게 말하면서, 이연화는 열려 있던 목함을 정리해 다시 닫아두었다. 슬금슬금 다가온 아경은, 이연화의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얼른 양팔을 벌린 채 비영에게 안겨들었다. 익숙한 토닥임에 몸을 맡긴 아이를 미소와 함께 바라보자니, 비영이 별 타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대협은 아이가 있으십니까?"
이연화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 그는 아경에게서 잠시 눈길을 떼고 쓴웃음을 띠었다.
"저는 아직 혼인하기 전입니다. 음인이기는 합니다만, 설령 혼인했다 한들 아이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연화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결과만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어제 만난 사람에게 '나는 남윤 황족과 대희국 황족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이자, 사고문을 세워 여러 사파 및 금원맹과 오래도록 혈투를 벌였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평생 끊이지 않을 치열한 견제와 관심을 여러 군데에서 받게 되었으므로, 후사는 고사하고 각인이나 혼인에 대한 사실조차 남들에게 알릴 마음이 전혀 없다. 또한 나는 아직 음인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따위의 사연을 구구절절히 알려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비영은 당혹한 얼굴로 쩔쩔매다가 곧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인연을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지요. 대협은 성품이 정의롭고 청아하시니, 분명 좋은 인연을 만나실 겁니다. 저, 저도 양연과 아이를 가질 순 없을 거라 여겼는걸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두 사람에게는 괜찮았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느리게 물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과 별개로, 대부분의 양인들은 각인에서 자손을 원했다. 혼인은 단순히 마음이 있는 두 사람의 결합을 넘어, 자손을 생산하고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비영이 아경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물론 아경은 우리의 보물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우리 둘의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아이는 생길지 아닐지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설령 생긴다 한들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서로뿐이었으니, 저는 그저 죽는 날까지 양연의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여겼습니다. 전 그것 하나면 충분했고, 다행히 양연도 그리 여겨주었지요."
"부인과 맺어진 일을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무심코 물어 놓고, 이연화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 건네기에는 지나치게 무신경하고 무례한 말이었다. 심지어 비영의 팔에는 아이까지 안겨 있었다. 얼른 사과하려 드는 이연화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비영은 곧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 눈으로 엷게 눈물이 고였다.
"어찌 그런 일을 후회하겠습니까? 해가 비치다가 사라졌다 해서, 해가 주었던 온기를 원망할 수는 없지요. 오히려 제가 스스로의 초라함을 두려워하여 끝까지 양연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지 못했던 것들과 하지 못했던 말들이 훨씬 지독한 후회가 되어 저를 무너뜨렸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의 제게는...양연과의 추억이라도 남아 있으니까요."
비영이 아이를 꼭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연화는 묘하게도 하효혜를 향해 고개를 숙이던 자신을 떠올렸다. 비록 처한 입장은 너무나 달랐지만, 자신 또한 스스로를 실속 없는 결함품으로 보아 각인하기에는 영 모자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으라 이야기하던 하효혜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이연화의 입가로 미소라기엔 너무 쓴 표정이 떠올랐다. 눈앞의 여자가 갑작스레 커 보였다. "그대는 강인한 사람이로군요.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손을 내밀었으니 말입니다." 이연화의 나직한 말에, 비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예? 아닙니다, 전 이겨내지 못했어요. 그냥 덜덜 떨면서 청혼한 겁니다. 되게 못나게 했어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비녀는 떨어뜨리고...양연과 혼인한 후에도 한동안은 계속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양연이 언제든 절 떠나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냥, 그냥 무서워하면서 계속 살았을 뿐입니다. 1년쯤 지나니까 많이 나아졌지요."
비영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맺었다. 이만 이 화제를 마무리할까 하다가, 이연화는 그만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눈가를 만지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반려자를 잃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건넬 말은 아니다 싶었으나, 주위에 평범하게 혼인해 살아가는 이가 거의 없었던지라-자신의 지인이라고 해봐야 거진 무림인들이었는데, 강호인들은 평화로운 결혼 생활과 거리가 먼 삶을 살기 일쑤였다-이런 일을 물어보기에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그...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기는 합니까?"
"예? 예에, 그렇기는 했습니다. 처음엔 금방이라도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양연의 마음이 금세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그저 하루하루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안위를 챙겨주고, 같이 잠드는 날이 반복되니...그런 일상에 익숙해지더군요."
비영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 마음이 순간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신혼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연화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긴, 나도 각인하겠다 마음먹으면 당장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전전긍긍했었지. 심악의 약 때문에 꾸었던 악몽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밤의 이연화는, 상대를 자신의 안에 깊이 들여놓으면 장차 다시 심장이 부서지리라 거의 확신하며 몸서리쳤다. 지금도 그의 일부는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상은 험난하고도 난데없는지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셋이 함께 누웠을 때의 온기와 놀리듯 주고받는 말들이 좋았지만, 그 행복에 잠겨 안주하는 것은 막연하고 안일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이연화의 미간이 자기도 모르게 슬쩍 좁혀졌다. 하지만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비극 때문에 현재를 포기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 또한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선택으로도 고통을 완벽히 피할 수 없다면, 설령 언젠가 깨질지라도 행복이 존재하는 길을 걷는 편이 낫지 않은가? 이연화가 내적 한숨을 푹 쉬며 팔짱을 끼었다. 이런 고민은 여현에서 승낙 아닌 승낙을 건넬 때 대충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해묵고도 복잡한 문제이다 보니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곤 했다.
홀로 생각하는 꼴이 어떻게 보였는지, 이연화의 얼굴을 살피던 비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대협도 마음에 두신 분이 있습니까? 각인하셨거나...."
각인을 넘어, 당장 얼마 후에 혼례까지 치르겠다고 버틴 놈들이 있습니다. 이연화는 어쩐지 아련한 두통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신음하듯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다, 사고문주는 보도사의 주지승을 대할 때처럼 스리슬쩍 둘러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대는 무료 대사만큼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데다 훨씬 순박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웬만해서는 이연화를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제 일은 아닙니다만...제 가까운 친우 중 하나가, 혼례를 앞두고 이래저래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혼인은 대사 중의 대사가 아닙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아, 이해합니다. 저도 막상 혼인할 무렵이 되자 마음이 복잡해져,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요."
비영이 잔뜩 동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선한 고백에, 이연화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렇게 서로 좋아했는데도 말입니까?" 비영이 아경의 등을 쓸어내리며 낮게 웃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혼인은 대협의 말씀대로 대사 중의 대사이니까요. 저는 스스로가 혼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 더했지요. 혼인 준비로 바쁜 와중에 괜히 침울해지기도 하고, 신경이 곤두서서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기도 하고, 서로를 위해 이제라도 물러야 하나 싶기도 하고...아주 정신이 없었습니다."
비영이 말도 말라는 듯 혀를 내두르며 웃었다. 이연화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며칠 동안 크게 괴롭히던 문제를, 상대는 퍽 소탈한 방식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비영이 아경을 추슬러 안고는 미소했다. "혼인을 너무나 큰 일로 여겨 무서워했지만, 사실 혼인이란 상대의 숟가락에 찬 하나 얹어주는 일상이 계속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더 이상 제게는 그런 기회가 없게 되었으나...그래도 그런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 분도 마음을 잘 추스르셨으면 좋겠네요." 사려 깊은 말에, 이연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의 말을 표했다.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진 것인지, 조금쯤 잠잠해진 것인지 금방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양연의 친구라던 수아가 도착하기까지는 반 시진 정도가 더 걸렸다. 그 동안 이연화는 비영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경의 부서진 장난감을 고쳐주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이연화의 친절한 태도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가끔씩 쑥스럽게나마 미소를 보여주었다. 고친 장난감을 받았을 때에는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하기도 했다. 열린 문으로 수아의 모습이 보이자, 아경은 장난감을 자랑하려는 듯 그편으로 달려갔다. 평소에도 오며가며 친분을 쌓은 모양이었다. 집 안을 들여다본 수아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글동글한 생김의, 퍽 친근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비영과 약속이 되어서,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비영을 돕기 위해 잠깐 들른 나그네로, 과거의 일을 물으려 낭자를 불러달라 청한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아, 비영이 얘기했던...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민망한 오해를 했네요."
수아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낯이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영이 다시 아경을 방에 들여보내자, 자리에 앉은 수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양연의 일로 제게 물으실 것이 있다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려 볼게요. 양연은...비록 그 아이가 거리에서 자라 소매치기로 살아간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마음씨를 지닌 아이였거든요." 그 얼굴로 반사적인 안타까움이 스쳤다. 고개를 끄덕하며 고맙다 건네고, 이연화는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당시에 양연을 발견하고 밖에 알린 사람이 수아 낭자라 들었습니다. 앞뒤 상황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아, 네. 사실 그때 마굿간을 지날 일은 없었어요. 그때는 객잔을 빌린 혼례가 한창이어서, 대부분 그쪽에 몰려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손님들 중 한 분이, 자기 말에서 미처 내리지 못한 짐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마굿간에 갔는데...뭔가, 못 보던 거적이 하나 나와 있었어요. 그냥 지나가려는데 거적 아래로 발끝이 삐죽 보여서...처음엔 술에 취한 사람이 잠을 자나 싶었지요. 그런데, 깨우려고 가까이 가 보니...."
수아가 말을 흐리며 입을 가렸다.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풍경을 묻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건넸다.
"시신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너, 너무 무서워서 자세히 보지도 못했어요. 양연이 눈을, 눈을 채 못 감고 있었거든요. 목에 선명히 손자국이 나 있어서, 거적을 걷어보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이 죽었다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지요. 그 뒤에 일각도 되지 않아 불길이 올랐고요."
수아가 정신없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 손이 연신 자신의 어깨를 감싸 쓸어내렸다. 고개를 끄덕인 이연화가 물었다.
"그때 양연의 몸에서 훔친 물건이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수아 낭자도 그것을 보았습니까?"
"아, 아니요. 하지만 거적을 다 내려보지는 못했으니까, 옷 아래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시신 주변에 발자국이나, 끌린 자국은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니 발자국은 있었지요. 하지만 끌린 자국 같은 건 못 봤어요."
수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맺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이연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몇 가지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몇 가지의 가설들이 힘을 얻었다. 벌건 눈으로 수아의 이야기를 듣던 비영이 입을 열었다. "대협, 이 이야기에서 무슨 실마리라도-." 그 말이 끝나기 전, 집으로 드는 문이 벌컥 열렸다. 곧 방다병과 적비성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 바짓단이며 소매에 흙과 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방다병이 어쩐지 비장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연화의 의혹 어린 시선 앞에서, 청년은 매우 무안하고도 죄스러운 얼굴로 양손을 포갰다.
"일단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시신의 손이 주먹 모양으로 닫혀 있어, 혹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확인하려 했는데...그만 오래된 유골이-."
"손을 펴려다 손이 부서졌다. 최대한 잘 맞추어두고 왔다만,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겠지."
적비성이 아무렇지 않게 이은 말에, 이연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좁혔다. "제발, 그 손 안에 뭔가 단서가 있었다고 해줘." 침음처럼 이야기하자,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에 홍옥 구슬이 두어 개 올라가 있었다. 붉은 쌀알처럼 보일 만큼 작은 크기였다.
"그 손 안에 이게 남아 있었어. 뭔지 아시겠습니까?"
"이건...이건, 제가 양연의 비녀를 장식할 때 썼던 홍옥입니다."
비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장인의 눈이 재빠르게 구슬을 훑었다. "틀림없습니다, 제가 직접 깎은 겁니다. 이게 왜...." 얼빠진 중얼거림에,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역시, 비녀를 잡은 채 누군가를 향해 휘두른 것이지. 날카로운 쪽을 상대에게 향하려면, 장식이 달린 쪽을 손에 쥐게 된다."
"하지만, 대체 누구를 향해...누가 양연에게 그런 피해를 입었다면 말을 했을 텐데...."
"만일 몸싸움을 하다가 상대를 죽게 만들었다면, 설령 먼저 공격당했더라도 입을 다물었겠지요."
방다병이 말했다. 비영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 안의 홍옥 구슬을 바라보았다. 불안에 떠는 비영을 연민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방다병은 곧 이연화를 향해 건넸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양연의 머리카락이 조금 남아 있었어."
"머리칼이 남았다고?"
"응. 기이하지 않아? 마굿간의 반이 전소되었는데, 그 아래 있던 시신에서 제일 타기 쉬운 부분이 일부나마 남았다는 게 말이야."
"그렇다면, 양연의 머리칼이 죄다 타기 어려운 상황이었던가 보지. 옷가지도 그렇고."
이연화의 태연한 말에, 비영이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연화는 수아를 돌아보았다. 수아는 비영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갑자기 나타난 두 남자와 이연화를 번갈아 보던 참이었다.
"수아 낭자. 당시에 양연을 발견했을 때, 혹시 그 몸이 젖어 있었습니까?"
"예? 그건...글쎄요. 제가 본 건 얼굴 정도인데, 그 눈을 마주치자마자 너무 정신이 없어서...일어나려다 고꾸라졌어요. 그래서 거적 끝을 짚고...."
그날을 재현하듯, 수아가 엉거주춤하게 오른손으로 허공을 짚어 보였다. 그 얼굴이 문득 멍해졌다. "거적 끝을 짚고...." 수아가 그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맞아요. 그때...넘어졌을 때 손이 젖었어요. 축축하고 기분이 나빠서...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나요. 바로 일어나 도망쳤지요. 맞아요." 말을 맺은 수아가 급히 양손을 맞잡아 주물렀다. 몸에 남은 기억을 없애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연화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비가 왔다면 불이 그렇게 번질 리 없었을 테니, 하늘에서 내린 물은 아니었겠지요."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졌다면, 양연이 죽은 곳은 마굿간이 아니었을 거야. 거기 있는 온천들 중 하나였겠지."
"양연이 살해당한 곳이 온천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왜...왜 이미 죽은 양연을 마굿간까지 옮겼단 말입니까?"
방다병의 단언에, 비영이 황망히 말했다. 쩔쩔매는 비영을 앞에 둔 채 잠시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곧 소매를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면객잔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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