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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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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러는거야 정말 모르는거야?"

답답함에 증순희의 동그란 눈이 더 커드래졌어. 연화루에서 만난 어리숙하고 귀여운 하지만 연기에 진심인 형에게 구애 아닌 구애를 해온지 8개월이 넘어가. 차라리 차내면 모르겠는데 둔해서 그런지 마음이 있어선지 태도가 늘 애매해.

"뭘 말이야?"

예능 한 번 나갔다가 게임 룰 듣고 눈 꿈뻑대던 때처럼 성의의 눈동자가 데구룩 굴렀어. 정말 이해를 못하나보군, 순희는 한숨을 폭 쉬었지.

"내가 형 만나자고 하는거 싫어?"

"아니? 그럴리가..."

"그럼 왜 매번 대답을 피해?"

"무슨 대답?"

벽을 보고 말을 해도 이거보단 낫겠다. 순희는 성의의 지능이 연기에 몰빵되서 일상 지능이 강아지 수준인게 아닐까 의심했어.

"나랑 사.귀.자.고."

큰 멍멍이같은 순한 인상, 혼혈같은 이국적인 외모, 커드란 눈때문에 선한 이미지인 증순희지만 사실 부잣집 도련님으로 모자란 것 없이 살아와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그였어. 물론 예의 바르고 배려심 있는 편으로 비춰지긴 했지만 성의에 비하면 한참 먼데다가,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하는거니까.

"만나서 이야기하고..이런게 교제인데 또 어떻게 더 사귀어?"

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너 다 마셨어? 확인하는 성의에 증순희는 복장이 터졌어.

"대체 이연화 연기는 어떻게 한거야. 그 반만큼만이라도 눈치 있어 보라고오..."

성의는 답답해하는 동생에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듯 눈만 깜빡대며 볼을 부풀렸어. 그걸 본 증순희는 속터지는거랑 별개로 푸스스 웃음을 흘렸어.

"삼십대에 이러기야? 귀엽지나 말던가."

장난끼가 살짝 섞였지만 열에 여덟은 좌절으로 뒤범벅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누가 누구보고 귀엽대. 애같아선."

성의는 증순희가 팔팔 뛰는게 좀 더 덜 점잖고 요란한 방다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 자기는 이연화처럼 스마트하지는 않지만. 캐릭터에 몰입해서 연기하는 것과 별개로 성의는 느릿하게 자기 페이스대로 있는게 편했어. 멍때리기도 취미이자 특기고. 폰 갖고 노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고. 반면 증순희는 휴대폰을 손에서 떼놓는 일이 없었지.

"넌 정말 폰이랑 혼연일체네."

"맞다. 톡! 전화! 이거 좀 어떻게 하면 안돼? 내가 쫓아다닌게 몇 달인데 톡 하나 안 보냐 진짜..."

"전화해. 난 문자 잘 안 봐."

"전화도 잘 안 받잖아.. 부재중 전화 찍히면 전화 한 번쯤 해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오늘 만났잖아. 전화도 걸고. 너는 인기도 많은 애가 왜 굳이 나랑..."

얼씨구.
인기는 님이 더 많거든요. 안 받아줄 뿐이지.

"그게 통화냐. 난 좀 더..됐다. 형한테 뭘 바래."

탑스타가 된 성의는 우쭐해하는 법이 없어 순희는 그런 형이 내심 존경스러웠어. 무명 생활이 좀 있었다해도 뜬지 몇 년이 지났고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단역 배우와도 이야기를 잘 나누고 와이어 액션을 한 후 쓰러진 적을 맡은 배우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것도 잊지 않아 스탭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어.

하아.

증순희는 자기가 어린건지 성의가 과하게 고리타분한 노땅인건지 알 수가 없었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답답이한테 쏠랑 반해서 이 고생인지. 8개월이면 벌써 연애하고 할거 다 하고 상대방의 싫은 점도 질리는 점도 보일 때 아닌가? 연기할 때의 진지함과 평소의 귀여움 사이의 갭이 너무 커서 이 형 자꾸 눈이 간다,한지는 일 년이 훌쩍 넘었다고.

"그래... 인기 많은 내가 굳이 형 만나겠다고 꾸역꾸역 오는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맞춰봐라 좀..."

"나 퀴즈에 약한거 알면서."

"어련하시겠어..."

빠닥빠닥 센스 있는 것과 백만광년 쯤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낚시하고 차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성의는 대놓고 그리 말했지. 이연화와 자기의 공통점은 유유자적 경치 보고 차 마시기를 즐긴다는 것 외에는 없다고. 이연화처럼 똑똑하면 예능 프로그램이 그리 곤혹스럽지 않았을까? 성의가 우스갯소리랍시고 중얼대자 증순희도 같이 중얼댔지.

"그러게. 내 속이 더 탔을까 덜 답답했을까. 그것도 궁금하네..."

"너는 왜 그렇게 궁시렁대, 젊은 애가..."

"하아... 그러게."

이젠 눈치 없는 형에게 대꾸하기도 지친 증순희였어. 그치만 어쩔거야, 반한 쪽이 죄인에 약자에 뭐 그런거 아니겠나. 속 답답하게 굴어도 오종종한 입술로 오물대고 중얼대면 마냥 귀여운걸 어째. 난들 이리 될 줄 알았냐고. 평소에 칠칠치 못하게 이리 쿵 저리 쿵해대니 주변에서 손을 안 댈 수가 없는데 남 손 타는건 또 왜 그리 신경 쓰이는지. 같이 활동할 때는 자기 손을 타서 내심 흐뭇했는데 이젠 어디서 누구 손 타는지 알게 뭐야. 다행인건 로맨스물 파트너가 있어 점잖게 서있을 일이 대부분이라는 점? 아무래도 여배우의 손을 타는 남자 주인공 배우는 대중이 딱히 바라는 모습이 아니니까.

일상에서는 여전히 손이 많이 가고, 꺼떡하면 탁자며 차 사이드 미러에 부딪히는 통에 옆구리나 골반에 작게 멍이 드는 일이 허다한 성의였어. 무방비하게도 아, 멍들었네-하며 바지춤을 슥 내려 골반뼈의 멍자욱을 확인할 때 증순희는 마시던 이온음료를 뿜을 뻔 했지.

나한테 왜 이래 형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어. 한때 분명 까무잡잡한 근육질이었는데 이렇게 뽀얗고 가늘기야? 우리네 배우 인생이 그렇다곤 해도 몸도 어느 정도 만들어둬야 하니 신경쓸게 많지만..아니 이게 아니라. 골반과 배꼽 아래 연한 살까지 드러나니 눈을 뗄 수가 없어.

"어디 봐. 멍 맞아? 옷에서 물든거 아니고?"

순희는 이런 개수작(!)에도 성의가 의심없이 그런가?하고 몸을 맡길만큼 순딩이라는 사실에 감사했어. 그 덕에 골반의 푸르스름 멍든 살을 두 손가락으로 쓰다듬을 수 있었지.

"간지러."

성의가 몸을 살짝 뒤로 뺐어.
꿀꺽. 침 삼키는 소리는 저한테만 들렸을거야.

"멍 맞네."

아무렇지 않은 척,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은 순희가 확인할건 다 했다는 듯 태연하게 일어섰어.

흐와. 위험했다.
뽀뽀하고 싶어졌잖아.

"협찬 받은 비싼 명품 옷인데 설마 물들려고."

별 말 아닌데도 참 성실한 직업인 멘트로 들려서 증순희가 피식 웃었어. 나 혼자 쩔쩔 매고, 나 혼자 끙끙 대고. 뭐 그런거지. 지치지도 않나. 이러다 지치면 어쩌지? 형은 눈치채기나 할까? 제 처지가 조금 서러워지는 순희였어.

"차 잘 마셨어. 나 간다. 스케줄 있어서 비행기 타야해."

아쉽지만 얼굴 봤으니 됐고, 오늘은 무려 골반뼈도 만져봤으니 봐준다. 증순희가 활짝 웃었어. 만족 대만족.

"앗, 벌써 그렇게 됐나? 조심해서 가고. 밥 잘 챙겨먹고 다녀."

증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어. 나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보고 인사해주던 성의는 문이 닫히자 웃던 얼굴을 굳혔어. 일때문에 임시로 얻은 오피스텔까지 매 주 짬을 내서 찾아오는 이 동생이 싫지 않았어. 제법 친해지기도 했고. 아무리 둔한 자기라해도 정말 모르지만도 않았고.

굳이 멍, 그렇게 볼 필요 없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의의 귀가 발갛게 물들었어. 어쩌자는거야, 어린애한테 민폐야.

성의는 도리질을 했어. 대본을 꺼내서 읽는데 집중이 잘 안되는 것 같아.

지잉-

휴대폰이 울렸어. 화면에 메세지 일부가 보여.

[다음 주 같은 시간에 갈게!]

증순희는 오랜 삽질 끝에 미리보기 메세지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짧게 끊어 문자를 하는 노하우를 얻었지. 성의가 답문자를 찍어 보내지는 않았지만 일이 있으면 전화로라도 안된다고 알려줬고 그 외의 경우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시간에 늘 집에 있었거든.

성의도 증순희와 그리 약속을 잡는 일에 익숙해져서 지금처럼 문자가 오면 스케줄부터 확인했어. 괜찮겠네-하고.


자꾸 사귀자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성의는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최근 몇 달동안 고민이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어. 사귀고 싶냐고 물으면 답이 턱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의 발길도 연락도 끊긴다고 상상하면 싫었으니까.

아무래도 오프인 날 혼자 조용히 낚시하러 가야겠어. 성의는 작게 한숨을 쉬었어.





...인게 보고 싶었다.





성의 츼츼 증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