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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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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ㅈ 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18편.
마을이 쇠락해서인지 명색이 촌장인 노인의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인이 쓰던 작은 방 몇 개가 둘이나 비어 그간의 일을 짐작케 했다. 아마도 너댓은 되었을 하인이 여러 사정으로 사라졌을 터였다. 빈 방에 오돌오돌 떠는 아이와 기절한 아버지를 눕히는 중에도 하인들은 체력이 부족한지 힘들어했다. 촌장 옆을 지키고 서있던 몸 좋은 사내가 보다 못해 힘을 써 늘어진 남자를 눕혀주었다.
이연화는 급한대로 제 몫으로 가져온 약재를 내놓을 심산이었다. 긴 여행길이라 비상용으로 챙겨왔다지만 자신말고 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그리 넉넉하게 챙기지는 않았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굳이 따라가 방에서 행낭을 뒤지는 일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연화가 약을 한 웅큼 꺼내는 것을 본 방다병이 물었다.
"그만큼이나 써도 괜찮겠어?"
"며칠이나 버틸지 몰라도 다섯 번은 나눠 먹일 수 있을거야. 어린애라 복용량이 적기도 하고."
약을 가늠하여 나누느라 여념이 없는 이연화에 방다병이 답답하다는 듯 팔을 나꿔채어 제쪽으로 돌렸다.
"아니. 난 네가 괜찮냐고 물은거야. 네 병때문에 가져온 약이잖아."
이연화는 순간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기민한 그였음에도 어쩐지 이해가 늦었다. 아이가 아프고 자신에게 약이 있으니 준다, 그게 다였다. 이연화는 잠시 후 방다병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낯설면서도 가슴 한 켠을 쿡 찌르는 듯한 느낌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상이일 때는 자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이연화일 때는 지킬 사람이 자신 뿐인 것에 괴로워하며 살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오래 전 일이라 그 감각을 잊은지 오래였다. 교완만처럼 자신을 위해 눈물 짓는 귀한 이가 있던 시절에도, 이상이는 그녀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일에 집중했지 걱정의 대상이 된 것에 마음 따스해할 틈이 없었다. 그저 그녀가 더 애틋하고 귀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제 곁의 사람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신이 나서서 몸 사리지 않고 싸우는 것, 그게 이상이의 방식이었다.
이연화는 방다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완만처럼 자신이 지켜줄 대상은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을 지키려하는 모습이 이연화로서는 몹시도 낯설었다. 문득 이상이로서 연형제인 방다병과 함께 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일방적으로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적과 싸우며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상대이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상념을 흩어내려 고개를 턴 이연화는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한 청년이 순간 귀여워보여 저도 모르게 방다병의 코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어쨌거나 산 시간으로 치면 증손주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고, 언젠가 멈춰버린 이상이의 시간으로 나이를 가늠한다해도 십 년은 어릴 청년이었다.
"걱정마, 넉넉히 챙겼으니."
이연화는 종이에 나눈 약을 야무지게 싸서 들고 나갔다. 뒤에 남은 방다병은 얼떨떨하게 이연화의 손이 닿은 제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에, 같이 가, 이연화!"
탕약을 달이는 동안 일행은 촌장의 방에서 조촐하게 다과상을 받았다. 간단한 반찬과 과일, 술떡이 있어 요기하기엔 충분했다. 이연화는 미리 새 물을 받아두고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혹시 모르니 음료는 마시지 말라고 일러 두었다. 세 사람은 차를 마시는 시늉만 하며 촌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풍림에 사는 요마는 여우 요괴입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정기를 빼먹는 요마인데 무슨 일인지 숨어지내는 것 같습니다. 풍림이 나타나는 것도 매번 그 위치가 달라 찾아가지도 못하고요. 그저 풍림이 나타나면 그리로 갈 뿐입니다. 처음에는 사내들을 데려다가 구미호가 하는 것마냥 정기를 빼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른게 더 필요한지 요력을 넣고 계속 불러대더군요. 길을 지나던 법사가 여우가 사람들에게 요력만 넣는게 아니라 내력을 빼간다고 하더군요. 그 법사는 최대한 도우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요마가 인간의 내력을 왜 빼가는지 아십니까?"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요. 내력을 빼가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그저 저희는 죽지 않으려고 시키는대로 할 뿐입니다."
방다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굴렸다.
"촌장님,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보통의 구미호라면 정기만 있으면 될텐데 굳이 반인반요를 만들어 내력까지 취하다니요. 반인반요가 되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방다병의 물음에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시름시름 앓아요. 요력을 받으려면 독을 먹어야하니 몸이 상하고 내력을 빼가니 몸이 약해지고 요력에 눌리니 그저 여기저기 아프지요. 감각이 예민해지기도 하고요. 젊은이들은 간혹 힘이 세지거나 몸이 빨라지기도 하는데 극소수에요. 대부분은 기력이 빠지고 핼쓱해집니다요."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 돌을 던져 아이 아버지를 기절시킬 수 있었던거군요."
힘이 세진 일부 사람들이 천사라는 말에 경계심을 가진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모두가 요마를 없애길 바라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연화는 말없이 촌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쪽에 선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선 모습을 보았다. 그는 확실히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요력이 강한 요마도 아니었다. 아마도 짐승을 부려 둔갑케 한 식신인 듯 했다. 촌장을 감시하기 위해 구미호가 붙여두었을 공산이 컸다. 그런데 어째서 내력도 약하고 쓸만한 정기도 없을 늙은이에게서 요력이 적지 않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연화는 촌장이 밝히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여겼다.
"저 아이는 언제 구미호에게 데려갑니까?"
"독이 충분히 퍼지면 데려가니 실은 내일 갈 작정이었습니다. 사실 의원님이 아이에게 약을 써서 붙잡아두시면 구미호가 마을 사람들을 죽일겁니다. 아이를 보내야 모두가 살아요."
촌장이 곧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를 보내야한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됩니다! 저희가 구미호를 잡을테니 아이는 보내지 마세요!"
방다병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촌장이 머뭇대며 하지만,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요마가 해코지할까 두려운 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 짓은 끝내야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이 상태로 계속 지내고 싶은 것은 아니시지요?"
이연화의 뼈를 담은 물음에 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일순의 움직임이었으나 이연화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정녕 마을을 위하신다면 아이 대신 저희를 보내시지요. 평소에 보내는 것처럼요."
촌장이 머뭇거리자 장정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를 잡아 끌었다. 촌장은 잠시 의논을 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덩치 큰 놈을 잡아야겠어. 마을 편이 아닌 것 같군."
적비성이 빈 자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적맹주 말이 맞아. 역시 저 둘 수상해."
어쩐 일로 맞장구를 치나 싶어 적비성이 방다병을 흘끔 쳐다보았다. 삵 요마를 잡는답시고 서로를 믿고 싸워서인지 방다병은 적비성을 경계하면서도 더 가깝게 대했고, 적비성도 방다병을 전처럼 무시하지 않았다.
"나도 동의해. 지금은 우선 아이 대신 가는게 급선무이니 고분고분하게 굴어야지. 저 사내는 요마가 붙인 감시일거야. 사람같이 굴지도 못하는걸 보니 하급요마도 못될테고."
이연화는 아는 척을 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저건 식신이다. 식신은 약해서 천리안처럼 상황을 전하지는 못해. 짐승을 쓰고 소통이 되는걸 보니 놈도 짐승일거고 구미호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군."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여누님이 구미호를 처치한 적이 있어. 마음을 읽어 연모하는 상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유혹술을 쓰지. 백년 묵은 여우면 미녀로 둔갑해서 뭇사내들을 유혹하고 이백년이 되면 미남으로도 변할 수 있어. 풍림의 구미호는 이백년은 넘은게 분명해. 그런데 사람들한테 요력은 왜 넣는거지?"
"내상을 크게 입었을 수도 있어. 인간에게 재 요력을 미약하게 넣어두면 유혹술에 요력을 많이 소모하지 않고도 정기를 취할 수 있지. 구미호는 인간이 되려고 정기를 빼가는데 요력도 딸리고 내력도 필요한 이유가 있을거야. 인간 모습을 유지하려고 내력을 빼가는지도 모르고. 다친 상태라면 내력을 뺏어서라도 인간 모습을 유지해야하는지도 몰라. 요마는 약점을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드니 거처를 숨기려고 환영술로 풍림을 여기저기 나타나게 하는거겠지."
이연화가 구미호에 대해 줄줄 읊자 적비성과 방다병이 의외란 듯 쳐다보았다.
"잘 아네?"
이연화는 두 사람을 흘끗 보고 천연덕스럽게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만난 환자가 법사였는데 구미호한테 당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거든. 유혹술로 나타난 모습이 마누라가 아니라 들키지 않으려고 생난리를 쳤다나? 그 이야기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둘의 눈이 더 가늘어지자 이연화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 문제 있어? 그나저나 조심들하라고. 구미호의 유혹에 뭘 볼지 몰라도 정신줄 단단히 잡아야할거야."
적비성은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방다병은 속으로 당연히 너지!라 외쳤다. 두 사람은 이연화에게 여우가 접근하게 둘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내심 저 여우보다 더 여우같은 이연화가 볼 환영이 누구일지 궁금증이 일었다. 어색하다면 어색할 침묵이 흘렀지만 촌장이 나타나면서 곧 흩어졌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아무래도 마을의 사활이 걸린 일이라..."
촌장이 말 끝을 흐리며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그 사이에 더 늙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더 핼쓱해졌다. 옆을 지키던 사내는 같이 오지 않았다.
"풍림이 나타나면 아이를 가마에 태워 가마꾼 둘을 딸려 보냅니다. 풍림 입구에 가마를 두고 오면 구미호의 수하들이 가마를 지고 구미호의 처소로 들어가지요. 가는 동안 눈을 가려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마가 뱅글뱅글 돌아 방향도 가늠하질 못해요."
"그 외 필요한건 없습니까?"
"네. 그게 다입니다."
이연화가 그럼 됐네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다병이 뭐가 되었냐는 듯 눈으로 묻자 이연화가 천연덕스레 손가락을 들어 적비성과 방다병을 차례로 가리켰다.
"가마꾼 둘. 그리고 제물 하나. 너희가 날 지고 가야지."
"반대다."
"안돼."
합이 잘 맞게도 동시에 나온 답에 셋은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다병은 적비성을 흘끔 보고는 아군이 생겨 기세등등해져서는 말을 덧붙였다.
"널 여우 소굴에 넣을 생각은 없으니 꿈 깨. 빈 가마를 들건 내가 적맹주를 넣고 혼자 들고 가건간에, 너는 못 가."
"무슨 소리야? 내가 너희 연형제인걸 잊었어?"
이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여우 따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구미호는 환영술이나 유혹술을 쓸 줄 알아도 공격력은 형편없어. 연형제 없이도 우리 둘이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너도 다치잖아. 안돼."
모처럼 의기투합해 이연화를 설득하는 두 사람에게 기가 막힌 이연화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이럴거면 나는 뭐하러 데려왔어? 연화루에서 약이나 만들게 놔두지. 야영하느라 몸이 얼마나 축나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시키고 정작 필요할 때 제껴둘 셈이야? 참 보람없네. 여기에 나 혼자 있는 쪽이 더 위험할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잠시 마주 본 방다병과 적비성은 이연화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머뭇댔다. 이연화는 이 둘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제 안위를 들먹이는 것임을 알고 알차게 써먹으면서도 답답했다. 저 둘이 없어도 구미호 정도는 이연화 혼자서 쳐내고도 남았다. 단지 며칠 몸이 아플 뿐이었다.
"좋아. 그럼 같이 가."
마지못해 답한 방다병에 적비성은 그럼 이야기 끝났군,하며 몸을 돌렸다. 이연화는 촌장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내일 밤에 셋이 풍림에 가겠노라 선언하고 얼른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촌장의 낯빛이 어두웠다.
밖으로 나가니 마침 하녀가 다 달인 탕약을 들고 오던 참이었다. 이연화는 아이를 살핀 후 방으로 돌아가겠다며 기어이 따라오려는 방다병을 먼저 보냈다.
하인 방에 가니 아이의 아버지가 정신을 차려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목까지 검붉은 독기가 올라온 아이는 한기에 이불을 둘둘 만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의원님, 딸을 살려주십시오!"
남자가 울면서 매달렸다. 이연화는 그를 진정시키고 약을 먹이게 했다. 그리고는 잠시 남자를 내보내고 누운 아이를 일으켜 앉혔다. 열살 남짓한 아이는 기운이 없어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다. 이연화는 아이의 어깨를 벽에 기대게 한 후 손을 모아 아이의 등에 대고 심호흡을 했다. 내력을 손바닥에 집중시킨 그는 양주만을 돌려 극양기운을 아이에게 불어넣었다. 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동시에 이연화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어찌된 일인지 평소보다 기운이 더 빨리 쇠하는 듯 했다. 아마도 두 연형제로 인해 경맥이 날뛰는 것을 제대로 잠재우지 못한 채 내력만 소모해서인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이연화는 아쉬운 지점에서 손을 떼었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양기를 주고픈 마음과, 자신이 앓기라도 하면 마을에 남겨져 제 연형제를 돕지 못하게 되리란 걱정 사이에서 후자의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더 큰 할 일이 있었다. 아이는 반인반요가 되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나을 것이다. 이연화는 비척대는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풍경은 거뭇하고 뾰족한 침엽수림이 가득 차 위압감이 들었다. 과연 환영으로 만들어낸 숲답게 괴이하리만치 커드랬다. 요마가 언제 어디에서 눈치 챌지 몰라 마을에서부터 말 한마디 않고 이동한 세 사람이었다.
정좌한 자세로 앉은 이연화는 내력을 빼앗는 요마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칠십여년간 내력을 빼가려는 요마는 딱 하나 만났다. 대개는 요력을 탐했지 내력을 탐하지는 않았다. 단, 인간이 되기를 강하게 열망하는 요마는 스스로 독을 써 내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만들기도 했다. 구미호처럼 짐승인 주제에 짐승을 혐오하고 인간이 되길 열망하는 요마도 있었지만, 인간을 은애하여 인간처럼 살려고 뿔을 넣고 갈퀴를 없애려는 사정이 딱한 요마도 있었다. 이연화가 만난 요마는 숲에서 한 여인을 구한 후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으나, 여인이 제 뿔을 보고 기절하는 바람에 인간이 되기 위해 주저않고 독을 마셨다 했다.
[요마가 은애의 감정도 안단 말이냐.]
검 끝에서 바르르 떠는 요마를 향해 이연화가 물었다. 감정을 가진 요마도 있다고는 했으나 몹시 그 수가 적었고 대다수는 살육에 굶주린 악귀라 배워왔던 그였다. 하지만 반인반요가 된 저에게 살육 욕구가 일지 않는다면, 인간의 감정을 가진 요마가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이연화는 눈물이 그렁한 요마의 목에 검을 더 들이밀고 물었다.
[요마는 소유욕이 강하다 들었다. 네가 말하는 은애는 소유와 어찌 다르냐.]
[난, 그,그냥. 낭자가 웃으면 좋겠소. 그런데 내 욕심에 옆에서, 그,그걸 보고 싶을 뿌,뿐이요.]
인간의 말투를 어설프게 따라하려는 요마는 말을 더듬었다.
[소유는 내가, 가지기만을 바래 상,상대가 안녕한지 보지 못,못하오. 은애하,하면 다르오. 그녀가 잘,잘 사는 못,모습을 보기 위해 내 안,안녕을 버리면 그것은 소유가 아닐 것이오.]
요마의 답에 이연화는 검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순수한 요마의 은애가 인간의 그것보다 나을지도 몰랐다.
[네가 정녕 인간이 되고 싶다면 사람부터 해지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 요마는 감히 이연화의 내력을 취하지 못했지만 연신 절을 하고 허둥지둥 숲으로 사라졌다.
은애라.
하지만 저 구미호는 그저 환영으로 유혹하여 소유하려할 뿐이겠지.
가마가 흔들리며 잡상을 흩어냈다. 도착한 모양이었다.
풍림의 입구 주변에는 바위가 많았다. 아무래도 은신처를 들키지 않고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지형이 험한 곳에 일부러 숲을 세운 것 같았다. 적비성과 방다병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돌아가는 척 하며 주변 바위에 몸을 숨겼다. 이연화는 둘러쓴 망토를 당겨 여미고 얼굴을 가렸다.
잠시 뒤 숲 입구가 일렁이면서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하나는 촌장 옆에 있던 사내였고 하나는 얼굴이 희고 입술을 붉게 칠한 자로 입을 여니 악어처럼 뾰족한 이가 가득했다. 둘은 말없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풍림 입구가 열려 환영 너머의 풍경이 보였다. 동굴 입구같는 시커먼 곳을 통과하는 가마를 확인한 방다병과 적비성이 잽싸게 몸을 움직여 뒤를 따랐다. 기척을 못 느끼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가마를 진 식신들은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식신들이 가마를 내려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지켜보다가 따라붙었다.
"이연화, 괜찮아? 식신들이 사라졌어."
방다병이 소근댔다. 적비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촌장 옆에 있던 식신이 역시 구미호의 수하였어. 촌장과 일부러 짜고 우리를 들여보낸 것 같다."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이연화가 가마에서 내려 망토를 벗었다.
"그럴 것 같았어. 촌장이 자리를 비울 때부터 의심했지. 함정일테니 조심해."
방다병과 적비성이 각자 검을 뽑아 들고 이연화의 앞뒤로 섰다. 주위는 온통 어둑하여 나무인지 바위인지 모를 것들의 형체가 검게 일렁였다. 바람도 불지 않아 실내같기도 했다. 가장 먼저 냄새를 맡은 것은 이연화였다. 반인반요의 예민한 후각 탓이었다.
"미혼향이야, 조심해."
이연화가 소매로 코를 가리며 경고하자 두 사람도 팔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큰한 향이 진하게 퍼져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더니 한쪽 어두운 공간에 불꽃이 일렁이며 주변이 밝아졌다. 푸르스름한 돌기둥에 꽂힌 횃불이었다. 곧 차례로 횃불 예닐곱개가 절로 점화되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동굴 내부의 한 방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굴 안에는 짚을 깐 낮은 침상 셋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횃불 사이로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눈꼬리가 길게 빠지고 붉은 눈화장과 입술연지를 칠한 미색의 여인이었다.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한 구미호는 요사스럽게 눈을 치뜨며 제 앞의 건장한 사내의 몸을 쓸듯이 훑어보았다.
"이리 건장하고 잘생긴 공자님들이라니 오늘은 천지신명께 절이라도 해야겠네."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을 교태 어린 목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흑단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멀리서도 꽃향이 느껴졌다. 꽃이 있을리는 없으니 유혹술이 발동한지도 몰랐다.
이연화는 두 사람을 흘끔 쳐다보았다.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적비성은 그저 인상만 쓰고 있었고, 방다병은 처음 보는 미색의 요마에 긴장한 듯 보였다. 아직 여인을 안은 적이 없을 도련님이라 내심 걱정이 되는 이연화였다.
"절을 할지 곡을 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여우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다가와 이연화 앞을 서성였다.
"어머, 잘생긴 오라버니. 그렇게 대들면 더 호되게 당한다는걸 모르나보네. 제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물고 안 놔줄거야. 뭘 물지는 말 안해도 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음담패설을 하는 여우에게 이연화도 지지 않고 답했다.
"수백살 난 할머니가 누구더러 오라버니래. 그리고 사내들의 맘을 설레게 하는 여인은 그런 추저분한 말은 안 하는 법이야. 정기만 빼먹을게 아니라 예부터 배워야겠어."
"하하하, 재밌군! 어디 나한테 깔려서도 그리 나불댈 수 있나 보지. 빌어먹을 예는 몸으로 가르쳐줘."
적비성은 익숙한 듯 냉랭한 표정이었으나 방다병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왜 저리 도발하는거야! 이연화는 구미호가 약이 올라 저를 먼저 치기를 바랬다. 유혹술을 쓰는 동안 붙잡아두면 두 사람이 뭐라도 하겠지 싶어서였다. 구미호는 코웃음을 치더니 양팔을 뻗어 허공에 장을 날렸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뒤로 밀리며 침상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셋은 곧 눈을 크게 떠야했다. 한 명에게 갈 줄 알았던 구미호가 분신술을 써 셋이 되어 각자에게 들러붙었다. 이연화의 팔목에 지푸라기가 감겼다. 왼쪽 침상에는 마찬가지로 짚에 결박 당한 방다병이 팔목을 애써 비틀다가 코앞에 다가든 미녀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고, 오른쪽의 적비성은 사정이 나아 발로 한 번 여우를 차낸 참이었다. 하지만 환술을 쓰는 구미호는 그저 유희거리라는 듯 깔깔 웃으며 적비성에게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는 유혹술을 쓰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방다병과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댄 여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젊고 잘 생긴 도련님. 네 음심은 어디에 있지?"
"시끄러워."
방다병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파고드는 듯한 유혹술에 방다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다병에게만 들리는 여우의 깔깔대는 요사스러운 웃음이 점점 끈적한 교성으로 변해갔다. 애써 저항했지만 방다병의 머리 속에는 일전에 화영루에서 본 비치는 옷을 입고 하늘대던 기녀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그때에도 머리 속을 채워 당황했던 제 입술의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연화가 제 입술을 덮어 혀를 얽어 오던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몸이 후끈 더워졌다.
"방다병, 방소보. 너는 그를 원하는구나."
이연화! 방다병이 이연화를 몇 번이고 부르는 장면이 머리 속을 떠다녔다. 자신이 부르고 또 따라다니던 사람. 그리고 또 욕정하는 사람. 여우가 꿈에 나왔던 이연화의 모습으로 변해 몸을 비벼왔다.
"방소보."
이연화의 목소리가 방다병을 녹일 듯이 귓가에서 들려왔다. 방다병은 가짜라 되뇌이면서도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나 아파. 네가 날 그냥 두면 몸이 달아 고통스러워. 어서 날 안아줘, 방소보. 나 괴로워."
열에 들떠 붉은 눈가를 촉촉히 적신 이연화가 방다병의 옷깃을 열며 맨 가슴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촉감에 방다병은 저도 모르게 이연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는 이연화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랑 나 뿐인데. 내가 누구겠어?"
방다병이 뭐라 한 소리를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천기산장의 제 방이었다. 그리고 애같이 몽정을 한 꿈의 그 장면 그대로, 이연화가 제 위에서 교태롭게 앉아 있었다. 눈이 커드래진 방다병에게 이연화가 웃어보였다.
"꿈이라도 꾼거야? 왜 그리 멍해. 오늘 나랑 각인하기로 했잖아."
"각..인?"
"이대로면 적비성한테 감응하느라 몸이 남아나질 않아. 내가 이대로 적비성에게 안기길 바라는거야? 너랑 각인하면 더는 적비성때문에 몸이 동하지 않아도 돼. 내가 그 자 앞에서 이렇게 되도 괜찮아?"
이연화가 방다병의 가운데에 손을 대어 쓸어 올렸다. 흡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참기가 무섭게 방다병의 양물이 크기를 부풀렸다. 적비성 앞에서 이렇게 된다니 안될 일이지. 방다병은 조급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날 어서 안아. 네 걸로 날 엉망으로 만들어줘. "
방다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방다병은 팔을 뻗어 이연화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그를 침상에 눕혔다. 이연화가 웃고 있었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연화의 눈에 정욕이 깃들어 색기를 흘려댔다. 방다병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를 쓸고 침의를 가르듯 가슴팍에 머물렀다. 얇은 옷 위에 도드라진 돌기를 손가락으로 쓸자 이연화의 입에서 웃음기 묻은 신음이 흘렀다.
"간지러워, 방소보."
방다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가짜라지만 유혹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연화는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과하게 유혹술을 쓰는 구미호가 글공부를 안 해 경박하기 짝이 없는 것에 고마워하며, 방다병은 정신을 집중해 눈 앞의 몸뚱이의 마비혈을 콱 찍어버렸다. 가짜 이연화가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구미호로 돌아갔다. 방다병은 곤란해진 제 물건이 급속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이연화에게 혼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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