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9766632
view 5766
2024.04.03 06:38
오나더
https://hygall.com/589486273



a814ac008e6463224b5b125834352147.jpg




"형님 이것 보세요. 열을 내리는 효능이 있는 약초인데 산에 널렸습니다."

연보라색 꽃을 피운 들풀을 꺾어올린 영직이 뒤쫓아오는 백기를 향해 흔들어보였다. 궁에서만 있던 분이 들풀들이며 야생초들은 어찌 이렇게 잘 아시는지 백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렇게 꽃이 막 피었을 때가 효능이 가장 좋습니다. 뿌리를 달여마시면 상처가 곪지 않게 해주고, 꽃을 말려 차로 내리면 해열 효과가 있지요. 또 잎은 향이 좋아..."

백기의 곁으로 달려와 종알종알 풀의 효능을 읊는 영직의 말을 노랫소리처럼 즐기며 백기는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쟁터에서 대승을 거둔 백기는 언제나처럼 궁에서 영직을 알현했다. 하지만 예를 올린 후 영직을 올려다봤을 때 백기는 숨이 막히고 가슴을 옥죄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영직의 눈 밑은 거뭇했고, 피부는 죽은 사람의 것처럼 잿빛이었으며, 눈은 충혈된 채 입술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알현을 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날 밤 백기는 영직의 처소로 숨어들었고, 무작정 영직을 업고 나와 궁을 빠져나왔다.

"형님 또 예전 생각을 하십니까?"

생각에 잠겨있는 백기를 눈치챈 영직이 백기의 소매를 흔들며 깨웠다. 백기는 그런 영직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그 형님 소리는 어색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처럼 장가를 갔으면 폐하보다도 큰 자식이 있었을 터인데..."

"허... 씁. 폐하라뇨. 이제 영직이라고 불러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눈에 힘을 주고 위협하듯 말하는 모양이 위엄있어보이려는 듯 했으나 백기에 눈에는 마냥 어려보였다. 백기는 난처한듯 시선을 돌렸지만 그 시선을 쫓아 다시 백기 앞에 선 영직 탓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소신이 어찌 폐하의 존함을..."

다시 눈을 피하는 백기의 팔을 붙잡은 영직이 그의 팔을 잡아 내렸다. 백기는 영직이 힘을 주는 대로 몸을 굽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영직을 올려다 보았다.

"절 황좌에서 끌어 내린 것이 바로 장군입니다."

"그건..."

흔들리는 눈빛으로 다시 눈을 피하려는 백기의 얼굴을 영직이 양 손으로 붙잡았다.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장군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 이런 자유도 평화도 느껴보지 않은채 죽임당했을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장군이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제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지내시게 하여..."

백기에게서 죄를 청하는 말을 이미 수십번, 수백번 들은 영직이 백기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백기는 당황했지만 영직이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영직은 백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백기의 눈썹 끝에서 광대뼈까지 난 흉터자국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 때문에 다친 상처가 이리 많은데... 왜 자꾸 장군이 저에게 사과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때문이 아닙니다. 소신의 능력이 미천하여..."

"씁."

영직은 듣기 싫다는 듯 백기의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갔다.

"폐하..."

백기는 자꾸 제 말을 막는 영직이 난처하다는 듯 영직을 불렀지만 영직은 무슨 좋은 생각이 난 사람처럼 입꼬리를 길게 당기며 미소지었다.

"장군이 워낙 건장하여 제가 실수를 한 듯 합니다. 형님이 불편하셨다니 신분을 속이려면 다른 호칭을 찾아야할 것인데...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아.버.지."

"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백기를 두고 영직은 멀찍히 떨어져 눈을 찡긋했다.

"아버지! 어서오십시오! 오늘은 제가 산에서 꺾은 약초를 넣고 끓인 국으로 몸보신을 시켜드리지요!"

"차...차라리 그냥 형님이 낫겠습니다!"

"역시 그렇죠? 형님이 낫겠죠? 그럼 형님도 말 편하게 하세요. 형이 아우에게 존대를 쓰는 경우가 어딨답니까?"

"그건 그렇지만..."

백기는 차마 나오지 않는 말에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답답하다는 듯 지켜보던 영직이 한숨을 쉬고는 백기에게 다시 다가왔다.

"됐습니다. 오늘은 이정도로 만족하죠. 형님의 말을 기다리다가는 해 떨어지겠습니다."

민망한듯 웃는 백기 앞에서 영직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 우리, 집으로 가요."

백기가 큰 손을 벌려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이 박힌 손 아래로 느껴지는 영직의 손은 보드랍고 또 따뜻했다.


떠나는 둘의 뒤로 검은 우산을 접은 션웨이가 나타났다. 영직의 얼굴을 본 순간 션웨이는 누군가 제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기분이 들었다. 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소년을 향해 저리 따뜻한 표정을 짓는 백기라니... 션웨이는 자신을 보자마자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던 백기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동안 백기는 션웨이에게서 저 소년을 찾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것도 모르고...션웨이는 바보처럼 이미 제 마음을 모두 백기에게 주고 말았다.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션웨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툭 떨어졌다. 션웨이의 눈물방울이 닿은 땅은 순식간에 흑백영화처럼 빛을 잃었지만 백기가 사라진 방향만 쳐다보던 션웨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맑았던 하늘은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가득찼고, 회색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션웨이의 눈물자국을 지우려는 듯 쏟아지는 빗속에서 션웨이는 접었던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않은채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있었다.




룡백 만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