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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 18:02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적비성이 꺼낸 것은 작고 얄팍한 책자였다. 적비성이 오른손을 불쑥 내밀자, 하효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책을 받아 그 내용을 확인했다. 천기당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적 맹주, 이건...."
"그 안에 금원맹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소."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건넸다. 이 자료를 불과 이틀 만에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충복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의외의 명령에 살짝 당혹했지만, 무안은 곧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최선을 다해 금원맹의 역사와 현황을 정리했다.
"금원맹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내가 폐관한 10년 동안 각려초의 손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오.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확인했으니 틀림은 없겠지."
"이런...중요한 물건을 넘겨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방칙사가 놀라움과 의혹이 드러난 얼굴로 물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끼고는 덤덤히 건넸다.
"당신들이 나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으나, 오해를 바라진 않으니 주는 거요. 하 당주의 말처럼, 금원맹은 독자적인 강자존의 원칙을 따를 뿐 정파가 말하는 복잡한 도리에 관심이 없소. 하지만 적어도 양민을 갈취하거나 사람을 사고 파는 등의 짓거리는 하지 않으니, 예전처럼 오해로 인한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한 감찰사나 백천원에 중히 책잡힐 일은 많지 않을 것이오."
'최소한의 도의란 무엇인가?' 이틀 전, 적비성은 그 질문을 무안에게 던졌다. 딱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연화가 자신과 어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소위 '최소한의 도의'가 있으리란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어구의 정확한 의미까지는 단정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들은 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보고 들은 세간의 상식을 알려주었다. 무고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해하지 않으며, 남의 마음을 쉬이 희롱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며, 유희를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일이 아니겠느냐던 무안의 말을 듣고, 적비성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했다. '약한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만 제외하면-적비성의 눈에, 이연화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약자로 보였다-역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적비성이 대수롭지 않게 이었다.
"각려초가 실각하면서 겁 없이 달려들던 근방 조직들과의 관계도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한동안 염려할 만한 일은 없겠지. 만에 하나 이 이중 각인이 지속된다면, 차후 천기당에 대한 정보도 요청할 거요. 동맹 상대에 대해서는 나 역시 파악해두고 싶으니."
당당한 요구에 방칙사의 미간이 움찔했다. 금원맹 같은 조직과 연결고리가 생길지 모른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치민 모양이었으나, 중년인은 별달리 말을 얹지 않고 아내를 기다렸다. 진지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던 하효혜는, 이윽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책을 덮었다.
"적 맹주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중립적으로 말한 천기당주가 등을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날아오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적비성 역시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하효혜가 입을 열었다. 예의바른 투였으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적 맹주가 금원맹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지요?"
"힘을 위해서요."
적비성이 즉답했다. 하효혜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힘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을 해치는 일도 괜찮다는 겁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지. 상대 역시 힘을 추구하는 무림인이라면 주저할 필요가 없소."
적비성의 단언에, 하효혜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흐려졌다. 제발, 삼가는 척이라도 좀 해라.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방다병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지금까지처럼 그 말을 흘리고, 적비성은 상대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본능적인 직감으로, 금원맹주는 이 자리에서 설득해야 하는 사람이 하효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효혜가 심란한 한숨과 함께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적 맹주에게는 강해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군요. 결국 천하제일인을 목표로 하고 있겠지요. 다른 많은 강호인들처럼 말입니다."
"맞소."
적비성이 짧게 대꾸했다. 다른 조잡한 무인들과 한데 묶이는 일은 원치 않았으나, 자신에게 그런 목표가 있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효혜의 눈으로 냉랭한 빛이 스쳤다. 방칙사가 목을 한 차례 가다듬으며 아내를 힐끗 보았다. 아비, 조심해. 하 당주는 목숨을 함부로 취급하는 무림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연화의 조용한 전음이 귓가를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진실한 염려가 섞여 있어, 적비성은 고개를 슬쩍 돌린 채 대답했다. 허울이 먹힐 사람이 아니다. 이연화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 또한 그렇지.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슬쩍 올렸다. 하효혜의 입에서 종전보다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이 가장 중요하다 했지요. 만일 누군가가 이 선생이나 소보의 명을 대가로 지고의 무공을 알려주겠다 약조한다면 어쩌겠습니까?"
"죽일 거요."
적비성이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대꾸했다. 하효혜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째서입니까? 힘이 가장 중요하다면서요."
"나는 구차하게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힘을 얻을 생각이 없소. 이연화나 방다병만 건드리더라도 죽일 판에, 나를 노예처럼 생각하고 감히 그딴 제안을 했으니 두 번 죽어 마땅하지."
적비성이 어렵지 않게 설명했다. 하효혜의 반대편 눈썹 역시 살짝 올라갔다. 기이한 눈으로 적비성을 보다, 하효혜는 곧 헛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짧게 뱉었다. 아내가 나서기 시작하자 한 발짝 물러서 있던 방칙사가, 퍽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그 말은, 누가 소보를 해하려 든다면 돕겠다는 뜻이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나, 방다병 역시 이 각인의 당사자요. 뭣보다, 방다병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이연화가 견디지 못할 테지. 갑갑하게 구는 건 이미 충분히 겪었으니, 그런 꼴은 보기 싫소."
호부상서의 질문에, 적비성이 지극히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골골거리면서도, 연명을 위한 영약 따위는 필요 없다 고집을 부리던 이연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신경질이 났다. 하효혜가 진중하게 물었다.
"그러면, 적 맹주는 힘을 추구하면서도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이 선생도 우리 소보도, 당신을 맹주라 떠받들지 않을 이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여 곁에 있어달라 청하는 순간, 그 마음을 일신의 무공이나 권력보다 중히 여길 수 있겠어요?"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적비성은 조금 당황했다. 지금껏 숙고해본 적이 없는 질문인 탓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적비성은 찻잔의 수면을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힘을 추구하는 일보다 각인을 더 중하게 여길 수 있겠느냐고? 그 둘이 양립하기 어려운 순간을 아직 겪어보지 못한 탓에, 금원맹주는 잠시 비관적인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했다.
아마도 하효혜는 여러 일이 동시에 발생하여,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연을 목전에 두었거나 금원맹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 이연화나 방다병이 자신을 필요로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화도 방다병도, 진지한 부탁을 쉽게 남발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이연화는 평소 남을 천연덕스럽게 잘 부려먹는 것 같다가도, 정작 중요한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계에 다다라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일쑤였다.
내게 도움을 청하거나 옆에 있어달라 한다면, 분명 심신이 오락가락할 만큼 중대한 일일 텐데. 적비성은 이연화나 방다병에게 일어났던 최근의 위기 상황을 몇 가지 떠올려 보았다. 납치되거나, 발작처럼 희락기에 들거나, 지옥 같은 악몽을 꾸며 버둥거리거나. 적비성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방다병이야 자신과 같이 곤경에 빠졌으니 부탁 따위를 꺼낼 입장이 아니었다 쳐도, 이연화는 그런 상황에서 도와달라 먼저 말한 적이 없었다. 괴로운 사태를 사전에 예견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연화가 입을 다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비성과 방다병이 다행히 적재적소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런 이연화가, 먼저 자신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민다? 상대가 그랬던 적이 딱히 없어서인지, 선명한 그림이 영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껏 나를 원하고 필요로 하며 같이 있어달라 간청했던 이들이 누구였더라. 기억을 뒤져보니, 아무래도 각려초의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존상, 오늘은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여자는 늘 적비성을 애타게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 음성에는 애욕이 섞였을 때도 있었고, 외사랑의 슬픔이 섞였을 때도 있었다. 아비, 오늘은 나와 있어줘.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연화의 목소리를 그 말에 대입해 보니, 갑자기 등으로 전율이 흘렀다.
나쁘지...않을 것 같은데? 적비성이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곁을 지켜달라 청하는 일은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는 짓이라 생각하여 지금껏 달갑게 여겨본 적이 없었으나,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상대를 떠올리자 전심이 쏟아지듯 그편으로 기울었다. 그런 이를 뿌리치고 돌아서는 자신이 조금도 상상되지 않았다. 상대가 욕망을 품고 건넨 말이든, 심신이 무너져 건넨 말이든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히려 후자의 경우라면 반드시 나나 방다병에게 말해야 하지 않나? 달리 누구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단 말인가? 적비성이 정확한 대상도 없이 험한 표정을 짓자, 하효혜가 그를 불렀다.
"적 맹주? 내가 곤란한 질문을 했나요?"
"생각에 시간이 걸렸소."
퍼뜩 고개를 들어 대꾸하고, 적비성은 종전까지 전개하던 생각을 정리했다. 다소 뒤엉켜 있던 문장들이 서서히 조합되어 제자리를 찾았다. 하효혜를 바라보며, 적비성이 느리게 말했다.
"무공을 익히는 일에는 때가 없소. 부단히 수련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오.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또 발견되기 마련이니, 크게 집착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사람이 관련된 일에는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일이 아주 어렵게 되더군."
그렇게 이야기하며, 적비성은 십 년 전의 동해대전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이상이를 꺾고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열망이 강렬하여, 이상이와의 오해를 적극적으로 풀려 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다시 쌓아올려지는 데에는 십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당시의 선택을 딱히 뼈저리게 후회하지는 않았으나-당시의 금원맹주에게는 이상이와의 일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그 일련의 인과에는 틀림이 없었다.
십 년이 지나 이연화와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맺으면서, 적비성은 결정적인 순간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화강암 같은 남자에게, '사람이 관련된 일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아로새길 만한 일들이었다. 침잠하는 이연화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제때 끌어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속절없이 상대를 잃었을 터였다. 이연화가 봉림에 의해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과 방다병이 그 자리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그는 상상하기도 싫은 일을 겪고 괴로워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심악의 약으로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던 이연화에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면, 남자는 스스로의 두려움에 재차 사로잡혀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이연화와 재회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중요한 '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에 가까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상을 멈추고, 적비성이 투박하게 말했다.
"나는 방소보처럼 자라지 않아, 사람을 정으로 챙기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소. 하지만 그들이 내게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할 때, 함부로 돌아서지는 않을 거요. 오히려 나한테서 그 사실을 숨긴다면 더 불쾌할 것 같군."
이연화는 말할 것도 없었고, 방다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방다병이 금원맹주에게 모든 일을 집어치우고 자신을 도우라 요구할 만한 상황이라면, 직계 혈육이나 이연화가 위험할 때 정도뿐일 터였다. 무공 수련이야 후에 잠을 쪼개 더 하면 될 일이었고, 금원맹의 일이야 무안에게 급한 대로 지시를 내려두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폐관 이후의 경험으로, 적비성은 적절한 순간 자신이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중요한 대상을 영영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에는 나와 나란히 둘 만큼 중요한 대상이랄 사람이 없었지. 내심 쓴웃음을 짓는 적비성을 향해, 오래도록 침묵하던 하효혜가 말했다.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적어도 일신의 욕심을 위해 이 선생이나 소보를 이용하진 않겠군요."
"내 무공을 높이는 건 내게 달린 일인데, 왜 이연화나 방소보를 이용해야 하지?"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생각만으로도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이연화에게는 제대로 된 비무를 원할 뿐, 그 외의 무엇도 크게 바라지 않았다. 하효혜가 피식 웃었다. 천기당주는 이내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그 얼굴로 어둡다 못해 분노를 닮은 빛이 스쳤다.
"나는 맹목적으로 힘을 원하던 강호인에게 한 번 가족을 잃은 적이 있어요. 선고도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결국 중요한 관계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요. 내 동생은 다친 마음과 약한 몸 때문에 단명하였고, 그 매정한 인사는 조문조차 제대로 오지 않았어요. 내 동생과 제대로 각인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그리 깊은 상처를 주었는데, 적 맹주는 그때와 또 다른 입장이니 이런저런 일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선고도처럼 행동할지 모른다 의심한 거요?"
적비성이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모욕적인 가정에 반감이 치밀었으나, 하효혜의 쓸쓸한 눈을 보니 어쩐지 역정이 나지는 않았다. 하효혜가 적비성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힘을 원한다 하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물을 수밖에 없더군요. 강함을 추구하는 무림인들은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혹해지니까요. 비록 맹주가 소보와 직접적으로 각인한 사이는 아니라 하나, 간접적이라 해도 꽤 가까운 관계이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하효혜가 긴 숨을 내쉬었다. 많은 생각과 감정이 내포된 한숨이었다. 살짝 숙여진 시선에서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그 곁의 방칙사는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적어도 적비성을 만난 직후처럼 성이 나 보이지는 않았다. 호부상서의 주의는 적비성보다 아내에게 조금 더 쏠려 있었다. 이윽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하효혜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금원맹주를 만나고 나니, 어떤 부분은 확실해지고 어떤 부분은 복잡해진 기분이 드는군요. 일단,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성의껏 임해주어 고마워요. 물론 맹주는 우리 부부에게 허락을 얻을 필요가 없지만 맹주 역시 긴밀히 관련된 일이니만큼, 우리가 논의를 마치고 결정을 내리는 대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괜찮다면 당분간 천기산장에서 묵도록 해요."
고개를 끄덕한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가부터 조용해진 문 밖을 힐끗 보고, 금원맹주는 부부에게 짧게 예를 표한 뒤 발길을 돌렸다.
사용인에게 거처를 안내받은 다음, 적비성은 당연하게도 이연화의 방을 향했다. 그곳에는 묘한 표정을 지은 이연화와, 어찌나 긴장했던지 탁자에 빨랫감처럼 축 늘어진 방다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비성을 보자마자, 방다병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넌 어른들께 대체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거야? 누가 보면 비슷한 연배인 줄 알겠어."
"됐어, 방소보. 하대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이연화가 한 손을 내젓고는 차를 홀짝였다. 그 낯빛에 별다른 수심이 보이지 않아, 적비성은 약간의 찜찜함을 대수롭지 않게 내려놓으며 탁자 앞에 앉았다. 방다병이 명치에 한 손을 얹고는 투덜거렸다.
"속이 다 쓰릴 지경이야. 너 말이야, 사람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조언하는데 어떻게 싹 다 무시할 수가 있어?"
"어줍잖게 둘러대는 말에 넘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다. 네 어머니를 그렇게 모르는 거냐?"
적비성이 돌려준 말에, 방다병은 욱한 얼굴을 했으나 당당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같은 소리라도 좀 좋게 얘기하면 급병에 걸려 죽기를 하나, 주화입마로 경맥이 터지길 하나. 오해받기 딱 좋게 쏘아붙이는 태도하곤...." 꿍얼거림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방다병을 노려보며, 적비성은 그 뒷덜미를 잡아 바깥에 내다 버리는 일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이제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천기산장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시간을 모두 방다병의 불평으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적비성이 일어서기 전, 문 밖에서 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여기 계세요? 마님께서 잠시 찾으세요."
방다병이 헉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섰다. 적비성은 청년이 부산스레 몸가짐을 정돈하는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았으나, 방다병은 어머니의 호출에 정신이 팔려 그 무례한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녀올게." 비장한 투로 이야기한 방다병이 방을 나섰다. 닫힌 문을 향해,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신 건 아닐 텐데. 너무 힘이 들어가 있네."
"너는 별로 염려되지 않나 보군."
"이제 와서 염려해도 무슨 소용이겠어,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담담히 말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야. 며칠 동안 하도 신경을 썼더니 피로해 죽겠어." 지나가는 투로 푸념하며, 이연화는 침상에 앉아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적비성이 따라 일어섰다. 기가 허해져 있다면 내력이라도 넣어줄까 싶어 등에 손을 대려 들자, 이연화가 그 팔목을 잡아당겼다. "그럴 필요는 없으니 앉기나 해." 조금 의아했으나, 적비성은 그 손길에 따라 이연화와 나란히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이연화가 눈가를 슬쩍 만졌다. 적비성이 의심스럽게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할 말이 있어 보여?"
"계속 뜸을 들이고 있잖아."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둘러대기는 해도, 할 말을 두고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일은 별로 없었던지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음, 사실은 오늘 걱정을 꽤 했는데 말이야." 이연화가 중립적인 투로 운을 뗐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병자처럼 굴던 방다병보다야 덜했지만, 너도 며칠 동안 정상은 아니었지. 사실 이해할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사람 대하는 연륜이 부족하다고 생각...생각하긴 했지. 네가 지금껏 얽혔던 사람들은 거의 다 무림인들이잖아. 개중에서도 사파가 많았을 테고. 하 당주와 방 상서는 네가 평소에 대하던 유형이 아니라, 어떤 오해로 마음이 상하거나 분쟁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여겼어."
이연화가 소탈하게 늘어놓은 말에, 적비성은 별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발생할 법했고, 대화 초반에는 실제로 발생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적비성은 별달리 켕기는 구석이라곤 없는 마음으로 이연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어땠지?"
이연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적비성이 방금 전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적비성이 상대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달가운 것인지 아닌지 영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성이 나거나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 당주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어. 내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일이니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 본인뿐 아니라 방 상서의 입장도 있고 하니까 말이야."
적비성은 별 감흥 없이 그 말을 수용했다. 하효혜의 마음이 바뀌든 말든 결국은 방다병이 가장 신경 쓸 문제였으니, 자신이 크게 동요할 것도 없었다. 이연화가 뺨을 긁적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뭐...." 고민하듯 눈동자를 한 차례 굴린 이연화는, 이내 적비성을 향해 살짝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 팔이 자신을 가볍게 끌어안았을 때, 적비성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먼저 손을 뻗은 포옹이 조금 어색한 듯했지만, 이연화는 적비성의 등을 몇 차례 토닥이면서 중얼거렸다.
"뭐,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머쓱하지만 썩 긍정적인 평가에, 금원맹주의 입에서 피식 소리가 새었다. 닿은 살갗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체취에 이끌려, 적비성은 양팔을 들어 그 몸을 꽉 끌어안았다. 흉곽이 강하게 짓눌릴 정도의 힘이었다. 이연화는 잠시 숨을 멈추었으나 상대를 딱히 막거나 만류하지 않았다. 적비성이 눈을 내리깐 채 놀리듯 읊조렸다. 품에 뿌듯이 차오른 존재감에, 며칠 동안 희미하게나마 계속되던 두통이 일순 흐려졌다.
"그냥 잘 대처했다고 말해도 될 것을."
"그렇게까지는 아냐, 꿈 깨. 너치고는 괜찮았단 거지."
이연화가 금세 타박하듯 이야기하며 등을 한 대 툭 쳤다.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그 몸은 여전히 적비성을 향해 기울어져 체중을 나누고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해." 금원맹주가 웃음기 묻은 소리로 받았다. 맞닿은 뺨과 목덜미를 슬쩍 비비며, 적비성은 자신이 이연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때'를 잘 넘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세 사람은 하효혜의 부름을 받았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적비성이 꺼낸 것은 작고 얄팍한 책자였다. 적비성이 오른손을 불쑥 내밀자, 하효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책을 받아 그 내용을 확인했다. 천기당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적 맹주, 이건...."
"그 안에 금원맹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소."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건넸다. 이 자료를 불과 이틀 만에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충복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의외의 명령에 살짝 당혹했지만, 무안은 곧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최선을 다해 금원맹의 역사와 현황을 정리했다.
"금원맹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내가 폐관한 10년 동안 각려초의 손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오.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확인했으니 틀림은 없겠지."
"이런...중요한 물건을 넘겨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방칙사가 놀라움과 의혹이 드러난 얼굴로 물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끼고는 덤덤히 건넸다.
"당신들이 나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으나, 오해를 바라진 않으니 주는 거요. 하 당주의 말처럼, 금원맹은 독자적인 강자존의 원칙을 따를 뿐 정파가 말하는 복잡한 도리에 관심이 없소. 하지만 적어도 양민을 갈취하거나 사람을 사고 파는 등의 짓거리는 하지 않으니, 예전처럼 오해로 인한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한 감찰사나 백천원에 중히 책잡힐 일은 많지 않을 것이오."
'최소한의 도의란 무엇인가?' 이틀 전, 적비성은 그 질문을 무안에게 던졌다. 딱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연화가 자신과 어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소위 '최소한의 도의'가 있으리란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어구의 정확한 의미까지는 단정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들은 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보고 들은 세간의 상식을 알려주었다. 무고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해하지 않으며, 남의 마음을 쉬이 희롱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며, 유희를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일이 아니겠느냐던 무안의 말을 듣고, 적비성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했다. '약한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만 제외하면-적비성의 눈에, 이연화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약자로 보였다-역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적비성이 대수롭지 않게 이었다.
"각려초가 실각하면서 겁 없이 달려들던 근방 조직들과의 관계도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한동안 염려할 만한 일은 없겠지. 만에 하나 이 이중 각인이 지속된다면, 차후 천기당에 대한 정보도 요청할 거요. 동맹 상대에 대해서는 나 역시 파악해두고 싶으니."
당당한 요구에 방칙사의 미간이 움찔했다. 금원맹 같은 조직과 연결고리가 생길지 모른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치민 모양이었으나, 중년인은 별달리 말을 얹지 않고 아내를 기다렸다. 진지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던 하효혜는, 이윽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책을 덮었다.
"적 맹주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중립적으로 말한 천기당주가 등을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날아오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적비성 역시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하효혜가 입을 열었다. 예의바른 투였으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적 맹주가 금원맹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지요?"
"힘을 위해서요."
적비성이 즉답했다. 하효혜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힘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을 해치는 일도 괜찮다는 겁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지. 상대 역시 힘을 추구하는 무림인이라면 주저할 필요가 없소."
적비성의 단언에, 하효혜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흐려졌다. 제발, 삼가는 척이라도 좀 해라.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방다병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지금까지처럼 그 말을 흘리고, 적비성은 상대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본능적인 직감으로, 금원맹주는 이 자리에서 설득해야 하는 사람이 하효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효혜가 심란한 한숨과 함께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적 맹주에게는 강해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군요. 결국 천하제일인을 목표로 하고 있겠지요. 다른 많은 강호인들처럼 말입니다."
"맞소."
적비성이 짧게 대꾸했다. 다른 조잡한 무인들과 한데 묶이는 일은 원치 않았으나, 자신에게 그런 목표가 있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효혜의 눈으로 냉랭한 빛이 스쳤다. 방칙사가 목을 한 차례 가다듬으며 아내를 힐끗 보았다. 아비, 조심해. 하 당주는 목숨을 함부로 취급하는 무림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연화의 조용한 전음이 귓가를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진실한 염려가 섞여 있어, 적비성은 고개를 슬쩍 돌린 채 대답했다. 허울이 먹힐 사람이 아니다. 이연화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 또한 그렇지.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슬쩍 올렸다. 하효혜의 입에서 종전보다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이 가장 중요하다 했지요. 만일 누군가가 이 선생이나 소보의 명을 대가로 지고의 무공을 알려주겠다 약조한다면 어쩌겠습니까?"
"죽일 거요."
적비성이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대꾸했다. 하효혜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째서입니까? 힘이 가장 중요하다면서요."
"나는 구차하게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힘을 얻을 생각이 없소. 이연화나 방다병만 건드리더라도 죽일 판에, 나를 노예처럼 생각하고 감히 그딴 제안을 했으니 두 번 죽어 마땅하지."
적비성이 어렵지 않게 설명했다. 하효혜의 반대편 눈썹 역시 살짝 올라갔다. 기이한 눈으로 적비성을 보다, 하효혜는 곧 헛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짧게 뱉었다. 아내가 나서기 시작하자 한 발짝 물러서 있던 방칙사가, 퍽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그 말은, 누가 소보를 해하려 든다면 돕겠다는 뜻이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나, 방다병 역시 이 각인의 당사자요. 뭣보다, 방다병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이연화가 견디지 못할 테지. 갑갑하게 구는 건 이미 충분히 겪었으니, 그런 꼴은 보기 싫소."
호부상서의 질문에, 적비성이 지극히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골골거리면서도, 연명을 위한 영약 따위는 필요 없다 고집을 부리던 이연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신경질이 났다. 하효혜가 진중하게 물었다.
"그러면, 적 맹주는 힘을 추구하면서도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이 선생도 우리 소보도, 당신을 맹주라 떠받들지 않을 이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여 곁에 있어달라 청하는 순간, 그 마음을 일신의 무공이나 권력보다 중히 여길 수 있겠어요?"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적비성은 조금 당황했다. 지금껏 숙고해본 적이 없는 질문인 탓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적비성은 찻잔의 수면을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힘을 추구하는 일보다 각인을 더 중하게 여길 수 있겠느냐고? 그 둘이 양립하기 어려운 순간을 아직 겪어보지 못한 탓에, 금원맹주는 잠시 비관적인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했다.
아마도 하효혜는 여러 일이 동시에 발생하여,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연을 목전에 두었거나 금원맹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 이연화나 방다병이 자신을 필요로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화도 방다병도, 진지한 부탁을 쉽게 남발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이연화는 평소 남을 천연덕스럽게 잘 부려먹는 것 같다가도, 정작 중요한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계에 다다라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일쑤였다.
내게 도움을 청하거나 옆에 있어달라 한다면, 분명 심신이 오락가락할 만큼 중대한 일일 텐데. 적비성은 이연화나 방다병에게 일어났던 최근의 위기 상황을 몇 가지 떠올려 보았다. 납치되거나, 발작처럼 희락기에 들거나, 지옥 같은 악몽을 꾸며 버둥거리거나. 적비성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방다병이야 자신과 같이 곤경에 빠졌으니 부탁 따위를 꺼낼 입장이 아니었다 쳐도, 이연화는 그런 상황에서 도와달라 먼저 말한 적이 없었다. 괴로운 사태를 사전에 예견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연화가 입을 다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비성과 방다병이 다행히 적재적소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런 이연화가, 먼저 자신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민다? 상대가 그랬던 적이 딱히 없어서인지, 선명한 그림이 영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껏 나를 원하고 필요로 하며 같이 있어달라 간청했던 이들이 누구였더라. 기억을 뒤져보니, 아무래도 각려초의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존상, 오늘은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여자는 늘 적비성을 애타게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 음성에는 애욕이 섞였을 때도 있었고, 외사랑의 슬픔이 섞였을 때도 있었다. 아비, 오늘은 나와 있어줘.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연화의 목소리를 그 말에 대입해 보니, 갑자기 등으로 전율이 흘렀다.
나쁘지...않을 것 같은데? 적비성이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곁을 지켜달라 청하는 일은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는 짓이라 생각하여 지금껏 달갑게 여겨본 적이 없었으나,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상대를 떠올리자 전심이 쏟아지듯 그편으로 기울었다. 그런 이를 뿌리치고 돌아서는 자신이 조금도 상상되지 않았다. 상대가 욕망을 품고 건넨 말이든, 심신이 무너져 건넨 말이든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히려 후자의 경우라면 반드시 나나 방다병에게 말해야 하지 않나? 달리 누구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단 말인가? 적비성이 정확한 대상도 없이 험한 표정을 짓자, 하효혜가 그를 불렀다.
"적 맹주? 내가 곤란한 질문을 했나요?"
"생각에 시간이 걸렸소."
퍼뜩 고개를 들어 대꾸하고, 적비성은 종전까지 전개하던 생각을 정리했다. 다소 뒤엉켜 있던 문장들이 서서히 조합되어 제자리를 찾았다. 하효혜를 바라보며, 적비성이 느리게 말했다.
"무공을 익히는 일에는 때가 없소. 부단히 수련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오.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또 발견되기 마련이니, 크게 집착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사람이 관련된 일에는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일이 아주 어렵게 되더군."
그렇게 이야기하며, 적비성은 십 년 전의 동해대전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이상이를 꺾고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열망이 강렬하여, 이상이와의 오해를 적극적으로 풀려 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다시 쌓아올려지는 데에는 십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당시의 선택을 딱히 뼈저리게 후회하지는 않았으나-당시의 금원맹주에게는 이상이와의 일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그 일련의 인과에는 틀림이 없었다.
십 년이 지나 이연화와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맺으면서, 적비성은 결정적인 순간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화강암 같은 남자에게, '사람이 관련된 일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아로새길 만한 일들이었다. 침잠하는 이연화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제때 끌어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속절없이 상대를 잃었을 터였다. 이연화가 봉림에 의해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과 방다병이 그 자리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그는 상상하기도 싫은 일을 겪고 괴로워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심악의 약으로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던 이연화에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면, 남자는 스스로의 두려움에 재차 사로잡혀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이연화와 재회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중요한 '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에 가까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상을 멈추고, 적비성이 투박하게 말했다.
"나는 방소보처럼 자라지 않아, 사람을 정으로 챙기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소. 하지만 그들이 내게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할 때, 함부로 돌아서지는 않을 거요. 오히려 나한테서 그 사실을 숨긴다면 더 불쾌할 것 같군."
이연화는 말할 것도 없었고, 방다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방다병이 금원맹주에게 모든 일을 집어치우고 자신을 도우라 요구할 만한 상황이라면, 직계 혈육이나 이연화가 위험할 때 정도뿐일 터였다. 무공 수련이야 후에 잠을 쪼개 더 하면 될 일이었고, 금원맹의 일이야 무안에게 급한 대로 지시를 내려두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폐관 이후의 경험으로, 적비성은 적절한 순간 자신이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중요한 대상을 영영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에는 나와 나란히 둘 만큼 중요한 대상이랄 사람이 없었지. 내심 쓴웃음을 짓는 적비성을 향해, 오래도록 침묵하던 하효혜가 말했다.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적어도 일신의 욕심을 위해 이 선생이나 소보를 이용하진 않겠군요."
"내 무공을 높이는 건 내게 달린 일인데, 왜 이연화나 방소보를 이용해야 하지?"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생각만으로도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이연화에게는 제대로 된 비무를 원할 뿐, 그 외의 무엇도 크게 바라지 않았다. 하효혜가 피식 웃었다. 천기당주는 이내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그 얼굴로 어둡다 못해 분노를 닮은 빛이 스쳤다.
"나는 맹목적으로 힘을 원하던 강호인에게 한 번 가족을 잃은 적이 있어요. 선고도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결국 중요한 관계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요. 내 동생은 다친 마음과 약한 몸 때문에 단명하였고, 그 매정한 인사는 조문조차 제대로 오지 않았어요. 내 동생과 제대로 각인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그리 깊은 상처를 주었는데, 적 맹주는 그때와 또 다른 입장이니 이런저런 일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선고도처럼 행동할지 모른다 의심한 거요?"
적비성이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모욕적인 가정에 반감이 치밀었으나, 하효혜의 쓸쓸한 눈을 보니 어쩐지 역정이 나지는 않았다. 하효혜가 적비성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힘을 원한다 하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물을 수밖에 없더군요. 강함을 추구하는 무림인들은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혹해지니까요. 비록 맹주가 소보와 직접적으로 각인한 사이는 아니라 하나, 간접적이라 해도 꽤 가까운 관계이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하효혜가 긴 숨을 내쉬었다. 많은 생각과 감정이 내포된 한숨이었다. 살짝 숙여진 시선에서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그 곁의 방칙사는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적어도 적비성을 만난 직후처럼 성이 나 보이지는 않았다. 호부상서의 주의는 적비성보다 아내에게 조금 더 쏠려 있었다. 이윽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하효혜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금원맹주를 만나고 나니, 어떤 부분은 확실해지고 어떤 부분은 복잡해진 기분이 드는군요. 일단,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성의껏 임해주어 고마워요. 물론 맹주는 우리 부부에게 허락을 얻을 필요가 없지만 맹주 역시 긴밀히 관련된 일이니만큼, 우리가 논의를 마치고 결정을 내리는 대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괜찮다면 당분간 천기산장에서 묵도록 해요."
고개를 끄덕한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가부터 조용해진 문 밖을 힐끗 보고, 금원맹주는 부부에게 짧게 예를 표한 뒤 발길을 돌렸다.
사용인에게 거처를 안내받은 다음, 적비성은 당연하게도 이연화의 방을 향했다. 그곳에는 묘한 표정을 지은 이연화와, 어찌나 긴장했던지 탁자에 빨랫감처럼 축 늘어진 방다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비성을 보자마자, 방다병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넌 어른들께 대체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거야? 누가 보면 비슷한 연배인 줄 알겠어."
"됐어, 방소보. 하대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이연화가 한 손을 내젓고는 차를 홀짝였다. 그 낯빛에 별다른 수심이 보이지 않아, 적비성은 약간의 찜찜함을 대수롭지 않게 내려놓으며 탁자 앞에 앉았다. 방다병이 명치에 한 손을 얹고는 투덜거렸다.
"속이 다 쓰릴 지경이야. 너 말이야, 사람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조언하는데 어떻게 싹 다 무시할 수가 있어?"
"어줍잖게 둘러대는 말에 넘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다. 네 어머니를 그렇게 모르는 거냐?"
적비성이 돌려준 말에, 방다병은 욱한 얼굴을 했으나 당당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같은 소리라도 좀 좋게 얘기하면 급병에 걸려 죽기를 하나, 주화입마로 경맥이 터지길 하나. 오해받기 딱 좋게 쏘아붙이는 태도하곤...." 꿍얼거림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방다병을 노려보며, 적비성은 그 뒷덜미를 잡아 바깥에 내다 버리는 일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이제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천기산장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시간을 모두 방다병의 불평으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적비성이 일어서기 전, 문 밖에서 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여기 계세요? 마님께서 잠시 찾으세요."
방다병이 헉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섰다. 적비성은 청년이 부산스레 몸가짐을 정돈하는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았으나, 방다병은 어머니의 호출에 정신이 팔려 그 무례한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녀올게." 비장한 투로 이야기한 방다병이 방을 나섰다. 닫힌 문을 향해,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신 건 아닐 텐데. 너무 힘이 들어가 있네."
"너는 별로 염려되지 않나 보군."
"이제 와서 염려해도 무슨 소용이겠어,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담담히 말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야. 며칠 동안 하도 신경을 썼더니 피로해 죽겠어." 지나가는 투로 푸념하며, 이연화는 침상에 앉아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적비성이 따라 일어섰다. 기가 허해져 있다면 내력이라도 넣어줄까 싶어 등에 손을 대려 들자, 이연화가 그 팔목을 잡아당겼다. "그럴 필요는 없으니 앉기나 해." 조금 의아했으나, 적비성은 그 손길에 따라 이연화와 나란히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이연화가 눈가를 슬쩍 만졌다. 적비성이 의심스럽게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할 말이 있어 보여?"
"계속 뜸을 들이고 있잖아."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둘러대기는 해도, 할 말을 두고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일은 별로 없었던지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음, 사실은 오늘 걱정을 꽤 했는데 말이야." 이연화가 중립적인 투로 운을 뗐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병자처럼 굴던 방다병보다야 덜했지만, 너도 며칠 동안 정상은 아니었지. 사실 이해할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사람 대하는 연륜이 부족하다고 생각...생각하긴 했지. 네가 지금껏 얽혔던 사람들은 거의 다 무림인들이잖아. 개중에서도 사파가 많았을 테고. 하 당주와 방 상서는 네가 평소에 대하던 유형이 아니라, 어떤 오해로 마음이 상하거나 분쟁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여겼어."
이연화가 소탈하게 늘어놓은 말에, 적비성은 별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발생할 법했고, 대화 초반에는 실제로 발생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적비성은 별달리 켕기는 구석이라곤 없는 마음으로 이연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어땠지?"
이연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적비성이 방금 전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적비성이 상대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달가운 것인지 아닌지 영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성이 나거나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 당주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어. 내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일이니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 본인뿐 아니라 방 상서의 입장도 있고 하니까 말이야."
적비성은 별 감흥 없이 그 말을 수용했다. 하효혜의 마음이 바뀌든 말든 결국은 방다병이 가장 신경 쓸 문제였으니, 자신이 크게 동요할 것도 없었다. 이연화가 뺨을 긁적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뭐...." 고민하듯 눈동자를 한 차례 굴린 이연화는, 이내 적비성을 향해 살짝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 팔이 자신을 가볍게 끌어안았을 때, 적비성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먼저 손을 뻗은 포옹이 조금 어색한 듯했지만, 이연화는 적비성의 등을 몇 차례 토닥이면서 중얼거렸다.
"뭐,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머쓱하지만 썩 긍정적인 평가에, 금원맹주의 입에서 피식 소리가 새었다. 닿은 살갗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체취에 이끌려, 적비성은 양팔을 들어 그 몸을 꽉 끌어안았다. 흉곽이 강하게 짓눌릴 정도의 힘이었다. 이연화는 잠시 숨을 멈추었으나 상대를 딱히 막거나 만류하지 않았다. 적비성이 눈을 내리깐 채 놀리듯 읊조렸다. 품에 뿌듯이 차오른 존재감에, 며칠 동안 희미하게나마 계속되던 두통이 일순 흐려졌다.
"그냥 잘 대처했다고 말해도 될 것을."
"그렇게까지는 아냐, 꿈 깨. 너치고는 괜찮았단 거지."
이연화가 금세 타박하듯 이야기하며 등을 한 대 툭 쳤다.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그 몸은 여전히 적비성을 향해 기울어져 체중을 나누고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해." 금원맹주가 웃음기 묻은 소리로 받았다. 맞닿은 뺨과 목덜미를 슬쩍 비비며, 적비성은 자신이 이연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때'를 잘 넘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세 사람은 하효혜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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