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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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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한결 단정해진 백기가 쭈뼛쭈뼛 거실로 나왔다. 머리는 말리지도 않은 건지 한껏 젖은 채 눈까지 길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아까보다는 검어진 백기의 오른쪽 눈동자가 살짝 살짝 드러났다.

"감기걸렸다면서요. 머리도 안말리고."

션웨이는 성큼성큼 백기에게 다가가 어깨에 대충 늘어트린 수건을 집어 들어 백기의 머리를 감쌌다. 갑작스러운 션웨이의 행동에 놀라 우물쭈물하는 백기를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힌 션웨이가 백기의 머리를 수건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가만히 둬도 금방 말라요."

"드라이기로 말리고 나왔어도 금방이었겠죠."

션웨이의 손에서 수건을 뺏으려던 백기는 션웨이의 단호한 목소리에 손을 내리고서도 어색함에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손끝으로 제 무릎을 두드렸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헤어샵 같은 곳을 안가본 것도 아니었으나, 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손의 주인이 션웨이라고 생각하니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어서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이 들었다. 차라리 귀찮더라도 욕실 찬장 어딘가 있을 드라이기를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션웨이가 머리를 문지르던 수건 끝으로 백기의 젖은 귓바퀴를 문질렀다. 부드러운 천이 귓바퀴를 따라 내려오자 더이상 참지 못한 백기가 마치 번개에 맞은 사람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마...말리고 올께요. 말리면 되잖아요!"

션웨이는 고장난 로봇처럼 제 집인데도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시 욕실로 사라지는 백기의 뒷모습을 보다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사람사는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별 것 없는 냉장고에서 그나마 쌀과 매실장아찌를 찾아낸 션웨이는 머리를 말리고 나온 백기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죽을 놓아주었다. 죽을 끓이는 동안 방에도 들렸다 온건지 집 안에서 어울리지 않게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백기에게 질문을 하려던 션웨이는 백기의 오른손이 책상 위의 젓가락을 한 번에 잡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걸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아침부터 저희 집에 무슨일입니까?"

"벌써 점심시간이니 아침부터는 아니죠."

션웨이의 말에 놀란 듯 백기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벌써 1시가 되어가는 시간인 것을 확인한 백기가 떨떠름하게 다시 물었다.

"그럼 점심부터 저희 집에 무슨 일로..."

"언제든지 오라고 한 건 백기씨입니다만?"

"그...랬죠?"

백기는 죽을 한 술 떠 호호 식히고 한 입 크게 먹으며 맛있다는 감탄을 터트리면서도 션웨이에게 납득할만한 답을 달라는 듯 집요하게 쳐다봤다. 션웨이는 한숨을 후 내쉬고 말했다.

"제 동생을 편하게 보내주고 싶어요."

"동생이요?"

진지한 션웨이의 모습에 숟가락을 내려놓으려는 백기에게 션웨이가 계속 먹으라는 듯 손짓했다.

"어렸을 때 죽은 쌍둥이 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 동생 야존이 영물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어렸을 때는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외로워서 죽은 동생을 상상하는 거라고 생각했죠. 상상속의 동생과 이야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은 더 오래 제 곁에 있었고, 나중에는 만질수도 있게 되더군요. 주변의 다른 사람은 동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요."

"동생분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심한듯 툭 던진 백기의 날카로운 질문에 션웨이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전 동생을 이해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저와 제 동생을 방치했습니다. 집에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고, 먹을 것도, 돈도 없었죠. 너무 어려서 저나 동생이나 집 밖에 나가 도움을 구했어야한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집에 있던 어느 추운 날 아마 저희 둘 다 열이 났었나봅니다. 집은 항상 눅눅하고 추웠으니까 무슨 병이든 걸려서 이상할 것도 없었죠."

담담한 션웨이의 말에 백기가 식탁 아래로 내린 손을 꽉 쥐었다. 백기의 눈빛도 흉흉하게 바뀌었지만 선글라스를 낀 덕에 션웨이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원래도 동생이 더 약한 편이었습니다. 열에 올라 잠들다 깨다를 반복했는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전 운이 좋았지만 야존은..."

"그럼 동생분이..."

백기는 말을 끝내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살해당한 피해자가 영물이 되었을 때 악귀로 변한 영물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살인자에게 복수하는 거였다. 처음 영물이 된 어린 야존은 힘이 없었겠지만 션웨이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면 그가 했을 일은 뻔했다.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차량의 브레이크가 고장나 있었지만 원래 그런 걸 점검하거나, 신경쓰는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영물이 된 동생분이 곁에 남아있었다고 했죠? 동생분이 죽고 나서 부모님들은 좀 바뀌었습니까? 죽은 동생분한테 죄스러워하고, 반성하고, 교수님한테 잘해주던가요?"

비꼬는 것 같기도,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한 백기의 말 앞에서 션웨이는 입을 다물었다. 션웨이의 태도가 충분한 대답이 되어서 백기는 하!하고 탄식했다.

"야존이 부모님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당연한 거였습니다. 야존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야존이 미워하는 건 당연했죠."

변명하는 듯 덧붙이는 션웨이의 말을 끊고 백기가 물었다.

"제가 교수님이랑 있는 동안 동생분을 본 적은 없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야존은..."

생각이 많아진 듯 션웨이가 손으로 제 안경을 매만졌다. 션웨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백기는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동생분이 교수님을 만질 수도 있었다고 하셨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일 수 없는데 물리력은 행사할 수 있었다면 동생분의 집념은 복수가 아니라 교수님이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곁에 있는 걸로 만족했겠지만 점차 교수님과 친한 다른 사람들을 견딜 수 없어했겠죠."

"저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겼지만 야존 옆에는 저뿐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외로워했을 것이고, 누구라도 화가 났을 겁니다. 제가 더 잘 챙겨줬어야하는데..."

"산 사람은 산 사람이죠. 죽은 사람이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선글라스를 벗은 백기가 션웨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죽은사람이 산 사람을 해쳐서도 안되고요."

어느새 검은색으로 돌아온 백기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션웨이가 입을 열었다.

"해치지 못하게 할겁니다. 편히 쉴 수 있게 보내줄 거예요. 그러니까 백기씨가 도와주세요."

보이지도 않으면서 쿤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에도, 지금도, 먼 옛날 제게 도와달라 했을 때처럼 간절함을 담은 꼿꼿하고 맑은 눈동자가 백기를 옭아맸다. 백기는 그 앞에 무릎꿇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렇게 쳐다보시면...제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백기는 잠에서 막 깼을 때처럼 아련한 표정으로 졌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백기는 션웨이가 볼 수 없는 먼 곳의 기억을 더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션웨이는 백기가 본인을 탓하며 자조적으로 웃는듯한 모습이 싫었다.

션웨이는 다짐했다. 야존을 보내주고 나면, 반드시 백기의 집념도 풀어주겠다고.

그런 후에는 정말로 혼자 남겠지만...

생각만으로도 가슴에 구멍이 나는 것처럼 마음이 시렸지만 션웨이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룡백 만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