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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 17:00
전편
https://hygall.com/index.php?mid=china&page=2&document_srl=588626628
꿈이다.
백기는 제 눈 앞에 서있는 사람이 션웨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촉촉해진 눈빛으로 제게 애원하는 그 얼굴 앞에서 백기는 피묻은 검을 들고 수많은 목숨을 해치고서도 여린 제 주군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를 원망합니까?"
영직이 무슨 대답을 할지 뻔히 알면서. 백기는 비겁한 제 모습을 조소했다.
"아니. 내가 장군을 왜?"
엣된 얼굴로 말갛게 저를 바라보는 영직의 앞에서 백기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영직의 시선을 피했다.
"당신을 증명해보이라고 했으면서, 지켜주지 않았으니까. 제 잇속만 채우는 권세가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생활을 하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 버려두고 떠났으니까. 당신에게 아무 힘이 없는데도 성군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영직이 죽고 나서야 백기는 제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당신을 진작에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나라며, 백성이며 그런 책임 같은 거 지워주는 게 아니였어. 굶기지는 않을테니 같이 떠나자고, 당신을 황좌에서 끌어내려 깊은 산 속에 숨었어야했어."
스르르 바닥에 무릎꿇은 백기가 두 손으로 영직의 손을 당겨 제 이마에 가져갔다. 영직의 서늘한 손등이 백기의 머리를 차게 식혔다. 산 자의 온기라고는 없는 냉기에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당신이 날 원망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용서를 빌 수 있을테니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백기는 눈을 감았다. 꿈에서조차 영직은 절 원망하는 법이 없었고, 그런 영직의 앞에서 백기는 다시 그 날로 돌아갔다. 저 멀리 성 안에서 영직이 죽어간다는 걸 알았지만 둔탁한 적의 무기가 백기의 머리를 내리쳤고, 허공을 가르며 날라온 화살이 백기의 어깨에 박혔다. 이를 악물고 검을 든 팔을 치켜올려 적의 목을 베었지만 그 뒤의 다른 적이 백기를 밀쳐 땅에 넘어트렸다. 고통스러웠지만 백기는 근육을 조여 땅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션웨이는 오전 강의가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백기의 집을 찾아갔다. 한 번도 제 연락을 무시한 적이 없었던 백기가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언제든 제 집을 찾아와도 좋다며,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던 백기였다. 당시에는 남의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무례한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벨을 세 번이나 울릴 동안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이 초조해진 션웨이는 기억속의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아리의 말로는 가벼운 감기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백기씨? 저 션웨이입니다. 아프시다고 들어서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션웨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백기씨?"
션웨이는 제 목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집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제 막 독립한 사람의 집처럼 백기의 집에는 짐이 많지 않았다. 한 쪽 벽에는 TV가 있었지만 전원이 빠져 있었고, 반대편 벽쪽에 놓여있는 고동색의 소파는 만들어진 지 오래된 듯 색이 바래 있었지만 사람이 오래 앉아 내려앉은 흔적 없이 탄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션웨이 역시 제 집을 단정하게 정리해두는 편이었지만 손 때 묻은 가구는 반질거렸고, 나무로 되어 있는 바닥은 생활 기스로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백기의 집은 마치 모델하우스를 보는 것처럼 생활감이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문 션웨이는 침실로 추측되는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본 방 안은 태양이 가장 밝게 빛나는 한낮이었고, 큰 창이 있었음에도 어째서인지 어둑한 느낌을 풍겼다. 장난기 많고 여유롭던 백기와 다른 방의 분위기에 인상을 찌뿌렸던 션웨이는 곧 방 한 쪽의 침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백기씨!"
얇은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있는 백기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션웨이는 다급히 침대로 다가가 백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백기씨 일어나요."
어찌나 몸에 힘을 줬는지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있었음에도 백기는 온 몸이 꽁꽁 묶여 있는 사람처럼 조금씩 꿈틀거릴 뿐이었다.
"백기씨! 무슨 꿈을 꾸는 건지는 몰라도 일어나요!"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같은 백기의 모습에 션웨이가 식은땀으로 미끌거리는 백기의 목덜미를 잡아 고정하려던 순간 백기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백기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안심할 틈도 없이 백기의 흐릿한 오른쪽 눈과 마주친 션웨이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악귀가 되어가던 충혈된 쿤의 눈과는 달랐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색을 한 백기의 눈도 사람의 것 같지는 않았다. 션웨이는 쿤이 사라진 직후 백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했다. 네가 잘 달랜 덕분에 저 바보같은 놈도 곱게 승천했어. 악귀로 변해 강제로 소멸당했다면..."
달래듯 귀에게 말하던 백기가 말을 멈췄다. 션웨이는 참지 못하고 백기에게 물었다.
"영물은 어쩌다 악귀가 되는 겁니까?"
"죽은 자는 저승에 가는게 순리죠. 영물이나 악귀나 순리를 어긴 건 마찬가지인데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어요?"
"이승에 남아있는 영물은 결국 악귀가 되는 겁니까? 쿤 씨는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악귀로 변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건가요?"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 충동적이죠. 자신이 무슨 집념으로 영물이 된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죽은 자로 분수를 잊지 않는 건 수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 땐 묻지 않았지만 션웨이는 지금 절실히 느꼈다. 백기 역시 집념을 놓지 못해 이승에 남은 영물이었다.
션웨이는 손을 들어 백기의 흐릿한 오른쪽 눈가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멍했던 백기의 왼쪽눈에 점차 초점이 잡히며 션웨이의 팔과 어깨를 따라움직이다가 션웨이의 얼굴을 동공에 담았다.
"아..."
신음하며 괴로운듯 눈을 감은 백기가 오른손을 들어올려 제 눈가를 문지르는 션웨이의 손목을 붙잡아 멈췄다.
"... 땀을 많이 흘렸더니 찝찝한데... 거실에서 좀 기다려주시죠?"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어낸 백기의 입가가 잘게 떨리고 있어서 션웨이는 그런 백기를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백기의 손길이 너무도 간절한듯 해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션웨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나서기 전 뒤돌아본 션웨이는 어둑한 방의 침대 위에서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숙인 채 잘게 어깨를 떨고 있는 백기를 보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당신의 집념의 대상이 누구든 그 사람도 백기씨가 행복해지기를 바랄겁니다.'
차마 입 밖으로 소리내어 하지 못한 말을 삼킨 채 백기에게서 등을 돌린 션웨이는 백기의 방을 뒤로 하고 한 걸음 크게 내딛었다.
룡백 만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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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다.
백기는 제 눈 앞에 서있는 사람이 션웨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촉촉해진 눈빛으로 제게 애원하는 그 얼굴 앞에서 백기는 피묻은 검을 들고 수많은 목숨을 해치고서도 여린 제 주군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를 원망합니까?"
영직이 무슨 대답을 할지 뻔히 알면서. 백기는 비겁한 제 모습을 조소했다.
"아니. 내가 장군을 왜?"
엣된 얼굴로 말갛게 저를 바라보는 영직의 앞에서 백기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영직의 시선을 피했다.
"당신을 증명해보이라고 했으면서, 지켜주지 않았으니까. 제 잇속만 채우는 권세가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생활을 하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 버려두고 떠났으니까. 당신에게 아무 힘이 없는데도 성군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영직이 죽고 나서야 백기는 제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당신을 진작에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나라며, 백성이며 그런 책임 같은 거 지워주는 게 아니였어. 굶기지는 않을테니 같이 떠나자고, 당신을 황좌에서 끌어내려 깊은 산 속에 숨었어야했어."
스르르 바닥에 무릎꿇은 백기가 두 손으로 영직의 손을 당겨 제 이마에 가져갔다. 영직의 서늘한 손등이 백기의 머리를 차게 식혔다. 산 자의 온기라고는 없는 냉기에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당신이 날 원망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용서를 빌 수 있을테니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백기는 눈을 감았다. 꿈에서조차 영직은 절 원망하는 법이 없었고, 그런 영직의 앞에서 백기는 다시 그 날로 돌아갔다. 저 멀리 성 안에서 영직이 죽어간다는 걸 알았지만 둔탁한 적의 무기가 백기의 머리를 내리쳤고, 허공을 가르며 날라온 화살이 백기의 어깨에 박혔다. 이를 악물고 검을 든 팔을 치켜올려 적의 목을 베었지만 그 뒤의 다른 적이 백기를 밀쳐 땅에 넘어트렸다. 고통스러웠지만 백기는 근육을 조여 땅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션웨이는 오전 강의가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백기의 집을 찾아갔다. 한 번도 제 연락을 무시한 적이 없었던 백기가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언제든 제 집을 찾아와도 좋다며,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던 백기였다. 당시에는 남의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무례한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벨을 세 번이나 울릴 동안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이 초조해진 션웨이는 기억속의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아리의 말로는 가벼운 감기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백기씨? 저 션웨이입니다. 아프시다고 들어서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션웨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백기씨?"
션웨이는 제 목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집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제 막 독립한 사람의 집처럼 백기의 집에는 짐이 많지 않았다. 한 쪽 벽에는 TV가 있었지만 전원이 빠져 있었고, 반대편 벽쪽에 놓여있는 고동색의 소파는 만들어진 지 오래된 듯 색이 바래 있었지만 사람이 오래 앉아 내려앉은 흔적 없이 탄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션웨이 역시 제 집을 단정하게 정리해두는 편이었지만 손 때 묻은 가구는 반질거렸고, 나무로 되어 있는 바닥은 생활 기스로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백기의 집은 마치 모델하우스를 보는 것처럼 생활감이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문 션웨이는 침실로 추측되는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본 방 안은 태양이 가장 밝게 빛나는 한낮이었고, 큰 창이 있었음에도 어째서인지 어둑한 느낌을 풍겼다. 장난기 많고 여유롭던 백기와 다른 방의 분위기에 인상을 찌뿌렸던 션웨이는 곧 방 한 쪽의 침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백기씨!"
얇은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있는 백기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션웨이는 다급히 침대로 다가가 백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백기씨 일어나요."
어찌나 몸에 힘을 줬는지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있었음에도 백기는 온 몸이 꽁꽁 묶여 있는 사람처럼 조금씩 꿈틀거릴 뿐이었다.
"백기씨! 무슨 꿈을 꾸는 건지는 몰라도 일어나요!"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같은 백기의 모습에 션웨이가 식은땀으로 미끌거리는 백기의 목덜미를 잡아 고정하려던 순간 백기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백기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안심할 틈도 없이 백기의 흐릿한 오른쪽 눈과 마주친 션웨이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악귀가 되어가던 충혈된 쿤의 눈과는 달랐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색을 한 백기의 눈도 사람의 것 같지는 않았다. 션웨이는 쿤이 사라진 직후 백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했다. 네가 잘 달랜 덕분에 저 바보같은 놈도 곱게 승천했어. 악귀로 변해 강제로 소멸당했다면..."
달래듯 귀에게 말하던 백기가 말을 멈췄다. 션웨이는 참지 못하고 백기에게 물었다.
"영물은 어쩌다 악귀가 되는 겁니까?"
"죽은 자는 저승에 가는게 순리죠. 영물이나 악귀나 순리를 어긴 건 마찬가지인데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어요?"
"이승에 남아있는 영물은 결국 악귀가 되는 겁니까? 쿤 씨는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악귀로 변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건가요?"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 충동적이죠. 자신이 무슨 집념으로 영물이 된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죽은 자로 분수를 잊지 않는 건 수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 땐 묻지 않았지만 션웨이는 지금 절실히 느꼈다. 백기 역시 집념을 놓지 못해 이승에 남은 영물이었다.
션웨이는 손을 들어 백기의 흐릿한 오른쪽 눈가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멍했던 백기의 왼쪽눈에 점차 초점이 잡히며 션웨이의 팔과 어깨를 따라움직이다가 션웨이의 얼굴을 동공에 담았다.
"아..."
신음하며 괴로운듯 눈을 감은 백기가 오른손을 들어올려 제 눈가를 문지르는 션웨이의 손목을 붙잡아 멈췄다.
"... 땀을 많이 흘렸더니 찝찝한데... 거실에서 좀 기다려주시죠?"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어낸 백기의 입가가 잘게 떨리고 있어서 션웨이는 그런 백기를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백기의 손길이 너무도 간절한듯 해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션웨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나서기 전 뒤돌아본 션웨이는 어둑한 방의 침대 위에서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숙인 채 잘게 어깨를 떨고 있는 백기를 보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당신의 집념의 대상이 누구든 그 사람도 백기씨가 행복해지기를 바랄겁니다.'
차마 입 밖으로 소리내어 하지 못한 말을 삼킨 채 백기에게서 등을 돌린 션웨이는 백기의 방을 뒤로 하고 한 걸음 크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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