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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3 14:10
전편인 본편
https://hygall.com/464817281
전편인 외전
https://hygall.com/465266939
한참만에야 백기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션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집어들고 백기에게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백기는 션웨이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고 몸을 움찔했다가 조금 다급하게 오른손으로 션웨이가 내민 휴지를 받아들었다.
실례했다며 화장실의 위치를 묻던 백기는 션웨이가 다시 물을 데워 차를 내린 후에야 여전히 붉은 눈가와 코는 그대로였지만 조금은 멀쩡한 얼굴로 사무실에 다시 나타났다.
백기가 차를 마실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던 션웨이가 자세한 사정을 묻는 대신 원래의 용건을 꺼냈다.
"영물에 대해 연구하고 싶습니다."
"어째서요?"
션웨이는 탁자 위의 빈 종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다 간결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학구적 호기심 때문입니다. 영물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백기는 션웨이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알고 나면요?"
"글쎄요. 그건 영물에 대해 알아가다보면 판단이 서지 않을까요?"
백기는 션웨이의 맑고 뚜렷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무릇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과 같았다. 환생한 영직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걱정해왔던 것이 무색하게도 백기는 션웨이의 눈을 보고 그가 영직의 환생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저를 향한 션웨이의 눈빛이 처음 본 제게 도와달라던 영직의 것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설사 션웨이가 영직과 관련이 없었더라도 백기는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거였다.
"...알겠습니다. 교수님께 협조하죠."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이 기쁜지 션웨이가 살며시 웃는 모습에 백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제야 백기는 눈 앞의 사내가 최소한 신체나이로는 자신보다도 연상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젖살이라고는 없는 성숙한 외모로 아이같이 순수하게 웃는 션웨이의 모습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백기는 제가 사무실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뒤늦게 너무 횡설수설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션웨이가 백기를 비정기적으로 찾아온지도 벌써 보름 째였다. 영물로 시작된 인터뷰는 주변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서의 저녁이나, 맑은 햇살 아래 산책으로 이어지곤 했고, 백기는 그것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교수님. 그러지 말고 한 번 먹어봐요. 보기보다 괜찮다니까요?"
백기는 휘핑크림이 듬뿍 얹어진 달디단 아이스 초코를 션웨이의 앞에 내밀었다. 백기도 이 정도로 단 음식을 자주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션웨이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보니 션웨이가 있을 때면 더 과하게 단 음료를 찾게 되어 버렸다.
"괜찮습니다."
"진짜요? 진짜 안 먹어볼 거예요? 쯧쯧 인생에 낙을 하나 잃으셨네 잃으셨어."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던 백기가 장난을 멈추고 음료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백기 선생님?"
목덜미까치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한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저도 모르게 백기의 목젖이 오르내리는 걸 멍하니 보던 션웨이는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앞에 놓인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백기는 션웨이의 어색한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채로 저를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왕교수님께 대충 설명은 들었는데.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구요?"
백기가 본격적으로 상담에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션웨이는 애써 헛기침으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공책과 펜을 꺼내 의뢰인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이랬다. 찾아온 학생의 이름은 귀였는데, 언제인가부터 월급을 떼먹은 가게 사장의 차가 떨어진 간판에 맞아 부서진다던가, 귀를 은근히 따돌리던 무리들이 다 같이 식중독에 걸려 입원한다던가, 학생식당에서 귀와 부딪힌 학생이 자전거와 부딪혀 넘어진다던가, 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다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이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묻는 백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우연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이게 우연 같지 않아요. 만약에 우연이 아니라..."
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고, 백기는 그런 귀 대신 조금 더 먼 곳에 시선을 가져가 굵은 나무 기둥 옆에 서있는 희미한 형체를 쳐다봤다.
"영물은... 강한 집념 없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게 누군지 알죠?"
백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션웨이의 눈에는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가지만 보였기에 백기가 뭘 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귀의 말에 집중했다.
"만약에 쿤이라면. 다 제가 걱정되어서 그런걸 거예요. 제가 몸이 좀 약해서... 쿤이 항상 걱정했었거든요. 그러지 말랬는데도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더 해가면서 제 학비까지 대주고, 저는 공부만 하라고하는 그런 애였어요. 제 유일한 가족이었는데...일하던 공장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촉촉히 젖어들어간 목소리로 귀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화학약품이 새서... 공장 직원들이 다 병원에 실려갔는데... 쿤은 마지막까지 제 걱정만했어요. 사람도 많이 만나고, 활발하게 잘 지내라고 그랬는데."
"마지막까지 무거운 짐을 안겨주더니, 정작 떠나지도 않고 당신을 또 괴롭히는 군요. 저 어리석은 영물은."
션웨이는 처음보는 냉소적인 백기의 반응에 놀라 끄적이던 메모에서 고개를 들고 백기를 쳐다봤다.
"괴롭힌 건 아니에요! 그냥 전... 쿤이 저 때문에 사람을 해치면 안되니까...!"
"그렇게 걱정이 되었다면 죽지 말고 당신 곁에 있었어야죠. 이제와서 당신 곁을 멤돌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게 괴롭히는 게 아니면 뭡니까?"
그게 아니라며 소리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귀는 제가 일으킨 작은 소란에도 귀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백기를 그제야 발견하고 빠르게 뒤로 돌았다.
"...쿤?"
션웨이처럼 귀의 눈에도 한 그루의 나무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귀는 무언가를 느낀 사람처럼 나무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쿤 너야?"
급하지 않게 몸을 일으킨 백기는 이내 놓아두었던 검정 우산을 집어 들고 귀의 앞을 막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이미 작별인사를 했고요. 저 자는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뇨. 아직 못했어요. 작별인사라는 거 충분히 했을리가 없잖아요."
귀는 백기의 우산을 밀치고 앞으로 가려고 애썼지만 공부만하던 학생이 밀어내기에 영물인 백기는 너무도 단단하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두 사람의 실랑이가 길어지자 백기와 귀의 주변으로 공기가 일렁이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션웨이는 바람에 부딪혀 거칠게 넘겨지는 공책을 꽉 닫아 쥐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씨!"
"살아서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딜...!"
백기의 미간이 좁아지며 우산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백기는 귀를 막고 있던 우산을 검처럼 휘둘러 허공을 갈랐다. 귀와 션웨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백기의 시선이 오른쪽 바닥을 향한 걸 보면 백기가 휘두른 우산에 쿤이 맞은 것 같았다. 주변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멎었다.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이제야 곁에 있어주려는 것이라면 너무 늦지 않았느냐."
백기가 쥔 우산의 끝이 바닥을 향했다. 션웨이는 방금전까지 제게 단 것을 먹어보라며 장난치던 백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냉소적인 백기의 모습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멈춰요!"
션웨이는 저도 모르게 백기의 우산 끝이 향한 곳으로 넘어지듯 몸을 날렸다. 바닥을 기는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백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션웨이의 단정한 양복바지가 흙먼지로 더럽혀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뿌렸다.
"교수님, 뭐하는 짓이죠? 분명히 말했을텐데요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만 허락한다고요."
"네, 압니다. 하지만 이건..."
션웨이는 제 손 끝에 닿은 차가움에 놀랄 새도 없이 갑자기 몰려오는 이미지들에 하려던 말을 채 내뱉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두컴컴한 방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던 어린 귀. 그런 귀에게 날씨가 좋으니 바람쐬러 가자며 꼬시는 목소리. 학교 동호회 가입희망서에 서명을 하며 잘했냐는 듯 저를 쳐다보던 귀의 얼굴과, 그런 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 단칸방에 단촐한 짐을 옮겨 넣으면서도 좋다는 듯 해맑게 웃는 이제 다 커버린 귀와, 늦은 밤 전공서적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귀의 옆얼굴... 그리고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일그러진 귀의 얼굴.
'나 없다고 혼자만 있지말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나중에 대학 졸업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도 낳고...'
'싫어, 난 쿤 너만 있으면 돼. 너만 있으면 된다고!'
애원하는 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아직은 물속에 잠겨 바깥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멍하게, 션웨이는 고개를 들어 어렴풋하게 보이는 백기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감히. 누굴 건드려?"
허공을 쥔 백기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말했다.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절반쯤 악귀가 되었으니, 남겠다고 고집을 피워봤자 저 아이까지 해치고 말겠지. 그러기 전에 순순히 사라져라."
"잠깐만요."
누군가의 목을 옥죄듯 핏줄을 세워가며 움켜쥐는 백기의 손등을 션웨이가 매달리듯 붙잡았다.
"백기씨 잠시만요."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
"쿤은 그냥 귀가 잘 살기를 바랐던 것 뿐이에요. 혹시 다시 혼자 어둠 속에 외롭게 있을까봐 그게 걱정되어서 가지 못한 겁니다."
백기는 션웨이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죽은 자가 옆에 있는 게 무슨 도움이 되지? 저 아이가 홀로 남는게 두려웠다면 죽지 말았어야지."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잖아요! 쿤은 그냥 귀가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매달 월급을 받기를 바랐던 것 뿐이에요. 그냥 귀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그게 저 아이가 바랐던 게 맞아? 그냥 저 어리석은 놈의 욕심이었던 거 아니고?"
백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었다.
"저 아이는 그냥 조용히 있고 싶었던 거 아냐? 제 욕심대로 남의 인생을 휘둘러 놓고서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머저리의 착각인 거 아니냐고."
"아니예요!"
백기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던 귀가 간신히 짜낸 목소리로 소리쳤다.
"혼자 있었던 게 싫었던 건 아니지만...그래도 기뻤어요!"
귀의 목소리에 백기가 고개를 돌려 귀를 쳐다봤다. 귀는 백기의 시선에 움찔하고 몸을 떨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쿤이 같이 나가자고 해줘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용기를 내게 해줘서,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믿어줘서! 그래서 좋았다고요!"
백기는 아무말 없이 귀를 쳐다봤고, 션웨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기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죽은 쿤의 시간은 끝났지만 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귀에게 기회를 줘요."
다시 고개를 돌려 션웨이의 시선을 마주한 백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교수님이 바라신다면."
백기는 허공을 붙잡듯 웅크린 손을 펴지 않은채 팔을 뻗은 모습 그대로 귀에게 다가갔다. 션웨이는 백기가 뭘 하려는 지는 몰랐으나, 이제 쿤을 해치려하지는 않을 것을 알아서, 떨고 있는 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귀의 곁에 앉아 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낮춘 백기는 허공을 붙잡지 않은 손을 뻗어 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쿤!"
션웨이의 눈 앞에 백기에게 목덜미가 잡힌 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른쪽 눈은 충혈된 것처럼 붉게 핏줄이 보였고, 오른쪽 얼굴 역시 일그러져 얼굴의 절반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귀 역시 쿤이 보이는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울지마."
쿤이 귀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손을 뻗어 귀의 얼굴에 가져갔지만 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쿤의 손을 통과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네 모습을 잠시 보이게했을 뿐이야."
놀라 제 손을 쳐다보는 쿤을 보며 백기가 투덜거리듯 작게 설명했다.
"네가 죽었다는 건 바뀌지 않아."
백기의 말을 들은 귀가 백기와 백기의 손에 붙들린 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제 소매를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내고 언제 울었냐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 걱정할 필요 없어."
"귀야..."
"하루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먹을거고, 수업도 열심히 들을 거고. 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공모전에 같이 나갈 사람들도 모아볼거야. 그러면 과제며, 공모전 준비며 정신없이 바빠서 지금처럼 하루종일 널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귀의 말에도 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걱정스럽다는 듯 귀를 쳐다봤다.
"당분간은 연애할 여유도 없을 것 같지만, 이제 고작 대학생이잖아. 앞으로 어떤 인연이 생길지는 모르지. 십년 후에는 아이도 둘쯤 있을지도 몰라."
붉어진 눈을 곱게 휘며 귀는 빙긋 웃었다.
"...그래도 쿤은 내 첫사랑이니까. 평생 기억할께."
귀를 바라보는 쿤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아해. 좋아했어. 네가 나한테 해준 것들 절대 잊지 않을께. 네 몫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께.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작별인사 하는 거야."
귀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지만 귀는 울먹이는 대신 좀 더 크게 미소지었다.
"잘가 쿤아. 그동안 고마웠어."
그런 귀를 가만히 쳐다보던 쿤의 오른쪽 얼굴에서 검은 오로라가 스며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언제 괴상한 몰골이었냐는 듯 조금 창백하지만 준수한 외모가 된 쿤이 귀를 따라 빙긋 웃었다.
"그래 넌 잘할 거야. 나도 그동안 고마웠어. 너와 함께라서 행복했어."
쿤이 팔을 벌리자 귀가 포옹하듯 쿤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귀를 감싸안던 쿤의 손이 흩어지며 노란 빛으로 빛났다.
션웨이는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을 애써 묻어두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 귀의 등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만년비 룡백 영직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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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만에야 백기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션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집어들고 백기에게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백기는 션웨이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고 몸을 움찔했다가 조금 다급하게 오른손으로 션웨이가 내민 휴지를 받아들었다.
실례했다며 화장실의 위치를 묻던 백기는 션웨이가 다시 물을 데워 차를 내린 후에야 여전히 붉은 눈가와 코는 그대로였지만 조금은 멀쩡한 얼굴로 사무실에 다시 나타났다.
백기가 차를 마실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던 션웨이가 자세한 사정을 묻는 대신 원래의 용건을 꺼냈다.
"영물에 대해 연구하고 싶습니다."
"어째서요?"
션웨이는 탁자 위의 빈 종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다 간결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학구적 호기심 때문입니다. 영물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백기는 션웨이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알고 나면요?"
"글쎄요. 그건 영물에 대해 알아가다보면 판단이 서지 않을까요?"
백기는 션웨이의 맑고 뚜렷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무릇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과 같았다. 환생한 영직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걱정해왔던 것이 무색하게도 백기는 션웨이의 눈을 보고 그가 영직의 환생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저를 향한 션웨이의 눈빛이 처음 본 제게 도와달라던 영직의 것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설사 션웨이가 영직과 관련이 없었더라도 백기는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거였다.
"...알겠습니다. 교수님께 협조하죠."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이 기쁜지 션웨이가 살며시 웃는 모습에 백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제야 백기는 눈 앞의 사내가 최소한 신체나이로는 자신보다도 연상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젖살이라고는 없는 성숙한 외모로 아이같이 순수하게 웃는 션웨이의 모습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백기는 제가 사무실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뒤늦게 너무 횡설수설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션웨이가 백기를 비정기적으로 찾아온지도 벌써 보름 째였다. 영물로 시작된 인터뷰는 주변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서의 저녁이나, 맑은 햇살 아래 산책으로 이어지곤 했고, 백기는 그것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교수님. 그러지 말고 한 번 먹어봐요. 보기보다 괜찮다니까요?"
백기는 휘핑크림이 듬뿍 얹어진 달디단 아이스 초코를 션웨이의 앞에 내밀었다. 백기도 이 정도로 단 음식을 자주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션웨이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보니 션웨이가 있을 때면 더 과하게 단 음료를 찾게 되어 버렸다.
"괜찮습니다."
"진짜요? 진짜 안 먹어볼 거예요? 쯧쯧 인생에 낙을 하나 잃으셨네 잃으셨어."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던 백기가 장난을 멈추고 음료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백기 선생님?"
목덜미까치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한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저도 모르게 백기의 목젖이 오르내리는 걸 멍하니 보던 션웨이는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앞에 놓인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백기는 션웨이의 어색한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채로 저를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왕교수님께 대충 설명은 들었는데.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구요?"
백기가 본격적으로 상담에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션웨이는 애써 헛기침으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공책과 펜을 꺼내 의뢰인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이랬다. 찾아온 학생의 이름은 귀였는데, 언제인가부터 월급을 떼먹은 가게 사장의 차가 떨어진 간판에 맞아 부서진다던가, 귀를 은근히 따돌리던 무리들이 다 같이 식중독에 걸려 입원한다던가, 학생식당에서 귀와 부딪힌 학생이 자전거와 부딪혀 넘어진다던가, 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다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이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묻는 백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우연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이게 우연 같지 않아요. 만약에 우연이 아니라..."
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고, 백기는 그런 귀 대신 조금 더 먼 곳에 시선을 가져가 굵은 나무 기둥 옆에 서있는 희미한 형체를 쳐다봤다.
"영물은... 강한 집념 없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게 누군지 알죠?"
백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션웨이의 눈에는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가지만 보였기에 백기가 뭘 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귀의 말에 집중했다.
"만약에 쿤이라면. 다 제가 걱정되어서 그런걸 거예요. 제가 몸이 좀 약해서... 쿤이 항상 걱정했었거든요. 그러지 말랬는데도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더 해가면서 제 학비까지 대주고, 저는 공부만 하라고하는 그런 애였어요. 제 유일한 가족이었는데...일하던 공장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촉촉히 젖어들어간 목소리로 귀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화학약품이 새서... 공장 직원들이 다 병원에 실려갔는데... 쿤은 마지막까지 제 걱정만했어요. 사람도 많이 만나고, 활발하게 잘 지내라고 그랬는데."
"마지막까지 무거운 짐을 안겨주더니, 정작 떠나지도 않고 당신을 또 괴롭히는 군요. 저 어리석은 영물은."
션웨이는 처음보는 냉소적인 백기의 반응에 놀라 끄적이던 메모에서 고개를 들고 백기를 쳐다봤다.
"괴롭힌 건 아니에요! 그냥 전... 쿤이 저 때문에 사람을 해치면 안되니까...!"
"그렇게 걱정이 되었다면 죽지 말고 당신 곁에 있었어야죠. 이제와서 당신 곁을 멤돌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게 괴롭히는 게 아니면 뭡니까?"
그게 아니라며 소리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귀는 제가 일으킨 작은 소란에도 귀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백기를 그제야 발견하고 빠르게 뒤로 돌았다.
"...쿤?"
션웨이처럼 귀의 눈에도 한 그루의 나무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귀는 무언가를 느낀 사람처럼 나무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쿤 너야?"
급하지 않게 몸을 일으킨 백기는 이내 놓아두었던 검정 우산을 집어 들고 귀의 앞을 막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이미 작별인사를 했고요. 저 자는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뇨. 아직 못했어요. 작별인사라는 거 충분히 했을리가 없잖아요."
귀는 백기의 우산을 밀치고 앞으로 가려고 애썼지만 공부만하던 학생이 밀어내기에 영물인 백기는 너무도 단단하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두 사람의 실랑이가 길어지자 백기와 귀의 주변으로 공기가 일렁이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션웨이는 바람에 부딪혀 거칠게 넘겨지는 공책을 꽉 닫아 쥐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씨!"
"살아서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딜...!"
백기의 미간이 좁아지며 우산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백기는 귀를 막고 있던 우산을 검처럼 휘둘러 허공을 갈랐다. 귀와 션웨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백기의 시선이 오른쪽 바닥을 향한 걸 보면 백기가 휘두른 우산에 쿤이 맞은 것 같았다. 주변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멎었다.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이제야 곁에 있어주려는 것이라면 너무 늦지 않았느냐."
백기가 쥔 우산의 끝이 바닥을 향했다. 션웨이는 방금전까지 제게 단 것을 먹어보라며 장난치던 백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냉소적인 백기의 모습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멈춰요!"
션웨이는 저도 모르게 백기의 우산 끝이 향한 곳으로 넘어지듯 몸을 날렸다. 바닥을 기는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백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션웨이의 단정한 양복바지가 흙먼지로 더럽혀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뿌렸다.
"교수님, 뭐하는 짓이죠? 분명히 말했을텐데요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만 허락한다고요."
"네, 압니다. 하지만 이건..."
션웨이는 제 손 끝에 닿은 차가움에 놀랄 새도 없이 갑자기 몰려오는 이미지들에 하려던 말을 채 내뱉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두컴컴한 방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던 어린 귀. 그런 귀에게 날씨가 좋으니 바람쐬러 가자며 꼬시는 목소리. 학교 동호회 가입희망서에 서명을 하며 잘했냐는 듯 저를 쳐다보던 귀의 얼굴과, 그런 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 단칸방에 단촐한 짐을 옮겨 넣으면서도 좋다는 듯 해맑게 웃는 이제 다 커버린 귀와, 늦은 밤 전공서적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귀의 옆얼굴... 그리고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일그러진 귀의 얼굴.
'나 없다고 혼자만 있지말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나중에 대학 졸업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도 낳고...'
'싫어, 난 쿤 너만 있으면 돼. 너만 있으면 된다고!'
애원하는 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아직은 물속에 잠겨 바깥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멍하게, 션웨이는 고개를 들어 어렴풋하게 보이는 백기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감히. 누굴 건드려?"
허공을 쥔 백기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말했다.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절반쯤 악귀가 되었으니, 남겠다고 고집을 피워봤자 저 아이까지 해치고 말겠지. 그러기 전에 순순히 사라져라."
"잠깐만요."
누군가의 목을 옥죄듯 핏줄을 세워가며 움켜쥐는 백기의 손등을 션웨이가 매달리듯 붙잡았다.
"백기씨 잠시만요."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
"쿤은 그냥 귀가 잘 살기를 바랐던 것 뿐이에요. 혹시 다시 혼자 어둠 속에 외롭게 있을까봐 그게 걱정되어서 가지 못한 겁니다."
백기는 션웨이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죽은 자가 옆에 있는 게 무슨 도움이 되지? 저 아이가 홀로 남는게 두려웠다면 죽지 말았어야지."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잖아요! 쿤은 그냥 귀가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매달 월급을 받기를 바랐던 것 뿐이에요. 그냥 귀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그게 저 아이가 바랐던 게 맞아? 그냥 저 어리석은 놈의 욕심이었던 거 아니고?"
백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었다.
"저 아이는 그냥 조용히 있고 싶었던 거 아냐? 제 욕심대로 남의 인생을 휘둘러 놓고서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머저리의 착각인 거 아니냐고."
"아니예요!"
백기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던 귀가 간신히 짜낸 목소리로 소리쳤다.
"혼자 있었던 게 싫었던 건 아니지만...그래도 기뻤어요!"
귀의 목소리에 백기가 고개를 돌려 귀를 쳐다봤다. 귀는 백기의 시선에 움찔하고 몸을 떨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쿤이 같이 나가자고 해줘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용기를 내게 해줘서,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믿어줘서! 그래서 좋았다고요!"
백기는 아무말 없이 귀를 쳐다봤고, 션웨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기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죽은 쿤의 시간은 끝났지만 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귀에게 기회를 줘요."
다시 고개를 돌려 션웨이의 시선을 마주한 백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교수님이 바라신다면."
백기는 허공을 붙잡듯 웅크린 손을 펴지 않은채 팔을 뻗은 모습 그대로 귀에게 다가갔다. 션웨이는 백기가 뭘 하려는 지는 몰랐으나, 이제 쿤을 해치려하지는 않을 것을 알아서, 떨고 있는 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귀의 곁에 앉아 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낮춘 백기는 허공을 붙잡지 않은 손을 뻗어 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쿤!"
션웨이의 눈 앞에 백기에게 목덜미가 잡힌 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른쪽 눈은 충혈된 것처럼 붉게 핏줄이 보였고, 오른쪽 얼굴 역시 일그러져 얼굴의 절반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귀 역시 쿤이 보이는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울지마."
쿤이 귀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손을 뻗어 귀의 얼굴에 가져갔지만 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쿤의 손을 통과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네 모습을 잠시 보이게했을 뿐이야."
놀라 제 손을 쳐다보는 쿤을 보며 백기가 투덜거리듯 작게 설명했다.
"네가 죽었다는 건 바뀌지 않아."
백기의 말을 들은 귀가 백기와 백기의 손에 붙들린 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제 소매를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내고 언제 울었냐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 걱정할 필요 없어."
"귀야..."
"하루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먹을거고, 수업도 열심히 들을 거고. 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공모전에 같이 나갈 사람들도 모아볼거야. 그러면 과제며, 공모전 준비며 정신없이 바빠서 지금처럼 하루종일 널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귀의 말에도 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걱정스럽다는 듯 귀를 쳐다봤다.
"당분간은 연애할 여유도 없을 것 같지만, 이제 고작 대학생이잖아. 앞으로 어떤 인연이 생길지는 모르지. 십년 후에는 아이도 둘쯤 있을지도 몰라."
붉어진 눈을 곱게 휘며 귀는 빙긋 웃었다.
"...그래도 쿤은 내 첫사랑이니까. 평생 기억할께."
귀를 바라보는 쿤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아해. 좋아했어. 네가 나한테 해준 것들 절대 잊지 않을께. 네 몫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께.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작별인사 하는 거야."
귀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지만 귀는 울먹이는 대신 좀 더 크게 미소지었다.
"잘가 쿤아. 그동안 고마웠어."
그런 귀를 가만히 쳐다보던 쿤의 오른쪽 얼굴에서 검은 오로라가 스며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언제 괴상한 몰골이었냐는 듯 조금 창백하지만 준수한 외모가 된 쿤이 귀를 따라 빙긋 웃었다.
"그래 넌 잘할 거야. 나도 그동안 고마웠어. 너와 함께라서 행복했어."
쿤이 팔을 벌리자 귀가 포옹하듯 쿤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귀를 감싸안던 쿤의 손이 흩어지며 노란 빛으로 빛났다.
션웨이는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을 애써 묻어두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 귀의 등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만년비 룡백 영직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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