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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9 23:33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무언가를 돌아보고 생각할 여유도 없을 만큼, 정말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적어도 이연화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타인의 눈에 수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이연화는 전력을 다해 뒷수습을 했다. 엉망이 된 몸은 씻어버리고, 더 엉망이 된 옷도 대충 빨아 내력으로 말려버리고-살면서 옷을 말리려고 내력을 운용해본 적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괜히 쭈뼛거리는 방다병의 등을 한 대 때린 다음, 기절한 여랑을 찾아 깨우니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몸이 가라앉을 만큼 피로하지는 않았으나, 설령 그렇다 해도 거처로 돌아가 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연화가 점혈해둔 자들은, 굳은 자세와 찬 밤공기로 인해 이미 대부분 기절해 있었다. 개중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문걸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중이었다. 네 사람은 잠시 고민하다, 곧 그들을 줄로 엮어 의방의 약재를 나르듯 운반했다. 방시문의 거처에 흉악범들을 가둬놓을 수는 없었기에, 일행은 관아를 찾아 상황을 설명했다. 포졸들은 매우 얼떨떨해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방다병이 꺼낸 형탐의 패와 세우단이 운반하던 보화 상자들, 불법적인 시장 및 약물에 대한 여러 권의 장부들을 확인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달려갔다. 잠들어 있을 상사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방다병이 상급 관리에게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사이, 이연화는 적비성과 함께 신가 저택에 들렀다. 도망쳤을지 모른다 염려했던 것과 다르게, 세우단의 말단 단원들은 사고문주의 명을 충실히 따라 가주를 감시하고 있었다. 뒤뜰의 참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 퍽 험한 풍경이 연출되던 참이었다. 신춘광을 비롯한 가족들이 멀찍이 서서 너희는 누구냐,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를 놓아달라 왁왁거렸다. 칼을 빼든 자도 있었으나, 널브러진 호위들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감히 달려든 이는 없었다. 이연화가 담벼락을 훌쩍 넘어 나타나자, 신춘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는...선화루의 예인이 아닌가! 여긴 갑자기 어떻게...얼굴에 흉터가 있다며...그보다, 방금 그 경공은...아니, 자네는 구 공자의 호위...?"
"문주, 명하신 바를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얼이 빠진 신춘광의 앞에서,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조아린 이마가 땅바닥에 닿을 듯했다. 그 뒤에 선 가주의 낯이 흙빛을 띠었다. 이연화가 짐짓 눈가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꼭 악인의 우두머리 같지 않습니까...신 공자, 묻고 싶은 일이 많으시겠지요? 부친께서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체면 때문에 예서 입을 열지 않으실 테니, 관아로 따라오시면 차차 자초지종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당신도 함께 가셔야 하거든요. 방 공자에게 저지른 일을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선화루에 들러 당신의 숙부도 데려갈 작정입니다. 아무리 세우단주님이라 해도, 나이 든 분을 언제까지 장롱에 가둬둘 수는 없으니까요. 벌을 받는 과정이 외롭지는 않겠습니다."
이연화가 얄밉게 건네자, 이미 바보 같았던 표정이 한층 멍해졌다. 신춘광이 멀거니 중얼거렸다. "숙부님...? 세우단주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연화가 피식 냉소했다. 친형인 가주에게도 숨기려 애를 쓴 마당에, 신우련이 조카와 그 사실을 공유했을 리 없었다. "뭘 기다리나." 짜증스레 중얼거린 적비성이, 신춘광에게 성큼 다가가 그 혈을 쿡 찍어버렸다. 넋 나간 얼굴 그대로 굳은 채, 신춘광은 아버지와 나란히 뒷덜미를 잡혀 끌려갔다.
관아에서 방다병과 이야기를 나누던 관리는, 신가의 거물들이 줄줄이 딸려오자 끝내 혼절할 것 같은 상태에 빠졌다. 과거에 비해 연륜이 쌓인 방다병은 두려워하는 공직자를 강단이 없다 매도하는 대신, 백천원과 감찰사가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할 테니 대인이 과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심시켰다. 한결 진정되었으나 여전히 불안에 떨던 관리는, 미리 전갈을 받은 석수와 양윤춘이 날듯이 도착했을 때 눈에 띄게 편안해져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세우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가를 비롯한 세가 사람들 중에는 조정에 관련된 자들도 있어 다소 복잡한 상황이 빚어졌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또한 양윤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백천원에 매우 협조적이었기에 일을 분담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해봤자, 방다병이 그들에게 지나칠 만큼 세세한 자초지종을 알려준 정도였다("문주가...뭘 하셨다고? 기루에서 검무를? 대체 어쩌다가...뭐라고? 문주가 술 시중을 드셨단 말이냐? 어떤 놈에게?"). 사고문주의 영패를 꺼냈던 일을 사과하고 앞으로 되도록 그러지 않겠노라 이야기하려 동석했던 이연화는, 오히려 엉뚱한 부분에서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연화가 진땀을 빼는 사이, 방다병은 뒤에서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연회 날과 전혀 다른 이유로, 여현은 다시 한 차례 뒤집어졌다. 여현에서 명성을 떨쳤던 기루와 몇 개의 세가가 동시에 휘말린 대사건이었다. 매일 화려한 불빛을 밝히고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던 선화루는, 처음으로 불이 꺼진 채 어두운 저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랑은 이연화가 만난 이후 가장 밝은 표정을 지은 채 일행을 환영했다. 두 개의 장부에 이름이 올랐던 탓으로, 아유를 죽게 만든 주 공자 역시 관아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약을 샀을 뿐 사용하지 않았다며 발뺌했으나, 방에서 빈 약함이 발견되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감찰사와 백천원이 함께하는 고압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을 터였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미련도 없이 여현을 떠날 수 있겠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여랑은 일행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설약을 비롯한 다른 무용수 몇도 함께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못다 한 마지막 춤을 저자에서 선보인 다음, 바로 행낭을 챙겨 떠날 예정입니다. 사건으로 다망하시겠으나, 여력이 된다면 구경하러 오시지요." 설약이 한결 평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연화는 그날 꼭 자리하겠노라 약속하며 빙긋 웃었다.
암담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기분을 느낀 사람은 비단 무용수들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던 방시문은,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 방다병과 이연화에게 감사를 표했다. 방시문의 주름진 얼굴은 여전히 지치고 피로해 보였으나, 적어도 처음 만났던 날처럼 어둡고 침울한 인상을 풍기지는 않았다. 방운일 또한 아직 여위었지만, 사건이 해결되고 있다는 희망과 양주만 덕으로 한결 건강한 혈색을 띠고 있었다. 방시문은 방다병의 손을 좀처럼 놓지 못한 채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허리가 자꾸만 굽어졌다.
"정말 고맙다. 네가 우리 집안의 흉사뿐 아니라, 이 지역의 흉사를 막았구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님. 덕분에 저뿐 아니라, 양친의 심화도 덜 수 있게 되었어요."
"형탐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더러, 저 혼자서 해결한 것도 아닌걸요. 이연화를 비롯한 사람들의 공이 컸습니다."
방다병이 당숙의 팔을 잡아 허리를 펴도록 하며 건넸다. 방다병이 덧붙인 말을 듣자마자, 이연화는 얼른 방씨 집안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신을 향해 또 허리를 숙이지 않게끔 했다. 방시문의 반려, 채명홍이 눈가를 훔치며 읊조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셨다면, 저는 아마 견디지 못하고 살수들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방다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퍽 처연한 투였으나, 형탐의 직감은 그 말이 과장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짚어냈다. 방시문보다 불길 같은 성품으로 표국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하나뿐인 자식이 죽을 지경이라면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를 법했다.
끔찍한 범죄에서 비롯되었던 사건인지라 마냥 축하할 만한 상황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방시문은 손님과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좋은 음식이며 술을 내놓았다. 본래도 식사량이 썩 많지는 않았기에, 이연화는 주인의 면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먹고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거처로 돌아왔다. 당장 눕거나 앉을 기분이 들지 않아, 사고문주는 잠시 지붕에 올라 맨몸으로 상이태검의 초식을 펼쳤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연습했던 동작인데도, 오늘은 어쩐지 칼끝에 잡념이 섞여들었다. 타인이 본다면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숨겨진 마음이었으나, 가상의 검을 휘두르는 자신만은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한숨과 함께 손을 내리고, 이연화는 여현에 걸린 달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붕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마음이 어수선한 까닭이야 자명했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히 매듭지어야 할 사안이 남아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옮기다, 이연화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사람의 그림자가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예민한 감각으로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금방도 다녀왔네." 이연화가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짚었다. 이 시간에 자신의 방에서 두런거릴 사람들이야 정해져 있었다. 약마에게 비급을 전달하러 갔던 적비성이 돌아온 듯했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태연한 얼굴로 문을 열자, 마주앉아 무슨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 왔어? 어디서 뭐하다 온 거야?"
"몰랐나? 지붕을 디디는 기척이 났는데. 위에서 수련하던 거겠지."
적비성이 천장을 향해 턱짓하며 받았다. 방다병이 울컥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연히 알았지! 난 그냥, 왜 이 밤에 혼자 거기서 수련하고 있었냐고 물으려던 거야." 익숙한 다툼을 힐끔 보고, 이연화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와 침상 위에 앉았다. 찰싹 달라붙어 따라오는 시선들이 매우 신경 쓰였다. 길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그편을 바라보자, 방다병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적비성은 여전히 빤한 눈길을 보내 왔다. 이연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묻고 싶으면서도 묻고 싶지 않았다.
금원맹주는 곧 탁자를 짚으며 등을 바로 폈다. 여느 때와 별다를 것도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무슨 일인데?"
"각인을 유지하게 되면, 각자의 희락기는 어떻게 할 셈이지?"
적비성이 진지하게 물은 말에, 이연화는 그만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뱉었다. 방다병이 슷 소리를 내며 적비성의 팔을 한 대 때렸다. "그렇게 무턱대고 꺼내지 말랬잖아!"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언젠가는 의논했어야 할 일이야."
"아비. 내가 거기서 분명히 말했잖아. 내 마음에 각인을 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걸 냉큼 따르겠단 뜻은 아니라고."
이연화가 타오르는 산불에 물 한 잔을 붓는 심정으로 건넸다. 경고하듯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귀에도 썩 강경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끊겠다고 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태도로, 적비성이 팔짱을 끼며 툭 던졌다.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자갈을 하나 던졌더니 바위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연화의 말문이 막힌 사이, 방다병이 적비성의 팔을 재차 때리며 쏘아붙였다.
"너 왜 그래? 우리가 조금 전까지 얘기했던 건 대체 어디로 다 빠져나간 거야?"
"네가 일방적으로 얘기했을 뿐이지. 난 그 말에 동의한 적이 없다."
"너 진짜!"
한심스러운 얼굴로 대꾸한 적비성을 향해, 방다병이 대놓고 삿대질을 했다. 코웃음과 함께 방다병을 무시하고, 금원맹주는 눈가를 난처하게 긁적이던 이연화를 향해 말했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태연한 투였다.
"네가 원한다면 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단은 유지하겠다는 뜻이지. 미래에 끊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면 얘기해라. 그 전까지, 내 각인 상대는 너다. 네 각인 상대는 나와 방다병이고."
적비성이 그들 사이를 가볍게 턱짓하며 맺었다.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명쾌한 태도였다. 동굴의 함정에서 몸을 섞은 이후, 이런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되리라고 짐작한 바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적절한 답은커녕, 능청스럽게 둘러댈 만한 말조차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 건은 아무리 이연화라 해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흘려버릴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하여 그저 쩔쩔매다가 마주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 달리 탓할 사람이라곤 없어 한숨을 삼키다가, 이연화는 눈을 뜨고 떠보듯이 물었다.
"내가 원하면, 끊을 마음은 있고?"
바로 대꾸하려던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남자는 곧 이연화를 향해 짧게 건넸다.
"사실 별로 없다."
"아비, 누가 설득을 이런 식으로 해...너,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방법 좀 배워!"
방다병이 위통을 참는 얼굴로 전전긍긍하며 질책했다. 적비성은 방다병을 귀찮은 눈으로 힐끗 보고는 이연화를 향했다. 그 목소리와 표정이 여전히 뻔뻔할 만큼 당당했다.
"네가 싫어했다면 나도 미련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겠지. 하지만 너 역시 원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쉽게 포기할 일은 없다."
그야 그렇겠지, 넌 내 심마를 불필요한 기력 소모라고 생각하니까. 이연화는 결국 참지 못한 한숨을 길게 토하며 뒷목을 주물렀다. 적비성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 양태를 고려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댄들 별 소용은 없을 터였다. 무슨 말을 하든, 상대의 논리는 '너는 생각이 너무 많다. 서로 원하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적비성이 눈살을 찡그리고는 덧붙였다. 팔짱을 단단히 낀 모양새가 퍽 짜증스러워 보였다.
"지금은 말리는 척하고 있지만, 방다병도 어차피 마찬가지일 거다."
"너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
"그럼 너는 포기할 거냐?"
"그런다는...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이연화를...이연화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을 거란 뜻이야."
"방금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잖아. 앞뒤가 다를 뿐이지. 웃기지도 않는군."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분이 치민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금원맹주를 노려보다, 방다병은 곧 머쓱하지만 성실한 표정을 짓고는 이연화를 향했다. "이연화, 널 재촉하거나 다그치려는 건 아니야.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곤란한 상황들이 생길 테니까...한번 확실히 묻고 싶었을 뿐이야." 이연화가 잠시 발치를 바라보았다. 불시에 예상 밖의 방식으로 토해냈을 뿐, 그날 동굴에서 했던 말들에 거짓은 없었다. 이연화가 재차 긴 숨을 토했다. 두 사람의 말대로, 이런 일은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은 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은근슬쩍 한 쪽에만 발을 걸치기는 어려웠다.
마음속의 전투가 관성적으로 시작되었다. 찬성과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아련히 뒤섞여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연화는, 결국 어떤 목소리가 승리할지 직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울타리 밖으로 내쳤다면 모를까, 이미 고집스레 비집고 들어와버린 이들을 야멸차게 내쫓을 수는 없었다. 이상이도 이연화도, 결국 사람을 향한 정에 약하여 그런 일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벌써 익숙해진 아침을, 불세출의 영웅이 아닌 이연화를 필사적으로 바라며 끌어안던 그 손길들을 깨끗이 포기할 자신도 없었다. 이연화가 뺨 안쪽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초조하고 불안한 동시에 낭패스러웠으나, 진실은 곤혹스러움을 이유로 바뀌지 않았다.
차마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어. 나나 너희 중에 누군가는...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이연화가 진실한 염려를 담아 낮게 읊조렸다. 어둡고 심각하다 못해 슬프게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면서, 이연화는 어쩐지 적들을 앞에 두고 섰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긴장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만난 적들은 이연화의 심장을 부술 수 없었지만, 이 두 사람은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연화는 그들에게 미지의 권한을 넘겨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너희도 바라니...아비가 말했던 대로, 끊기 전까지는 이어진다고 봐야겠지."
간신히 떨지 않고 말하면서도, 이연화는 자신이 퍽 비겁한 겁쟁이처럼 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 이리 어정쩡하게 얼버무리듯 얘기한단 말인가? 그 이유야 명백했다. 자신의 일부는 아직도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두고 싶어 안달하는 참이었다. 정말 꼴사납구나, 이연화. 넋두리처럼 스스로를 타박하던 이연화의 앞에서, 상대는 사뭇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방다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날 만큼 큰 동작이었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서슬에, 이연화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뜨뜻미지근한 소리에 화가 났나 싶어 재빨리 상대를 살폈으나, 상기된 뺨이나 빛나는 눈동자가 영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연화의 손을 덥석 잡고, 방다병이 크게 뜬 눈으로 물었다. 그 입이 딱 벌어져 있었다.
"정말이야? 그럼 지금은-적어도 지금은, 각인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야?"
"다른 뜻으로 들렸어?"
무안함을 감추려, 이연화가 괜히 타박하듯 되물었다. 방다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양쪽 뺨이 더 짙은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다. 그 손아귀로 꾹 힘이 들어갔다.
"이연화, 네가 엄청 용기 냈다는 거 알아.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이해해. 하지만...."
방다병의 목소리가 떨렸다. 맞잡은 손을 주물거리다가, 청년은 곧 이연화를 놓아주고는 휙 등을 돌렸다. "하지만, 너무 기뻐서...." 살짝 메인 목으로 말끝을 흐리더니, 방다병은 이내 한 차례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민망하면서도 조금 미안한 마음에, 이연화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 등을 두어 차례 토닥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적비성이 툭 던졌다. 그는 이연화의 말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했다.
"난 네 마음이 바뀌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할 거다."
"거 참 좋은 자세다, 적 맹주."
이연화가 상대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건넸다.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올려 비뚤어진 미소를 띠었다.
"만일 그런 상황이 된다면, 쓸데없이 고민하는 대신 네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겠지. 어쨌든, 네 뜻은 알겠다. 이젠 세부사항을 논의할 수 있겠군."
"그래, 뭐 하나하나 얘기해 보자고...아, 방소보. 그 전에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이연화가 방다병의 등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방다병이 얼른 돌아보았다. 눈물이 넘치지는 않았으나, 그 눈가와 코끝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아, 이 말부터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이연화가 내심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울상을 지을 만큼 좋아하는 청년을 향해 건넬 말은 아니다 싶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적당히 눙친 채 넘어갈 수도 없었다.
"아비는 상관없는데, 너한테는 조건이 하나 있어."
"뭐? 뭔데? 왜 나한테만 조건이 있어?"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갛던 낯빛이 갑작스레 창백해졌다. 철렁한 얼굴을 가리키며, 이연화가 못을 박았다.
"넌, 하 당주한테 허락 못 받으면 안 돼."
"뭐?!"
방다병이 대번에 억울한 소리를 내질렀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무언가를 돌아보고 생각할 여유도 없을 만큼, 정말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적어도 이연화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타인의 눈에 수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이연화는 전력을 다해 뒷수습을 했다. 엉망이 된 몸은 씻어버리고, 더 엉망이 된 옷도 대충 빨아 내력으로 말려버리고-살면서 옷을 말리려고 내력을 운용해본 적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괜히 쭈뼛거리는 방다병의 등을 한 대 때린 다음, 기절한 여랑을 찾아 깨우니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몸이 가라앉을 만큼 피로하지는 않았으나, 설령 그렇다 해도 거처로 돌아가 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연화가 점혈해둔 자들은, 굳은 자세와 찬 밤공기로 인해 이미 대부분 기절해 있었다. 개중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문걸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중이었다. 네 사람은 잠시 고민하다, 곧 그들을 줄로 엮어 의방의 약재를 나르듯 운반했다. 방시문의 거처에 흉악범들을 가둬놓을 수는 없었기에, 일행은 관아를 찾아 상황을 설명했다. 포졸들은 매우 얼떨떨해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방다병이 꺼낸 형탐의 패와 세우단이 운반하던 보화 상자들, 불법적인 시장 및 약물에 대한 여러 권의 장부들을 확인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달려갔다. 잠들어 있을 상사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방다병이 상급 관리에게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사이, 이연화는 적비성과 함께 신가 저택에 들렀다. 도망쳤을지 모른다 염려했던 것과 다르게, 세우단의 말단 단원들은 사고문주의 명을 충실히 따라 가주를 감시하고 있었다. 뒤뜰의 참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 퍽 험한 풍경이 연출되던 참이었다. 신춘광을 비롯한 가족들이 멀찍이 서서 너희는 누구냐,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를 놓아달라 왁왁거렸다. 칼을 빼든 자도 있었으나, 널브러진 호위들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감히 달려든 이는 없었다. 이연화가 담벼락을 훌쩍 넘어 나타나자, 신춘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는...선화루의 예인이 아닌가! 여긴 갑자기 어떻게...얼굴에 흉터가 있다며...그보다, 방금 그 경공은...아니, 자네는 구 공자의 호위...?"
"문주, 명하신 바를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얼이 빠진 신춘광의 앞에서,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조아린 이마가 땅바닥에 닿을 듯했다. 그 뒤에 선 가주의 낯이 흙빛을 띠었다. 이연화가 짐짓 눈가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꼭 악인의 우두머리 같지 않습니까...신 공자, 묻고 싶은 일이 많으시겠지요? 부친께서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체면 때문에 예서 입을 열지 않으실 테니, 관아로 따라오시면 차차 자초지종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당신도 함께 가셔야 하거든요. 방 공자에게 저지른 일을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선화루에 들러 당신의 숙부도 데려갈 작정입니다. 아무리 세우단주님이라 해도, 나이 든 분을 언제까지 장롱에 가둬둘 수는 없으니까요. 벌을 받는 과정이 외롭지는 않겠습니다."
이연화가 얄밉게 건네자, 이미 바보 같았던 표정이 한층 멍해졌다. 신춘광이 멀거니 중얼거렸다. "숙부님...? 세우단주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연화가 피식 냉소했다. 친형인 가주에게도 숨기려 애를 쓴 마당에, 신우련이 조카와 그 사실을 공유했을 리 없었다. "뭘 기다리나." 짜증스레 중얼거린 적비성이, 신춘광에게 성큼 다가가 그 혈을 쿡 찍어버렸다. 넋 나간 얼굴 그대로 굳은 채, 신춘광은 아버지와 나란히 뒷덜미를 잡혀 끌려갔다.
관아에서 방다병과 이야기를 나누던 관리는, 신가의 거물들이 줄줄이 딸려오자 끝내 혼절할 것 같은 상태에 빠졌다. 과거에 비해 연륜이 쌓인 방다병은 두려워하는 공직자를 강단이 없다 매도하는 대신, 백천원과 감찰사가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할 테니 대인이 과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심시켰다. 한결 진정되었으나 여전히 불안에 떨던 관리는, 미리 전갈을 받은 석수와 양윤춘이 날듯이 도착했을 때 눈에 띄게 편안해져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세우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가를 비롯한 세가 사람들 중에는 조정에 관련된 자들도 있어 다소 복잡한 상황이 빚어졌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또한 양윤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백천원에 매우 협조적이었기에 일을 분담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해봤자, 방다병이 그들에게 지나칠 만큼 세세한 자초지종을 알려준 정도였다("문주가...뭘 하셨다고? 기루에서 검무를? 대체 어쩌다가...뭐라고? 문주가 술 시중을 드셨단 말이냐? 어떤 놈에게?"). 사고문주의 영패를 꺼냈던 일을 사과하고 앞으로 되도록 그러지 않겠노라 이야기하려 동석했던 이연화는, 오히려 엉뚱한 부분에서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연화가 진땀을 빼는 사이, 방다병은 뒤에서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연회 날과 전혀 다른 이유로, 여현은 다시 한 차례 뒤집어졌다. 여현에서 명성을 떨쳤던 기루와 몇 개의 세가가 동시에 휘말린 대사건이었다. 매일 화려한 불빛을 밝히고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던 선화루는, 처음으로 불이 꺼진 채 어두운 저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랑은 이연화가 만난 이후 가장 밝은 표정을 지은 채 일행을 환영했다. 두 개의 장부에 이름이 올랐던 탓으로, 아유를 죽게 만든 주 공자 역시 관아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약을 샀을 뿐 사용하지 않았다며 발뺌했으나, 방에서 빈 약함이 발견되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감찰사와 백천원이 함께하는 고압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을 터였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미련도 없이 여현을 떠날 수 있겠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여랑은 일행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설약을 비롯한 다른 무용수 몇도 함께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못다 한 마지막 춤을 저자에서 선보인 다음, 바로 행낭을 챙겨 떠날 예정입니다. 사건으로 다망하시겠으나, 여력이 된다면 구경하러 오시지요." 설약이 한결 평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연화는 그날 꼭 자리하겠노라 약속하며 빙긋 웃었다.
암담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기분을 느낀 사람은 비단 무용수들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던 방시문은,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 방다병과 이연화에게 감사를 표했다. 방시문의 주름진 얼굴은 여전히 지치고 피로해 보였으나, 적어도 처음 만났던 날처럼 어둡고 침울한 인상을 풍기지는 않았다. 방운일 또한 아직 여위었지만, 사건이 해결되고 있다는 희망과 양주만 덕으로 한결 건강한 혈색을 띠고 있었다. 방시문은 방다병의 손을 좀처럼 놓지 못한 채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허리가 자꾸만 굽어졌다.
"정말 고맙다. 네가 우리 집안의 흉사뿐 아니라, 이 지역의 흉사를 막았구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님. 덕분에 저뿐 아니라, 양친의 심화도 덜 수 있게 되었어요."
"형탐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더러, 저 혼자서 해결한 것도 아닌걸요. 이연화를 비롯한 사람들의 공이 컸습니다."
방다병이 당숙의 팔을 잡아 허리를 펴도록 하며 건넸다. 방다병이 덧붙인 말을 듣자마자, 이연화는 얼른 방씨 집안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신을 향해 또 허리를 숙이지 않게끔 했다. 방시문의 반려, 채명홍이 눈가를 훔치며 읊조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셨다면, 저는 아마 견디지 못하고 살수들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방다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퍽 처연한 투였으나, 형탐의 직감은 그 말이 과장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짚어냈다. 방시문보다 불길 같은 성품으로 표국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하나뿐인 자식이 죽을 지경이라면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를 법했다.
끔찍한 범죄에서 비롯되었던 사건인지라 마냥 축하할 만한 상황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방시문은 손님과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좋은 음식이며 술을 내놓았다. 본래도 식사량이 썩 많지는 않았기에, 이연화는 주인의 면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먹고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거처로 돌아왔다. 당장 눕거나 앉을 기분이 들지 않아, 사고문주는 잠시 지붕에 올라 맨몸으로 상이태검의 초식을 펼쳤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연습했던 동작인데도, 오늘은 어쩐지 칼끝에 잡념이 섞여들었다. 타인이 본다면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숨겨진 마음이었으나, 가상의 검을 휘두르는 자신만은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한숨과 함께 손을 내리고, 이연화는 여현에 걸린 달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붕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마음이 어수선한 까닭이야 자명했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히 매듭지어야 할 사안이 남아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옮기다, 이연화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사람의 그림자가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예민한 감각으로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금방도 다녀왔네." 이연화가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짚었다. 이 시간에 자신의 방에서 두런거릴 사람들이야 정해져 있었다. 약마에게 비급을 전달하러 갔던 적비성이 돌아온 듯했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태연한 얼굴로 문을 열자, 마주앉아 무슨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 왔어? 어디서 뭐하다 온 거야?"
"몰랐나? 지붕을 디디는 기척이 났는데. 위에서 수련하던 거겠지."
적비성이 천장을 향해 턱짓하며 받았다. 방다병이 울컥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연히 알았지! 난 그냥, 왜 이 밤에 혼자 거기서 수련하고 있었냐고 물으려던 거야." 익숙한 다툼을 힐끔 보고, 이연화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와 침상 위에 앉았다. 찰싹 달라붙어 따라오는 시선들이 매우 신경 쓰였다. 길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그편을 바라보자, 방다병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적비성은 여전히 빤한 눈길을 보내 왔다. 이연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묻고 싶으면서도 묻고 싶지 않았다.
금원맹주는 곧 탁자를 짚으며 등을 바로 폈다. 여느 때와 별다를 것도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무슨 일인데?"
"각인을 유지하게 되면, 각자의 희락기는 어떻게 할 셈이지?"
적비성이 진지하게 물은 말에, 이연화는 그만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뱉었다. 방다병이 슷 소리를 내며 적비성의 팔을 한 대 때렸다. "그렇게 무턱대고 꺼내지 말랬잖아!"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언젠가는 의논했어야 할 일이야."
"아비. 내가 거기서 분명히 말했잖아. 내 마음에 각인을 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걸 냉큼 따르겠단 뜻은 아니라고."
이연화가 타오르는 산불에 물 한 잔을 붓는 심정으로 건넸다. 경고하듯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귀에도 썩 강경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끊겠다고 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태도로, 적비성이 팔짱을 끼며 툭 던졌다.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자갈을 하나 던졌더니 바위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연화의 말문이 막힌 사이, 방다병이 적비성의 팔을 재차 때리며 쏘아붙였다.
"너 왜 그래? 우리가 조금 전까지 얘기했던 건 대체 어디로 다 빠져나간 거야?"
"네가 일방적으로 얘기했을 뿐이지. 난 그 말에 동의한 적이 없다."
"너 진짜!"
한심스러운 얼굴로 대꾸한 적비성을 향해, 방다병이 대놓고 삿대질을 했다. 코웃음과 함께 방다병을 무시하고, 금원맹주는 눈가를 난처하게 긁적이던 이연화를 향해 말했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태연한 투였다.
"네가 원한다면 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단은 유지하겠다는 뜻이지. 미래에 끊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면 얘기해라. 그 전까지, 내 각인 상대는 너다. 네 각인 상대는 나와 방다병이고."
적비성이 그들 사이를 가볍게 턱짓하며 맺었다.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명쾌한 태도였다. 동굴의 함정에서 몸을 섞은 이후, 이런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되리라고 짐작한 바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적절한 답은커녕, 능청스럽게 둘러댈 만한 말조차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 건은 아무리 이연화라 해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흘려버릴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하여 그저 쩔쩔매다가 마주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 달리 탓할 사람이라곤 없어 한숨을 삼키다가, 이연화는 눈을 뜨고 떠보듯이 물었다.
"내가 원하면, 끊을 마음은 있고?"
바로 대꾸하려던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남자는 곧 이연화를 향해 짧게 건넸다.
"사실 별로 없다."
"아비, 누가 설득을 이런 식으로 해...너,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방법 좀 배워!"
방다병이 위통을 참는 얼굴로 전전긍긍하며 질책했다. 적비성은 방다병을 귀찮은 눈으로 힐끗 보고는 이연화를 향했다. 그 목소리와 표정이 여전히 뻔뻔할 만큼 당당했다.
"네가 싫어했다면 나도 미련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겠지. 하지만 너 역시 원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쉽게 포기할 일은 없다."
그야 그렇겠지, 넌 내 심마를 불필요한 기력 소모라고 생각하니까. 이연화는 결국 참지 못한 한숨을 길게 토하며 뒷목을 주물렀다. 적비성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 양태를 고려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댄들 별 소용은 없을 터였다. 무슨 말을 하든, 상대의 논리는 '너는 생각이 너무 많다. 서로 원하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적비성이 눈살을 찡그리고는 덧붙였다. 팔짱을 단단히 낀 모양새가 퍽 짜증스러워 보였다.
"지금은 말리는 척하고 있지만, 방다병도 어차피 마찬가지일 거다."
"너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
"그럼 너는 포기할 거냐?"
"그런다는...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이연화를...이연화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을 거란 뜻이야."
"방금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잖아. 앞뒤가 다를 뿐이지. 웃기지도 않는군."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분이 치민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금원맹주를 노려보다, 방다병은 곧 머쓱하지만 성실한 표정을 짓고는 이연화를 향했다. "이연화, 널 재촉하거나 다그치려는 건 아니야.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곤란한 상황들이 생길 테니까...한번 확실히 묻고 싶었을 뿐이야." 이연화가 잠시 발치를 바라보았다. 불시에 예상 밖의 방식으로 토해냈을 뿐, 그날 동굴에서 했던 말들에 거짓은 없었다. 이연화가 재차 긴 숨을 토했다. 두 사람의 말대로, 이런 일은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은 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은근슬쩍 한 쪽에만 발을 걸치기는 어려웠다.
마음속의 전투가 관성적으로 시작되었다. 찬성과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아련히 뒤섞여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연화는, 결국 어떤 목소리가 승리할지 직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울타리 밖으로 내쳤다면 모를까, 이미 고집스레 비집고 들어와버린 이들을 야멸차게 내쫓을 수는 없었다. 이상이도 이연화도, 결국 사람을 향한 정에 약하여 그런 일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벌써 익숙해진 아침을, 불세출의 영웅이 아닌 이연화를 필사적으로 바라며 끌어안던 그 손길들을 깨끗이 포기할 자신도 없었다. 이연화가 뺨 안쪽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초조하고 불안한 동시에 낭패스러웠으나, 진실은 곤혹스러움을 이유로 바뀌지 않았다.
차마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어. 나나 너희 중에 누군가는...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이연화가 진실한 염려를 담아 낮게 읊조렸다. 어둡고 심각하다 못해 슬프게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면서, 이연화는 어쩐지 적들을 앞에 두고 섰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긴장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만난 적들은 이연화의 심장을 부술 수 없었지만, 이 두 사람은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연화는 그들에게 미지의 권한을 넘겨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너희도 바라니...아비가 말했던 대로, 끊기 전까지는 이어진다고 봐야겠지."
간신히 떨지 않고 말하면서도, 이연화는 자신이 퍽 비겁한 겁쟁이처럼 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 이리 어정쩡하게 얼버무리듯 얘기한단 말인가? 그 이유야 명백했다. 자신의 일부는 아직도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두고 싶어 안달하는 참이었다. 정말 꼴사납구나, 이연화. 넋두리처럼 스스로를 타박하던 이연화의 앞에서, 상대는 사뭇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방다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날 만큼 큰 동작이었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서슬에, 이연화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뜨뜻미지근한 소리에 화가 났나 싶어 재빨리 상대를 살폈으나, 상기된 뺨이나 빛나는 눈동자가 영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연화의 손을 덥석 잡고, 방다병이 크게 뜬 눈으로 물었다. 그 입이 딱 벌어져 있었다.
"정말이야? 그럼 지금은-적어도 지금은, 각인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야?"
"다른 뜻으로 들렸어?"
무안함을 감추려, 이연화가 괜히 타박하듯 되물었다. 방다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양쪽 뺨이 더 짙은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다. 그 손아귀로 꾹 힘이 들어갔다.
"이연화, 네가 엄청 용기 냈다는 거 알아.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이해해. 하지만...."
방다병의 목소리가 떨렸다. 맞잡은 손을 주물거리다가, 청년은 곧 이연화를 놓아주고는 휙 등을 돌렸다. "하지만, 너무 기뻐서...." 살짝 메인 목으로 말끝을 흐리더니, 방다병은 이내 한 차례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민망하면서도 조금 미안한 마음에, 이연화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 등을 두어 차례 토닥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적비성이 툭 던졌다. 그는 이연화의 말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했다.
"난 네 마음이 바뀌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할 거다."
"거 참 좋은 자세다, 적 맹주."
이연화가 상대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건넸다.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올려 비뚤어진 미소를 띠었다.
"만일 그런 상황이 된다면, 쓸데없이 고민하는 대신 네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겠지. 어쨌든, 네 뜻은 알겠다. 이젠 세부사항을 논의할 수 있겠군."
"그래, 뭐 하나하나 얘기해 보자고...아, 방소보. 그 전에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이연화가 방다병의 등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방다병이 얼른 돌아보았다. 눈물이 넘치지는 않았으나, 그 눈가와 코끝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아, 이 말부터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이연화가 내심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울상을 지을 만큼 좋아하는 청년을 향해 건넬 말은 아니다 싶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적당히 눙친 채 넘어갈 수도 없었다.
"아비는 상관없는데, 너한테는 조건이 하나 있어."
"뭐? 뭔데? 왜 나한테만 조건이 있어?"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갛던 낯빛이 갑작스레 창백해졌다. 철렁한 얼굴을 가리키며, 이연화가 못을 박았다.
"넌, 하 당주한테 허락 못 받으면 안 돼."
"뭐?!"
방다병이 대번에 억울한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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