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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5 02:46
키스가 길어졌다. 음. 이즈미의 혀를 받아들이는 키쿠의 목에서 달콤한 울림이 샌다. 처음으로 이즈미에게서 받는 키스다. 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이즈미의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키쿠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남자의 손이 허리에 닿는 순간 이즈미의 온 몸이 크게 흔들렸다.

 

"잠깐, 키쿠..."

 

당황한 이즈미가 입술을 떼고 키쿠를 불렀지만 키쿠의 다른 한 손이 이즈미의 머리를 끌어내리며 다시 입술을 붙여왔다. 욕망에 젖은 시선과 마주한 순간 이즈미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안돼!"

 

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으며 키쿠를 양손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안돼. 명백한 거부의 말이 날아가 키쿠에게 못처럼 똑똑히 박힌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키쿠가 이내 머쓱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저, 내일 아침 예정이 있었네요.”

내일은 휴일이라 할 일이 없다는 걸 둘 다 아는 상황에서 키쿠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씻고 잘게요. 이즈미상은 먼저 들어가세요. 이즈미가 뭐라고 변명할 틈도 없이 키쿠는 빠르게 거실을 나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자신의 방에서 일어난 이즈미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지난 밤에 마신 술 때문인가, 아니면 그대로 자리를 뜬 키쿠때문인가. 몸을 쭉 뻗은 이즈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키쿠를 진심으로 거부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다만 허리 밑으로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몸이 반사적으로 경직됐을 뿐이다. 아키토가 죽고 난 뒤로 그런 쪽으론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키토. 
 
잠시 아키토에 생각이 스친 이즈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팍 앞을 쥐었다가 이내 손을 떼었다. 몇 년간 소중히 지니고 다니던 이즈미의 보물은 이제 그의 목이 아닌 서랍 속에 있는 것이다. 허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펜던트를 풀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이상 아키토 생각을 하는 건 키쿠에게 실례다.
 
세수를 끝낸 이즈미는 비척비척 거실로 향했다. 집은 조용하다. 키쿠는 아직 일어난 기척이 없었다. 오늘은 이즈미와 키쿠가 다시 같이 살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일의 아침이었다. 키쿠에겐 커다란 임무를 끝낸 뒤 받은 모처럼의 휴일이었고, 이즈미에게는 공안으로 복귀하기 직전 마지막 휴일이었다. 주변인들의 오지랖으로 이즈미의 사직서는 휴직으로 수리되었기에 복직은 물흐르듯이 쉬웠다. 자네가 공안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겠나, 하고 이치카와가 핀잔을 주기도 했다. 어딘지 기껍게까지 들리는 상사의 목소리를 들으니 보나마나 앞으로 바빠질테다. 게다가 공안의 업무 특성 상 휴일도 정기적이지 않다. 이렇게 여유로운 하루는 한동안 없을 수도 있다. 둘이서 함께 할 첫 휴일의 아침이 이런 어색한 형태로 시작하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주먹밥이라도 만들까.”

요리엔 재주가 없다. 그나마 만들 줄 아는 건 키쿠가 가르쳐준 주먹밥 뿐이다. 찬장을 뒤져보았지만 이즈미가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이럴 때 인스턴트 된장국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쓸데없이 요리에 진심인 키쿠는 그런건 사놓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부터나 하자 싶어 일단 이즈미는 밥을 안치고 주먹밥을 만들 재료를 준비했다. 
 
다 만든 주먹밥에 마지막으로 작은 치즈를 박고 있자니 또 기억이 났다. 홈파티에 들고 가려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어떻게 해도 둥글어만지던 주먹밥이다. 자신에게 키쿠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그 날 밤, 이즈미는 주먹밥을 쥐며 울었더랜다. 아키토의 장례식에도, 펜던트가 없어졌던 순간에도, 이 주먹밥을 가르쳐 줄 때에도. 아키토가 없는 매 순간 순간마다 키쿠가 존재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때, 거실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즈미가 고개를 들자 거실로 들어오던 키쿠와 눈이 딱 마주쳤다. 부엌에 서있는 이즈미를 본 키쿠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 이즈미상?”

“일어났네.”
 
자신에게 다가오는 키쿠가 평소와 같아서 이즈미는 내심 안심했다. 한편 키쿠는 키쿠대로 놀란 얼굴이다. 자신이 있는데도 이즈미가 나서서 요리를 하는 건 아주 드문일이었기 때문이다. 주먹밥? 나지막히 중얼거린 키쿠가 이즈미 손에 쥐어진 동그란 것을 보곤 바로 야유를 날렸다.

“또 치즈 넣었어요?”
“치즈가 뭐 어때서.”
 
키쿠의 핀잔에 이즈미가 투덜거렸다. 치즈 정도면 주먹밥의 훌륭한 악센트인데 키쿠는 도무지 인정하질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맛있다고 했어."
"다른 사람들요?"
"아, 하루타씨의 홈파티에서. " 


이즈미에겐 임무 탓에 늦어서 못갔다고 했지만 사실은 일부러 가지 않았던 하루타네 홈파티다. 하루타를 바라 보는 이즈미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공안시절 사귀던 둘을 떠올리게 될 일을 굳이 찾아 가서 보고 싶진 않다. 하루타가 아키토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건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겉모습이 너무나 판박이었기에 스스로가 괴로워질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억지로 봉합시켜둔 상처를 굳이 헤집는 짓을 왜 찾아가서 하겠는가. 한편 이즈미는 이즈미 나름대로 평소처럼 행동하는 키쿠가 신경쓰였기에 조심히 키쿠를 내려본다. 언제나처럼 산뜻하게 잘 생긴 얼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잠을 못 잤는지 눈이 조금 빨갛다.

 

"헤에. 그랬단 말이죠."

 

하긴, 누가 가르쳤는데. 다소 건방진 말을 하고 어깨를 으쓱인 키쿠는 치즈가 든 동그란 주먹밥을 주워 들고는 한 입 베어물었다.
 
"어때?"
"뭐, 나쁘지는 않지만..."
 
이즈미가 만들어준 것인데 뭔들 맛있지 않겠는가. 사실 이즈미가 만들어 준 치즈 주먹밥을 처음 먹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걸 먹고 있자니 자신이 이즈미와 살던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날이 떠올랐다. 이즈미 역시 같은 생각을 한듯 문득 쓴웃음을 짓는다. 이즈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키쿠가 그 표정을 보고는 주먹밥 씹는 것을 멈추고 이즈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키쿠의 시선을 눈치챈 이즈미가 눈썹을 들어올린다. 키쿠가 좋아하는 이즈미의 다정한 얼굴이다. 키쿠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이즈미상.”
“응?”
“치즈는 그렇다치고 ...결국 삼각형이 안되던가요?”

키쿠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동그란 주먹밥을 들어 올리자 이즈미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말한다. 

"젠장맞게 어렵더군."
"대체 왜 그럴까나..."

키쿠가 웃어 버렸다. 이즈미도 따라 웃었다. 그 웃는 소리가 오늘따라 키쿠의 가슴에 스며든다. 아키토가 죽은 이후로 완전히 비어버렸던 이즈미에게 진짜 웃음이 돌아온 건 다행이었다. 그래, 이대로도 좋다. 아직 너무 욕심을 부리지말자. 키쿠는  다짐하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즈미상."

"응?"
”저, 기다릴 수 있어요."
 
주먹밥을 둥글리던 이즈미의 손이 딱 멈추었다. 동그래진 이즈미의 눈이 키쿠를 향했고 키쿠는 씨익 웃어보였다. 

“이래보여도 기다리는 거 잘하니까요. "

 

생각지도 못한 키쿠의 말에 이즈미는 당황했다.  아니, 키쿠. 그게 아니라. 이즈미가 허둥지둥 손에 들고 있던 주먹밥을 내려 놓고 손을 씻는 사이 키쿠는 쏟아내듯이 말을 이었다. 

 

"어제는 미안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어요. 이즈미상이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예요."

 

이즈미가 아직 아키토를 잊었을 리 없다. 아키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몇 년간 그 비석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아키토를 닮은 하루타에게 빠지는 것까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하루타를 좋아하게 됐다는 이즈미의 고백에 키쿠가 절실히 느낀 것은 단 하나였다. 죽은 아키토에게조차 이길 수 없는 자신에겐 영원히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아직... 절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건 알아요." 

"키쿠."

 

이즈미가 키쿠의 이름을 불렀지만 키쿠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대로라면 어쩐지 울 것 같아 키쿠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내었다. 

 

"아무튼 언제든지, 이즈미상이 준비되면 그때..."

"나는 준비됐어."

 

이즈미의 단호한 말에 키쿠는 그제서야 다시 얼굴을 들었다. 이즈미의 눈은 똑바로 키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서 팔을 뻗었다. 방금 씻어 물기에 젖은 그의 손이 주먹을 쥐고 있던 키쿠의 손을 단단하게 감싼다. 

 

"어제는 단순히 놀랐을 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고."

 

이즈미는 한숨을 푹 쉰다. 이제까지 단순히 남동생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눈에서 성욕을, 그것도 자신을 향한 욕구과 똑바로 마주쳐버린 아저씨의 가여운 심장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난 널 이 이상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이젠 동생이 아니잖아."
 

뚝. 키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이즈미는 키쿠의 손을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말재주는 없지만 제대로 전할 것은 전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다. 

 

"미안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뚝. 뚝.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고장난 것처럼 계속 흐르기 시작한다. 뚜껑을 닫고 모른척 하려던 감정이 슬금슬금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걸 이즈미는 안타까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과는 됐어요. 그런 말 보다..."

 

키쿠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연신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몰래 품어왔던 비밀스런 감정에 사과받는 것도 이상하다. 이즈미의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네가 없으면 어쩐지 진정되지 않는다. 에둘러 한 그 말은 고백이 맞을까. 자기가 좋은대로 해석한 게 아닐까. 오랜 시간 동안 키쿠가 옆에 있었던 것에 익숙해져 있다가 이제와서 없어지니 단순히 허전했을 뿐 아닐까. 어쨌건 이즈미에겐 동생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키쿠는 혼란스러웠다. 설령 이즈미가 정말 진심으로 고백을 했다한들, 이즈미의 좋아한다는 감정은, 자신의 좋아한다는 감정과 똑같은 의미일까. 자신이 이즈미에게 품고 있는 감정과 그 무게가 같을 리 없다. 한번도 공평해 본적이 없었던 그의 짝사랑은 추가 기울어져 고장난지가 너무나 오래인데. 

 

"응. 좋아해, 키쿠."

 

좋아해. 그 세 음절의 단어에 결국 키쿠는 눈물을 쏟아냈다. 불안으로 얼룩져있던 그의 머릿속이 이즈미의 말 한 마디에 다 녹아내렸다. 기나긴 세월 동안 억눌러왔던 지난한 짝사랑이 마침내 그 주인을 찾는다. 눈물을 흘리던 키쿠는 이즈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즈미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쓸어내린다. 언젠가 키쿠가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한동안 키쿠는 계속 불안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감하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보고싶은데 왜 공식은 나한테 앙빵키스만 주냐고 왜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