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https://hygall.com/587638350
view 6295
2024.03.13 22:57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닫힌 천장에서부터 어슴푸레한 빛이 떨어져,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상만 식별할 수 있었다. 축축한 벽에 이마를 눌러 댄 채 헐떡이며, 방다병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했는지를 되짚었다.
적비성과 함께 청망산에 다다라, 방다병은 오래지 않아 세우단의 은신처처럼 보이는 동굴을 찾았다. 여랑이 이동하며 흔적을 남겨준 덕이었다. 감각을 잔뜩 곤두세운 채 걷다 보니, 며칠 전 진법에 들어갔을 때처럼 몸이 둔하고 나른해졌다. 몸의 혈을 몇 군데 찍고, 방다병은 짜증스러운 얼굴의 금원맹주와 점점 더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언가가 감각을 흩뜨려놓고 있었으나, 충분히 집중하면 미세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좁았던 길은 조금씩 넓어져, 이내 둥그런 공터로 연결되었다. 방다병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일단의 무리가 모여, 흑단으로 만든 상자를 멘 채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문걸과 심악의 모습을 찾던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터 한편에, 기절한 여랑의 모습이 보였다.
"여랑 낭자!"
다급히 부르며 그 옆으로 날아들자, 모였던 사람들이 일제히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칼 뽑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적비성이 대도 자루를 잡은 채 그들을 노려보는 사이, 방다병은 얼른 여랑의 몸을 살폈다. 강력한 수면향 따위에 당한 듯, 다행히 맥이 크게 어지럽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안도한 방다병이 여랑을 눕히고 자리에 서자, 무리의 앞에 섰던 노인이 카랑카랑한 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뭐냐?"
"그때 그 젊은이로군. 금원맹주는 함께 오지 않았나?"
문걸이 말했다. 해괴한 소리를 들은 사람답게, 방다병은 적비성과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청년이 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금원맹주라니, 설마 이-그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을 말하는 건가?"
"금원맹에게 쫓기는 처지였으니,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군."
적비성이 차갑게 비웃었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문걸이 긴장한 눈으로 적비성을 훑어보았다. 적비성이 대도를 꺼내 그들을 겨누었다.
"상자를 내려놓고 알아서 꿇어라. 그리고 너, 약마의 비급을 내놔."
적비성이 심악에게 턱짓하며 쏘아붙였다. 노인에 대한 공경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태도였으나, 방다병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짐작대로라면, 눈앞의 노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과 비탄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무생벽이 품의 꾸러미를 반사적으로 단단히 안으며 상체를 틀었다.
"이건 내 거야. 내가 어렵게 구한 거라고! 어차피 약마한테는 별로 중요한 자료도 아냐. 내가 가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야."
"주인이 귀히 여기지 않는다 하여 남의 물건을 훔쳐도 된다는 것은 궤변입니다, 노인장. 대체 왜 그런 참담한 약들을 만든 겁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까?"
방다병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상식적으로 따지자, 문걸이 갑자기 방다병을 막고픈 것처럼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그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질문을 하면 피곤해지는데." 문걸이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무생벽은 갑작스레 영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상기되더니 언성을 높였다.
"돈이라니? 돈이라니! 내 목적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약을 만든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사람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짓밟고, 각인을 강제시키고, 억지로 웃거나 울도록 만드는 약의 대체 어디에 사람을 위하는 구석이 있다는 거예요? 개에게도 안 먹힐 논리네요!"
화가 난 방다병이 빠르게 쏘아붙이자, 무생벽이 입술을 씰룩이며 이죽거렸다.
"형탐이 아니랄까봐, 꼭 그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군. 난 내 약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뭐라고요?"
"정말 사랑하는데, 그 사람의 시선 한 조각도 못 받는 좌절감을 아나? 용기를 내어 진심을 전했는데, 그 차가운 마음을 돌릴 수 없을 때의 절망감을 알아? 나는 하루하루 말라가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다는 그 비참함을 아느냔 말이야."
무생벽이 정말 억울한 얼굴로 늘어놓았다. 방다병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마음에 괴로워하고 복잡해진 적은 있었지만, 노인의 논리는 어쩐지 이상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약들을 만들었다고요? 못 이룰 연심을 품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해가 되지 않아 우그러진 얼굴로 묻자, 노인이 끽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눈으로 어두운 번득임이 스쳤다.
"처음에는 내 바람이었지. 근처에 한 음인이 살았거든, 꽤 고왔어. 친절하게 대했는데도 날 사람으로 안 보기에, 약을 써서 각인하도록 만들었지. 그랬더니 싫다고 죽어버리지 않았겠어? 그때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그래서 오래도록 여러 약들을 고안했지. 많은 사람의 감정과 욕망을 주물러, 결국 그들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도록 만들었어. 그런데, 생각보다 내 약이 아주 인기가 좋더라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지. 해서 그들과 여기, 부단주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박차를 가하던 차였는데...너희 때문에 퍽 귀찮게 됐어."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던 심악이, 험한 눈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다병은 오물을 귀에 부은 듯한 기분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기와 각인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약을 써서 상대를 죽게 만든 다음에도, 반성하지는 못할망정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평생을 바쳤단 말입니까? 그 이기심이 징그러울 정도네요. 그 이야기의 어디에 사랑이 있단 말입니까?"
"불쾌한 데다 비겁하군. 맹에 가입하러 왔다면 죽였을 거다."
적비성이 경멸스러운 얼굴로 던졌다. 방다병이 힐끗 그 모습을 보았다. 불건전한 집착의 대상이 되어본 사람으로써, 적비성이 느끼는 혐오감은 매우 정당했다. 그 각려초조차 적비성의 마음을 약으로 돌리겠다는 발상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자와 결탁한 당신도, 어떤 인간인지 알 만하군." 방다병이 문걸을 노려보며 비난했다. 문걸이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니 뭐니 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소. 난 그저 돈을 따지는 사람이오, 그런 약의 수요가 많은 건 내 탓이 아니지. 나는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에 맞춰 행동했을 뿐이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약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 내게 고맙다며 눈물까지 흘린 자들도 숱하다. 네놈들이 아직 고통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야. 누구를 진심으로 마음에 둔 적도 없는 것이지."
무생벽이 혀를 차며 얕잡아보는 소리를 했다. 방다병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는 소리를 참 길게도 하는군. 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건강하고 평안하길 바랄 따름이지 내 이기심 때문에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적비성이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눈을 굴렸다. 대도를 쥔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뭐하러 이런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모두 죽여 없애면 될 일을."
"죽이면 안 되지, 심문해서 앞뒤를 밝혀야 하는데."
방다병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심악이 문걸에게 꾸러미를 넘기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수하들과 함께 칼을 빼어 들고, 문걸이 적비성을 향해 물었다.
"그 대도를 보니, 설마 당신이 금원맹주요?"
"알고도 투항하지 않는 걸 보니, 주제를 모르는 놈이구나."
"우리를 놓아주면, 앞으로 우리가 얻는 수익의 반절을 금원맹에 바치리다. 그 정도로 합의할 수는 없겠소?"
문걸이 빠르게 간청했다. 그 지체 없는 판단을 보니, 아마 그들과 마주치기 전부터 고려하던 사항인 듯했다. 설마 금원맹주가 문걸과 손을 잡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방다병은 힐끗 적비성을 곁눈질했다. 어쨌든 금원맹은 정파 집단이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도의나 명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맹 내의 반역이 남긴 후유증을 처리하느라 큰 인력과 자원이 들어갔으니, 상대의 제안을 수긍하는 척하여 이득을 보려 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비성은 한 차례 코웃음을 치고는, 문걸의 인상착의를 위아래로 살폈다.
"네놈이 문걸이냐?"
"그렇소."
"네놈은 내게 제안할 자격이 없다. 그냥 죽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풍백양이 폭발했다. 적들이 모두 칼을 들어 방어했으나, 심후한 내력은 강맹한 폭풍처럼 뻗어 나가 그들의 몸뚱이를 일시에 날려버렸다. 자리에 넘어지지 않고 버틴 사람은 문걸뿐이었는데, 남자는 균형을 바로잡기 무섭게 지시했다. "이기는 건 무리다. 왼편으로 도망쳐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한 방향으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빠르게 뛸 수 없는 심악의 뒷덜미를 문걸이 콱 틀어쥐었다. 노인은 볼품없는 비명을 질렀으나 놓으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멈추는 순간, 귀신처럼 그들을 쫓아오는 두 검객의 손에 어딘가가 썰려나갈 가능성이 농후한 탓이었다.
"다들 검이 아닌 경공만 연습했나 보군."
적비성이 불만스레 읊조렸다. 적비성의 말대로, 상대의 경공은 아주 준수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협소하고 복잡한 동굴 지대라, 익숙하게 이동하는 사람들을 비슷한 속도로 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벽을 디디며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튼 방다병이 말했다.
"조심해야겠어, 또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몰라."
"기관 따위는 네가 잘 확인해라, 방다병."
"뭐? 이렇게 빨리 이동하면서 확인하기는-기다려!"
불평을 끝내지 못하고, 방다병은 기겁하여 외쳤다. 적비성의 발이 수상하게 튀어나온 바닥을 슬쩍 내리누르자, 천장에서 흰 독무가 터졌다. 혀를 찬 금원맹주는 훌쩍 뛰어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다음, 노기에 형형해진 눈으로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곧 그 손바닥에서 동굴이 붕괴되지 않을까 염려될 만큼 강렬한 일격이 터져 나왔다. 방다병은 실제로 공간 전체를 은은히 뒤흔드는 진동을 느꼈다. "조심해, 여기 동굴이야!" 방다병이 균형을 잡으며 소리쳤다. 내력을 만난 독무가 순식간에 앞쪽으로 밀려나자, 도망가던 이들 중 두엇이 토혈하며 나자빠졌다. "더 빨리, 빨리 달려!" 물론 문걸은 쓰러진 수하를 돌아보지 않았고, 심악은 호들갑스럽게 그 등을 두드렸다.
그들은 곧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대치하게 되었다. 좁은 길목을 돌아 빠져나가니, 갑작스레 작은 굴방이 나타났다. 작은 횃불과 함께 잡동사니 몇 개가 놓인 막다른 장소였다. 문걸을 비롯한 수하들이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심악이 얼굴을 붉힌 채 악을 썼다.
"이런 멍청한 놈들, 자기들이 쓰던 공간에서 길을 잃는 천치가 어디 있어!"
"조용히 좀 하시오."
문걸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방다병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주위를 짧게 확인했다. 눈에 보이는 함정이나 기관 따위는 없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은 문걸이 칼 든 손을 늘어뜨렸다. 저항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만 묻겠소. 당신이 금원맹주라면, 그쪽은 누구요?"
문걸이 방다병에게 물었다. 방다병이 칼을 바로 들며 대답했다. "나는 백천원의 형탐, 방다병이오." 문걸의 눈으로 이채가 돌았다. 그 입가에 곧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래서...세상에 그런 고수가 몇씩이나 있을 리는 없지. 이번 일은 영 운수가 사납군."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문걸이 다시 칼을 들었다. 그 얼굴이 일견 단호한 빛을 띠었다.
"내 비록 당신들을 이기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싸움 한 번 없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오."
"해보거라."
상대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적비성이 비뚤어진 미소를 지은 채 한 발을 내디뎠다. 쿵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마치 산맥이 움직이는 듯한 존재감이었다. 묵직한 공격을 거푸 날리는 적비성의 옆에서, 방다병은 깊은 숲을 누비는 사슴처럼 빠르고 깔끔하게 날아올라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기에 휘말린 사람들이 비틀거리거나 뒤로 넘어졌다. 문걸이 악에 받친 얼굴로 망토를 들추었다. 바늘을 비롯한 암기들이 몇 차례에 걸쳐 비처럼 쏟아졌고, 문걸의 수하들은 그 틈새마다 기합을 내지르며 협공을 시도했다. 때로는 무생벽의 독과 약들이 펑펑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터지기도 했다.
비풍백양은 인간의 노력을 비웃는 재해처럼, 상대의 공격을 짓누르고 부수며 거푸 튕겨냈다. 바늘도 검도, 독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협소한 동굴 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 위력을 한풀 깎았음에도, 병장기와 사람의 몸뚱이가 번갈아 동굴 벽을 치고는 떨어졌다. 쓰러진 자들이 치미는 피를 삼키며 오기로 일어서 달려들어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적비성이 가하는 큰 일격의 사이사이에, 방다병의 상이태검은 상대의 흔들림을 빠르고 깨끗하게 짚어 공략해 들어갔다. 때로는 비풍백양의 연장선처럼 보일 만큼 미려한 연계를 펼치기도 했다. 서로를 비교적 잘 아는 두 고수의 앞에서, 소수 대 다수란 조건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결국 승패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앞으로 함께 싸울 일이 많아질지도 모르니, 합공에 익숙해져야겠네. 방다병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그 시야로 이상한 것이 꿈틀거렸다. 심악이 굴방의 하나뿐인 출입구로 빌빌거리며 다가가던 참이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방다병이 그편을 향해 검기를 날리자, 문걸이 얼른 그 앞을 막아섰다. 우두머리에게서 보이지 않는 신호라도 받은 것마냥, 흩어졌던 수하들이 일순 문걸의 주변으로 집합했다. 방다병의 뒷목으로 불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아비-." 상대에게 경고하기 위해 외친 순간, 가장 먼저 도망간 심악이 벽의 어딘가를 눌렀다.
발밑이 어찔하게 꺼져들었다. 굴방의 삼분지 이가 쑥 꺼질 만큼 큰 함정이었다. 충격에 대비하던 방다병의 눈앞에서, 그나마 함정의 가장자리에 섰던 적비성이 벽을 딛고 오르려 들었다. 하지만 문걸이 아래편으로 중침의 비를 쏟아내자, 그 일격을 막느라 발이 밀려나 위태로운 모양새가 되었다. 적비성의 눈으로 살기가 타올랐다. 금원맹주는 추락하면서도 오른손을 들어, 보이지 않는 공격을 집요하고도 무자비하게 쏘아올렸다. 문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방다병이 적비성의 강기에 당했을 때처럼, 문걸의 몸뚱이가 퍽 소리와 함께 붕 떠올랐다. 싸움의 여파로 이미 피를 흘리고 있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한 움큼 터져 나왔다. "부단주!" 수하들이 얼른 그 몸을 부축했다.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적비성도 방다병도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절망하지 않았다(적비성은 위를 향해, 네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고 쏘아붙였다). 경공에 조예가 있다면, 미끄럽고 높은 곳이라도 별다른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얼른 자세를 다잡고 위를 향해 도약하기 전, 입을 벌렸던 함정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불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몇 개의 독 자루가 안으로 쏟아져 펑펑 소리와 함께 터졌다. 밀폐된 공간이었기에, 내력으로 날려본들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입과 코를 막았으나, 안개처럼 내려앉은 약의 일부는 체내로 흘러들었다.
방다병이 헉 소리를 내며 상체를 수그렸다. 몸 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바늘로 후비듯이 배가 아프더니, 곧 정신이 혼몽해지고 전신에서 뜨거운 땀이 쏟아졌다. 익숙했으나 전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함정 바깥에서 심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거기서 고통스럽게 죽어봐라. 내가 제일 최근에 만든 약이야. 희락기가 시작된 후 한 시진 안으로 음인과 정을 통하지 않으면, 열 때문에 혈맥이 뒤틀려 죽거나 폐인이 될 거다. 실험에서도 살아남은 놈은 없었어. 딱 봐도 양인인 둘이 갇혔으니, 뭐 어쩔 방도도 없을 테지.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어지면, 스스로 백회혈을 치거라."
심악이 낄낄거리며 조롱했다. 그러나 방다병은 그 말에 마주 대거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토하지 않기 위해 벽을 짚었다. "그럴...그럴 필요가 있었소?" 문걸의 꺼져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적비성의 공격에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심악이 코웃음을 쳤다. "나를 그리 멸시한 놈들에게, 이 정도가 뭐 그리 잔혹한가?" "우리에겐 아직 큰 적이 남았소. 굳이 그의 화를 살 필요는 없었는데...일단 갑시다.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지." 한숨을 쉰 문걸이 수하들과 함께 멀어졌다.
방다병이 이를 갈았다. 시야가 제멋대로 번쩍였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굳게 닫힌 함정이 야속했다. 갇힌 상황에서 무턱대고 강한 검기를 쏘아댈 수도 없었다. 방다병의 눈이 어두컴컴한 공간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듯한 이 깊고 좁은 구멍은, 그저 반질반질할 뿐 별다른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벽에 남은 손톱자국들만 눈에 들어와, 마음이 한층 스산해졌다. 안에서는 해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걸까? 방다병이 흐릿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석수촌에서 적비성과 함께 중독되었던 상황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는 어떻게 위험에서 벗어났더라? 백의 대협의 모습을 떠올린 방다병이, 헐떡이는 숨에 섞어 말했다.
"이연화가...곧 이연화가 올 거야."
"이연화가 오면 더 문제다."
적비성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방다병의 눈썹이 팔자로 일그러졌다.
"나도...나도 알아. 못 들어오게 해야 돼. 우릴 보면 분명히...."
"속 터지는 짓을 하겠지. 들어오려 하면...알아서 말려라."
신음처럼 지시하고, 적비성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은지 물으려던 방다병이 눈썹을 들었다. 적비성은 고행자처럼 꿋꿋이 앉아 운기할 자세를 취한 채, 내력을 운용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삼킨 방다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락기가 이만큼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수십 개의 송곳처럼 몸 안쪽을 들쑤시는 열기에 딱 기절할 것만 같았다. 통증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방다병이 일부러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괜찮겠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했잖아."
"이 따위 허접스러운 약에 죽는다면...그냥 죽는 게 낫지. 전신의 경맥이 끊겼을 때에 비하면...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감은 적비성이 긁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짙은 눈썹 위로 이미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방다병은 곧 고집스러운 얼굴로 적비성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상대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 방다병. 양주만의 후계자가 고작 저런 기분 나쁜 소인배의 약 따위에 질 수는 없어! 방다병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집중하려 애썼다. 온몸이 절절 끓다 못해 녹아 퍼져버릴 듯했다. 적비성의 강기가 몸 안에서 펄펄 날뛸 때와 사뭇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었다. 고통 외의 감각은 단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양생우목 음생우금. 여기서 정말 죽게 되면, 이연화가 많이 괴로워하지 않을까? 음양전합 강하도현.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집중해야 해. 살아 나가야 이연화한테 계속 함께하자 떼를 쓸 수 있지 않겠어. 선지우구 장지내심. 뭣보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와 아비를 이곳으로 보낸 이연화가 또 죽도록 자책할 거야. 그건 정말 안 돼. 심구여일 오기귀원. 또 사람한테 큰 상처를 받으면, 이연화는 평생 산에 틀어박혀서 죽을 때까지 안 나올지도 몰라.
어금니를 부수려는 듯 꽉 악문 채, 방다병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양손이 허벅지를 뜯어내려는 것처럼 세게 움켜쥐었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그 목과 관자놀이에서, 붉고 굵직한 핏대가 의지와 상관없이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거친 숨소리밖에 울리지 않았지만, 작은 함정 안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전투에 균열이 생긴 것은, 함정 바깥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적비성 역시 눈을 반쯤 뜨고 미간을 좁혔다. 그 인기척은 공터에 멈추어 잠시 주저하다가, 곧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방다병! 아비! 너희 여기 있어?"
이연화를 여기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잠시 잊어버리고, 방다병은 그만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이연화의 외침이 정말 초조하고 불안하게 들린 탓이었다. 심악과 문걸은 잡았을까? 여랑 낭자는 무사하겠지? 그놈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궁금했으나 금방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상황을 알면, 이연화는 분명 이 안에 기를 쓰고 들어오려 들 터였다. 이연화는 두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더니, 곧 조용해졌다. 열에 휩싸여 혼절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방다병은 등골로 스친 짧은 오한을 느꼈다.
설마, 문걸과 심악이 함정의 해제 방법을 알려준 건 아닐까? 방다병이 가부좌를 풀고 급히 일어섰다. 그 동작만으로도 머리가 심히 어지러워, 청년은 비틀거리다 동굴 벽에 몸을 꿍 부딪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닫혔던 천장이 큰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위편에서, 이연화의 얼굴이 작게 나타났다. "방다병! 아비!" 황황히 부르는 소리에, 방다병이 마주 외쳤다. 목소리가 어느새 심히 잠겨 있었다.
"우리 둘 다 괜찮아, 그러니까...그러니까 밖에 나가서 기다려!"
"무슨 소리야? 괜찮으면 어서 올라와!"
이연화가 손짓했다. 방다병이 울고 싶은 심정으로 벽을 짚었다. 평소라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지금은 경공은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적비성은 이연화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쳤어? 그럼 내가 내려간다!" 이연화의 외침에, 방다병이 최대한 크게 고함쳤다. 초조한 나머지 오금이 저렸다. 살면서 지금처럼 이연화와 떨어져 있길 바란 적이 없었다.
"이연화, 우린 정말 괜찮으니까...들어오지 마!"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듯이, 이연화는 방다병의 말과 반대로 행동했다.
큰 소리도 없이, 이연화는 절벽을 가뿐히 타는 산양처럼 함정 아래로 내려왔다. "뭐하는-어서 나가!" 방다병이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이미 터질 것처럼 붉어졌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지금 이 안이 어떤 냄새로 가득할지, 자신의 코는 진즉에 마비되어 있었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당황하지 않았다. 방다병과 적비성의 상태를 기민하게 확인하고, 이연화는 오히려 깊이 안도한 듯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살아 있네."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방다병이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현기증이 났다.
"그래, 우리 살아 있어. 멀쩡하다고 했잖아! 그-어-그런데, 이상한 약 때문에 해독에 시간이...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좀...나가 있어 줘."
"농담해?"
이연화가 싸늘해 보일 만큼 성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방다병이 조금 놀라 충혈된 눈을 깜박였다.
"내가 여길 운으로 찾은 것 같아? 무슨 약에 당한 건지 다 들었으니, 입 다물고 앉기나 해."
그 양손이 방다병의 어깨를 꽉 눌러 앉혔다. 강압적인 힘에, 그렇잖아도 흐물거리던 방다병이 푹 주저앉았다. 휘둥그레진 눈의 청년을 앞에 두고, 이연화는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화의 손이 예고도 없이 자신의 옷깃을 확 벌려냈을 때, 방다병은 그만 악 소리를 지르며 동굴 벽을 향해 확 돌아앉았다. 이연화가 어이없는 투로 타박하며 방다병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너 왜 이래? 무슨 말도 안 되는 고집이야, 어서 돌아앉지 못해!"
"싫어! 싫다고, 이런 건 안 돼!"
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래고래 외쳤다. 이연화가 기막힌 얼굴로 입을 벌렸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닫힌 천장에서부터 어슴푸레한 빛이 떨어져,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상만 식별할 수 있었다. 축축한 벽에 이마를 눌러 댄 채 헐떡이며, 방다병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했는지를 되짚었다.
적비성과 함께 청망산에 다다라, 방다병은 오래지 않아 세우단의 은신처처럼 보이는 동굴을 찾았다. 여랑이 이동하며 흔적을 남겨준 덕이었다. 감각을 잔뜩 곤두세운 채 걷다 보니, 며칠 전 진법에 들어갔을 때처럼 몸이 둔하고 나른해졌다. 몸의 혈을 몇 군데 찍고, 방다병은 짜증스러운 얼굴의 금원맹주와 점점 더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언가가 감각을 흩뜨려놓고 있었으나, 충분히 집중하면 미세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좁았던 길은 조금씩 넓어져, 이내 둥그런 공터로 연결되었다. 방다병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일단의 무리가 모여, 흑단으로 만든 상자를 멘 채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문걸과 심악의 모습을 찾던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터 한편에, 기절한 여랑의 모습이 보였다.
"여랑 낭자!"
다급히 부르며 그 옆으로 날아들자, 모였던 사람들이 일제히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칼 뽑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적비성이 대도 자루를 잡은 채 그들을 노려보는 사이, 방다병은 얼른 여랑의 몸을 살폈다. 강력한 수면향 따위에 당한 듯, 다행히 맥이 크게 어지럽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안도한 방다병이 여랑을 눕히고 자리에 서자, 무리의 앞에 섰던 노인이 카랑카랑한 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뭐냐?"
"그때 그 젊은이로군. 금원맹주는 함께 오지 않았나?"
문걸이 말했다. 해괴한 소리를 들은 사람답게, 방다병은 적비성과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청년이 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금원맹주라니, 설마 이-그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을 말하는 건가?"
"금원맹에게 쫓기는 처지였으니,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군."
적비성이 차갑게 비웃었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문걸이 긴장한 눈으로 적비성을 훑어보았다. 적비성이 대도를 꺼내 그들을 겨누었다.
"상자를 내려놓고 알아서 꿇어라. 그리고 너, 약마의 비급을 내놔."
적비성이 심악에게 턱짓하며 쏘아붙였다. 노인에 대한 공경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태도였으나, 방다병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짐작대로라면, 눈앞의 노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과 비탄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무생벽이 품의 꾸러미를 반사적으로 단단히 안으며 상체를 틀었다.
"이건 내 거야. 내가 어렵게 구한 거라고! 어차피 약마한테는 별로 중요한 자료도 아냐. 내가 가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야."
"주인이 귀히 여기지 않는다 하여 남의 물건을 훔쳐도 된다는 것은 궤변입니다, 노인장. 대체 왜 그런 참담한 약들을 만든 겁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까?"
방다병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상식적으로 따지자, 문걸이 갑자기 방다병을 막고픈 것처럼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그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질문을 하면 피곤해지는데." 문걸이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무생벽은 갑작스레 영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상기되더니 언성을 높였다.
"돈이라니? 돈이라니! 내 목적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약을 만든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사람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짓밟고, 각인을 강제시키고, 억지로 웃거나 울도록 만드는 약의 대체 어디에 사람을 위하는 구석이 있다는 거예요? 개에게도 안 먹힐 논리네요!"
화가 난 방다병이 빠르게 쏘아붙이자, 무생벽이 입술을 씰룩이며 이죽거렸다.
"형탐이 아니랄까봐, 꼭 그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군. 난 내 약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뭐라고요?"
"정말 사랑하는데, 그 사람의 시선 한 조각도 못 받는 좌절감을 아나? 용기를 내어 진심을 전했는데, 그 차가운 마음을 돌릴 수 없을 때의 절망감을 알아? 나는 하루하루 말라가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다는 그 비참함을 아느냔 말이야."
무생벽이 정말 억울한 얼굴로 늘어놓았다. 방다병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마음에 괴로워하고 복잡해진 적은 있었지만, 노인의 논리는 어쩐지 이상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약들을 만들었다고요? 못 이룰 연심을 품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해가 되지 않아 우그러진 얼굴로 묻자, 노인이 끽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눈으로 어두운 번득임이 스쳤다.
"처음에는 내 바람이었지. 근처에 한 음인이 살았거든, 꽤 고왔어. 친절하게 대했는데도 날 사람으로 안 보기에, 약을 써서 각인하도록 만들었지. 그랬더니 싫다고 죽어버리지 않았겠어? 그때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그래서 오래도록 여러 약들을 고안했지. 많은 사람의 감정과 욕망을 주물러, 결국 그들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도록 만들었어. 그런데, 생각보다 내 약이 아주 인기가 좋더라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지. 해서 그들과 여기, 부단주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박차를 가하던 차였는데...너희 때문에 퍽 귀찮게 됐어."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던 심악이, 험한 눈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다병은 오물을 귀에 부은 듯한 기분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기와 각인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약을 써서 상대를 죽게 만든 다음에도, 반성하지는 못할망정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평생을 바쳤단 말입니까? 그 이기심이 징그러울 정도네요. 그 이야기의 어디에 사랑이 있단 말입니까?"
"불쾌한 데다 비겁하군. 맹에 가입하러 왔다면 죽였을 거다."
적비성이 경멸스러운 얼굴로 던졌다. 방다병이 힐끗 그 모습을 보았다. 불건전한 집착의 대상이 되어본 사람으로써, 적비성이 느끼는 혐오감은 매우 정당했다. 그 각려초조차 적비성의 마음을 약으로 돌리겠다는 발상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자와 결탁한 당신도, 어떤 인간인지 알 만하군." 방다병이 문걸을 노려보며 비난했다. 문걸이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니 뭐니 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소. 난 그저 돈을 따지는 사람이오, 그런 약의 수요가 많은 건 내 탓이 아니지. 나는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에 맞춰 행동했을 뿐이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약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 내게 고맙다며 눈물까지 흘린 자들도 숱하다. 네놈들이 아직 고통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야. 누구를 진심으로 마음에 둔 적도 없는 것이지."
무생벽이 혀를 차며 얕잡아보는 소리를 했다. 방다병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는 소리를 참 길게도 하는군. 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건강하고 평안하길 바랄 따름이지 내 이기심 때문에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적비성이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눈을 굴렸다. 대도를 쥔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뭐하러 이런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모두 죽여 없애면 될 일을."
"죽이면 안 되지, 심문해서 앞뒤를 밝혀야 하는데."
방다병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심악이 문걸에게 꾸러미를 넘기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수하들과 함께 칼을 빼어 들고, 문걸이 적비성을 향해 물었다.
"그 대도를 보니, 설마 당신이 금원맹주요?"
"알고도 투항하지 않는 걸 보니, 주제를 모르는 놈이구나."
"우리를 놓아주면, 앞으로 우리가 얻는 수익의 반절을 금원맹에 바치리다. 그 정도로 합의할 수는 없겠소?"
문걸이 빠르게 간청했다. 그 지체 없는 판단을 보니, 아마 그들과 마주치기 전부터 고려하던 사항인 듯했다. 설마 금원맹주가 문걸과 손을 잡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방다병은 힐끗 적비성을 곁눈질했다. 어쨌든 금원맹은 정파 집단이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도의나 명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맹 내의 반역이 남긴 후유증을 처리하느라 큰 인력과 자원이 들어갔으니, 상대의 제안을 수긍하는 척하여 이득을 보려 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비성은 한 차례 코웃음을 치고는, 문걸의 인상착의를 위아래로 살폈다.
"네놈이 문걸이냐?"
"그렇소."
"네놈은 내게 제안할 자격이 없다. 그냥 죽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풍백양이 폭발했다. 적들이 모두 칼을 들어 방어했으나, 심후한 내력은 강맹한 폭풍처럼 뻗어 나가 그들의 몸뚱이를 일시에 날려버렸다. 자리에 넘어지지 않고 버틴 사람은 문걸뿐이었는데, 남자는 균형을 바로잡기 무섭게 지시했다. "이기는 건 무리다. 왼편으로 도망쳐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한 방향으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빠르게 뛸 수 없는 심악의 뒷덜미를 문걸이 콱 틀어쥐었다. 노인은 볼품없는 비명을 질렀으나 놓으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멈추는 순간, 귀신처럼 그들을 쫓아오는 두 검객의 손에 어딘가가 썰려나갈 가능성이 농후한 탓이었다.
"다들 검이 아닌 경공만 연습했나 보군."
적비성이 불만스레 읊조렸다. 적비성의 말대로, 상대의 경공은 아주 준수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협소하고 복잡한 동굴 지대라, 익숙하게 이동하는 사람들을 비슷한 속도로 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벽을 디디며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튼 방다병이 말했다.
"조심해야겠어, 또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몰라."
"기관 따위는 네가 잘 확인해라, 방다병."
"뭐? 이렇게 빨리 이동하면서 확인하기는-기다려!"
불평을 끝내지 못하고, 방다병은 기겁하여 외쳤다. 적비성의 발이 수상하게 튀어나온 바닥을 슬쩍 내리누르자, 천장에서 흰 독무가 터졌다. 혀를 찬 금원맹주는 훌쩍 뛰어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다음, 노기에 형형해진 눈으로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곧 그 손바닥에서 동굴이 붕괴되지 않을까 염려될 만큼 강렬한 일격이 터져 나왔다. 방다병은 실제로 공간 전체를 은은히 뒤흔드는 진동을 느꼈다. "조심해, 여기 동굴이야!" 방다병이 균형을 잡으며 소리쳤다. 내력을 만난 독무가 순식간에 앞쪽으로 밀려나자, 도망가던 이들 중 두엇이 토혈하며 나자빠졌다. "더 빨리, 빨리 달려!" 물론 문걸은 쓰러진 수하를 돌아보지 않았고, 심악은 호들갑스럽게 그 등을 두드렸다.
그들은 곧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대치하게 되었다. 좁은 길목을 돌아 빠져나가니, 갑작스레 작은 굴방이 나타났다. 작은 횃불과 함께 잡동사니 몇 개가 놓인 막다른 장소였다. 문걸을 비롯한 수하들이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심악이 얼굴을 붉힌 채 악을 썼다.
"이런 멍청한 놈들, 자기들이 쓰던 공간에서 길을 잃는 천치가 어디 있어!"
"조용히 좀 하시오."
문걸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방다병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주위를 짧게 확인했다. 눈에 보이는 함정이나 기관 따위는 없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은 문걸이 칼 든 손을 늘어뜨렸다. 저항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만 묻겠소. 당신이 금원맹주라면, 그쪽은 누구요?"
문걸이 방다병에게 물었다. 방다병이 칼을 바로 들며 대답했다. "나는 백천원의 형탐, 방다병이오." 문걸의 눈으로 이채가 돌았다. 그 입가에 곧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래서...세상에 그런 고수가 몇씩이나 있을 리는 없지. 이번 일은 영 운수가 사납군."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문걸이 다시 칼을 들었다. 그 얼굴이 일견 단호한 빛을 띠었다.
"내 비록 당신들을 이기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싸움 한 번 없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오."
"해보거라."
상대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적비성이 비뚤어진 미소를 지은 채 한 발을 내디뎠다. 쿵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마치 산맥이 움직이는 듯한 존재감이었다. 묵직한 공격을 거푸 날리는 적비성의 옆에서, 방다병은 깊은 숲을 누비는 사슴처럼 빠르고 깔끔하게 날아올라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기에 휘말린 사람들이 비틀거리거나 뒤로 넘어졌다. 문걸이 악에 받친 얼굴로 망토를 들추었다. 바늘을 비롯한 암기들이 몇 차례에 걸쳐 비처럼 쏟아졌고, 문걸의 수하들은 그 틈새마다 기합을 내지르며 협공을 시도했다. 때로는 무생벽의 독과 약들이 펑펑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터지기도 했다.
비풍백양은 인간의 노력을 비웃는 재해처럼, 상대의 공격을 짓누르고 부수며 거푸 튕겨냈다. 바늘도 검도, 독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협소한 동굴 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 위력을 한풀 깎았음에도, 병장기와 사람의 몸뚱이가 번갈아 동굴 벽을 치고는 떨어졌다. 쓰러진 자들이 치미는 피를 삼키며 오기로 일어서 달려들어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적비성이 가하는 큰 일격의 사이사이에, 방다병의 상이태검은 상대의 흔들림을 빠르고 깨끗하게 짚어 공략해 들어갔다. 때로는 비풍백양의 연장선처럼 보일 만큼 미려한 연계를 펼치기도 했다. 서로를 비교적 잘 아는 두 고수의 앞에서, 소수 대 다수란 조건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결국 승패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앞으로 함께 싸울 일이 많아질지도 모르니, 합공에 익숙해져야겠네. 방다병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그 시야로 이상한 것이 꿈틀거렸다. 심악이 굴방의 하나뿐인 출입구로 빌빌거리며 다가가던 참이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방다병이 그편을 향해 검기를 날리자, 문걸이 얼른 그 앞을 막아섰다. 우두머리에게서 보이지 않는 신호라도 받은 것마냥, 흩어졌던 수하들이 일순 문걸의 주변으로 집합했다. 방다병의 뒷목으로 불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아비-." 상대에게 경고하기 위해 외친 순간, 가장 먼저 도망간 심악이 벽의 어딘가를 눌렀다.
발밑이 어찔하게 꺼져들었다. 굴방의 삼분지 이가 쑥 꺼질 만큼 큰 함정이었다. 충격에 대비하던 방다병의 눈앞에서, 그나마 함정의 가장자리에 섰던 적비성이 벽을 딛고 오르려 들었다. 하지만 문걸이 아래편으로 중침의 비를 쏟아내자, 그 일격을 막느라 발이 밀려나 위태로운 모양새가 되었다. 적비성의 눈으로 살기가 타올랐다. 금원맹주는 추락하면서도 오른손을 들어, 보이지 않는 공격을 집요하고도 무자비하게 쏘아올렸다. 문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방다병이 적비성의 강기에 당했을 때처럼, 문걸의 몸뚱이가 퍽 소리와 함께 붕 떠올랐다. 싸움의 여파로 이미 피를 흘리고 있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한 움큼 터져 나왔다. "부단주!" 수하들이 얼른 그 몸을 부축했다.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적비성도 방다병도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절망하지 않았다(적비성은 위를 향해, 네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고 쏘아붙였다). 경공에 조예가 있다면, 미끄럽고 높은 곳이라도 별다른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얼른 자세를 다잡고 위를 향해 도약하기 전, 입을 벌렸던 함정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불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몇 개의 독 자루가 안으로 쏟아져 펑펑 소리와 함께 터졌다. 밀폐된 공간이었기에, 내력으로 날려본들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입과 코를 막았으나, 안개처럼 내려앉은 약의 일부는 체내로 흘러들었다.
방다병이 헉 소리를 내며 상체를 수그렸다. 몸 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바늘로 후비듯이 배가 아프더니, 곧 정신이 혼몽해지고 전신에서 뜨거운 땀이 쏟아졌다. 익숙했으나 전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함정 바깥에서 심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거기서 고통스럽게 죽어봐라. 내가 제일 최근에 만든 약이야. 희락기가 시작된 후 한 시진 안으로 음인과 정을 통하지 않으면, 열 때문에 혈맥이 뒤틀려 죽거나 폐인이 될 거다. 실험에서도 살아남은 놈은 없었어. 딱 봐도 양인인 둘이 갇혔으니, 뭐 어쩔 방도도 없을 테지.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어지면, 스스로 백회혈을 치거라."
심악이 낄낄거리며 조롱했다. 그러나 방다병은 그 말에 마주 대거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토하지 않기 위해 벽을 짚었다. "그럴...그럴 필요가 있었소?" 문걸의 꺼져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적비성의 공격에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심악이 코웃음을 쳤다. "나를 그리 멸시한 놈들에게, 이 정도가 뭐 그리 잔혹한가?" "우리에겐 아직 큰 적이 남았소. 굳이 그의 화를 살 필요는 없었는데...일단 갑시다.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지." 한숨을 쉰 문걸이 수하들과 함께 멀어졌다.
방다병이 이를 갈았다. 시야가 제멋대로 번쩍였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굳게 닫힌 함정이 야속했다. 갇힌 상황에서 무턱대고 강한 검기를 쏘아댈 수도 없었다. 방다병의 눈이 어두컴컴한 공간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듯한 이 깊고 좁은 구멍은, 그저 반질반질할 뿐 별다른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벽에 남은 손톱자국들만 눈에 들어와, 마음이 한층 스산해졌다. 안에서는 해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걸까? 방다병이 흐릿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석수촌에서 적비성과 함께 중독되었던 상황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는 어떻게 위험에서 벗어났더라? 백의 대협의 모습을 떠올린 방다병이, 헐떡이는 숨에 섞어 말했다.
"이연화가...곧 이연화가 올 거야."
"이연화가 오면 더 문제다."
적비성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방다병의 눈썹이 팔자로 일그러졌다.
"나도...나도 알아. 못 들어오게 해야 돼. 우릴 보면 분명히...."
"속 터지는 짓을 하겠지. 들어오려 하면...알아서 말려라."
신음처럼 지시하고, 적비성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은지 물으려던 방다병이 눈썹을 들었다. 적비성은 고행자처럼 꿋꿋이 앉아 운기할 자세를 취한 채, 내력을 운용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삼킨 방다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락기가 이만큼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수십 개의 송곳처럼 몸 안쪽을 들쑤시는 열기에 딱 기절할 것만 같았다. 통증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방다병이 일부러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괜찮겠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했잖아."
"이 따위 허접스러운 약에 죽는다면...그냥 죽는 게 낫지. 전신의 경맥이 끊겼을 때에 비하면...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감은 적비성이 긁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짙은 눈썹 위로 이미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방다병은 곧 고집스러운 얼굴로 적비성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상대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 방다병. 양주만의 후계자가 고작 저런 기분 나쁜 소인배의 약 따위에 질 수는 없어! 방다병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집중하려 애썼다. 온몸이 절절 끓다 못해 녹아 퍼져버릴 듯했다. 적비성의 강기가 몸 안에서 펄펄 날뛸 때와 사뭇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었다. 고통 외의 감각은 단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양생우목 음생우금. 여기서 정말 죽게 되면, 이연화가 많이 괴로워하지 않을까? 음양전합 강하도현.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집중해야 해. 살아 나가야 이연화한테 계속 함께하자 떼를 쓸 수 있지 않겠어. 선지우구 장지내심. 뭣보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와 아비를 이곳으로 보낸 이연화가 또 죽도록 자책할 거야. 그건 정말 안 돼. 심구여일 오기귀원. 또 사람한테 큰 상처를 받으면, 이연화는 평생 산에 틀어박혀서 죽을 때까지 안 나올지도 몰라.
어금니를 부수려는 듯 꽉 악문 채, 방다병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양손이 허벅지를 뜯어내려는 것처럼 세게 움켜쥐었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그 목과 관자놀이에서, 붉고 굵직한 핏대가 의지와 상관없이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거친 숨소리밖에 울리지 않았지만, 작은 함정 안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전투에 균열이 생긴 것은, 함정 바깥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적비성 역시 눈을 반쯤 뜨고 미간을 좁혔다. 그 인기척은 공터에 멈추어 잠시 주저하다가, 곧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방다병! 아비! 너희 여기 있어?"
이연화를 여기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잠시 잊어버리고, 방다병은 그만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이연화의 외침이 정말 초조하고 불안하게 들린 탓이었다. 심악과 문걸은 잡았을까? 여랑 낭자는 무사하겠지? 그놈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궁금했으나 금방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상황을 알면, 이연화는 분명 이 안에 기를 쓰고 들어오려 들 터였다. 이연화는 두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더니, 곧 조용해졌다. 열에 휩싸여 혼절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방다병은 등골로 스친 짧은 오한을 느꼈다.
설마, 문걸과 심악이 함정의 해제 방법을 알려준 건 아닐까? 방다병이 가부좌를 풀고 급히 일어섰다. 그 동작만으로도 머리가 심히 어지러워, 청년은 비틀거리다 동굴 벽에 몸을 꿍 부딪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닫혔던 천장이 큰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위편에서, 이연화의 얼굴이 작게 나타났다. "방다병! 아비!" 황황히 부르는 소리에, 방다병이 마주 외쳤다. 목소리가 어느새 심히 잠겨 있었다.
"우리 둘 다 괜찮아, 그러니까...그러니까 밖에 나가서 기다려!"
"무슨 소리야? 괜찮으면 어서 올라와!"
이연화가 손짓했다. 방다병이 울고 싶은 심정으로 벽을 짚었다. 평소라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지금은 경공은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적비성은 이연화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쳤어? 그럼 내가 내려간다!" 이연화의 외침에, 방다병이 최대한 크게 고함쳤다. 초조한 나머지 오금이 저렸다. 살면서 지금처럼 이연화와 떨어져 있길 바란 적이 없었다.
"이연화, 우린 정말 괜찮으니까...들어오지 마!"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듯이, 이연화는 방다병의 말과 반대로 행동했다.
큰 소리도 없이, 이연화는 절벽을 가뿐히 타는 산양처럼 함정 아래로 내려왔다. "뭐하는-어서 나가!" 방다병이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이미 터질 것처럼 붉어졌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지금 이 안이 어떤 냄새로 가득할지, 자신의 코는 진즉에 마비되어 있었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당황하지 않았다. 방다병과 적비성의 상태를 기민하게 확인하고, 이연화는 오히려 깊이 안도한 듯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살아 있네."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방다병이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현기증이 났다.
"그래, 우리 살아 있어. 멀쩡하다고 했잖아! 그-어-그런데, 이상한 약 때문에 해독에 시간이...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좀...나가 있어 줘."
"농담해?"
이연화가 싸늘해 보일 만큼 성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방다병이 조금 놀라 충혈된 눈을 깜박였다.
"내가 여길 운으로 찾은 것 같아? 무슨 약에 당한 건지 다 들었으니, 입 다물고 앉기나 해."
그 양손이 방다병의 어깨를 꽉 눌러 앉혔다. 강압적인 힘에, 그렇잖아도 흐물거리던 방다병이 푹 주저앉았다. 휘둥그레진 눈의 청년을 앞에 두고, 이연화는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화의 손이 예고도 없이 자신의 옷깃을 확 벌려냈을 때, 방다병은 그만 악 소리를 지르며 동굴 벽을 향해 확 돌아앉았다. 이연화가 어이없는 투로 타박하며 방다병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너 왜 이래? 무슨 말도 안 되는 고집이야, 어서 돌아앉지 못해!"
"싫어! 싫다고, 이런 건 안 돼!"
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래고래 외쳤다. 이연화가 기막힌 얼굴로 입을 벌렸다.
https://hygall.com/587638350
[Code: ee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