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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2 00:20
나비는 사건 수사에 쓸만한 연줄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커스단임
서커스단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한동안 머무니까 다양한 소식을 물어다주는 데 딱이었겠지 그런데 그 서커스단 안에서 단 하나 나비에게 그런 쪽으로 도움이 안 되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축
왜냐면 축은 말을 못하는 데다가 글도 잘 몰랐음 나비가 인사하면 늘 활짝 웃는 얼굴 분장을 한 채로 허리를 숙이거나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임 그리고 그게 그나마 소통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교류의 전부였음

축은 작은 단칸방에서 분장을 하고 서커스 무대에 나와서 작은 마술 공연을 선보인 다음 수금을 함 아주 가끔은 꽃이나 풍선을 들고 있거나 서커스 광고 전단지를 나눠주기 위해 골목길에 서 있기도 했음

그날은 그렇게, 가끔씩 축이 골목길에 서 있는 날이었음
상하이 조계지의 설리번 아파트 앞에 제법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 한 무더기가 축이 들고 있던 전단지와 꽃을 갖고 놀고 있었음 아이들은 축에게 빼앗은 전단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사방에 날리고 있었고 꽃잎을 뜯어 흩뿌리는 중이었음
축은 진한 분장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아이들의 행동거지를 바라보고 있었음 마치 하나하나 그 순간을 새겨넣듯이

나비는 시가를 피우려 옥상에 올라갔다가 제 앞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주웠음 종이비행기 날개 한쪽에는 접혀서 모양이 온전하진 않았지만 대충 뜻을 알 수 있는 글자가 인쇄돼 있었음 나비의 정보망 중 하나가 이곳에 돌아왔다는 소식이었음


나비는 옷을 갈아입고, 한손에 케인을 들고 아파트를 나섰음 서커스단을 한번 찾아가 볼 요량이었음 그때,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남자가 눈에 띄었음 이상하게도 존재감이 희미했지만 나비는 직감했음 무언가 사건의 예고편을 자기가 지금 보았다는 느낌이었음


나비는 남자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음 남자는 뚫어져라 아이를 보고 있었고 남자의 두터운 손에는 힘줄이 섰음
나비는 남자의 뒤에 떨어져 있던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주웠음 그리고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꽃을 내밀었음

남자의 시선이 풀렸음 그리고 꽃을 내민 나비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음

당신 것인가요? 오랫만에 보네요, 축.

탐정의 입술이 움직였음 축은 제 앞에 내밀어진 장미와 탐정의 입술을 보았음 축은 그것을 알고 있었음
언젠가의 탐정은, 이 장미와 같았음
축의 눈앞이 장미의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음 그때처럼 나비를 탐하고 싶었음 지금 이 길가에 흩뿌려진 꽃잎같이, 난잡하게 흐트러진 그를 다시 보고 싶었음 만일 그걸 그가 알았다면 제 앞에 이렇게 나서서 제게 아는 척을 할 리가 없겠지만


축은 손을 뻗어 나비의 팔목을 잡았음
나비의 맥박이 축의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음 너무나도 평온한 그 리듬이 축의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동시에 다른 충동을 이끌어내고 있었음


저, 서커스단을 가려고 하는데, 날 데리고 가 줄래요?


축은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어, 길을 안내했음
축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발길을 내딛는 나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그 뒤로 축의 그림자가 숨어 들었음 진득하게 달라붙어, 하나가 된 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룡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