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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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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는 비로소 좀 제대로된 해방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궁에 갇혀 노심초사할 때에 비하면 나들이는 물론 좋았다. 극장 사업을 감독할 수 있는 기회도 좋았다. 그러나 구태여 불편한 차림새로 나온 건 두고두고 성가셨고, 또 음행을 들켰을까 걱정하느라 심력을 소모해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고 싶어졌다. 때마침 들어선 숲은 괜찮은 쉼터였다. 달빛이 비치는 숲길을 걷는 동안 황제는 묵묵히 걸음을 맞췄다. 덕분에 완만한 산비탈의 중간쯤 이르렀을 때 마치다는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부부는 참나무 사이를 거닐며 오붓한 시간을 만끽했다. 잔잔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숲 속 풍광을 완상하노라면 부귀와 권세를 다 버리고 오두막이나 한채 짓고 싶었다. 하지만, 무리겠지. 오래 다물려있던 입이 열렸다.
"저희들의 순간도 항상 고요하였으면 좋겠사온데.. 밖에서나 안에서나 바람 잘 날 없으니 소첩의 팔자에 고요란 없는가 봅니다."
"밖이 시끄럽다는 건 궁 생활이 혹독하다는 뜻이겠고, 안에서도 바람잘 날 없단 말인가? 우리 사이가 그렇단 말이오?"
새침하게 황제를 올려다본 마치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둥지둥 정신을 못 차리겠사옵니다. 분위기가 좋을 때도 꼭 마지막엔 곤란하게 하셔놓고서는 어찌 시침을 뚝 떼시옵니까."
"그래서 싫소?"
황제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마치 일련의 소동에서 아무런 심각성도 실감하지 못하는 투였다. 마치다는 약이 올랐다.
"알아서 헤아려 주시옵소서!"
"어허. 알았습니다, 알았어. 내 자중하겠소. 그대의 반응이 하도 재미있어 못 참겠지 뭐요."
"...."
"이렇게 이해해보시오. 내 고양이를 데려가 먹이로 약올려 본 적이 한번도 없소?"
"없습니다."
단호한 귀비의 대답에 황제는 잠시 눈가를 씰룩였다.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되먹은 심성이길래 소동물을 놀릴 장난기조차 없나.
"그럴리가. 단 한번도?"
"그런 장난을 왜 칩니까?"
"귀엽잖아."
"됐습니다. 그만하시지요."
마치다는 작게 손을 내저었다. 부부는 애정어린 것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었다. 서로 태도를 합의하기엔 황제는 너무 장난기 넘치고 고약했다. 새삼 그 사실을 통감한 마치다는 패배한 채 논쟁을 빠져나왔다. 그는 사실 숨쉬듯 쏟아지는 장난질에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의 적응력을 예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참고자 하면 버틸 만은 하다. 다만, 이런 것마저 적응해내는 자신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꽤 걸었소. 다리가 아프진 않소?"
"소첩은 보기보다 튼튼하옵니다. 미오산을 홀몸으로 누비던 왕자를 잊으셨사옵니까."
"글쎄. 그래도 걱정이오. 그대는 대체로 어딘가가 아팠잖소.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튼튼하다 자신하기엔 민망할 만큼 오늘내일 하던 시절이 있긴 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다는 그게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일테지.
"이제 소첩에겐 의지처가 있지 않사옵니까. 쉬이 몸져 눕지 않습니다."
"시름을 덜어주시는구려. 그대가 아프면 내탓이라는 생각에 몹시 미안했건만. 그런데, 실은 다리가 아프지 않냐고 물었던 건 종아리의 상처를 염두에 둔 것이었소. 아직 회복이 다 안 되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며칠간 작열감이 상당했지만 굳이 말씀드리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 상처보단 태후와 태감의 모진 대접이 더 아팠다. 아군이 생겼다 믿었을 때조차 그들은 철저히 정치적으로 귀비를 좌지우지했다. 아군이라고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는 냉엄한 현실을 이해하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꼭 매질을 동원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고육책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생각하옵니다. 허나 그보나 나은 방법은 없었을지... 소첩이 다쳐서가 아니라 그 방법이 폐하의 가슴을 찢어놓지 않았사옵니까."
마치다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제 머리로 아무 방안도 내놓지 못했으면서 정작 고비를 넘겨준 태감과 태후를 나무라다니. 양심이 있는가? 궁 생활이란 참 어렵다는 한탄을 다시금 속으로 삼키는 순간이었다.
마치다는 시련을 꾸역꾸역 수용했지만, 황제는 근래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무소불위 권력을 위해 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인 역학들을 겸허하게 수용했다. 그런데 매 맞은 귀비가 편전 앞에 등장했을 때, 그리고 숙부가 준비한 연극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을 때, 거대한 회의감이 찾아들었다. 연기일 뿐임에도 귀비에게 상처주는 잔인한 방식이 싫었다.
밤마다 무희들의 춤을 시종 건조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황제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달라질 시기가 도래한 건 아닐지... 잔인한 제왕에서 자애로운 제왕으로. 겁주고 조종하기보다 신의를 쌓아 따르게 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폭군으로 변하는 고역을 이쯤에서 멈추면 안 될까. 모두를 위해서. 하지만 자애로운 자신의 모습을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우스운 망상 같기만 하고 아무튼 자신이 없었다. 분명 이 제국의 역사 속 어떤 황제들은 두터운 인망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나 적어도 스즈키 노부유키는 그런 통치법을 몰랐다. 게다가 그는 이제 겨우 귀비 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 한 걸음 발전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누굴 어떻게 더 믿을지. 오랜 시간 잔인함으로 쌓아온 업이 과보로 돌아오면 그 때는 또 어찌할 것인가? 천하를 호령해도 결국 인간이다.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똑똑히 기억하므로 돌려받을 과보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태세를 바꿔 자애로운 제왕이 되더라도, 언젠가는 과보를 이겨내기 위해 다시 잔인한 괴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괴롭다. 모든 것이 악화되기만 하는 굴레에 빠져드는 것 같다. 어쩌다가 이런 굴레에 접어들게 되었는가? 한때는 평범하게 마음을 열고 벗도 여럿 둔 적당히 잊혀진 황자로 살았는데! 고만고만한 친우와 우정을 나누며 행복했고 실없는 장난질로 종일 깔깔댄 날이면 옥좌에 앉지 않아도 천하가 내 것이었다. 헌데 지금의 자신은 무엇인가. 피바람을 일으켰던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자신 안에 온전히 보존된 것이 하나라도 있나? 황제는 갑자기 내면의 취약함을 느꼈다. 무의식중 소매에 감춘 가죽주머니를 더듬었다. 전신의 핏기가 빠져나가고 호흡이 가빠지며 흑암중에 홀로 남겨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 안돼. 이 철저한 유폐로부터 해방시켜줘.
그러나, 질끈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 황제의 앞엔 달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는 귀비의 얼굴이 보였다.
"노부. 저 여기 있어요."
걱정으로 올려다보는 귀비의 따뜻하고 총명한 눈과 마주치자 격하게 고동치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오한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뭇 편안해졌다.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굴레에 뛰어듦으로써 그는 귀비를 얻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황제는 나약함을 떨쳐내고는 마치다의 어깨를 안았다.
“내가 그대의 의지처라 했소? 그대야말로 진정한 내 의지처요.”
“괜찮으시옵니까?”
“괜찮고 말고. 쓸데없는 생각을 좀 했소.”
“소첩이 들어도 되는 이야기이옵니까?”
“안 될 건 없소만 별 이야긴 아니오.”
“허면 소첩에게 들려주시겠사옵니까?”
“나의 숙부께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고효율을 내는데 능한 분이오. 제왕의 권위를 휘두르는 법을,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숙부님께 배웠지. 배운 것에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소만... 요즘은 혼란스럽소. 다른 스승에게 제왕학을 배웠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으면, 그랬어도,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어떤 황제가 되었을까.”
유일하게 한 번, 태감은 잔인하여서는 안 된다고 한 적 있었다. 부부 사이 만큼은 현명함으로 처신해야 한다던가. 그러나 그 조언을 들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제왕의 역할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때때로 미흡함을 보충하고자 더욱 잔인함에 심취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 외엔 무엇이든 서툴렀다. 부부사이에 대한 충고? 황제는 무시해버렸다. 그 결과 귀비는 수모로 점철된 궁 생활을 한다. 헌데, 터무니없지 않나? 실컷 조카를 괴물로 만들고는 온건하게 처신하라니 이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소리냐는 말이야. 기실 귀비에게만 수모가 아니라 황제에게도 수모다.
마음 깊이 분노가 끓었다. 너무 이골이 난 나머지 숙부가 남긴 것은 교훈이건 무엇이건 모조리 제거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남긴 상처까진 참았다. 그러나 귀비에게 매를 댄 것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 만일 그 고육책에 충분한 이유가 없었다면 더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태만죄를 반드시 물으리라. 스승에게 배운 것을 스승에게만 휘두르지 말란 법은 없지.
"내 숙부께 다시는 그대 몸에 작은 상처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당부드렸소. 이런 일이 또 있거든 곱절로 갚아 드릴 거라고 했더니 송구하다더군. 빌어먹을 송구."
마치다는 적잖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예?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소."
"태감께서 실의에 빠지셨겠습니다. 그래도 숙부님 아니십니까."
"최고의 제자가 되려는 것 뿐이오."
황제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런 뒤에 부부는 살벌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기로 했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어두운 정치 이야기만 이어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들은 종종 달려드는 숲모기나 벌 같은 벌레를 대신 쫓아주며 오늘의 나들이가 어땠는지, 그리고 황후가 되면 황후전을 어떻게 꾸밀 것인지, 설레는 주제만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간질거리는 대화로 넘어가기 전 마치다는 이 이야기 만큼은 꼭 했다. 이조판서를 적으로 돌린 지금 신임할 수 있는 신하를 한 명만 고르라면 무조건 태감이니 절대 그와 척을 져서는 안 된다고. 황제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에 떨리는 근육은 조용히 타오르는 분개를 보여주었다. 그 때, 마치다는 그 적개심이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짙게 받았다. 아마 그 감정은 스승의 권위, 손윗어른의 지위, 그리고 태감에 대한 존경심 따위에 묻혀 있었다가 종아리 사건을 통해 용암처럼 지층을 뚫고나온 것 같았다. 본디 고운 본성을 억지로 갈아엎은 상흔은 깊고 오래되었을 터. 시간이 흘렀다고 그냥 치유되었을 리 없다. 마치다는 황제가 품은 감정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민감한 시국에 감정을 태도로 내세우면 심각한 자충수가 될 것 같아 무척 심려스러웠다.
타카노는 앞머리를 쥐어 뜯었다. 조금 전까지는 인형을 구입하고 계시더니 찾으려고 하니까 또 금방 사라지셨다. 장사를 끝낸 상인에게 부부의 행방을 묻자 상인은 건성이지만 분명하게 수목림 쪽을 가리켰다. 역시나...! 타카노는 어둑한 수목림으로 내달리며 '도련님', '아기씨'를 외쳐불렀다.
"타카노! 불 여깄다!"
야산 입구에서 타니가 숨을 몰아쉬며 따라붙었다. 그는 횃불 한 개를 타카노에게 넘기고, 자신도 한 개를 치켜들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봐. 헉헉."
"쉿."
타카노는 바닥에 불을 비치고 흙바닥을 매만졌다. 아주 최근에 생긴 두 사람 분의 통행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길 지나가신 게 확실했다.
"아, 답답해!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이유 좀 알자!"
"누군가가 귀비마마를 노리고 있어. 잘못하면 말벌의 습격을 받겠어."
타니는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버럭 외쳤다.
"뭐라고? 그럼 귀바마마만 당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역... 읍!"
타카노의 큰 손이 타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역시 같은 단어를 떠올렸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런 말은 꼭 필요한 때에만 하는 것이다. 하여간 심각한 상황이었다.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국 전체가 파란에 휩싸인다. 타카노는 횃불을 든 채 굳어버린 타니에게 조용히 하라고 충고하며 손을 뗐다.
"이야기는 나중에. 그보다, 들려?"
타카노가 어둠속을 의식하며 질문하자 타니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웅대는 소리는 일단 들리기 시작하자 꽤 컸다. 독말벌떼였다.
"요동치지 않고 한곳에서만 소리가 나는 걸 보아 아직 무슨 자극을 받은 것 같진 않아. 아직 본격적인 활동철이 아니라 움직임이 둔한 까닭도 있겠군."
벌떼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수는 꽤 많은 듯 했다. 요즘 들꽃이 만개하며 말벌 세력이 늘어서, 잘못 건드리거나 냄새 따위로 자극하면 멀쩡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규모로 추정되었다. 유인제나 다름없는 나무패를 달고 있는 귀비마마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찾아서 모시고 나와야지.”
"빌어먹을... 아, 진짜 빌어먹기나 할 걸! 그 몇 푼에 넘어가서..."
오열 섞인 투덜거림을 내뱉으면서도 타니는 부지런히 타카노를 따라갔다. 그들은 횃불로 숲을 밝히며 산길에 진입했다. 적막한 숲에서 다시 황제와 귀비를 부르자 곧 응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산중에 굽이치는 황제의 목소리. 아. 하늘이 도왔다. 이렇게 빨리 찾다니. 이제 최대한 조심히 돌아나오시게 하면 된다!
"그곳은 독말벌떼의 위협이 잦아 위험합니다! 속히 돌아오시옵소서!"
잠시 조용했다. 바람을 타고 맴도는 벌소리를 듣고 계시는 듯 했다. 이윽고 답이 들려왔다.
"지금 하산중이다. 너희는 벌떼를 멀리 유인하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귀비마마께서 벌떼를 유인하는 물건을 소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혹 노리개 옆에 나무패가 달려있지 않습니까?"
또 다시 조용했다.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억누르고 또 억누른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나무패가 너무 얇아 억지로 떼어내려다가는 파손이 되겠군. 자칫 냄새가 퍼져 말벌을 자극하겠는데!"
"저희가 횃불을 가지고 그리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안전을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하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타카노는 횃불을 치켜들었다. 불길로 방어하면 무방비하게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타카노는 말벌 소리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산길을 탔다. 그러나 강운의 사내인 그에게도 운세가 나쁜 날이 있는지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말벌들은 불청객을 인지하고 언제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위협비행을 하던 한 마리가 집요하게 그들을 쫓더니
"악! 망할. 나 쏘였어!"
타니가 먼저 당하고 말았다. 그는 격통이 밴 신음을 씹어삼키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타카노는 비틀거리는 타니를 부축했다.
“아윽.. 아파..”
결국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대로 황상께 이른다 해도 벌떼를 끌고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전진해서는 안 될 상황. 하지만 멈춰선다 해도 벌떼는 나무패가 흘린 냄세의 궤적을 타고 기어이 두 분을 덮칠 터이니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이 있기는 했다. 타카노 자신이 미끼가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목숨을 부지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타카노는 생각했다. 운에 맡겨야만 한다면, 적어도 자신은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망설임없이 타니에게 부탁했다.
"내가 말벌을 유인할테니 넌 폐하와 귀비마마를 모시고 내려가."
"뭐! 어떻게 하게? 도망칠 데도 없잖아. 여러 방 쏘이면 너 죽어!!"
무모한 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타니는 항의했다.
"지금은 그 수밖에 없어."
타카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벌떼를 향해 나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하였다. 그러나 타니가 급히 붙잡았다. 힘이 장사라 타카노는 거의 강제로 돌려세워졌다.
“너 진짜로 가?”
돌아선 순간 타카노는 횃불이 주는 한줌 불빛 속에서도 찌푸려진 이마와 퉁퉁 부어오른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까만 두 눈, 걱정과 불안으로 뒤엉킨 눈동자가 있었다. 매우 긴급한 상황인데도 어떤 정적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늑장부릴 때가 아니야.”
"나는 너 죽는 거 싫어! 가지 마 제발!"
날것의 간절한 진심에 타카노는 당황했다. 그러나 시간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성급하게 타박했다.
"그래서 어쩌자고?"
대안이라도 내놓고 말려야...!
타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타카노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지했다. 타니는 다쳤다. 그런 그에게 혼자 위험한 임무를 맡겨야 한다. 최소한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 정도는 했었어야... 그러나 지금 기분 따위를 맞춰주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이제와서 그런 말을 꺼내기엔 늦었다. 급한 상황이고, 달려드는 벌을 쫓아내느라 바쁜 와중에 해명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할말 없으면.."
"개자식! 꺼져버려!"
냉정하게 돌아서서 나아가던 타카노는 멈칫했다. 그는 부랴부랴 소매를 뒤져 상비용 붕대로 소지하는 긴 헝겊을 꺼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이라도 벌의 공격을 막아내길 바라면서 타니의 머리를 둘둘 싸맸다.
"집어치워!"
타니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하지만 타카노가 솜씨좋게 처치해 놓은 헝겊을 굳이 풀어내 못쓰게 만들지는 않았다.
“폐하와 귀비마마를 부탁해. 그럼.”
"병신! 자기나 할 것이지!"
타카노는 등 뒤로 쏟아지는 욕을 무시하고 떠났다. 이제 타카노는 제 한몸 건사하기 바빠 다른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그는 벌떼와 싸우며 우연히 산토끼처럼 산길을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안심이 마음속을 스쳐갔다. 타니라면 영리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ㅠㅠ
마치다는 비로소 좀 제대로된 해방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궁에 갇혀 노심초사할 때에 비하면 나들이는 물론 좋았다. 극장 사업을 감독할 수 있는 기회도 좋았다. 그러나 구태여 불편한 차림새로 나온 건 두고두고 성가셨고, 또 음행을 들켰을까 걱정하느라 심력을 소모해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고 싶어졌다. 때마침 들어선 숲은 괜찮은 쉼터였다. 달빛이 비치는 숲길을 걷는 동안 황제는 묵묵히 걸음을 맞췄다. 덕분에 완만한 산비탈의 중간쯤 이르렀을 때 마치다는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부부는 참나무 사이를 거닐며 오붓한 시간을 만끽했다. 잔잔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숲 속 풍광을 완상하노라면 부귀와 권세를 다 버리고 오두막이나 한채 짓고 싶었다. 하지만, 무리겠지. 오래 다물려있던 입이 열렸다.
"저희들의 순간도 항상 고요하였으면 좋겠사온데.. 밖에서나 안에서나 바람 잘 날 없으니 소첩의 팔자에 고요란 없는가 봅니다."
"밖이 시끄럽다는 건 궁 생활이 혹독하다는 뜻이겠고, 안에서도 바람잘 날 없단 말인가? 우리 사이가 그렇단 말이오?"
새침하게 황제를 올려다본 마치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둥지둥 정신을 못 차리겠사옵니다. 분위기가 좋을 때도 꼭 마지막엔 곤란하게 하셔놓고서는 어찌 시침을 뚝 떼시옵니까."
"그래서 싫소?"
황제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마치 일련의 소동에서 아무런 심각성도 실감하지 못하는 투였다. 마치다는 약이 올랐다.
"알아서 헤아려 주시옵소서!"
"어허. 알았습니다, 알았어. 내 자중하겠소. 그대의 반응이 하도 재미있어 못 참겠지 뭐요."
"...."
"이렇게 이해해보시오. 내 고양이를 데려가 먹이로 약올려 본 적이 한번도 없소?"
"없습니다."
단호한 귀비의 대답에 황제는 잠시 눈가를 씰룩였다.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되먹은 심성이길래 소동물을 놀릴 장난기조차 없나.
"그럴리가. 단 한번도?"
"그런 장난을 왜 칩니까?"
"귀엽잖아."
"됐습니다. 그만하시지요."
마치다는 작게 손을 내저었다. 부부는 애정어린 것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었다. 서로 태도를 합의하기엔 황제는 너무 장난기 넘치고 고약했다. 새삼 그 사실을 통감한 마치다는 패배한 채 논쟁을 빠져나왔다. 그는 사실 숨쉬듯 쏟아지는 장난질에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의 적응력을 예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참고자 하면 버틸 만은 하다. 다만, 이런 것마저 적응해내는 자신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꽤 걸었소. 다리가 아프진 않소?"
"소첩은 보기보다 튼튼하옵니다. 미오산을 홀몸으로 누비던 왕자를 잊으셨사옵니까."
"글쎄. 그래도 걱정이오. 그대는 대체로 어딘가가 아팠잖소.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튼튼하다 자신하기엔 민망할 만큼 오늘내일 하던 시절이 있긴 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다는 그게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일테지.
"이제 소첩에겐 의지처가 있지 않사옵니까. 쉬이 몸져 눕지 않습니다."
"시름을 덜어주시는구려. 그대가 아프면 내탓이라는 생각에 몹시 미안했건만. 그런데, 실은 다리가 아프지 않냐고 물었던 건 종아리의 상처를 염두에 둔 것이었소. 아직 회복이 다 안 되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며칠간 작열감이 상당했지만 굳이 말씀드리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 상처보단 태후와 태감의 모진 대접이 더 아팠다. 아군이 생겼다 믿었을 때조차 그들은 철저히 정치적으로 귀비를 좌지우지했다. 아군이라고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는 냉엄한 현실을 이해하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꼭 매질을 동원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고육책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생각하옵니다. 허나 그보나 나은 방법은 없었을지... 소첩이 다쳐서가 아니라 그 방법이 폐하의 가슴을 찢어놓지 않았사옵니까."
마치다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제 머리로 아무 방안도 내놓지 못했으면서 정작 고비를 넘겨준 태감과 태후를 나무라다니. 양심이 있는가? 궁 생활이란 참 어렵다는 한탄을 다시금 속으로 삼키는 순간이었다.
마치다는 시련을 꾸역꾸역 수용했지만, 황제는 근래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무소불위 권력을 위해 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인 역학들을 겸허하게 수용했다. 그런데 매 맞은 귀비가 편전 앞에 등장했을 때, 그리고 숙부가 준비한 연극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을 때, 거대한 회의감이 찾아들었다. 연기일 뿐임에도 귀비에게 상처주는 잔인한 방식이 싫었다.
밤마다 무희들의 춤을 시종 건조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황제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달라질 시기가 도래한 건 아닐지... 잔인한 제왕에서 자애로운 제왕으로. 겁주고 조종하기보다 신의를 쌓아 따르게 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폭군으로 변하는 고역을 이쯤에서 멈추면 안 될까. 모두를 위해서. 하지만 자애로운 자신의 모습을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우스운 망상 같기만 하고 아무튼 자신이 없었다. 분명 이 제국의 역사 속 어떤 황제들은 두터운 인망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나 적어도 스즈키 노부유키는 그런 통치법을 몰랐다. 게다가 그는 이제 겨우 귀비 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 한 걸음 발전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누굴 어떻게 더 믿을지. 오랜 시간 잔인함으로 쌓아온 업이 과보로 돌아오면 그 때는 또 어찌할 것인가? 천하를 호령해도 결국 인간이다.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똑똑히 기억하므로 돌려받을 과보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태세를 바꿔 자애로운 제왕이 되더라도, 언젠가는 과보를 이겨내기 위해 다시 잔인한 괴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괴롭다. 모든 것이 악화되기만 하는 굴레에 빠져드는 것 같다. 어쩌다가 이런 굴레에 접어들게 되었는가? 한때는 평범하게 마음을 열고 벗도 여럿 둔 적당히 잊혀진 황자로 살았는데! 고만고만한 친우와 우정을 나누며 행복했고 실없는 장난질로 종일 깔깔댄 날이면 옥좌에 앉지 않아도 천하가 내 것이었다. 헌데 지금의 자신은 무엇인가. 피바람을 일으켰던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자신 안에 온전히 보존된 것이 하나라도 있나? 황제는 갑자기 내면의 취약함을 느꼈다. 무의식중 소매에 감춘 가죽주머니를 더듬었다. 전신의 핏기가 빠져나가고 호흡이 가빠지며 흑암중에 홀로 남겨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 안돼. 이 철저한 유폐로부터 해방시켜줘.
그러나, 질끈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 황제의 앞엔 달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는 귀비의 얼굴이 보였다.
"노부. 저 여기 있어요."
걱정으로 올려다보는 귀비의 따뜻하고 총명한 눈과 마주치자 격하게 고동치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오한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뭇 편안해졌다.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굴레에 뛰어듦으로써 그는 귀비를 얻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황제는 나약함을 떨쳐내고는 마치다의 어깨를 안았다.
“내가 그대의 의지처라 했소? 그대야말로 진정한 내 의지처요.”
“괜찮으시옵니까?”
“괜찮고 말고. 쓸데없는 생각을 좀 했소.”
“소첩이 들어도 되는 이야기이옵니까?”
“안 될 건 없소만 별 이야긴 아니오.”
“허면 소첩에게 들려주시겠사옵니까?”
“나의 숙부께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고효율을 내는데 능한 분이오. 제왕의 권위를 휘두르는 법을,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숙부님께 배웠지. 배운 것에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소만... 요즘은 혼란스럽소. 다른 스승에게 제왕학을 배웠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으면, 그랬어도,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어떤 황제가 되었을까.”
유일하게 한 번, 태감은 잔인하여서는 안 된다고 한 적 있었다. 부부 사이 만큼은 현명함으로 처신해야 한다던가. 그러나 그 조언을 들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제왕의 역할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때때로 미흡함을 보충하고자 더욱 잔인함에 심취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 외엔 무엇이든 서툴렀다. 부부사이에 대한 충고? 황제는 무시해버렸다. 그 결과 귀비는 수모로 점철된 궁 생활을 한다. 헌데, 터무니없지 않나? 실컷 조카를 괴물로 만들고는 온건하게 처신하라니 이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소리냐는 말이야. 기실 귀비에게만 수모가 아니라 황제에게도 수모다.
마음 깊이 분노가 끓었다. 너무 이골이 난 나머지 숙부가 남긴 것은 교훈이건 무엇이건 모조리 제거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남긴 상처까진 참았다. 그러나 귀비에게 매를 댄 것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 만일 그 고육책에 충분한 이유가 없었다면 더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태만죄를 반드시 물으리라. 스승에게 배운 것을 스승에게만 휘두르지 말란 법은 없지.
"내 숙부께 다시는 그대 몸에 작은 상처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당부드렸소. 이런 일이 또 있거든 곱절로 갚아 드릴 거라고 했더니 송구하다더군. 빌어먹을 송구."
마치다는 적잖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예?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소."
"태감께서 실의에 빠지셨겠습니다. 그래도 숙부님 아니십니까."
"최고의 제자가 되려는 것 뿐이오."
황제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런 뒤에 부부는 살벌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기로 했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어두운 정치 이야기만 이어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들은 종종 달려드는 숲모기나 벌 같은 벌레를 대신 쫓아주며 오늘의 나들이가 어땠는지, 그리고 황후가 되면 황후전을 어떻게 꾸밀 것인지, 설레는 주제만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간질거리는 대화로 넘어가기 전 마치다는 이 이야기 만큼은 꼭 했다. 이조판서를 적으로 돌린 지금 신임할 수 있는 신하를 한 명만 고르라면 무조건 태감이니 절대 그와 척을 져서는 안 된다고. 황제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에 떨리는 근육은 조용히 타오르는 분개를 보여주었다. 그 때, 마치다는 그 적개심이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짙게 받았다. 아마 그 감정은 스승의 권위, 손윗어른의 지위, 그리고 태감에 대한 존경심 따위에 묻혀 있었다가 종아리 사건을 통해 용암처럼 지층을 뚫고나온 것 같았다. 본디 고운 본성을 억지로 갈아엎은 상흔은 깊고 오래되었을 터. 시간이 흘렀다고 그냥 치유되었을 리 없다. 마치다는 황제가 품은 감정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민감한 시국에 감정을 태도로 내세우면 심각한 자충수가 될 것 같아 무척 심려스러웠다.
타카노는 앞머리를 쥐어 뜯었다. 조금 전까지는 인형을 구입하고 계시더니 찾으려고 하니까 또 금방 사라지셨다. 장사를 끝낸 상인에게 부부의 행방을 묻자 상인은 건성이지만 분명하게 수목림 쪽을 가리켰다. 역시나...! 타카노는 어둑한 수목림으로 내달리며 '도련님', '아기씨'를 외쳐불렀다.
"타카노! 불 여깄다!"
야산 입구에서 타니가 숨을 몰아쉬며 따라붙었다. 그는 횃불 한 개를 타카노에게 넘기고, 자신도 한 개를 치켜들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봐. 헉헉."
"쉿."
타카노는 바닥에 불을 비치고 흙바닥을 매만졌다. 아주 최근에 생긴 두 사람 분의 통행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길 지나가신 게 확실했다.
"아, 답답해!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이유 좀 알자!"
"누군가가 귀비마마를 노리고 있어. 잘못하면 말벌의 습격을 받겠어."
타니는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버럭 외쳤다.
"뭐라고? 그럼 귀바마마만 당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역... 읍!"
타카노의 큰 손이 타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역시 같은 단어를 떠올렸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런 말은 꼭 필요한 때에만 하는 것이다. 하여간 심각한 상황이었다.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국 전체가 파란에 휩싸인다. 타카노는 횃불을 든 채 굳어버린 타니에게 조용히 하라고 충고하며 손을 뗐다.
"이야기는 나중에. 그보다, 들려?"
타카노가 어둠속을 의식하며 질문하자 타니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웅대는 소리는 일단 들리기 시작하자 꽤 컸다. 독말벌떼였다.
"요동치지 않고 한곳에서만 소리가 나는 걸 보아 아직 무슨 자극을 받은 것 같진 않아. 아직 본격적인 활동철이 아니라 움직임이 둔한 까닭도 있겠군."
벌떼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수는 꽤 많은 듯 했다. 요즘 들꽃이 만개하며 말벌 세력이 늘어서, 잘못 건드리거나 냄새 따위로 자극하면 멀쩡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규모로 추정되었다. 유인제나 다름없는 나무패를 달고 있는 귀비마마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찾아서 모시고 나와야지.”
"빌어먹을... 아, 진짜 빌어먹기나 할 걸! 그 몇 푼에 넘어가서..."
오열 섞인 투덜거림을 내뱉으면서도 타니는 부지런히 타카노를 따라갔다. 그들은 횃불로 숲을 밝히며 산길에 진입했다. 적막한 숲에서 다시 황제와 귀비를 부르자 곧 응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산중에 굽이치는 황제의 목소리. 아. 하늘이 도왔다. 이렇게 빨리 찾다니. 이제 최대한 조심히 돌아나오시게 하면 된다!
"그곳은 독말벌떼의 위협이 잦아 위험합니다! 속히 돌아오시옵소서!"
잠시 조용했다. 바람을 타고 맴도는 벌소리를 듣고 계시는 듯 했다. 이윽고 답이 들려왔다.
"지금 하산중이다. 너희는 벌떼를 멀리 유인하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귀비마마께서 벌떼를 유인하는 물건을 소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혹 노리개 옆에 나무패가 달려있지 않습니까?"
또 다시 조용했다.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억누르고 또 억누른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나무패가 너무 얇아 억지로 떼어내려다가는 파손이 되겠군. 자칫 냄새가 퍼져 말벌을 자극하겠는데!"
"저희가 횃불을 가지고 그리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안전을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하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타카노는 횃불을 치켜들었다. 불길로 방어하면 무방비하게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타카노는 말벌 소리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산길을 탔다. 그러나 강운의 사내인 그에게도 운세가 나쁜 날이 있는지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말벌들은 불청객을 인지하고 언제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위협비행을 하던 한 마리가 집요하게 그들을 쫓더니
"악! 망할. 나 쏘였어!"
타니가 먼저 당하고 말았다. 그는 격통이 밴 신음을 씹어삼키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타카노는 비틀거리는 타니를 부축했다.
“아윽.. 아파..”
결국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대로 황상께 이른다 해도 벌떼를 끌고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전진해서는 안 될 상황. 하지만 멈춰선다 해도 벌떼는 나무패가 흘린 냄세의 궤적을 타고 기어이 두 분을 덮칠 터이니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이 있기는 했다. 타카노 자신이 미끼가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목숨을 부지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타카노는 생각했다. 운에 맡겨야만 한다면, 적어도 자신은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망설임없이 타니에게 부탁했다.
"내가 말벌을 유인할테니 넌 폐하와 귀비마마를 모시고 내려가."
"뭐! 어떻게 하게? 도망칠 데도 없잖아. 여러 방 쏘이면 너 죽어!!"
무모한 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타니는 항의했다.
"지금은 그 수밖에 없어."
타카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벌떼를 향해 나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하였다. 그러나 타니가 급히 붙잡았다. 힘이 장사라 타카노는 거의 강제로 돌려세워졌다.
“너 진짜로 가?”
돌아선 순간 타카노는 횃불이 주는 한줌 불빛 속에서도 찌푸려진 이마와 퉁퉁 부어오른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까만 두 눈, 걱정과 불안으로 뒤엉킨 눈동자가 있었다. 매우 긴급한 상황인데도 어떤 정적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늑장부릴 때가 아니야.”
"나는 너 죽는 거 싫어! 가지 마 제발!"
날것의 간절한 진심에 타카노는 당황했다. 그러나 시간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성급하게 타박했다.
"그래서 어쩌자고?"
대안이라도 내놓고 말려야...!
타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타카노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지했다. 타니는 다쳤다. 그런 그에게 혼자 위험한 임무를 맡겨야 한다. 최소한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 정도는 했었어야... 그러나 지금 기분 따위를 맞춰주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이제와서 그런 말을 꺼내기엔 늦었다. 급한 상황이고, 달려드는 벌을 쫓아내느라 바쁜 와중에 해명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할말 없으면.."
"개자식! 꺼져버려!"
냉정하게 돌아서서 나아가던 타카노는 멈칫했다. 그는 부랴부랴 소매를 뒤져 상비용 붕대로 소지하는 긴 헝겊을 꺼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이라도 벌의 공격을 막아내길 바라면서 타니의 머리를 둘둘 싸맸다.
"집어치워!"
타니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하지만 타카노가 솜씨좋게 처치해 놓은 헝겊을 굳이 풀어내 못쓰게 만들지는 않았다.
“폐하와 귀비마마를 부탁해. 그럼.”
"병신! 자기나 할 것이지!"
타카노는 등 뒤로 쏟아지는 욕을 무시하고 떠났다. 이제 타카노는 제 한몸 건사하기 바빠 다른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그는 벌떼와 싸우며 우연히 산토끼처럼 산길을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안심이 마음속을 스쳐갔다. 타니라면 영리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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