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6576466
view 5341
2024.03.04 16:02
요마 퇴치하는 천사 방다병과 떠돌이 의원 하지만 당연히 과거 이상이인 이연화가 센티넬 가이드스러운 관계인거 bgsd..

*ㅅㅈ주의, 주화입마된 사파 무순 주의.

이전 : https://hygall.com/586419273

7편.

연화루는 중원 초입에서 조금 더 들어간 서쪽 대나무숲에 있었다. 바퀴가 달려 말이 끌 수 있게 된 복층 누각으로 모양새는 단촐했으나 세간살이를 그럭저럭 굴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요마가 출몰하는 중원 숲은 되려 연화루를 두고 이동하기에는 더 편했다. 말 빌리는 값을 치르지 않고도 비마(비술로 불러낸 말)로 누각을 끌게 할 수 있어서였다.
이연화는 수인을 그려 누각에 던졌다. 연화루의 기둥과 판자에 빛줄기가 번지며 비술을 씻어냈다.
푸른 빛이 남은 잔상을 응시하던 이연화는 70년 전 현야와의 교전을 떠올렸다. 그때 이상이는 목숨을 걸고 천마왕을 칠곡산에서 묶어둘 결계를 쳤다. 그날은 이상이로서의 생이 막을 내린 날이기도 했다.



재생다운로드6089E1A9-5A5B-4261-9F54-490A2A1D20FB.gif

치열한 교전에 칠곡산 산맥이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이상이의 소사검이 내뿜는 푸른 검기와 천마왕 현야의 채찍 패월에서 타오르는 붉은 요기가 요동치며 얽혀 들었다. 주변의 땅이 갈라져 돌덩이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현야가 검은 뱀이 휘감긴 채찍을 휘둘러 이상이를 재차 노렸다. 지칠대로 지친 이상이는 아슬아슬하게 소사검으로 패월을 막았지만 수 장을 뒤로 날아가 침엽수림에 그대로 처박혔다.

"이대로 죽이기는 아깝군."

현야가 이상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 따위는 버리고 내 곁에 있어라. 아껴주마."

이상이는 대답 대신 침을 뱉으려 했지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고 올라와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쿨럭-

검붉은 피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미 이상이의 입가는 피로 물들었고 백의 또한 피로 붉게 젖어 들어 있었다. 이상이는 피를 한 웅큼 토하면서도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지막 주문을 외워야 결계를 완성할 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상이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 팔이 부러진 듯 늘어졌다. 격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팔로 가슴팍의 옷을 풀어헤치자 가슴 가득히 술법으로 쓴 진언문이 드러났다. 세 보옥은 결계의 세 지점에 주박을 걸어 새겨 놓았고, 마지막 주문과 함께 진법이 작동하면 칠곡산 주변에 결계 장을 쳐낼 터였다. 이를 위해서는 현야의 피가 필요했으나 이상이는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다운로드.jpeg.jpg

"네 옆에 있으라고?"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서서 버티고 있는 이상이가 되물었다. 미약한 인간이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구는 모습이 현야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떻게 하찮은 인간 하나가 자기한테 모든 것을 맡긴 비겁한 다른 인간들의 안위를 위해 이렇게까지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일까. 현야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천마왕이 날 아끼겠다니 죽이기 전에 하는 농담치고 고약하네."

"죽여? 나는 너를 죽이지 않는다."

현야가 눈웃음을 지었다. 정인에게 하는 듯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서늘한 웃음이 엇갈려 기묘했다.

"나는 너를 가질 것이다."

"누구 맘대로."

현야는 기어이 쏘아 붙이는 이상이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상이의 눈 앞에 현야가 수 장의 거리를 좁혀 순식간에 나타났다. 현야는 이상이의 목덜미를 잡아 올려 얼굴을 제 쪽으로 향하게 꺾었다. 길고 흰 손가락이 이상이의 뺨을 쓸었다.

"네게서 참을 수 없는 향이 나."

현야의 코와 입술이 이상이의 얼굴에 닿을 듯 다가와 주변을 배회했다. 천마왕은 이상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향을 한껏 들이켰다. 맛을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길고 뜨거운 혀가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이상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시 고개를 든 현야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이는 등 뒤로 소사검을 그러쥐었다. 현야가 이상이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얌전하니 심심하군. 좀 더 짖어보거라."

이상이는 현아의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현야의 얼굴을 쓸었다. 하나씩 야금야금 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눈으로 현야의 콧날을 훑어내리다가 입술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현야는 그런 이상이의 행동에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이상이는 너덜너덜하다 해도 좋을만큼 엉망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피로 물든 얼굴에 눈에만은 생기와 의지가 서려 있었다. 천마왕은 그 눈빛에 등줄기가 오싹하고 짜릿해지는 감각을 느껴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기쁘게 목울음 소리를 냈다.
요마의 야성이 날뛰어 요력이 폭주하는 바람에 주변의 자갈이 떠올라 회오리를 그렸다. 이상이는 문득 현야의 빈틈을 노릴 방법을 깨달았다. 도박일지도 몰랐지만 현야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이상이 자신인 것 같았다. 이상이는 목숨과 세상의 존망을 건 도박패를 던졌다.

"요마는 피를 마시면 쾌락을 느낀다지?"

이상이의 말에 현야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교접을 하나?"

노골적인 말에 현야의 눈이 번득였다. 이상이는 제 직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는 현야의 눈에 깃든 것은 정욕이었다. 이리 붙잡아 시간을 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상이는 재빨리 속으로 마지막 진언을 외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현야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이는 자포자기한 듯 얕은 숨을 쉬고 눈을 내리 깔았다가 천천히 치뜨며 현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눈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에 감긴 채였다. 이상이는 비웃듯이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천마왕과 뒹굴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때. 내게 극락을 보여줄 수 있어?"

"얼마든지."

현야가 비릿하게 웃고는 얼굴을 기울였다. 이상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여 현야에 응했다. 뒷머리채가 현야의 손에 우악스레 잡혀 뒤로 세게 제껴졌다. 이상이는 일부러 밭은 신음을 냈다. 현야는 이상이의 피 묻은 입술에 제 입술을 내려 혀로 그 피를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으읏."

현야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 난폭하게 이상이의 입안을 헤집었다. 이상이는 무력하게 몸을 현야에게 맡긴 채 속절없이 흔들렸다. 현야가 자신을 탐하는데 열중해 있는 사이 이상이는 마지막 진언을 완성하고는 눈을 와짝 떴다. 소사검을 쥔 손에 힘을 준 그는 단번에 검을 휘둘러 현야의 어깨를 뚫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현야의 가슴팍에 장을 날려 현야를 수 장 밖으로 밀어냈다.
이상이는 곧바로 망설임없이 현야의 피가 묻은 검을 제 몸에 꽂아 넣었다. 피를 토하면서도 이상이는 술인을 그려 마지막 결계 진을 열었다. 산 주변에 푸른 빛이 작렬했다. 빛이 어찌나 밝고 강렬한지 낮이 된 것처럼 온 하늘이 하얗게 번쩍였다. 이상이의 경맥이 흩어져 나갔다. 타는 듯한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상이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제 끝났어.

사부님, 사모님, 완만, 사고문의 사형과 사제들. 이제는 더는 피흘리지 않고 살아가기를.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교완만의 미소가 보였다. 다음 생에는 부디 평범하게 만나길.

이상이는 정신을 놓았고 현야의 소유욕으로 가득 찬 눈길을 보지 못했다. 결계석에 박힌 보옥이 현야의 요력을 흡수하여 결계를 치고 있었다. 요력을 빼앗기는 현야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현야는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제 요력의 일부가 자신을 가둘 결계가 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만 갸웃해 보였다. 천마왕을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의 천마왕의 눈에는 오로지 이상이만 보였다. 결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쓰러진 채 미동도 않는 이상이를 보며 현야는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자는 내 것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현야는 집착으로 번들대는 눈을 하고 이상이를 향해 걸어갔다. 요력을 빼앗겨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그는 기어이 이상이를 일으켜 제 품에 안았다. 축 늘어진 이상이는 숨이 거의 끊어져 죽기 직전이었다.

"네 멋대로 죽게 놔둘 것 같으냐."

현야는 손으로 이상이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엄지로 이상이의 입을 열었다. 현야가 손가락를 튕기자 소매자락에서 검은 환약이 튀어나왔다. 환약은 이상이의 입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잃은 이상이의 목의 혈관이 까맣게 도드라지며 올라왔다.

벽차지독.

극강의 독약을 이상이의 몸에 넣은 현야는 이상이의 내력이 급격히 소모되는 것을 느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요력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상이의 몸이 고통스럽게 들썩였다. 벽차지독은 보통은 해독약이 없다시피한 극약이었다. 내력을 소진시키고 경맥을 망가뜨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약으로 오감을 잃고 자기 자신마저 잃어 정신줄을 놓게 된다. 하지만 소수의 요마들이 알고 있는 다른 쓰임이 있었다. 벽차지독이 경맥을 흐트려 뒤집어 놓으면, 이 독에 당한 인간이 요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를 버틸 수 있는 강한 내공이 필요했다. 버텨내기만 하면 인간의 내력과 요마의 요력을 같이 운용하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야는 벽차지독과 요력으로 이상이를 살려냈다. 이상이는 이제 오래토록 현야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있을 터였다. 요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현야는 다소 지쳐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 자를 삼칠일 보살펴라. 그 후 중원에 데려다 주어라."

박쥐 날개를 한 요마들이 나타나 이상이의 몸을 들어 하늘로 날아 올랐다. 현야는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 묻은 백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보름간 깊은 잠을 자서 요력을 회복해야 했다. 결계 보옥이 흡수한 요력보다 이상이에게 준 요력이 몇 갑절은 더 많았다.

다운로드.jpeg-1.jpg

요마로서는 가장 취약한 상태가 된 현야는 다른 요마들이 제 기척을 느끼지 못하게 지워냈다. 아무리 천마왕의 지배를 받는 요마들이라 해도 약해진 현야는 탐나는 먹잇감이었다. 요마들의 세계에서는 강한 자만이 다른 존재를 지배했고 충성심이나 의리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요력의 8할을 이상이에게 쏟아 부은 현야의 선택은 요마답지 않았다. 살아 남으려는 본능보다 이상이를 살려두겠다는 집념이 앞선 자신이 낯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면 희열에 가까웠다.

이상이의 몸에서 돌기 시작한 요력이 현야에게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상이가 어디에 있건 현야만이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천마왕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



비마가 도성 근처의 너른 들판에 멈추어 섰다. 이연화는 비마를 들여보내고 땅으로 내려와 옷을 털었다. 한 달여를 못 들어가니 연화루에 먼지가 쌓이고 수확해두었던 채소가 모두 시들었다. 살릴만한 것을 모아 마른 채소 묶음으로 만들어 처마에 걸고 버릴 것은 들판에 내던져 날짐승에게 주었다.

소박한 살림을 매만지려니 과거의 일이 한낱 꿈처럼 느껴졌다. 그저 모양새만 거창한 꿈을 꾸었을런지도 몰랐다. 인간도 요마도 아닌 이연화가 이상이의 꿈을 꾸었던게 아닐까.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귀히 여겼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혼자 남아 죽지 못하고 연명하는 이 삶이 지치고 또 지겨웠다. 천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살아내온 지난 세월이 몹시 노곤했다. 언제까지 이래야할지 몰랐다. 소원이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끝내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눈에 밟히는 이들이 있을 때는 죽어야 했고, 아무 미련이 없을 때는 살아내야 하는 운명이 얄궂었다.

이연화는 술병을 꺼내어 한 모금 들이켰다. 지킬 것이 많았던 삶에서도, 지킬 것이 없었던 삶에서도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아무리 가까운 연인도 그 길에서는 옆에 설 수 없었다. 누군가를 곁에 또 두는 일은 고통을 한 자락 더 늘리는 일과도 같았다.

방다병과의 연도 새삼스레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무슨 연형제란 말인가. 벽차지독에 요력이 깃든 제 몸과 어찌 경맥을 통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요력에 잠식 당하지 않게 극양 기운의 양주만으로 누르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방다병에 생각이 이르자 해가 지는 시간까지 어디서 뭐하고 있었냐고 펄펄 뛸 모양새가 그려졌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에게 돌아가야 했다. 세상 연이 질기구나 싶어 이연화는 망연히 노을을 바라보며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연화루 이연화 방다병 다병연화 현야연화 성의 츼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