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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2 21:48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연화는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작은 손이었다. 기이한 일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꿈 특유의 설득력에, 이연화는 소년의 몸으로 목검을 쥔 자신을 어렵잖게 받아들였다.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다른 소년이 서 있었다. 가슴 한편이 조이듯이 아팠지만, 정말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반갑기도 했다. 그래, 사실 그땐 사형과 대련하는 일을 좋아했는데. 이연화가 씁쓸하게 생각했다. 늘 분한 얼굴의 사형을 보면서도, 그 분함의 깊이를 제대로 가늠한 적이 없었다.
어린 이상이에게 가까이 다가와, 소년은 퍽 다정한 얼굴로 사탕을 내밀었다. 간식을 냉큼 받아 먹으며, 이연화는 한편으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사형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챙겨줬을까? 그것조차 연기였다 하더라도, 아니면 그것만큼은 진심었다 하더라도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사형, 오늘은 대련할 수 있어요?" 어린 이연화가 물었다. 언젠가부터, 이상이는 대련을 청할 때 사형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꼬마의 머리라도, 예정된 패배가 그리 즐겁지 않으리란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상이야, 오늘은 너와 겨룰 수가 없겠다."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 사형이 말했다. 입안의 사탕이 맛을 잃었다. 어린아이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왜요? 사부님이 많이 겨룰수록 좋다고 하셨는데-."
말이 끝나기 전, 얼굴로 무언가 뜨끈한 것이 뿌려졌다. 꼬마 이상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젖은 뺨을 훔쳐보니, 붉고 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놀라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핏발 선 눈의 남자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어린 사형의 것과 똑같아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나를 죽였잖아."
어린 이상이가 비명을 질렀다. "사부님!" 찢어지는 목소리로 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누군가에게 발목이 잡힌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리에 넘어져 돌아보니, 입과 눈에서 검은 피를 흘리던 선고도가 자신의 다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벌려 웃었다. 그 입 안이 구멍처럼 시커멨다. "사부님은 죽었어. 그분도 너 때문에 죽었지." 어딘가에서 칠목산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연화는 정신이 나갈 듯한 기분으로 헐떡였다. "사부님!"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도 성인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목을 잡은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렸으나 도무지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사방이 어두워지고 발밑이 꺼져들어, 점점 늪 안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비명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찬양과 증오가 한데 섞여 어깨를 짓눌렀다. 식별할 수 없도록 겹쳐져 울리던 음성들은, 어느 순간부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문장을 외쳤다. 너 때문이야. 모두 너 때문에! 이연화가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뇌로 직접 꽂히는 듯한 소리를 내칠 수가 없었다.
"넌 살아 있어선 안 돼. 네 존재는 재앙이나 다름없어. 사람들을 끌어들여 죽게 만들지."
등 뒤에서 원한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가 헉 소리를 삼키며 돌아보았다. 산발을 한 남자가 번쩍이는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칼끝처럼 이연화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상이의 이름을 버리고 살아가겠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아? 네가 버린다고 그 명성이 모두 버려질 것 같으냐? 네 핏줄은 또 어떻고? 차라리 네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네 친형과 함께 죽었다면, 사부님은 살아 계셨을 거다. 나도 헛꿈을 품을 일이 없었을 테지."
이연화가 큰 숨을 몰아쉬었다. 눈으로 열기가 몰렸고, 벽차지독에 고생할 때처럼 울혈이 목으로 치미는 듯했다. 이런 꿈이 처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난자하는 일에는 십 년 동안 충분히 익숙해졌으나, 칠목산이 죽은 내막을 알게 되고 사형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한 직후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어떻게 모두 잊고 지냈을까? 이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선고도가 냉랭하게 비웃었다.
"그 모든 비극의 원흉이 되어놓고,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을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니. 넌 그럴 자격이 없어."
이연화는 잠시 눈을 감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갑자기 미칠 듯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자칫하면 무릎을 꿇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이연화는 허벅지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런 논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할퀸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이연화는 차마 스스로 생을 멈추지 못했다. 사부님과 사모님이 살리려 애쓴 삶을 적극적으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는 두 사람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연화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읊조렸다.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그럼 나는?"
쾌활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붉은색 옷에, 턱을 약간 들고 팔짱을 낀 자세가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해 보였다. 이연화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연화의 몸이 굳어졌다. 저것은 자신이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을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청년은 성큼성큼 걸어와 이연화의 앞에 섰다. 바라보는 눈이 끝없이 무정하여 등골로 소름이 돋았다. 이상이가 말했다.
"우리가 한 일은 변하지 않아. 네가 이름을 바꾸고 도망치더라도 마찬가지지."
이연화의 눈가가 움찔했다. 이상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이연화를 훑어보다, 이내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 오른손이 어깨에 올라오자, 정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희게 질린 이연화를 바라보며, 이상이가 입을 열었다.
"넌 늘 이상이가 죽었다고 했지. 용서를 모르던 그 사람은 죽었다고. 그래, 맞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이연화는 운피구의 과거와 현재를 용서했고, 예전이었다면 이빨을 모두 뽑아버렸을 소자금도 용서했지. 교완만을 원망하지 않았고, 네게 치욕을 준 각려초에게도 순수한 살심을 품지 않았어. 어찌나 멍청할 만큼 자비로운지."
이상이가 엷은 미소와 함께 빈정거렸다. 이연화는 그 얼굴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상대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상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남자는 분노로 날카로워진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하지만 네가 이상이를 죽이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 있어. 그게 누구인지 알아?"
어깨에 얹힌 오른손이 마치 천근 같았다.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씁쓸하다 못해 처참한 심정이었다.
"우리지."
이상이의 한쪽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의 왼손마저 어깨로 올라오자, 세상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 압력을 견디는 이연화를 향해, 청년은 독을 부어넣듯 차근차근 힘주어 말했다.
"우리에게 안식은 없어. 숨이 붙어있는 한, 우리는 문제를 끌어당겨. 하루이틀 무탈하다고 방심할 순 없어. 아무리 이름을 바꾼다 한들, 그 죄과에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하거든. 그러니 절대 한 곳에 머물러서는 안 돼.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고, 약점을 만들어도 안 돼. 우린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어. 강 위에서 영원히 홀로 떠가는 쪽배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다가 떠나야 해."
외로운 삶. 어딘가에서 홀로 죽어 백골이 되더라도, 자신의 죽음을 아무도 모를 삶. 이연화가 그 말을 허망하게 곱씹었다. 이상이라는 이름을 버렸을 때부터, 이연화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다 끝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상대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뒤를 어떻게든 쫓아다니며 온갖 귀찮은 일을 자처하던 청년과,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끝까지 따라와 자신을 살리겠다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침상을 데우던 온기가, 진심으로 자신을 바라던 그 눈빛들이 심장을 찌르듯 다가왔다.
"난...하지만, 나와 함께 있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없으면...그들은 슬퍼할 거야."
이연화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로 사라져본 적이 없으니, 그들이 얼마나 슬퍼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실을 애도하는 시간이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아니면 십 년이든 그들은 분명 슬퍼할 터였다. 이상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너와 함께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네가 다른 이들을 마음에 깊이 들였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잊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무수한 비명소리가 다시 몸을 끌어당겼다. 그와 함께 화염 같은 통증이 온몸을 태웠다.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벽차지독과 자신의 몸을 꿰뚫던 칼날, 십 년 만에 나타난 사형의 얼굴과 그의 죽음, 칠목산의 부고 따위가 동시에 떠올라 심신이 짜부라질 것 같았다. 이미 부서진 심장이 누군가에게 자근자근 짓밟히는 듯했다. 제대로 된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이연화는 눈을 질끈 감고는 덜덜 떨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탈출구를 찾는 일은 고사하고,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연화, 이연화!" 어딘가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화가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깊은 바다에 빠졌다가 동앗줄을 찾은 사람처럼, 이연화는 급히 움직여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꽤 가까워졌는데도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이연화는 미친 사람처럼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비! 어디 있어? 방다병!"
"여기 있어."
작은 목소리가 발치에서 들려왔다. 왜 이렇게 낮은 곳에서 말하지? 시선을 내렸다가, 이연화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공포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두 사람의 머리가 땅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아래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왜, 왜-."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이연화가, 차마 그 얼굴을 만지지도 못한 채 더듬거렸다. 머리만 남은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감긴 눈에서 핏물이 흘러 있었다.
"잊었어? 이연화. 너 때문이잖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연화는 비명을 내질렀다.
사방이 어두웠다. 몸이 미친 듯이 떨려, 춥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몸부림치니, 억센 손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이연화, 이연화!"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에게는 이제 몸뚱이가 있었다. 크게 뜬 눈으로 헐떡이며, 이연화가 그 몸을 급히 더듬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재차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꿈일까? 아니면 꿈이 아닌 걸까? 어느 쪽이든 사죄해야 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이연화는 아직 살아있는 그들을 향해 두서 없이 횡설수설했다.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으나 그런 데에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공황에 빠진 목소리가 스스로의 귀에도 낯설었다.
"미안해. 난 못 하겠어. 난...난 너희가 원하는 걸 줄 수가 없어."
네가 다른 이들을 마음에 깊이 들였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잊었어? 이상이의 목소리가 섬뜩한 비수처럼 떠올랐다. 그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새삼스레 참담한 기분이 밀려왔다. 자신이 이상이를 죽이고 이연화로 변화한 이유는, 비단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의식이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스무 살의 청년은, 매우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두려움으로 숨어버리길 택했는지도 몰랐다. 두 개의 소매를 꽉 부여잡은 채, 이연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피를 토하듯 꺼냈다.
"난, 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또...또 누가 돌아서거나 죽어버리면, 나는...."
서러운 숨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사형이 사부를 죽였노라 털어놓았던 순간 이후,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형상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꼬마였을 때부터, 이상이는 소년다운 솔직함과 정으로 여러 사람을 마음에 두었다. 당시에는 그저 무공과 정의에만 관심이 많아, 그런 일이 어떻게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깊은 피로감이 심신을 짓눌렀다. 악몽이 거의 끝나서인지, 자신이 부여잡은 팔 때문인지 과거의 목소리는 한결 잠잠해져 힘을 쓰지 못했다.
눈앞의 상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연화의 팔을 더 꽉 마주잡았을 뿐이었다. 이연화는 매서운 채찍을 기다리듯이 침묵을 견뎠다. 마음의 경계를 내려놓으면, 바로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지거나 비난하는 말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염려하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는 자신을 끌어당겨 안고는, 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어쩐지 익숙한 손길이었다. "괜찮아." 방다병이 낮게 말했다. 이연화가 반쯤 감은 눈으로 혼몽한 숨을 색색 쉬었다. 몸뚱이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괜찮아." 방다병이 다시 말했다. 그 목덜미에서 편안한 체취가 흘러나왔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 정말로 괜찮을 것만 같았다. 곧 작은 한숨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등 뒤로 뜨거운 손바닥이 와 닿았다. 등을 쓸던 손길만큼 익숙한 내력이 몸 안을 돌면서, 답지 않게 위안하는 것처럼 경맥을 진정시켰다.
미친 듯 뛰던 심장박동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굳다 못해 경련이 일어날 듯하던 근육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렸다. 이연화는 악몽의 마무리가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어찌나 식은땀을 흘렸던지, 자기 전 갈아입었던 옷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잠깐, 자기 전 갈아입었던 옷...? 그럼 지금은 자고 있지 않다는 뜻이잖아? 이연화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악몽의 여운을 뚫고, 한 줄기 현실감이 선득하게 치밀었다. 그러나 이연화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깨어나려 들기 전, 방다병이 말했다.
"더 쉬어. 안신향 피워 줄게."
아니, 잠깐만-무슨 말을 다급히 꺼내기 전, 누군가가 이연화의 수면혈을 짚었다. 생각을 잇지 못하고, 이연화는 속절없이 도로 잠에 이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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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시문의 집으로 돌아올 때부터, 적비성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생벽과 그 문걸이라는 작자를 잡지 못한 탓이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안과 적비성이 세우단의 본부를 발견했을 때, 그곳은 이미 불타거나 폭발하던 참이었다. 그쯤이야 예상 내였으나, 문제는 군데군데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점이었다. 적비성과 무안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은 나무로 된 옥 안에서 손을 내밀며 살려달라 아우성을 쳤다. 마음 한편에서는 그들이야 어찌됐든 복수심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이 일렁였으나,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적가에서의 경험 탓으로, 적비성은 어른에게 휘둘리는 꼬마들을 두고 보기 싫어했다. 찰나의 갈등을 엿본 무안이 말했다.
"존상. 그놈들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에 남은 흔적들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불을 놓았다는 건, 그놈들이 급히 도망치느라 뒷수습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도망친 사람은 잡을 수 있으나 타버린 종이와 사람은 되돌릴 수 없지요. 그들의 뿌리를 뽑으실 작정이라면, 증인과 증좌를 남겨두는 편이 좋습니다."
적비성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을 다 죽게 내버려두면, 아무래도 찜찜할 뿐더러 이연화가 엄청나게 성을 낼 것 같았다. "내가 옥을 열 테니, 타지 않은 것들을 챙겨라." 무안이 고개를 숙였다.
무안이 재빠르게 움직여 불을 끄거나 문서들을 챙기는 사이, 적비성은 무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옥의 자물쇠들을 툭툭 부숴버렸다. 나무로 만든 감옥들은 귀찮게도 본부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 아무리 높은 수준의 경공을 쓰더라도 모두 부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풀려난 사람들은 얼른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서는, 적비성과 무안에게 울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적비성은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금원맹주는 이런 식으로 감사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그들에게 세우단과 심악에 대해 물었다.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신분은 다양했는데, 일이나 놀이로 산을 타다가 진법에 잘못 발을 디뎌 포획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달 전부터, 세우단은 그들을 잡아 가두고는 심악의 실험 대상으로 내주었다. 가끔씩은 누군가가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실험 중 죽었거나, 이상한 약의 재료가 된 것 아니겠냐며 진저리를 쳤다.
심악의 실험 일지와 다양한 약의 생산 현황, 심지어 약마의 비급 일부까지 되찾았지만 적비성은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금원맹주는 죽이고 싶은 자를 두고 오래 참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공유하기는 해야 했고, 어차피 잠자리는 이연화와 함께할 생각이었기에, 적비성은 찌푸린 얼굴로나마 방시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적비성은 이연화 대신 그의 방 근처를 서성거리던 방다병을 먼저 마주쳤다.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 나와 있지? 그 녀석이 아직 깨어 있나?"
"아니, 자고 있어. 오늘은 혼자 자고 싶다고 해서."
"어째서?"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 그럴 수도 있지, 뭘."
방다병이 조금 시무룩한 투로 이야기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적비성은 굳은 얼굴을 하고는 바로 이연화의 방에 들어가려 했다. 방다병이 얼른 그 팔을 잡았다.
"그냥 둬. 오늘 힘들어 보였는데, 편히 자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 녀석은 오늘 편히 잘 만한 상태가 아니었어. 아마 자다 발작할까봐 널 내보낸 거겠지. 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 들어갈 테다."
"잠깐 기다려, 이렇게 들어간다고 이연화가 반길 리는 없잖아. 넌 왜 그렇게 항상 너 좋을 대로만 하는 거야?"
방다병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런 와중에도 이연화의 잠을 깨울까 조용조용 말하는 점이 우스웠다. 코웃음을 친 적비성이 그 손길을 뿌리치려던 때, 이연화의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말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작고 낮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의 신음이었다.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적비성과 시선을 교환하고, 방다병은 조금 전 적비성을 멈추려던 스스로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날듯이 움직였다. 방다병과 함께 방 안에 들어서면서, 적비성은 약의 후유증을 꾹 참는 이연화를 마주하리라 예상했다.
말인즉슨, 그는 이연화가 완전히 허물어진 얼굴로 더듬거리는 광경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쉼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똑똑히 보면서도 금방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이연화가 다시 잠든 후에도 두근거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연화를 침상에 눕히고, 방다병은 어두운 얼굴로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할 말이나 행동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적비성은 미간을 한껏 좁힌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어쩐지 목이 바짝 탔다. 가득 찬 찻잔을 한 호흡에 비우고, 적비성은 이연화를 힐끗 보며 말했다.
"심악의 약이 정말 독했나 보군."
"약기운 때문만은 아닐 거야. 평소에 가진 생각이 증폭된 거겠지."
이연화의 머리맡에 앉은 채, 방다병이 조용히 말했다. 그 표정이 묘하게 차분했다. 긴 한숨을 쉬고, 방다병은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연화는 이상이로서 겪은 일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어. 자책이 깊어 사고문에 돌아가지도 못했고. 그건 너도 알잖아."
"폐인이 되기로 자처하고, 혼자 죽을 길을 찾아 들어가던 꼴 말이냐? 잘 알고 있다."
적비성이 날선 투로 받아쳤다. 이 짜증스러운 기분에 금방 이유나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선고도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라 자조하던 이연화가 떠오르자,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다 못해 화가 났다. 팔짱을 낀 채, 금원맹주는 지극히 못마땅한 투로 이었다.
"하지만 그런 꼴을 이해하거나 동조할 마음은 없어. 이연화는 자신이 생긴 대로 살아갈 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어찌 되든, 그건 주변 사람들이 알아 할 일이지. 모든 사건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 또한 오만이야. 왜 그렇게 쓸데없이 스스로를 좀먹는지 모르겠군."
"너, 나중에 이연화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할 거야? 적당히 좀 해."
"적당히 해서 알아먹을 놈이었으면 좋았겠지."
적비성이 냉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말로는 이연화를 탓했지만, 마음은 시원스러워지는 대신 더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문걸과 심악뿐 아니라, 선고도를 비롯한 몇몇 인간들까지 무덤에서 끌어내 다시 죽이고 싶었다. 방다병의 눈썹이 살짝 처졌다. 청년은 잠든 이연화를 위로하듯, 그 어깨를 잡아 가볍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연화는 그냥...중요했던 것들을 너무 잔인하게 잃은 거야."
"그래서 검객은 약점을 만들면 안 된다고 얘기했는데."
적비성이 동해대전 날을 떠올리며 불만스레 중얼거리자, 방다병이 어이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상한 말을 하네.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는 넌, 진심으로 이연화와 각인하길 원하잖아. 그건 약점이 아니야?" 입을 살짝 벌렸다가, 적비성은 드물게도 반박할 말을 잃어버린 채 눈썹을 찡그렸다. 대상이 이연화라 하여 각인의 위험부담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방다병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넘겨주다, 청년은 적비성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너, 내일 이연화가 기억 못하는 것 같으면 괜히 들추지 마. 엄청 민망해할 테니까."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저 녀석은 어차피 기억하더라도 기억 못하는 척할 테니."
적비성이 가볍게 턱짓하며 이죽거렸다. 뭐라 대꾸하려던 방다병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하네." 적비성이 건조한 코웃음을 쳤다. 이연화에 대한 의견이 방다병과 일치할 때마다, 아무래도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연화는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작은 손이었다. 기이한 일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꿈 특유의 설득력에, 이연화는 소년의 몸으로 목검을 쥔 자신을 어렵잖게 받아들였다.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다른 소년이 서 있었다. 가슴 한편이 조이듯이 아팠지만, 정말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반갑기도 했다. 그래, 사실 그땐 사형과 대련하는 일을 좋아했는데. 이연화가 씁쓸하게 생각했다. 늘 분한 얼굴의 사형을 보면서도, 그 분함의 깊이를 제대로 가늠한 적이 없었다.
어린 이상이에게 가까이 다가와, 소년은 퍽 다정한 얼굴로 사탕을 내밀었다. 간식을 냉큼 받아 먹으며, 이연화는 한편으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사형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챙겨줬을까? 그것조차 연기였다 하더라도, 아니면 그것만큼은 진심었다 하더라도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사형, 오늘은 대련할 수 있어요?" 어린 이연화가 물었다. 언젠가부터, 이상이는 대련을 청할 때 사형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꼬마의 머리라도, 예정된 패배가 그리 즐겁지 않으리란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상이야, 오늘은 너와 겨룰 수가 없겠다."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 사형이 말했다. 입안의 사탕이 맛을 잃었다. 어린아이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왜요? 사부님이 많이 겨룰수록 좋다고 하셨는데-."
말이 끝나기 전, 얼굴로 무언가 뜨끈한 것이 뿌려졌다. 꼬마 이상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젖은 뺨을 훔쳐보니, 붉고 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놀라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핏발 선 눈의 남자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어린 사형의 것과 똑같아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나를 죽였잖아."
어린 이상이가 비명을 질렀다. "사부님!" 찢어지는 목소리로 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누군가에게 발목이 잡힌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리에 넘어져 돌아보니, 입과 눈에서 검은 피를 흘리던 선고도가 자신의 다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벌려 웃었다. 그 입 안이 구멍처럼 시커멨다. "사부님은 죽었어. 그분도 너 때문에 죽었지." 어딘가에서 칠목산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연화는 정신이 나갈 듯한 기분으로 헐떡였다. "사부님!"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도 성인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목을 잡은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렸으나 도무지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사방이 어두워지고 발밑이 꺼져들어, 점점 늪 안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비명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찬양과 증오가 한데 섞여 어깨를 짓눌렀다. 식별할 수 없도록 겹쳐져 울리던 음성들은, 어느 순간부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문장을 외쳤다. 너 때문이야. 모두 너 때문에! 이연화가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뇌로 직접 꽂히는 듯한 소리를 내칠 수가 없었다.
"넌 살아 있어선 안 돼. 네 존재는 재앙이나 다름없어. 사람들을 끌어들여 죽게 만들지."
등 뒤에서 원한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가 헉 소리를 삼키며 돌아보았다. 산발을 한 남자가 번쩍이는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칼끝처럼 이연화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상이의 이름을 버리고 살아가겠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아? 네가 버린다고 그 명성이 모두 버려질 것 같으냐? 네 핏줄은 또 어떻고? 차라리 네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네 친형과 함께 죽었다면, 사부님은 살아 계셨을 거다. 나도 헛꿈을 품을 일이 없었을 테지."
이연화가 큰 숨을 몰아쉬었다. 눈으로 열기가 몰렸고, 벽차지독에 고생할 때처럼 울혈이 목으로 치미는 듯했다. 이런 꿈이 처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난자하는 일에는 십 년 동안 충분히 익숙해졌으나, 칠목산이 죽은 내막을 알게 되고 사형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한 직후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어떻게 모두 잊고 지냈을까? 이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선고도가 냉랭하게 비웃었다.
"그 모든 비극의 원흉이 되어놓고,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을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니. 넌 그럴 자격이 없어."
이연화는 잠시 눈을 감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갑자기 미칠 듯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자칫하면 무릎을 꿇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이연화는 허벅지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런 논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할퀸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이연화는 차마 스스로 생을 멈추지 못했다. 사부님과 사모님이 살리려 애쓴 삶을 적극적으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는 두 사람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연화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읊조렸다.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그럼 나는?"
쾌활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화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붉은색 옷에, 턱을 약간 들고 팔짱을 낀 자세가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해 보였다. 이연화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연화의 몸이 굳어졌다. 저것은 자신이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을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청년은 성큼성큼 걸어와 이연화의 앞에 섰다. 바라보는 눈이 끝없이 무정하여 등골로 소름이 돋았다. 이상이가 말했다.
"우리가 한 일은 변하지 않아. 네가 이름을 바꾸고 도망치더라도 마찬가지지."
이연화의 눈가가 움찔했다. 이상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이연화를 훑어보다, 이내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 오른손이 어깨에 올라오자, 정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희게 질린 이연화를 바라보며, 이상이가 입을 열었다.
"넌 늘 이상이가 죽었다고 했지. 용서를 모르던 그 사람은 죽었다고. 그래, 맞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이연화는 운피구의 과거와 현재를 용서했고, 예전이었다면 이빨을 모두 뽑아버렸을 소자금도 용서했지. 교완만을 원망하지 않았고, 네게 치욕을 준 각려초에게도 순수한 살심을 품지 않았어. 어찌나 멍청할 만큼 자비로운지."
이상이가 엷은 미소와 함께 빈정거렸다. 이연화는 그 얼굴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상대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상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남자는 분노로 날카로워진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하지만 네가 이상이를 죽이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 있어. 그게 누구인지 알아?"
어깨에 얹힌 오른손이 마치 천근 같았다.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씁쓸하다 못해 처참한 심정이었다.
"우리지."
이상이의 한쪽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의 왼손마저 어깨로 올라오자, 세상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 압력을 견디는 이연화를 향해, 청년은 독을 부어넣듯 차근차근 힘주어 말했다.
"우리에게 안식은 없어. 숨이 붙어있는 한, 우리는 문제를 끌어당겨. 하루이틀 무탈하다고 방심할 순 없어. 아무리 이름을 바꾼다 한들, 그 죄과에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하거든. 그러니 절대 한 곳에 머물러서는 안 돼.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고, 약점을 만들어도 안 돼. 우린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어. 강 위에서 영원히 홀로 떠가는 쪽배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다가 떠나야 해."
외로운 삶. 어딘가에서 홀로 죽어 백골이 되더라도, 자신의 죽음을 아무도 모를 삶. 이연화가 그 말을 허망하게 곱씹었다. 이상이라는 이름을 버렸을 때부터, 이연화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다 끝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상대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뒤를 어떻게든 쫓아다니며 온갖 귀찮은 일을 자처하던 청년과,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끝까지 따라와 자신을 살리겠다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침상을 데우던 온기가, 진심으로 자신을 바라던 그 눈빛들이 심장을 찌르듯 다가왔다.
"난...하지만, 나와 함께 있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없으면...그들은 슬퍼할 거야."
이연화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로 사라져본 적이 없으니, 그들이 얼마나 슬퍼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실을 애도하는 시간이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아니면 십 년이든 그들은 분명 슬퍼할 터였다. 이상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너와 함께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네가 다른 이들을 마음에 깊이 들였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잊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무수한 비명소리가 다시 몸을 끌어당겼다. 그와 함께 화염 같은 통증이 온몸을 태웠다.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벽차지독과 자신의 몸을 꿰뚫던 칼날, 십 년 만에 나타난 사형의 얼굴과 그의 죽음, 칠목산의 부고 따위가 동시에 떠올라 심신이 짜부라질 것 같았다. 이미 부서진 심장이 누군가에게 자근자근 짓밟히는 듯했다. 제대로 된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이연화는 눈을 질끈 감고는 덜덜 떨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탈출구를 찾는 일은 고사하고,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연화, 이연화!" 어딘가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화가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깊은 바다에 빠졌다가 동앗줄을 찾은 사람처럼, 이연화는 급히 움직여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꽤 가까워졌는데도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이연화는 미친 사람처럼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비! 어디 있어? 방다병!"
"여기 있어."
작은 목소리가 발치에서 들려왔다. 왜 이렇게 낮은 곳에서 말하지? 시선을 내렸다가, 이연화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공포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두 사람의 머리가 땅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아래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왜, 왜-."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이연화가, 차마 그 얼굴을 만지지도 못한 채 더듬거렸다. 머리만 남은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감긴 눈에서 핏물이 흘러 있었다.
"잊었어? 이연화. 너 때문이잖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연화는 비명을 내질렀다.
사방이 어두웠다. 몸이 미친 듯이 떨려, 춥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몸부림치니, 억센 손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이연화, 이연화!"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에게는 이제 몸뚱이가 있었다. 크게 뜬 눈으로 헐떡이며, 이연화가 그 몸을 급히 더듬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재차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꿈일까? 아니면 꿈이 아닌 걸까? 어느 쪽이든 사죄해야 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이연화는 아직 살아있는 그들을 향해 두서 없이 횡설수설했다.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으나 그런 데에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공황에 빠진 목소리가 스스로의 귀에도 낯설었다.
"미안해. 난 못 하겠어. 난...난 너희가 원하는 걸 줄 수가 없어."
네가 다른 이들을 마음에 깊이 들였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잊었어? 이상이의 목소리가 섬뜩한 비수처럼 떠올랐다. 그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새삼스레 참담한 기분이 밀려왔다. 자신이 이상이를 죽이고 이연화로 변화한 이유는, 비단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의식이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스무 살의 청년은, 매우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두려움으로 숨어버리길 택했는지도 몰랐다. 두 개의 소매를 꽉 부여잡은 채, 이연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피를 토하듯 꺼냈다.
"난, 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또...또 누가 돌아서거나 죽어버리면, 나는...."
서러운 숨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사형이 사부를 죽였노라 털어놓았던 순간 이후,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형상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꼬마였을 때부터, 이상이는 소년다운 솔직함과 정으로 여러 사람을 마음에 두었다. 당시에는 그저 무공과 정의에만 관심이 많아, 그런 일이 어떻게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깊은 피로감이 심신을 짓눌렀다. 악몽이 거의 끝나서인지, 자신이 부여잡은 팔 때문인지 과거의 목소리는 한결 잠잠해져 힘을 쓰지 못했다.
눈앞의 상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연화의 팔을 더 꽉 마주잡았을 뿐이었다. 이연화는 매서운 채찍을 기다리듯이 침묵을 견뎠다. 마음의 경계를 내려놓으면, 바로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지거나 비난하는 말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염려하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는 자신을 끌어당겨 안고는, 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어쩐지 익숙한 손길이었다. "괜찮아." 방다병이 낮게 말했다. 이연화가 반쯤 감은 눈으로 혼몽한 숨을 색색 쉬었다. 몸뚱이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괜찮아." 방다병이 다시 말했다. 그 목덜미에서 편안한 체취가 흘러나왔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 정말로 괜찮을 것만 같았다. 곧 작은 한숨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등 뒤로 뜨거운 손바닥이 와 닿았다. 등을 쓸던 손길만큼 익숙한 내력이 몸 안을 돌면서, 답지 않게 위안하는 것처럼 경맥을 진정시켰다.
미친 듯 뛰던 심장박동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굳다 못해 경련이 일어날 듯하던 근육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렸다. 이연화는 악몽의 마무리가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어찌나 식은땀을 흘렸던지, 자기 전 갈아입었던 옷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잠깐, 자기 전 갈아입었던 옷...? 그럼 지금은 자고 있지 않다는 뜻이잖아? 이연화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악몽의 여운을 뚫고, 한 줄기 현실감이 선득하게 치밀었다. 그러나 이연화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깨어나려 들기 전, 방다병이 말했다.
"더 쉬어. 안신향 피워 줄게."
아니, 잠깐만-무슨 말을 다급히 꺼내기 전, 누군가가 이연화의 수면혈을 짚었다. 생각을 잇지 못하고, 이연화는 속절없이 도로 잠에 이끌렸다.
-
방시문의 집으로 돌아올 때부터, 적비성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생벽과 그 문걸이라는 작자를 잡지 못한 탓이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안과 적비성이 세우단의 본부를 발견했을 때, 그곳은 이미 불타거나 폭발하던 참이었다. 그쯤이야 예상 내였으나, 문제는 군데군데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점이었다. 적비성과 무안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은 나무로 된 옥 안에서 손을 내밀며 살려달라 아우성을 쳤다. 마음 한편에서는 그들이야 어찌됐든 복수심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이 일렁였으나,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적가에서의 경험 탓으로, 적비성은 어른에게 휘둘리는 꼬마들을 두고 보기 싫어했다. 찰나의 갈등을 엿본 무안이 말했다.
"존상. 그놈들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에 남은 흔적들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불을 놓았다는 건, 그놈들이 급히 도망치느라 뒷수습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도망친 사람은 잡을 수 있으나 타버린 종이와 사람은 되돌릴 수 없지요. 그들의 뿌리를 뽑으실 작정이라면, 증인과 증좌를 남겨두는 편이 좋습니다."
적비성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을 다 죽게 내버려두면, 아무래도 찜찜할 뿐더러 이연화가 엄청나게 성을 낼 것 같았다. "내가 옥을 열 테니, 타지 않은 것들을 챙겨라." 무안이 고개를 숙였다.
무안이 재빠르게 움직여 불을 끄거나 문서들을 챙기는 사이, 적비성은 무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옥의 자물쇠들을 툭툭 부숴버렸다. 나무로 만든 감옥들은 귀찮게도 본부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 아무리 높은 수준의 경공을 쓰더라도 모두 부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풀려난 사람들은 얼른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서는, 적비성과 무안에게 울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적비성은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금원맹주는 이런 식으로 감사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그들에게 세우단과 심악에 대해 물었다.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신분은 다양했는데, 일이나 놀이로 산을 타다가 진법에 잘못 발을 디뎌 포획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달 전부터, 세우단은 그들을 잡아 가두고는 심악의 실험 대상으로 내주었다. 가끔씩은 누군가가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실험 중 죽었거나, 이상한 약의 재료가 된 것 아니겠냐며 진저리를 쳤다.
심악의 실험 일지와 다양한 약의 생산 현황, 심지어 약마의 비급 일부까지 되찾았지만 적비성은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금원맹주는 죽이고 싶은 자를 두고 오래 참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공유하기는 해야 했고, 어차피 잠자리는 이연화와 함께할 생각이었기에, 적비성은 찌푸린 얼굴로나마 방시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적비성은 이연화 대신 그의 방 근처를 서성거리던 방다병을 먼저 마주쳤다.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 나와 있지? 그 녀석이 아직 깨어 있나?"
"아니, 자고 있어. 오늘은 혼자 자고 싶다고 해서."
"어째서?"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 그럴 수도 있지, 뭘."
방다병이 조금 시무룩한 투로 이야기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적비성은 굳은 얼굴을 하고는 바로 이연화의 방에 들어가려 했다. 방다병이 얼른 그 팔을 잡았다.
"그냥 둬. 오늘 힘들어 보였는데, 편히 자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 녀석은 오늘 편히 잘 만한 상태가 아니었어. 아마 자다 발작할까봐 널 내보낸 거겠지. 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 들어갈 테다."
"잠깐 기다려, 이렇게 들어간다고 이연화가 반길 리는 없잖아. 넌 왜 그렇게 항상 너 좋을 대로만 하는 거야?"
방다병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런 와중에도 이연화의 잠을 깨울까 조용조용 말하는 점이 우스웠다. 코웃음을 친 적비성이 그 손길을 뿌리치려던 때, 이연화의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말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작고 낮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의 신음이었다.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적비성과 시선을 교환하고, 방다병은 조금 전 적비성을 멈추려던 스스로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날듯이 움직였다. 방다병과 함께 방 안에 들어서면서, 적비성은 약의 후유증을 꾹 참는 이연화를 마주하리라 예상했다.
말인즉슨, 그는 이연화가 완전히 허물어진 얼굴로 더듬거리는 광경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쉼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똑똑히 보면서도 금방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이연화가 다시 잠든 후에도 두근거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연화를 침상에 눕히고, 방다병은 어두운 얼굴로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할 말이나 행동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적비성은 미간을 한껏 좁힌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어쩐지 목이 바짝 탔다. 가득 찬 찻잔을 한 호흡에 비우고, 적비성은 이연화를 힐끗 보며 말했다.
"심악의 약이 정말 독했나 보군."
"약기운 때문만은 아닐 거야. 평소에 가진 생각이 증폭된 거겠지."
이연화의 머리맡에 앉은 채, 방다병이 조용히 말했다. 그 표정이 묘하게 차분했다. 긴 한숨을 쉬고, 방다병은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연화는 이상이로서 겪은 일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어. 자책이 깊어 사고문에 돌아가지도 못했고. 그건 너도 알잖아."
"폐인이 되기로 자처하고, 혼자 죽을 길을 찾아 들어가던 꼴 말이냐? 잘 알고 있다."
적비성이 날선 투로 받아쳤다. 이 짜증스러운 기분에 금방 이유나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선고도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라 자조하던 이연화가 떠오르자,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다 못해 화가 났다. 팔짱을 낀 채, 금원맹주는 지극히 못마땅한 투로 이었다.
"하지만 그런 꼴을 이해하거나 동조할 마음은 없어. 이연화는 자신이 생긴 대로 살아갈 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어찌 되든, 그건 주변 사람들이 알아 할 일이지. 모든 사건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 또한 오만이야. 왜 그렇게 쓸데없이 스스로를 좀먹는지 모르겠군."
"너, 나중에 이연화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할 거야? 적당히 좀 해."
"적당히 해서 알아먹을 놈이었으면 좋았겠지."
적비성이 냉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말로는 이연화를 탓했지만, 마음은 시원스러워지는 대신 더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문걸과 심악뿐 아니라, 선고도를 비롯한 몇몇 인간들까지 무덤에서 끌어내 다시 죽이고 싶었다. 방다병의 눈썹이 살짝 처졌다. 청년은 잠든 이연화를 위로하듯, 그 어깨를 잡아 가볍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연화는 그냥...중요했던 것들을 너무 잔인하게 잃은 거야."
"그래서 검객은 약점을 만들면 안 된다고 얘기했는데."
적비성이 동해대전 날을 떠올리며 불만스레 중얼거리자, 방다병이 어이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상한 말을 하네.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는 넌, 진심으로 이연화와 각인하길 원하잖아. 그건 약점이 아니야?" 입을 살짝 벌렸다가, 적비성은 드물게도 반박할 말을 잃어버린 채 눈썹을 찡그렸다. 대상이 이연화라 하여 각인의 위험부담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방다병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넘겨주다, 청년은 적비성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너, 내일 이연화가 기억 못하는 것 같으면 괜히 들추지 마. 엄청 민망해할 테니까."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저 녀석은 어차피 기억하더라도 기억 못하는 척할 테니."
적비성이 가볍게 턱짓하며 이죽거렸다. 뭐라 대꾸하려던 방다병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하네." 적비성이 건조한 코웃음을 쳤다. 이연화에 대한 의견이 방다병과 일치할 때마다, 아무래도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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