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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9 22:52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당장 수상한 증상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짜증스럽고도 불쾌한 예감이 스쳤다. 침을 암기처럼 쓰는 이들은 통상 바늘에 독을 발라두었다. 가느다란 침으로 치명상을 입히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연화의 반응을 관찰하듯, 문걸은 바로 달려드는 대신 자리에 멈추어 가만히 이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좋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상처인데 스쳤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지. 이연화가 퍽 귀찮아졌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슬쩍 틀었다. 곤두세운 청각으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방다병이 치명상을 입은 낌새는 없었다. 청년은 다시 이아검을 쥔 채 싸우고 있었다.
"꽤 자신 있는 독을 쓰셨나 봅니다. 그렇게 기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내가 다 부끄러워지네요."
이연화가 능청스러운 웃음과 함께 건넸다. 문걸의 입가로 긴장 섞인 냉소가 떠올랐다. "맹독은 아니오, 몸에 크게 해가 되진 않소. 그렇기에 오히려 막기 어렵지. 적어도 심악은 그리 말했으나...." 남자가 희미하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리며 바늘을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한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건넸다.
"계속 하시렵니까? 나는 딱히 이 자리에서 당신과 생사결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제 동행과 재회하고 싶은데-."
어딘가에서 높은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연화가 홱 돌아보았다. 그 주체를 금방 확신할 수 없었으나, 분명 젊은 음성이었다. 순식간에 심장박동이 격렬해지면서, 온통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이연화가 날듯이 땅을 디디려던 순간, 문걸의 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검과 나뭇가지가 살벌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연화의 미간으로 깊은 골이 생겼다. 문걸이 이빨을 슬쩍 드러내며 웃었다.
"그 청년이 걱정되시오? 꽤 아끼나 보군. 이 진법에 잘못 발을 디뎠으니, 이미 내 수하들에게 사지 중 어딘가가 잘려나갔을지도 모르지. 그쪽을 따라온 것 같던데, 뛰어난 젊은이가 아깝게 되었소."
이연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뻔하고 저급한 도발이었으나 평소처럼 비웃음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방다병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빨리 피를 잃고 죽을 수 있는지, 수많은 대결과 전투를 치러본 이연화는 지나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검을 거세게 튕겨냈다. 문걸이 뒤로 죽 물러난 사이, 이연화는 어느새 얕고 가빠진 숨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쩐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지? 턱에 꽉 힘을 준 채, 이연화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아무리 방다병이 위험하더라도, 이런 반응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싸우다 수세에 몰린 적이야 왕왕 있었지만, 이렇게 공황에 빠진 듯 이성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공황?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난데없었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발작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연화가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방다병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나중에 풀려난 아이들이 증언했어. 어떨 때에는 너무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울다가 기절해서 거품을 물기도 했다고. 아마도 눈앞의 남자는, 심악의 발명품을 스스로의 무기로 삼은 모양이었다.
긴 숨을 조용히 내쉬며, 이연화는 자신의 혈을 두어 군데 찍었다. 날뛰는 마음과 경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계속 빨라지기만 하던 심장박동이 잠시나마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러난 자리에서 이연화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문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하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고수로군. 웬만큼 높은 내력을 지닌 자들도, 이 약에 당하면 곧 숨도 쉬지 못하고 쓰러져 발작했는데."
이연화가 픽 웃었다. 언뜻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그 내면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이제는 방다병의 외침이 저 멀리서부터 언뜻언뜻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도와달라 말하거나, 이연화의 이름을 다급히 불렀다. 저 음성은 진짜일까? 아니면 이 약이 만들어낸 환청일까? 이연화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 쪽이든, 방다병의 기척에 완벽히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쪽을 따라온 것 같던데, 뛰어난 젊은이가 아깝게 되었소. 문걸의 말이 절벽을 구른 암석처럼 가슴을 쿵 두들겼다. 목이 바짝 마르면서 손발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만일 방다병이 잘못되면,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다 너 때문이야. 누군가의 말소리가 비수처럼 떠올라 폐부를 쥐어짰다. 나뭇가지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줄곧 차분하던 눈동자 역시, 문걸에게 똑바로 맞춰지지 않은 채 일렁였다. 그 작은 이변을 발견했는지, 문걸이 한쪽 입매를 살짝 올렸다. 일말의 안도감마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 진법의 목적이 뭔지 물었지. 이 진법은 그물이오. 물고기를 산 채로 잡는 그물."
문걸이 한 발짝 다가오며 말했다. 그물? 심마와 싸우면서도, 이연화는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자원이었다. 팔리거나, 또는 먹히거나. 문걸의 손 위에서, 몇 개의 대침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연화가 잠시 눈을 감았다. 공격 직전의 적을 앞에 두고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과민해진 사고와 감각이 미친 듯 날뛰어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지금껏 마주했던 적들에 비하면 거대한 시련이 아니었으나, 약에 흐려진 마음과 감각은 마치 재해를 만난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내가 바늘에 묻힌 약도 비슷하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진 마시오. 바로 죽이는 것보다, 얼마간 살려두는 쪽이 더 이득이거든."
문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 방소보가 근처에서 싸우고 있는데, 내가 쓰러지면 그 녀석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이연화가 뺨을 때리듯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몸뚱이는, 해일처럼 밀려온 심마를 견디는 것만도 버거운 듯 뻣뻣이 굳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연화가 혀뿌리를 지그시 깨물었다. 흉흉한 폭풍에 속절없이 말려들어 이리저리 부딪치는 듯했다.
눈을 떠, 멍청아. 정말 그런 결과가 두려워? 그럼 당장 눈앞의 적을 치워버리고 그 녀석한테 가. 그러지 못하겠다면, 적한테 치욕을 당하기 전에 여기서 자진이라도 하든가! 패기와 분노 섞인 고함이 터져 머릿속을 울렸다. 이연화의 눈썹이 꿈틀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어조였다. 이것은 이연화가 아닌, 이상이의 말이었다. 해를 끼친 상대를 절대 용서하지 않고, 이연화보다 분노와 단죄에 훨씬 진지했던 젊은이.
"네가 떠들다니. 내 꼴이 정말 엉망이긴 한가 보네."
오래 전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자의 불씨를 느낀 순간, 이연화가 약간 떨리는 헛웃음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 이미 여러 개의 대침이 표적을 꿰기 위해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들지 않은 채, 이연화는 왼손을 펴 드는 것으로 내력의 바람을 일으켰다. 대침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도록, 문걸의 검날이 코앞으로 쇄도했다. 그 일격을 막아내고, 이연화는 가면 너머에서 문걸을 노려보았다. 과거의 청년이 죽여야 할 적을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문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맞댄 검날로 미약한 흐트러짐이 느껴졌다.
"비켜!"
이연화가 씹어 뱉었다. 놀랍게도, 문걸은 정말 훌쩍 뛰어 뒤로 날았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가 닥치리라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했다. 문걸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지만, 이연화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그 내력이 거칠다 못해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 힘을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결결이 찢어지듯 폭발했다. 평소 깨끗할 만큼 예리하고 정확하던 검격은, 마치 거대한 주먹처럼 폭발해 넓은 면적을 후려쳤다. 마치 맹렬한 비풍백양을 떠올리게끔 하는 모습이었다.
그 참격에 얻어맞은 고목들이 비명도 없이 갈라졌다. 쿵, 쿵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며 이파리가 푸스스 얽히고 떨어졌다. 이연화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 그 소란은, 한두 그루에서 멈추지 않고 번지듯 뻗어 나가 이내 십여 그루의 나무를 넘어뜨렸다. 불꽃 없는 뇌화탄 수십 개를 일시에 터뜨린 듯했다. 이연화가 숨을 몰아쉬며 그 너머를 쏘아보았다. 문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도 당신과 생사결을 할 생각은 없소. 그런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상대의 전음이 흐리게 멀어졌다.
그 뒤를 쫓는 대신, 이연화는 갑작스레 변화하는 광경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아마도 진법을 구성하던 무언가가 파괴된 모양이었다. 교란되었던 감각들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이연화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곧 작은 바람과 함께 방다병이 나타났다. 그 뺨에 몇 개의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이연화! 괜찮아? 이상한 진법이 펼쳐져 있었는데, 내가 미처 모르고-네가 부순 거지?"
"방다병."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이연화는 허리를 약간 숙인 채 헉헉거리다 말고 청년의 양팔을 꽉 잡았다.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흠칫했다.
"어? 어어."
"방다병, 너 괜찮아?"
이연화가 눈을 크게 뜬 채 상대를 더듬었다. 방다병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은데...진법의 효과도 있었고, 그 세 명이 생각보다 협공을 잘 해서 잠깐 위험할 뻔하기는 했지만. 봐, 아무렇지도 않아."
방다병이 양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큰 한숨을 토하면서, 이연화는 자리에 무너지듯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억지로 내리눌렀던 신체 반응이 다시금 생생하게 치밀었다. 상대가 괜찮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머리와 몸은 끊임없이 위험 신호를 뿜어올렸다. 손발이 미세하게 떨렸고 귓속은 심하게 윙윙거렸다. 이연화가 끙 소리를 참으며 두 눈을 꾹 감았다.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환각과 환청 따위에 습격당할 것만 같았다.
"이연화, 이연화. 너 왜 그래? 그놈에게 당한 거야?"
대경한 방다병이 마주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연화의 오른팔을 잡았다. 이연화가 눈을 뜨고 뭐라 말하려던 때, 작은 바람이 일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날던 금원맹주가,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착지한 참이었다. "멍청한 놈." 다짜고짜 욕설처럼 뱉으면서도, 적비성은 얼른 다가와 이연화의 왼팔을 잡았다. 두 명의 부축을 받아, 이연화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쪽 오금이 아련히 저려 왔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스스로 보기에도 꼴사나웠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니니 그렇게 볼 거 없어. 심악 선생이 협력자들에게 자기 발명품을 나눠준 모양이야. 맹독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맹독이 아니라고? 말도 안 돼, 이렇게 땀을 흘리는데-."
"방다병, 잡아."
적비성이 짤막하게 지시하고는 이연화의 뒤에 섰다. 큰 손바닥이 등을 받쳤다. 이연화가 소용없이 불평했다. "정말 맹독이 아니라니까, 봐. 피도 안 토하고-." "말하지 마." 적비성이 쏘아붙였다. 이연화는 눈을 살짝 굴렸지만, 닿은 손을 통해 들어오는 내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증상이 단박에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각인한 상대와 내밀하게 연결되자 미친 듯 질주하던 심장박동이 슬쩍 가라앉았다. 적비성의 얼굴로 미미한 혼란이 번졌다.
"이건...독이 맞나?"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독초도, 경우에 따라 정신을 명료히 하는 약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아마 이것도 그런 종류겠지...오장육부를 망가뜨리는 약이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야. 약을 쓴 사람도 그렇게 말했고."
이연화가 헐떡이는 숨에 섞어 이야기했다. 그 손이 적비성의 팔을 더듬어 잡았다. "난 괜찮아. 내력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애쓰지 마." 적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뗐다. 이연화를 쩔쩔매며 지켜보던 방다병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보다 훨씬 좋지 못한 꼴을 그토록 많이 보았음에도, 청년은 아직 이연화의 고통에 조금의 면역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연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이 어마어마한 실력자였어?"
"실력자는 맞는데, 아비 정도는 아니야. 잠깐 방심했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넌 나한테 어떤 상황에서든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 그런 놈에게 틈을 보이면 어떡해?"
방다병이 안타깝게 책망했다. 상대의 말이 애정에 기반한 것을 알면서도, 이연화는 어쩔 수 없이 험한 눈으로 방다병을 흘겨보았다. 차마 네가 검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즉각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조금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이연화는 진지한 눈으로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다 하여 해야 할 일을 방기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 심악과 세우단의 거처가 있을 거야. 오늘 일 때문에 흔적을 지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들 수도 있으니, 꼬리를 놓쳐선 안 돼."
"그건 나와 무안이 알아서 하겠다. 방다병, 이연화를 데리고 돌아가."
"알았어."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홱 몸을 돌리려던 적비성이 문득 이연화를 보았다. 상대가 왜 이상한 표정을 짓는지 의아해하다가, 이연화는 자신이 적비성의 팔을 잡았던 손으로 부지불식간에 힘을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안함이 확 올라와 뒷목을 데웠다. 조금 전의 방다병처럼 적비성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각인한 상대가 취약해진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길 원해서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떤 이유든 비합리적이다 못해 처량할 정도였다. "이연화?"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이연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말을 쥐어짰다.
"그...음. 네가 쫓은 의원 쪽에서는 뭔가 나온 게 없었어?"
"노인에게 짐을 건네주고 하산하려 하기에, 잠시 붙들어 심문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알려줄 테니, 일단 방다병과 돌아가. 꼬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건 너잖아."
가볍게 타박하듯 말하고, 적비성은 품에서 금색 피리를 꺼내 불었다. 곧 무안이 나타나 존상을 향해 예를 표했다. 적비성이 빠르게 지시했다. "진법이 무너졌으니, 근처에 있을 본부를 찾아 소탕한다. 놈들이 도망치는 중이라면, 백발에 회색 옷을 걸친 노인은 꼭 잡아야 한다. 그리고...." 적비성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그 미간으로 깊은 골이 패였다.
"이놈을 이 꼴로 만든 자는 누구냐?"
"어, 아마 삿갓을 쓴 무인일 거야. 검을 쓰는 사람 같았는데, 무공이 뛰어나 보였어."
"본인을 세우단이라는 조직의 부단주라고 했어. 문걸이란 이름인데, 검과 침을 함께 쓰니 주의해. 묘하게 살수 같은 구석이 있어."
이연화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요약해 건네자, 적비성이 무안을 돌아보았다.
"잘 기억해 뒀다가, 그놈을 잡게 되면 실수로라도 죽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조직의 부단주라면 심문할 내용이 많을 겁니다."
"심문은 어찌 돼도 좋아. 내가 죽일 거다."
적비성이 불쾌감에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두 공자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겠노라 예고하던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투였다. 이연화가 뭐라 말을 얹기 전-바로 죽이라고 알려준 인적사항이 아니야!-금원맹주는 수하와 함께 뛰어올라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어쩐지 여러모로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은 채,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처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새벽이 깊어져 있었다.
"이연화, 아직도 계속 불편해? 역시 의원을 불러올까?"
"죽을 병도 아닌데,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의원이야. 됐어, 벌써 많이 나아졌어."
방다병의 부축을 받아 침상에 누운 채, 이연화가 한 손을 대충 내저으며 대꾸했다. 식은땀으로 온통 들러붙은 옷이 불쾌했다. 약효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천천히 흐려졌지만, 그 후유증인지 약간의 현기증과 두통이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이연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심악이라는 자는, 아마 알려진 것보다 더 성가신 악인인 듯해. 세우단이라는 조직도...문걸이라는 자를 보면 그리 만만하지 않아."
"반드시 뿌리를 찾아내서 잘라버려야지. 백천원에도 미리 서신을 보내야겠어. 상대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부턴 절대로 너 혼자 우릴 따돌리지 마."
"알았어, 알았어."
이연화가 힘없이 대꾸했다. 방다병이 흥 소리를 내더니 부산스레 움직였다. 무얼 하나 신경이 쓰여 눈을 반쯤 뜨고 돌아보니, 방다병은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새 침의를 가져와 이연화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올려두던 참이었다.
"너 땀을 많이 흘렸잖아. 갈아입고 싶을 것 같아서."
방다병이 이연화를 일으키면서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주섬주섬 새 옷을 걸치며, 이연화는 등을 보인 채 돌아앉은 방다병을 어쩐지 불가사의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이 녀석은 어떻게 이다지도 섬세한 성품을 타고났단 말인가? 뭣보다, 이런 아이가 대체 어쩌다가 나 같은 이에게 붙어 이리 귀찮은 수발을 자처하는 걸까? 묻는다고 이해할 만한 답이 나올 듯하지는 않아, 이연화는 잠자코 자리에 누웠다.
"이제 좀 쉬어. 난 적비성이 오는 걸 기다렸다가 알아서 누울게."
방다병이 이연화의 몸 위로 이불까지 덮어주고는 건넸다. 이연화의 미간이 움찔했다.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눈가를 살짝 만지고 입을 열었다.
"저기, 방소보. 오늘은 좀...따로 자는 게 좋겠는데."
"뭐? 왜?"
방다병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청년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 사람처럼 벌게져서 물었다.
"혹시...혹시 내가 어젯밤에 뭔가 이상한 짓을 해서 그래?"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오늘 밤엔 내가 좀...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이연화가 얼버무리듯 말했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둘러대기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소보, 내가 아직 약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단 말이지. 남은 밤에 제대로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자칫하다간 너희 둘한테 굉장한 추태를 보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건 정말 싫거든? 사실 한편으로는 이럴 때라서 더 함께 자고픈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꼭 혼자 있고 싶은 거라고. 이연화가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복잡한 속내를 줄줄 늘어놓으면, 방다병의 성정상 분명 체면보다는 네가 괜찮은 게 중요하다며 방방 뛸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방다병은 더 캐묻거나 이연화를 밀어붙이지 않았다(사실 침상을 공유하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기 미묘한 사안이었다). 청년은 조금 의아하면서도 떨떠름해 보였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침상이 좀 좁기는 했지. 그래도...혹시 어디가 안 좋거나 하면 바로 알려줘야 해."
"네가 날 곳간에 넣었을 때를 잊었어? 난 아플 때 아프다고 해, 걱정하지 마."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 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뻔뻔하게 들린다."
퉁명스레 대꾸한 방다병은, 이내 등불을 꺼주고는 방을 나섰다.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고, 이연화는 아직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나아져 있겠지. 스스로를 위안하듯 생각하며, 이연화는 억지로 잠을 청하고자 애썼다. 침상이 요 며칠 사이보다 차가워서인지, 아직 남은 약기운 때문인지 좀처럼 안정할 수가 없었다.
뒤척이다 겨우 선잠이 들었을 때, 이연화는 오랜만에 끔찍한 악몽을 꾸고는 짧은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당장 수상한 증상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짜증스럽고도 불쾌한 예감이 스쳤다. 침을 암기처럼 쓰는 이들은 통상 바늘에 독을 발라두었다. 가느다란 침으로 치명상을 입히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연화의 반응을 관찰하듯, 문걸은 바로 달려드는 대신 자리에 멈추어 가만히 이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좋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상처인데 스쳤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지. 이연화가 퍽 귀찮아졌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슬쩍 틀었다. 곤두세운 청각으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방다병이 치명상을 입은 낌새는 없었다. 청년은 다시 이아검을 쥔 채 싸우고 있었다.
"꽤 자신 있는 독을 쓰셨나 봅니다. 그렇게 기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내가 다 부끄러워지네요."
이연화가 능청스러운 웃음과 함께 건넸다. 문걸의 입가로 긴장 섞인 냉소가 떠올랐다. "맹독은 아니오, 몸에 크게 해가 되진 않소. 그렇기에 오히려 막기 어렵지. 적어도 심악은 그리 말했으나...." 남자가 희미하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리며 바늘을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한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건넸다.
"계속 하시렵니까? 나는 딱히 이 자리에서 당신과 생사결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제 동행과 재회하고 싶은데-."
어딘가에서 높은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연화가 홱 돌아보았다. 그 주체를 금방 확신할 수 없었으나, 분명 젊은 음성이었다. 순식간에 심장박동이 격렬해지면서, 온통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이연화가 날듯이 땅을 디디려던 순간, 문걸의 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검과 나뭇가지가 살벌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연화의 미간으로 깊은 골이 생겼다. 문걸이 이빨을 슬쩍 드러내며 웃었다.
"그 청년이 걱정되시오? 꽤 아끼나 보군. 이 진법에 잘못 발을 디뎠으니, 이미 내 수하들에게 사지 중 어딘가가 잘려나갔을지도 모르지. 그쪽을 따라온 것 같던데, 뛰어난 젊은이가 아깝게 되었소."
이연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뻔하고 저급한 도발이었으나 평소처럼 비웃음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방다병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빨리 피를 잃고 죽을 수 있는지, 수많은 대결과 전투를 치러본 이연화는 지나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검을 거세게 튕겨냈다. 문걸이 뒤로 죽 물러난 사이, 이연화는 어느새 얕고 가빠진 숨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쩐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지? 턱에 꽉 힘을 준 채, 이연화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아무리 방다병이 위험하더라도, 이런 반응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싸우다 수세에 몰린 적이야 왕왕 있었지만, 이렇게 공황에 빠진 듯 이성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공황?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난데없었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발작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연화가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방다병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나중에 풀려난 아이들이 증언했어. 어떨 때에는 너무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울다가 기절해서 거품을 물기도 했다고. 아마도 눈앞의 남자는, 심악의 발명품을 스스로의 무기로 삼은 모양이었다.
긴 숨을 조용히 내쉬며, 이연화는 자신의 혈을 두어 군데 찍었다. 날뛰는 마음과 경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계속 빨라지기만 하던 심장박동이 잠시나마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러난 자리에서 이연화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문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하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고수로군. 웬만큼 높은 내력을 지닌 자들도, 이 약에 당하면 곧 숨도 쉬지 못하고 쓰러져 발작했는데."
이연화가 픽 웃었다. 언뜻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그 내면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이제는 방다병의 외침이 저 멀리서부터 언뜻언뜻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도와달라 말하거나, 이연화의 이름을 다급히 불렀다. 저 음성은 진짜일까? 아니면 이 약이 만들어낸 환청일까? 이연화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 쪽이든, 방다병의 기척에 완벽히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쪽을 따라온 것 같던데, 뛰어난 젊은이가 아깝게 되었소. 문걸의 말이 절벽을 구른 암석처럼 가슴을 쿵 두들겼다. 목이 바짝 마르면서 손발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만일 방다병이 잘못되면,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다 너 때문이야. 누군가의 말소리가 비수처럼 떠올라 폐부를 쥐어짰다. 나뭇가지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줄곧 차분하던 눈동자 역시, 문걸에게 똑바로 맞춰지지 않은 채 일렁였다. 그 작은 이변을 발견했는지, 문걸이 한쪽 입매를 살짝 올렸다. 일말의 안도감마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 진법의 목적이 뭔지 물었지. 이 진법은 그물이오. 물고기를 산 채로 잡는 그물."
문걸이 한 발짝 다가오며 말했다. 그물? 심마와 싸우면서도, 이연화는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자원이었다. 팔리거나, 또는 먹히거나. 문걸의 손 위에서, 몇 개의 대침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연화가 잠시 눈을 감았다. 공격 직전의 적을 앞에 두고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과민해진 사고와 감각이 미친 듯 날뛰어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지금껏 마주했던 적들에 비하면 거대한 시련이 아니었으나, 약에 흐려진 마음과 감각은 마치 재해를 만난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내가 바늘에 묻힌 약도 비슷하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진 마시오. 바로 죽이는 것보다, 얼마간 살려두는 쪽이 더 이득이거든."
문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 방소보가 근처에서 싸우고 있는데, 내가 쓰러지면 그 녀석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이연화가 뺨을 때리듯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몸뚱이는, 해일처럼 밀려온 심마를 견디는 것만도 버거운 듯 뻣뻣이 굳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연화가 혀뿌리를 지그시 깨물었다. 흉흉한 폭풍에 속절없이 말려들어 이리저리 부딪치는 듯했다.
눈을 떠, 멍청아. 정말 그런 결과가 두려워? 그럼 당장 눈앞의 적을 치워버리고 그 녀석한테 가. 그러지 못하겠다면, 적한테 치욕을 당하기 전에 여기서 자진이라도 하든가! 패기와 분노 섞인 고함이 터져 머릿속을 울렸다. 이연화의 눈썹이 꿈틀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어조였다. 이것은 이연화가 아닌, 이상이의 말이었다. 해를 끼친 상대를 절대 용서하지 않고, 이연화보다 분노와 단죄에 훨씬 진지했던 젊은이.
"네가 떠들다니. 내 꼴이 정말 엉망이긴 한가 보네."
오래 전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자의 불씨를 느낀 순간, 이연화가 약간 떨리는 헛웃음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 이미 여러 개의 대침이 표적을 꿰기 위해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들지 않은 채, 이연화는 왼손을 펴 드는 것으로 내력의 바람을 일으켰다. 대침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도록, 문걸의 검날이 코앞으로 쇄도했다. 그 일격을 막아내고, 이연화는 가면 너머에서 문걸을 노려보았다. 과거의 청년이 죽여야 할 적을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문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맞댄 검날로 미약한 흐트러짐이 느껴졌다.
"비켜!"
이연화가 씹어 뱉었다. 놀랍게도, 문걸은 정말 훌쩍 뛰어 뒤로 날았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가 닥치리라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했다. 문걸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지만, 이연화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그 내력이 거칠다 못해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 힘을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결결이 찢어지듯 폭발했다. 평소 깨끗할 만큼 예리하고 정확하던 검격은, 마치 거대한 주먹처럼 폭발해 넓은 면적을 후려쳤다. 마치 맹렬한 비풍백양을 떠올리게끔 하는 모습이었다.
그 참격에 얻어맞은 고목들이 비명도 없이 갈라졌다. 쿵, 쿵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며 이파리가 푸스스 얽히고 떨어졌다. 이연화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 그 소란은, 한두 그루에서 멈추지 않고 번지듯 뻗어 나가 이내 십여 그루의 나무를 넘어뜨렸다. 불꽃 없는 뇌화탄 수십 개를 일시에 터뜨린 듯했다. 이연화가 숨을 몰아쉬며 그 너머를 쏘아보았다. 문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도 당신과 생사결을 할 생각은 없소. 그런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상대의 전음이 흐리게 멀어졌다.
그 뒤를 쫓는 대신, 이연화는 갑작스레 변화하는 광경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아마도 진법을 구성하던 무언가가 파괴된 모양이었다. 교란되었던 감각들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이연화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곧 작은 바람과 함께 방다병이 나타났다. 그 뺨에 몇 개의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이연화! 괜찮아? 이상한 진법이 펼쳐져 있었는데, 내가 미처 모르고-네가 부순 거지?"
"방다병."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이연화는 허리를 약간 숙인 채 헉헉거리다 말고 청년의 양팔을 꽉 잡았다.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흠칫했다.
"어? 어어."
"방다병, 너 괜찮아?"
이연화가 눈을 크게 뜬 채 상대를 더듬었다. 방다병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은데...진법의 효과도 있었고, 그 세 명이 생각보다 협공을 잘 해서 잠깐 위험할 뻔하기는 했지만. 봐, 아무렇지도 않아."
방다병이 양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큰 한숨을 토하면서, 이연화는 자리에 무너지듯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억지로 내리눌렀던 신체 반응이 다시금 생생하게 치밀었다. 상대가 괜찮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머리와 몸은 끊임없이 위험 신호를 뿜어올렸다. 손발이 미세하게 떨렸고 귓속은 심하게 윙윙거렸다. 이연화가 끙 소리를 참으며 두 눈을 꾹 감았다.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환각과 환청 따위에 습격당할 것만 같았다.
"이연화, 이연화. 너 왜 그래? 그놈에게 당한 거야?"
대경한 방다병이 마주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연화의 오른팔을 잡았다. 이연화가 눈을 뜨고 뭐라 말하려던 때, 작은 바람이 일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날던 금원맹주가,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착지한 참이었다. "멍청한 놈." 다짜고짜 욕설처럼 뱉으면서도, 적비성은 얼른 다가와 이연화의 왼팔을 잡았다. 두 명의 부축을 받아, 이연화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쪽 오금이 아련히 저려 왔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스스로 보기에도 꼴사나웠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니니 그렇게 볼 거 없어. 심악 선생이 협력자들에게 자기 발명품을 나눠준 모양이야. 맹독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맹독이 아니라고? 말도 안 돼, 이렇게 땀을 흘리는데-."
"방다병, 잡아."
적비성이 짤막하게 지시하고는 이연화의 뒤에 섰다. 큰 손바닥이 등을 받쳤다. 이연화가 소용없이 불평했다. "정말 맹독이 아니라니까, 봐. 피도 안 토하고-." "말하지 마." 적비성이 쏘아붙였다. 이연화는 눈을 살짝 굴렸지만, 닿은 손을 통해 들어오는 내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증상이 단박에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각인한 상대와 내밀하게 연결되자 미친 듯 질주하던 심장박동이 슬쩍 가라앉았다. 적비성의 얼굴로 미미한 혼란이 번졌다.
"이건...독이 맞나?"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독초도, 경우에 따라 정신을 명료히 하는 약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아마 이것도 그런 종류겠지...오장육부를 망가뜨리는 약이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야. 약을 쓴 사람도 그렇게 말했고."
이연화가 헐떡이는 숨에 섞어 이야기했다. 그 손이 적비성의 팔을 더듬어 잡았다. "난 괜찮아. 내력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애쓰지 마." 적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뗐다. 이연화를 쩔쩔매며 지켜보던 방다병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보다 훨씬 좋지 못한 꼴을 그토록 많이 보았음에도, 청년은 아직 이연화의 고통에 조금의 면역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연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이 어마어마한 실력자였어?"
"실력자는 맞는데, 아비 정도는 아니야. 잠깐 방심했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넌 나한테 어떤 상황에서든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 그런 놈에게 틈을 보이면 어떡해?"
방다병이 안타깝게 책망했다. 상대의 말이 애정에 기반한 것을 알면서도, 이연화는 어쩔 수 없이 험한 눈으로 방다병을 흘겨보았다. 차마 네가 검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즉각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조금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이연화는 진지한 눈으로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다 하여 해야 할 일을 방기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 심악과 세우단의 거처가 있을 거야. 오늘 일 때문에 흔적을 지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들 수도 있으니, 꼬리를 놓쳐선 안 돼."
"그건 나와 무안이 알아서 하겠다. 방다병, 이연화를 데리고 돌아가."
"알았어."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홱 몸을 돌리려던 적비성이 문득 이연화를 보았다. 상대가 왜 이상한 표정을 짓는지 의아해하다가, 이연화는 자신이 적비성의 팔을 잡았던 손으로 부지불식간에 힘을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안함이 확 올라와 뒷목을 데웠다. 조금 전의 방다병처럼 적비성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각인한 상대가 취약해진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길 원해서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떤 이유든 비합리적이다 못해 처량할 정도였다. "이연화?"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이연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말을 쥐어짰다.
"그...음. 네가 쫓은 의원 쪽에서는 뭔가 나온 게 없었어?"
"노인에게 짐을 건네주고 하산하려 하기에, 잠시 붙들어 심문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알려줄 테니, 일단 방다병과 돌아가. 꼬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건 너잖아."
가볍게 타박하듯 말하고, 적비성은 품에서 금색 피리를 꺼내 불었다. 곧 무안이 나타나 존상을 향해 예를 표했다. 적비성이 빠르게 지시했다. "진법이 무너졌으니, 근처에 있을 본부를 찾아 소탕한다. 놈들이 도망치는 중이라면, 백발에 회색 옷을 걸친 노인은 꼭 잡아야 한다. 그리고...." 적비성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그 미간으로 깊은 골이 패였다.
"이놈을 이 꼴로 만든 자는 누구냐?"
"어, 아마 삿갓을 쓴 무인일 거야. 검을 쓰는 사람 같았는데, 무공이 뛰어나 보였어."
"본인을 세우단이라는 조직의 부단주라고 했어. 문걸이란 이름인데, 검과 침을 함께 쓰니 주의해. 묘하게 살수 같은 구석이 있어."
이연화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요약해 건네자, 적비성이 무안을 돌아보았다.
"잘 기억해 뒀다가, 그놈을 잡게 되면 실수로라도 죽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조직의 부단주라면 심문할 내용이 많을 겁니다."
"심문은 어찌 돼도 좋아. 내가 죽일 거다."
적비성이 불쾌감에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두 공자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겠노라 예고하던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투였다. 이연화가 뭐라 말을 얹기 전-바로 죽이라고 알려준 인적사항이 아니야!-금원맹주는 수하와 함께 뛰어올라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어쩐지 여러모로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은 채,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처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새벽이 깊어져 있었다.
"이연화, 아직도 계속 불편해? 역시 의원을 불러올까?"
"죽을 병도 아닌데,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의원이야. 됐어, 벌써 많이 나아졌어."
방다병의 부축을 받아 침상에 누운 채, 이연화가 한 손을 대충 내저으며 대꾸했다. 식은땀으로 온통 들러붙은 옷이 불쾌했다. 약효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천천히 흐려졌지만, 그 후유증인지 약간의 현기증과 두통이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이연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심악이라는 자는, 아마 알려진 것보다 더 성가신 악인인 듯해. 세우단이라는 조직도...문걸이라는 자를 보면 그리 만만하지 않아."
"반드시 뿌리를 찾아내서 잘라버려야지. 백천원에도 미리 서신을 보내야겠어. 상대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부턴 절대로 너 혼자 우릴 따돌리지 마."
"알았어, 알았어."
이연화가 힘없이 대꾸했다. 방다병이 흥 소리를 내더니 부산스레 움직였다. 무얼 하나 신경이 쓰여 눈을 반쯤 뜨고 돌아보니, 방다병은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새 침의를 가져와 이연화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올려두던 참이었다.
"너 땀을 많이 흘렸잖아. 갈아입고 싶을 것 같아서."
방다병이 이연화를 일으키면서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주섬주섬 새 옷을 걸치며, 이연화는 등을 보인 채 돌아앉은 방다병을 어쩐지 불가사의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이 녀석은 어떻게 이다지도 섬세한 성품을 타고났단 말인가? 뭣보다, 이런 아이가 대체 어쩌다가 나 같은 이에게 붙어 이리 귀찮은 수발을 자처하는 걸까? 묻는다고 이해할 만한 답이 나올 듯하지는 않아, 이연화는 잠자코 자리에 누웠다.
"이제 좀 쉬어. 난 적비성이 오는 걸 기다렸다가 알아서 누울게."
방다병이 이연화의 몸 위로 이불까지 덮어주고는 건넸다. 이연화의 미간이 움찔했다.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눈가를 살짝 만지고 입을 열었다.
"저기, 방소보. 오늘은 좀...따로 자는 게 좋겠는데."
"뭐? 왜?"
방다병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청년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 사람처럼 벌게져서 물었다.
"혹시...혹시 내가 어젯밤에 뭔가 이상한 짓을 해서 그래?"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오늘 밤엔 내가 좀...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이연화가 얼버무리듯 말했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둘러대기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소보, 내가 아직 약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단 말이지. 남은 밤에 제대로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자칫하다간 너희 둘한테 굉장한 추태를 보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건 정말 싫거든? 사실 한편으로는 이럴 때라서 더 함께 자고픈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꼭 혼자 있고 싶은 거라고. 이연화가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복잡한 속내를 줄줄 늘어놓으면, 방다병의 성정상 분명 체면보다는 네가 괜찮은 게 중요하다며 방방 뛸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방다병은 더 캐묻거나 이연화를 밀어붙이지 않았다(사실 침상을 공유하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기 미묘한 사안이었다). 청년은 조금 의아하면서도 떨떠름해 보였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침상이 좀 좁기는 했지. 그래도...혹시 어디가 안 좋거나 하면 바로 알려줘야 해."
"네가 날 곳간에 넣었을 때를 잊었어? 난 아플 때 아프다고 해, 걱정하지 마."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 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뻔뻔하게 들린다."
퉁명스레 대꾸한 방다병은, 이내 등불을 꺼주고는 방을 나섰다.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고, 이연화는 아직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나아져 있겠지. 스스로를 위안하듯 생각하며, 이연화는 억지로 잠을 청하고자 애썼다. 침상이 요 며칠 사이보다 차가워서인지, 아직 남은 약기운 때문인지 좀처럼 안정할 수가 없었다.
뒤척이다 겨우 선잠이 들었을 때, 이연화는 오랜만에 끔찍한 악몽을 꾸고는 짧은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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