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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8 00:43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의원과 노인은 도심으로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밤인 데다 산의 운무가 짙어, 까딱하는 순간 시야에서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연화는 상대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인 채 조용히 움직였다. 어찌나 조심스러운 미행이었던지, 밤을 누비던 산짐승들조차 세 사람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나다녔다.
산길은 점점 험하고 좁아졌다. 이제는 사람이 오가는 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의원과 노인은 무공을 모르는지, 이따금씩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멈추어 섰다. 힘든 여정에 뭐라 불만의 말을 꿍얼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험한 비탈을 요리조리 넘어 종내에는 폭포 뒤의 작은 동굴까지 지나갔다.
작은 이변이 일어난 것은, 세 사람 역시 그 동굴을 통과했을 때였다.
동굴을 가장 먼저 나온 이연화가 흠칫했다. 의원과 노인이 꽤 가까운 곳에 멈춘 채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세 남자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이연화는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상대가 이쪽의 미행을 알아차린 듯하지는 않았다. 이전까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의원과 노인은 곧 짐을 추스르고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방다병이 당혹해 두 방향을 번갈아 보았다.
"어쩌지? 갈라져서 따라가야겠는데."
청년이 낭패스러운 투로 속삭였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음. 네 말대로 갈라져야겠어. 너와 아비가 의원을 쫓아. 만일 그가 심악이라면, 한 명으로는 위험할지도 몰라. 나는 노인을 따라가서 심문해 볼게. 상대가 독이나 약을 쓸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알았어. 너도 조심해."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했다. 적비성은 이연화를 힐끗 보았지만, 곧 별다른 말 없이 방다병과 의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두 인영을 확인하고, 이연화는 재빨리 발을 옮겨 노인을 따라갔다.
생각보다 체력이 좋은 노인이었는지, 그 걸음이 장년인과 함께할 때보다 더 빨랐다. 노인에게 집중하며 걷던 이연화는, 상대의 인영이 어느 순간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졌을 때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 입가로 옅은 냉소가 스쳤다. 노인은 숲에 펼쳐진 진법 속으로 사라진 참이었다. 이연화는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눈가를 만졌다. 정체 모를 진법에 무작정 몸을 던지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도 꽤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누군가가 구해주러 올 때까지 같은 지점만 뱅뱅 돌게 될 수도 있었다.
"그냥 진법 자체를 힘으로 날려버리는 방법도 있긴 한데...아직 그렇게까지 큰 소동을 만들 생각은 없단 말이지."
이연화가 눈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쪽이 시끄럽게 굴었을 때, 상대의 반응은 대충 두 가지로 예상할 수 있었다. 불청객을 찾아 없애버리려 들거나, 아니면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려 들거나. 차라리 전자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후자라면 일이 쓸데없이 지지부진해질 터였다. 눈 딱 감고 뛰어들어 봐야 하나? 이연화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익숙한 음성들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또 그러면 난리들 나겠지.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그 녀석들을 다른 데로 보낸 의미가 없잖아."
이연화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갸웃하며 말했다. 마음의 저울추가 일단 뛰어들고 본다는 쪽으로 한 차례 흔들했을 때, 이연화의 눈앞으로 네 명의 장정이 불쑥 나타났다. 조금 전 노인이 사라졌던 것처럼 부자연스럽고도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난데없는 만남에, 이연화뿐 아니라 네 명의 사람들 역시 흠칫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한 차례 들린 후에야, 이연화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건넸다.
"이야, 이거 다행입니다. 꼼짝없이 길을 잃었나 했는데, 하늘이 저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네요."
"누구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중 하나가 칼자루에 손을 대며 물었다. 이연화가 얼른 한 손을 들며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길을 잃은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대협들처럼 무림인도 아니에요. 보세요, 칼도 없지 않습니까."
"이 시간에, 이렇게 깊은 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칼자루에 손을 댄 남자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이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약초를 캐며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운봉 의원이 귀한 약초를 캐오면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 하여 산에 올랐지요. 그런데 제가 늘상 다니던 산에서 길을 잃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산짐승을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바람에, 기껏 채웠던 망태기까지 모두 잃어버렸지 뭡니까. 정처없이 헤매다 보니 여기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도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그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 듯 서로와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이연화는 최대한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응시했다. 둥그렇고 결백하게 뜨인 눈망울이 남자들의 목을 힐끗 스쳤다. 그 목에도 하나같이 작은 비수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넷 중 가장 오른편에 섰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훤칠한 키에, 삿갓으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산짐승을 피하던 사람치고는 복장이 너무 깨끗하오."
이연화가 한쪽 입매를 살짝 올렸다. 흙이라고는 한 톨도 묻지 않은 옷이었으니 그리 말할 법도 했다. 이연화가 양팔을 가볍게 벌리며 말했다.
"이 옷이 약초 캐기에 특화되어 있어서, 웬만해선 잘 젖거나 더러워지지 않거든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본인도 그런 옷감을 알고 있으나, 약초꾼이 걸치기엔 너무 귀한 옷이오. 또한 약초꾼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지."
쳇, 안 먹히네. 이연화가 뻔뻔하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마도 저 남자가 넷 중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어쩔 수 없겠다는 얼굴로 피식 웃자, 남자가 고개를 조금 들고는 물었다. 그늘에 가려진 눈동자가 검고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어디서 온 누구시오?"
"음. 저부터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 질문에 답해주시면 저도 답을 드리지요."
이연화가 흥정하듯 건넸다. 남자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연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락을 바라고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이연화가 남자들의 너머를 바라보며 건넸다.
"방금 진으로 들어간 노인장이 심악 무생벽입니까?"
삿갓 쓴 남자를 제외하고, 상대의 분위기가 일순 흉흉해졌다. 세 명이 요란하게 칼을 뽑았다. 이연화는 한쪽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싱긋 웃었다. "역시 그랬군요." 귀장에서부터, 이연화는 그 의원이 무생벽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 정말 심악이라면, 금원맹이 자신을 쫓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당히 전면에 나와 물건을 팔까? 아마도 좌판을 관리하던 의원은 그저 눈속임용 인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이연화는 조금 전 동굴을 나섰을 때 묘한 상호작용을 목격했다. 아마 선두로 나온 자신밖에 보지 못했을 테지만, 의원은 귀장에서 일꾼으로 부리던 노인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노인장이 무생벽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짐작했고, 어쩌면 진법이나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짐작했지만, 댁들을 만난 건 뜻밖이네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귀장을 운영하는 조직인 듯한데, 아무래도 낯이 설군요."
"나는 세우단의 부단주, 문걸이라 하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상대가 이렇게 선선히 답을 주리라 생각하진 않은 탓이었다. 삿갓 쓴 남자의 수하들이 조금 당혹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삿갓 쓴 남자가 턱짓하며 물었다. "당신의 질문에 답했으니, 당신도 답하시오. 어디서 온 누구요?" 이연화가 엷게 미소했다.
"난 떠돌이 의원입니다. 제 친구를 돕기 위해, 무생벽에게 볼일이 있지요."
모든 진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다. 무생벽을 찾으면, 아마도 방운일을 도울 방법이 확실해질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눈앞에 나타난 뜻밖의 세력이었다. 세우단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부단주라 자칭한 남자는 꽤 실력이 있어 보였다. 심악이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들에게 덜미를 붙들려 일하는 상황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눈앞에 나타난 네 명은 병장기를 다루는 일이 주업인 무림인이었다. 삿갓 쓴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무생벽은 제대로 된 의원이 아닌데, 누굴 도울 수 있다는 것이오?"
"검객의 검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약이나 독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정 무생벽을 만나야겠다면, 우리와 함께 가야 할 거요."
삿갓 쓴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이연화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런, 말씀하시는 투가 꼭 저를 객귀로 만들어 데려가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아니면 고문으로 몸통만 남겨놓고 데려가든가요."
"저항하지 않는다면 사지를 남겨둘 수도 있겠지. 질문에 솔직히 대답한다면 계속 사지를 보존할 수도 있을 테고."
"음, 별로 믿기지 않네요. 조직 이름을 순순히 알려준 걸 보니, 아무래도 절 곱게 돌려보낼 마음이 없어 보이거든요."
이연화가 대답하자마자, 삿갓 쓴 남자가 등 뒤에서 칼을 뽑았다. 그 칼날로 서슬퍼런 예기가 감돌았다. 다른 세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심상찮은 투기가 흘러나왔다. 이연화가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상대를 관찰했다. 검을 든 자세와 분위기만 보아도, 상대의 무공이 꽤 고강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연화가 이마를 찌푸린 채 팔짱을 끼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 도망친다. 자신의 경공을 따라올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니 덜미를 잡힐 가능성은 희박했다. 둘, 싸워 이긴다. 상대가 적비성의 쌍둥이들로 이루어진 4인방이 아닌 이상,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셋, 일부러 진다. 마지막 선택지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불청객의 정체가 궁금할 테니, 상대가 당장 자신을 죽일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일부러 허약한 모습을 보여 방심하게 만든 다음, '사지를 보존하기 어려울 때'까지만 버텨 볼까? 그럼 저 진법을 통과할 수 있지 않으려나? 그 선택지를 진지하게 고려하다, 이연화는 재차 누군가의 호통이 들린 듯한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자칫했다간 여생 동안 혼자 다닐 권리를 박탈당할 것만 같았다.
"왠지 이러고 있을 것 같더라!"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호통을 친 방다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눈빛이 엄하고 뚱하기 그지없었다. 아, 세 번째 선택지는 절대 안 되겠네. 내심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이연화는 정말 놀란 사람처럼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무래도 네가 수상해서, 중간에 갈라졌어."
방다병이 별로 성나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수상해? 합리적인 역할 분담이었잖아."
"가끔 보면 넌 식사보다 거짓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니까. 정말 그 의원이 심악처럼 보였으면, 넌 절대 발을 빼지 않았을 거야. 넌 아직도 위험한 데로 날 안 보내려고 들잖아. 그런데 나와 아비를 보내고 혼자 가겠다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왜 아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바로 묻는다고 네가 순순히 대답해 줬겠어? 또 둘러대기나 했겠지. 시간 낭비하는 대신, 일단 네 말을 따르는 척하고 잠시 뒤에 쫓아가 보자 싶었어. 도착했더니 바로 이 꼴이네."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대꾸하며 턱을 살짝 들었다. 어디 내 앞에서 그런 오래된 헛수작을 부리려 드느냐 으스대는 듯한 태도였다. 상황의 긴박함도 잠시 잊고, 이연화는 그만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엿한 강호인이 다 됐네." "난 처음부터 어엿한 강호인이었거든!" 입을 삐죽하며 말한 방다병이, 네 남자를 향해 똑바로 섰다. 청년은 퍽 불손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어보다 물었다.
"그래서, 무슨 상황이야? 이 사람들은 누군데?"
"심악 무생벽과 함께 일하시는 분들인 것 같아. 정확한 관계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흥. 싸운 다음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지."
앞으로 냉큼 나선 방다병이 호기롭게 말하며 칼을 뽑았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이아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칼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이 녀석, 언젠가부터 가끔씩 적비성과 비슷한 투로 말할 때가 있단 말이야. 이연화가 눈썹을 든 채 생각했다. 방다병의 태세에서 고수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네 남자는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 시선을 교환하며 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팽팽해진 기류를 깬 것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삿갓 쓴 남자의 지시였다.
"물러나라!"
갑작스러운 후퇴 지시에, 네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훌쩍 뛰어 물러났다. "어딜!" 방다병이 기민하게 그 뒤를 따라 도약했다. 이연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사람을 마주친 후, 처음으로 언성이 높아졌다. "기다려! 숲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고-." 그 외침이나 손이 방다병에 닿기 전, 청년은 네 사람과 함께 진법 안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찼다. 이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이연화는 어두컴컴한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눈앞이 깜박 흐려졌다.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예전부터 진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을 들여 파훼하지 못할 진은 없었으나, 그 전까지 불쾌한 감각을 견뎌야 한다는 점이 달갑지 않았다. 심지어 이 진법은 아직 그 정체를 완벽히 알 수 없었다.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마의 생사장과 언뜻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강렬한 독기 대신 즉각적인 나른함이 밀려왔다. 살인보다는 마비를 목적으로 한 듯했다. 이연화는 몸의 혈을 두어 군데 짚어 그 기운을 물리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사장의 틀에 기문둔갑술이나 환술을 섞은 듯했다. 그저 평범한 밤의 숲속 같았으나,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이봐! 내 말 들려?"
이연화가 허공에 대고 외쳐보았다. 어쨌든 지금은 방다병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적이 이 진법에 능란하다면, 함정에 빠진 방다병을 몰아세우는 일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바보 방소보, 왜 주위를 살피기도 전에 쫓아 들어간 거야? 많이 컸다 싶더니 다시 소협처럼 굴고 말이야. 이연화가 내심 투덜거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함께 오는 편이 나았겠단 생각이 뒤늦게 피어올랐다. 혀를 한 번 차고, 이연화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언가가 자신의 감각을 흐려놓고 있었으나, 이연화는 겹겹이 쌓인 거미줄을 헤치듯이 그 너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한 방향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연화의 귀가 움찔했다. 전투의 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인 안도감이 치밀었다. 상대와 싸우고 있다면, 적어도 방다병이 진법에 무력하게 당해 쓰러지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혹시 위험해지기 전에 도우러 가야겠다. 이연화가 눈을 뜨고는 바닥의 나뭇가지를 하나 집었다. 이제는 슬슬 제대로 된 검을 가지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모두 펴기 전에, 이연화는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한쪽 입매를 슬몃 올렸다. 담담히 고개를 들어 위편을 향하자, 문걸이 나무 위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객의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 왜 맨몸인지 의아했는데, 나뭇가지가 마치 검의 자태로군." 남자의 말에, 피식 웃은 이연화가 태연하게 건넸다.
"성가신 진법을 펼쳐 놓으셨습니다. 내 동행은 어디 있습니까?"
"내 수하들이 상대하는 중이오."
짧게 말한 문걸이 땅으로 내려섰다. 이연화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물었다. "생사장을 응용한 진법이군요.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아닌 듯한데, 이런 진을 펼친 이유가 뭡니까?" 문걸이 팔짱을 끼었다. 대답 대신, 남자는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약마의 생사장에 대해 잘 아는 듯한데. 혹시 금원맹에서 온 사람인가?"
타당한 가설이었으나, 이연화는 순간 맥없이 터질 뻔한 웃음을 참았다. 하긴, 약마라고 부르지 않는 게 어디야? 과거 자신을 약마로 의심해 몰아세웠던 방다병을 떠올리며, 이연화는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무생벽이 금원맹의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와 손을 잡은 듯한데, 후환이 두렵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든 수습할 방도가 있는 법이지. 금원맹에서 온 사람이라면 솔직히 말하시오, 단주와 연결해줄 수도 있으니."
문걸이 말했다. 내용만 두고 보면 시원스러울 만큼 담백한 제안이었다. 이연화가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시선을 살짝 숙인 채 틈을 보이자, 문걸의 검이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코앞으로 쇄도했다. 이연화가 지체 없이 나뭇가지를 들어 그 검을 쳐냈다. 철과 철이 부딪친 듯한 소리가 울렸다. 뒤로 훌쩍 물러서서, 두 검객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연화의 얼굴로 능청스러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당신들에게 정말 협상할 마음이 있었다면, 무생벽과 협력을 시작하자마자 소식을 보냈겠지요. 단주와 연결해 주겠다는 말을 건네면서 살기를 감추지도 않았을 테고. 세우단이 얼마나 대단한 조직인지는 몰라도, 금원맹과 척을 지고 살아남을 자신이 있나 봅니다."
"지금 금원맹에서 경계할 만한 사람은 맹주뿐이오. 설령 태산을 가르는 벼락이 내리친다 한들, 가느다란 빗줄기를 어찌 모두 베겠소?"
문걸이 칼을 눈앞으로 들며 말했다. 삿갓 아래의 얼굴로 선뜩한 빛이 스쳤다. 전통적인 검객과 효율적인 살수 사이의 기세를 풍기는 남자였다. 이연화는 딱히 공격 자세를 취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편안히 든 채 그와 대치했다. 문걸의 입가로 비틀린 미소가 스쳤다.
"검을 지니지 않았을 때부터, 당신이 그 청년보다 더 고수처럼 보였지. 내 감이 틀리지 않았나 보오."
"음, 부탁인데 그런 표정을 짓지는 마시지요. 대결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제 친구 하나로 족합니다. 더는 감당하기-."
이연화가 짐짓 진저리를 치듯 대꾸하는 도중, 희뜩한 빛이 다시 지척까지 다가왔다. 이연화는 남자의 신속한 검격을 몇 차례 받아내고는, 높이 뛰어 나뭇가지 위에 올랐다. 상이태검의 초식을 사용하여 단서를 흘릴 마음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문걸이 빛살 같은 경공으로 그 뒤를 따랐다. 예상보다 더 실력이 좋은 자로군.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걸이라는 이름을 따로 들은 기억은 없었지만, 강호는 넓으며 숨은 고수들도 많은 법이었다. 이연화가 방다병의 기척이 들리는 방향을 힐끗 보았다. 오래 상대할수록 정체를 숨기기 어려워질 테니, 되도록 빨리 그를 뿌리치고 방다병과 합류해야 했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도, 문걸의 검은 위협적인 살기를 두른 채 찔러 들어왔다.
적절한 내력을 실어, 이연화는 상대의 검을 크게 쳐냈다. 강하고 깨끗한 일격과 함께, 긴 머리칼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문걸의 몸이 처음으로 튕기듯 물러났다. 그러나 이연화가 자리를 뜨기 전, 문걸이 검고 긴 겉옷을 펼치더니 엄청난 속도로 휘돌았다. 그 옷자락에서 무수한 세침이 쏟아져 마치 빗줄기처럼 날아왔다. 꽤 넓은 면적을 뒤덮은 공격에, 이연화는 내심 혀를 차며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대부분의 세침이 강맹한 검풍에 휘말려 날아갔다. 바늘의 비가 걷히기 무섭게, 몇 개의 중침이 거푸 이연화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숨가쁜 연격이었으나, 이연화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날카롭게 집중하고 있었다. 검풍을 또 일으키는 대신, 이연화는 간결한 보법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침을 피해냈다. 하나, 둘, 셋, 넷. 중침들이 맥없이 바닥에 꽂혔다. 냉담한 눈을 한 채, 이연화는 바닥에 쌓인 나뭇잎들을 스치듯이 디디며 환영처럼 움직였다. 다섯, 여섯. 피하기 까다로웠지만 그뿐이었다. 방심하지 않는다면 절대 자신에게 닿을 수 없었다. 아무리 파괴적인 위력을 지닌 공격이라 해도, 닿지 못하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문걸의 눈동자로 놀라움과 초조함이 배었다.
마지막 하나의 침을 어렵잖게 피하려던 때, 이연화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방다병의 신음이었다. 비명은 아니었지만, 청년의 음성에는 분명 통증이 실려 있었다. 그와 함께, 이아검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지불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방다병이 검을 놓쳤어? 강호에서 오래 살아온 만큼, 이연화는 아무리 능란한 고수라 해도 단 일순으로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음이 순간 흔들리면서, 치밀하게 유지되던 집중에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그래봐야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이연화는 방다병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정말 미세한 동작이었으나, 그것은 분명 실수였다.
침은 이연화의 급소에 꽂히지 못했다. 이연화가 이미 그 궤도에서 거의 벗어나 있던 탓이었다. 중침은 이연화의 왼편 목을 아주 살짝 긁으며 지나가, 뒤쪽의 나무에 박혔다. 이연화가 눈썹을 찌푸렸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의원과 노인은 도심으로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밤인 데다 산의 운무가 짙어, 까딱하는 순간 시야에서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연화는 상대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인 채 조용히 움직였다. 어찌나 조심스러운 미행이었던지, 밤을 누비던 산짐승들조차 세 사람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나다녔다.
산길은 점점 험하고 좁아졌다. 이제는 사람이 오가는 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의원과 노인은 무공을 모르는지, 이따금씩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멈추어 섰다. 힘든 여정에 뭐라 불만의 말을 꿍얼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험한 비탈을 요리조리 넘어 종내에는 폭포 뒤의 작은 동굴까지 지나갔다.
작은 이변이 일어난 것은, 세 사람 역시 그 동굴을 통과했을 때였다.
동굴을 가장 먼저 나온 이연화가 흠칫했다. 의원과 노인이 꽤 가까운 곳에 멈춘 채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세 남자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이연화는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상대가 이쪽의 미행을 알아차린 듯하지는 않았다. 이전까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의원과 노인은 곧 짐을 추스르고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방다병이 당혹해 두 방향을 번갈아 보았다.
"어쩌지? 갈라져서 따라가야겠는데."
청년이 낭패스러운 투로 속삭였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음. 네 말대로 갈라져야겠어. 너와 아비가 의원을 쫓아. 만일 그가 심악이라면, 한 명으로는 위험할지도 몰라. 나는 노인을 따라가서 심문해 볼게. 상대가 독이나 약을 쓸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알았어. 너도 조심해."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했다. 적비성은 이연화를 힐끗 보았지만, 곧 별다른 말 없이 방다병과 의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두 인영을 확인하고, 이연화는 재빨리 발을 옮겨 노인을 따라갔다.
생각보다 체력이 좋은 노인이었는지, 그 걸음이 장년인과 함께할 때보다 더 빨랐다. 노인에게 집중하며 걷던 이연화는, 상대의 인영이 어느 순간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졌을 때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 입가로 옅은 냉소가 스쳤다. 노인은 숲에 펼쳐진 진법 속으로 사라진 참이었다. 이연화는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눈가를 만졌다. 정체 모를 진법에 무작정 몸을 던지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도 꽤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누군가가 구해주러 올 때까지 같은 지점만 뱅뱅 돌게 될 수도 있었다.
"그냥 진법 자체를 힘으로 날려버리는 방법도 있긴 한데...아직 그렇게까지 큰 소동을 만들 생각은 없단 말이지."
이연화가 눈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쪽이 시끄럽게 굴었을 때, 상대의 반응은 대충 두 가지로 예상할 수 있었다. 불청객을 찾아 없애버리려 들거나, 아니면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려 들거나. 차라리 전자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후자라면 일이 쓸데없이 지지부진해질 터였다. 눈 딱 감고 뛰어들어 봐야 하나? 이연화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익숙한 음성들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또 그러면 난리들 나겠지.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그 녀석들을 다른 데로 보낸 의미가 없잖아."
이연화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갸웃하며 말했다. 마음의 저울추가 일단 뛰어들고 본다는 쪽으로 한 차례 흔들했을 때, 이연화의 눈앞으로 네 명의 장정이 불쑥 나타났다. 조금 전 노인이 사라졌던 것처럼 부자연스럽고도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난데없는 만남에, 이연화뿐 아니라 네 명의 사람들 역시 흠칫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한 차례 들린 후에야, 이연화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건넸다.
"이야, 이거 다행입니다. 꼼짝없이 길을 잃었나 했는데, 하늘이 저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네요."
"누구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중 하나가 칼자루에 손을 대며 물었다. 이연화가 얼른 한 손을 들며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길을 잃은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대협들처럼 무림인도 아니에요. 보세요, 칼도 없지 않습니까."
"이 시간에, 이렇게 깊은 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칼자루에 손을 댄 남자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이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약초를 캐며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운봉 의원이 귀한 약초를 캐오면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 하여 산에 올랐지요. 그런데 제가 늘상 다니던 산에서 길을 잃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산짐승을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바람에, 기껏 채웠던 망태기까지 모두 잃어버렸지 뭡니까. 정처없이 헤매다 보니 여기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도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그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 듯 서로와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이연화는 최대한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응시했다. 둥그렇고 결백하게 뜨인 눈망울이 남자들의 목을 힐끗 스쳤다. 그 목에도 하나같이 작은 비수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넷 중 가장 오른편에 섰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훤칠한 키에, 삿갓으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산짐승을 피하던 사람치고는 복장이 너무 깨끗하오."
이연화가 한쪽 입매를 살짝 올렸다. 흙이라고는 한 톨도 묻지 않은 옷이었으니 그리 말할 법도 했다. 이연화가 양팔을 가볍게 벌리며 말했다.
"이 옷이 약초 캐기에 특화되어 있어서, 웬만해선 잘 젖거나 더러워지지 않거든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본인도 그런 옷감을 알고 있으나, 약초꾼이 걸치기엔 너무 귀한 옷이오. 또한 약초꾼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지."
쳇, 안 먹히네. 이연화가 뻔뻔하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마도 저 남자가 넷 중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어쩔 수 없겠다는 얼굴로 피식 웃자, 남자가 고개를 조금 들고는 물었다. 그늘에 가려진 눈동자가 검고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어디서 온 누구시오?"
"음. 저부터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 질문에 답해주시면 저도 답을 드리지요."
이연화가 흥정하듯 건넸다. 남자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연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락을 바라고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이연화가 남자들의 너머를 바라보며 건넸다.
"방금 진으로 들어간 노인장이 심악 무생벽입니까?"
삿갓 쓴 남자를 제외하고, 상대의 분위기가 일순 흉흉해졌다. 세 명이 요란하게 칼을 뽑았다. 이연화는 한쪽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싱긋 웃었다. "역시 그랬군요." 귀장에서부터, 이연화는 그 의원이 무생벽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 정말 심악이라면, 금원맹이 자신을 쫓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당히 전면에 나와 물건을 팔까? 아마도 좌판을 관리하던 의원은 그저 눈속임용 인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이연화는 조금 전 동굴을 나섰을 때 묘한 상호작용을 목격했다. 아마 선두로 나온 자신밖에 보지 못했을 테지만, 의원은 귀장에서 일꾼으로 부리던 노인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노인장이 무생벽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짐작했고, 어쩌면 진법이나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짐작했지만, 댁들을 만난 건 뜻밖이네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귀장을 운영하는 조직인 듯한데, 아무래도 낯이 설군요."
"나는 세우단의 부단주, 문걸이라 하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상대가 이렇게 선선히 답을 주리라 생각하진 않은 탓이었다. 삿갓 쓴 남자의 수하들이 조금 당혹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삿갓 쓴 남자가 턱짓하며 물었다. "당신의 질문에 답했으니, 당신도 답하시오. 어디서 온 누구요?" 이연화가 엷게 미소했다.
"난 떠돌이 의원입니다. 제 친구를 돕기 위해, 무생벽에게 볼일이 있지요."
모든 진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다. 무생벽을 찾으면, 아마도 방운일을 도울 방법이 확실해질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눈앞에 나타난 뜻밖의 세력이었다. 세우단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부단주라 자칭한 남자는 꽤 실력이 있어 보였다. 심악이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들에게 덜미를 붙들려 일하는 상황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눈앞에 나타난 네 명은 병장기를 다루는 일이 주업인 무림인이었다. 삿갓 쓴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무생벽은 제대로 된 의원이 아닌데, 누굴 도울 수 있다는 것이오?"
"검객의 검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약이나 독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정 무생벽을 만나야겠다면, 우리와 함께 가야 할 거요."
삿갓 쓴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이연화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런, 말씀하시는 투가 꼭 저를 객귀로 만들어 데려가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아니면 고문으로 몸통만 남겨놓고 데려가든가요."
"저항하지 않는다면 사지를 남겨둘 수도 있겠지. 질문에 솔직히 대답한다면 계속 사지를 보존할 수도 있을 테고."
"음, 별로 믿기지 않네요. 조직 이름을 순순히 알려준 걸 보니, 아무래도 절 곱게 돌려보낼 마음이 없어 보이거든요."
이연화가 대답하자마자, 삿갓 쓴 남자가 등 뒤에서 칼을 뽑았다. 그 칼날로 서슬퍼런 예기가 감돌았다. 다른 세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심상찮은 투기가 흘러나왔다. 이연화가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상대를 관찰했다. 검을 든 자세와 분위기만 보아도, 상대의 무공이 꽤 고강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연화가 이마를 찌푸린 채 팔짱을 끼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 도망친다. 자신의 경공을 따라올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니 덜미를 잡힐 가능성은 희박했다. 둘, 싸워 이긴다. 상대가 적비성의 쌍둥이들로 이루어진 4인방이 아닌 이상,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셋, 일부러 진다. 마지막 선택지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불청객의 정체가 궁금할 테니, 상대가 당장 자신을 죽일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일부러 허약한 모습을 보여 방심하게 만든 다음, '사지를 보존하기 어려울 때'까지만 버텨 볼까? 그럼 저 진법을 통과할 수 있지 않으려나? 그 선택지를 진지하게 고려하다, 이연화는 재차 누군가의 호통이 들린 듯한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자칫했다간 여생 동안 혼자 다닐 권리를 박탈당할 것만 같았다.
"왠지 이러고 있을 것 같더라!"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호통을 친 방다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눈빛이 엄하고 뚱하기 그지없었다. 아, 세 번째 선택지는 절대 안 되겠네. 내심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이연화는 정말 놀란 사람처럼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무래도 네가 수상해서, 중간에 갈라졌어."
방다병이 별로 성나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수상해? 합리적인 역할 분담이었잖아."
"가끔 보면 넌 식사보다 거짓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니까. 정말 그 의원이 심악처럼 보였으면, 넌 절대 발을 빼지 않았을 거야. 넌 아직도 위험한 데로 날 안 보내려고 들잖아. 그런데 나와 아비를 보내고 혼자 가겠다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왜 아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바로 묻는다고 네가 순순히 대답해 줬겠어? 또 둘러대기나 했겠지. 시간 낭비하는 대신, 일단 네 말을 따르는 척하고 잠시 뒤에 쫓아가 보자 싶었어. 도착했더니 바로 이 꼴이네."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대꾸하며 턱을 살짝 들었다. 어디 내 앞에서 그런 오래된 헛수작을 부리려 드느냐 으스대는 듯한 태도였다. 상황의 긴박함도 잠시 잊고, 이연화는 그만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엿한 강호인이 다 됐네." "난 처음부터 어엿한 강호인이었거든!" 입을 삐죽하며 말한 방다병이, 네 남자를 향해 똑바로 섰다. 청년은 퍽 불손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어보다 물었다.
"그래서, 무슨 상황이야? 이 사람들은 누군데?"
"심악 무생벽과 함께 일하시는 분들인 것 같아. 정확한 관계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흥. 싸운 다음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지."
앞으로 냉큼 나선 방다병이 호기롭게 말하며 칼을 뽑았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이아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칼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이 녀석, 언젠가부터 가끔씩 적비성과 비슷한 투로 말할 때가 있단 말이야. 이연화가 눈썹을 든 채 생각했다. 방다병의 태세에서 고수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네 남자는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 시선을 교환하며 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팽팽해진 기류를 깬 것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삿갓 쓴 남자의 지시였다.
"물러나라!"
갑작스러운 후퇴 지시에, 네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훌쩍 뛰어 물러났다. "어딜!" 방다병이 기민하게 그 뒤를 따라 도약했다. 이연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사람을 마주친 후, 처음으로 언성이 높아졌다. "기다려! 숲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고-." 그 외침이나 손이 방다병에 닿기 전, 청년은 네 사람과 함께 진법 안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찼다. 이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이연화는 어두컴컴한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눈앞이 깜박 흐려졌다.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예전부터 진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을 들여 파훼하지 못할 진은 없었으나, 그 전까지 불쾌한 감각을 견뎌야 한다는 점이 달갑지 않았다. 심지어 이 진법은 아직 그 정체를 완벽히 알 수 없었다.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마의 생사장과 언뜻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강렬한 독기 대신 즉각적인 나른함이 밀려왔다. 살인보다는 마비를 목적으로 한 듯했다. 이연화는 몸의 혈을 두어 군데 짚어 그 기운을 물리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사장의 틀에 기문둔갑술이나 환술을 섞은 듯했다. 그저 평범한 밤의 숲속 같았으나,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이봐! 내 말 들려?"
이연화가 허공에 대고 외쳐보았다. 어쨌든 지금은 방다병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적이 이 진법에 능란하다면, 함정에 빠진 방다병을 몰아세우는 일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바보 방소보, 왜 주위를 살피기도 전에 쫓아 들어간 거야? 많이 컸다 싶더니 다시 소협처럼 굴고 말이야. 이연화가 내심 투덜거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함께 오는 편이 나았겠단 생각이 뒤늦게 피어올랐다. 혀를 한 번 차고, 이연화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언가가 자신의 감각을 흐려놓고 있었으나, 이연화는 겹겹이 쌓인 거미줄을 헤치듯이 그 너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한 방향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연화의 귀가 움찔했다. 전투의 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인 안도감이 치밀었다. 상대와 싸우고 있다면, 적어도 방다병이 진법에 무력하게 당해 쓰러지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혹시 위험해지기 전에 도우러 가야겠다. 이연화가 눈을 뜨고는 바닥의 나뭇가지를 하나 집었다. 이제는 슬슬 제대로 된 검을 가지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모두 펴기 전에, 이연화는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한쪽 입매를 슬몃 올렸다. 담담히 고개를 들어 위편을 향하자, 문걸이 나무 위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객의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 왜 맨몸인지 의아했는데, 나뭇가지가 마치 검의 자태로군." 남자의 말에, 피식 웃은 이연화가 태연하게 건넸다.
"성가신 진법을 펼쳐 놓으셨습니다. 내 동행은 어디 있습니까?"
"내 수하들이 상대하는 중이오."
짧게 말한 문걸이 땅으로 내려섰다. 이연화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물었다. "생사장을 응용한 진법이군요.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아닌 듯한데, 이런 진을 펼친 이유가 뭡니까?" 문걸이 팔짱을 끼었다. 대답 대신, 남자는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약마의 생사장에 대해 잘 아는 듯한데. 혹시 금원맹에서 온 사람인가?"
타당한 가설이었으나, 이연화는 순간 맥없이 터질 뻔한 웃음을 참았다. 하긴, 약마라고 부르지 않는 게 어디야? 과거 자신을 약마로 의심해 몰아세웠던 방다병을 떠올리며, 이연화는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무생벽이 금원맹의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와 손을 잡은 듯한데, 후환이 두렵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든 수습할 방도가 있는 법이지. 금원맹에서 온 사람이라면 솔직히 말하시오, 단주와 연결해줄 수도 있으니."
문걸이 말했다. 내용만 두고 보면 시원스러울 만큼 담백한 제안이었다. 이연화가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시선을 살짝 숙인 채 틈을 보이자, 문걸의 검이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코앞으로 쇄도했다. 이연화가 지체 없이 나뭇가지를 들어 그 검을 쳐냈다. 철과 철이 부딪친 듯한 소리가 울렸다. 뒤로 훌쩍 물러서서, 두 검객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연화의 얼굴로 능청스러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당신들에게 정말 협상할 마음이 있었다면, 무생벽과 협력을 시작하자마자 소식을 보냈겠지요. 단주와 연결해 주겠다는 말을 건네면서 살기를 감추지도 않았을 테고. 세우단이 얼마나 대단한 조직인지는 몰라도, 금원맹과 척을 지고 살아남을 자신이 있나 봅니다."
"지금 금원맹에서 경계할 만한 사람은 맹주뿐이오. 설령 태산을 가르는 벼락이 내리친다 한들, 가느다란 빗줄기를 어찌 모두 베겠소?"
문걸이 칼을 눈앞으로 들며 말했다. 삿갓 아래의 얼굴로 선뜩한 빛이 스쳤다. 전통적인 검객과 효율적인 살수 사이의 기세를 풍기는 남자였다. 이연화는 딱히 공격 자세를 취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편안히 든 채 그와 대치했다. 문걸의 입가로 비틀린 미소가 스쳤다.
"검을 지니지 않았을 때부터, 당신이 그 청년보다 더 고수처럼 보였지. 내 감이 틀리지 않았나 보오."
"음, 부탁인데 그런 표정을 짓지는 마시지요. 대결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제 친구 하나로 족합니다. 더는 감당하기-."
이연화가 짐짓 진저리를 치듯 대꾸하는 도중, 희뜩한 빛이 다시 지척까지 다가왔다. 이연화는 남자의 신속한 검격을 몇 차례 받아내고는, 높이 뛰어 나뭇가지 위에 올랐다. 상이태검의 초식을 사용하여 단서를 흘릴 마음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문걸이 빛살 같은 경공으로 그 뒤를 따랐다. 예상보다 더 실력이 좋은 자로군.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걸이라는 이름을 따로 들은 기억은 없었지만, 강호는 넓으며 숨은 고수들도 많은 법이었다. 이연화가 방다병의 기척이 들리는 방향을 힐끗 보았다. 오래 상대할수록 정체를 숨기기 어려워질 테니, 되도록 빨리 그를 뿌리치고 방다병과 합류해야 했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도, 문걸의 검은 위협적인 살기를 두른 채 찔러 들어왔다.
적절한 내력을 실어, 이연화는 상대의 검을 크게 쳐냈다. 강하고 깨끗한 일격과 함께, 긴 머리칼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문걸의 몸이 처음으로 튕기듯 물러났다. 그러나 이연화가 자리를 뜨기 전, 문걸이 검고 긴 겉옷을 펼치더니 엄청난 속도로 휘돌았다. 그 옷자락에서 무수한 세침이 쏟아져 마치 빗줄기처럼 날아왔다. 꽤 넓은 면적을 뒤덮은 공격에, 이연화는 내심 혀를 차며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대부분의 세침이 강맹한 검풍에 휘말려 날아갔다. 바늘의 비가 걷히기 무섭게, 몇 개의 중침이 거푸 이연화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숨가쁜 연격이었으나, 이연화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날카롭게 집중하고 있었다. 검풍을 또 일으키는 대신, 이연화는 간결한 보법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침을 피해냈다. 하나, 둘, 셋, 넷. 중침들이 맥없이 바닥에 꽂혔다. 냉담한 눈을 한 채, 이연화는 바닥에 쌓인 나뭇잎들을 스치듯이 디디며 환영처럼 움직였다. 다섯, 여섯. 피하기 까다로웠지만 그뿐이었다. 방심하지 않는다면 절대 자신에게 닿을 수 없었다. 아무리 파괴적인 위력을 지닌 공격이라 해도, 닿지 못하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문걸의 눈동자로 놀라움과 초조함이 배었다.
마지막 하나의 침을 어렵잖게 피하려던 때, 이연화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방다병의 신음이었다. 비명은 아니었지만, 청년의 음성에는 분명 통증이 실려 있었다. 그와 함께, 이아검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지불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방다병이 검을 놓쳤어? 강호에서 오래 살아온 만큼, 이연화는 아무리 능란한 고수라 해도 단 일순으로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음이 순간 흔들리면서, 치밀하게 유지되던 집중에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그래봐야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이연화는 방다병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정말 미세한 동작이었으나, 그것은 분명 실수였다.
침은 이연화의 급소에 꽂히지 못했다. 이연화가 이미 그 궤도에서 거의 벗어나 있던 탓이었다. 중침은 이연화의 왼편 목을 아주 살짝 긁으며 지나가, 뒤쪽의 나무에 박혔다. 이연화가 눈썹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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