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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2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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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안 되는 기억이지만 아주 가끔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과거와 현재, 두 번의 생에 걸쳐 열손가락을 채우지 않는 횟수였지만 애정에 목마른 아이에게는 꿀물보다도 단 행복한 시간이었다. 별다른 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운몽 강씨 종주로서의 마음가짐이라던가, 무선을 잘 챙기라던가 등의 이야기를 듣고 차를 마시는 것이 다였다. 다만 한 가지, 몇 십년 동안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있었다.

“세인들은 과거 한 번 일어난 일로 앞으로도 또 그럴거라며 쉬이 단정짓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대하거나 문제에 직면할 때 과거의 경험으로 쉬이 단정짓지 말거라. 신중히,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그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도 있으니,”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또 다시 일어나리라.

아버님이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를 그 동안 마음 쓰지 않았으나 시간을 건너고 다시금 연화오가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자니, 문득 떠오른 그 말씀에 신경이 쓰였다.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난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방식과 결과만이라도 바꿀 수 없는가? 아무도 없는 연화오에 홀로 남아 고민해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 눈을 다시 뜨니 저 멀리, 무장한 이들이 열을 맞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붉은 옷과 철로 무장한 기산 온씨의 세가였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리라. 스쳐지나가는 일일지,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 그렇다면 나는 그 운명을 어찌 바꿀 수 있을지도.


기산과의 우호를 다지고 뒤로는 정보를 모았으나 기산이 전 수선계에 가진 야욕을 저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온 자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전처럼 노련한 종주가 아닌 세가의 공자인 이상, 저 혼자 움직이는 데에는 어려움이 컸다. 이맘때에 저는 상황에 휘둘리는 쪽에 더 가까웠으니 과거에 의지할 만한 구석도 없었다. 가능성이 있는 쪽은 기산이 손을 뻗치길 기다렸다 때를 보아 덮치는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자금을 만들고 또 앞으로의 있을 일을 정리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온약한이 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기산이 세가의 이들을 불러모아 제 입맛껏 부릴 때 온조와 온 남매들이 제게 경고를 하였다.

“아버지께서 강 공자를 눈여겨 보고 있소.”
“이전에 한 번, 불야천에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말고는 그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온 종주님께서 저를 눈여겨 보실만한 일이 없으실텐데요.”
“어찌 없겠소. 나의 아버지, 이 기산의 종주께서는 수선계의 모든 일에 모르는 일이 없으시지. 그대의 뛰어남을 알고 계시오. 어쩌면 내가 이리 그대에게 말하는 것 조차 아실지 모르지.”
“기산이 이리도 강한 것은 지금의 종주님이 크게 힘쓴 것을 압니다. 그분의 눈에 차기에는 저는 아직 미숙합니다.”
“흥 알고는 있나보군. 계속 그렇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온조 역시 그대를 지켜볼 터이니.”

온조가 저의 어깨를 치며 제 무리를 이끌며 지나갔다. 스치는 순간 그의 손에서 접힌 서신을 건네 받았다. 친해진 뒤 저에게 가끔 뻐기거나 잘난 체는 해도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던 이다. 평소와 달리 낯을 차갑게 하는 그가 낯설더라니 다 연기였나. 의외로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사이가 뒤틀린 지 알고 제 가슴이 한 순간 아릴 정도면.

서신은 총 2장이었다. 그의 것 하나와 온 소저와 온경림의 것 하나. 그 하나도 기실 아우 쪽의 걱정어림이 대부분이고 온약한을 조심해야하니 어찌하여라하는, 몇 줄로 정리한 게 온 소저의 서신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나를 생각해주고 걱정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니.

이와 달리 온조의 경고는 구체적이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제 아버지 온약한은 소름끼칠 정도로 무섭고 잔악무도한 자다, 본인이 겪었던 일화를 쓰며 아버지가 어떤 이인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리 자세할 것은 없는데, 이전과 달리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가 어이가 없기도, 웃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비의 애정이 너무나 고팠소. 능력이 뛰어난 제 형제나 다른 이들에게 질투가 났고 오갈 데 없는 열등감을 아랫사람이나 약한 이에게 풀었지. 그 성질 역시 아마 내 아버지는 알고 이용했을 것이오. 그러나 강공자 그대를 만나고 진정으로 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소. 내 성질이 방자하고 더러워 다가오기 어려웠을텐데도 그댄 언제나 잔잔하게 날 기다려주고 받아줬지. 그 사실만은 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오’…
‘나는 여전히 부친의 사랑을 받고 싶은 유치한 이오. 그러나 그보다도 내게는 당신의 안위가 훨씬 중하오. 당신이 제대로 웃는 모습이 보고 싶소. 내게 짜증을 내도 좋고 서럽다며 눈물흘려도 좋으니 그 깊은 마음 속에 담은 것 좀 말 좀 해주시오. 혹시 아오? 이 온공자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일지. 그러니 강만음, 아징 나를 이용해도 좋으니 이야기하시오. 기산을 팔아먹으라 해도 내 들어드리리라.’

-그대의 허펑이-

정인에게 쓰는 구구절절한 서신도 아니고 친우에게 제 가문을 팔아먹어도 좋으니 뭐든 해달라 하는 게 어디있나. 어여쁜 여인에게나 그리 좋은 말을 해주지. 나는 그대를 이용할 뿐인데. 그저 내 가문을 지키고자 억지로 인연을 만들고 유일한 친우인 척 그리했을 뿐인데. 웃다가 울다가 제 하나뿐인 친우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되 단단한 동앗줄에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그런 날이였다.


상황은 점차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전과 달리 왕영교는 온조의 애첩이 아닌 일을 하는 시녀로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위무선이 도륙현무를 쓰러트리고 온약한은 음철을 얻지 못했다. 연화오가 참변을 겪기까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움직일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아버지와 누이가 난릉으로 잠시 떠나고 무선에게 몸도 풀겸 어린 사제들이나 데리고 근처로 야렵 겸 수련이나 갔다오라 일렀다. 내 사형은 아직도 자기는 몸이 아프다며 징징거렸으나 어머니가 심부름 시킬 것이 있다 말하니 미적거리던 침상에서 뛰어올라 바로 나가 사제들을 닦달하였다. 채비를 마친 무선에게 해야할 일과 사야할 것들을 적은 것을 들려주고 어머니께서 기분이 안 좋으실 때니 한 일주일 이상은 나갔다 들어와야한다 일렀다. 무선은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제들을 이끌고 저멀리 신나는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이리하여 연화오에 남은 것은 이제 삼분지일이었다. 대부분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이들과 연화오의 살림을 돕는 이들이었다. 곧 비가 내릴테니 그들도 연화오를 떠나야할 것이다.

“어머니 오늘 밤에 내릴 비가 심상치 않을 것 같습니다. 유래없는 큰 비라니 민가를 도와 그들을 대피하게끔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 곳도 연화호를 끼고 있으니 필시 범람할 것입니다. 방비를 하고 피해야합니다.”
“벌써 큰 비가 돌아올 시기가 되었구나. 기산으로 세상이 어수선해 내 미리 생각치 못했다. 대비를 해야겠어. 그나저나 위무선은 대체 이럴 때에 어딜 간 것이야. 손 하나라도 모자랄 때에.”
“아버지께서 곧 비가 내릴 줄 아시고 떠나기 전에 사형에게 어린 사제들 나들이시킬 겸 필요한 물품을 사오라 시키셨는데 예상보다 비가 빨리 왔습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누이와 사형에게 편지를 써 호수를 통해 오지 말고 육로로 오던가 물이 가라앉고 오라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쯧 하는 수 없지. 그렇게 하거라. 시간이 없으니 우선 금주와 은주가 분담하여...”


“방비는 다 하였느냐.”
“네 무너질만한 것들은 줄로 단단히 묶었고 법보와 젖어선 안될 물건들은 물이 새지 않는 상자에 잘 보관하였습니다.”
“그래 아요 고생많았다. 집안에 있는 이들도 모두 떠나였으니 너도 이만 출발하거라. 서둘러야 비를 피한다.”
“소종주님 역시 저도 동행하면 안될까요? 저만 두고 어찌 혼자만 가시려합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위사형이 노잣돈을 전부 잃어버려 사제들이 굶게 생겼다는데. 어머니가 사실을 아시면 심히 노하실테니 그냥 사형이 보고싶어 떠났다고만 알려드리거라. 너가 가야 어머니께 알려드리지. 부탁한다 아요.”
“...알겠습니다. 대신 비 그치지마자 바로 저희가 머무는 숙소로 오셔야 합니다!”
“그래 약속하마. 어여 가거라. 내 너가 떠나는 모습만 보고 출발할련다.”
“네! 비만 그치면 바로 보는 거에요!”

말도 안되는 거짓부렁 솜씨만 느는구나. 비가 그치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을. 손 안에 쥔 기산이 연화오를 밟는 세세한 날짜와 계획이 적혀있는 종이를 구겼다. 온조가 목숨을 걸고 알려준 것이었다. 온약한이 직접 몸을 움직인다. 손님이 오시니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대문을 열어 기다려야지. 비때문에 기산이 연화오로 오지 못할거라는 기대나 연화호가 범람할 걱정은 하지 않았다.

기산과 내가 밟은 땅에는 결코 비가 오지 않을 터이니.


사특한 것, 사술. 등선을 추구하는 자가 결코 행해선 안되는 것. ‘강만음’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진실을 버리고 수명의 10년을 바쳐 자연의 순리를 어겨가며 찾아낸 나의 해답은 이것이었다. 연화오와 기산이 연화오로 오는 딱 한 길에만 비가 내리지 않는 것. 그렇게 그들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것.

종주석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앉아있자, 이윽고 눈에 은은히 광화가 서리며 풍채가 훌륭한 이가 거침없이 걸어오며 제 앞에 섰다. 온약한이었다.

“오랜만이오 강공자. 그 자리에 앉아있으니 공자가 아니라 운몽 사람들이 부르는 것처럼 소종주라 불러드리는 것이 더 나을까.”
“어서 오십시오 온종주님. 호칭은 편하실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아버님이나 어머님 모두 공사가 다망하셔 자리를 비우셨으니 부족하나마 제가 종주 대리로 나섰습니다.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참고 넘어가시지요.”
“하하하 참고 넘어가라? 운몽의 대접은 원래 이런 식이오, 아니면 강공자의 성격이 그러한 거요?”
“모든 이에게 열린 것이 우리 운몽이나 시덥잖은 시정잡배까지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방문하겠다 알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대접을 바라십니까?”

그 때 온욱이 튀어나오며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네 이놈! 아버지께 감히 무슨 말버릇이더냐! 당장 자리에서 내려와라! 아버님 저놈을 죽여 이 기산 온씨에게 방만하게 군 자의 말로를 보이겠습니다.”
“아니 온욱 가만히 있거라. 재밌구나. 너 내가, 이 기산이 두렵지 않느냐?”

나는 그에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였다.

“어찌 제 몸 갉아먹히는지 모르고 날뛰는 이들을 두려워할까. 날 잡으려왔으면 잡아가시지요. 허나 모두 제 목숨을 내놓을 각오 정도는 해야할 겁니다.”
“발톱을 꽤나 세우는구나. 온조가 말하는 것과 딴 판이 아니냐. 표정은 없지만 따뜻하고 어여쁜만큼 심성이 곱다 그리 말하던데. 내 아들놈을 홀린 이와 내 앞에 앉은 이가 같은 이가 맞느냐.”
“우둔한 아우가 왠 사내에게 홀리더니 결국 가문을 팔아먹을 줄이야. 그놈은 제가 홀린 것을 알지나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비꼬는 말에 가슴이 선득했다. 온조, 그이가 보이지 않았다.

“...온이공자가 보이지 않는군요. 날 잡으러 같이 온 게 아닙니까.”
“시치미떼기는, 네놈에게 기산의 정보를 흘린 것을 우리가 모를 줄 아느냐. 그놈은 내가 사지가 부러뜨렸으니 지금쯤 지하감옥에서 기어나 다니고 있을 것이다. 곧 네놈도 그리 만들어주마.”

“...그 말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겁니다, 온일공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다 이내 온약한의 손짓으로 그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저 뒤에는 아마 괴뢰떼들도 함께 있겠지. 아주 오랜만에 나의 자전과 삼독을 휘둘렀다. 연화오의 참변이 시작되었다.


강징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