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5191769
view 4090
2024.02.22 01:29
1000003218.jpg
?feature=shared


인연은 꼬여버린 실과 같아 아무리 풀려 애써도 풀리지 않는다. 꼬여버린 인연을 풀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실을 끊어버리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가 어디 불가능하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존재인가. 어리석게도 엉킨 실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여서 제 실타래를 놓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처음의 인연을 풀고 잇고 마침내는 잘라내는 것이,

운명이다.
누구에게나 첫 번째 생이 있다.
당신은 몇 번째 생을 살고 있는가.
나 강만음은 내 생을 모두 기억한다. 이번은 세 번째 생이며 신이 내게 허락하시매 모든 연을 끊을 마지막 생이였다.


첫 번째 생은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은 부모의 애정에 목말랐고 조금 자라서는 기산의 개들에게 제 몸과 가문을 빼앗겼다. 부모의 시체는 대들보에 걸리고 누이와 매형은 조카만 남기고 세상을 등졌으며 제 손으로 사형을 죽인 삼독성수의 삶. 그것이 강만음으로서 산 최초의 생이었다.

애정이 고팠다. 누구에게도 첫 번째가 될 수 없었기에 탐욕스러웠고 그것을 분노로 풀어냈었다. 그리하여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친, 어리석고 한 없이 어리석은 삶이었다.
지난한 삶이 서글프고 원망스럽던 차, 신이 내게 가로었다.

<그대, 삼독의 정점을 이룬 자.>
<내 시간을 되돌려 그대에게 두 번째 생을 준다면, 어떤가? 다시 한 번 살아볼테냐.>

나는 받아들였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두 번째 생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의 잘못을 잡기 위해 숨을 쉬었다. 애정은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첫 번째가 되지 않는다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스스로를 부숴서라도 연화오의 참변을 막는 것,
나의 목표는 오직 그 뿐이었다.


처음 생에서 자신은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싫고 좋음이 분명했고 웃기도 잘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억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더 이상 감정 표현이 어려웠다. 살아돌아온 제 부모님과 어린 누이가 기쁠만도 한데 입꼬리는 도통 올라가지 않고 눈물 역시 나지 않았다. 그냥 후유증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아이답지 않게 감정이 없고 그저 고요하니 어머니께서는 종주의 싹이 보인다 기뻐하셨다. 모든 것을 기억하니 어린 몸뚱이가 적응되자 수련의 솜씨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점도 컸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만큼은 영 아이답지 않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듯 싶다. 어머니를 닮은 얼굴도 컸겠지. 예상했던 일이라 그런지 무관심이 아프진 않았다.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무선을 데리고 오셨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은 뒤집어졌고 부모님은 크게 싸우셨다. 아버지는 무선을 양자로 들이고자 하셨으나 어머니께서 그것만큼은 결사반대하여 운몽 강씨의 아이로 키우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전생의 반복이었다. 그즈음에 나는, 기산의 정보를 사고 있었으며 금광요, 현재는 맹요일 아이를 찾고 있었다. 얼핏, 그이의 모친이 운몽의 기녀였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기가 맞다면 두 모자는 아직 운몽에 있을 터이다.

사실 그 이를 어찌할지 마음 속으로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 이리 빨리 미래를 바꾸다가 알고 있는 미래가 틀어지면 어쩌나? 불안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때나마 연모했던 이가 그리 아끼던 의형제요, 사랑했던 이인데 내가 그의 목숨을 취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찢어죽여 마땅한 이다. 그러나 어쩐지 함께 아릉을 키우며 잔잔히 웃었던 기억도 스쳐지나가는 것이 내 알게모르게 그에 대한 감정이 꽤나 복잡하였구나 생각되었다. 이리 할지 저리 할지 모르겠다면 내 곁에 두고 지켜보면 되겠지. 결정은 신중하였으나 마음 먹은 뒤 이루는 것은 재빨랐다. 모친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맹요를 기어코 찾아내 제 옆에 두었다. 아이의 출신을 어머니는 탐탁치않아 하셨으나 장차 운몽의 종주로서 아이를 제 곁에서 제대로 키워 제 부사로 쓰고 싶다는 뜻을 밝힌 뒤로 별 말씀은 없으셨다. 아마도 맹요가 영특하고 싹싹해 허락을 하신 것이겠지. 아버지는 여전히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누이와 무선과는 나쁘지 않게 지내었다. 둘의 존재는 무정한 자신에게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얼마 되지 않는 존재였다만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제 정신은 아이가 아니었기에 이전만큼 어울려 놀기에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저번 생처럼 그들을 망칠까봐 한 발짝 떨어져 그들과의 거리를 지킨 것이 컸다. 다만 원하는 것이 있음 모두 들어주고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할 따름이었다. 이전과 달리 무선보다 제 성취가 뛰어나 어머니의 구박이 덜하니 안심이 되었다.

누이는 여전히 무선을 가장 아꼈고 무선은 제 어머니를 제외하고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그것으로 족하였다. 저가 요즘 가장 관심을 쏟는 것은 맹요와 기산이었다. 아이는 가끔 어머니가 보고싶다고 울었지만 그래도 일을 배우고 수련을 하며 밝고 강하게 커갔다. 사람은 어찌 자라는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나는 깨달았다. 맹요를 보며 미래는 정말로 변할 수 있음을,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아요, 너를 보노라면 내 너를 데려온 것이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 매우 기쁘고 더없이 고맙구나.”
“실망시키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하다. 아마 너는 수선계에 이름을 날릴 강한 이가 되겠지...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선함을 사랑하고 악함을 멀리하거라. 오직 그것만이 내가 아요, 너에게 바라는 것이다.”
“네! 소종주님!”


맹요를 아끼는 만큼, 이따금 누이와 무선은 제가 퍽 서운한 듯 싶었다.

“저 아이는 이리 곁을 내주며 어찌 우리는 이다지도 박대할까?”

장난스레 말하는 것이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맹요가 들어오기 전에는 원래 제 성정이 그런지 알았지만 아이가 들어오니 거리감이 보인 것이겠지. 하지만 어찌 사실대로 말할까. 과거를 되돌아왔노라 내가 누이와 사형을 망칠까 저어되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변명할 수 밖에.

“누이, 사형 무얼 섭섭해하는 겁니까. 우리는 남매이니 티내지 않아도 그 정이 두텁지만 맹요는 제가 밖에서 데리고 온 아이가 아닙니까. 제가 잘 챙겨야지요.”
“그럼 우리에게도 그만큼 해주면 되지! 어찌 그 아이만 그리 싸고 돌아. 선선이 형 질투난다 말이야!”
“그래 아징, 이 누이도 그것이 못내 섭섭했단다. 맹요는 네 사람이니 당연히 챙겨주는 것이 마땅하나 부모님이나 나와 아선에게도 그만큼은 아니잖니?”
“...지금의 아요에게는 제가 첫 번째일겁니다. 언젠가 자라 어른이 되어 제 날개를 펼칠 때는 또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애정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믿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에게는 내가 첫 번째가 아니었으니 무엇이라 말하기 애매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 나 역시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계절이 몇 차례 바뀌고 고소로 수학을 떠날 시기가 왔다. 고소로 가기 이전부터 기산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위험을 무릅쓰고 불야천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으나 별달리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인 성격이 강해 정보를 모으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기산을 캔다는 걸 들키지 않았는지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고소를 가기 전까지 별달리 이룬 것은 아요 하나 뿐이구나. 답답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고소는 그래도 기산을 항상 경계해왔으니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음철의 정보도 찾을 수 있겠지.


“고소에는 아요 너도 함께 갈 것이니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비하도록 하거라.”
“네 그러겠습니다. 그러고보니 고소수학을 가게 되면 그 유명한 고소쌍벽도 만나뵐 수 있겠네요. 예전부터 꼭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공자방 1, 2 순위를 다투는 이들이니 그럴만도 하지.”
“네 도대체 어떤 이들이길래 우리 소종주님을 제치고 1, 2순위인지 이 아요가 꼭 확인해야겠습니다. 우리 소종주님보다 좀이라도 모자르면 제가 항의를 해서 순위를 뒤바꿔놓을 겁니다!”

이번 생의 제 공자방의 순위는 3위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공자방 순위를 들을 때마다 괜히 저 때문에 자리가 밀린 금자헌과 무선에게 미안하였다. 물론 한 때 제 누이를 울린 금자헌에 대한 미안함은 곧 희석되었지만서도.

출발하기 전의 밤, 아요와 챙겨야할 짐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며 누군가가 제 꿈 속에 나타났다. 이번 생에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제 첫사랑의 얼굴이었다.

내가 그대를 많이 그리워했나 봅니다. 그 전에는 눈을 감고 기억을 헤집어야 그대 모습이 보였건만, 고소로 간다고 들떠 그대가 꿈에 보이니.
고맙습니다. 이제라도 꿈에 나와줘서. 다시 한 번 살아있는 그대를 만날 수 있어 반복되는 생의 무게가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않습니다.


온종일 온 소저의 생각만으로 고소로 가니 지루할 새가 없었다. 누이와 무선, 아요까지 제가 딴 생각에 빠져있는 것이 퍽 불만처럼 보이긴 했으나 제 수련이 모자라 한 번 생각난 온 소저를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래도 운심부지처의 도착 전, 명첩을 빠트리고 오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리 해야 내 사형과 그 도려가 다시 사랑을 시작할 터이니 말이다.

가장 수련의 경지가 높은 내가 다녀와야하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운심부지처 계단에 도달하기 직전 발을 헛디디어 다쳤다. 아니나다를까, 이전처럼 함광군은 밤이 되자 우리를 들여보냈고 무선은 명첩을 찾아 돌아오다 함광군과 첫날부터 시비가 붙었다. 그 삐그덕거림은 고소수학이 한참인 와중까지 계속되었다가 그들이 잠깐 사라진 시점부터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요 역시 그를 마음에 들어한 택무군과 점차 만나는 횟수가 늘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서서히 혼자있는 시간이 늘자 저는 이제 기산과의 인연을 쌓는 데에 집중하였다. 고소수학을 오기 이전부터 기산과 불야천을 방문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억지로 우연을 가장하여 온조와 기산에서 마주치고 운몽 강씨의 이름으로 불야천을 방문하니 온조는 이를 운명이라며 무척 흡족해했다. 지난 생의 악연으로 제가 만나는 모든 기산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여전히 제 감정은 무동이었다.

다만 그 붉은 의복을, 기산의 문양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소에 온 남매를 데려온 온조는 저를 발견하자 매우 기뻐하더니 바로 떠나지 않고 저와 회포를 푼다며 며칠 머물다가 온약한의 부름으로 곧장 가봐야한다며 아쉬움을 전하고 떠났다. 마지막에 제 식구들을 잘 부탁하고 가는 것이 제 가족은 끔찍히 여기는 기산다웠다.

온소저는 이전에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온경림은 기산과 불야천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친해지는 데 퍽 어렵진 않았다. 무선과는 언제 친해졌는지 저와 있을 때도 가끔은 무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이도 많이 어렸구나. 이전에는 또래로 만나 그에 대한 증오를 품기 이전까지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세월을 거슬러 다시 만나니 이렇게나 어린 소년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얼마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데 당신은 제 동생을 지키고자, 가족을 구하고자 그리 애썼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또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돌이키면 돌이킬수록 우둔한 지난 삶이 부끄러웠다.


기실, 그녀를 대하는 것만큼은 이전이나 현재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없이 모든 것을 주고 싶다가도 혹여 내가 부담스러울까 저어되는 마음의 반복이었다. 앞에서는 차마 나서지 못하고 온경림이나 누이, 무선을 통해 몰래 챙겼다.

다만 언젠가는 들킬지 알았지만 이리 빠를지는 몰랐지.

“강공자께서 저를 챙겨주시는 것을 압니다. 어찌 이리 제게 잘해주십니까?”
“그저 물건들을 구하면 그대 생각이 나 챙겼을 뿐입니다. 온이공자의 부탁도 있었으니 그대를 챙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물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라버니가 한 마디했다고 챙겨주시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고, 또 많습니다. 강 공자, 저는 공자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라지 않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니깐요. 그냥, 이리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가 될까봐, 내가 이기적이라 그러한 겁니다. 저어되면 버리셔도 됩니다. 다시는 아무것도 드리지 않겠다 약속해드릴 수 없지만서도,”

나는 그녀의 버릇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혼자 그녀를 바라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을 때마다 손아귀를 꽉 지는 그녀는 종종 들고 있는 검 때문에 손에 상처가 생겼다. 다른 사람의 상처는 잘 돌봐도 저 자신이 다치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매번 아팠다.

“내 평생 그대가 안온하길 바랍니다. 그저 그 뿐입니다.”

손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다물린 그녀의 손가락을 이내 천천히, 하나하나 살살 피어주었다. 멍하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온 소저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이내 뒤돌아 사라졌다. 손을 잡은 것이 많이 불쾌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붉은 옷이 너울거릴 정도로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가서 용서를 구하는 서신이라도 쓰자.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번은 무례를 범한 거니 선물이라도 함께.


강징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