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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7 22:38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어찌 그런 짓을 하려 들었어!"
무대 뒤로 물러나자마자, 가장 먼저 언성을 높인 사람은 설약이었다. 그 양손에 붙들린 여랑이 면사를 벗어던졌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유령 같던 인상과 달리, 타는 듯한 외침이 터졌다.
"그렇게밖에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으니까요!"
설약이 흠칫했다. 뺨이 실룩일 만큼 이를 세게 악문 채, 여랑이 설약을 노려보며 이었다.
"내 동생이 죽었는데, 억울하다고 목숨을 끊었는데! 여현의 아무도 살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일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요. 그래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화려한 순간에 죽어버리자 생각했어요. 그럼 이 여현에서 그 사건이 쉬이 잊히지는 않을 테니까요. 내 손으로 주가 놈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그놈의 앞길에 사라지지 않을 소문이란 돌부리쯤은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요!"
설약의 낯빛이 상기되었다. 여자는 말을 잃어버린 채 여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참담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랑의 눈에 서렸던 원한이 이내 비탄으로 변했다. 설약의 팔을 꽉 잡은 채, 여랑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그게 내가 져야 할 책임이에요. 언니, 아유는 나 때문에 춤을 시작했어요...나 때문에 여기서 춤추기 시작했다고요. 내 잘못이에요."
여랑이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설약이 눈을 감았다. 그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긴 한숨을 내쉬고, 설약은 여랑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내가...내가 무용단 식구들의 생계에 눈이 멀어, 네 마음을 미처 잘 살피지 못했구나." 설약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랑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 어깨를 쓸어주다가, 설약은 곧 몸을 돌려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아직 면사를 벗지 않은 이연화를 향해, 설약이 양손을 포개어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 어떤 연유로 신분을 감추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득한 경지의 고수시지요. 덕분에 여랑의 목숨을 구했고, 무용단의 평판을 잃지 않았습니다. 질문은 물론이고, 선생의 목적이 무엇이든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평범한 의원이라 변명해봐야 별 의미는 없었다. 설약과 여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던 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두 얼굴이 서 있었다. 설약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냐?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아, 설약 낭자. 미안합니다. 제 일행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들어오시지요."
설약이 대번에 바뀐 태도로 건네자, 적비성과 방다병이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무용수들과 이연화를 빠르게 번갈아 본 방다병이 속삭이듯 물었다. "이연화, 괜찮아? 어쩌다가 이 사람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거야?" 이연화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왜겠어, 사건 조사를 위해서지. 내가 부탁해서 겨우 성사시킨 거래였다고." 적비성이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눈을 뗀 사이, 흙탕물에서 대차게 굴러버린 꼬마를 바라보는 듯한 반응이었다. 적비성을 힐끗 흘겨보고, 이연화는 여랑에게 진중히 말했다.
"여랑 낭자, 아까 천 아래에서 드렸던 말씀은 모두 진실입니다. 저는 아유 낭자와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는 일을 막기 위해, 여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낭자의 친동생을 돌려드릴 수는 없으나, 적어도 아유 낭자가 세상에 남긴 억울함을 풀고 악인에게 대가를 치르게끔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여랑 낭자가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선생은...선생은 조정의 관리이십니까?"
여랑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왜 이 일을 조사한다고 하십니까?"
"원래는 다른 피해자의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유 낭자에게 일어난 변고가 그 사건과 흡사하여, 어쩌면 같은 뿌리를 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싶더군요. 서로 협력한다면, 분명 진상을 알아내고 증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무용수들이 웅성였다. 그들은 이 비밀스러운 사람이 나라의 조사관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다소 염려스러우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동안 보고 들은 경험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여랑 역시 헛된 기대와 희망 사이를 오가는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내심 고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내 이름이라도 밝혀야 하나? 자칫 조사에 득보다 실이 더 많으면 곤란한데. 이연화가 주저하는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방다병이 나섰다.
"여랑 낭자. 저는 백천원의 형탐입니다. 세상의 기이한 사건들을 여러 차례 보고 해결했지요. 부당한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형탐의 소임이니, 부디 우리를 믿고 목숨을 귀히 여겨 주십시오."
방다병의 진심 어린 말에, 여랑을 비롯한 무용수들이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여럿의 눈빛에 금세 신뢰가 어렸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살짝 미소하며 방다병을 힐끔 보았다. 수사관이라는 직함과 방다병 특유의 맑고 선한 기운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특히 빛을 발했다. 그 뒤편의 적비성을 문득 일별했다가, 이연화는 그만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적비성은 '우리'라는 단어에 두드러기가 돋은 듯한 얼굴로 방다병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여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제가 무엇을 도우면 될지요?"
"일단, 아유 낭자에게 일이 생긴 정황을 상세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방다병의 말에, 여랑은 고개를 끄덕하고는 어쩐지 방운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원래 무용수들은 술 시중을 들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주 공자와 신 공자를 비롯한 몇몇 세가의 자식들에게는 가끔씩 어쩔 수 없이 불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유는 주 공자가 혼자 술을 마시던 외딴 별실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술을 주고받던 중 갑작스러운 희락기가 터진 바람에, 아유는 상대와 결국 각인까지 맺고 말았다. 아무리 아유가 주 공자의 계략임을 주장하며 거부하려 들어도, 별다른 증좌가 없는 상황에서 신분과 형질의 차이는 아유의 목소리를 쉽게 찍어눌렀다.
"당시에 아유 낭자가 먹고 마셨던 것이 있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이연화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여랑이 말했다.
"음식은 먹지 않았어요. 그때 주 공자가 권한 술만 한두 잔 먹었을 겁니다."
"무슨 술이었습니까?"
"백설향이었어요. 배꽃 냄새가 진했다 하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방다병과 이연화가 시선을 교환했다. 방운일 역시, 자신의 증언에서 순간 진한 배꽃 냄새를 맡았노라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변변한 흔적을 남기지 않은 약의 정체가 무엇이든, 아마도 그 향기가 특징인 듯했다. 이연화가 더 묻기 위해 입을 열기 전, 선화루의 점원이 문을 열었다. 남자는 방다병과 적비성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공자님들. 여기 왜 들어와 계십니까? 무용수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시면 곤란합니다. 반드시 기루를 통하셔야-."
"만날 사람이 있어 잠시 들어온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방다병이 얼른 말했다. 그러나 전혀 오해가 풀리지 않은 듯한 점원을 향해, 적비성이 눈을 한 차례 굴리더니 은자 하나를 던져주었다. 점원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남자는 종전의 경계심이라곤 깡그리 사라진 태도로 굽신거리며 말했다.
"물론 그런 멋진 공연을 보고 나면 호기심이 생기실 법도 하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설약 낭자, 신 공자와 친구분들이 사람을 청하셨어요. 술 시중을 원하신답니다."
"곧 적당한 아이들을 둘 정도 보낼 테니, 좀 기다리라고 전해요. 공연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소리요."
설약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점원의 허리가 더 굽혀졌다. 점원이 설약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사람을 지정하셨는데...."
"지정이라니, 또 여랑이오? 여랑은 안 돼요, 오늘 기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 오신 분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점원의 질문에, 이연화는 반사적으로 두 남자의 기색을 먼저 살폈다. 방다병은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입과 눈을 커다랗게 벌렸고, 적비성은 경고하는 눈으로 이연화를 쏘아보았다. 점원이 해해거리며 말했다. "그게...사실 둘을 모두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래도 신 공자와 친구분들이 선화루에서 가장 큰손이시지 않습니까. 요새 신 공자의 심기도 계속 불편했고요. 오늘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 공자들에게 밉보이면 모두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설약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분-이 사람은 우리 무용단 소속이 아니라, 잠깐 무대를 도우러 임시로 온 이요. 정식으로 고용된 사람이 아닌데, 어찌 술 시중을 들라 하겠소? 오늘은 날이 좋지 않으니, 신 공자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아, 저는 괜찮습니다. 말상대 잠깐 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방다병과 적비성을 일부러 외면하며, 이연화가 산뜻한 얼굴로 말했다. "이연-너 미쳤어?" 방다병이 무시무시한 귀신을 마주한 사람마냥 새파래진 얼굴로 이연화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이연화가 결백한 눈으로 방다병을 보았다. "아니, 아주 이성적인 판단인데. 범인에게서 직접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기회를 왜 놓치겠어?" 방다병이 무너지는 하늘을 목도한 사람처럼 뻐끔거렸다. 설약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갈 테니, 여랑 낭자는 쉬게 해주시지요. 오늘 많이 지치셨을 텐데요."
"저도 가겠습니다."
여랑이 말했다. 설약이 놀라 숨을 삼켰고, 점원은 기쁨에 차 양손을 딱 마주쳐 잡았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들께 일러두겠으니 필요한 만큼 준비하시고 오십시오!" 자칫하다간 여랑과 이연화가 결정을 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점원은 속사포처럼 늘어놓고는 홱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점원이 문을 나서기 전, 방다병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요!"
점원이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은 잠시 갈등하다가 품에 손을 넣었다. 그 손에 번쩍이는 금자가 딸려 나오자, 이번에는 오히려 이연화가 놀라 방다병을 보았다. 방소보, 그건 너희 어머니가 챙겨준 여비의 절반 이상이잖아? 뭘 어쩌려고 그래? 치미는 심화를 꾹 누르듯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방다병이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가서 전하시오, 오늘 무대를 인상 깊게 본 공자들이 거금을 치르며 이 둘을 먼저 청했다고 말이오. 하지만 신 공자가 이 기루의 큰 손님이란 체면을 보아, 원한다면 합석할 의향이 있소. 흥취를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한다면, 좋은 술을 더 많이 나눌 수 있겠지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점원은, 마지막 말을 듣고는 금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신 공자만 허락한다면, 기루 입장에서야 수익을 더 많이 올릴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만난 젊은 공자들이 과시욕에 휩싸여 비싼 술이며 음식들을 마구 시켜대는 일쯤은 그리 드물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한번 잘 말씀드려 보지요." 점원이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를 뜨자, 설약이 걱정스럽게 여랑을 향했다.
"여랑, 괜찮겠어? 그놈들도 주 공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야. 아유 일을 두고 부주의하게 떠들어댈 수도 있어."
"괜찮아요. 선생께서 가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얻을 만한 단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함께해서 도움이 된다면 뭐든 이야기하십시오."
여랑이 이연화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낯빛과 태도가 한결 정돈되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한 이연화가 건넸다.
"제 추측이 맞다면, 아마 주 공자와 신 공자는 동일한 약을 이용하여 일을 저질렀을 겁니다. 십중팔구 같은 경로를 통해 구한 약이겠지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약을 얻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낭자께서는 적당히 맞춰주시다가, 제가 신호할 일이 생기면 잠시 시선을 끌어주십시오. 낭자께 직접적으로 해가 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해를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여랑이 고개를 끄덕했다. 잠시 뒤, 점원이 돌아와 함박웃음을 지은 채 좋은 소식을 전했다. 신 공자와 그 친구들이 넓은 도량으로 방다병의 제안을 승낙했다는 전갈이었다. "넓은 도량이 무슨 말이야, 선점한 사람이 있다는데 거기에 끼어들면서 선심 쓰는 척이네." 방다병이 입을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이연화가 양팔을 가볍게 들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잘됐어,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와야겠다. 이 복장을 그대로 걸치고 가면 너무 눈에 띌 테니까."
"남의 눈에 띌 걸 걱정하면서 그런 짓을 했어? 넌 너무 조심성이 없어. 알아?"
"그래서 내가 너와 같이 다니잖아. 걱정 마, 너희가 합석하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가 아시면 넌 저번보다 훨씬 더 심하게 혼날 거야."
이연화가 눈웃음을 지으며 달래듯 건네자,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꿍얼거렸다. 이연화가 그 어깨를 툭 쳤다.
"다 대의를 위한 거잖아. 운일 공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하루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여현 사람들이 마음 편히 지내지 않겠어?"
"됐어, 나도 아니까 더 변명할 필요 없어. 심문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심문해야 한다니, 이런 짓은 또 오랜만이네."
방다병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중얼거렸다. 픽 웃은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의 강렬한 시선이 무색하게, 적비성은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오히려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잔소리한다고 들을 놈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넌 네가 좋을 대로 해라. 난 옆에서 술이나 마시며 지켜보다가, 만일 너를 지저분하게 건드리거나 헛소리를 하는 놈이 있다면 나중에 그 손가락을 자르거나 혀를 뽑아버리겠다."
적비성이 산뜻하기까지 한 태도로 말했다. 이연화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농담인 척 웃어버리고 싶었으나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적비성의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생각한 바를 그대로 실행할 것이라는 선언에 가까웠다. 안 봐도 불량한 한량들일 테지만, 집에서 오냐오냐 자란 공자들을 일거에 불구 만들 마음까진 없는데. 눈가를 살짝 만진 이연화가 중재하듯 건넸다.
"저기, 이봐. 잘 알겠지만, 나는 명예를 중히 여기는 가련한 규수가 아니라고. 내가 음인이 됐다고 이럴 필요 없어.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목적을 위해 그 공자들을 속이는 거니까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설명할 필요 없다, 네가 옛날부터 버렸던 명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니.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다."
적비성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그 냉랭해 보일 만큼 차분한 태도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뭐라 진지하게 쏘아붙이려 드는 이연화에게, 적비성이 한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건넸다. 이런 걸 굳이 설명씩이나 해야 하느냐고 타박하는 듯한 어조였다.
"너도 얼마 전까지는 양인이었지. 네가 옛날에 교완만과 교제할 때를 생각해 봐라. 넌 그녀와 각인하지 않았지만 교완만을 중히 여겼어. 정파의 목적을 위해 기생 연기를 하던 교완만을, 웬 놈팽이가 함부로 희롱하거나 건드렸다면 넌 어떻게 했겠나?"
그야 상대가 무공을 하든 못 하든 죽이고 싶었겠지. 당시의 나라면, 죽이진 않았더라도 어딘가를 부러뜨렸을 테고. 이연화는 차마 그렇게 대꾸하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은 꽤 좋은 대답이 되었다. 적비성의 얼굴로 바보의 깨달음을 비웃는 미소가 비뚤게 떠올랐다. "비록 지금 우리가 그때의 교완만과 너 같은 관계는 아니다만, 넌 최근에 나와 각인한 사람이다. 이 정도 여파는 당연하지. 내 앞에서 이런 일을 벌였으니, 결과도 감수하도록 해." 드물게도 돌려줄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금원맹주를 보며, 이연화가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방다병의 팔을 흔들었다.
"방소보, 들었지? 저 녀석은 데리고 들어가지 마. 조사에 방해될 게 분명해."
"네 말로 안 되는데, 내가 말한다고 대마두가 듣겠어? 알아서 해."
방다병이 이연화의 팔을 떨쳐내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연화가 끙 소리를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상대의 반응에는 일말의 합리성이 있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술 시중 따위야 정말 별일 아니라고 여겼는데, 내가 각인한 사람의 본능을 너무 부주의하게 건드렸나 보네. 방다병이 안다면 그걸 이제야 떠올리냐며 펄쩍 뛸 만한 생각을 하면서, 이연화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용의자에게서 정보를 캐내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상대가 난데없는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다니. 반쯤 자초한 일이었으나 어쩐지 영 부당하게 느껴졌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어찌 그런 짓을 하려 들었어!"
무대 뒤로 물러나자마자, 가장 먼저 언성을 높인 사람은 설약이었다. 그 양손에 붙들린 여랑이 면사를 벗어던졌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유령 같던 인상과 달리, 타는 듯한 외침이 터졌다.
"그렇게밖에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으니까요!"
설약이 흠칫했다. 뺨이 실룩일 만큼 이를 세게 악문 채, 여랑이 설약을 노려보며 이었다.
"내 동생이 죽었는데, 억울하다고 목숨을 끊었는데! 여현의 아무도 살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일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요. 그래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화려한 순간에 죽어버리자 생각했어요. 그럼 이 여현에서 그 사건이 쉬이 잊히지는 않을 테니까요. 내 손으로 주가 놈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그놈의 앞길에 사라지지 않을 소문이란 돌부리쯤은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요!"
설약의 낯빛이 상기되었다. 여자는 말을 잃어버린 채 여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참담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랑의 눈에 서렸던 원한이 이내 비탄으로 변했다. 설약의 팔을 꽉 잡은 채, 여랑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그게 내가 져야 할 책임이에요. 언니, 아유는 나 때문에 춤을 시작했어요...나 때문에 여기서 춤추기 시작했다고요. 내 잘못이에요."
여랑이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설약이 눈을 감았다. 그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긴 한숨을 내쉬고, 설약은 여랑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내가...내가 무용단 식구들의 생계에 눈이 멀어, 네 마음을 미처 잘 살피지 못했구나." 설약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랑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 어깨를 쓸어주다가, 설약은 곧 몸을 돌려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아직 면사를 벗지 않은 이연화를 향해, 설약이 양손을 포개어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 어떤 연유로 신분을 감추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득한 경지의 고수시지요. 덕분에 여랑의 목숨을 구했고, 무용단의 평판을 잃지 않았습니다. 질문은 물론이고, 선생의 목적이 무엇이든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평범한 의원이라 변명해봐야 별 의미는 없었다. 설약과 여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던 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두 얼굴이 서 있었다. 설약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냐?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아, 설약 낭자. 미안합니다. 제 일행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들어오시지요."
설약이 대번에 바뀐 태도로 건네자, 적비성과 방다병이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무용수들과 이연화를 빠르게 번갈아 본 방다병이 속삭이듯 물었다. "이연화, 괜찮아? 어쩌다가 이 사람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거야?" 이연화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왜겠어, 사건 조사를 위해서지. 내가 부탁해서 겨우 성사시킨 거래였다고." 적비성이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눈을 뗀 사이, 흙탕물에서 대차게 굴러버린 꼬마를 바라보는 듯한 반응이었다. 적비성을 힐끗 흘겨보고, 이연화는 여랑에게 진중히 말했다.
"여랑 낭자, 아까 천 아래에서 드렸던 말씀은 모두 진실입니다. 저는 아유 낭자와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는 일을 막기 위해, 여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낭자의 친동생을 돌려드릴 수는 없으나, 적어도 아유 낭자가 세상에 남긴 억울함을 풀고 악인에게 대가를 치르게끔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여랑 낭자가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선생은...선생은 조정의 관리이십니까?"
여랑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왜 이 일을 조사한다고 하십니까?"
"원래는 다른 피해자의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유 낭자에게 일어난 변고가 그 사건과 흡사하여, 어쩌면 같은 뿌리를 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싶더군요. 서로 협력한다면, 분명 진상을 알아내고 증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무용수들이 웅성였다. 그들은 이 비밀스러운 사람이 나라의 조사관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다소 염려스러우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동안 보고 들은 경험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여랑 역시 헛된 기대와 희망 사이를 오가는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내심 고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내 이름이라도 밝혀야 하나? 자칫 조사에 득보다 실이 더 많으면 곤란한데. 이연화가 주저하는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방다병이 나섰다.
"여랑 낭자. 저는 백천원의 형탐입니다. 세상의 기이한 사건들을 여러 차례 보고 해결했지요. 부당한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형탐의 소임이니, 부디 우리를 믿고 목숨을 귀히 여겨 주십시오."
방다병의 진심 어린 말에, 여랑을 비롯한 무용수들이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여럿의 눈빛에 금세 신뢰가 어렸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살짝 미소하며 방다병을 힐끔 보았다. 수사관이라는 직함과 방다병 특유의 맑고 선한 기운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특히 빛을 발했다. 그 뒤편의 적비성을 문득 일별했다가, 이연화는 그만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적비성은 '우리'라는 단어에 두드러기가 돋은 듯한 얼굴로 방다병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여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제가 무엇을 도우면 될지요?"
"일단, 아유 낭자에게 일이 생긴 정황을 상세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방다병의 말에, 여랑은 고개를 끄덕하고는 어쩐지 방운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원래 무용수들은 술 시중을 들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주 공자와 신 공자를 비롯한 몇몇 세가의 자식들에게는 가끔씩 어쩔 수 없이 불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유는 주 공자가 혼자 술을 마시던 외딴 별실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술을 주고받던 중 갑작스러운 희락기가 터진 바람에, 아유는 상대와 결국 각인까지 맺고 말았다. 아무리 아유가 주 공자의 계략임을 주장하며 거부하려 들어도, 별다른 증좌가 없는 상황에서 신분과 형질의 차이는 아유의 목소리를 쉽게 찍어눌렀다.
"당시에 아유 낭자가 먹고 마셨던 것이 있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이연화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여랑이 말했다.
"음식은 먹지 않았어요. 그때 주 공자가 권한 술만 한두 잔 먹었을 겁니다."
"무슨 술이었습니까?"
"백설향이었어요. 배꽃 냄새가 진했다 하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방다병과 이연화가 시선을 교환했다. 방운일 역시, 자신의 증언에서 순간 진한 배꽃 냄새를 맡았노라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변변한 흔적을 남기지 않은 약의 정체가 무엇이든, 아마도 그 향기가 특징인 듯했다. 이연화가 더 묻기 위해 입을 열기 전, 선화루의 점원이 문을 열었다. 남자는 방다병과 적비성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공자님들. 여기 왜 들어와 계십니까? 무용수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시면 곤란합니다. 반드시 기루를 통하셔야-."
"만날 사람이 있어 잠시 들어온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방다병이 얼른 말했다. 그러나 전혀 오해가 풀리지 않은 듯한 점원을 향해, 적비성이 눈을 한 차례 굴리더니 은자 하나를 던져주었다. 점원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남자는 종전의 경계심이라곤 깡그리 사라진 태도로 굽신거리며 말했다.
"물론 그런 멋진 공연을 보고 나면 호기심이 생기실 법도 하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설약 낭자, 신 공자와 친구분들이 사람을 청하셨어요. 술 시중을 원하신답니다."
"곧 적당한 아이들을 둘 정도 보낼 테니, 좀 기다리라고 전해요. 공연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소리요."
설약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점원의 허리가 더 굽혀졌다. 점원이 설약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사람을 지정하셨는데...."
"지정이라니, 또 여랑이오? 여랑은 안 돼요, 오늘 기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 오신 분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점원의 질문에, 이연화는 반사적으로 두 남자의 기색을 먼저 살폈다. 방다병은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입과 눈을 커다랗게 벌렸고, 적비성은 경고하는 눈으로 이연화를 쏘아보았다. 점원이 해해거리며 말했다. "그게...사실 둘을 모두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래도 신 공자와 친구분들이 선화루에서 가장 큰손이시지 않습니까. 요새 신 공자의 심기도 계속 불편했고요. 오늘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 공자들에게 밉보이면 모두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설약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분-이 사람은 우리 무용단 소속이 아니라, 잠깐 무대를 도우러 임시로 온 이요. 정식으로 고용된 사람이 아닌데, 어찌 술 시중을 들라 하겠소? 오늘은 날이 좋지 않으니, 신 공자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아, 저는 괜찮습니다. 말상대 잠깐 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방다병과 적비성을 일부러 외면하며, 이연화가 산뜻한 얼굴로 말했다. "이연-너 미쳤어?" 방다병이 무시무시한 귀신을 마주한 사람마냥 새파래진 얼굴로 이연화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이연화가 결백한 눈으로 방다병을 보았다. "아니, 아주 이성적인 판단인데. 범인에게서 직접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기회를 왜 놓치겠어?" 방다병이 무너지는 하늘을 목도한 사람처럼 뻐끔거렸다. 설약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갈 테니, 여랑 낭자는 쉬게 해주시지요. 오늘 많이 지치셨을 텐데요."
"저도 가겠습니다."
여랑이 말했다. 설약이 놀라 숨을 삼켰고, 점원은 기쁨에 차 양손을 딱 마주쳐 잡았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들께 일러두겠으니 필요한 만큼 준비하시고 오십시오!" 자칫하다간 여랑과 이연화가 결정을 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점원은 속사포처럼 늘어놓고는 홱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점원이 문을 나서기 전, 방다병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요!"
점원이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은 잠시 갈등하다가 품에 손을 넣었다. 그 손에 번쩍이는 금자가 딸려 나오자, 이번에는 오히려 이연화가 놀라 방다병을 보았다. 방소보, 그건 너희 어머니가 챙겨준 여비의 절반 이상이잖아? 뭘 어쩌려고 그래? 치미는 심화를 꾹 누르듯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방다병이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가서 전하시오, 오늘 무대를 인상 깊게 본 공자들이 거금을 치르며 이 둘을 먼저 청했다고 말이오. 하지만 신 공자가 이 기루의 큰 손님이란 체면을 보아, 원한다면 합석할 의향이 있소. 흥취를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한다면, 좋은 술을 더 많이 나눌 수 있겠지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점원은, 마지막 말을 듣고는 금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신 공자만 허락한다면, 기루 입장에서야 수익을 더 많이 올릴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만난 젊은 공자들이 과시욕에 휩싸여 비싼 술이며 음식들을 마구 시켜대는 일쯤은 그리 드물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한번 잘 말씀드려 보지요." 점원이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를 뜨자, 설약이 걱정스럽게 여랑을 향했다.
"여랑, 괜찮겠어? 그놈들도 주 공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야. 아유 일을 두고 부주의하게 떠들어댈 수도 있어."
"괜찮아요. 선생께서 가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얻을 만한 단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함께해서 도움이 된다면 뭐든 이야기하십시오."
여랑이 이연화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낯빛과 태도가 한결 정돈되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한 이연화가 건넸다.
"제 추측이 맞다면, 아마 주 공자와 신 공자는 동일한 약을 이용하여 일을 저질렀을 겁니다. 십중팔구 같은 경로를 통해 구한 약이겠지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약을 얻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낭자께서는 적당히 맞춰주시다가, 제가 신호할 일이 생기면 잠시 시선을 끌어주십시오. 낭자께 직접적으로 해가 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해를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여랑이 고개를 끄덕했다. 잠시 뒤, 점원이 돌아와 함박웃음을 지은 채 좋은 소식을 전했다. 신 공자와 그 친구들이 넓은 도량으로 방다병의 제안을 승낙했다는 전갈이었다. "넓은 도량이 무슨 말이야, 선점한 사람이 있다는데 거기에 끼어들면서 선심 쓰는 척이네." 방다병이 입을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이연화가 양팔을 가볍게 들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잘됐어,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와야겠다. 이 복장을 그대로 걸치고 가면 너무 눈에 띌 테니까."
"남의 눈에 띌 걸 걱정하면서 그런 짓을 했어? 넌 너무 조심성이 없어. 알아?"
"그래서 내가 너와 같이 다니잖아. 걱정 마, 너희가 합석하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가 아시면 넌 저번보다 훨씬 더 심하게 혼날 거야."
이연화가 눈웃음을 지으며 달래듯 건네자,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꿍얼거렸다. 이연화가 그 어깨를 툭 쳤다.
"다 대의를 위한 거잖아. 운일 공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하루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여현 사람들이 마음 편히 지내지 않겠어?"
"됐어, 나도 아니까 더 변명할 필요 없어. 심문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심문해야 한다니, 이런 짓은 또 오랜만이네."
방다병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중얼거렸다. 픽 웃은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의 강렬한 시선이 무색하게, 적비성은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오히려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잔소리한다고 들을 놈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넌 네가 좋을 대로 해라. 난 옆에서 술이나 마시며 지켜보다가, 만일 너를 지저분하게 건드리거나 헛소리를 하는 놈이 있다면 나중에 그 손가락을 자르거나 혀를 뽑아버리겠다."
적비성이 산뜻하기까지 한 태도로 말했다. 이연화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농담인 척 웃어버리고 싶었으나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적비성의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생각한 바를 그대로 실행할 것이라는 선언에 가까웠다. 안 봐도 불량한 한량들일 테지만, 집에서 오냐오냐 자란 공자들을 일거에 불구 만들 마음까진 없는데. 눈가를 살짝 만진 이연화가 중재하듯 건넸다.
"저기, 이봐. 잘 알겠지만, 나는 명예를 중히 여기는 가련한 규수가 아니라고. 내가 음인이 됐다고 이럴 필요 없어.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목적을 위해 그 공자들을 속이는 거니까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설명할 필요 없다, 네가 옛날부터 버렸던 명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니.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다."
적비성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그 냉랭해 보일 만큼 차분한 태도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뭐라 진지하게 쏘아붙이려 드는 이연화에게, 적비성이 한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건넸다. 이런 걸 굳이 설명씩이나 해야 하느냐고 타박하는 듯한 어조였다.
"너도 얼마 전까지는 양인이었지. 네가 옛날에 교완만과 교제할 때를 생각해 봐라. 넌 그녀와 각인하지 않았지만 교완만을 중히 여겼어. 정파의 목적을 위해 기생 연기를 하던 교완만을, 웬 놈팽이가 함부로 희롱하거나 건드렸다면 넌 어떻게 했겠나?"
그야 상대가 무공을 하든 못 하든 죽이고 싶었겠지. 당시의 나라면, 죽이진 않았더라도 어딘가를 부러뜨렸을 테고. 이연화는 차마 그렇게 대꾸하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은 꽤 좋은 대답이 되었다. 적비성의 얼굴로 바보의 깨달음을 비웃는 미소가 비뚤게 떠올랐다. "비록 지금 우리가 그때의 교완만과 너 같은 관계는 아니다만, 넌 최근에 나와 각인한 사람이다. 이 정도 여파는 당연하지. 내 앞에서 이런 일을 벌였으니, 결과도 감수하도록 해." 드물게도 돌려줄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금원맹주를 보며, 이연화가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방다병의 팔을 흔들었다.
"방소보, 들었지? 저 녀석은 데리고 들어가지 마. 조사에 방해될 게 분명해."
"네 말로 안 되는데, 내가 말한다고 대마두가 듣겠어? 알아서 해."
방다병이 이연화의 팔을 떨쳐내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연화가 끙 소리를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상대의 반응에는 일말의 합리성이 있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술 시중 따위야 정말 별일 아니라고 여겼는데, 내가 각인한 사람의 본능을 너무 부주의하게 건드렸나 보네. 방다병이 안다면 그걸 이제야 떠올리냐며 펄쩍 뛸 만한 생각을 하면서, 이연화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용의자에게서 정보를 캐내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상대가 난데없는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다니. 반쯤 자초한 일이었으나 어쩐지 영 부당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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