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https://hygall.com/584223397
view 6636
2024.02.13 23:37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너, 허튼짓 하면 내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조심해."
"너보다는 이연화가 먼저 알겠지. 잠이나 자."
"부주의하게 냄새를 흘리거나 하는 것도 안 돼!"
"시끄럽다. 점혈하기 전에 입 좀 다물어."
"둘 다 시끄러워, 그리고 둘 다 조금 떨어져. 숨을 못 쉬겠다."
이연화가 투덜거리며 두 몸뚱이를 양옆으로 꾹 밀어냈다. 둘 모두 한 치 정도 순순히 물러났지만, 허리에 감긴 두 손은 풀리지 않았다. 이연화는 목석처럼 바른 자세로 천장을 향한 채 누웠다. 가슴에 양손을 잘 포개어 올려놓자 마치 관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기분이었다. 어느 쪽으로 돌아누워도 부적절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 됐지. 이제 눈 좀 붙이자."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 이연화는 눈을 감은 채 심신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한 사람을 위한 침상에 셋이 구겨져 있자니 미간을 좀처럼 펼 수가 없었다.
적비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엽 풀린 인형마냥 툭 잠이 들었고, 적비성처럼 한쪽 팔을 묶인 방다병은 몇 차례 뒤척이는 듯했으나 생각보다 이르게 잠들었다. 양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연화는 소리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남을 가운데에 끼워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놓고 자기들은 잠이 아주 잘 오신다 이거지. 스멀스멀 치미는 심화를 내리누르며, 이연화는 역시 이 두 개의 각인이 퍽 번거롭고도 난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일은 하루종일 피로할 각오를 해야 할 듯했다.
그 각오가 무색하도록, 이연화는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떴다.
나른하고 따뜻했다. 이연화는 잠의 여운이 남은 머리로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푹 쉬고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몸은, 아침의 선뜩한 기운이 아닌 더운 온기에 휩싸여 있었다. 숨쉬기가 약간 답답했지만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그 감촉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의 팔이 자신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아, 사람과 함께 있었구나. 이연화가 멍하게 생각했다. 약 따위에 당한 것이 아님에도, 바로 곁의 타인을 향해 금방 경계심이 올라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자고 싶네...뭔가 할 일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이연화가 웅얼거리듯 떠올렸다. 오래도록 경험하지 못한 노곤함이 반가웠다. 이연화는 오랜 떠돌이 생활로 어디서든 잠들 수 있었으나, 어디서도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했다. 몇 시진만 더 이렇게 잘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이연화의 귀로, 옷깃이 부스럭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다리가 자신의 다리 위에 턱 올라왔다. 하지만 딱히 불평할 만한 일도 아닌 것이, 이연화의 다리 한 쪽도 이미 다른 누군가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잠깐, 지금 나랑 자는 사람이 몇이야? 이연화의 눈이 살짝 열렸다. 눈앞으로 어두운 색깔의 옷감이 보였다. 누군가의 가슴팍이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가, 이연화는 놀란 소리를 겨우 참았다. 적비성의 얼굴이 과히 코앞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머리의 방향을 홱 틀었다가, 이연화는 또 짧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방다병의 얼굴도 지척이었다. 입을 살짝 벌린 모양새가, 정말 깊이 잠든 듯했다. 두 사람의 숨결이 목덜미와 귓전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말 그대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잠들기 전 거리를 두라며 밀어냈던 몸도 언제 붙었는지, 맞닿은 옷 너머로 두 명분의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개중 가장 시끄러워진 것은 자신의 심장박동이었다. 이연화는 이를 꽉 악문 채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죽여 숨을 골랐다. 어젯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한 발 늦게 떠올랐다. 어느새 방 안이 훤하게 밝아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잠든 거지? 이연화가 꿈틀거리자, 허리와 가슴팍에 감겼던 팔들이 더 단단해졌다. 이연화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잡혀 있으니 딱 그날이 떠오르는데...앗. 이연화가 순간 어색하게 경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상하기에는 참으로 부적절한 기억이 튀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려 했으나, 한 번 부주의하게 시작된 생각은 멈추지 않고 도리어 야속할 만큼 쭉쭉 뻗어 나갔다.
-이거...이거 꿈인가...?
-좋을 대로 생각해라.
-이연화, 아직도 아파?
-이상해, 기다려, 잠깐만-.
이연화는 드물게도 내적 고함을 질렀다. 상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자꾸 그날의 몇몇 장면이 선연해지면서, 아랫배가 간질거리고 입안이 말라 왔다. 그날 자신을 여러모로 더듬던 손길과 입술이 바로 곁에 있었다. 뜨겁다 못해 폭력적일 만큼 맹렬했던 순간을 외면하기 위해 애쓰며, 이연화는 이를 꽉 악문 채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양옆에서 끌어안은 손길이 마치 나무를 휘감아 자란 넝쿨처럼 들러붙어, 웬만해선 벗어나는 일은 고사하고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이놈들, 진짜! 이연화가 이를 득득 갈았다. 여러 이유로 열이 올라 뒷목이 뜨끈뜨끈했다. 원한마저 서린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다, 이연화는 곧 발에 공력을 집중해 단숨에 몸을 퉁겼다.
바닥으로 내려선 이연화가 호흡을 고르며 옷자락을 탁 당겼다. 어느새 벌게진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을 생각도 미처 들지 않았다. 가슴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탁자 앞에 털썩 앉아, 이연화는 차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무슨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파사보를 써야 돼?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지? 그래, 나 때문이지."
이연화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일부러 잡혀갔던 스스로가 참 원망스러워졌다. 갑자기 한 사람의 체온이 쑥 빠져나가자 영 불만스러웠는지, 남은 두 사람은 빈 옆자리를 더듬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연화는 차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서로를 찾아 붙들었을 때 그만 웃음을 참기 위해 황급히 입을 막았다. 퍽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숨을 들이마시다가, 두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후각으로 먼저 깨달았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이연화는 조금 전까지 불평하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꼴을 구경했다.
표정으로 끙끙거리던 두 사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와,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입술이라도 닿았겠어. 이연화가 흥미진진하게 생각했다. 조금 혼몽하게 뜨였던 두 쌍의 눈동자는, 상대의 정체와 그 거리를 인지하자마자 화들짝 커졌다. 적비성에게서 화다닥 멀어지며, 방다병이 품위 없는 비명을 꽥 질렀다.
"와아아악!"
적비성은 물러나다가 부딪힐 벽이 있었지만, 바깥쪽 자리를 차지했던 방다병에게는 벽이 없었다. 불쌍한 청년은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팔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두세 바퀴 데굴데굴 굴렀을지도 몰랐다. 이연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소리내어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바닥에 처박혔던 방다병이 억울한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 너 내가 머리를 박고 죽을 뻔한 게 그렇게 재미있어?"
"헛소리 마. 만인책에 오른 고수가, 침상에서 굴러 죽을 뻔할 리야 있겠어."
이연화가 살짝 배어나온 눈물을 훔치곤 손을 내저었다. 투덜대며 일어선 방다병이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빈말 아니야, 심장질환이 오는 줄 알았다고! 넌 언제 깬 거야?"
"나도 방금 일어났어."
이연화가 얄미울 만큼 태연하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좋지 못한 눈으로 이연화를 흘겨보고, 방다병은 손목을 묶었던 끈을 풀었다. 적비성은 바로 끈을 푸는 대신, 침상에 정자세로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그 표정이 어제에 비해 퍽 차분해 보였다. 차를 따라 쭉 들이킨 방다병이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물었다.
"이연화, 넌 잘 잤어?"
"평소랑 비슷하지 뭐. 너는?"
"음, 몸이 가벼워. 처음에 누웠을 땐 좁고 불편했는데, 엄청 깊이 잠들었지 뭐야. 묶인 팔이 좀 아픈 걸 빼곤 괜찮아."
방다병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팔을 돌리며 말했다. 이연화는 겉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적비성만큼 통증에 시달리진 않았겠지만, 방다병 역시 각인 상대와 원하는 만큼 붙어있지 못해 줄곧 결핍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나부터가 전에 없이 숙면했는데, 이 녀석도 비슷하겠지. 이연화가 어쩐지 착잡한 심정으로 찻잔을 채웠다.
"좋군. 드디어 내 몸 같아."
적비성이 짧고도 만족스럽게 평가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이연화가 영혼 없이 한쪽 입매를 끌어올리며 엄지를 슥 들었다. "잘됐네." 방다병의 잔을 빼앗아 차를 한 잔 마시고, 적비성은 코웃음과 함께 청년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끈을 더 짧게 매어야겠군. 너와 끌어안는 불상사를 다시 겪고 싶진 않으니."
"누가 할 말인데!"
방다병이 발끈해 마주 외쳤다. 다음이라니, 오늘도 셋이 자야 해? 이연화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 누군가가 창문을 작게 두드렸다. 적비성은 마치 이 집에 기거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고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창을 열었다. 무안의 모습이 보였다. 금원맹주의 측근은 놀란 눈으로 삼인방을 슬쩍 보고는, 곧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존상, 적당한 자를 하나 포섭했습니다. 고씨 집안의 삼남인데, 대가를 지불하면 본인과 동행해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알겠다. 미리 낯짝을 보아 두어야겠군. 이연화, 선화루 앞에서 만나자."
아무렇지 않게 건네고, 적비성은 어제보다 한결 편안해진 낯빛과 태도로 창을 넘어 사라졌다. 방다병이 침상과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 눈동자가 퍽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이연화, 아비가 자는 사이에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지?"
"네가 함께 있는데 무슨 짓을 했겠어. 잠결에 더듬을까봐 한쪽 손도 묶어놨잖아."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갈등하는 얼굴로 침묵하다가, 방다병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그...내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
"남일처럼 묻네, 방소보. 네가 무슨 짓을 했다면 스스로 알았겠지."
"물론 그런 기억은 없지만, 잠결에 혹시...혹시 모르잖아."
"잠결에 뭘. 민망한 꿈이라도 꿨어?"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놀리듯 묻자, 방다병의 귀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새빨개졌다. 앗, 진짜? 오히려 던진 쪽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아, 아니야!"
방다병이 버럭 외쳤다. 이연화는 내심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답게, 방다병은 갑작스러운 거짓말에 퍽 약한 편이었다. 어쨌든 별일이 없어 다행이라 꿍얼거리는 방다병에게, 이연화는 제발 이걸 먹고 말을 그만해달라는 마음으로 사탕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런 와중에도 차와 함께 사탕을 오물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 보여, 이연화는 그만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차라리 일이나 무공에 매진하는 편이 나았다.
해가 중천을 넘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을 즈음, 방다병과 이연화는 선화루 앞에서 적비성을 만났다. 아직 햇빛이 남은 시간이었으나 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자들의 유흥은 일찍부터 시작되기에, 거리는 이미 등으로 화려하게 밝혀져 있었다. 투실투실한 얼굴의 고씨 공자가 의아한 눈으로 방다병과 이연화를 보았다.
"저, 제가 들은 동행인은 선생 하나였는데...."
"내 일행이다. 함께 들어갈 테니 그리 알아라."
"아, 하지만...한 번에 세 명이나 데리고 들어가는 건 좀...."
고씨 공자가 난감한 미소를 띤 채 우물거렸다. 적비성이 가면 아래에서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성질대로 상대를 죽이거나 겁박했다간 계획이 틀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금원맹주는 아무 말 없이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본 고씨 공자의 얼굴이 잠깐 밝아졌다.
"제가 잘 말하면 문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들어간 후에는 제가 편의를 봐드리기 어려워요. 저도 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니까요."
"네가 편의를 봐줄 필요는 없다. 저 안에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적비성이 차갑게 대꾸했다. 고씨 공자는 약간 기분이 상한 눈치였으나, 별다른 반박 없이 일행을 데리고 선화루 입구를 향했다. 지배인과 과장된 인사를 나누고, 고씨는 지배인에게 자신이 새로 사귄 친구들이라며 세 사람을 소개했다. 수도에서 가장 큰 기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건물로 들어서면서, 방다병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여기 드나들 정도면 돈깨나 있는 공자일 텐데, 대체 대가를 얼마나 준 거야?"
"여기 드나들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또 그만큼 돈을 써야 하지. 가진 자도 늘 돈을 필요로 한다."
적비성이 대꾸했다. 이연화가 실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열린 공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루의 음인을 옆에 두고 술을 마시거나, 가벼운 노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외로는 문이 닫힌 여러 개의 별실이 보였는데, 아마도 많은 돈을 쓰는 자들을 위해 내어주는 사적 공간일 터였다. 기루의 한가운데에서, 한 무리의 악공들이 큰 무대에 앉아 흥겨운 곡조를 연주하던 참이었다. 적비성이 이연화와 방다병을 향해 건넸다.
"나는 비적단과 거래했다는 점원을 찾아볼 테니, 너희는 알아서 해라."
"난 신춘광이 어디 있는지 알아볼게. 아직 오기 전이라면, 평소 어디에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알아봐야지."
"음, 나는 예인들을 만나봐야겠어. 피해자들 중 자진한 사람이 이 기루에서 일하던 무희였다니,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중에 만나서 정보를 교환하기로 하지. 허튼짓 하지 마라, 이연화."
적비성이 단호한 눈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이연화가 매우 어안이벙벙하면서도 억울한 얼굴로 대거리하기 전, 금원맹주는 홱 발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졌다. 이연화가 방다병을 돌아보았을 때, 방다병은 적비성과 다르지만 사뭇 비슷한 눈빛을 띠고는 말했다.
"위험한 짓 하지 마, 이연화."
이연화는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자신의 죄업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그러나 그 감정을 설명하기 전, 방다병도 발길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 혼자 남은 이연화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이연화는 곧 어렵잖게 예인들의 대기실을 찾았다. 드러난 곳에 자리한 장소가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았으나, 지나가던 점원을 붙들고 '무희 중 누군가가 의원을 청했다' 말하자 답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안색까지 새파래진 것이, 아마 얼마 전 자진했다던 무희의 사건을 떠올린 듯했다. 점원은 오늘 공연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이연화에게 제발 잘 보아달라 신신당부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참 매정하군. 이연화는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이연화는 잠시 기척을 감추고 슬쩍 안을 살폈다.
일단의 무용수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붉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채 면사를 쓴 남녀들 중, 가장 가운데에 선 장신의 여자가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그 앞에는 비교적 작은 체구의 무희가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다. "죄송해요, 설약 언니. 취한 공자 하나를 뿌리치다가 발을 헛디뎌서...." 설약 언니라고 불린 사람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욕설을 씹어 뱉었다.
"대체 여기선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이 생기는 거야? 빨리 다른 곳과 계약하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 오는 손님들 질도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 아유가 그렇게 됐을 때 어떻게든 떴어야 하는데."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자, 이 소란과 동떨어진 채 구석에서 치장하던 한 무희가 움찔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연화가 살짝 기척을 내며 들어섰다. "누구냐!" 여자가 날카롭게 외치며 노려보았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이연화에게 쏠렸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모두 아름답게 세공된 검이 채워져 있었다. 이연화가 무해한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아, 저는 의원입니다. 지나가다가 소동이 들려 잠깐 들여다 보았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의원이라고요? 얼른 들어와요."
여자가 태세를 바꾸어 얼른 손짓했다. 이연화는 잠자코 안으로 들어가, 발을 다쳤다는 무희를 보아주었다. 꽤 부어오른 모양새를 보니, 설령 관하몽이 오더라도 오늘 당장 공연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진단을 전해주자, 설약이 이마를 짚은 채 초조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선 안 돼, 한 명이라도 빠지면 동선이 꼬인다고. 아무리 여랑이 화려한 춤사위를 보여도, 그 주변 사람들이 절도 있게 움직이지 못하면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선화루에 오는 관객들이 얼마나 깐깐한지 알아?"
"공연을 취소하거나 미루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이연화가 천진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묻자, 설약이 냉소했다.
"그럼 우리 쪽에서 위약금을 내야 해요. 보수가 센 만큼, 파토 냈을 때의 대가도 세죠."
"근처 기루에서 사람을 빌릴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 공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나 보군요. 단순히 춤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급히 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검을 다뤄요, 미약하나마 내력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요. 그래야 완성할 수 있는 무대거든요."
설약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용수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렸다. 그렇잖아도 최근 자진한 무희의 일로 한 차례 평판이 깎여 보수도 삭감되었는데, 오늘 공연까지 취소하게 된다면 사정이 더 어려워질 거라는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다친 여자는 사색이 되어 울며 떨고 있었다. 도무지 사건 해결을 위한 질문 따위를 하며 돌아다닐 분위기가 아니었다. 춤이라. 이연화가 눈가를 살짝 만졌다. 그들의 검과 면사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설약을 향해 슬쩍 건넸다.
"저, 설약 낭자. 어쩌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요?"
설약이 회의적인 눈으로 이연화를 훑어보았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예. 만일 제가 제대로 도움을 드린다면, 이 의원의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지요."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너, 허튼짓 하면 내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조심해."
"너보다는 이연화가 먼저 알겠지. 잠이나 자."
"부주의하게 냄새를 흘리거나 하는 것도 안 돼!"
"시끄럽다. 점혈하기 전에 입 좀 다물어."
"둘 다 시끄러워, 그리고 둘 다 조금 떨어져. 숨을 못 쉬겠다."
이연화가 투덜거리며 두 몸뚱이를 양옆으로 꾹 밀어냈다. 둘 모두 한 치 정도 순순히 물러났지만, 허리에 감긴 두 손은 풀리지 않았다. 이연화는 목석처럼 바른 자세로 천장을 향한 채 누웠다. 가슴에 양손을 잘 포개어 올려놓자 마치 관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기분이었다. 어느 쪽으로 돌아누워도 부적절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 됐지. 이제 눈 좀 붙이자."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 이연화는 눈을 감은 채 심신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한 사람을 위한 침상에 셋이 구겨져 있자니 미간을 좀처럼 펼 수가 없었다.
적비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엽 풀린 인형마냥 툭 잠이 들었고, 적비성처럼 한쪽 팔을 묶인 방다병은 몇 차례 뒤척이는 듯했으나 생각보다 이르게 잠들었다. 양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연화는 소리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남을 가운데에 끼워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놓고 자기들은 잠이 아주 잘 오신다 이거지. 스멀스멀 치미는 심화를 내리누르며, 이연화는 역시 이 두 개의 각인이 퍽 번거롭고도 난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일은 하루종일 피로할 각오를 해야 할 듯했다.
그 각오가 무색하도록, 이연화는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떴다.
나른하고 따뜻했다. 이연화는 잠의 여운이 남은 머리로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푹 쉬고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몸은, 아침의 선뜩한 기운이 아닌 더운 온기에 휩싸여 있었다. 숨쉬기가 약간 답답했지만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그 감촉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의 팔이 자신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아, 사람과 함께 있었구나. 이연화가 멍하게 생각했다. 약 따위에 당한 것이 아님에도, 바로 곁의 타인을 향해 금방 경계심이 올라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자고 싶네...뭔가 할 일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이연화가 웅얼거리듯 떠올렸다. 오래도록 경험하지 못한 노곤함이 반가웠다. 이연화는 오랜 떠돌이 생활로 어디서든 잠들 수 있었으나, 어디서도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했다. 몇 시진만 더 이렇게 잘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이연화의 귀로, 옷깃이 부스럭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다리가 자신의 다리 위에 턱 올라왔다. 하지만 딱히 불평할 만한 일도 아닌 것이, 이연화의 다리 한 쪽도 이미 다른 누군가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잠깐, 지금 나랑 자는 사람이 몇이야? 이연화의 눈이 살짝 열렸다. 눈앞으로 어두운 색깔의 옷감이 보였다. 누군가의 가슴팍이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가, 이연화는 놀란 소리를 겨우 참았다. 적비성의 얼굴이 과히 코앞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머리의 방향을 홱 틀었다가, 이연화는 또 짧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방다병의 얼굴도 지척이었다. 입을 살짝 벌린 모양새가, 정말 깊이 잠든 듯했다. 두 사람의 숨결이 목덜미와 귓전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말 그대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잠들기 전 거리를 두라며 밀어냈던 몸도 언제 붙었는지, 맞닿은 옷 너머로 두 명분의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개중 가장 시끄러워진 것은 자신의 심장박동이었다. 이연화는 이를 꽉 악문 채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죽여 숨을 골랐다. 어젯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한 발 늦게 떠올랐다. 어느새 방 안이 훤하게 밝아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잠든 거지? 이연화가 꿈틀거리자, 허리와 가슴팍에 감겼던 팔들이 더 단단해졌다. 이연화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잡혀 있으니 딱 그날이 떠오르는데...앗. 이연화가 순간 어색하게 경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상하기에는 참으로 부적절한 기억이 튀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려 했으나, 한 번 부주의하게 시작된 생각은 멈추지 않고 도리어 야속할 만큼 쭉쭉 뻗어 나갔다.
-이거...이거 꿈인가...?
-좋을 대로 생각해라.
-이연화, 아직도 아파?
-이상해, 기다려, 잠깐만-.
이연화는 드물게도 내적 고함을 질렀다. 상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자꾸 그날의 몇몇 장면이 선연해지면서, 아랫배가 간질거리고 입안이 말라 왔다. 그날 자신을 여러모로 더듬던 손길과 입술이 바로 곁에 있었다. 뜨겁다 못해 폭력적일 만큼 맹렬했던 순간을 외면하기 위해 애쓰며, 이연화는 이를 꽉 악문 채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양옆에서 끌어안은 손길이 마치 나무를 휘감아 자란 넝쿨처럼 들러붙어, 웬만해선 벗어나는 일은 고사하고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이놈들, 진짜! 이연화가 이를 득득 갈았다. 여러 이유로 열이 올라 뒷목이 뜨끈뜨끈했다. 원한마저 서린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다, 이연화는 곧 발에 공력을 집중해 단숨에 몸을 퉁겼다.
바닥으로 내려선 이연화가 호흡을 고르며 옷자락을 탁 당겼다. 어느새 벌게진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을 생각도 미처 들지 않았다. 가슴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탁자 앞에 털썩 앉아, 이연화는 차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무슨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파사보를 써야 돼?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지? 그래, 나 때문이지."
이연화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일부러 잡혀갔던 스스로가 참 원망스러워졌다. 갑자기 한 사람의 체온이 쑥 빠져나가자 영 불만스러웠는지, 남은 두 사람은 빈 옆자리를 더듬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연화는 차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서로를 찾아 붙들었을 때 그만 웃음을 참기 위해 황급히 입을 막았다. 퍽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숨을 들이마시다가, 두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후각으로 먼저 깨달았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이연화는 조금 전까지 불평하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꼴을 구경했다.
표정으로 끙끙거리던 두 사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와,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입술이라도 닿았겠어. 이연화가 흥미진진하게 생각했다. 조금 혼몽하게 뜨였던 두 쌍의 눈동자는, 상대의 정체와 그 거리를 인지하자마자 화들짝 커졌다. 적비성에게서 화다닥 멀어지며, 방다병이 품위 없는 비명을 꽥 질렀다.
"와아아악!"
적비성은 물러나다가 부딪힐 벽이 있었지만, 바깥쪽 자리를 차지했던 방다병에게는 벽이 없었다. 불쌍한 청년은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팔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두세 바퀴 데굴데굴 굴렀을지도 몰랐다. 이연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소리내어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바닥에 처박혔던 방다병이 억울한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 너 내가 머리를 박고 죽을 뻔한 게 그렇게 재미있어?"
"헛소리 마. 만인책에 오른 고수가, 침상에서 굴러 죽을 뻔할 리야 있겠어."
이연화가 살짝 배어나온 눈물을 훔치곤 손을 내저었다. 투덜대며 일어선 방다병이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빈말 아니야, 심장질환이 오는 줄 알았다고! 넌 언제 깬 거야?"
"나도 방금 일어났어."
이연화가 얄미울 만큼 태연하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좋지 못한 눈으로 이연화를 흘겨보고, 방다병은 손목을 묶었던 끈을 풀었다. 적비성은 바로 끈을 푸는 대신, 침상에 정자세로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그 표정이 어제에 비해 퍽 차분해 보였다. 차를 따라 쭉 들이킨 방다병이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물었다.
"이연화, 넌 잘 잤어?"
"평소랑 비슷하지 뭐. 너는?"
"음, 몸이 가벼워. 처음에 누웠을 땐 좁고 불편했는데, 엄청 깊이 잠들었지 뭐야. 묶인 팔이 좀 아픈 걸 빼곤 괜찮아."
방다병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팔을 돌리며 말했다. 이연화는 겉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적비성만큼 통증에 시달리진 않았겠지만, 방다병 역시 각인 상대와 원하는 만큼 붙어있지 못해 줄곧 결핍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나부터가 전에 없이 숙면했는데, 이 녀석도 비슷하겠지. 이연화가 어쩐지 착잡한 심정으로 찻잔을 채웠다.
"좋군. 드디어 내 몸 같아."
적비성이 짧고도 만족스럽게 평가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이연화가 영혼 없이 한쪽 입매를 끌어올리며 엄지를 슥 들었다. "잘됐네." 방다병의 잔을 빼앗아 차를 한 잔 마시고, 적비성은 코웃음과 함께 청년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끈을 더 짧게 매어야겠군. 너와 끌어안는 불상사를 다시 겪고 싶진 않으니."
"누가 할 말인데!"
방다병이 발끈해 마주 외쳤다. 다음이라니, 오늘도 셋이 자야 해? 이연화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 누군가가 창문을 작게 두드렸다. 적비성은 마치 이 집에 기거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고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창을 열었다. 무안의 모습이 보였다. 금원맹주의 측근은 놀란 눈으로 삼인방을 슬쩍 보고는, 곧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존상, 적당한 자를 하나 포섭했습니다. 고씨 집안의 삼남인데, 대가를 지불하면 본인과 동행해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알겠다. 미리 낯짝을 보아 두어야겠군. 이연화, 선화루 앞에서 만나자."
아무렇지 않게 건네고, 적비성은 어제보다 한결 편안해진 낯빛과 태도로 창을 넘어 사라졌다. 방다병이 침상과 이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 눈동자가 퍽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이연화, 아비가 자는 사이에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지?"
"네가 함께 있는데 무슨 짓을 했겠어. 잠결에 더듬을까봐 한쪽 손도 묶어놨잖아."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갈등하는 얼굴로 침묵하다가, 방다병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그...내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
"남일처럼 묻네, 방소보. 네가 무슨 짓을 했다면 스스로 알았겠지."
"물론 그런 기억은 없지만, 잠결에 혹시...혹시 모르잖아."
"잠결에 뭘. 민망한 꿈이라도 꿨어?"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놀리듯 묻자, 방다병의 귀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새빨개졌다. 앗, 진짜? 오히려 던진 쪽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아, 아니야!"
방다병이 버럭 외쳤다. 이연화는 내심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답게, 방다병은 갑작스러운 거짓말에 퍽 약한 편이었다. 어쨌든 별일이 없어 다행이라 꿍얼거리는 방다병에게, 이연화는 제발 이걸 먹고 말을 그만해달라는 마음으로 사탕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런 와중에도 차와 함께 사탕을 오물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 보여, 이연화는 그만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차라리 일이나 무공에 매진하는 편이 나았다.
해가 중천을 넘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을 즈음, 방다병과 이연화는 선화루 앞에서 적비성을 만났다. 아직 햇빛이 남은 시간이었으나 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자들의 유흥은 일찍부터 시작되기에, 거리는 이미 등으로 화려하게 밝혀져 있었다. 투실투실한 얼굴의 고씨 공자가 의아한 눈으로 방다병과 이연화를 보았다.
"저, 제가 들은 동행인은 선생 하나였는데...."
"내 일행이다. 함께 들어갈 테니 그리 알아라."
"아, 하지만...한 번에 세 명이나 데리고 들어가는 건 좀...."
고씨 공자가 난감한 미소를 띤 채 우물거렸다. 적비성이 가면 아래에서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성질대로 상대를 죽이거나 겁박했다간 계획이 틀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금원맹주는 아무 말 없이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본 고씨 공자의 얼굴이 잠깐 밝아졌다.
"제가 잘 말하면 문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들어간 후에는 제가 편의를 봐드리기 어려워요. 저도 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니까요."
"네가 편의를 봐줄 필요는 없다. 저 안에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적비성이 차갑게 대꾸했다. 고씨 공자는 약간 기분이 상한 눈치였으나, 별다른 반박 없이 일행을 데리고 선화루 입구를 향했다. 지배인과 과장된 인사를 나누고, 고씨는 지배인에게 자신이 새로 사귄 친구들이라며 세 사람을 소개했다. 수도에서 가장 큰 기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건물로 들어서면서, 방다병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여기 드나들 정도면 돈깨나 있는 공자일 텐데, 대체 대가를 얼마나 준 거야?"
"여기 드나들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또 그만큼 돈을 써야 하지. 가진 자도 늘 돈을 필요로 한다."
적비성이 대꾸했다. 이연화가 실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열린 공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루의 음인을 옆에 두고 술을 마시거나, 가벼운 노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외로는 문이 닫힌 여러 개의 별실이 보였는데, 아마도 많은 돈을 쓰는 자들을 위해 내어주는 사적 공간일 터였다. 기루의 한가운데에서, 한 무리의 악공들이 큰 무대에 앉아 흥겨운 곡조를 연주하던 참이었다. 적비성이 이연화와 방다병을 향해 건넸다.
"나는 비적단과 거래했다는 점원을 찾아볼 테니, 너희는 알아서 해라."
"난 신춘광이 어디 있는지 알아볼게. 아직 오기 전이라면, 평소 어디에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알아봐야지."
"음, 나는 예인들을 만나봐야겠어. 피해자들 중 자진한 사람이 이 기루에서 일하던 무희였다니,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중에 만나서 정보를 교환하기로 하지. 허튼짓 하지 마라, 이연화."
적비성이 단호한 눈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이연화가 매우 어안이벙벙하면서도 억울한 얼굴로 대거리하기 전, 금원맹주는 홱 발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졌다. 이연화가 방다병을 돌아보았을 때, 방다병은 적비성과 다르지만 사뭇 비슷한 눈빛을 띠고는 말했다.
"위험한 짓 하지 마, 이연화."
이연화는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자신의 죄업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그러나 그 감정을 설명하기 전, 방다병도 발길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 혼자 남은 이연화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이연화는 곧 어렵잖게 예인들의 대기실을 찾았다. 드러난 곳에 자리한 장소가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았으나, 지나가던 점원을 붙들고 '무희 중 누군가가 의원을 청했다' 말하자 답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안색까지 새파래진 것이, 아마 얼마 전 자진했다던 무희의 사건을 떠올린 듯했다. 점원은 오늘 공연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이연화에게 제발 잘 보아달라 신신당부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참 매정하군. 이연화는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이연화는 잠시 기척을 감추고 슬쩍 안을 살폈다.
일단의 무용수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붉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채 면사를 쓴 남녀들 중, 가장 가운데에 선 장신의 여자가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그 앞에는 비교적 작은 체구의 무희가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다. "죄송해요, 설약 언니. 취한 공자 하나를 뿌리치다가 발을 헛디뎌서...." 설약 언니라고 불린 사람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욕설을 씹어 뱉었다.
"대체 여기선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이 생기는 거야? 빨리 다른 곳과 계약하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 오는 손님들 질도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 아유가 그렇게 됐을 때 어떻게든 떴어야 하는데."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자, 이 소란과 동떨어진 채 구석에서 치장하던 한 무희가 움찔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연화가 살짝 기척을 내며 들어섰다. "누구냐!" 여자가 날카롭게 외치며 노려보았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이연화에게 쏠렸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모두 아름답게 세공된 검이 채워져 있었다. 이연화가 무해한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아, 저는 의원입니다. 지나가다가 소동이 들려 잠깐 들여다 보았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의원이라고요? 얼른 들어와요."
여자가 태세를 바꾸어 얼른 손짓했다. 이연화는 잠자코 안으로 들어가, 발을 다쳤다는 무희를 보아주었다. 꽤 부어오른 모양새를 보니, 설령 관하몽이 오더라도 오늘 당장 공연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진단을 전해주자, 설약이 이마를 짚은 채 초조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선 안 돼, 한 명이라도 빠지면 동선이 꼬인다고. 아무리 여랑이 화려한 춤사위를 보여도, 그 주변 사람들이 절도 있게 움직이지 못하면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선화루에 오는 관객들이 얼마나 깐깐한지 알아?"
"공연을 취소하거나 미루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이연화가 천진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묻자, 설약이 냉소했다.
"그럼 우리 쪽에서 위약금을 내야 해요. 보수가 센 만큼, 파토 냈을 때의 대가도 세죠."
"근처 기루에서 사람을 빌릴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 공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나 보군요. 단순히 춤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급히 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검을 다뤄요, 미약하나마 내력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요. 그래야 완성할 수 있는 무대거든요."
설약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용수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렸다. 그렇잖아도 최근 자진한 무희의 일로 한 차례 평판이 깎여 보수도 삭감되었는데, 오늘 공연까지 취소하게 된다면 사정이 더 어려워질 거라는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다친 여자는 사색이 되어 울며 떨고 있었다. 도무지 사건 해결을 위한 질문 따위를 하며 돌아다닐 분위기가 아니었다. 춤이라. 이연화가 눈가를 살짝 만졌다. 그들의 검과 면사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설약을 향해 슬쩍 건넸다.
"저, 설약 낭자. 어쩌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요?"
설약이 회의적인 눈으로 이연화를 훑어보았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예. 만일 제가 제대로 도움을 드린다면, 이 의원의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지요."
https://hygall.com/584223397
[Code: 892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