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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23:05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그보다, 비적단 이야기는 뭐야?"
이연화가 다가오는 태풍을 외면하는 사람처럼 물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찾는 물건에 관한 단서가 그 비적단과 이어져 있었어."
"뭐야, 그럼 정말 뭘 찾고 있던 거라고? 뭔데?"
방다병이 놀라 물었다. 이연화 역시 의아하게 상대를 보았다. 이제는 내력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텐데, 금원맹주가 각인통을 참으면서까지 찾아다닐 물건이 대체 뭐란 말인가? 적비성의 얼굴로 선연한 짜증이 배었다. 남자는 당장 눈앞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만으로 죽일 듯한 눈빛을 띤 채 씹어 뱉었다.
"약마의 물건들이야. 비급과 약재 같은 것들."
"약마? 잠깐, 누가 약마의 작업장을 털기라도 한 거야?"
방다병이 눈이 둥그레졌다. 적비성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별다른 숨김 없이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이 일은 적비성이 오랜만에 약마의 거처를 찾아간 날부터 시작되었다. 난데없는 각인통에 수면을 방해받아 매우 날카로워진 적비성은, 노인의 집으로 쳐들어가 이 귀찮은 통증을 없앨 만한 약을 내놓으라 명령했다. 하지만 약마는 여느 때처럼 어서 들어오라든가, 방법을 찾아보겠다든가 하는 말 대신 새파랗게 질려 쩔쩔매기 시작했다. 눈빛으로 다그치는 적비성에게, 노인은 더듬더듬 실토했다.
각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각인통만 흐려지게 만드는 약은 상당히 까다로운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어 달 전쯤 누군가가 자신의 작업장에 침입하여 여러 비급과 약재들을 훔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 도둑의 뒤를 쫓고 싶었으나, 아직 금원맹 내에 반란의 후유증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심화를 더해드리고 싶지 않아 본의 아니게 보고를 미루게 되었다. 비록 벽차지독의 제조법만큼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것들은 아니지만, 존상께서 원하시는 약을 만들려면 그자가 훔친 비급들 중 일부가 꼭 필요하다. 이야기를 듣던 이연화가 물었다.
"그래서, 도둑맞은 비급들이 뭔데?"
"사람의 여러 욕구와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가라앉히는 약에 대한 비급들을 골라 훔쳤다고 하더군."
"영약이나 극독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니, 특이하네. 훔쳐간 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약마는 아마도 심악 무생벽일 거라고 짐작했어."
"심악 무생벽?"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그 이름을 뱉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이며 돌아보았다. 강호 구석구석의 기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년은, 상황을 이해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으로 의심하기에 딱 좋은 사람이기는 하네."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만인책에서도 본 기억이 없는 이름이었다. 방다병이 이연화에게 설명했다.
"무생벽은 좀 특이해. 원래 약에 관심이 많은 자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는 일, 혹은 내력을 높이는 환단 같은 데에 집중하잖아? 하지만 무생벽은 인간의 정신에 집착하는 자야. 사람의 감정과 욕망, 의지를 자기 뜻대로 뒤흔드는 일에서 재미와 만족을 느끼지. 고아들을 데려가 실험 대상으로 썼던 적도 있는데, 나중에 풀려난 아이들이 증언했어. 어떨 때에는 하루종일 웃다가 쓰러지기도 했고, 어떨 때에는 너무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울다가 기절해서 거품을 물기도 했다고."
"심악이란 이름이 단순하지만 잘 어울리는 자네. 질이 나빠 보이는데, 백천원에서 그걸 그냥 두고 봤어?"
이연화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방다병이 못마땅한 한숨을 쉬었다.
"그게...무생벽은 가끔 불순한 약을 만들거나 소란을 일으키지만, 실제로 누굴 심하게 해치거나 죽인 적은 없어. 그때 실험 대상이 된 고아들에게도 정당한 보수를 지불한 거라고 했지. 말했잖아, 사람의 생사가 아니라 마음에 집착한다고. 결과만 놓고 보면 몸이 크게 상한 이가 없으니, 몇 차례 벌금조로 대가를 치른 적은 있어도 옥에 갇힐 정도의 형벌을 받지는 않았어. 그런 요사스런 연구를 지속하지 말라 경고를 받기는 했다지만, 그 말을 지켰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과거 몇 차례 약마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적도 있다더군. 약마는 제자나 후인 따위에 관심이 없으니, 아마 면박을 줘서 내쫓았겠지."
적비성이 냉소와 함께 덧붙였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생각에 잠겼던 이연화가 물었다.
"아비, 그 심악의 흔적이 여현 근처의 비적단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그래. 무생벽이 제조한 독이나 약 따위를 사들여, 인근의 여러 물밑 조직과 거래해 왔다고 했어. 무생벽의 소재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비교적 최근에도 비적단과 접촉한 적이 있다고 하니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
"이연화. 혹시...그 심악이 여현의 변고들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방다병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연화가 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까딱했다. 확언할 수는 없었으나, 기이한 약에 집착하는 악인의 이야기에는 어쩐지 신경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아직 두 현상을 엮을 근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 자의 행적과 여현이 겹친다는 건 주목할 만해. 일단 선화루에 가서 더 알아보자고."
"선화루?"
적비성이 눈썹을 꿈틀했다. 고개를 끄덕한 이연화가, 그들이 여현에 오게 된 대략적인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신춘광과 선화루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은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올리며 픽 웃었다. "공교롭군. 나도 거기에 들어갈 참이었다. 비적단 두목 놈이 말하길, 그곳 점원에게 무생벽의 약을 가장 많이 납품했다고 했거든." 이연화와 방다병이 시선을 교환했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앞뒤가 맞아드는 그림이었다. 방다병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런데, 아비. 넌 선화루에 어떻게 들어갈 작정이야? 듣자하니 거긴 지인의 소개로만 출입할 수 있다던데. 여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여긴 맹의 근거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다. 맹과 바로 접점이 있는 자는 없어."
"그러면 손님이 아니라 일꾼 따위로 위장할 셈이야?"
"그런 귀찮은 짓을 뭐하러 해. 무안에게 일을 맡겨두었다. 오늘 밤 선화루에 출입하는 놈들 중 적당한 자를 물색해서 협박하거나 포섭하라 일렀으니, 내일이면 거기 들어갈 수 있겠지."
"잘됐네, 그럼 우리도 그때 동행시켜 줘!"
방다병이 밝은 얼굴로 외쳤다. 적비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라니, 우리의 도움이 있으면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너희와 나의 목적은 동일하지 않아. 너희는 신가 놈을 쫓겠지만, 난 약마가 도난당한 물건에만 관심이 있다. 너희가 허튼 짓을 해서 이목을 끌면, 내 조사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
"왜 꼭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해?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면 서로에게 효율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는데, 꽉 막혀서는-."
"아비."
방다병의 퉁명스러운 말을 끊고, 이연화가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이연화를 향했다. 시선만 살짝 들어 적비성을 바라보며, 이연화는 연못에 조약돌을 던지듯이 툭 물었다.
"나랑 함께 자자며?"
적비성의 눈썹이 움찔했고, 방다병의 눈동자는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벌게진 청년은, 목소리를 낮추어 억눌린 고함처럼 말했다. "이연화! 너 지금 뭐랑 뭐를 바꾸려는 거야?"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 움직여 적비성을 가리켰다. 능청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방소보, 아비를 봐.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잖아. 나는 마음이 선한 사람이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냉정하게 외면할 수는 없지. 하지만 뭐, 만일 그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타인을 냉정하게 외면한다면...."
"알았다."
적비성이 주먹을 꽉 쥔 채 냉큼 대꾸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음, 잘됐네. 어떻게 함께 잘지는 내가 정할 거야."
"좋을 대로 해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라니, 그게 대체-."
"아, 그리고 아비. 내가 지금 방 어르신 댁에 머물고 있어. 방 공자의 안위가 염려되기도 하니, 잠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거든. 내 방 앞에 등불을 내놓을 테니까 알아서 찾아와."
"이연화! 너 지금 우리 당숙 어르신의 집에 대마두를 들이겠다는 거야?"
방다병은 세상이 반쯤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이연화가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대꾸했다.
"방다병, 그럼 나랑 아비만 밖에서 자고 들어가란 말이야? 그래도 되겠어? 어쨌든 우리 중 누군가가 운일 공자를 근처에서 지켜보긴 해야 할 거 아니야. 아까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야. 공자의 기력이 워낙 쇠해 있으니, 만일 위험한 상황이 되면 다시 내력을 넣어줘야 해."
"하지만, 하지만-둘만 그러는 건 안 돼!"
"정 걱정되면 네가 틈틈이 들여다보든가. 난 결정했으니 알아서 해."
대충 손을 내저으며 귀찮은 투로 이야기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연화!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방다병이 분연히 일어나 그 뒤를 따라왔다. 적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 꼴을 지켜보다가, 이연화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깨너머로 그 모습을 힐끗 확인한 이연화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각인이란 이래저래 예측 불가능하고 골치아픈 일이었다.
"적 맹주. 넌 정말 이걸 끊을 생각이 없어?"
그날 저녁, 적비성은 해가 지자마자 귀신처럼 정확하게 이연화의 방을 찾았다. 이연화가 다짜고짜 던진 질문에, 금원맹주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팔짱을 끼었다. 바보를 타박하는 시선이 날아왔다. 이연화가 회의적인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불편할 거 아니야. 너 같은 고수가 두통 따위에 괴로워한다는 게 싫지 않아?"
"귀찮을 뿐이지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네가 방다병과 단둘이 각인을 유지하는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넌 전부터 왜 내가 방다병을 못 떨쳐낼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나 그 녀석 버리고 도망친 적 많아. 뭐, 아주 잘한 짓은 아니지만."
이연화가 입맛을 다시며 덧붙였다. 비록 당시에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해도, 한참 어리고 순수한 청년의 뒤통수를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 연달아 쳤던 기억은 별로 자랑스럽지 않았다.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비뚤게 올리며 비웃었다. "그래, 하지만 넌 여전히 그 녀석에게 붙들려 있지."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연화는 잠시 말을 잃고 상대를 흘겨보다 침대를 탁 두드리며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와서 눕기나 해."
적비성은 전혀 사양하지 않았다. 겉옷을 휙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고, 금원맹주는 침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양손이 이연화의 어깨를 향해 올라왔다. 억센 힘에 붙들리기 전에, 이연화는 한 손을 들어 그 코앞으로 쑥 들이밀었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그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튼튼한 흰색 천으로 된 끈이었다. 이연화가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건넸다.
"나랑 자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엉켜서 뒹굴잔 얘긴 아냐. 그러니, 자. 묶어. 여차하면 너만 남겨두고 나갈 거야."
적비성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군말 없이 끈을 탁 낚아챘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다툼을 예상했던 이연화가 놀라 눈썹을 들었다. 한쪽 팔뚝에 덤덤히 끈을 매던 적비성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지?"
"음, 이렇게 순순히 따라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객잔에서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적비성이 끈의 한쪽 끝을 침상에 바짝 묶으며 대꾸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그랬어?"
"아무리 교활한 사기꾼처럼 굴 때가 많다 해도, 넌 결국 최소한의 법도와 예를 따지는 정파인이지. 방다병의 당숙이 사는 집에서 나와 정사를 치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또한 각인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만일 마음을 굳힌 거라면 객잔에서 그리 가벼운 투로 말하지 않았겠지. 방다병에게 감히 여길 들여다보란 소리도 안 했을 테고."
"너는 가끔 보면, 무뚝뚝한 데 비해 꽤 날카로운 편이란 말이야."
"알아차리는 것과 그에 맞춰 행동하는 건 다른 일이니까. 가까이 와."
적비성이 이연화의 팔을 잡았다. 끌어당기는 힘에 크게 저항하지 않고, 이연화는 상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차마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은 없어 등을 돌리자, 묶이지 않은 손이 허리를 턱 감아 왔다. 어쩐지 살짝 말라 오는 입안을 훑으며, 이연화는 한 손을 내저어 방의 등불을 껐다. 밝은 가운데 자신의 몸에 얹힌 적비성의 손을 보자니 영 기분이 이상해서였으나, 그 또한 썩 좋은 선택지는 되지 못했다. 어둠이 내려앉자 다른 감각들이 한층 예민해진 탓이었다. 등 뒤편에서 상대의 숨소리와 심장박동뿐 아니라, 뜨끈한 체열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조금 더 집중하면, 맞닿은 몸을 통해 상대의 내력까지도 감지될 판이었다. 그 존재감이 무서우리만치 강렬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이연화는 과히 긴장하지 않으려 매우 애를 썼다. 이런 상황에서 무안하거나 어색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연화는 언제나 천연덕스럽고 뻔뻔하며, 좀처럼 부끄러워하거나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껏 노력하여 만들어낸 이연화란 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평온해지기가 어려웠다. 방에는 둘뿐이었고, 등 뒤에 누운 사람은 자신과 최근 각인한 양인인 동시에 적비성이었다. 이 사실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놈이야말로 미친 거 아닌가? 이연화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만 풀어라."
"뭐?"
등 뒤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연화는 흠칫 놀라 물으며 어깨너머를 돌아보았다. 굳게 눈을 감은 적비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체취. 조금만 풀어."
"이런 상황에서?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이 빌어먹을 두통 때문에 며칠을 내리 못 잤다."
적비성이 미간을 심히 구긴 채 낮게 말했다. 이연화는 미심쩍은 의혹과 약간의 연민을 섞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삼키며 체취를 약간 흘려보냈다. 스스로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연꽃 냄새가 엷게 퍼지자, 적비성의 미간에 생겼던 골이 스르르 펴졌다. 남자는 수면향이나 안신향이라도 맡은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는, 이내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연화가 크게 뜬 눈을 깜박였다. 잠든 건가? 이렇게 빨리? 이연화가 그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을 새삼스레 뜯어보다, 이연화는 순간 긴장해 문간을 돌아보았다.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진 탓이었다.
"아비, 이봐, 아비."
이연화가 허리를 감은 손을 탁탁 두드리며 소곤거리듯 불렀다. 그러나 금원맹주는 손을 떼고 어딘가로 숨는 대신,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주어 이연화를 끌어당겼다. 순간 뒷목으로 와 닿은 코와 입술, 들이마시는 숨결에 등골이 쭈뼛했다. 발소리가 문앞에 다다라 멈추었을 때, 이연화는 조금 당혹해 적비성의 배를 팔꿈치로 세게 찔렀다.
"잠깐 정신차려 봐, 밖에-."
"됐다. 지금 올 놈이라곤 하나밖에 없어."
적비성이 수면욕에 온통 잠긴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연화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처소 문이 벌컥 열렸다. "이연화!" 달빛을 등진 채, 방다병이 숨을 몰아쉬며 소리죽여 외쳤다. 아, 그렇지. 하나밖에 없지. 이연화가 끙 소리를 삼키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적비성의 팔에 매인 끈을 가리키며 '진정하고 잘 봐, 별일 없지?'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방다병은 전혀 진정하지 못한 얼굴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뭐야, 왜 별일 없는 걸 확인하고도 안 나가지? 이연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방다병을 훑어보았다. 기이하게도, 청년은 한 손에 베개를 들고 있었다. 상대가 지금 몽유 중인지 의심하던 이연화가 낮게 물었다.
"방소보, 무슨 일-."
"나도 같이 잘 거야."
방다병이 잔뜩 힘을 준 표정과 어조로 선언했다.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뭐?"
"나도 각인통 있어!"
"네가 무슨 각인통이 있어, 나한테 한 번도 그런 얘기한 적 없었잖아."
"이...있어! 네가 괜히 부담스러워할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야."
방다병이 시선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이연화는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드물게도 금방 판별하지 못하고 아연해졌다. 진실이어도 방다병다웠고, 거짓이어도 방다병다웠다. 등 뒤에서 적비성의 낮은 코웃음이 들려왔다. 물론 어떤 이유로든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이연화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말다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어쩐지 승리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잘 들지 않았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그보다, 비적단 이야기는 뭐야?"
이연화가 다가오는 태풍을 외면하는 사람처럼 물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찾는 물건에 관한 단서가 그 비적단과 이어져 있었어."
"뭐야, 그럼 정말 뭘 찾고 있던 거라고? 뭔데?"
방다병이 놀라 물었다. 이연화 역시 의아하게 상대를 보았다. 이제는 내력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텐데, 금원맹주가 각인통을 참으면서까지 찾아다닐 물건이 대체 뭐란 말인가? 적비성의 얼굴로 선연한 짜증이 배었다. 남자는 당장 눈앞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만으로 죽일 듯한 눈빛을 띤 채 씹어 뱉었다.
"약마의 물건들이야. 비급과 약재 같은 것들."
"약마? 잠깐, 누가 약마의 작업장을 털기라도 한 거야?"
방다병이 눈이 둥그레졌다. 적비성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별다른 숨김 없이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이 일은 적비성이 오랜만에 약마의 거처를 찾아간 날부터 시작되었다. 난데없는 각인통에 수면을 방해받아 매우 날카로워진 적비성은, 노인의 집으로 쳐들어가 이 귀찮은 통증을 없앨 만한 약을 내놓으라 명령했다. 하지만 약마는 여느 때처럼 어서 들어오라든가, 방법을 찾아보겠다든가 하는 말 대신 새파랗게 질려 쩔쩔매기 시작했다. 눈빛으로 다그치는 적비성에게, 노인은 더듬더듬 실토했다.
각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각인통만 흐려지게 만드는 약은 상당히 까다로운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어 달 전쯤 누군가가 자신의 작업장에 침입하여 여러 비급과 약재들을 훔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 도둑의 뒤를 쫓고 싶었으나, 아직 금원맹 내에 반란의 후유증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심화를 더해드리고 싶지 않아 본의 아니게 보고를 미루게 되었다. 비록 벽차지독의 제조법만큼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것들은 아니지만, 존상께서 원하시는 약을 만들려면 그자가 훔친 비급들 중 일부가 꼭 필요하다. 이야기를 듣던 이연화가 물었다.
"그래서, 도둑맞은 비급들이 뭔데?"
"사람의 여러 욕구와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가라앉히는 약에 대한 비급들을 골라 훔쳤다고 하더군."
"영약이나 극독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니, 특이하네. 훔쳐간 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약마는 아마도 심악 무생벽일 거라고 짐작했어."
"심악 무생벽?"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그 이름을 뱉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이며 돌아보았다. 강호 구석구석의 기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년은, 상황을 이해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으로 의심하기에 딱 좋은 사람이기는 하네."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만인책에서도 본 기억이 없는 이름이었다. 방다병이 이연화에게 설명했다.
"무생벽은 좀 특이해. 원래 약에 관심이 많은 자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는 일, 혹은 내력을 높이는 환단 같은 데에 집중하잖아? 하지만 무생벽은 인간의 정신에 집착하는 자야. 사람의 감정과 욕망, 의지를 자기 뜻대로 뒤흔드는 일에서 재미와 만족을 느끼지. 고아들을 데려가 실험 대상으로 썼던 적도 있는데, 나중에 풀려난 아이들이 증언했어. 어떨 때에는 하루종일 웃다가 쓰러지기도 했고, 어떨 때에는 너무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울다가 기절해서 거품을 물기도 했다고."
"심악이란 이름이 단순하지만 잘 어울리는 자네. 질이 나빠 보이는데, 백천원에서 그걸 그냥 두고 봤어?"
이연화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방다병이 못마땅한 한숨을 쉬었다.
"그게...무생벽은 가끔 불순한 약을 만들거나 소란을 일으키지만, 실제로 누굴 심하게 해치거나 죽인 적은 없어. 그때 실험 대상이 된 고아들에게도 정당한 보수를 지불한 거라고 했지. 말했잖아, 사람의 생사가 아니라 마음에 집착한다고. 결과만 놓고 보면 몸이 크게 상한 이가 없으니, 몇 차례 벌금조로 대가를 치른 적은 있어도 옥에 갇힐 정도의 형벌을 받지는 않았어. 그런 요사스런 연구를 지속하지 말라 경고를 받기는 했다지만, 그 말을 지켰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과거 몇 차례 약마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적도 있다더군. 약마는 제자나 후인 따위에 관심이 없으니, 아마 면박을 줘서 내쫓았겠지."
적비성이 냉소와 함께 덧붙였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생각에 잠겼던 이연화가 물었다.
"아비, 그 심악의 흔적이 여현 근처의 비적단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그래. 무생벽이 제조한 독이나 약 따위를 사들여, 인근의 여러 물밑 조직과 거래해 왔다고 했어. 무생벽의 소재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비교적 최근에도 비적단과 접촉한 적이 있다고 하니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
"이연화. 혹시...그 심악이 여현의 변고들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방다병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연화가 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까딱했다. 확언할 수는 없었으나, 기이한 약에 집착하는 악인의 이야기에는 어쩐지 신경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아직 두 현상을 엮을 근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 자의 행적과 여현이 겹친다는 건 주목할 만해. 일단 선화루에 가서 더 알아보자고."
"선화루?"
적비성이 눈썹을 꿈틀했다. 고개를 끄덕한 이연화가, 그들이 여현에 오게 된 대략적인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신춘광과 선화루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은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올리며 픽 웃었다. "공교롭군. 나도 거기에 들어갈 참이었다. 비적단 두목 놈이 말하길, 그곳 점원에게 무생벽의 약을 가장 많이 납품했다고 했거든." 이연화와 방다병이 시선을 교환했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앞뒤가 맞아드는 그림이었다. 방다병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런데, 아비. 넌 선화루에 어떻게 들어갈 작정이야? 듣자하니 거긴 지인의 소개로만 출입할 수 있다던데. 여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여긴 맹의 근거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다. 맹과 바로 접점이 있는 자는 없어."
"그러면 손님이 아니라 일꾼 따위로 위장할 셈이야?"
"그런 귀찮은 짓을 뭐하러 해. 무안에게 일을 맡겨두었다. 오늘 밤 선화루에 출입하는 놈들 중 적당한 자를 물색해서 협박하거나 포섭하라 일렀으니, 내일이면 거기 들어갈 수 있겠지."
"잘됐네, 그럼 우리도 그때 동행시켜 줘!"
방다병이 밝은 얼굴로 외쳤다. 적비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라니, 우리의 도움이 있으면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너희와 나의 목적은 동일하지 않아. 너희는 신가 놈을 쫓겠지만, 난 약마가 도난당한 물건에만 관심이 있다. 너희가 허튼 짓을 해서 이목을 끌면, 내 조사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
"왜 꼭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해?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면 서로에게 효율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는데, 꽉 막혀서는-."
"아비."
방다병의 퉁명스러운 말을 끊고, 이연화가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이연화를 향했다. 시선만 살짝 들어 적비성을 바라보며, 이연화는 연못에 조약돌을 던지듯이 툭 물었다.
"나랑 함께 자자며?"
적비성의 눈썹이 움찔했고, 방다병의 눈동자는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벌게진 청년은, 목소리를 낮추어 억눌린 고함처럼 말했다. "이연화! 너 지금 뭐랑 뭐를 바꾸려는 거야?"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 움직여 적비성을 가리켰다. 능청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방소보, 아비를 봐.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잖아. 나는 마음이 선한 사람이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냉정하게 외면할 수는 없지. 하지만 뭐, 만일 그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타인을 냉정하게 외면한다면...."
"알았다."
적비성이 주먹을 꽉 쥔 채 냉큼 대꾸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음, 잘됐네. 어떻게 함께 잘지는 내가 정할 거야."
"좋을 대로 해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라니, 그게 대체-."
"아, 그리고 아비. 내가 지금 방 어르신 댁에 머물고 있어. 방 공자의 안위가 염려되기도 하니, 잠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거든. 내 방 앞에 등불을 내놓을 테니까 알아서 찾아와."
"이연화! 너 지금 우리 당숙 어르신의 집에 대마두를 들이겠다는 거야?"
방다병은 세상이 반쯤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이연화가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대꾸했다.
"방다병, 그럼 나랑 아비만 밖에서 자고 들어가란 말이야? 그래도 되겠어? 어쨌든 우리 중 누군가가 운일 공자를 근처에서 지켜보긴 해야 할 거 아니야. 아까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야. 공자의 기력이 워낙 쇠해 있으니, 만일 위험한 상황이 되면 다시 내력을 넣어줘야 해."
"하지만, 하지만-둘만 그러는 건 안 돼!"
"정 걱정되면 네가 틈틈이 들여다보든가. 난 결정했으니 알아서 해."
대충 손을 내저으며 귀찮은 투로 이야기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연화!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방다병이 분연히 일어나 그 뒤를 따라왔다. 적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 꼴을 지켜보다가, 이연화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깨너머로 그 모습을 힐끗 확인한 이연화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각인이란 이래저래 예측 불가능하고 골치아픈 일이었다.
"적 맹주. 넌 정말 이걸 끊을 생각이 없어?"
그날 저녁, 적비성은 해가 지자마자 귀신처럼 정확하게 이연화의 방을 찾았다. 이연화가 다짜고짜 던진 질문에, 금원맹주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팔짱을 끼었다. 바보를 타박하는 시선이 날아왔다. 이연화가 회의적인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불편할 거 아니야. 너 같은 고수가 두통 따위에 괴로워한다는 게 싫지 않아?"
"귀찮을 뿐이지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네가 방다병과 단둘이 각인을 유지하는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넌 전부터 왜 내가 방다병을 못 떨쳐낼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나 그 녀석 버리고 도망친 적 많아. 뭐, 아주 잘한 짓은 아니지만."
이연화가 입맛을 다시며 덧붙였다. 비록 당시에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해도, 한참 어리고 순수한 청년의 뒤통수를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 연달아 쳤던 기억은 별로 자랑스럽지 않았다.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비뚤게 올리며 비웃었다. "그래, 하지만 넌 여전히 그 녀석에게 붙들려 있지."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연화는 잠시 말을 잃고 상대를 흘겨보다 침대를 탁 두드리며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와서 눕기나 해."
적비성은 전혀 사양하지 않았다. 겉옷을 휙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고, 금원맹주는 침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양손이 이연화의 어깨를 향해 올라왔다. 억센 힘에 붙들리기 전에, 이연화는 한 손을 들어 그 코앞으로 쑥 들이밀었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그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튼튼한 흰색 천으로 된 끈이었다. 이연화가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건넸다.
"나랑 자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엉켜서 뒹굴잔 얘긴 아냐. 그러니, 자. 묶어. 여차하면 너만 남겨두고 나갈 거야."
적비성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군말 없이 끈을 탁 낚아챘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다툼을 예상했던 이연화가 놀라 눈썹을 들었다. 한쪽 팔뚝에 덤덤히 끈을 매던 적비성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지?"
"음, 이렇게 순순히 따라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객잔에서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적비성이 끈의 한쪽 끝을 침상에 바짝 묶으며 대꾸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그랬어?"
"아무리 교활한 사기꾼처럼 굴 때가 많다 해도, 넌 결국 최소한의 법도와 예를 따지는 정파인이지. 방다병의 당숙이 사는 집에서 나와 정사를 치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또한 각인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만일 마음을 굳힌 거라면 객잔에서 그리 가벼운 투로 말하지 않았겠지. 방다병에게 감히 여길 들여다보란 소리도 안 했을 테고."
"너는 가끔 보면, 무뚝뚝한 데 비해 꽤 날카로운 편이란 말이야."
"알아차리는 것과 그에 맞춰 행동하는 건 다른 일이니까. 가까이 와."
적비성이 이연화의 팔을 잡았다. 끌어당기는 힘에 크게 저항하지 않고, 이연화는 상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차마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은 없어 등을 돌리자, 묶이지 않은 손이 허리를 턱 감아 왔다. 어쩐지 살짝 말라 오는 입안을 훑으며, 이연화는 한 손을 내저어 방의 등불을 껐다. 밝은 가운데 자신의 몸에 얹힌 적비성의 손을 보자니 영 기분이 이상해서였으나, 그 또한 썩 좋은 선택지는 되지 못했다. 어둠이 내려앉자 다른 감각들이 한층 예민해진 탓이었다. 등 뒤편에서 상대의 숨소리와 심장박동뿐 아니라, 뜨끈한 체열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조금 더 집중하면, 맞닿은 몸을 통해 상대의 내력까지도 감지될 판이었다. 그 존재감이 무서우리만치 강렬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이연화는 과히 긴장하지 않으려 매우 애를 썼다. 이런 상황에서 무안하거나 어색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연화는 언제나 천연덕스럽고 뻔뻔하며, 좀처럼 부끄러워하거나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껏 노력하여 만들어낸 이연화란 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평온해지기가 어려웠다. 방에는 둘뿐이었고, 등 뒤에 누운 사람은 자신과 최근 각인한 양인인 동시에 적비성이었다. 이 사실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놈이야말로 미친 거 아닌가? 이연화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만 풀어라."
"뭐?"
등 뒤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연화는 흠칫 놀라 물으며 어깨너머를 돌아보았다. 굳게 눈을 감은 적비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체취. 조금만 풀어."
"이런 상황에서?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이 빌어먹을 두통 때문에 며칠을 내리 못 잤다."
적비성이 미간을 심히 구긴 채 낮게 말했다. 이연화는 미심쩍은 의혹과 약간의 연민을 섞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삼키며 체취를 약간 흘려보냈다. 스스로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연꽃 냄새가 엷게 퍼지자, 적비성의 미간에 생겼던 골이 스르르 펴졌다. 남자는 수면향이나 안신향이라도 맡은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는, 이내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연화가 크게 뜬 눈을 깜박였다. 잠든 건가? 이렇게 빨리? 이연화가 그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을 새삼스레 뜯어보다, 이연화는 순간 긴장해 문간을 돌아보았다.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진 탓이었다.
"아비, 이봐, 아비."
이연화가 허리를 감은 손을 탁탁 두드리며 소곤거리듯 불렀다. 그러나 금원맹주는 손을 떼고 어딘가로 숨는 대신,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주어 이연화를 끌어당겼다. 순간 뒷목으로 와 닿은 코와 입술, 들이마시는 숨결에 등골이 쭈뼛했다. 발소리가 문앞에 다다라 멈추었을 때, 이연화는 조금 당혹해 적비성의 배를 팔꿈치로 세게 찔렀다.
"잠깐 정신차려 봐, 밖에-."
"됐다. 지금 올 놈이라곤 하나밖에 없어."
적비성이 수면욕에 온통 잠긴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연화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처소 문이 벌컥 열렸다. "이연화!" 달빛을 등진 채, 방다병이 숨을 몰아쉬며 소리죽여 외쳤다. 아, 그렇지. 하나밖에 없지. 이연화가 끙 소리를 삼키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적비성의 팔에 매인 끈을 가리키며 '진정하고 잘 봐, 별일 없지?'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방다병은 전혀 진정하지 못한 얼굴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뭐야, 왜 별일 없는 걸 확인하고도 안 나가지? 이연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방다병을 훑어보았다. 기이하게도, 청년은 한 손에 베개를 들고 있었다. 상대가 지금 몽유 중인지 의심하던 이연화가 낮게 물었다.
"방소보, 무슨 일-."
"나도 같이 잘 거야."
방다병이 잔뜩 힘을 준 표정과 어조로 선언했다.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뭐?"
"나도 각인통 있어!"
"네가 무슨 각인통이 있어, 나한테 한 번도 그런 얘기한 적 없었잖아."
"이...있어! 네가 괜히 부담스러워할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야."
방다병이 시선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이연화는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드물게도 금방 판별하지 못하고 아연해졌다. 진실이어도 방다병다웠고, 거짓이어도 방다병다웠다. 등 뒤에서 적비성의 낮은 코웃음이 들려왔다. 물론 어떤 이유로든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이연화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말다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어쩐지 승리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잘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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