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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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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도 넘어 오시에 이르자 위무선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에서 내려서는 첫 발에 바로 와삭 하고 종이가 밟혔다. 바닥은 어젯밤 열심히 베껴서 널어놓은 검은 글자들로 빽빽했다.
그래도 아직 <예측편>의 벌은 10회도 넘게 남아 있었다. 어제도 남망기가 엄하게 재촉하는 바람에 억지로 써 보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아무튼 이 과제를 달성하기만 하면 운심부지처의 위업으로 길이길이 남을 테니 자랑스러워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위무선은 주섬주섬 종이를 주워서 침상에서 문까지 길을 낸 다음 밖으로 나갔다. 햇빛이 마구 쏟아져 눈살이 찌푸려졌고, 또다시 쓰디쓴 남씨의 밥을 먹을 생각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위무선은 근처의 복숭아밭을 살펴보고 몰래 복숭아 몇개를 딴 다음 고목 위로 올라갔다. 높은 가지 위는 지열이 올라오지 않고 나뭇잎이 우거져서 한결 시원했다. 기분 좋게 복숭아를 베어 무니 달콤한 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남잠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겠지?’
남망기는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다. 위무선에게 다시 손을 대는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는 걸 서로가 절절이 느끼고 있었다.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두근거려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내도 좋을 것 같았다.
복숭아 씨를 던져버리고 새 것을 물었을 때 갑자기 쨍 쨍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니 소리가 뒤쪽에서 나는 것 같아서 나뭇가지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자리를 이동했다.
‘아니, 택무군과 염방존이 싸우고 있어?’
자세히 보니 남희신이 옅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하. 비무를 하는 거군.’
위무선은 굵은 나뭇가지 위에 편하게 엎드려서 구경했다.
사일지정 때에는 온갖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싸웠으므로 남희신의 검법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새삼 놀라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소문으로만 듣던 금광요의 한생은 과연 볼만한 만한 가치가 있었다.
처음에는 금광요도 정도로써 대결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겸손하게 굴다간 십여 초도 못 가서 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희신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나 그렇게 빨리 무릎 꿇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갈수록 몸짓이 현란해지며 채찍같은 검날이 예고도 없이 사방에서 치솟았다.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비무에 위무선은 입에 든 것을 씹는 것도 잊고 말았다.
‘염방존의 한생이 기상천외하다더니 정말이네. 저러면 매 초가 기습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택무군은 왜 왼손을 쓰지 않지? 아아. 한 수 접어주시는 모양이군.’
한생은 귀신같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습성 때문에 어지간한 고수가 상대해도 애를 먹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남희신의 삭월은 단순한 영력과 속도만으로도 여유있게 막아내며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명불허전 택무군. 역시 진정한 고수 앞에선 잔기술도 소용이 없구나. 아. 나는 금단을 맺기도 바빠 죽겠는데.”
위무선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지 정말로 속이 상한 건 아니었다. 원래가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금단을 다시 얻은 것만도 기적이라는 걸 잘 알았다.
더구나, 누가 찾아준 소중한 금단인데.
위무선은 습관처럼 톡톡, 배를 두드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금광요는 끝이 뻔한 승부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도 받아내는 사람과 검을 주고받는 것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것처럼 즐거운 행위였다.
그래도 이만해 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1초를 찌르는데, 상대를 너무 믿은 나머지 부지불식간에 인정사정 없는 살초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등을 보이는 듯하다가 별안간 코 앞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은 절묘했으나 남희신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금광요의 얼굴이 보이자 그대로 튕겨냈다간 그를 다치게 할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리며 회피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깃이 찢어지며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다음에야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형님!”
깜짝 놀란 금광요가 재빨리 검을 말아 넣으며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형님.”
남희신이 웃으며 삭월을 집어넣었다.
“이런 재미를 보자고 하는 것인데 죄송할 게 다 뭐냐. 정말 재미있었다. 솜씨가 대단하구나, 아요.”
“아닙니다. 형님께서 사정을 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무를 하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남희신이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시간이 나도 산책을 하거나 금을 타는 게 고작이라, 금광요의 기분이 더 처지지나 않을까 남희신은 두루 궁리를 했다. 그러다가 아예 운심부지처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 싶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형님을 뵈러 가 볼까 하는데, 함께 가겠느냐?”
“부정세에 가시는 겁니까?”
“그래. 큰형님을 뵌 지도 오래 되었으니.”
예전에는 섭명결이 불신의 눈초리로 감시하는 것이 불편했었다. 사실 그의 의심이 타당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지만 그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었다. 금광요는 이미 몇 년 동안 주기적으로 부정세를 방문해 왔으며, 그 동안 섭명결의 태도도 많이 누그러들었다.
금광요는 세속에 대한 욕심은 다 잊어버렸지만 남희신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속한 세계와의 유대는 끊지 않을 셈이었다. 계속해서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를 공정하게 왕복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또한,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는 일이니, 언제나 권력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이로웠다.
***
섭회상은 책을 무더기로 끌어안고 신이 나서 종종걸음을 쳤다.
섭명결이 며칠째 자리를 비운 덕에 눈치를 보느라고 못했던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중이었다. 오늘은 방에 책장을 하나 더 넣었고 숨겨 두었던 서책들을 손수 옮기고 있었다. 그러느라 좀처럼 땀 흘리는 일이 없던 얼굴에 일꾼의 보람이 가득했다.
“소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귀찮아하던 섭회상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희신 형님, 광요 형님!”
섭회상은 책을 내려놓고 얼른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웬일이세요? 두 분이 함께?”
“오랜만에 들러 보았단다. 큰형님께서는?”
“형님은 출타중이신데요.”
“저런.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더니 이렇게 됐구나.”
섭회상은 금광요가 부채함을 내밀자 얼른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채의진의 우아한 신품이 놓여 있었으니, 이 이상 기쁠 수가 없었다.
“아마 앞으로 하루이틀이면 돌아오실 거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잠시 후 하인들이 시원한 정자에 상을 차렸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 섭회상이 물었다.
“그런데 희신 형님. 위형은 대체 운심부지처에서 뭘 하는 거에요? 아직도 머무르고 있어요?”
남희신이 대답하기 어려워하자 금광요가 웃으면서 대신 말을 받았다.
“위공자는 망기와 친하니까 언제까지 있어도 이상할 것 없지.”
섭회상이 벌레라도 밟은 듯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위형이 진짜로 함광군과 친하다고요? 말도 안 돼.”
“말이 안 될 게 뭐 있느냐?”
“친하다는 건 우선 두 사람의 취미가 맞아야 하는 거라고요. 위형이 함광군이랑 대체 뭘 할 수 있는데요? 서책 베끼기? 아니면 함광군이 위형이랑 물고기라도 잡아요?”
남희신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으나 섭회상이 진지하게 쳐다보자 말문이 막혔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역시 위무선이 남망기를 은근히 괴롭히는 걸로 재미를 보고 있는 거라고, 섭회상은 그를 위해 묵념을 했다.
‘위형이 술병 들고 운심부지처 담을 넘었을 때 그냥 넘어가 줬으면 이렇게 오래도록 고생하진 않았을 텐데. 애주가의 원한은 크고 깊구나.’
섭명결은 다음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란 후에는 피바다가 된 전쟁터가 많아서 이후로 요괴나 흉시, 악령이 출몰하는 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몇 년이 흐르며 많이 줄어들었다.
“야렵이 이렇게 오래 걸릴 리 없을 텐데. 그것도 큰형님의 실력에...”
섭회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처에 분가가 많으니 들렀다 오실 거에요. 큰형님께서는 사람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 한 번 나가시면 한꺼번에 돌아보고 오실 때가 많으니까요.”
섭회상은 아무쪼록 섭명결이 더 늦게 오길 바랬다. 남희신과, 특히 금광요를 오래도록 붙들어 놓고 싶었다. 다행히 그들은 섭명결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것 같았다.
“소공자님!”
섭회상은 익숙한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듣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인이 아닌 총령이 자신을 찾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과연 총령이 급한 일을 전했다.
“서쪽 야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요수가 나타나서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섭회상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어떻게 하긴 내가 어떻게 해? 곧 형님께서 오실 테니 형님께 말하라고.”
“그렇지만 종주님께서 언제 오실까요? 요수가 마을까지 내려왔다고 당장 도와 달라고 합니다만.”
“몰라, 몰라! 기다리라고 해!”
섭회상은 마구 팔을 저으며 듣기 싫다는 듯 어린애처럼 돌아앉았다.
총령이 달래듯이 말했다.
“소공자님, 시간을 지체하면 나중에 종주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 제가 보좌할 테니 함께 가시죠.”
섭회상은 오만가지 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둘렀다. 그의 말대로 이 일을 미루면 섭명결에게 야단을 맞을 게 분명했고, 그렇다고 총령과 수사들만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산 짐승의 꾀가 남아 있어서 갑자기 덤벼들어오는 요수가 귀 종류보다 더 싫었다.
문득 그의 눈에 곁에 앉은 남희신과 금광요가 들어왔다.
섭회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남희신에게 매달렸다.
“희신 형님! 형님께서 좀 도와 주세요! 형님께는 요수 한 마리 정돈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이미 이럴 줄 예상하고 있었던 남희신이 웃으며 팔에 달라붙은 섭회상을 차근차근 떼어내었다.
“알았다. 그러니까 소란 피우지 말거라. 아랫사람들이 본다.”
남희신이 금광요를 쳐다보자 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까지 끌고 갈 필요는 없다. 우리 둘이면 충분해.”
“아아아, 희신 형님과 광요 형님이라면 충분하고 말고요!”
“물론 너는 가지 않겠지?”
섭회상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 저는 안 가는 게 나아요. 방해만 될 테니까요.”
금광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빨리 가 보는 게 좋겠네요. 큰형님께서 오시기 전에 끝내는 게 좋을 테니까.”
뼈가 있는 말에 섭회상이 겸연쩍게 웃으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들.”
남희신과 금광요가 해당 마을에 도착해 보니 몇 군데의 밭과 집이 부서져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집채만한 멧돼지였어요!”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이 말했다. 남희신은 가져온 약을 전달한 뒤 곧장 산으로 향했다.
금광요가 말했다.
“요수가 빈번히 출몰하는군요. 일전에 위공자도 채의진 근처의 산에서 요수를 잡았다고 했지요.”
“우연은 아니겠지. 아마 요 몇 년간 짐승들이 계속해서 시체를 파먹고 다녔을 테니.”
“감시탑이 있다면 이런 일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텐데요.”
“감시탑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도 했었지. 하지만 워낙 큰 일이 되어놔서 어떨런지 모르겠구나. 비용 문제도 있지만, 온가가 무너진 후 오히려 가문들끼리의 결속력은 약해진 것 같거든.”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금광요는 예전에 취약한 지역을 돕는다는 핑계로 난릉 금씨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감시탑 건설을 계획한 적이 있었다.
그처럼 큰 문제가 대두되면 선독을 뽑자는 의견을 부추기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남희신의 말대로 공동의 위협이 제거되고 나니 선문들은 더 이상 뭉치려 하지 않게 되었지만, 선독이 나서서 백가를 규합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금광선은 여지껏 선독이 될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문제를 은근히 공식석상에서 거론해 왔지만 이렇다할 결실은 맺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금광요도 그가 선독이 되도록 힘껏 돕고 감시탑 계획을 물위로 끌어올렸겠지만 그런 의욕이나 욕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중립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은 금광선이 선독 자리에 앉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했다.
금광요는 차라리 남희신이 선독이 되고 자신이 그를 보좌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릉 금씨가 워낙 크고 부유하여 충성을 바치는 산하 가문들이 부지기수였다. 정말로 선독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면 금광선이 계책을 써서 선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금광요는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다.
두 사람이 산중턱쯤 올랐을 때 남희신이 조그맣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그가 금광요를 향해 눈짓을 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뛰어 올라 높은 나뭇가지 위에 섰다.
아래를 굽어 보니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과연 덩치 큰 멧돼지의 요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크기가 크고 수공도 상당해 보였다.
이내 요수가 달려와 남희신이 선 나무의 둥치를 박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년은 묵었을 나무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요수는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바로 태도를 바꾸어 등을 돌리더니 산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희신과 금광요가 지상으로 내려온 후 쫓아가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채 계속 달아났다.
남희신과 금광요는 몇 번이나 요수의 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나무가 빽빽한 틈을 요리조리 비껴가는데다 워낙 빨랐다.
이러다가는 산 하나를 다 넘어가겠다고 다른 수를 궁리할 때쯤 눈 앞에 조그만 평야가 펼쳐졌다.
요수는 그 곳에서 멈추어 몸을 돌리더니 거꾸로 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요수에게 부딪히기 직전에 몸을 날려 금방 요수가 섰던 반대편에 내려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이 온통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부러 이리로 끌고 온 건가. 영리하군.”
깊은 산의 주인도 아니고, 민가 근방에 이만한 요수가 돌아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남희신이 검에 영력을 주입하며 소리쳤다.
“아요, 조심해라!”
“예!”
요수는 금빛이 찬란한 금광요에게 먼저 덤벼들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금광요는 요수가 달려들자 가볍게 날아오르며 공중에서 한생을 길게 뻗었다. 동시에 남희신의 삭월이 옆에서 베었다.
요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지더니 잠시 후퇴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내두르는 품이 화만 더 돋군 것 같았다. 남희신이 목덜미를 벤 것은 거의 효과가 없었고, 금광요의 한생이 살을 찌르긴 했으나 너무 얕았다.
요수가 다시 돌진하려고 땅을 차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금광요에게 찔린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이번에는 남희신을 향하고 있었다.
남희신은 금광요의 검이 먹혀들었던 곳을 노리고 찌르려고 단단히 검날을 세웠다.
금광요가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형님, 제가 발을 붙잡아보겠습니다.”
남희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를 쳐다보던 금광요의 안색이 변했다. 뜻밖에 남희신의 옆에서 소리도 없이 커다란 범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을 붙잡아 뒤로 밀치며 대신 자신의 몸을 내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재빠른 손이 영력 줄기를 뻗었으나 한생의 검 끝은 요수를 비껴가서 허공을 찔렀고, 첫 공격을 실패한 요수가 마구 앞발을 휘둘렀다.
“아요!”
남희신이 놀라서 금광요를 붙잡으며 범의 머리에 삭월을 내리쳤다.
범의 기습에 정신이 빼앗긴 그는 한순간 정면에서 돌진해 오던 멧돼지 요수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멧돼지가 코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남희신은 금광요를 꽉 끌어안으며 내력을 끌어올려 방어했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21) (22) (23)
사시도 넘어 오시에 이르자 위무선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에서 내려서는 첫 발에 바로 와삭 하고 종이가 밟혔다. 바닥은 어젯밤 열심히 베껴서 널어놓은 검은 글자들로 빽빽했다.
그래도 아직 <예측편>의 벌은 10회도 넘게 남아 있었다. 어제도 남망기가 엄하게 재촉하는 바람에 억지로 써 보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아무튼 이 과제를 달성하기만 하면 운심부지처의 위업으로 길이길이 남을 테니 자랑스러워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위무선은 주섬주섬 종이를 주워서 침상에서 문까지 길을 낸 다음 밖으로 나갔다. 햇빛이 마구 쏟아져 눈살이 찌푸려졌고, 또다시 쓰디쓴 남씨의 밥을 먹을 생각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위무선은 근처의 복숭아밭을 살펴보고 몰래 복숭아 몇개를 딴 다음 고목 위로 올라갔다. 높은 가지 위는 지열이 올라오지 않고 나뭇잎이 우거져서 한결 시원했다. 기분 좋게 복숭아를 베어 무니 달콤한 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남잠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겠지?’
남망기는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다. 위무선에게 다시 손을 대는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는 걸 서로가 절절이 느끼고 있었다.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두근거려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내도 좋을 것 같았다.
복숭아 씨를 던져버리고 새 것을 물었을 때 갑자기 쨍 쨍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니 소리가 뒤쪽에서 나는 것 같아서 나뭇가지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자리를 이동했다.
‘아니, 택무군과 염방존이 싸우고 있어?’
자세히 보니 남희신이 옅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하. 비무를 하는 거군.’
위무선은 굵은 나뭇가지 위에 편하게 엎드려서 구경했다.
사일지정 때에는 온갖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싸웠으므로 남희신의 검법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새삼 놀라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소문으로만 듣던 금광요의 한생은 과연 볼만한 만한 가치가 있었다.
처음에는 금광요도 정도로써 대결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겸손하게 굴다간 십여 초도 못 가서 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희신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나 그렇게 빨리 무릎 꿇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갈수록 몸짓이 현란해지며 채찍같은 검날이 예고도 없이 사방에서 치솟았다.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비무에 위무선은 입에 든 것을 씹는 것도 잊고 말았다.
‘염방존의 한생이 기상천외하다더니 정말이네. 저러면 매 초가 기습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택무군은 왜 왼손을 쓰지 않지? 아아. 한 수 접어주시는 모양이군.’
한생은 귀신같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습성 때문에 어지간한 고수가 상대해도 애를 먹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남희신의 삭월은 단순한 영력과 속도만으로도 여유있게 막아내며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명불허전 택무군. 역시 진정한 고수 앞에선 잔기술도 소용이 없구나. 아. 나는 금단을 맺기도 바빠 죽겠는데.”
위무선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지 정말로 속이 상한 건 아니었다. 원래가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금단을 다시 얻은 것만도 기적이라는 걸 잘 알았다.
더구나, 누가 찾아준 소중한 금단인데.
위무선은 습관처럼 톡톡, 배를 두드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금광요는 끝이 뻔한 승부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도 받아내는 사람과 검을 주고받는 것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것처럼 즐거운 행위였다.
그래도 이만해 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1초를 찌르는데, 상대를 너무 믿은 나머지 부지불식간에 인정사정 없는 살초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등을 보이는 듯하다가 별안간 코 앞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은 절묘했으나 남희신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금광요의 얼굴이 보이자 그대로 튕겨냈다간 그를 다치게 할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리며 회피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깃이 찢어지며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다음에야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형님!”
깜짝 놀란 금광요가 재빨리 검을 말아 넣으며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형님.”
남희신이 웃으며 삭월을 집어넣었다.
“이런 재미를 보자고 하는 것인데 죄송할 게 다 뭐냐. 정말 재미있었다. 솜씨가 대단하구나, 아요.”
“아닙니다. 형님께서 사정을 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무를 하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남희신이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시간이 나도 산책을 하거나 금을 타는 게 고작이라, 금광요의 기분이 더 처지지나 않을까 남희신은 두루 궁리를 했다. 그러다가 아예 운심부지처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 싶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형님을 뵈러 가 볼까 하는데, 함께 가겠느냐?”
“부정세에 가시는 겁니까?”
“그래. 큰형님을 뵌 지도 오래 되었으니.”
예전에는 섭명결이 불신의 눈초리로 감시하는 것이 불편했었다. 사실 그의 의심이 타당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지만 그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었다. 금광요는 이미 몇 년 동안 주기적으로 부정세를 방문해 왔으며, 그 동안 섭명결의 태도도 많이 누그러들었다.
금광요는 세속에 대한 욕심은 다 잊어버렸지만 남희신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속한 세계와의 유대는 끊지 않을 셈이었다. 계속해서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를 공정하게 왕복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또한,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는 일이니, 언제나 권력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이로웠다.
***
섭회상은 책을 무더기로 끌어안고 신이 나서 종종걸음을 쳤다.
섭명결이 며칠째 자리를 비운 덕에 눈치를 보느라고 못했던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중이었다. 오늘은 방에 책장을 하나 더 넣었고 숨겨 두었던 서책들을 손수 옮기고 있었다. 그러느라 좀처럼 땀 흘리는 일이 없던 얼굴에 일꾼의 보람이 가득했다.
“소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귀찮아하던 섭회상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희신 형님, 광요 형님!”
섭회상은 책을 내려놓고 얼른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웬일이세요? 두 분이 함께?”
“오랜만에 들러 보았단다. 큰형님께서는?”
“형님은 출타중이신데요.”
“저런.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더니 이렇게 됐구나.”
섭회상은 금광요가 부채함을 내밀자 얼른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채의진의 우아한 신품이 놓여 있었으니, 이 이상 기쁠 수가 없었다.
“아마 앞으로 하루이틀이면 돌아오실 거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잠시 후 하인들이 시원한 정자에 상을 차렸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 섭회상이 물었다.
“그런데 희신 형님. 위형은 대체 운심부지처에서 뭘 하는 거에요? 아직도 머무르고 있어요?”
남희신이 대답하기 어려워하자 금광요가 웃으면서 대신 말을 받았다.
“위공자는 망기와 친하니까 언제까지 있어도 이상할 것 없지.”
섭회상이 벌레라도 밟은 듯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위형이 진짜로 함광군과 친하다고요? 말도 안 돼.”
“말이 안 될 게 뭐 있느냐?”
“친하다는 건 우선 두 사람의 취미가 맞아야 하는 거라고요. 위형이 함광군이랑 대체 뭘 할 수 있는데요? 서책 베끼기? 아니면 함광군이 위형이랑 물고기라도 잡아요?”
남희신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으나 섭회상이 진지하게 쳐다보자 말문이 막혔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역시 위무선이 남망기를 은근히 괴롭히는 걸로 재미를 보고 있는 거라고, 섭회상은 그를 위해 묵념을 했다.
‘위형이 술병 들고 운심부지처 담을 넘었을 때 그냥 넘어가 줬으면 이렇게 오래도록 고생하진 않았을 텐데. 애주가의 원한은 크고 깊구나.’
섭명결은 다음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란 후에는 피바다가 된 전쟁터가 많아서 이후로 요괴나 흉시, 악령이 출몰하는 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몇 년이 흐르며 많이 줄어들었다.
“야렵이 이렇게 오래 걸릴 리 없을 텐데. 그것도 큰형님의 실력에...”
섭회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처에 분가가 많으니 들렀다 오실 거에요. 큰형님께서는 사람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 한 번 나가시면 한꺼번에 돌아보고 오실 때가 많으니까요.”
섭회상은 아무쪼록 섭명결이 더 늦게 오길 바랬다. 남희신과, 특히 금광요를 오래도록 붙들어 놓고 싶었다. 다행히 그들은 섭명결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것 같았다.
“소공자님!”
섭회상은 익숙한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듣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인이 아닌 총령이 자신을 찾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과연 총령이 급한 일을 전했다.
“서쪽 야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요수가 나타나서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섭회상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어떻게 하긴 내가 어떻게 해? 곧 형님께서 오실 테니 형님께 말하라고.”
“그렇지만 종주님께서 언제 오실까요? 요수가 마을까지 내려왔다고 당장 도와 달라고 합니다만.”
“몰라, 몰라! 기다리라고 해!”
섭회상은 마구 팔을 저으며 듣기 싫다는 듯 어린애처럼 돌아앉았다.
총령이 달래듯이 말했다.
“소공자님, 시간을 지체하면 나중에 종주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 제가 보좌할 테니 함께 가시죠.”
섭회상은 오만가지 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둘렀다. 그의 말대로 이 일을 미루면 섭명결에게 야단을 맞을 게 분명했고, 그렇다고 총령과 수사들만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산 짐승의 꾀가 남아 있어서 갑자기 덤벼들어오는 요수가 귀 종류보다 더 싫었다.
문득 그의 눈에 곁에 앉은 남희신과 금광요가 들어왔다.
섭회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남희신에게 매달렸다.
“희신 형님! 형님께서 좀 도와 주세요! 형님께는 요수 한 마리 정돈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이미 이럴 줄 예상하고 있었던 남희신이 웃으며 팔에 달라붙은 섭회상을 차근차근 떼어내었다.
“알았다. 그러니까 소란 피우지 말거라. 아랫사람들이 본다.”
남희신이 금광요를 쳐다보자 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까지 끌고 갈 필요는 없다. 우리 둘이면 충분해.”
“아아아, 희신 형님과 광요 형님이라면 충분하고 말고요!”
“물론 너는 가지 않겠지?”
섭회상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 저는 안 가는 게 나아요. 방해만 될 테니까요.”
금광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빨리 가 보는 게 좋겠네요. 큰형님께서 오시기 전에 끝내는 게 좋을 테니까.”
뼈가 있는 말에 섭회상이 겸연쩍게 웃으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들.”
남희신과 금광요가 해당 마을에 도착해 보니 몇 군데의 밭과 집이 부서져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집채만한 멧돼지였어요!”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이 말했다. 남희신은 가져온 약을 전달한 뒤 곧장 산으로 향했다.
금광요가 말했다.
“요수가 빈번히 출몰하는군요. 일전에 위공자도 채의진 근처의 산에서 요수를 잡았다고 했지요.”
“우연은 아니겠지. 아마 요 몇 년간 짐승들이 계속해서 시체를 파먹고 다녔을 테니.”
“감시탑이 있다면 이런 일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텐데요.”
“감시탑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도 했었지. 하지만 워낙 큰 일이 되어놔서 어떨런지 모르겠구나. 비용 문제도 있지만, 온가가 무너진 후 오히려 가문들끼리의 결속력은 약해진 것 같거든.”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금광요는 예전에 취약한 지역을 돕는다는 핑계로 난릉 금씨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감시탑 건설을 계획한 적이 있었다.
그처럼 큰 문제가 대두되면 선독을 뽑자는 의견을 부추기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남희신의 말대로 공동의 위협이 제거되고 나니 선문들은 더 이상 뭉치려 하지 않게 되었지만, 선독이 나서서 백가를 규합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금광선은 여지껏 선독이 될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문제를 은근히 공식석상에서 거론해 왔지만 이렇다할 결실은 맺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금광요도 그가 선독이 되도록 힘껏 돕고 감시탑 계획을 물위로 끌어올렸겠지만 그런 의욕이나 욕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중립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은 금광선이 선독 자리에 앉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했다.
금광요는 차라리 남희신이 선독이 되고 자신이 그를 보좌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릉 금씨가 워낙 크고 부유하여 충성을 바치는 산하 가문들이 부지기수였다. 정말로 선독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면 금광선이 계책을 써서 선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금광요는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다.
두 사람이 산중턱쯤 올랐을 때 남희신이 조그맣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그가 금광요를 향해 눈짓을 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뛰어 올라 높은 나뭇가지 위에 섰다.
아래를 굽어 보니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과연 덩치 큰 멧돼지의 요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크기가 크고 수공도 상당해 보였다.
이내 요수가 달려와 남희신이 선 나무의 둥치를 박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년은 묵었을 나무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요수는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바로 태도를 바꾸어 등을 돌리더니 산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희신과 금광요가 지상으로 내려온 후 쫓아가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채 계속 달아났다.
남희신과 금광요는 몇 번이나 요수의 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나무가 빽빽한 틈을 요리조리 비껴가는데다 워낙 빨랐다.
이러다가는 산 하나를 다 넘어가겠다고 다른 수를 궁리할 때쯤 눈 앞에 조그만 평야가 펼쳐졌다.
요수는 그 곳에서 멈추어 몸을 돌리더니 거꾸로 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요수에게 부딪히기 직전에 몸을 날려 금방 요수가 섰던 반대편에 내려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이 온통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부러 이리로 끌고 온 건가. 영리하군.”
깊은 산의 주인도 아니고, 민가 근방에 이만한 요수가 돌아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남희신이 검에 영력을 주입하며 소리쳤다.
“아요, 조심해라!”
“예!”
요수는 금빛이 찬란한 금광요에게 먼저 덤벼들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금광요는 요수가 달려들자 가볍게 날아오르며 공중에서 한생을 길게 뻗었다. 동시에 남희신의 삭월이 옆에서 베었다.
요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지더니 잠시 후퇴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내두르는 품이 화만 더 돋군 것 같았다. 남희신이 목덜미를 벤 것은 거의 효과가 없었고, 금광요의 한생이 살을 찌르긴 했으나 너무 얕았다.
요수가 다시 돌진하려고 땅을 차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금광요에게 찔린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이번에는 남희신을 향하고 있었다.
남희신은 금광요의 검이 먹혀들었던 곳을 노리고 찌르려고 단단히 검날을 세웠다.
금광요가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형님, 제가 발을 붙잡아보겠습니다.”
남희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를 쳐다보던 금광요의 안색이 변했다. 뜻밖에 남희신의 옆에서 소리도 없이 커다란 범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을 붙잡아 뒤로 밀치며 대신 자신의 몸을 내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재빠른 손이 영력 줄기를 뻗었으나 한생의 검 끝은 요수를 비껴가서 허공을 찔렀고, 첫 공격을 실패한 요수가 마구 앞발을 휘둘렀다.
“아요!”
남희신이 놀라서 금광요를 붙잡으며 범의 머리에 삭월을 내리쳤다.
범의 기습에 정신이 빼앗긴 그는 한순간 정면에서 돌진해 오던 멧돼지 요수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멧돼지가 코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남희신은 금광요를 꽉 끌어안으며 내력을 끌어올려 방어했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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