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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9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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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전의 심상재는 이른 오후부터 침상에 웅크리고 있다가 운혜로부터 황후의 금족령이 풀렸다는 말을 듣고 알았으니 물러가라고 손짓을 함. 운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벌써 두달 가까이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태의를 불러야 하는게 아니냐고 말을 꺼냄. 그 말에 심상재가 제 증상은 가슴속에 울화가 쌓여서 생긴것이니 귀찮게 굴지 말고 나가라고 역정을 냈음. 심상재는 침전의 문이 닫히는 소리에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작은 병을 꺼내어서 마개를 빼고 안에 들어있던 환을 입안에 털어넣었음. 쓰디쓴 약을 물없이 씹어서 삼키고 다시 침상에 웅크리고 누웠지. 요근래 계속 피곤하고 속이 메스꺼운데다 현기증에 두통까지 도져서 몸상태가 좋지 않았음. 심상재는 자신에게 이런 증상이 생긴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기에 태의를 부르는 대신에 증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 심상재가 한숨을 쉬고는 아직 태가 크게 나지 않는 배를 손으로 덮고는 중얼거렸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아직은 때가 아니니 몸이 아파도 참아야지. 온갖 음모술수가 횡행하는 궁중에서 제 몸이 아픈 이유가 뭔지 알린다면 어떻게 될지 안봐도 뻔했으니. 심상재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음.
강징은 어머니가 가져온 상자에서 자신이 어릴때 입었던 옷들과 장난감들을 꺼내 만지며 무척이나 즐거워함. 잠시후에 상궁에게 황제가 준 하사품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연꽃이 새겨진 자개함을 가져오라고 이름. 강징은 자개함에서 이전에 황제와 함께 출궁을 했을때 시전에서 샀던 작은 버선과 연꽃이 수놓인 비단신을 꺼내어 만짐. 우자연이 비단신을 보더니 자수 기법이 마마께서 어릴때 신었던 신의 자수 기법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함. 강징이 그게 정말이냐고 되묻고는 그래서인지 제 마음에 쏙 들었던것 같다고 환하게 웃을거야. 우자연은 환히 웃는 강징의 모습을 보고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아직도 일곱살의 이전의 기억이 나지 않으시냐고 물어봄. 사실 강징은 어릴적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일곱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거든. 사고 직후에 사흘을 내리 앓다가 깨어났을때는 부모와 자매인 염리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매우 심각했었음. 당시 열살도 채 안된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이후에 부분적인 기억 상실 말고는 별다른 후유증 없이 몸을 회복했기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다른 문제는 없었어. 강징이 어릴때 기억의 일부를 잃은게 서글프기는 해도 다른 기억들은 생생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을 시킴. 그리고는 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는 오늘 연희궁에서 저녁을 드시고 주무시고 가라고 말했음. 오랜만에 어머니랑 언니랑 밤새 한담을 나누고 침상에 같이 누워서 자고 싶다고 하니 우자연이 웃으면서 강징의 뺨을 쓰다듬었어. 그러면서 우리 징이는 어릴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하나도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이제 네 아이의 모친이 되는데도 아직도 어린 아이처럼 어미의 품에 안겨 자고 싶어하니 큰일이라고 부러 농을 함. 강징이 입을 삐쭉이고는 모친이 저를 어렵게 대하시니 더욱 더 철부지처럼 굴고 싶은거라고 항변했더니 우자연이 이 어미도 농을 한거라고 품에 안고 달랬음. 그때 춘희전에 갔었던 염리가 안으로 들어와서 채가 의식을 회복했는데 마마를 뵙고 싶어한다고 말함.
강징이 침전안으로 들어오는 강채를 보고 몹시 반가워하는데 그런 채를 보는 우자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음. 채는 가슴 부분에 연분홍색의 연꽃이 수놓인 의복을 입고 어린 아이들처럼 머리를 길게 내려뜨려 반만 묶은 다음에 연꽃이 수놓인 비단 끈으로 매듭을 지은 상태였음. 그 모습이 어릴때 강징의 모습과 지나치게 비슷해 무척이나 의아했고 당혹스러움을 느낄 정도였어. 강채가 강징에게 그간 강녕하셨냐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고 난후에 이모인 우자연에게 다가와서 손을 붙잡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망해함. 강징이 모친하고 부르니 우자연이 그제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몸은 좀 어떠냐고 강채를 살폈음. 강채가 걱정해주신 덕분에 괜찮아졌다고 하고는 강징에게는 귀비마마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고 또 다시 무릎을 굽히려고 함. 강징이 심란한 표정으로 강채의 팔을 붙잡고는 그리 깍듯이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앞으로는 무릎을 굽혀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음. 강채가 아무리 그래도 존귀하신 귀비마마께 사가에 있을때처럼 편히 대할수가 있냐며 고개를 가로 저음. 강징이 채 너는 어릴때부터 나와 같이 자랐고 이제 이종형제라고는 너밖에 없는데 네가 나를 그저 폐하의 비빈으로만 대하니 속상하다고 말했어. 그 말에 채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언니라고 호칭을 바꿈. 그러자 강징이 몸이 아직 힘들텐데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탁자로 데리고 갔음.
그 시각 황후는 양심전의 총관 태감이 자신을 동쪽의 체순당이 아니라 서쪽의 연희당으로 안내하자 당혹스러워함. 황후는 자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태감까지 저를 업신여기나 싶어서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졌음. 황후가 태감에게 연희당은 비빈들이 시침을 들기전에 머무는 전각이 아니냐고 따져물음. 양심전의 총관이 폐하께서 체순당에 부정한 기운이 침범해서 신성한 기운이 쇠하였으니 중궁이신 황후께 부정한 기운이 향하지 않게 즉시 전각을 허물고 다시 지으라고 하셨다고 아룀. 황후가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폐하께서 본궁을 그리 각별하게 생각하시는지 몰랐다고 말하고는 순순히 연희당으로 향했어. 황제가 후궁들을 가까이하지 않는터라 연희당에 궁인들과 태감외에 비빈이 들어온적이 없었음. 십수년간 비어져 있었던 탓인지 냉궁에 들어온것 마냥 한기가 돌고 퀘퀘한 냄새까지 났음. 황후는 연희당에 들어서자마자 제대로 소제가 안된건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영견으로 입을 가림. 그때 황후궁의 상궁이 안으로 들어와서 연희당의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음.
상궁은 황후를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히고는 귓가에 뭐라고 속삭임. 황후가 사향을 구했다는 상궁의 말에 환히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음. 상궁이 의복 소매에 숨겨두었던 향낭을 꺼내어 황후의 손바닥에 올려두자 황후가 정말 이게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효과가 있냐고 물었어. 상궁이 천하에 둘도 없는 박색이어도 이 사향을 쓰면 사내들이 줄줄이 따른다고 들었다고 효과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을 시켰음. 그리고는 시침을 들기전에 베개 밑에 숨겨놓으셨다가 이튿날 양심전에서 나오실때 몰래 가지고 나오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음. 황후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상궁이 화장이 지워진것 같다고 분합을 꺼내 분을 분첩에 찍어 덧발라줌. 황후가 상궁의 섬세한 손길을 받으며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쉬고는 좌태약까지 마셨으니 이번 시침으로 회임이 되어야 할터인데 하고 중얼거림. 상궁이 오늘이 마침 합궁 길일이니 건강한 황자 아기씨를 수태하실거라고말함. 그리고는 폐하께서는 정숙한 여인을 좋아하시니 폐하께 가만히 몸을 맡기시면 된다고 긴장하지 마시라고 함. 황후가 오랜만의 합궁에 긴장했는지 옷자락을 엉망으로 구기는등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자 상궁이 다시 한번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거였음. 대혼을 치른지 두 해가 다되어가지만 시침을 든건 열번도 채 되지 않았으니 긴장을 할만도 했음. 마지막으로 함께 밤을 보낸것도 작년 가을의 일이라 이제는 황제와 운우지정을 어찌 나눴는지 기억조차 안날 지경이었어. 황후가 어색하게 웃으며 흥분과 긴장으로 거세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음.
망기는 태감으로부터 황후가 서쪽의 연희당에서 대기중이라는 말을 듣고 손에 쥔 세필붓을 내려놓았음. 그리고는 양심전에 있는 침전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음. 그런데 그때 자녕궁의 태감이 들어와서 태후께서 찾으신다고 아뢰어 지체없이 자녕궁으로 향했음. 망기가 자녕궁의 내실에 막 들어섰을때 태후는 세욕을 끝낸지 얼마 안된건지 가벼운 차림으로 경대앞에서 머리를 만지고 있었음. 태후가 힐끔 곁눈질을 하더니 왔으면 예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뭘 그리 멀거니 서 있는거냐고 가볍게 타박을 함. 망기가 뒤늦게 소자 모후께 인사를 올린다고 예를 갖추려고 하자 태후가 못마땅한듯 쯧쯧 혀를 차고는 그럴 필요없으니 이리 와서 이 어미의 머리나 빗겨달라고 말함. 망기가 아무런 말없이 상궁에게서 빗을 건네받아 태후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함. 태후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것인지 머리가 희끗희끗했음. 태후가 동경에 비친 흰머리를 보고 한숨을 쉬며 황제 이 어미도 많이 늙었지요하고 물었음. 망기가 그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궁중에서 제일 미인이시라고 했더니 태후가 피식 웃으며 황제가 그런 입발림도 할줄 아냐고 신기하게 여김. 망기가 아주 단호하게 입발림이 아니라고 하자 태후가 당황한듯 이제 되었으니 빗질을 그만하라고 했음. 잠시후에 태후가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상으로 향하며 황제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황후의 금족령을 풀라는 명을 내렸냐고 물었음.
망기가 태후의 옆자리에 앉아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혜귀태비의 가르침 덕분에 생각이 바뀌었을뿐이라고 말했음. 태후가 한숨을 쉬며 혜귀태비께서 다른 비빈들을 안쓰럽게 여겨신게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낭군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여인의 처지가 어떤것인지 일깨워주신거지 황후의 금족령을 풀고 시침을 들게 하란 말씀을 하신게 아닐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고 의아해함. 망기가 황후가 혹 회임이라도 할까 저어되시냐고 물음.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그걸 말이라고 하는게요. 황후에게서 황자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바로 적장자인데 적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윤에게 큰 위협이 될거라는 생각은 안해본게요. 황후의 성정상 제 소생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텐데 황제의 유고시에 오왕의 난에 버금가는 피의 축록이 벌어질수도 있다고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음. 망기가 웃으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철저하게 방책을 세울 작정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자가 듣기로는 모후께 궁중의 여인들이 은밀히 쓰는 비약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리 걱정되신다면 그것을 내어주시지요라고 말함. 태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약이라니 무얼 말하는거냐고 되묻자 망기가 태연자약하게 웃으면서 지난날 자녕궁의 상궁을 통해 황후궁의 궁녀에게 건네주신 여인의 불임을 야기하는 약 말입니다. 태후가 그 말을 듣고 잠깐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가 시치미를 떼면서 그런 약이 어디 있냐고 이 어미에게 그런 말도 안되는 누명을 씌울 작정이냐고 화를 냈음. 망기가 태후와 눈을 마주치고는 모후께서 황후를 이용하여 연귀비의 태를 망가뜨리고 그 일로 황후를 겁박하실 생각이셨던것을 소자가 모를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태후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 어미가 연귀비의 태를 망가뜨리려고 한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껏 모르는척을 한거냐고 되려 화를 냈어.
망기가 다탁에 놓인 다완의 덮개를 열어서 식은 찻물을 화분에 부어버리고는 제 모친의 말간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음. 그럼 소자가 모후께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생각을 하셨냐고 추궁하고 치죄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모후께서 연귀비와 황후를 못마땅해하시는 것을 잘압니다. 황후야 권신의 자손인데다가 황후의 모친이 오래전 모후를 핍박한 일로 그에 대한 원한이 깊으시니 황후에 대한 미움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귀비는 무슨 죄가 있어서 그리도 미워하십니까. 그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왜그리 못마땅해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귀비가 모후께 오만불손하게 군적도 없고 총애만을 믿고 권세를 휘두른적도 없잖습니까.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귀비만 보면 언짢아서 그러오! 연귀비는 영명하고 온순하고 단아한데다 박학다식하기까지 하지. 무엇 하나 모자랄게 없소.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명문가의 여식이라 혈통도 우수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아 슬하에 자식도 여럿인데다 이미 존귀한 귀비의 지위에 있으니 복이 차고 넘치오. 귀비는 입궁 이후로 줄곧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니 다른 이들과 쟁총을 할 일이 없어 다른 비빈들을 핍박하고 모해한적도 없다는 것도 잘아오. 그래서 그저 지고지순한 여인처럼 보이는게요. 그런데 연귀비가 언제까지 후궁의 아귀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지고지순함을 유지할것 같소? 태후가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망기의 옷깃을 매만지다가 망기의 굳은 얼굴을 보고 삐뚜름하게 웃었음.
망기가 태후의 희고 고운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음. 소자가 멀쩡히 살아 두눈을 뜨고 있는 이상 쟁총으로 인한 암투로 연귀비의 섬섬옥수를 더럽히는 일은 없을것입니다. 소자의 비빈들은 선대의 비빈들처럼 물밑에서 음모와 중상모략으로 서로를 해치다못해 황손들까지 해치는 일이 절대 없을것입니다. 소자가 결코 좌시하지 않을테니 두고 보십시오. 태후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다가 만승지존이 처첩의 쟁총에 관여라도 하겠다 이 말이오? 아니면 황제가 궁중의 여인들처럼 암투를 벌여 연귀비에게 해가 되는 비빈들을 해치기라도 할 작정이냐고 버럭 화를 내었음. 망기가 굳은 얼굴로 못할것도 없질 않냐고 은애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게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대답을 하니 태후가 분기탱천해서 옷깃에 달린 염주를 뜯어다가 바닥에 집어던짐. 일국의 황제가 연심에 눈이 멀어 규중의 비천한 계집들이나 할 짓을 한다!? 이 어미가 겨우 그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하라고 그대를 황위에 올린줄 아시오! 황제가 간계로 비빈을 해치면 비천한 여인의 자식이라 배운바가 없어 그리한다고 누대에 걸쳐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을게 뻔한데 이 어미가 그것을 두고 볼것 같습니까! 망기가 몹시 격앙된 표정으로 그동안 두고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소자가 양모에게 모진 핍박을 받고 독이 든 다과를 먹었을때도 그저 가만히 보고만 계셨던게 바로 모후이십니다. 그때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어린 자식의 안위보다 황제의 총애를 얻는게 더 중요하셔서 모르는척 하신것을 제가 모를줄 아십니까. 태후가 그 말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듯 손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이 어미의 출신이 비천하고 지위가 낮아서 자식을 양육할 권한이 없었던거요! 이 어미가 그대를 낳았을때 겨우 상재였고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는데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자식을 지킬수가 있었겠소. 지금 이 어미를 원망하는게요? 이 어미에게 죄가 있다면 다른 비빈들처럼 명문가의 여식이 아닌것과 일찌기 양친을 앓고 고아가 된 까닭에 힘을 실어줄 가문의 권세가 없다는 것뿐인데 그게 자식에게 원망을 받아 마땅한 죄냐고 눈물을 뚝뚝 흘림.
망기가 눈물을 흘리는 태후를 보고 심기가 어지러워서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리자 태후가 그런 망기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림. 황제 이 어미라고 강보에 싸인 어린 자식을 연적이나 다름없는 총비에게 맡기고 싶었는줄 아냐고 서럽게 울었음. 비천한 어미의 슬하에서 자라는것보다 존귀한 신분의 양모에게서 자라는 것이 그대에게 훨씬 이로울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같은 궁에 기거하며 교분이 두터웠던 당시의 정비에게 그대의 양육을 맡아달라고 간청한것이었어요. 그 계집이 그리 악독한 계집인줄 알았다면 내 손으로 배아파 낳은 자식을 맹수의 아가리에 들이미는 짓따위는 하지 않았을거라고 애처롭게 울었음. 이 어미가 쟁총을 한것은 선제를 진심으로 연모해서 그런것도 있었지만 궁중의 암투에서 나와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함. 그로 인해 우리 모자의 정이 이리 희박해질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것입니다. 황제에게 잊혀진 여인이 되어 낡고 허름한 곳에서 기거하며 푸성귀와 식은밥으로 겨우 연명하고 궁인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홀대를 받는다해도 내 품에서 고이 길렀을거라고 숨이 넘어갈듯이 울다가 아무 대답이 없는 망기의 손을 가져와서 얼굴을 부볐음. 아잠 이 어미를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 남은 자식에게까지 미움을 받는다면 이 어미의 지난 삶은 뭐가 됩니까. 그대에게 원망을 받는다면 그대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했던 그간의 노력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황제 이 어미가 그리도 밉습니까.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거냐고 애원을 하다가 망기가 억지로 떼어내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음. 망기가 한숨을 쉬면서 지금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잠이라구요? 어린 시절에는 한번도 그리 다정하게 불러주지 않으시더니 이제와서 아잠이라구요. 어미의 품이 그리운 나이는 지난지 오래입니다. 소자 모후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모후께 말하기 힘든 고충이 있었다는것을 소자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지난날을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또한 아시지 않습니까.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망기가 태후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인사를 올리고 나오자마자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녕궁의 상궁과 궁인들이 고정하시라고 만류하는 소리가 들림.
그 시각 강징은 강채로부터 연못에 빠졌던 날이 죽은 아우의 기일이었다는 말에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음. 강채는 모친과 아우의 생각에 울적한 기분이 들어 수련을 보며 마음을 달래다가 발을 헛디뎌서 그런 변고가 벌어진것이라고 마마께 누를 끼쳐서 송구하다고 했음. 강징의 모친인 우부인이 세상을 뜬 언니 생각에 울적해하자 염리가 따뜻한 차를 마실건을 권했고 강징은 채에게 누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했음. 강징이 올해로 네 나이가 스물하고도 하나인데 아직 혼전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조만간 폐하께 말씀을 올려 좋은 배필을 찾아주겠다고 했음. 강채가 멋쩍게 웃으면서 사생아인 저와 혼인을 할 사내가 있겠냐고 마마의 말씀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함. 강징이 그런 강채가 안쓰러워서 채의 손을 붙잡고 달리 마음에 품은 이도 없냐고 물었어. 강채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연희궁의 태감이 급히 들어와서 서비와 영상재의 거처인 저수궁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고 함. 강징이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냐고 하문하니 태감이 아뢰길 서비가 낮부터 복통이 심했는데 갑자기 하혈을 한다고 말함. 강징이 하혈이라는 말에 놀라서 상궁에게 당장 가마를 대령하라고 일렀음. 그리고는 세 사람에게 서비의 저수궁에 가보아야 할것 같다고 시간이 늦었으니 연희궁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말하고 급히 자리를 떴음.
저수궁의 내실에서 영상재가 침상에 걸터앉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서비의 얼굴을 영견으로 닦아주다가 강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강징이 영상재에게 예를 차릴것이 없다고 만류하고 태의를 불렀냐고 묻고는 그렇다는 말을 듣자 폐하께도 알렸냐고 물음. 영상재가 양심전에 태감을 보냈는데 아직 감감 무소식이라고 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상에 누운 서비를 돌아보았음. 강징이 서비에게 다가가 배가 어떻게 아픈거냐고 물었는데 서비는 이미 반나절을 꼬박 앓은터라 기력이 없어서 그런지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그저 앓기만 함. 강징이 태의는 언제쯤 오는거냐고 닥달을 하려는 때에 태의감의 당직인 태의가 들어와서 무릎을 꿇으려고 했음. 강징이 거추장스럽게 예를 차릴것 없으니 당장 서비를 진맥하라고 일렀어. 태의가 진맥을 하더니 서비께서 회임을 하셨는데 태기가 약해서 유산의 조짐이 있으시다고 고했음. 강징이 회임이라는 말과 유산의 조짐이라는 말에 몹시 당황해서 서비의 배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태의에게 얼른 시침을 하고 탕약을 올리라고 함. 잠시후에 황제가 급히 저수궁안으로 들어섰는데 저수궁의 태감으로부터 회임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건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 강징이 황제가 들었다는 말에 내실에서 나와 웃는 낯으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경하드린다고 말함. 황제가 강징의 팔을 붙잡아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휘휘 둘러봄. 그리고는 말없이 강징의 표정을 살피다가 강징으로부터 신첩의 얼굴에 티끌이라도 묻었냐고 의아해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 저었어. 강징은 황제에게 서비가 많이 놀라고 당황하여 경황이 없을텐데 안으로 들어가셔서 곁에 있어주시라고 청했음. 황제가 뭔가 할말이 있는듯 강징의 손을 붙잡았지만 강징이 슬그머니 손을 빼고는 서비가 회임하였으니 황손이 귀한 황실의 큰 경사이고 신첩도 기쁘기 한량없다고 말했음. 강징이 수강궁의 태황태후마마와 자녕궁의 태후마마께는 태감과 상궁을 보내 희소식을 전했다고 하자 황제가 한숨을 쉬며 그대가 고생이 많다고 어깨를 어루만졌어. 강징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신첩이 중궁이신 황후를 대리하여 육궁을 통솔하니 당연히 해야 할 소임이라고 말하고는 슬쩍 뒤로 물러났음. 그리고는 신첩은 이만 물러가보겠다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떴어.
강징은 저수궁의 궁문을 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뻔 했음. 상궁이 급히 부축하면서 고단하실테니 가마에 오르시라고 하자 연희궁까지 걸어가고 싶다고 말함. 상궁은 강징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가마꾼들과 다른 궁인들을 물리고 등롱 하나만 손에 들고 강징의 뒤를 따랐음. 강징은 황궁의 붉은 담장 밑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이지러지는 달빛에 마음이 괴로워져서 억지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림. 너른 소매로 곱게 단장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자 상궁이 마마하고 손을 붙잡으려고 함. 그런데 강징이 손을 앞으로 빼자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주변을 살폈어. 강징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크게 소리를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죽여 울다가 이제는 담장에 이마를 대고 서러이 울기 시작함. 강징은 일국의 황제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신이 무척이나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제왕에게는 사랑놀음도 한낱 유희거리뿐 일터인데 그런 사내에게 진실된 부부의 정을 바란다는게 헛된 꿈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커져가는 욕심을 억누를수가 없었던거겠지. 황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은애한다고 해도 밤이 오면 다른 여인을 찾을것이고 언젠가는 다른 여인들에게 자식을 볼것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리 되니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이 아득해졌음. 지금 궁중에 있는 비빈들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시기가 되면 보다 어리고 미색이 뛰어난 후궁들을 들여서 그들에게서 자식을 보겠지. 제왕가에 시집을 온 이상 낭군과의 백년해로는 헛된 꿈일뿐이고 황궁에는 진정한 사랑따위 존재하지 않는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픈것인지 모를 일이었음. 강징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이처럼 몸이 빳빳해져서 숨을 몰아쉬다가 상궁하고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음. 그러다가 눈앞이 아득해지고 구역질이 치밀어 상궁에게 기댄채로 거친 숨을 몰아쉼.
그 시각 황후는 양심전의 서쪽 연희당에서 황제가 자신을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음. 벌써 해시(21시~23시)하고 일각인데도 태감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밖에 있는 상궁을 소리쳐 불렀음. 그때 상궁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와서 일단 경인궁으로 돌아가셨다가 날이 밝는대로 저수궁으로 가셔야 할것 같다고 아룀. 황후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데 상궁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저수궁의 서비가 회임을 하여 폐하께서 저수궁으로 행차하셨다고 말함. 황후는 서비가 회임을 했다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도대체 그게 무슨하고 중얼거리다가 상궁에게 따져물음. 서비가 무슨 수로 회임을 하였단 말이냐! 폐하께서 석달 가까이 비빈들의 녹두패를 뒤집으신적이 없거늘! 상궁이 황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를 살피며 서비가 회임한지 벌써 넉달이나 되었답니다. 일전에 폐하께서 연귀비의 궁에 발길을 잠시 끊으신적이 있사온데 그 사이에 서비가 두번 정도 시침을 든것으로 압니다. 아무래도 그때 황손을 잉태한것 같다고 하니 황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매에 넣어두었던 향낭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름. 서비까지 황손을 회임하였는데 본궁에게는 왜 그런 경사가 생기질 않는것이야! 도대체 왜!!! 황후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침의 차림으로 밖을 뛰쳐나가자 상궁이 급히 뒤를 따름. 황후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맨발로 연희당의 앞뜰을 배회하다가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오늘이 보름인데 폐하께서 아니 오신단 말이냐! 오늘이 합궁 길일이라 하지 않았어! 당장 저수궁으로 가서 폐하를 모시고 오거라! 모시고 오래두! 상궁이 황후의 어깨에 얇은 피풍의를 둘러주며 마마 길일은 또 있으니 제발 고정하십시오. 이러다 존체에 해가 될까 저어됩니다라고 만류함. 황후가 아이처럼 울면서 폐하 신첩에게도 아이를 주세요. 왜 제게는 아이를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오씨여서 그러시는것이냐고 울부짖다가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허망한 표정으로 저수궁이 있는 쪽을 쳐다봄. 그리고는 상궁에게 날이 밝는대로 태극전에 기별을 하여 심상재를 경인궁으로 오라고 해라. 황후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연귀비면 몰라도 서비까지 황상의 성총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것이다. 황후가 입꼬리를 올려 웃다가 상궁을 뒤돌아보며 마치 귀역(귀신과 불여우: 음험하여 남몰래 남을 해치는 사람)씌인듯이 기괴한 표정으로 말했음. 다음에 태어날 황손은 다른 여인의 태가 아니라 본궁의 태에서 나온 황자여야만 해. 본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그렇게 만들것이다.
망기강징 망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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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전의 심상재는 이른 오후부터 침상에 웅크리고 있다가 운혜로부터 황후의 금족령이 풀렸다는 말을 듣고 알았으니 물러가라고 손짓을 함. 운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벌써 두달 가까이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태의를 불러야 하는게 아니냐고 말을 꺼냄. 그 말에 심상재가 제 증상은 가슴속에 울화가 쌓여서 생긴것이니 귀찮게 굴지 말고 나가라고 역정을 냈음. 심상재는 침전의 문이 닫히는 소리에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작은 병을 꺼내어서 마개를 빼고 안에 들어있던 환을 입안에 털어넣었음. 쓰디쓴 약을 물없이 씹어서 삼키고 다시 침상에 웅크리고 누웠지. 요근래 계속 피곤하고 속이 메스꺼운데다 현기증에 두통까지 도져서 몸상태가 좋지 않았음. 심상재는 자신에게 이런 증상이 생긴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기에 태의를 부르는 대신에 증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 심상재가 한숨을 쉬고는 아직 태가 크게 나지 않는 배를 손으로 덮고는 중얼거렸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아직은 때가 아니니 몸이 아파도 참아야지. 온갖 음모술수가 횡행하는 궁중에서 제 몸이 아픈 이유가 뭔지 알린다면 어떻게 될지 안봐도 뻔했으니. 심상재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음.
강징은 어머니가 가져온 상자에서 자신이 어릴때 입었던 옷들과 장난감들을 꺼내 만지며 무척이나 즐거워함. 잠시후에 상궁에게 황제가 준 하사품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연꽃이 새겨진 자개함을 가져오라고 이름. 강징은 자개함에서 이전에 황제와 함께 출궁을 했을때 시전에서 샀던 작은 버선과 연꽃이 수놓인 비단신을 꺼내어 만짐. 우자연이 비단신을 보더니 자수 기법이 마마께서 어릴때 신었던 신의 자수 기법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함. 강징이 그게 정말이냐고 되묻고는 그래서인지 제 마음에 쏙 들었던것 같다고 환하게 웃을거야. 우자연은 환히 웃는 강징의 모습을 보고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아직도 일곱살의 이전의 기억이 나지 않으시냐고 물어봄. 사실 강징은 어릴적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일곱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거든. 사고 직후에 사흘을 내리 앓다가 깨어났을때는 부모와 자매인 염리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매우 심각했었음. 당시 열살도 채 안된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이후에 부분적인 기억 상실 말고는 별다른 후유증 없이 몸을 회복했기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다른 문제는 없었어. 강징이 어릴때 기억의 일부를 잃은게 서글프기는 해도 다른 기억들은 생생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을 시킴. 그리고는 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는 오늘 연희궁에서 저녁을 드시고 주무시고 가라고 말했음. 오랜만에 어머니랑 언니랑 밤새 한담을 나누고 침상에 같이 누워서 자고 싶다고 하니 우자연이 웃으면서 강징의 뺨을 쓰다듬었어. 그러면서 우리 징이는 어릴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하나도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이제 네 아이의 모친이 되는데도 아직도 어린 아이처럼 어미의 품에 안겨 자고 싶어하니 큰일이라고 부러 농을 함. 강징이 입을 삐쭉이고는 모친이 저를 어렵게 대하시니 더욱 더 철부지처럼 굴고 싶은거라고 항변했더니 우자연이 이 어미도 농을 한거라고 품에 안고 달랬음. 그때 춘희전에 갔었던 염리가 안으로 들어와서 채가 의식을 회복했는데 마마를 뵙고 싶어한다고 말함.
강징이 침전안으로 들어오는 강채를 보고 몹시 반가워하는데 그런 채를 보는 우자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음. 채는 가슴 부분에 연분홍색의 연꽃이 수놓인 의복을 입고 어린 아이들처럼 머리를 길게 내려뜨려 반만 묶은 다음에 연꽃이 수놓인 비단 끈으로 매듭을 지은 상태였음. 그 모습이 어릴때 강징의 모습과 지나치게 비슷해 무척이나 의아했고 당혹스러움을 느낄 정도였어. 강채가 강징에게 그간 강녕하셨냐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고 난후에 이모인 우자연에게 다가와서 손을 붙잡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망해함. 강징이 모친하고 부르니 우자연이 그제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몸은 좀 어떠냐고 강채를 살폈음. 강채가 걱정해주신 덕분에 괜찮아졌다고 하고는 강징에게는 귀비마마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고 또 다시 무릎을 굽히려고 함. 강징이 심란한 표정으로 강채의 팔을 붙잡고는 그리 깍듯이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앞으로는 무릎을 굽혀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음. 강채가 아무리 그래도 존귀하신 귀비마마께 사가에 있을때처럼 편히 대할수가 있냐며 고개를 가로 저음. 강징이 채 너는 어릴때부터 나와 같이 자랐고 이제 이종형제라고는 너밖에 없는데 네가 나를 그저 폐하의 비빈으로만 대하니 속상하다고 말했어. 그 말에 채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언니라고 호칭을 바꿈. 그러자 강징이 몸이 아직 힘들텐데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탁자로 데리고 갔음.
그 시각 황후는 양심전의 총관 태감이 자신을 동쪽의 체순당이 아니라 서쪽의 연희당으로 안내하자 당혹스러워함. 황후는 자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태감까지 저를 업신여기나 싶어서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졌음. 황후가 태감에게 연희당은 비빈들이 시침을 들기전에 머무는 전각이 아니냐고 따져물음. 양심전의 총관이 폐하께서 체순당에 부정한 기운이 침범해서 신성한 기운이 쇠하였으니 중궁이신 황후께 부정한 기운이 향하지 않게 즉시 전각을 허물고 다시 지으라고 하셨다고 아룀. 황후가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폐하께서 본궁을 그리 각별하게 생각하시는지 몰랐다고 말하고는 순순히 연희당으로 향했어. 황제가 후궁들을 가까이하지 않는터라 연희당에 궁인들과 태감외에 비빈이 들어온적이 없었음. 십수년간 비어져 있었던 탓인지 냉궁에 들어온것 마냥 한기가 돌고 퀘퀘한 냄새까지 났음. 황후는 연희당에 들어서자마자 제대로 소제가 안된건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영견으로 입을 가림. 그때 황후궁의 상궁이 안으로 들어와서 연희당의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음.
상궁은 황후를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히고는 귓가에 뭐라고 속삭임. 황후가 사향을 구했다는 상궁의 말에 환히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음. 상궁이 의복 소매에 숨겨두었던 향낭을 꺼내어 황후의 손바닥에 올려두자 황후가 정말 이게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효과가 있냐고 물었어. 상궁이 천하에 둘도 없는 박색이어도 이 사향을 쓰면 사내들이 줄줄이 따른다고 들었다고 효과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을 시켰음. 그리고는 시침을 들기전에 베개 밑에 숨겨놓으셨다가 이튿날 양심전에서 나오실때 몰래 가지고 나오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음. 황후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상궁이 화장이 지워진것 같다고 분합을 꺼내 분을 분첩에 찍어 덧발라줌. 황후가 상궁의 섬세한 손길을 받으며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쉬고는 좌태약까지 마셨으니 이번 시침으로 회임이 되어야 할터인데 하고 중얼거림. 상궁이 오늘이 마침 합궁 길일이니 건강한 황자 아기씨를 수태하실거라고말함. 그리고는 폐하께서는 정숙한 여인을 좋아하시니 폐하께 가만히 몸을 맡기시면 된다고 긴장하지 마시라고 함. 황후가 오랜만의 합궁에 긴장했는지 옷자락을 엉망으로 구기는등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자 상궁이 다시 한번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거였음. 대혼을 치른지 두 해가 다되어가지만 시침을 든건 열번도 채 되지 않았으니 긴장을 할만도 했음. 마지막으로 함께 밤을 보낸것도 작년 가을의 일이라 이제는 황제와 운우지정을 어찌 나눴는지 기억조차 안날 지경이었어. 황후가 어색하게 웃으며 흥분과 긴장으로 거세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음.
망기는 태감으로부터 황후가 서쪽의 연희당에서 대기중이라는 말을 듣고 손에 쥔 세필붓을 내려놓았음. 그리고는 양심전에 있는 침전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음. 그런데 그때 자녕궁의 태감이 들어와서 태후께서 찾으신다고 아뢰어 지체없이 자녕궁으로 향했음. 망기가 자녕궁의 내실에 막 들어섰을때 태후는 세욕을 끝낸지 얼마 안된건지 가벼운 차림으로 경대앞에서 머리를 만지고 있었음. 태후가 힐끔 곁눈질을 하더니 왔으면 예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뭘 그리 멀거니 서 있는거냐고 가볍게 타박을 함. 망기가 뒤늦게 소자 모후께 인사를 올린다고 예를 갖추려고 하자 태후가 못마땅한듯 쯧쯧 혀를 차고는 그럴 필요없으니 이리 와서 이 어미의 머리나 빗겨달라고 말함. 망기가 아무런 말없이 상궁에게서 빗을 건네받아 태후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함. 태후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것인지 머리가 희끗희끗했음. 태후가 동경에 비친 흰머리를 보고 한숨을 쉬며 황제 이 어미도 많이 늙었지요하고 물었음. 망기가 그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궁중에서 제일 미인이시라고 했더니 태후가 피식 웃으며 황제가 그런 입발림도 할줄 아냐고 신기하게 여김. 망기가 아주 단호하게 입발림이 아니라고 하자 태후가 당황한듯 이제 되었으니 빗질을 그만하라고 했음. 잠시후에 태후가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상으로 향하며 황제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황후의 금족령을 풀라는 명을 내렸냐고 물었음.
망기가 태후의 옆자리에 앉아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혜귀태비의 가르침 덕분에 생각이 바뀌었을뿐이라고 말했음. 태후가 한숨을 쉬며 혜귀태비께서 다른 비빈들을 안쓰럽게 여겨신게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낭군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여인의 처지가 어떤것인지 일깨워주신거지 황후의 금족령을 풀고 시침을 들게 하란 말씀을 하신게 아닐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고 의아해함. 망기가 황후가 혹 회임이라도 할까 저어되시냐고 물음.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그걸 말이라고 하는게요. 황후에게서 황자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바로 적장자인데 적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윤에게 큰 위협이 될거라는 생각은 안해본게요. 황후의 성정상 제 소생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텐데 황제의 유고시에 오왕의 난에 버금가는 피의 축록이 벌어질수도 있다고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음. 망기가 웃으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철저하게 방책을 세울 작정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자가 듣기로는 모후께 궁중의 여인들이 은밀히 쓰는 비약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리 걱정되신다면 그것을 내어주시지요라고 말함. 태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약이라니 무얼 말하는거냐고 되묻자 망기가 태연자약하게 웃으면서 지난날 자녕궁의 상궁을 통해 황후궁의 궁녀에게 건네주신 여인의 불임을 야기하는 약 말입니다. 태후가 그 말을 듣고 잠깐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가 시치미를 떼면서 그런 약이 어디 있냐고 이 어미에게 그런 말도 안되는 누명을 씌울 작정이냐고 화를 냈음. 망기가 태후와 눈을 마주치고는 모후께서 황후를 이용하여 연귀비의 태를 망가뜨리고 그 일로 황후를 겁박하실 생각이셨던것을 소자가 모를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태후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 어미가 연귀비의 태를 망가뜨리려고 한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껏 모르는척을 한거냐고 되려 화를 냈어.
망기가 다탁에 놓인 다완의 덮개를 열어서 식은 찻물을 화분에 부어버리고는 제 모친의 말간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음. 그럼 소자가 모후께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생각을 하셨냐고 추궁하고 치죄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모후께서 연귀비와 황후를 못마땅해하시는 것을 잘압니다. 황후야 권신의 자손인데다가 황후의 모친이 오래전 모후를 핍박한 일로 그에 대한 원한이 깊으시니 황후에 대한 미움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귀비는 무슨 죄가 있어서 그리도 미워하십니까. 그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왜그리 못마땅해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귀비가 모후께 오만불손하게 군적도 없고 총애만을 믿고 권세를 휘두른적도 없잖습니까.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귀비만 보면 언짢아서 그러오! 연귀비는 영명하고 온순하고 단아한데다 박학다식하기까지 하지. 무엇 하나 모자랄게 없소.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명문가의 여식이라 혈통도 우수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아 슬하에 자식도 여럿인데다 이미 존귀한 귀비의 지위에 있으니 복이 차고 넘치오. 귀비는 입궁 이후로 줄곧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니 다른 이들과 쟁총을 할 일이 없어 다른 비빈들을 핍박하고 모해한적도 없다는 것도 잘아오. 그래서 그저 지고지순한 여인처럼 보이는게요. 그런데 연귀비가 언제까지 후궁의 아귀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지고지순함을 유지할것 같소? 태후가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망기의 옷깃을 매만지다가 망기의 굳은 얼굴을 보고 삐뚜름하게 웃었음.
망기가 태후의 희고 고운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음. 소자가 멀쩡히 살아 두눈을 뜨고 있는 이상 쟁총으로 인한 암투로 연귀비의 섬섬옥수를 더럽히는 일은 없을것입니다. 소자의 비빈들은 선대의 비빈들처럼 물밑에서 음모와 중상모략으로 서로를 해치다못해 황손들까지 해치는 일이 절대 없을것입니다. 소자가 결코 좌시하지 않을테니 두고 보십시오. 태후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다가 만승지존이 처첩의 쟁총에 관여라도 하겠다 이 말이오? 아니면 황제가 궁중의 여인들처럼 암투를 벌여 연귀비에게 해가 되는 비빈들을 해치기라도 할 작정이냐고 버럭 화를 내었음. 망기가 굳은 얼굴로 못할것도 없질 않냐고 은애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게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대답을 하니 태후가 분기탱천해서 옷깃에 달린 염주를 뜯어다가 바닥에 집어던짐. 일국의 황제가 연심에 눈이 멀어 규중의 비천한 계집들이나 할 짓을 한다!? 이 어미가 겨우 그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하라고 그대를 황위에 올린줄 아시오! 황제가 간계로 비빈을 해치면 비천한 여인의 자식이라 배운바가 없어 그리한다고 누대에 걸쳐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을게 뻔한데 이 어미가 그것을 두고 볼것 같습니까! 망기가 몹시 격앙된 표정으로 그동안 두고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소자가 양모에게 모진 핍박을 받고 독이 든 다과를 먹었을때도 그저 가만히 보고만 계셨던게 바로 모후이십니다. 그때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어린 자식의 안위보다 황제의 총애를 얻는게 더 중요하셔서 모르는척 하신것을 제가 모를줄 아십니까. 태후가 그 말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듯 손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이 어미의 출신이 비천하고 지위가 낮아서 자식을 양육할 권한이 없었던거요! 이 어미가 그대를 낳았을때 겨우 상재였고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는데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자식을 지킬수가 있었겠소. 지금 이 어미를 원망하는게요? 이 어미에게 죄가 있다면 다른 비빈들처럼 명문가의 여식이 아닌것과 일찌기 양친을 앓고 고아가 된 까닭에 힘을 실어줄 가문의 권세가 없다는 것뿐인데 그게 자식에게 원망을 받아 마땅한 죄냐고 눈물을 뚝뚝 흘림.
망기가 눈물을 흘리는 태후를 보고 심기가 어지러워서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리자 태후가 그런 망기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림. 황제 이 어미라고 강보에 싸인 어린 자식을 연적이나 다름없는 총비에게 맡기고 싶었는줄 아냐고 서럽게 울었음. 비천한 어미의 슬하에서 자라는것보다 존귀한 신분의 양모에게서 자라는 것이 그대에게 훨씬 이로울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같은 궁에 기거하며 교분이 두터웠던 당시의 정비에게 그대의 양육을 맡아달라고 간청한것이었어요. 그 계집이 그리 악독한 계집인줄 알았다면 내 손으로 배아파 낳은 자식을 맹수의 아가리에 들이미는 짓따위는 하지 않았을거라고 애처롭게 울었음. 이 어미가 쟁총을 한것은 선제를 진심으로 연모해서 그런것도 있었지만 궁중의 암투에서 나와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함. 그로 인해 우리 모자의 정이 이리 희박해질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것입니다. 황제에게 잊혀진 여인이 되어 낡고 허름한 곳에서 기거하며 푸성귀와 식은밥으로 겨우 연명하고 궁인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홀대를 받는다해도 내 품에서 고이 길렀을거라고 숨이 넘어갈듯이 울다가 아무 대답이 없는 망기의 손을 가져와서 얼굴을 부볐음. 아잠 이 어미를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 남은 자식에게까지 미움을 받는다면 이 어미의 지난 삶은 뭐가 됩니까. 그대에게 원망을 받는다면 그대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했던 그간의 노력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황제 이 어미가 그리도 밉습니까.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거냐고 애원을 하다가 망기가 억지로 떼어내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음. 망기가 한숨을 쉬면서 지금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잠이라구요? 어린 시절에는 한번도 그리 다정하게 불러주지 않으시더니 이제와서 아잠이라구요. 어미의 품이 그리운 나이는 지난지 오래입니다. 소자 모후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모후께 말하기 힘든 고충이 있었다는것을 소자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지난날을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또한 아시지 않습니까.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망기가 태후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인사를 올리고 나오자마자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녕궁의 상궁과 궁인들이 고정하시라고 만류하는 소리가 들림.
그 시각 강징은 강채로부터 연못에 빠졌던 날이 죽은 아우의 기일이었다는 말에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음. 강채는 모친과 아우의 생각에 울적한 기분이 들어 수련을 보며 마음을 달래다가 발을 헛디뎌서 그런 변고가 벌어진것이라고 마마께 누를 끼쳐서 송구하다고 했음. 강징의 모친인 우부인이 세상을 뜬 언니 생각에 울적해하자 염리가 따뜻한 차를 마실건을 권했고 강징은 채에게 누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했음. 강징이 올해로 네 나이가 스물하고도 하나인데 아직 혼전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조만간 폐하께 말씀을 올려 좋은 배필을 찾아주겠다고 했음. 강채가 멋쩍게 웃으면서 사생아인 저와 혼인을 할 사내가 있겠냐고 마마의 말씀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함. 강징이 그런 강채가 안쓰러워서 채의 손을 붙잡고 달리 마음에 품은 이도 없냐고 물었어. 강채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연희궁의 태감이 급히 들어와서 서비와 영상재의 거처인 저수궁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고 함. 강징이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냐고 하문하니 태감이 아뢰길 서비가 낮부터 복통이 심했는데 갑자기 하혈을 한다고 말함. 강징이 하혈이라는 말에 놀라서 상궁에게 당장 가마를 대령하라고 일렀음. 그리고는 세 사람에게 서비의 저수궁에 가보아야 할것 같다고 시간이 늦었으니 연희궁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말하고 급히 자리를 떴음.
저수궁의 내실에서 영상재가 침상에 걸터앉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서비의 얼굴을 영견으로 닦아주다가 강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강징이 영상재에게 예를 차릴것이 없다고 만류하고 태의를 불렀냐고 묻고는 그렇다는 말을 듣자 폐하께도 알렸냐고 물음. 영상재가 양심전에 태감을 보냈는데 아직 감감 무소식이라고 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상에 누운 서비를 돌아보았음. 강징이 서비에게 다가가 배가 어떻게 아픈거냐고 물었는데 서비는 이미 반나절을 꼬박 앓은터라 기력이 없어서 그런지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그저 앓기만 함. 강징이 태의는 언제쯤 오는거냐고 닥달을 하려는 때에 태의감의 당직인 태의가 들어와서 무릎을 꿇으려고 했음. 강징이 거추장스럽게 예를 차릴것 없으니 당장 서비를 진맥하라고 일렀어. 태의가 진맥을 하더니 서비께서 회임을 하셨는데 태기가 약해서 유산의 조짐이 있으시다고 고했음. 강징이 회임이라는 말과 유산의 조짐이라는 말에 몹시 당황해서 서비의 배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태의에게 얼른 시침을 하고 탕약을 올리라고 함. 잠시후에 황제가 급히 저수궁안으로 들어섰는데 저수궁의 태감으로부터 회임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건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 강징이 황제가 들었다는 말에 내실에서 나와 웃는 낯으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경하드린다고 말함. 황제가 강징의 팔을 붙잡아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휘휘 둘러봄. 그리고는 말없이 강징의 표정을 살피다가 강징으로부터 신첩의 얼굴에 티끌이라도 묻었냐고 의아해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 저었어. 강징은 황제에게 서비가 많이 놀라고 당황하여 경황이 없을텐데 안으로 들어가셔서 곁에 있어주시라고 청했음. 황제가 뭔가 할말이 있는듯 강징의 손을 붙잡았지만 강징이 슬그머니 손을 빼고는 서비가 회임하였으니 황손이 귀한 황실의 큰 경사이고 신첩도 기쁘기 한량없다고 말했음. 강징이 수강궁의 태황태후마마와 자녕궁의 태후마마께는 태감과 상궁을 보내 희소식을 전했다고 하자 황제가 한숨을 쉬며 그대가 고생이 많다고 어깨를 어루만졌어. 강징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신첩이 중궁이신 황후를 대리하여 육궁을 통솔하니 당연히 해야 할 소임이라고 말하고는 슬쩍 뒤로 물러났음. 그리고는 신첩은 이만 물러가보겠다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떴어.
강징은 저수궁의 궁문을 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뻔 했음. 상궁이 급히 부축하면서 고단하실테니 가마에 오르시라고 하자 연희궁까지 걸어가고 싶다고 말함. 상궁은 강징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가마꾼들과 다른 궁인들을 물리고 등롱 하나만 손에 들고 강징의 뒤를 따랐음. 강징은 황궁의 붉은 담장 밑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이지러지는 달빛에 마음이 괴로워져서 억지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림. 너른 소매로 곱게 단장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자 상궁이 마마하고 손을 붙잡으려고 함. 그런데 강징이 손을 앞으로 빼자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주변을 살폈어. 강징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크게 소리를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죽여 울다가 이제는 담장에 이마를 대고 서러이 울기 시작함. 강징은 일국의 황제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신이 무척이나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제왕에게는 사랑놀음도 한낱 유희거리뿐 일터인데 그런 사내에게 진실된 부부의 정을 바란다는게 헛된 꿈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커져가는 욕심을 억누를수가 없었던거겠지. 황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은애한다고 해도 밤이 오면 다른 여인을 찾을것이고 언젠가는 다른 여인들에게 자식을 볼것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리 되니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이 아득해졌음. 지금 궁중에 있는 비빈들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시기가 되면 보다 어리고 미색이 뛰어난 후궁들을 들여서 그들에게서 자식을 보겠지. 제왕가에 시집을 온 이상 낭군과의 백년해로는 헛된 꿈일뿐이고 황궁에는 진정한 사랑따위 존재하지 않는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픈것인지 모를 일이었음. 강징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이처럼 몸이 빳빳해져서 숨을 몰아쉬다가 상궁하고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음. 그러다가 눈앞이 아득해지고 구역질이 치밀어 상궁에게 기댄채로 거친 숨을 몰아쉼.
그 시각 황후는 양심전의 서쪽 연희당에서 황제가 자신을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음. 벌써 해시(21시~23시)하고 일각인데도 태감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밖에 있는 상궁을 소리쳐 불렀음. 그때 상궁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와서 일단 경인궁으로 돌아가셨다가 날이 밝는대로 저수궁으로 가셔야 할것 같다고 아룀. 황후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데 상궁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저수궁의 서비가 회임을 하여 폐하께서 저수궁으로 행차하셨다고 말함. 황후는 서비가 회임을 했다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도대체 그게 무슨하고 중얼거리다가 상궁에게 따져물음. 서비가 무슨 수로 회임을 하였단 말이냐! 폐하께서 석달 가까이 비빈들의 녹두패를 뒤집으신적이 없거늘! 상궁이 황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를 살피며 서비가 회임한지 벌써 넉달이나 되었답니다. 일전에 폐하께서 연귀비의 궁에 발길을 잠시 끊으신적이 있사온데 그 사이에 서비가 두번 정도 시침을 든것으로 압니다. 아무래도 그때 황손을 잉태한것 같다고 하니 황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매에 넣어두었던 향낭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름. 서비까지 황손을 회임하였는데 본궁에게는 왜 그런 경사가 생기질 않는것이야! 도대체 왜!!! 황후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침의 차림으로 밖을 뛰쳐나가자 상궁이 급히 뒤를 따름. 황후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맨발로 연희당의 앞뜰을 배회하다가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오늘이 보름인데 폐하께서 아니 오신단 말이냐! 오늘이 합궁 길일이라 하지 않았어! 당장 저수궁으로 가서 폐하를 모시고 오거라! 모시고 오래두! 상궁이 황후의 어깨에 얇은 피풍의를 둘러주며 마마 길일은 또 있으니 제발 고정하십시오. 이러다 존체에 해가 될까 저어됩니다라고 만류함. 황후가 아이처럼 울면서 폐하 신첩에게도 아이를 주세요. 왜 제게는 아이를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오씨여서 그러시는것이냐고 울부짖다가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허망한 표정으로 저수궁이 있는 쪽을 쳐다봄. 그리고는 상궁에게 날이 밝는대로 태극전에 기별을 하여 심상재를 경인궁으로 오라고 해라. 황후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연귀비면 몰라도 서비까지 황상의 성총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것이다. 황후가 입꼬리를 올려 웃다가 상궁을 뒤돌아보며 마치 귀역(귀신과 불여우: 음험하여 남몰래 남을 해치는 사람)씌인듯이 기괴한 표정으로 말했음. 다음에 태어날 황손은 다른 여인의 태가 아니라 본궁의 태에서 나온 황자여야만 해. 본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그렇게 만들것이다.
망기강징 망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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