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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6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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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신과 금광요는 운심부지처 입구로 향하는 산길을 올랐다.
꽤 더운 날씨였다. 남희신이 돌아보니 뒤를 따라오는 금광요의 하얀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평소보다 말수가 적을 뿐,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흥분해서 울부짖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마음이 쓰였다.
“아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던 금광요가 고개를 들었다.
“예, 형님.”
“무슨 생각을 하느냐?”
금광요가 난처한 듯 웃었다. 아마도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그 대답이 남희신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하는 것 같았다.
남희신이 걸음을 멈추자 금광요도 손을 모으고 다소곳하게 섰다. 남희신은 역시 마음이 언짢았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을 이제 와 바꾸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요, 혹여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나에게 말하거라.”
동글동글 윤기나는 눈동자가 쳐다보자 더욱 마음이 애틋했다.
“허한 마음은 내버려두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법이다. 지금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만 같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남희신이 다정하게 말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금광요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그 진동이 남희신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신경쓰였다.
“자, 어서 올라가자.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다.”
금일 운심부지처 경내는 특히 고요했다. 오후 수업을 쉬는 바람에 신이 난 문하생들이 외곽으로 몰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위무선이 폭포수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으려니 소년 수사들이 와글와글 들이닥쳐 잠을 깨웠다. 가재를 잡느니, 물고기를 잡느니 하면서 텀벙거리기 시작하자 다시 잠들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은 위무선과 있으면 덜 혼날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저와 남망기가 친한 것을 보고 그러나 본데, 그러다 언젠가 된통 혼이 날 거라고 혼자서 웃었다.
어린애들이 이렇게 다 빠져나왔으면 남망기는 또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생각하던 그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해도 남망기가 상대를 안 해 주니 이 편에서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뱃속에서 은은하게 뻗어나가는 영기가 느껴지는데, 진정으로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런 일까지 해 주고선.’
신경만 쓰이게 하고. 나와 둘도 없는 지기가 되든지, 아니면 은혜를 갚을 방법이라도 알려 줘야지. 대체 이러는 법이 어디 있나?
아직도 남망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준 것이 너무나 커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전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건데.
맨날 혼자서 말없이 하얗고 깨끗한 얼굴만 하곤. 영 손에 닿지 않을 사람처럼.
“내가 포기할 줄 알고.”
“뭐라구요? 위 선배?”
바로 옆에서 자꾸 물을 튀기던 소년이 물었다.
“너네 함광군 말이다!”
아이들은 웃기만 하고 또 물고기잡이에 열심이었다. 심각한 얘기엔 아무 관심이 없다.
“하긴 나도 너네 나이 때는 그랬지.”
아직 늙으려면 그도 한참을 먼 나이이건만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하긴 열 몇 살의 남망기와 자신도 어렸던 것 같다. 수십년이나 지난 것도 아닌데 그 때의 사건들은 왜 그렇게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지는지 몰랐다.
문득 남망기가 자신의 술병을 뒤집어엎던 기억이 떠오른 위무선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야! 다들! 내 얘기좀 들어! 모여 봐!”
그때 갑자기 멀리서 한 소년이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나 아까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저 쪽 봉암산에서 요수가 나타났대.”
“요수? 얼마만한데? 어떤 요수?”
“그건 몰라. 나무꾼 하나가 다쳐서 겨우 돌아왔대나 봐.”
“그럼 대단한 요수는 아니겠네.”
“당연하지. 진짜로 대단한 요수는 자기 구역을 가지고 있는 걸.”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를 듣던 위무선이 눈을 찡그리며 돌아누웠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한 마리 요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구경 갈까?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잖아.”
아이들이 이런 작당을 하기 시작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위무선이 귀찮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야, 이 꼬맹이들아. 너희들이 요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까불지 말고 물고기나 계속 잡아.”
“누가 잡는대요. 구경만 하고 올 거에요.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지.”
열 명도 넘는 소년들은 얼른 옷을 주워입으며 당장에 몰려갈 기세였다. 위무선은 한숨이 나왔다.
꽉 막힌 남씨들 흉내를 내서 야단을 치는 아니꼬운 짓을 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래, 이런 것도 다 공부니까 뭐...”
오래지 않아 봉암산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다닐 법한 산길이 대낮인데도 텅 비어 있었다. 아마 요수가 나타나며 인적이 끊긴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요란하게 수풀을 들쑤시는 것을 보고 위무선은 아마 요수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태평스럽게 생각했다. 떠돌아다니는 경계심 많은 요수가 아이들이라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었다. 그러니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운심부지처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운수 사납게도 어떤 소년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리 형님의 책에서 베껴 둔 거야. 이걸 붙여 두면 수공이 있는 요의 종류는 뭐든 몰려든대.”
위무선이 고개를 휙 돌려 보니 키가 큰 소년이 막 손에 든 종이에 뭔가를 그려넣고 있었다.
그런 주문은 초보자가 흉내만 내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무용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만약 요수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면...
“멈춰!”
갑자기 위무선이 엄하게 외치자 와글거리는 소란이 일제히 멎었다. 순간적으로 깔린 정적 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흩어져, 이 멍청이들아!”
위무선이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덮치자 그가 잽싸게 몸을 숙이며 근처에 있던 소년들을 떠다밀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뭉쳐 있던 소년들 몇이 패검을 떨어뜨리며 넘어졌다.
요수가 홱 몸을 돌리고 다시 앞발질을 하며 덤벼들자 소년들도 뒤늦게 검을 뽑아들고는 정신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요수는 표범과 비슷한 생김새였는데 형체가 많이 상하여 본래의 종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색이 거무칙칙한 것이 수풀 안으로 사라지면 종적이 끊겨버렸다가, 전연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며 사납게 할퀴고 으르렁대기를 반복했다.
삽시간에 산길은 아이들이 아우성을 치고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고 하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 중심에서 위무선이 피로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교육을 잘 받았는지 혼자 도망가는 아이는 없었고 어설프게나마 패검을 가진 소년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보호하며 요수를 위협했다. 갑자기 허를 찔려 정신이 흐트러졌던 것뿐, 내버려두면 알아서 요수를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며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곧장 위무선이 입술을 오므려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마치 주인의 부름을 받은 개처럼 홱 고개를 돌린 요수가 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수편을 튕겨내서 잡은 뒤 정면을 향해 멋드러지게 베었다. 그러나 영력이 부족했던지 타격감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요수가 할퀴어대는 서슬에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세상에, 이따위 것도 못 잡는다고?”
투덜거리는 새 요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지만 피냄새에 흥분했으니 금방 다시 덤벼들어 올 터였다.
위무선이 소매와 함께 길게 찢긴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 짐승 녀석,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리는구나.”
그는 재빨리 피를 찍어서 하얀 소매에다 주문을 휘갈겼다. 그리고는 소매로 앞을 가리고 천천히 돌며 주위를 살폈다. 진지한 분위기에 눌린 듯, 소년들도 저마다 가만히 멈춰선 채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완전한 정적에 묻힌 상태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위무선이 번개같이 돌아섰다. 곧장 요수가 덤벼들며 시야를 커다랗게 덮쳤다.
이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년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찔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조심조심 실눈을 뜨며 바라보자, 위무선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낡은 이불더미 같은 꼴의 요수가 쓰러져 있었다.
해치운 걸까? 하고 불안하게 서로를 쳐다보던 소년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기웃거렸다.
요수의 몸에서 시익시익 하고 수공이 흩어지는 불쾌한 소리가 일어나며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요수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소년들이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무선은 요수를 발로 툭 차고는 스스로 혈도를 눌러 출혈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수편을 주워서 쨍 소리가 나게 검집에 집어넣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을 쌓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영력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무척 기분이 상했다.
“이제부턴 나를 위대인이라고 불러라, 이 애송이 놈들아. 검도 제대로 쥐고 있지 못하는 녀석들이 구경은 무슨...”
그는 괜히 소년들에게 툴툴거리며 또다시 요수를 발로 찼다. 소년들은 주눅이 들었는지 놀랐는지, 입을 꼭 닫고는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제쯤 기뻐하며 박수라도 쳐야 할 텐데,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위무선이 보니까 소년들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조금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위무선은 얕은 숨을 삼키며 요수가 코 앞에서 덤벼도 안 나던 식은땀이 솟았다.
“함광군...!”
결국 가장 무서운 세 이름자를 듣고 만 위무선이 슬금슬금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망기가 와서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위무선은 얼른 부적 대신 사용했던 소매를 등 뒤로 감추며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남망기가 소년 자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쏘아보았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가 매섭게 말했다.
“시검당에 가서 꿇어앉아.”
남망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소년들은 얼른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며, 오늘은 정말 죽었다고 속으로 곡을 했다.
“남잠... 봤어?”
위무선이 눈을 깜작깜작거리며 왔다갔다 하니 남망기의 유리알같은 눈이 따라서 왔다갔다하며 꽁꽁 얼려버릴 듯했다.
“남잠... 귓것을 조종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남망기의 눈매가 너무 사나웠기 때문에, 그가 손을 들자 위무선은 순간 눈을 감으며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남망기는 단지 소매를 홱 뿌리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위무선은 망했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내 뒤를 쫓기 시작했다.
“남잠- 남가 둘째 공자님, 스승님, 제가 잘못했어요.”
위무선이 애교를 떨면서 말을 붙였지만 남망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새파란 눈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니까.”
“...”
“남잠, 나 너 땜에 죽을 뻔했는데.”
이 말에 남망기가 발을 멈추더니 돌아보았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반응을 보이자 금세 여유를 되찾으며 수편을 빙빙 돌렸다.
“처음부터 그냥 주문으로 날려버릴 수도 있었는데, 이 변변치 않은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혼쭐이 났다니까. 나도 노력했다고. 자, 봐.”
위무선이 그렇게 말하며 소매를 걷어서 할퀸 자국을 보여주자 남망기의 눈이 커지며 이마에 사나운 주름이 잡혔다. 벌써 피가 말라붙은 상처가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깊게 패여서 본인의 눈으로 봐도 섬뜩해 보였기에 위무선은 윽, 짧은 신음을 토하며 도로 소매로 덮어버렸다.
“너...!”
남망기의 숨소리가 높아지며 더욱 화가 난 것 같았으나 어쨌든 주의를 돌렸으니 성공이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다치길 잘 했다고 생각한 위무선이 거드름을 피웠다.
“걱정 마, 내가 어린애냐. 패검을 못 쓰는 것뿐이지 다른 건 너보다도 나을 걸. 아, 현살술. 그건 내가 한 수 접어 드리지.”
“...”
“그럼 된 거지, 남잠? 응? 말 좀 해봐!”
“...10번.”
“뭐라고?”
“<예측편> 열 번.”
“뭐, 뭐어?!!!”
위무선이 비명처럼 외치자 남망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맞받아치듯 똑똑히 말했다.
“<예측편>을 열 번 써!”
“미, 미쳤어?! <예측편>을 열 번이나 쓰라고?!”
“반성해!”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요수를 막았다고! 네 멍청한 꼬맹이들을 내가 구해 줬잖아!”
“애초에 데리고 오지도 말았어야지!”
“내가 데리고 온 게 아ㄴ... 아니, 남잠~”
다시금 냉정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남망기를 쫓아가며 계속 말을 붙였지만 성과가 없자 위무선은 포기하지 않고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한 치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며 어깨를 밀치고, 꼬집고, 옷소매를 당기고, 머리카락을 쳐서 날리기도 했다. 스스로가 너무 어린애같이 군다거나, 도리어 화를 돋구고 있다는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확실히 화를 내어 줬으면 싶었다. 뭐가 됐든 무관심보다는 나으니까.
마침내 남망기가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그는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화가 났을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 차이가 보이지 않으니 위무선은 단지 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에 의기양양 웃었다.
해사하게 웃는 눈빛과 짧게 시선이 부딪힌 직후 남망기가 양 손바닥으로 위무선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으앗!”
위무선은 거세게 밀쳐져서 땅에 나동그라지는 순간 ‘너무 화나게 했나’ 싶은 뒤늦은 우려가 스쳤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고 뭐고 아무 것도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밀쳐낸 간격을 좁히며 빠르게 다가온 남망기가 위무선을 덮쳤다. 일어나려는 애쓰는 어깨를 다시 밀쳐서 떨어뜨리고는, 위무선이 다음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아득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읍!”
상상조차 못 해 본 이변에 놀란 위무선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남망기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 이빨로 찍어버릴 듯 난폭하게 짓눌렀다. 그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곧바로 혀가 밀려들어오며 화가 난 듯 이와 입속을 마구 더듬었다. 놀라서 숨을 들이키자 언제나 남망기의 몸에서 나던 단향목 향기가 콧 속으로 흠뻑 밀려들어오며 2차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물어뜯을 듯 거친 입맞춤에 남망기의 이빨이 위무선의 이와 입술을 긁어 여러 개의 생채기를 내었다. 그에 잠시 갈 곳을 모르던 양 손이 흠칫 반항하듯 자신의 어깨를 밀자 남망기는 각각의 손목을 붙잡아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힘으로 내리눌렀다.
숨이 막힐 것 같아서 헐떡거리며 입이 더 크게 벌어진 위무선은 그 바람에 남망기의 혀가 자신의 혀에 얽혀들자 그만 무엇을 하려던 건지조차 잊고 말았다.
한참 후, 사나운 기세가 수그러들며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물러가는 것을 느끼고서야 위무선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슬며시 눈을 떴더니, 아직도 남망기의 얼굴이 코 앞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비로소 얼마나 화가 난 건지 알 것 같았다. 더불어 분노와는 별개의 어떤 열기가 느껴졌고, 그로 인해 무언가가 훅 치밀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50번.”
“어...”
위무선이 멍청하게 말을 흐리자 아직도 그를 덮친 채, 손아귀 가득 머리채와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남망기가 무섭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했다.
“<예측편> 50번.”
“뭐?!”
이번에는 정신이 번쩍 든 위무선이 일어나려고 용을 썼다. 하지만 남망기가 다시 힘을 주어 누르며 명료한 소리로 경고했다.
“다 쓸 때까지 나한테 오지 마.”
말이 끝난 후 훌쩍 뛰어 일어난 남망기는 그 자리에서 피진에 오르더니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위무선은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다가, 그만 힘이 쭉 빠졌다.
구름이 드문드문한 하늘이 맑고 상쾌한 것이 그지없이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감이 더욱 괴상하게 느껴져, 위무선은 그 자리에 대자로 뻗은 채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11) (12) (13) (14) (15) (16) (17) (18) (19)
남희신과 금광요는 운심부지처 입구로 향하는 산길을 올랐다.
꽤 더운 날씨였다. 남희신이 돌아보니 뒤를 따라오는 금광요의 하얀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평소보다 말수가 적을 뿐,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흥분해서 울부짖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마음이 쓰였다.
“아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던 금광요가 고개를 들었다.
“예, 형님.”
“무슨 생각을 하느냐?”
금광요가 난처한 듯 웃었다. 아마도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그 대답이 남희신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하는 것 같았다.
남희신이 걸음을 멈추자 금광요도 손을 모으고 다소곳하게 섰다. 남희신은 역시 마음이 언짢았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을 이제 와 바꾸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요, 혹여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나에게 말하거라.”
동글동글 윤기나는 눈동자가 쳐다보자 더욱 마음이 애틋했다.
“허한 마음은 내버려두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법이다. 지금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만 같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남희신이 다정하게 말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금광요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그 진동이 남희신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신경쓰였다.
“자, 어서 올라가자.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다.”
금일 운심부지처 경내는 특히 고요했다. 오후 수업을 쉬는 바람에 신이 난 문하생들이 외곽으로 몰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위무선이 폭포수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으려니 소년 수사들이 와글와글 들이닥쳐 잠을 깨웠다. 가재를 잡느니, 물고기를 잡느니 하면서 텀벙거리기 시작하자 다시 잠들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은 위무선과 있으면 덜 혼날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저와 남망기가 친한 것을 보고 그러나 본데, 그러다 언젠가 된통 혼이 날 거라고 혼자서 웃었다.
어린애들이 이렇게 다 빠져나왔으면 남망기는 또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생각하던 그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해도 남망기가 상대를 안 해 주니 이 편에서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뱃속에서 은은하게 뻗어나가는 영기가 느껴지는데, 진정으로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런 일까지 해 주고선.’
신경만 쓰이게 하고. 나와 둘도 없는 지기가 되든지, 아니면 은혜를 갚을 방법이라도 알려 줘야지. 대체 이러는 법이 어디 있나?
아직도 남망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준 것이 너무나 커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전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건데.
맨날 혼자서 말없이 하얗고 깨끗한 얼굴만 하곤. 영 손에 닿지 않을 사람처럼.
“내가 포기할 줄 알고.”
“뭐라구요? 위 선배?”
바로 옆에서 자꾸 물을 튀기던 소년이 물었다.
“너네 함광군 말이다!”
아이들은 웃기만 하고 또 물고기잡이에 열심이었다. 심각한 얘기엔 아무 관심이 없다.
“하긴 나도 너네 나이 때는 그랬지.”
아직 늙으려면 그도 한참을 먼 나이이건만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하긴 열 몇 살의 남망기와 자신도 어렸던 것 같다. 수십년이나 지난 것도 아닌데 그 때의 사건들은 왜 그렇게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지는지 몰랐다.
문득 남망기가 자신의 술병을 뒤집어엎던 기억이 떠오른 위무선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야! 다들! 내 얘기좀 들어! 모여 봐!”
그때 갑자기 멀리서 한 소년이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나 아까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저 쪽 봉암산에서 요수가 나타났대.”
“요수? 얼마만한데? 어떤 요수?”
“그건 몰라. 나무꾼 하나가 다쳐서 겨우 돌아왔대나 봐.”
“그럼 대단한 요수는 아니겠네.”
“당연하지. 진짜로 대단한 요수는 자기 구역을 가지고 있는 걸.”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를 듣던 위무선이 눈을 찡그리며 돌아누웠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한 마리 요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구경 갈까?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잖아.”
아이들이 이런 작당을 하기 시작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위무선이 귀찮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야, 이 꼬맹이들아. 너희들이 요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까불지 말고 물고기나 계속 잡아.”
“누가 잡는대요. 구경만 하고 올 거에요.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지.”
열 명도 넘는 소년들은 얼른 옷을 주워입으며 당장에 몰려갈 기세였다. 위무선은 한숨이 나왔다.
꽉 막힌 남씨들 흉내를 내서 야단을 치는 아니꼬운 짓을 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래, 이런 것도 다 공부니까 뭐...”
오래지 않아 봉암산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다닐 법한 산길이 대낮인데도 텅 비어 있었다. 아마 요수가 나타나며 인적이 끊긴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요란하게 수풀을 들쑤시는 것을 보고 위무선은 아마 요수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태평스럽게 생각했다. 떠돌아다니는 경계심 많은 요수가 아이들이라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었다. 그러니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운심부지처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운수 사납게도 어떤 소년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리 형님의 책에서 베껴 둔 거야. 이걸 붙여 두면 수공이 있는 요의 종류는 뭐든 몰려든대.”
위무선이 고개를 휙 돌려 보니 키가 큰 소년이 막 손에 든 종이에 뭔가를 그려넣고 있었다.
그런 주문은 초보자가 흉내만 내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무용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만약 요수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면...
“멈춰!”
갑자기 위무선이 엄하게 외치자 와글거리는 소란이 일제히 멎었다. 순간적으로 깔린 정적 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흩어져, 이 멍청이들아!”
위무선이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덮치자 그가 잽싸게 몸을 숙이며 근처에 있던 소년들을 떠다밀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뭉쳐 있던 소년들 몇이 패검을 떨어뜨리며 넘어졌다.
요수가 홱 몸을 돌리고 다시 앞발질을 하며 덤벼들자 소년들도 뒤늦게 검을 뽑아들고는 정신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요수는 표범과 비슷한 생김새였는데 형체가 많이 상하여 본래의 종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색이 거무칙칙한 것이 수풀 안으로 사라지면 종적이 끊겨버렸다가, 전연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며 사납게 할퀴고 으르렁대기를 반복했다.
삽시간에 산길은 아이들이 아우성을 치고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고 하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 중심에서 위무선이 피로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교육을 잘 받았는지 혼자 도망가는 아이는 없었고 어설프게나마 패검을 가진 소년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보호하며 요수를 위협했다. 갑자기 허를 찔려 정신이 흐트러졌던 것뿐, 내버려두면 알아서 요수를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며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곧장 위무선이 입술을 오므려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마치 주인의 부름을 받은 개처럼 홱 고개를 돌린 요수가 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수편을 튕겨내서 잡은 뒤 정면을 향해 멋드러지게 베었다. 그러나 영력이 부족했던지 타격감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요수가 할퀴어대는 서슬에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세상에, 이따위 것도 못 잡는다고?”
투덜거리는 새 요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지만 피냄새에 흥분했으니 금방 다시 덤벼들어 올 터였다.
위무선이 소매와 함께 길게 찢긴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 짐승 녀석,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리는구나.”
그는 재빨리 피를 찍어서 하얀 소매에다 주문을 휘갈겼다. 그리고는 소매로 앞을 가리고 천천히 돌며 주위를 살폈다. 진지한 분위기에 눌린 듯, 소년들도 저마다 가만히 멈춰선 채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완전한 정적에 묻힌 상태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위무선이 번개같이 돌아섰다. 곧장 요수가 덤벼들며 시야를 커다랗게 덮쳤다.
이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년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찔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조심조심 실눈을 뜨며 바라보자, 위무선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낡은 이불더미 같은 꼴의 요수가 쓰러져 있었다.
해치운 걸까? 하고 불안하게 서로를 쳐다보던 소년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기웃거렸다.
요수의 몸에서 시익시익 하고 수공이 흩어지는 불쾌한 소리가 일어나며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요수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소년들이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무선은 요수를 발로 툭 차고는 스스로 혈도를 눌러 출혈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수편을 주워서 쨍 소리가 나게 검집에 집어넣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을 쌓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영력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무척 기분이 상했다.
“이제부턴 나를 위대인이라고 불러라, 이 애송이 놈들아. 검도 제대로 쥐고 있지 못하는 녀석들이 구경은 무슨...”
그는 괜히 소년들에게 툴툴거리며 또다시 요수를 발로 찼다. 소년들은 주눅이 들었는지 놀랐는지, 입을 꼭 닫고는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제쯤 기뻐하며 박수라도 쳐야 할 텐데,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위무선이 보니까 소년들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조금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위무선은 얕은 숨을 삼키며 요수가 코 앞에서 덤벼도 안 나던 식은땀이 솟았다.
“함광군...!”
결국 가장 무서운 세 이름자를 듣고 만 위무선이 슬금슬금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망기가 와서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위무선은 얼른 부적 대신 사용했던 소매를 등 뒤로 감추며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남망기가 소년 자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쏘아보았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가 매섭게 말했다.
“시검당에 가서 꿇어앉아.”
남망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소년들은 얼른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며, 오늘은 정말 죽었다고 속으로 곡을 했다.
“남잠... 봤어?”
위무선이 눈을 깜작깜작거리며 왔다갔다 하니 남망기의 유리알같은 눈이 따라서 왔다갔다하며 꽁꽁 얼려버릴 듯했다.
“남잠... 귓것을 조종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남망기의 눈매가 너무 사나웠기 때문에, 그가 손을 들자 위무선은 순간 눈을 감으며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남망기는 단지 소매를 홱 뿌리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위무선은 망했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내 뒤를 쫓기 시작했다.
“남잠- 남가 둘째 공자님, 스승님, 제가 잘못했어요.”
위무선이 애교를 떨면서 말을 붙였지만 남망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새파란 눈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니까.”
“...”
“남잠, 나 너 땜에 죽을 뻔했는데.”
이 말에 남망기가 발을 멈추더니 돌아보았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반응을 보이자 금세 여유를 되찾으며 수편을 빙빙 돌렸다.
“처음부터 그냥 주문으로 날려버릴 수도 있었는데, 이 변변치 않은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혼쭐이 났다니까. 나도 노력했다고. 자, 봐.”
위무선이 그렇게 말하며 소매를 걷어서 할퀸 자국을 보여주자 남망기의 눈이 커지며 이마에 사나운 주름이 잡혔다. 벌써 피가 말라붙은 상처가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깊게 패여서 본인의 눈으로 봐도 섬뜩해 보였기에 위무선은 윽, 짧은 신음을 토하며 도로 소매로 덮어버렸다.
“너...!”
남망기의 숨소리가 높아지며 더욱 화가 난 것 같았으나 어쨌든 주의를 돌렸으니 성공이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다치길 잘 했다고 생각한 위무선이 거드름을 피웠다.
“걱정 마, 내가 어린애냐. 패검을 못 쓰는 것뿐이지 다른 건 너보다도 나을 걸. 아, 현살술. 그건 내가 한 수 접어 드리지.”
“...”
“그럼 된 거지, 남잠? 응? 말 좀 해봐!”
“...10번.”
“뭐라고?”
“<예측편> 열 번.”
“뭐, 뭐어?!!!”
위무선이 비명처럼 외치자 남망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맞받아치듯 똑똑히 말했다.
“<예측편>을 열 번 써!”
“미, 미쳤어?! <예측편>을 열 번이나 쓰라고?!”
“반성해!”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요수를 막았다고! 네 멍청한 꼬맹이들을 내가 구해 줬잖아!”
“애초에 데리고 오지도 말았어야지!”
“내가 데리고 온 게 아ㄴ... 아니, 남잠~”
다시금 냉정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남망기를 쫓아가며 계속 말을 붙였지만 성과가 없자 위무선은 포기하지 않고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한 치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며 어깨를 밀치고, 꼬집고, 옷소매를 당기고, 머리카락을 쳐서 날리기도 했다. 스스로가 너무 어린애같이 군다거나, 도리어 화를 돋구고 있다는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확실히 화를 내어 줬으면 싶었다. 뭐가 됐든 무관심보다는 나으니까.
마침내 남망기가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그는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화가 났을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 차이가 보이지 않으니 위무선은 단지 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에 의기양양 웃었다.
해사하게 웃는 눈빛과 짧게 시선이 부딪힌 직후 남망기가 양 손바닥으로 위무선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으앗!”
위무선은 거세게 밀쳐져서 땅에 나동그라지는 순간 ‘너무 화나게 했나’ 싶은 뒤늦은 우려가 스쳤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고 뭐고 아무 것도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밀쳐낸 간격을 좁히며 빠르게 다가온 남망기가 위무선을 덮쳤다. 일어나려는 애쓰는 어깨를 다시 밀쳐서 떨어뜨리고는, 위무선이 다음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아득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읍!”
상상조차 못 해 본 이변에 놀란 위무선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남망기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 이빨로 찍어버릴 듯 난폭하게 짓눌렀다. 그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곧바로 혀가 밀려들어오며 화가 난 듯 이와 입속을 마구 더듬었다. 놀라서 숨을 들이키자 언제나 남망기의 몸에서 나던 단향목 향기가 콧 속으로 흠뻑 밀려들어오며 2차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물어뜯을 듯 거친 입맞춤에 남망기의 이빨이 위무선의 이와 입술을 긁어 여러 개의 생채기를 내었다. 그에 잠시 갈 곳을 모르던 양 손이 흠칫 반항하듯 자신의 어깨를 밀자 남망기는 각각의 손목을 붙잡아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힘으로 내리눌렀다.
숨이 막힐 것 같아서 헐떡거리며 입이 더 크게 벌어진 위무선은 그 바람에 남망기의 혀가 자신의 혀에 얽혀들자 그만 무엇을 하려던 건지조차 잊고 말았다.
한참 후, 사나운 기세가 수그러들며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물러가는 것을 느끼고서야 위무선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슬며시 눈을 떴더니, 아직도 남망기의 얼굴이 코 앞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비로소 얼마나 화가 난 건지 알 것 같았다. 더불어 분노와는 별개의 어떤 열기가 느껴졌고, 그로 인해 무언가가 훅 치밀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50번.”
“어...”
위무선이 멍청하게 말을 흐리자 아직도 그를 덮친 채, 손아귀 가득 머리채와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남망기가 무섭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했다.
“<예측편> 50번.”
“뭐?!”
이번에는 정신이 번쩍 든 위무선이 일어나려고 용을 썼다. 하지만 남망기가 다시 힘을 주어 누르며 명료한 소리로 경고했다.
“다 쓸 때까지 나한테 오지 마.”
말이 끝난 후 훌쩍 뛰어 일어난 남망기는 그 자리에서 피진에 오르더니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위무선은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다가, 그만 힘이 쭉 빠졌다.
구름이 드문드문한 하늘이 맑고 상쾌한 것이 그지없이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감이 더욱 괴상하게 느껴져, 위무선은 그 자리에 대자로 뻗은 채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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