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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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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무선은 땅콩을 휙 던져서 입으로 받아 먹었다.
  그의 주위를 올망졸망 둘러싼 소년들도 위무선이 준 땅콩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전에는 결국 남망기를 끌고 하산하지 못했다. 대신 혼자서 갔던 위무선은 차마 술은 마시지 못하고, 기름지고 매운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는 간식을 잔뜩 사서 짊어지고 돌아왔다.
  어린 자제들은 자세를 바로 하라느니, 조용히 하라느니 하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위무선이 무척 좋았다. 
  그들은 위무선이 어떤 사람이고, 사일지정 때 구체적으로 어떤 공을 세웠는지 잘 모른다. 어른들은 온가가 횡포를 부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역시 아이들이라 심각한 과거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위무선이 함광군과 동년배인 것 같은데 그에게 수업을 받고 있는 것만이 의문이었다.
  위무선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내가 너네 함광군한테 죄를 지어서 매일 닦이는 중이야.”
  “?”
  그는 며칠 전 남망기에게 빈 부적종이까지 뺏긴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진짜로 간단한 술법만 사용할 거야. 아주 살짝 충격을 준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시체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괜찮잖아.”
  “안 돼. 너는 금단이 약해서 습관이 들었다간 자칫 더 강한 주술에 손을 대기 쉬워. 금단을 맺을 때까진 아무리 사소한 주술이라도 사용하지 마.”
  결국 위무선은 무거운 수편과 옥피리 말고는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벽창호 같으니라고... 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남잠!”
  위무선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외치자 아이들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 놀랐다. 눈을 뒤룩거리며 호랑이라도 보는 듯 조심스레 돌아보고는 남망기가 멀리 있는 것을 깨닫고 몸을 더 낮추었다.
  위무선은 아이들이 개미떼처럼 기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런데 남망기는 대답도 않고 길을 따라 저 쪽으로 가 버렸다.
  “남잠!”
  마주칠 때마다 이 편에서 먼저 말을 걸어야 했고, 남망기는 여전히 냉기 도는 태도였다. 아무래도 이건 운심부지처에 서린 독안개 때문이 분명하다고 투덜대며 얼른 쫓아갔다. 
  남희신이 질겁을 했지만, 말액을 건드리는 것이 습관이 된 위무선은 이번에도 남망기를 따라잡자마자 멋대로 손이 뻗어갈 뻔했다.
  ‘뭐 어때, 남잠은 날 좋아한다구. 예전엔 말액을 건드리면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요즘은 안 그러잖아. 그게 증거지.’
  그렇지만 반려자만 만질 수 있는 물건이라니, 어찌나 무안하던지. 그래서 옛날엔 그리도 화를 냈던가 보다.
  ‘하지만 부인이 생길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좀 만지면 어때?’
  위무선은 입에 손바닥을 대고 푸웁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망기가 수상하다는 듯 눈총을 주었다.
  “남잠, 날이 꽤 덥지?”
  “...”
  “저기, 우리 수영하러 가자.”
  채의진에 놀러가자고 했다가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햇살이 따가우니 대뜸 물 생각이 났다. 연화오는 한 발짝만 나가면 사방 천지가 호수라 더울 땐 실컷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칠 수 있는데 운심부지처에서는 수영을 할만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냉천 뿐 아니라 산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물은 어디든 심하게 차가웠다.
  “안 가.”
  “내가 좋은 델 알거든. 물이 아주 맑고, 진짜로 선녀가 내려올 것 같은 산이야. 달밤에는...”
  “물엔 익숙하지 않아.”
  “점잔만 빼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줄게.”
  남망기는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위무선은 끈덕지게 따라가며 시비를 걸었다.
  “남잠, 너 운심부지처에 뼈라도 묻을 셈이야?”
  “...”
  “너 요즘 몸에서 향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 노인네 같다고.”
  그렇게 말하며 수편으로 남망기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별 생각 없이 찌른 것이 그만 옆구리에 끼고 있던 몇 권의 책이 와르르 쏟아졌다. 남망기가 위무선을 한 번 노려본 뒤 허리를 굽혀 줍기 시작했다. 그래도 위무선은 심통이 나서 뒷짐을 지고는 모른척이었다.
  그 때 문득 몸을 숙인 남망기의 머리에서 꽃잎 같은 것이 나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칼을 깨끗하게 빗어넘긴 귀 위쪽에 조그만 나비가 앉은 귀여운 모양새가 위무선의 흥미를 끌었다.      
  “악!”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내미는 턱을 남망기가 휙 일어나며 정통으로 들이박았다. 위무선은 비명을 지르며 입을 움켜잡았고, 턱뼈에 세게 부딪힌 남망기도 머리에 손을 갖다대며 또다시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잠, 너 정말 나한테 무슨 감정이...”
  남망기가 퉁퉁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꾸준하게 책을 줍고 났더니 위무선의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너 입술에 피 나.”
  “어디?”
  위무선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왼쪽이야. 그만 좀 까불어.”
  위무선은 핀잔을 귓등으로 흘리며 자꾸만 입술을 핥았다. 그렇게 혀를 날름거리며 몇 번 핥자 남망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던지고 옆의 샛길로 휙 들어가 버렸다.
  “남잠, 어디 가! 수영은?”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말, 꽉 막힌 녀석.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니까. 이만큼 꼬드기면 좀 넘어와 줘야지.”

  
  남망기가 좁은 흙길을 걸어올라가자 행선지가 궁금해진 위무선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거대한 폭포였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아래쪽에는 제법 넓고 깊은 물이 고여 있었다. 
  ‘이런 데가 있었네? 그런데 설마, 정말로 수영을 하려고?’
  남망기가 몸을 날려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갔다. 대체 뭘 하려는지, 호기심에 찬 위무선의 눈길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남망기는 단정히 앉은 후 고금을 꺼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책을 펼치더니 주의 깊게 읽는 것 같았다.
  이윽고 땅, 땅 하고 깊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빛이 폭포수로 날아들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물줄기가 군데군데 박살이 나며 폭죽처럼 물방울이 흩어지자 위무선이 기뻐하며 얼른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남망기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현을 세게 울리다가는 열 손가락으로 한꺼번에 긁었다. 그러면 물줄기는 크게 폭발하기도 하고 벌떼가 윙윙대는 듯 휘몰아치기도 했다.
  위무선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운심부지처에서 늘 따분하기만 하다가 이런 볼거리는 처음이었다. 고소 남씨의 현살술은 전시에 언뜻언뜻 곁눈으로만 봤지 이렇게 세세하게 구경할 기회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망기가 무겁게 현을 울리자 두꺼운 물줄기가 잠시 공중에서 멈춘 듯 보이다가 이내 화려하게 터뜨려졌다. 작은 폭포수처럼 무섭게 쏟아져내리며 주변이 짙게 물들자 위무선은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남잠, 굉장해! 난 칭찬은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정말 탄복했어! 넌 정말 대단해!”
  남망기는 책을 몇 장 더 넘겨보려고 했지만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덮어버렸다. 아직 시험해 보려던 부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위무선이 옆에서 소란을 피워대는 통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위무선이 얼른 남망기가 앉은 바위로 이동해 오더니 말했다.
  “있잖아, 남잠, 나도 그거 가르쳐 줘. 현살술. 응?”
  “넌 고소 남씨가 아니잖아.”
  “너 어차피 날 가르치잖아, 그런데 뭐 그리 빡빡하게 굴어.”
  불평을 하던 위무선이 얼른 남망기 앞에 정좌를 하더니 세 번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제자 위무선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스승님, 좀 가르쳐 주세요!”
  “안 돼.”
  “...쳇.”
  남망기는 고금을 집어넣고는 그대로 가부좌를 틀었다. 
  위무선은 전혀 상대를 해 주지 않고 눈을 감는 남망기를 흘겨보더니 앙갚음을 하듯 그의 어깨에 몸을 부딪혔다.
  “하지 마.” 
  위무선은 들은 척도 앉고 등으로 남망기의 어깨를 쿡쿡 밀었다.
  “위영, 너... 저리 좀 가라고.”
  위무선은 본래 사람에게 달라붙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라 남망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남망기가 참다 못해 손으로 밀어내려고 하자 위무선은 잽싸게 그 팔 아래로 기어들어가 그의 무릎을 차지했다.
  “위영!”
  따갑게 외치는 것도 못 들은 척, 위무선은 편하게 허리를 비비적대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은 남망기가 빡빡하게 굴어도 위무선의 이런 행동들을 그냥 못 본 척 지나치거나 허용해줄 때가 더 많았다. 위무선도 그걸 알아서 점점 더 장난의 강도를 높여가는 것이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다 퇴짜를 맞으면 그만이고, 혹여나 그가 받아주기라도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랐다.
  이번에도 남망기가 공격을 해 오면 어떻게 대응할까 하고 기다리는데 한참 동안 조용했다.
  해가 따끈따끈하게 얼굴을 데우고 옆에서는 폭포수로 번진 물안개가 계속 피부에 부딪혀 왔다. 옛날에 강염리가 앉아 있으면 이렇게 기습을 해서 무릎베개를 하던 기억에 위무선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순간 가득히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가슴이 따뜻해지며 주변이 다 잊혀졌다. 그는 그대로 까무룩 선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남망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위무선이 다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양 팔을 둘 데가 없어서 뒤로 돌린 채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이걸 어떡할까하고 잠든 위무선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에 문득 색색 숨을 내쉬는 입술이 들어왔다. 
  입술은 좀 전에 부딪힌 피멍으로 조금 부었고, 가볍게 벌린 잇새로 분홍빛 혀끝이 살짝 보였다. 
  주변을 가득 채운 물안개로 옷이 조금씩 젖는 것도 모르고 남망기는 한참 동안 위무선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찰싹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위무선이 깜짝 놀라 튀어오르며 이마를 문질렀다.
  “야! 남잠!”
  그가 씩씩거리며 마구 항의했지만 남망기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책을 챙겨서는 바위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위무선이 소리를 질렀다.
  “너하고 놀아주기도 정말 힘들어 죽겠어, 함광군 남망기! 듣고 있어?! 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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