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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3 21:38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연화는 생각했다. 어쩌면 하늘은 자신을 매우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여러 번 떠올렸던 가능성이지만, 최근 며칠 동안에는 유독 각별하게 의심되었다. 어쩌면 일이 꼬여도 이런 식으로 꼬일 수 있단 말인가? 난데없는 희락기, 그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형질은 변화한 이후 줄곧 불안정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잘못 걸려 각인당하는 상황, 그래. 그것도 백번 양보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걸어들어간 사람은 본인이었고,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방다병과 적비성이라니! 하나도 아닌 데다, 둘 모두 이미 자신과 너무 깊이 얽힌 사람들이었다. 눈을 뜬 시간 동안 도대체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멀쩡해 보이는군, 이연화."
그 한숨은, 한밤중 갑작스레 뒷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를 보았을 때 다시금 흘러나왔다. 두통이 심화되는 기분에 사로잡혀-실제로 머리가 정말 아팠다-이연화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적비성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성큼 다가섰다.
"아직 나아지지 않은 건가?"
"괜찮으니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약마한테 갈 일정은 언제가 됐든 괜찮아."
이연화가 팩 후려치듯 말했다. 적비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비교적 덜 들었는지라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었다. 사실 덜 미안한 정도를 넘어, 이연화는 적비성에게 일정 부분 성이 나 있었다.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약마에게는 왜? 필요한 게 있나?"
"각인을 끊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거잖아, 독이든 약이든. 피 몇 번쯤 토하는 건 아무렇지 않으니까 뭐든 내놓으라고 해야지. 너도 그편이 나을 거 아니야? 그 얘기하려고 온 게 아니었어?"
이연화가 눈을 뜨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적비성은 금방 수긍하거나 비웃는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팔짱을 끼었다.
"화가 났군. 어째서지?"
"어째서? 어째서라니-기절했다가 일어나 보니까 갑자기 하나도 아니고 둘이랑 각인이 됐다는데, 신경이 안 곤두서겠어?"
"그 일로 나나 방다병을 탓할 셈이냐? 애초부터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은 너였어. 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적에게 잡혀가겠다는 무모한 계획에 동참한 적이 없다. 우리가 더 늦게 도착했다면, 넌 거기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윤간당했을 거야. 그랬다면 네 신경이 지금보다 더 곤두섰겠지. 나나 방다병도 마찬가지고."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후회나 연민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신경한 태도에, 이연화는 울컥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어찌 됐든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돕겠답시고 했던 행위였으니,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러대거나 욕을 할 수는 없었다. 심마를 다스리기 위해 속으로 깊은 심호흡을 하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눈썹을 슬쩍 찌푸리고는 물었다.
"설마 방다병한테도 이런 식으로 얘기했나? 그놈이 이런 소리를 들었으면 자진이라도 하려 들었을 텐데."
"내가 방다병한테 왜 화를 내."
이연화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었다. 퍽 불량한 태도에, 적비성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왜 나한테만 화를 내는 거냐?"
"적 맹주, 당연히 화를 내면 너한테 내지! 그 녀석은 어린애잖아, 너는 아니고! 그 녀석을 그런-일에 동참시키면 어떡해?"
이연화가 대놓고 삿대질을 하며 성을 냈다. 적비성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어째서 방다병을 바로 내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음인과 몸을 섞은 경험도 없는 녀석더러, 대체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라고? 적비성의 얼굴이 한층 차가워졌다.
"내가 그 녀석을 죽이지 않은 게 불만인가?"
"뭐?"
이연화가 입을 딱 벌린 채 되물었다. 적비성이 한숨을 참는 얼굴로 이연화를 보았다.
"그 녀석을 대체 얼마나 어리게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연화. 그 녀석은 한참 전에 성년을 지난 양인이야. 네게 어처구니없을 만큼 집착하는 놈이기도 하지. 그 태도에 다른 불순함이 없어 내버려둘 뿐, 그 녀석이 네게 집중하는 정도는 정상이 아니다. 그런 녀석이, 그런 상황에서 나와 널 단둘이 내버려두고 자리를 뜰 수 있었을 것 같나? 네가 양인일 때에도 음인에게 각인한 사람처럼 굴던 놈이?"
"너라면 할 수 있었잖아. 점혈을 하든 기절을 시키든-."
"네 냄새는 이상하다고 분명히 경고했잖아. 네가 뿜는 해괴한 냄새 때문에 나도 그렇게까지 정상은 아니었다. 방다병도 마찬가지지. 그때 우리가 싸웠다면, 아마 둘 중 하나는 죽거나 사지 중 어딘가가 뽑혔을 거야. 아마 그 하나는 방다병이었겠지."
적비성이 이를 반쯤 악물고는 말했다. 그 관자놀이로 은은히 핏대가 서 있었다. 이연화는 지극히 불만스러우나 딱히 돌려줄 말이 없어 심기가 상한 눈으로 적비성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적비성이 무정히 대꾸하며 발길을 휙 돌렸다.
"내가 그러지 못해 유감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놈을 두들겨 주지. 팔을 한 쪽 들고 돌아오거나."
"뭐하는 짓이야, 그만둬!"
이연화가 벌떡 일어나 그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적비성이 몸을 틀어 피하자, 이연화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약간의 감정을 실어, 이연화는 내력이 섞인 손바닥으로 그 어깨를 한 대 치려 들었다. 물론 순순히 맞아줄 성격은 아니었기에, 적비성 또한 내력을 실어 응수했다. 두 개의 손바닥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내력끼리 충돌하면서, 이연화와 적비성의 머리칼이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뻔뻔한 작자 같으니라고, 어디까지 피하나 보자. 왼손을 슬쩍 뒷짐 진 채, 이연화는 최소한의 발놀림과 권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적비성 역시 순식간에 집중한 얼굴로 합을 나누었다. 그 눈동자로 묘한 불꽃이 번쩍였다.
처음에 조금씩 발출되던 내력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져, 때때로 작은 바람과 여파를 만들어냈다. 소소한 집기가 쓰러지거나 창이 덜그럭거렸다. 이연화는 눈을 뜬 이후 줄곧 느끼던 좌절감을 해소하듯이 상대를 매섭게 몰아세웠다. 심후한 내력을 담은 일장이 내질러졌을 때, 적비성은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뒤로 쭉 미끄러졌다. 문간 앞에서 멈춘 적비성의 얼굴이 이채를 띠었다. "이연화, 너...." 적비성이 새삼스러운 투로 불렀다. 내가 왜. 이연화가 뚱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처소 문이 열렸다. 관하몽이었다.
"문주, 괜찮으십니까?"
"아, 관 협의. 괜찮습니다. 잠깐...의견 조정 중이었습니다."
이연화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충 둘러댔다. 시끄럽게 싸워댔으니, 타인의 주의를 끌었을 법했다. 어질러진 꼴을 둘러본 관하몽이 말했다.
"내력을 사용하셨는데, 체취가 흐르지 않는군요. 다행입니다."
어? 이연화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내력을 꽤 부어가며 싸웠는데도 방에 연꽃 냄새가 퍼져 있지 않았다. 이연화가 놀라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의원은 아무래도 맹렬했던 희락기와 각인의 영향으로, 몸이 자연스레 새 형질에 익숙해진 듯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지나치게 강한 자극에 노출되면, 몸이 생존을 위해 빨리 적응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맺은 관하몽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적비성을 향했다.
"비교적 평온한 상태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당분간 안정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여러모로 말입니다."
"내가 아니다. 이연화가 먼저-."
"여러모로 말입니다."
감히 금원맹주의 말을 끊고, 의원이 차갑게 건넸다. 적비성은 잠깐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으나 관하몽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원이 방을 나섰을 때, 남자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만면에 은은히 떠오른 미소를 보고, 이연화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떨었다. "넌 나랑 불의의 각인까지 해버린 상태인데, 지금 기뻐할 때야? 실실거리지 말고 빨리 약마한테 갈 날이나 잡아 봐." 이연화가 팔꿈치로 그 옆구리를 치며 질책했다.
그 말에, 적비성은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 한층 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듯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는, 곧 처소의 탁자 앞에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차를 따르는 적비성의 맞은편으로, 이연화가 매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앉았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상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연화의 앞에도 찻잔을 채워 밀어주고는, 적비성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 두겠는데, 그때 네 맥은 정말 위험했어. 내가 참지 못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널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을 뿐이니, 그 사실은 성질 부리지 말고 받아들여라."
이연화가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꼬인 부분이었다. 이연화는 방다병도 적비성도, 일정 부분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차라리 대상이 자신의 냄새에 홀린 적이었다면, 그저 죽여버린 다음 어떻게든 각인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괴로울지언정 감정적으로 난처하거나 어려울 필요는 없었다. 찻잔을 술잔처럼 비우고, 이연화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그건 알아. 그 부분은 한편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이걸 끊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잖아."
"거기에 대해서 말인데, 이연화. 난 이걸 끊을 마음이 없다."
입 속에 차가 남지 않았음에도, 이연화는 찻물에 사레가 들린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했다. 돌아본 얼굴에는 온통 당혹이 번져 있었다. "무, 뭐라고?" 이연화가 소용없이 물었다. 분명히 들었으나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는 말이었다. 적비성이 담담하기까지 한 얼굴로 반복했다. 그 목소리며 낯빛에 농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난 이걸 끊을 마음이 없다. 네가 정 끊기를 바란다면 강제하진 않겠지만."
이연화는 그만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상이일 때에도 이연화일 때에도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물음표가 폭발적으로 치민 나머지, 개중 무엇도 쉽게 나오지를 않았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연화는 겨우 입을 움직였다.
"적 맹주, 내가 내력을 써도 더 이상 체취를 풍기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그건 각인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뭣보다! 그런 상태가 됐다고 내가 갑자기 너와 진지하게 비무를 벌일 거라 생각한다면-."
"그래서가 아니다. 물론 반길 만한 상황이긴 하다만."
적비성이 끊었다. 이연화는 난생 처음 보는 신묘한 진법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심정으로 뻐끔거렸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상대의 진지하다 못해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다, 이연화는 도무지 참지 못하고 외치듯 물었다.
"그럼 대체 왜?"
"내가 원하니까."
적비성이 간결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연화의 마음은 조금도 간결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쏘아붙이기 전에, 적비성은 작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원하니까, 이연화."
이연화의 입이 벌어졌다. 상대의 말도, 그 분위기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날 원한다고? 그 말이 메아리치듯이 머릿속을 울렸다. 날...뭐? 이연화의 입에서 헛웃음을 닮은 헛숨이 터졌다. 적비성은 여느 때처럼 심각할 정도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큰 불길 앞에 종이로 된 방패를 들이미는 기분으로, 이연화는 눈가를 살짝 만지며 일부러 웃음을 섞어 건넸다. 목소리를 떨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적 맹주. 원래 각인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 상대가 굉장히 특별해 보이고, 평소랑 달라 보인대. 너도 아마-."
"그 전부터다."
적비성은 짧은 한 마디로 이연화의 긴 말을 막아버렸다. 이연화의 입이 다시 멍하게 벌어졌다. 그 전부터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데...?" 넋이 나간 질문에, 적비성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글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확실하다. 나는 널 원해."
"잠깐, 잠깐만. 우린 그런...그런 적은 없었잖아. 넌 항상 날 이길 생각만 했었는데, 왜 갑자기-."
"시작은 거기였겠지.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공이다. 때문에 네가 눈에 들어왔어. 처음엔 그저 호적수라고 여겼다. 내가 꺾어야 할 높은 봉우리라고. 십 년 후 너를 다시 만났을 때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친우라고 생각했지. 그 다음에는...글쎄."
적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주변의 기류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긴 세월을 한번에 돌아보는 듯,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이연화는 조용히 적비성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비록 원할 때 얼마든지 능청스럽게 굴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그리고 뭣보다, 건넬 만한 말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적비성이 이연화를 똑바로 보며 이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이 투박하고 무뚝뚝한 투였으나, 그 음성에는 희미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넌 언제나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상이. 내가 그렇게까지 널 원한다는 건...네게는 갑작스러운 일이겠지만, 내게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이 적비성이 그런 마음을 품을 자는, 천하에 오직 너 하나뿐이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숨도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비. 네가 언제나 이상이를 부르짖으며 나를 따라다니긴 했지만, 내가 이연화가 된 이후로도 우리가 함께 많은 일을 하긴 했지만, 비록 내 형질이 바뀐 이후로 네가 심경이 더 복잡해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결국 우리가 선을 넘고 각인까지 해버리긴 했지만-여러 생각 사이에서 헤엄치던 이연화의 정신이 점차 아득해졌다. 그와의 역사를 쭉 떠올리자니, 적비성의 말이 마냥 흰소리처럼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금원맹주가 전 사고문주를? 그 직함만 놓고 보면 정말 농담 같았지만, 적비성과 이연화라는 개인만 두고 보면 마냥 해괴하기만 한 일도 아니었다.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이건 불공평하잖아."
"뭐가 말이냐?"
"너는 다 준비해온 말들이겠지만, 난 지금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고!"
"나에겐 그게 공평한 일인데. 나는 너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인 적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뻔뻔하게 이야기한 적비성에게 뭐라 대거리하려던 때, 밖에서 존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안이었다. 잔뜩 삼가는 투로 보아, 아무래도 맹에 급히 처리할 일이 생긴 듯했다. 바깥을 힐끗 돌아본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다시 오겠다, 이연화." 오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겠지. 말문이 막힌 이연화를 남겨두고, 적비성은 휙 자리를 떴다.
당연하게도, 이연화는 그날 거의 한잠도 자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자문해 보아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옛날부터, 그는 고난도의 무공보다 가까운 사람들의 머릿속을 더 어려워했다. 이연화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심정적으로 모두 수용하기 전, 금원맹주는 예고했던 대로 다시 이연화의 처소를 찾았다. 새벽에 가까울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넌 왜 제대로 된 문을 쓸 줄을 모르는 거야?"
이연화가 짐짓 투덜거렸지만, 물론 적비성은 그 항의를 무시하고 방에 들어섰다. 막 침대에 누우려던 이연화가 한숨과 함께 그편을 향해 돌아앉았다.
"미안하지만, 적 맹주. 아직 내 생각이 다 정리가 안 됐어. 뭔가 대답을 바라고 온 거라면-."
"대답을 들으려 온 건 아니야. 어제 다 못한 이야기가 있다."
"뭔데?"
"각인한 사람이 있으면, 설령 미약에 당하더라도 아무 양인을 향해 뛰어들진 않게 된다. 평소의 희락기도 한결 잠잠해지지. 형질의 영향을 일상에서 덜 받고 싶다면, 각인한 사람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라면 어딘가에서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할 가능성도 적으니, 각인 상대를 잃을 위험도 낮을 거다. 네게도 마냥 손해인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그걸 결정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적비성이 덤덤히 말했다. 마치 저녁식사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처럼 침착한 태도였다. 이연화는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둔 사람한테 이런 건조한 이야기를 건네다니, 진심인가? 하긴, 금원맹주가 애정을 보이는 방식에 대해 내가 뭘 알겠어. 한숨을 억누르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들고는 물었다.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로군. 방다병은 비슷한 소리를 안 했나 보지?"
"방다병 얘기가 왜 나와. 그 녀석 얼굴 본 지도 오래됐어."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퉁명스럽게 받았다. 방다병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경이 곤두선 탓이었다.
처음 깨어났던 날 이후, 방다병은 한 번도 이연화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에 들어왔나 싶으면 부리나케 피하기 일쑤였다. 이연화를 연발하며 주변을 맴돌던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죄책감이 삐죽이 솟아나 가슴 한편을 찔렀다. 자신의 무모한 계획 탓으로, 이연화가 된 이후 처음 사귀었던 친구를 영영 잃을 판이었다. 적비성과의 일 때문에 잠깐 잊었던 돌덩이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얼마나 불편하고 어색하면, 그 선량한 청년이 차마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까? 적비성이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삽질하는 중이군. 그럴 줄 알았다."
"넌-그럴 줄 알았으면 그때 막았어야지!"
"또 그 얘기냐? 이연화, 방다병은 나와 크게 다를 것 없어. 그 녀석도 분명 너와 각인을 유지하길 원할 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도 없거니와, 방다병은 안 돼."
이연화가 미간을 확 좁히고는 대꾸했다. 적비성이 딱한 아이를 보듯이 이연화를 응시했다.
"진심이냐?"
"당연하지. 차라리 너라면 모를까, 방다병하고는 절대 안 돼."
이연화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물론 금원맹주와의 각인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비성은 여러모로 방다병보다는 자신과 더 비슷한 사람이었다. 무공에 열중하며, 세상에 친족이랄 사람도 없고, 언제 어디서 스러져도 그만인 삶. 하지만 방다병은 달랐다. 아직 창창한 나이의 청년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곧고 바르게 자란 사람이었다. 방다병에게는 아직 수많은 기회와 길이 있었다. 이연화는 그 삶에 가끔씩 도움은 줄 수 있을지언정,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만을 줄 순 없는 존재였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네가 그럴 수 있다면야."
"무슨 헛소리야? 전처럼 신경 긁을 거면 나가, 적 맹주.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하지."
이연화가 대놓고 성질을 부렸다. 적비성이 왜 자꾸 방다병에 대해 헛소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난 지금 너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 착한 아이까지 이 아수라장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런 의도를 잔뜩 담아 쏘아보다가, 이연화는 문이 벌컥 열렸을 때 진심으로 당혹해 어깨를 움찔했다. 난데없이 끼어들어 나하고는 뭐가 안 되냐 외친 방다병은, 잔뜩 억울한 일을 당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비성이 그런 방다병과 자신만을 남기고 떠나버리자, 이연화는 내심 이마를 짚으며 신음하듯 생각했다. 하늘은 아무래도 자신을 정말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연화는 생각했다. 어쩌면 하늘은 자신을 매우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여러 번 떠올렸던 가능성이지만, 최근 며칠 동안에는 유독 각별하게 의심되었다. 어쩌면 일이 꼬여도 이런 식으로 꼬일 수 있단 말인가? 난데없는 희락기, 그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형질은 변화한 이후 줄곧 불안정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잘못 걸려 각인당하는 상황, 그래. 그것도 백번 양보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걸어들어간 사람은 본인이었고,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방다병과 적비성이라니! 하나도 아닌 데다, 둘 모두 이미 자신과 너무 깊이 얽힌 사람들이었다. 눈을 뜬 시간 동안 도대체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멀쩡해 보이는군, 이연화."
그 한숨은, 한밤중 갑작스레 뒷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를 보았을 때 다시금 흘러나왔다. 두통이 심화되는 기분에 사로잡혀-실제로 머리가 정말 아팠다-이연화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적비성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성큼 다가섰다.
"아직 나아지지 않은 건가?"
"괜찮으니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약마한테 갈 일정은 언제가 됐든 괜찮아."
이연화가 팩 후려치듯 말했다. 적비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비교적 덜 들었는지라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었다. 사실 덜 미안한 정도를 넘어, 이연화는 적비성에게 일정 부분 성이 나 있었다.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약마에게는 왜? 필요한 게 있나?"
"각인을 끊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거잖아, 독이든 약이든. 피 몇 번쯤 토하는 건 아무렇지 않으니까 뭐든 내놓으라고 해야지. 너도 그편이 나을 거 아니야? 그 얘기하려고 온 게 아니었어?"
이연화가 눈을 뜨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적비성은 금방 수긍하거나 비웃는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팔짱을 끼었다.
"화가 났군. 어째서지?"
"어째서? 어째서라니-기절했다가 일어나 보니까 갑자기 하나도 아니고 둘이랑 각인이 됐다는데, 신경이 안 곤두서겠어?"
"그 일로 나나 방다병을 탓할 셈이냐? 애초부터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은 너였어. 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적에게 잡혀가겠다는 무모한 계획에 동참한 적이 없다. 우리가 더 늦게 도착했다면, 넌 거기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윤간당했을 거야. 그랬다면 네 신경이 지금보다 더 곤두섰겠지. 나나 방다병도 마찬가지고."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후회나 연민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신경한 태도에, 이연화는 울컥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어찌 됐든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돕겠답시고 했던 행위였으니,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러대거나 욕을 할 수는 없었다. 심마를 다스리기 위해 속으로 깊은 심호흡을 하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눈썹을 슬쩍 찌푸리고는 물었다.
"설마 방다병한테도 이런 식으로 얘기했나? 그놈이 이런 소리를 들었으면 자진이라도 하려 들었을 텐데."
"내가 방다병한테 왜 화를 내."
이연화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었다. 퍽 불량한 태도에, 적비성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왜 나한테만 화를 내는 거냐?"
"적 맹주, 당연히 화를 내면 너한테 내지! 그 녀석은 어린애잖아, 너는 아니고! 그 녀석을 그런-일에 동참시키면 어떡해?"
이연화가 대놓고 삿대질을 하며 성을 냈다. 적비성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어째서 방다병을 바로 내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음인과 몸을 섞은 경험도 없는 녀석더러, 대체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라고? 적비성의 얼굴이 한층 차가워졌다.
"내가 그 녀석을 죽이지 않은 게 불만인가?"
"뭐?"
이연화가 입을 딱 벌린 채 되물었다. 적비성이 한숨을 참는 얼굴로 이연화를 보았다.
"그 녀석을 대체 얼마나 어리게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연화. 그 녀석은 한참 전에 성년을 지난 양인이야. 네게 어처구니없을 만큼 집착하는 놈이기도 하지. 그 태도에 다른 불순함이 없어 내버려둘 뿐, 그 녀석이 네게 집중하는 정도는 정상이 아니다. 그런 녀석이, 그런 상황에서 나와 널 단둘이 내버려두고 자리를 뜰 수 있었을 것 같나? 네가 양인일 때에도 음인에게 각인한 사람처럼 굴던 놈이?"
"너라면 할 수 있었잖아. 점혈을 하든 기절을 시키든-."
"네 냄새는 이상하다고 분명히 경고했잖아. 네가 뿜는 해괴한 냄새 때문에 나도 그렇게까지 정상은 아니었다. 방다병도 마찬가지지. 그때 우리가 싸웠다면, 아마 둘 중 하나는 죽거나 사지 중 어딘가가 뽑혔을 거야. 아마 그 하나는 방다병이었겠지."
적비성이 이를 반쯤 악물고는 말했다. 그 관자놀이로 은은히 핏대가 서 있었다. 이연화는 지극히 불만스러우나 딱히 돌려줄 말이 없어 심기가 상한 눈으로 적비성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적비성이 무정히 대꾸하며 발길을 휙 돌렸다.
"내가 그러지 못해 유감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놈을 두들겨 주지. 팔을 한 쪽 들고 돌아오거나."
"뭐하는 짓이야, 그만둬!"
이연화가 벌떡 일어나 그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적비성이 몸을 틀어 피하자, 이연화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약간의 감정을 실어, 이연화는 내력이 섞인 손바닥으로 그 어깨를 한 대 치려 들었다. 물론 순순히 맞아줄 성격은 아니었기에, 적비성 또한 내력을 실어 응수했다. 두 개의 손바닥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내력끼리 충돌하면서, 이연화와 적비성의 머리칼이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뻔뻔한 작자 같으니라고, 어디까지 피하나 보자. 왼손을 슬쩍 뒷짐 진 채, 이연화는 최소한의 발놀림과 권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적비성 역시 순식간에 집중한 얼굴로 합을 나누었다. 그 눈동자로 묘한 불꽃이 번쩍였다.
처음에 조금씩 발출되던 내력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져, 때때로 작은 바람과 여파를 만들어냈다. 소소한 집기가 쓰러지거나 창이 덜그럭거렸다. 이연화는 눈을 뜬 이후 줄곧 느끼던 좌절감을 해소하듯이 상대를 매섭게 몰아세웠다. 심후한 내력을 담은 일장이 내질러졌을 때, 적비성은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뒤로 쭉 미끄러졌다. 문간 앞에서 멈춘 적비성의 얼굴이 이채를 띠었다. "이연화, 너...." 적비성이 새삼스러운 투로 불렀다. 내가 왜. 이연화가 뚱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처소 문이 열렸다. 관하몽이었다.
"문주, 괜찮으십니까?"
"아, 관 협의. 괜찮습니다. 잠깐...의견 조정 중이었습니다."
이연화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충 둘러댔다. 시끄럽게 싸워댔으니, 타인의 주의를 끌었을 법했다. 어질러진 꼴을 둘러본 관하몽이 말했다.
"내력을 사용하셨는데, 체취가 흐르지 않는군요. 다행입니다."
어? 이연화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내력을 꽤 부어가며 싸웠는데도 방에 연꽃 냄새가 퍼져 있지 않았다. 이연화가 놀라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의원은 아무래도 맹렬했던 희락기와 각인의 영향으로, 몸이 자연스레 새 형질에 익숙해진 듯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지나치게 강한 자극에 노출되면, 몸이 생존을 위해 빨리 적응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맺은 관하몽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적비성을 향했다.
"비교적 평온한 상태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당분간 안정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여러모로 말입니다."
"내가 아니다. 이연화가 먼저-."
"여러모로 말입니다."
감히 금원맹주의 말을 끊고, 의원이 차갑게 건넸다. 적비성은 잠깐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으나 관하몽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원이 방을 나섰을 때, 남자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만면에 은은히 떠오른 미소를 보고, 이연화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떨었다. "넌 나랑 불의의 각인까지 해버린 상태인데, 지금 기뻐할 때야? 실실거리지 말고 빨리 약마한테 갈 날이나 잡아 봐." 이연화가 팔꿈치로 그 옆구리를 치며 질책했다.
그 말에, 적비성은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 한층 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듯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는, 곧 처소의 탁자 앞에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차를 따르는 적비성의 맞은편으로, 이연화가 매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앉았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상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연화의 앞에도 찻잔을 채워 밀어주고는, 적비성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 두겠는데, 그때 네 맥은 정말 위험했어. 내가 참지 못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널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을 뿐이니, 그 사실은 성질 부리지 말고 받아들여라."
이연화가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꼬인 부분이었다. 이연화는 방다병도 적비성도, 일정 부분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차라리 대상이 자신의 냄새에 홀린 적이었다면, 그저 죽여버린 다음 어떻게든 각인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괴로울지언정 감정적으로 난처하거나 어려울 필요는 없었다. 찻잔을 술잔처럼 비우고, 이연화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그건 알아. 그 부분은 한편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이걸 끊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잖아."
"거기에 대해서 말인데, 이연화. 난 이걸 끊을 마음이 없다."
입 속에 차가 남지 않았음에도, 이연화는 찻물에 사레가 들린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했다. 돌아본 얼굴에는 온통 당혹이 번져 있었다. "무, 뭐라고?" 이연화가 소용없이 물었다. 분명히 들었으나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는 말이었다. 적비성이 담담하기까지 한 얼굴로 반복했다. 그 목소리며 낯빛에 농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난 이걸 끊을 마음이 없다. 네가 정 끊기를 바란다면 강제하진 않겠지만."
이연화는 그만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상이일 때에도 이연화일 때에도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물음표가 폭발적으로 치민 나머지, 개중 무엇도 쉽게 나오지를 않았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연화는 겨우 입을 움직였다.
"적 맹주, 내가 내력을 써도 더 이상 체취를 풍기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그건 각인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뭣보다! 그런 상태가 됐다고 내가 갑자기 너와 진지하게 비무를 벌일 거라 생각한다면-."
"그래서가 아니다. 물론 반길 만한 상황이긴 하다만."
적비성이 끊었다. 이연화는 난생 처음 보는 신묘한 진법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심정으로 뻐끔거렸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상대의 진지하다 못해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다, 이연화는 도무지 참지 못하고 외치듯 물었다.
"그럼 대체 왜?"
"내가 원하니까."
적비성이 간결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연화의 마음은 조금도 간결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쏘아붙이기 전에, 적비성은 작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원하니까, 이연화."
이연화의 입이 벌어졌다. 상대의 말도, 그 분위기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날 원한다고? 그 말이 메아리치듯이 머릿속을 울렸다. 날...뭐? 이연화의 입에서 헛웃음을 닮은 헛숨이 터졌다. 적비성은 여느 때처럼 심각할 정도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큰 불길 앞에 종이로 된 방패를 들이미는 기분으로, 이연화는 눈가를 살짝 만지며 일부러 웃음을 섞어 건넸다. 목소리를 떨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적 맹주. 원래 각인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 상대가 굉장히 특별해 보이고, 평소랑 달라 보인대. 너도 아마-."
"그 전부터다."
적비성은 짧은 한 마디로 이연화의 긴 말을 막아버렸다. 이연화의 입이 다시 멍하게 벌어졌다. 그 전부터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데...?" 넋이 나간 질문에, 적비성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글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확실하다. 나는 널 원해."
"잠깐, 잠깐만. 우린 그런...그런 적은 없었잖아. 넌 항상 날 이길 생각만 했었는데, 왜 갑자기-."
"시작은 거기였겠지.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공이다. 때문에 네가 눈에 들어왔어. 처음엔 그저 호적수라고 여겼다. 내가 꺾어야 할 높은 봉우리라고. 십 년 후 너를 다시 만났을 때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친우라고 생각했지. 그 다음에는...글쎄."
적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주변의 기류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긴 세월을 한번에 돌아보는 듯,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이연화는 조용히 적비성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비록 원할 때 얼마든지 능청스럽게 굴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그리고 뭣보다, 건넬 만한 말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적비성이 이연화를 똑바로 보며 이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이 투박하고 무뚝뚝한 투였으나, 그 음성에는 희미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넌 언제나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상이. 내가 그렇게까지 널 원한다는 건...네게는 갑작스러운 일이겠지만, 내게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이 적비성이 그런 마음을 품을 자는, 천하에 오직 너 하나뿐이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숨도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비. 네가 언제나 이상이를 부르짖으며 나를 따라다니긴 했지만, 내가 이연화가 된 이후로도 우리가 함께 많은 일을 하긴 했지만, 비록 내 형질이 바뀐 이후로 네가 심경이 더 복잡해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결국 우리가 선을 넘고 각인까지 해버리긴 했지만-여러 생각 사이에서 헤엄치던 이연화의 정신이 점차 아득해졌다. 그와의 역사를 쭉 떠올리자니, 적비성의 말이 마냥 흰소리처럼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금원맹주가 전 사고문주를? 그 직함만 놓고 보면 정말 농담 같았지만, 적비성과 이연화라는 개인만 두고 보면 마냥 해괴하기만 한 일도 아니었다.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이건 불공평하잖아."
"뭐가 말이냐?"
"너는 다 준비해온 말들이겠지만, 난 지금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고!"
"나에겐 그게 공평한 일인데. 나는 너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인 적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뻔뻔하게 이야기한 적비성에게 뭐라 대거리하려던 때, 밖에서 존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안이었다. 잔뜩 삼가는 투로 보아, 아무래도 맹에 급히 처리할 일이 생긴 듯했다. 바깥을 힐끗 돌아본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다시 오겠다, 이연화." 오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겠지. 말문이 막힌 이연화를 남겨두고, 적비성은 휙 자리를 떴다.
당연하게도, 이연화는 그날 거의 한잠도 자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자문해 보아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옛날부터, 그는 고난도의 무공보다 가까운 사람들의 머릿속을 더 어려워했다. 이연화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심정적으로 모두 수용하기 전, 금원맹주는 예고했던 대로 다시 이연화의 처소를 찾았다. 새벽에 가까울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넌 왜 제대로 된 문을 쓸 줄을 모르는 거야?"
이연화가 짐짓 투덜거렸지만, 물론 적비성은 그 항의를 무시하고 방에 들어섰다. 막 침대에 누우려던 이연화가 한숨과 함께 그편을 향해 돌아앉았다.
"미안하지만, 적 맹주. 아직 내 생각이 다 정리가 안 됐어. 뭔가 대답을 바라고 온 거라면-."
"대답을 들으려 온 건 아니야. 어제 다 못한 이야기가 있다."
"뭔데?"
"각인한 사람이 있으면, 설령 미약에 당하더라도 아무 양인을 향해 뛰어들진 않게 된다. 평소의 희락기도 한결 잠잠해지지. 형질의 영향을 일상에서 덜 받고 싶다면, 각인한 사람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라면 어딘가에서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할 가능성도 적으니, 각인 상대를 잃을 위험도 낮을 거다. 네게도 마냥 손해인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그걸 결정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적비성이 덤덤히 말했다. 마치 저녁식사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처럼 침착한 태도였다. 이연화는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둔 사람한테 이런 건조한 이야기를 건네다니, 진심인가? 하긴, 금원맹주가 애정을 보이는 방식에 대해 내가 뭘 알겠어. 한숨을 억누르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들고는 물었다.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로군. 방다병은 비슷한 소리를 안 했나 보지?"
"방다병 얘기가 왜 나와. 그 녀석 얼굴 본 지도 오래됐어."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퉁명스럽게 받았다. 방다병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경이 곤두선 탓이었다.
처음 깨어났던 날 이후, 방다병은 한 번도 이연화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에 들어왔나 싶으면 부리나케 피하기 일쑤였다. 이연화를 연발하며 주변을 맴돌던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죄책감이 삐죽이 솟아나 가슴 한편을 찔렀다. 자신의 무모한 계획 탓으로, 이연화가 된 이후 처음 사귀었던 친구를 영영 잃을 판이었다. 적비성과의 일 때문에 잠깐 잊었던 돌덩이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얼마나 불편하고 어색하면, 그 선량한 청년이 차마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까? 적비성이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삽질하는 중이군. 그럴 줄 알았다."
"넌-그럴 줄 알았으면 그때 막았어야지!"
"또 그 얘기냐? 이연화, 방다병은 나와 크게 다를 것 없어. 그 녀석도 분명 너와 각인을 유지하길 원할 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도 없거니와, 방다병은 안 돼."
이연화가 미간을 확 좁히고는 대꾸했다. 적비성이 딱한 아이를 보듯이 이연화를 응시했다.
"진심이냐?"
"당연하지. 차라리 너라면 모를까, 방다병하고는 절대 안 돼."
이연화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물론 금원맹주와의 각인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비성은 여러모로 방다병보다는 자신과 더 비슷한 사람이었다. 무공에 열중하며, 세상에 친족이랄 사람도 없고, 언제 어디서 스러져도 그만인 삶. 하지만 방다병은 달랐다. 아직 창창한 나이의 청년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곧고 바르게 자란 사람이었다. 방다병에게는 아직 수많은 기회와 길이 있었다. 이연화는 그 삶에 가끔씩 도움은 줄 수 있을지언정,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만을 줄 순 없는 존재였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네가 그럴 수 있다면야."
"무슨 헛소리야? 전처럼 신경 긁을 거면 나가, 적 맹주.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하지."
이연화가 대놓고 성질을 부렸다. 적비성이 왜 자꾸 방다병에 대해 헛소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난 지금 너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 착한 아이까지 이 아수라장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런 의도를 잔뜩 담아 쏘아보다가, 이연화는 문이 벌컥 열렸을 때 진심으로 당혹해 어깨를 움찔했다. 난데없이 끼어들어 나하고는 뭐가 안 되냐 외친 방다병은, 잔뜩 억울한 일을 당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비성이 그런 방다병과 자신만을 남기고 떠나버리자, 이연화는 내심 이마를 짚으며 신음하듯 생각했다. 하늘은 아무래도 자신을 정말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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