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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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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요는 혼례식을 마무리한 후 강염리에 대한 예의로 1개월 가량을 머무른 다음 운심부지처로 돌아왔다.
화려한 화분을 안고 찾아온 그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요? 너 왔구나.”
“예, 형님.”
벌써 고소 남씨의 옷으로 갈아입은 금광요가 조심스럽게 화분을 내려놓았다. 반쯤 피거나 활짝 핀 올망졸망한 꽃들이 금테가 둘러서 화사했다.
“금린대에서 보았던 꽃이구나.”
“예. 금모란의 아종입니다. 부친께서는 꽃이 너무 작다고 다 뽑아버리라고 하셨지만, 형님께서 맘에 들어하셨던 것 같아서요.”
“그래,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 곳은 밤바람이 찬데 괜찮을까?”
“실내에 두어야 할 겁니다.”
“그럼 내 방에 두지.”
금광요는 흘긋 남희신의 방을 돌아보았다. 고소 남씨의 종주다운 품격이 깃든 한실에는 아무래도 금칠을 한 듯한 꽃과 화분이 어울리지 않았다.
“화분을 바꿔 오겠습니다.”
“괜찮다, 그대로 다오.”
남희신은 손수 화분을 가져다 창가에 놓고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작은 금부인께서는 잘 지내시지?”
금광요가 말없이 웃었다. 금자헌이 강염리를 애지중지 받드는 모양은 금광선도 눈꼴이 시다고 할 정도였다. 덕분에 집안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웠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문득 행복스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염방존.”
촘촘히 박힌 박석을 밟고 지나가던 금광요의 귓전에 날카로운 소년의 목소리가 와 박혔다.
예의 없게도 높다랗게 얹힌 돌사자의 옆에 끼어 앉은 소년은 언뜻 보아도 성질이 고약해 보였다.
“설양.”
소년은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금광요의 주위를 슬슬 돌았다.
“요즘 보기 힘들던데? 노인네 비위 맞추긴 그만 뒀나 보지?”
금광요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난날에는 묘한 동질감까지 느꼈던 이가 갑자기 위험하고 낯설어 보인다는 사실에 괴리감이 들었다.
“요즘 뭐 하고 있어?”
“...그냥.”
금광요의 성의 없는 대답, 벽을 치는 듯한 태도를 보고 설양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못보던 새에 뭔가 싫은 냄새를 풍기게 됐군. 아니면 나조차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 된 건가?”
“...”
“가급적 후자이길 바랄게. 난 너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단 말이야.”
금광요는 설양이 등을 돌리자마자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운심부지처로 돌아갈 것이라는 핑계로 여러 가지 일들을 피했다. 설양을 돕는 수상한 임무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금자훈이 궁기도 사건에 데인 후 떠넘기려 한 건설 일 역시 모른체 외면해버렸다.
다행히 남희신과 가까이 지내는 그에게 떳떳치 못한 일을 맡기는 건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 금광선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금자헌의 혼례식에서 위무선이 사돈으로서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는 음호부의 일도 잊고는 마음 편히 주색으로 빠져들었다.
천하가 평정된 후 고소 남씨는 고상하고, 청하 섭씨는 정의로우며, 난릉 금씨는 지난날 손상되었던 영화를 재건하는데 힘을 다하니 하루 하루가 무탈하게 흘러갔다.
막 전쟁을 치른 직후라 좀체 적응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평화로운 일상에 물들어갔다.
***
스산한 안개 위에 짙은 어둠이 깔리고 그 위로 금과 퉁소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현을 튕기는 사이사이 애잔한 퉁소 소리가 스며드는 것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심금을 울리는 것 같았다.
운심부지처 사람들은 남씨 쌍벽이 합주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금광요의 금 소리였다. 최근 남망기는 어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보통은 남희신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금을 탔지만 오늘은 금광요가 자청한 일이었다.
본래 사람이 음률에 젖고 싶을 때는 기쁠 때보다는 마음이 쓸쓸할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노하거나 슬픈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산 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외롭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남희신의 손을 빌려 보았더니,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커녕 영혼까지 쥐어 흔들린 느낌이었다.
“정말 좋구나.”
한숨을 쉬는 듯 남희신이 말하자 금광요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가다듬은 얼굴을 들었다.
“제가 형님의 솜씨에 미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당치도 않다. 너는 너무 겸손해.”
본래도 고금 타는 솜씨가 제법 훌륭했던 금광요는 근래 영맥이 트이며 금 소리가 한층 깊어진 것 같았다.
남희신이 다가오자 금광요는 고금을 밀어놓고 돌아앉았다.
“소리를 들어 보니 왼팔로 가는 심맥도 많이 진정된 것 같구나.”
맥을 짚어 보니 과연 영력이 부드럽게 통과하고 있었다. 남희신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전에 남희신의 맨살에 닿았다가 기겁을 한 금광요는 금단을 다듬는 데 매진하고 싶다며 영력 읽는 수련을 중단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맥만 짚어도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심지어는 남희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마저도 훔쳐보는 것처럼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전에 임맥을 뚫어볼까? 내일 해도 좋다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하겠습니다.”
“그래. 모처럼 조용해졌으니 지금 하는 편이 낫겠지.”
금광요는 태연한 척 가장하며 겉옷을 벗었다.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등불을 끄자 보랏빛 어둠이 내려앉았다.
서로가 단정하게 마주앉은 상태에서 남희신이 양 손바닥을 겹쳐 금광요의 몸 중심부에 갖다대고 눈을 감았다.
한 주향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금광요의 눈썹이 꿈틀대며 얼굴 옆으로 땀이 배어 나왔다. 불상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몸 속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한 빛은 없지만 남희신도 온 신경을 집중시켜서 영맥을 보호하고 있었다.
별안간 뭉쳤던 영력이 풀려나며 굵은 영맥을 통과했다. 드세게 터져 나오면서 미처 바른 길을 달리지 못한 영맥이 좌충우돌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남희신의 손을 튕겨내었다.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눈을 뜬 금광요가 숨을 삼켰다.
남희신의 손바닥이 갈라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형님!”
남희신이 놀라서 일어나려는 금광요의 어깨를 잡아서 내리눌렀다.
“아요! 호흡을 흩트리면 안 된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거라!”
드물게 엄한 말투의 명령에 금광요는 이내 바른 자세로 돌아와서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 겨우 영맥을 진정시켰을 때에는 남희신의 옷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벌떡 일어난 금광요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남희신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영맥이 뚫린 사실을 기뻐했다.
“이 정도 상처를 가지고 뭘 그러느냐. 그보다 명심하거라, 내일은 다른 영맥을 건드릴 생각 말고 운기조식만 해야 한다.”
해시가 가까워져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새까맣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금광요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후 다시금 조용히 앉아서 영력을 순환시켜 보았다. 또 하나의 큰 영맥이 뚫려서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두 개의 검은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감돌았다. 신체 능력의 향상은 누구에게든 기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 후 금광요는 초에 불을 붙이고 반 시진 가량 붓을 놀렸다.
앞으로도 금광요는 운심부지처와 금린대를 오가며 심법, 검법, 음률까지 뭐든 닥치는대로 배울 생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량을 늘리고 싶은 이유만은 아니었다.
남희신의 곁에만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금광요는 스스로에게 솔직히 인정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인생의 목적을 잃고 만 일은 혼란스러웠지만, 당장은 다정하게 대해 주는 남희신의 존재만으로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취침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침상에 누워서 한참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희신의 손바닥에 긴 상처가 패여 깨끗한 피부와 옷자락에 피가 흐르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쳤더라면 이 편에서 먼저 나서서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감아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남희신이 스스로 치료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날이 갈수록 그의 앞에만 서면 행동이 흐트러지고 맥을 못 추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다친 것이 저이고, 남희신이 제 손을 치료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금광요는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온정과 온녕 일가는 수진계의 세력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지방으로 떠났다. 산과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기후가 차가워서 기산이나 운몽만큼 풍요롭다곤 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했다.
여울에서 이맘때쯤 자라는 약초를 캐고 있던 온정이 인기척에 허리를 세웠다.
뜻밖에도 온녕의 곁에 남망기가 서 있었다.
“함광군?”
온정은 위무선뿐 아니라 남망기와 금광요에게 도움을 받은 사실을 당연히 잊지 않았다. 그가 왜 왔는지는 몰라도 반갑게 맞아들였다.
하지만 남망기는 초대를 거절하고 온정에게 잠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남망기를 따라가면서 온정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무슨 이유든 의술사인 자신을 찾는데 길한 일보다 불길한 일이 더 많을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남망기는 인가를 계속 지나쳐 시내로 들어간 후 허름한 객점 앞에 멈추었다. 하얗게 빛나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객점이었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더 나은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는 온정이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남망기는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방을 미리 빌려 둔 것 같았다.
온정은 남망기가 문에 걸린 결계를 지우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서자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 작지 않은 방 안이 온통 사람의 키만큼 쌓인 서책으로 그득했다.
장서를 배경으로 우뚝 선 남망기가 가까운 책더미 위에 손을 올리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금광요는 혼례식을 마무리한 후 강염리에 대한 예의로 1개월 가량을 머무른 다음 운심부지처로 돌아왔다.
화려한 화분을 안고 찾아온 그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요? 너 왔구나.”
“예, 형님.”
벌써 고소 남씨의 옷으로 갈아입은 금광요가 조심스럽게 화분을 내려놓았다. 반쯤 피거나 활짝 핀 올망졸망한 꽃들이 금테가 둘러서 화사했다.
“금린대에서 보았던 꽃이구나.”
“예. 금모란의 아종입니다. 부친께서는 꽃이 너무 작다고 다 뽑아버리라고 하셨지만, 형님께서 맘에 들어하셨던 것 같아서요.”
“그래,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 곳은 밤바람이 찬데 괜찮을까?”
“실내에 두어야 할 겁니다.”
“그럼 내 방에 두지.”
금광요는 흘긋 남희신의 방을 돌아보았다. 고소 남씨의 종주다운 품격이 깃든 한실에는 아무래도 금칠을 한 듯한 꽃과 화분이 어울리지 않았다.
“화분을 바꿔 오겠습니다.”
“괜찮다, 그대로 다오.”
남희신은 손수 화분을 가져다 창가에 놓고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작은 금부인께서는 잘 지내시지?”
금광요가 말없이 웃었다. 금자헌이 강염리를 애지중지 받드는 모양은 금광선도 눈꼴이 시다고 할 정도였다. 덕분에 집안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웠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문득 행복스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염방존.”
촘촘히 박힌 박석을 밟고 지나가던 금광요의 귓전에 날카로운 소년의 목소리가 와 박혔다.
예의 없게도 높다랗게 얹힌 돌사자의 옆에 끼어 앉은 소년은 언뜻 보아도 성질이 고약해 보였다.
“설양.”
소년은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금광요의 주위를 슬슬 돌았다.
“요즘 보기 힘들던데? 노인네 비위 맞추긴 그만 뒀나 보지?”
금광요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난날에는 묘한 동질감까지 느꼈던 이가 갑자기 위험하고 낯설어 보인다는 사실에 괴리감이 들었다.
“요즘 뭐 하고 있어?”
“...그냥.”
금광요의 성의 없는 대답, 벽을 치는 듯한 태도를 보고 설양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못보던 새에 뭔가 싫은 냄새를 풍기게 됐군. 아니면 나조차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 된 건가?”
“...”
“가급적 후자이길 바랄게. 난 너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단 말이야.”
금광요는 설양이 등을 돌리자마자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운심부지처로 돌아갈 것이라는 핑계로 여러 가지 일들을 피했다. 설양을 돕는 수상한 임무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금자훈이 궁기도 사건에 데인 후 떠넘기려 한 건설 일 역시 모른체 외면해버렸다.
다행히 남희신과 가까이 지내는 그에게 떳떳치 못한 일을 맡기는 건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 금광선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금자헌의 혼례식에서 위무선이 사돈으로서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는 음호부의 일도 잊고는 마음 편히 주색으로 빠져들었다.
천하가 평정된 후 고소 남씨는 고상하고, 청하 섭씨는 정의로우며, 난릉 금씨는 지난날 손상되었던 영화를 재건하는데 힘을 다하니 하루 하루가 무탈하게 흘러갔다.
막 전쟁을 치른 직후라 좀체 적응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평화로운 일상에 물들어갔다.
***
스산한 안개 위에 짙은 어둠이 깔리고 그 위로 금과 퉁소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현을 튕기는 사이사이 애잔한 퉁소 소리가 스며드는 것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심금을 울리는 것 같았다.
운심부지처 사람들은 남씨 쌍벽이 합주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금광요의 금 소리였다. 최근 남망기는 어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보통은 남희신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금을 탔지만 오늘은 금광요가 자청한 일이었다.
본래 사람이 음률에 젖고 싶을 때는 기쁠 때보다는 마음이 쓸쓸할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노하거나 슬픈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산 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외롭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남희신의 손을 빌려 보았더니,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커녕 영혼까지 쥐어 흔들린 느낌이었다.
“정말 좋구나.”
한숨을 쉬는 듯 남희신이 말하자 금광요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가다듬은 얼굴을 들었다.
“제가 형님의 솜씨에 미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당치도 않다. 너는 너무 겸손해.”
본래도 고금 타는 솜씨가 제법 훌륭했던 금광요는 근래 영맥이 트이며 금 소리가 한층 깊어진 것 같았다.
남희신이 다가오자 금광요는 고금을 밀어놓고 돌아앉았다.
“소리를 들어 보니 왼팔로 가는 심맥도 많이 진정된 것 같구나.”
맥을 짚어 보니 과연 영력이 부드럽게 통과하고 있었다. 남희신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전에 남희신의 맨살에 닿았다가 기겁을 한 금광요는 금단을 다듬는 데 매진하고 싶다며 영력 읽는 수련을 중단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맥만 짚어도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심지어는 남희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마저도 훔쳐보는 것처럼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전에 임맥을 뚫어볼까? 내일 해도 좋다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하겠습니다.”
“그래. 모처럼 조용해졌으니 지금 하는 편이 낫겠지.”
금광요는 태연한 척 가장하며 겉옷을 벗었다.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등불을 끄자 보랏빛 어둠이 내려앉았다.
서로가 단정하게 마주앉은 상태에서 남희신이 양 손바닥을 겹쳐 금광요의 몸 중심부에 갖다대고 눈을 감았다.
한 주향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금광요의 눈썹이 꿈틀대며 얼굴 옆으로 땀이 배어 나왔다. 불상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몸 속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한 빛은 없지만 남희신도 온 신경을 집중시켜서 영맥을 보호하고 있었다.
별안간 뭉쳤던 영력이 풀려나며 굵은 영맥을 통과했다. 드세게 터져 나오면서 미처 바른 길을 달리지 못한 영맥이 좌충우돌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남희신의 손을 튕겨내었다.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눈을 뜬 금광요가 숨을 삼켰다.
남희신의 손바닥이 갈라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형님!”
남희신이 놀라서 일어나려는 금광요의 어깨를 잡아서 내리눌렀다.
“아요! 호흡을 흩트리면 안 된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거라!”
드물게 엄한 말투의 명령에 금광요는 이내 바른 자세로 돌아와서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 겨우 영맥을 진정시켰을 때에는 남희신의 옷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벌떡 일어난 금광요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남희신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영맥이 뚫린 사실을 기뻐했다.
“이 정도 상처를 가지고 뭘 그러느냐. 그보다 명심하거라, 내일은 다른 영맥을 건드릴 생각 말고 운기조식만 해야 한다.”
해시가 가까워져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새까맣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금광요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후 다시금 조용히 앉아서 영력을 순환시켜 보았다. 또 하나의 큰 영맥이 뚫려서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두 개의 검은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감돌았다. 신체 능력의 향상은 누구에게든 기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 후 금광요는 초에 불을 붙이고 반 시진 가량 붓을 놀렸다.
앞으로도 금광요는 운심부지처와 금린대를 오가며 심법, 검법, 음률까지 뭐든 닥치는대로 배울 생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량을 늘리고 싶은 이유만은 아니었다.
남희신의 곁에만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금광요는 스스로에게 솔직히 인정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인생의 목적을 잃고 만 일은 혼란스러웠지만, 당장은 다정하게 대해 주는 남희신의 존재만으로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취침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침상에 누워서 한참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희신의 손바닥에 긴 상처가 패여 깨끗한 피부와 옷자락에 피가 흐르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쳤더라면 이 편에서 먼저 나서서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감아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남희신이 스스로 치료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날이 갈수록 그의 앞에만 서면 행동이 흐트러지고 맥을 못 추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다친 것이 저이고, 남희신이 제 손을 치료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금광요는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온정과 온녕 일가는 수진계의 세력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지방으로 떠났다. 산과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기후가 차가워서 기산이나 운몽만큼 풍요롭다곤 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했다.
여울에서 이맘때쯤 자라는 약초를 캐고 있던 온정이 인기척에 허리를 세웠다.
뜻밖에도 온녕의 곁에 남망기가 서 있었다.
“함광군?”
온정은 위무선뿐 아니라 남망기와 금광요에게 도움을 받은 사실을 당연히 잊지 않았다. 그가 왜 왔는지는 몰라도 반갑게 맞아들였다.
하지만 남망기는 초대를 거절하고 온정에게 잠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남망기를 따라가면서 온정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무슨 이유든 의술사인 자신을 찾는데 길한 일보다 불길한 일이 더 많을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남망기는 인가를 계속 지나쳐 시내로 들어간 후 허름한 객점 앞에 멈추었다. 하얗게 빛나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객점이었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더 나은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는 온정이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남망기는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방을 미리 빌려 둔 것 같았다.
온정은 남망기가 문에 걸린 결계를 지우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서자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 작지 않은 방 안이 온통 사람의 키만큼 쌓인 서책으로 그득했다.
장서를 배경으로 우뚝 선 남망기가 가까운 책더미 위에 손을 올리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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