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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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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 되자 해가 떠오르는 시각부터 엄청난 인파가 연도를 오르기 시작했다. 왕궁처럼 넓고 으리으리한 금린대가 손님 뿐 아니라 시중드는 하인들까지 더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금광선이 주요 인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데만도 긴 시간이 소요되어서 제때에 예식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잦은 청담회와 연회가 열리는 난릉 금씨이지만 일찌기 이만한 규모의 모임은 없었다. 금광요가 금광선조차도 감당할 수 있을까 우려할 정도로 많은 초청장을 날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빈틈없는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사방은 이를데 없이 화려하여 어디를 쳐다보아도 금빛이 찬란했다. 물론 금광선이 사랑하는 아들의 혼례에 돈을 아끼지 않은 덕이었다.
“아무렴, 누구 혼사인데.”
사람들은 연방 감탄을 하며, 특히 평소에 세가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이들은 체면도 버리고 이곳 저곳 쫓아다니며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가의 주인이 앉는 좌석에는 강만음과 위무선이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위무선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으나 오늘만은 운몽 강씨의 자색 예복을 휘감고, 허리춤엔 진정 외에 수편까지 꽂고 예의바르게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강징이 얼굴 좀 펴라는 듯 위무선을 노려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라고 대놓고 싫은 티를 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웃고 싶어도 웃음이 안 나오는 걸 어쩌라는 건가.
그나마 적봉존에 이어 고소 남씨 쌍벽의 입장을 보고서야 조금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근래 남망기와 어울리던 것이 습관이 되어, 얼른 그에게 달려가서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마침내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강염리가 등장했을 때에는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오늘만은 신랑복을 입고 들떠 있는 금자헌을 보아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사저와 예를 나누고 부부가 되는 것이니, 두 사람이 잘 살아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연회는 앞으로 며칠이나 계속될 예정이었다.
혼례 첫날 위무선은 예식이 끝나자 눈에 불을 켜고 단속하는 강징 때문에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혼례 이튿날에는 갓 혼인한 부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지만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체면 차릴 필요도 없이 마음껏 떠들며 가능한 즐겁게 놀았다. 많이 먹고 마시고 흥겨워할수록 신랑 신부를 축복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위무선은 강징과 함께 상좌에 앉았지만 아침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강징은 옆에서 위무선의 술병을 빼앗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연회 분위기 전체가 흥청망청 흘러가자 명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리를 떠나 버리고 말았다.
위무선은 한동안 술을 가져오라고 독촉을 하여 마구 들이부었다. 그러나 선견지명이 있는 금광요가 특별히 향기로우면서도 독하지는 않은 술을 갖다주도록 지시했으므로 상당히 마셨다 싶은데도 원하는 만큼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하객들 중에는 아는 얼굴이 간간이 보였지만 하나같이 즐거워 보이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런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앞을 가리고 있던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그 너머에 자기처럼 시무룩한 얼굴을 한 사람이 보였다.
모두가 술잔을 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거나 뭉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는데, 그는 혼자서 단정하게 백옥상 뒤에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또 찻잔이나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이야 뭘 하든 거들떠도 보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남망기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갑자기 어깨 뒤로 무거운 것이 털썩 덮쳐와서 보니 술병을 쥐고 있는 위무선이었다.
“...위영.”
광택이 영롱한 예복에서 잔뜩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은 남망기가 이마를 찌푸렸다.
“남잠.”
위무선이 남망기의 등에 멋대로 무게를 실으며 대꾸했다.
“혼례식에 와서까지 차라니. 너다워서 할 말이 없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던 남망기는 묵묵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위무선이 보니 멀리서 강징이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에 띄는 물건은 모조리 금빛 아니면 붉은빛에, 잔에 든 것은 미주. 사람들은 천상에라도 오른 듯 행복해 보였다.
저만이 그 빛나는 세계로부터 떨어져서 바위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다. 혼자는 아니다. 남망기가 함께 있었다.
“남잠.”
위무선이 몸을 돌려 남망기의 등에 찰싹 달라붙더니 어깨 너머로 술병을 내밀었다.
“남잠, 나랑 한잔 하자.”
“안돼.”
“그러지 말고 한잔 하자니까.”
당연히 거절할 줄 알면서도, 위무선은 굽히지 않고 술기운까지 빌려서 끈덕지게 졸라대었다.
“알았어, 진정해. 섭회상을 데려올 테니까...”
“난 너하고 마시고 싶다고! 너, 내가 남씨 가훈을 얼마나 베꼈는지 알지? 운심부지처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단 거지, 여기선 괜찮잖아. 여긴 금린대이고, 혼례식이고...”
남망기의 어깨가 담벼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을 얹고 마구 지껄이던 목소리가 돌연 시무룩하게 줄어들었다.
“...사저의 혼례식이란 말이야...”
남망기가 무거운 어깨 쪽으로 고개를 살짝 꼬더니 한숨을 쉬었다.
“딱 한잔만이야.”
위무선은 금세 희희낙락하며 남망기의 빈 찻잔에 술을 철철 들이부었다.
“너 아무리 그래도 설마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은 아니겠지?”
그는 다시 남망기의 어깨에 뒤통수를 얹고 편하게 비비적대었다.
“남잠, 비웃으면 안 돼. 너도 여동생이나 누님이 있어서 갑자기 남의 집으로 시집을 가 버린다면 쓸쓸할 거라고. 그럴 일이 없으니 다행인 줄 알아...”
아련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던 위무선이 술병을 들어 입술에 갖다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망기가 몸을 숙이는 바람에 술이 왁하고 옷으로 쏟아졌다.
“야, 남잠, 너 또 심술이야?”
위무선이 불평하며 무거운 몸을 세우고 술방울을 털어내었다. 그런데 남망기는 점점 머리를 숙이더니 쿵 하고 백옥상에 이마를 박고 말았다.
그 바람에 다기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로워 놀란 위무선이 황급히 남망기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남망기는 머리가 휙 뒤로 넘어가며 늘어지는데, 말액이 비뚤어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잠, 장난치지 말라니까?”
말하면서도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남망기가 아무리 장난을 친대도 말액이 비뚤어질 정도로 할 리는 없는데.
“아니, 술에 뭘 섞기라도 했나?”
부질없이 술병을 코에 대고 킁킁 맡아 보았지만, 이미 저는 반 병이나 마셔버린 술이다.
“남잠!”
위무선이 한 번 더 외치며 흔들어대자 남망기가 번뜩 눈을 떴다.
“와, 놀래라. 너 방금 뭐였어? 장난친 거 맞지?”
위무선은 남망기가 꼿꼿한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너, 말액 비뚤어졌어.”
이 말에 남망기가 얼른 말액을 잡더니 균형을 맞추었다.
위무선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남잠, 설마 그거 먹고 취한 건 아니지?”
남망기가 자꾸만 말을 거는 위무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1초 1초 지나갈수록 불길한 느낌도 불쑥불쑥 커져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남잠. 내가 누구지?”
“위영.”
“여긴 어디지?”
“위영.”
위무선이 화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이 쪽을 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망설이다가, 에라 하고 기다란 말액 끄트머리를 잡아서 남망기의 코 앞에 대고 빙빙빙 손가락을 감아 보았다.
그러나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 듯 남망기는 내처 위무선만 바라보았다. 아주 진중하고, 위엄 있는 눈빛으로.
“...이 녀석, 정말로 술을 처음 마셨나 본데.”
단 한 잔으로 이런 괴상한 주사 상태로 넘어가는데, 알고 있었다면 절대 마실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순간 위무선은 강염리의 혼례를 포함한 자신의 우울한 문제 일체를 잊었다.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지만 말액으로 장난을 쳐도 못 알아볼 정도로 인사불성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우격다짐으로 간신히 친구가 된 참인데 이런 웃기지도 않은 실수로 절교당하고 싶진 않았다.
“남잠, 방으로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다행스럽게도 남망기는 위무선이 잡아끌자 얌전히 일어나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가긴 모양새가 이상해서 주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남망기의 어깨를 안고 내심으론 강압적으로 당겼다. 그러나 평소 설산 같은 함광군의 어깨에 타인의 손이 올라가 있는 것만도 충분히 괴이쩍은 일이라 인파를 빠져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위무선은 취한 척 헤헤 웃었지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겨우 객실에 도착한 다음 얼른 남망기를 안으로 떠밀어넣고 문을 닫은 다음 걸쇠까지 걸었다.
한숨을 돌리고 보니 남망기는 금방 밀어넣어진 그대로 서 있었는데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꼿꼿한 아주 훌륭한 자세였다. 낯빛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약간의 홍조도 없었다.
“남잠, 너 이제 와서 장난이었다고 하면 날려버릴 거야.”
남망기는 위무선이 말을 걸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위무선은 남망기가 절대로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망기의 손이 빠르게 뻗어오더니, 허리춤에 꽂힌 진정을 뽑아서 냅다 던져버린 것이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호되게 벽에 부딪힌 진정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평범한 피리였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위무선은 너무 놀라서 남망기와 바닥에 떨어진 피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망기는 이제 조금도 고고해 보이지 않았다. 위무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아니꼬운 빛이 가득했다. ‘어디 두고 보자’고 말하는 어린애처럼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취했군. 확실히 취했어!’
더럭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막 어린애같은 주정을 시작한 이 남자는, 끝장나는 영력과, 끝장나는 패검에, 끝장나는 완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위무선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채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피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범의 수염을 건드린 것처럼 남망기가 움직여오더니 위무선을 낚아채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위무선은 바로 항복을 표하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남잠, 귀물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세상에 귀신 피리 진정을 저런 취급한 건 남망기 단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위무선이 재차 좋은 말로 달래 보았지만 남망기는 어림없다는 듯 입술을 움찔하더니 위무선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저렇게 아무데나 굴려놓을 순 없잖아. 탁자 위에 올려놓기만 할게. 올려놓기만!”
이 말에 남망기가 수상쩍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위무선은 조심조심 발을 떼서 진정을 집은 다음, 탁자에 얹어 놓았다.
“내 말이 맞지? 됐지? ...으악! 또 뭐야!”
남망기가 성큼하고 다시 거리를 좁혀오자 놀란 위무선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더욱 기절초풍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을 붙잡은 남망기가 다짜고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악! 남잠! 너 뭐해! 남망기!”
난폭한 손이 예복의 옷깃을 잡아 뽑았고, 뒤이어 중의 안으로 쑥 들어와 가슴이고 허리 뒤고 함부로 쑤셔대었다. 위무선은 일껏 밀어내며 너무 놀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윽고 남망기가 손을 홱 뿌렸다.
위무선은 머리 위에서부터 수십 장의 종이가 꽃잎처럼 펄렁펄렁 떨어지는 것을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남망기가 부적을 찾아내어 피리처럼 던져버린 것을 알았다. 볼 일이 끝나자 쇠집게처럼 잡고 놓아주지 않던 손도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까... 깜짝이야. 이상한 술버릇이라도 있는 줄...”
남망기는 단정한 자세로 되돌아가서 고요해졌지만 위무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벌렁대는 가슴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했다.
이윽고 위무선이 허리를 굽혀 부적을 줍기 시작하며, 때맞춰 한 발짝 내미는 남망기에게 팔을 휘둘렀다.
“줍기만! 줍기만 한다고!”
금종이처럼 뿌려진 부적을 남김없이 줍느라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위무선은 성가신 나머지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말, 이게 뭐냐고... 술 한잔 같이 하자고 했을 뿐인데. 이런 아니꼬운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너 진짜 밉상이다...”
부적을 다 줍고 난 후에는 역시 피리 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얌전히 서 있는 남망기를 보았더니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해?”
위무선이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자 남망기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눈빛이었다.
“...하지 마.”
“또 뭘?”
“사술을 부리면 못써.”
만약 남망기가 맨정신이었다면 그 말에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과 진지하게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잊겠지.”
위무선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남망기를 향해 어린애에게 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알았어, 안 쓸게.”
“진짜?”
“진짜.”
그 순간 남망기의 얼굴에 미소가 퍼지자, 위무선은 침상을 짚은 팔이 휘청했다.
남망기가 이렇게 전면으로 웃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웃는 근육이 다 망가져 버렸을 거라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남망기는 웃을 수 있었고, 그 웃는 얼굴은 따스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하물며 함광군의 웃는 얼굴이라.
위무선은 마음이 누그러들었고, 남망기가 취중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불쑥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남잠, 이리 와 봐.”
남망기는 금방의 요구가 무슨 평생의 소원이라도 되었던 양 얌전해진 상태였다. 위무선이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는 주시처럼 터벅터벅 걸어와서 앞에 멈추었다.
위무선이 아주 다정하게 불렀다.
“남잠.”
“응.”
“그런데 나 이제 어떡하지? 금단이 없는데 주술조차 못 쓰면, 누가 괴롭히면 어떡해. 너 그런 생각까진 안 하지?”
“내가 지켜줄 거야.”
역시 어린애같은 대답에, 위무선이 하하 웃었다.
“남잠, 말도 안 하고 무뚝뚝하게 굴더니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어?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이렇게 친해졌는데 금단이 없어졌으니. 오래도록 너랑 친구할 수도 없겠다.”
이 말에 갑자기 남망기가 팍 하고 위무선의 어깨를 때렸다. 힘조절도 못하는지 꽤 아파서 위무선이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때려!”
남망기는 말없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는 눈빛도 어딘지 귀여운 데가 있어서, 위무선은 어깨를 주무르면서 투덜거렸다. 웃는 것도 노려보는 것도 참 심장에 나쁘네. 그런데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관두자. 취한 사람 상대로 뭘 하겠어.
그는 남망기를 잡아서 침상에 앉혔다.
“자, 이제 마음 풀렸으면 얌전히 누워 잠이나 자, 남잠.”
그러나 남망기는 몸을 꼿꼿하게 한 채 밀어도 밀리지 않고 당겨도 당겨지지 않았다.
“해시가 아니라서 안 자겠다는 거야? 이런, 무슨 힘이 이렇게 세! 아직 밤도 멀었는데 나더러 널 어떻게 감당하라고?”
갑자기 남망기가 손을 뒤집더니 위무선을 끌어당겼다. 동상처럼 앉은 채 손만 당겼지만 강철같은 힘이라 위무선은 남망기의 몸 위로 확 엎어지고 말았다.
위무선이 남망기의 어깨를 짚고 간신히 몸을 가누자 옅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내가 되찾아줄게.”
남망기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금단을 되찾아줄게. 걱정하지 마, 위영.”
혼례 사흘째 되는 날.
정오가 가까워지자 온전히 난릉 금씨의 식구가 되어 새색시의 옷을 입은 강염리와 금자헌이 연회에 나왔다.
부부는 가장 먼저 금광선 부부와 강징 형제에게 예를 올렸고 그 후에도 계속 손님들을 만나며 축하를 받았다.
위무선은 턱을 괴고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슬며시 일어나서 남망기의 곁으로 이동했다.
남망기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사저는 정말로 행복한가 봐.”
“...”
“사저가 좋다면 좋은 거지만... 난 정말 괴로워, 남잠.”
남망기는 차조차 입에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위무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간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 속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반대로 남망기답지 않은 귀여운 짓을 전부 기억하는 위무선은 그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잠시 시름을 잊었다.
“남잠, 너 술버릇 신기하더라.”
이 말에 남망기가 움찔 동요하는 것이 역시 재미있었다.
“기억나?”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진정을 내동댕이치고 부적을 공중에 뿌리던 걸 생각하면 기억 못하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뭔가 아쉬웠다.
“남가 둘째 공자, 다정하기도 하지. 내 손을 이렇게 꼭 잡고...”
위무선이 그렇게 말하며 남망기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흘려넣었다.
“금단을 되돌려줄 테니 자기만 믿으라더라.”
‘요즘 남망기는 내가 손까지 잡아도 가만히 있네.’
위무선이 웃으면서 손을 떼려고 하는 순간, 남망기가 손가락을 오무리며 꽉 붙잡았다.
“위영.”
“...응?”
“금단을 살리고 싶어?”
위무선은 잠시 말이 없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문이었다.
위무선은 천하의 보물인 음호부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주술사로서 달인의 경지에 달해 수백 수천의 망령을 떡주무르듯 할 수 있었고, 또한 수백 수천의 산 사람을 손 끝으로 도륙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문 백가의 사람들이 위무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질투하지만, 그들에게 만약 그 엄청난 힘과 금단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
금단이 없으면 이미 수선인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위무선은 마음 속이 만신창이였다.
그 동안 가슴 상할 일을 수없이 겪었고, 사저마저 떠나보낸 참이었다.
예전엔 남망기도 그 가슴 상할 일 중 하나를 보태 줬었는데. 지금은 뜻밖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위무선에게는 아직 금단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는 강염리 때문에 연화오에 매여 있었더랬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만 지금은 혼자 남을 강징이 마음에 걸렸다. 항상 남을 밀쳐내는 소리만 하지만 외로움을 잘 타는 형제를 위무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 남자가 백골이 될 때까지 한 집에 싸우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강징 녀석도 시집이나 보내버려야지.”
위무선은 풀이 죽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남망기의 다리를 두들겼다.
“고마워.”
“뭐가?”
“내 곁에 있어 줘서.”
그렇게 말하는 위무선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진지했다.
“남잠, 혼례식이 끝나면 고소로 돌아갈 거지?”
“...응.”
“그래...”
연회 마지막 날,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금린대를 떠날 무렵 남망기가 위무선을 찾아왔다.
왠지 남망기와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냥 떠나려던 위무선은 정겨운 목소리가 부르자 하는 수 없이 돌아서서 웃었다.
“이제 돌아가?”
“위영.”
“응?”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연화오에 있어.”
“어디 갈 생각도 없지만... 왜?”
문득 위무선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또 놀러올 거야, 너?”
“아무데도 가면 안 돼.”
위무선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게 심각하게 할 얘기도 아니건만, 남망기도 참. 하긴 그래, 원체 심각한 성격이니까.
어쩌면 그만큼 저에게 놀러오고 싶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가시는 것 같았다.
“알았어. 너도 꼭 와야 돼.”
“...꼭 갈게.”
남망기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마침내 남희신과 함께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무선은 괜시리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다음날이 되자 해가 떠오르는 시각부터 엄청난 인파가 연도를 오르기 시작했다. 왕궁처럼 넓고 으리으리한 금린대가 손님 뿐 아니라 시중드는 하인들까지 더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금광선이 주요 인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데만도 긴 시간이 소요되어서 제때에 예식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잦은 청담회와 연회가 열리는 난릉 금씨이지만 일찌기 이만한 규모의 모임은 없었다. 금광요가 금광선조차도 감당할 수 있을까 우려할 정도로 많은 초청장을 날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빈틈없는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사방은 이를데 없이 화려하여 어디를 쳐다보아도 금빛이 찬란했다. 물론 금광선이 사랑하는 아들의 혼례에 돈을 아끼지 않은 덕이었다.
“아무렴, 누구 혼사인데.”
사람들은 연방 감탄을 하며, 특히 평소에 세가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이들은 체면도 버리고 이곳 저곳 쫓아다니며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가의 주인이 앉는 좌석에는 강만음과 위무선이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위무선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으나 오늘만은 운몽 강씨의 자색 예복을 휘감고, 허리춤엔 진정 외에 수편까지 꽂고 예의바르게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강징이 얼굴 좀 펴라는 듯 위무선을 노려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라고 대놓고 싫은 티를 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웃고 싶어도 웃음이 안 나오는 걸 어쩌라는 건가.
그나마 적봉존에 이어 고소 남씨 쌍벽의 입장을 보고서야 조금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근래 남망기와 어울리던 것이 습관이 되어, 얼른 그에게 달려가서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마침내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강염리가 등장했을 때에는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오늘만은 신랑복을 입고 들떠 있는 금자헌을 보아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사저와 예를 나누고 부부가 되는 것이니, 두 사람이 잘 살아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연회는 앞으로 며칠이나 계속될 예정이었다.
혼례 첫날 위무선은 예식이 끝나자 눈에 불을 켜고 단속하는 강징 때문에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혼례 이튿날에는 갓 혼인한 부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지만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체면 차릴 필요도 없이 마음껏 떠들며 가능한 즐겁게 놀았다. 많이 먹고 마시고 흥겨워할수록 신랑 신부를 축복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위무선은 강징과 함께 상좌에 앉았지만 아침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강징은 옆에서 위무선의 술병을 빼앗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연회 분위기 전체가 흥청망청 흘러가자 명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리를 떠나 버리고 말았다.
위무선은 한동안 술을 가져오라고 독촉을 하여 마구 들이부었다. 그러나 선견지명이 있는 금광요가 특별히 향기로우면서도 독하지는 않은 술을 갖다주도록 지시했으므로 상당히 마셨다 싶은데도 원하는 만큼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하객들 중에는 아는 얼굴이 간간이 보였지만 하나같이 즐거워 보이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런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앞을 가리고 있던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그 너머에 자기처럼 시무룩한 얼굴을 한 사람이 보였다.
모두가 술잔을 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거나 뭉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는데, 그는 혼자서 단정하게 백옥상 뒤에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또 찻잔이나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이야 뭘 하든 거들떠도 보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남망기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갑자기 어깨 뒤로 무거운 것이 털썩 덮쳐와서 보니 술병을 쥐고 있는 위무선이었다.
“...위영.”
광택이 영롱한 예복에서 잔뜩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은 남망기가 이마를 찌푸렸다.
“남잠.”
위무선이 남망기의 등에 멋대로 무게를 실으며 대꾸했다.
“혼례식에 와서까지 차라니. 너다워서 할 말이 없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던 남망기는 묵묵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위무선이 보니 멀리서 강징이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에 띄는 물건은 모조리 금빛 아니면 붉은빛에, 잔에 든 것은 미주. 사람들은 천상에라도 오른 듯 행복해 보였다.
저만이 그 빛나는 세계로부터 떨어져서 바위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다. 혼자는 아니다. 남망기가 함께 있었다.
“남잠.”
위무선이 몸을 돌려 남망기의 등에 찰싹 달라붙더니 어깨 너머로 술병을 내밀었다.
“남잠, 나랑 한잔 하자.”
“안돼.”
“그러지 말고 한잔 하자니까.”
당연히 거절할 줄 알면서도, 위무선은 굽히지 않고 술기운까지 빌려서 끈덕지게 졸라대었다.
“알았어, 진정해. 섭회상을 데려올 테니까...”
“난 너하고 마시고 싶다고! 너, 내가 남씨 가훈을 얼마나 베꼈는지 알지? 운심부지처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단 거지, 여기선 괜찮잖아. 여긴 금린대이고, 혼례식이고...”
남망기의 어깨가 담벼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을 얹고 마구 지껄이던 목소리가 돌연 시무룩하게 줄어들었다.
“...사저의 혼례식이란 말이야...”
남망기가 무거운 어깨 쪽으로 고개를 살짝 꼬더니 한숨을 쉬었다.
“딱 한잔만이야.”
위무선은 금세 희희낙락하며 남망기의 빈 찻잔에 술을 철철 들이부었다.
“너 아무리 그래도 설마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은 아니겠지?”
그는 다시 남망기의 어깨에 뒤통수를 얹고 편하게 비비적대었다.
“남잠, 비웃으면 안 돼. 너도 여동생이나 누님이 있어서 갑자기 남의 집으로 시집을 가 버린다면 쓸쓸할 거라고. 그럴 일이 없으니 다행인 줄 알아...”
아련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던 위무선이 술병을 들어 입술에 갖다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망기가 몸을 숙이는 바람에 술이 왁하고 옷으로 쏟아졌다.
“야, 남잠, 너 또 심술이야?”
위무선이 불평하며 무거운 몸을 세우고 술방울을 털어내었다. 그런데 남망기는 점점 머리를 숙이더니 쿵 하고 백옥상에 이마를 박고 말았다.
그 바람에 다기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로워 놀란 위무선이 황급히 남망기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남망기는 머리가 휙 뒤로 넘어가며 늘어지는데, 말액이 비뚤어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잠, 장난치지 말라니까?”
말하면서도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남망기가 아무리 장난을 친대도 말액이 비뚤어질 정도로 할 리는 없는데.
“아니, 술에 뭘 섞기라도 했나?”
부질없이 술병을 코에 대고 킁킁 맡아 보았지만, 이미 저는 반 병이나 마셔버린 술이다.
“남잠!”
위무선이 한 번 더 외치며 흔들어대자 남망기가 번뜩 눈을 떴다.
“와, 놀래라. 너 방금 뭐였어? 장난친 거 맞지?”
위무선은 남망기가 꼿꼿한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너, 말액 비뚤어졌어.”
이 말에 남망기가 얼른 말액을 잡더니 균형을 맞추었다.
위무선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남잠, 설마 그거 먹고 취한 건 아니지?”
남망기가 자꾸만 말을 거는 위무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1초 1초 지나갈수록 불길한 느낌도 불쑥불쑥 커져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남잠. 내가 누구지?”
“위영.”
“여긴 어디지?”
“위영.”
위무선이 화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이 쪽을 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망설이다가, 에라 하고 기다란 말액 끄트머리를 잡아서 남망기의 코 앞에 대고 빙빙빙 손가락을 감아 보았다.
그러나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 듯 남망기는 내처 위무선만 바라보았다. 아주 진중하고, 위엄 있는 눈빛으로.
“...이 녀석, 정말로 술을 처음 마셨나 본데.”
단 한 잔으로 이런 괴상한 주사 상태로 넘어가는데, 알고 있었다면 절대 마실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순간 위무선은 강염리의 혼례를 포함한 자신의 우울한 문제 일체를 잊었다.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지만 말액으로 장난을 쳐도 못 알아볼 정도로 인사불성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우격다짐으로 간신히 친구가 된 참인데 이런 웃기지도 않은 실수로 절교당하고 싶진 않았다.
“남잠, 방으로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다행스럽게도 남망기는 위무선이 잡아끌자 얌전히 일어나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가긴 모양새가 이상해서 주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남망기의 어깨를 안고 내심으론 강압적으로 당겼다. 그러나 평소 설산 같은 함광군의 어깨에 타인의 손이 올라가 있는 것만도 충분히 괴이쩍은 일이라 인파를 빠져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위무선은 취한 척 헤헤 웃었지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겨우 객실에 도착한 다음 얼른 남망기를 안으로 떠밀어넣고 문을 닫은 다음 걸쇠까지 걸었다.
한숨을 돌리고 보니 남망기는 금방 밀어넣어진 그대로 서 있었는데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꼿꼿한 아주 훌륭한 자세였다. 낯빛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약간의 홍조도 없었다.
“남잠, 너 이제 와서 장난이었다고 하면 날려버릴 거야.”
남망기는 위무선이 말을 걸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위무선은 남망기가 절대로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망기의 손이 빠르게 뻗어오더니, 허리춤에 꽂힌 진정을 뽑아서 냅다 던져버린 것이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호되게 벽에 부딪힌 진정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평범한 피리였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위무선은 너무 놀라서 남망기와 바닥에 떨어진 피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망기는 이제 조금도 고고해 보이지 않았다. 위무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아니꼬운 빛이 가득했다. ‘어디 두고 보자’고 말하는 어린애처럼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취했군. 확실히 취했어!’
더럭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막 어린애같은 주정을 시작한 이 남자는, 끝장나는 영력과, 끝장나는 패검에, 끝장나는 완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위무선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채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피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범의 수염을 건드린 것처럼 남망기가 움직여오더니 위무선을 낚아채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위무선은 바로 항복을 표하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남잠, 귀물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세상에 귀신 피리 진정을 저런 취급한 건 남망기 단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위무선이 재차 좋은 말로 달래 보았지만 남망기는 어림없다는 듯 입술을 움찔하더니 위무선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저렇게 아무데나 굴려놓을 순 없잖아. 탁자 위에 올려놓기만 할게. 올려놓기만!”
이 말에 남망기가 수상쩍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위무선은 조심조심 발을 떼서 진정을 집은 다음, 탁자에 얹어 놓았다.
“내 말이 맞지? 됐지? ...으악! 또 뭐야!”
남망기가 성큼하고 다시 거리를 좁혀오자 놀란 위무선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더욱 기절초풍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을 붙잡은 남망기가 다짜고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악! 남잠! 너 뭐해! 남망기!”
난폭한 손이 예복의 옷깃을 잡아 뽑았고, 뒤이어 중의 안으로 쑥 들어와 가슴이고 허리 뒤고 함부로 쑤셔대었다. 위무선은 일껏 밀어내며 너무 놀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윽고 남망기가 손을 홱 뿌렸다.
위무선은 머리 위에서부터 수십 장의 종이가 꽃잎처럼 펄렁펄렁 떨어지는 것을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남망기가 부적을 찾아내어 피리처럼 던져버린 것을 알았다. 볼 일이 끝나자 쇠집게처럼 잡고 놓아주지 않던 손도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까... 깜짝이야. 이상한 술버릇이라도 있는 줄...”
남망기는 단정한 자세로 되돌아가서 고요해졌지만 위무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벌렁대는 가슴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했다.
이윽고 위무선이 허리를 굽혀 부적을 줍기 시작하며, 때맞춰 한 발짝 내미는 남망기에게 팔을 휘둘렀다.
“줍기만! 줍기만 한다고!”
금종이처럼 뿌려진 부적을 남김없이 줍느라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위무선은 성가신 나머지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말, 이게 뭐냐고... 술 한잔 같이 하자고 했을 뿐인데. 이런 아니꼬운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너 진짜 밉상이다...”
부적을 다 줍고 난 후에는 역시 피리 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얌전히 서 있는 남망기를 보았더니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해?”
위무선이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자 남망기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눈빛이었다.
“...하지 마.”
“또 뭘?”
“사술을 부리면 못써.”
만약 남망기가 맨정신이었다면 그 말에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과 진지하게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잊겠지.”
위무선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남망기를 향해 어린애에게 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알았어, 안 쓸게.”
“진짜?”
“진짜.”
그 순간 남망기의 얼굴에 미소가 퍼지자, 위무선은 침상을 짚은 팔이 휘청했다.
남망기가 이렇게 전면으로 웃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웃는 근육이 다 망가져 버렸을 거라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남망기는 웃을 수 있었고, 그 웃는 얼굴은 따스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하물며 함광군의 웃는 얼굴이라.
위무선은 마음이 누그러들었고, 남망기가 취중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불쑥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남잠, 이리 와 봐.”
남망기는 금방의 요구가 무슨 평생의 소원이라도 되었던 양 얌전해진 상태였다. 위무선이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는 주시처럼 터벅터벅 걸어와서 앞에 멈추었다.
위무선이 아주 다정하게 불렀다.
“남잠.”
“응.”
“그런데 나 이제 어떡하지? 금단이 없는데 주술조차 못 쓰면, 누가 괴롭히면 어떡해. 너 그런 생각까진 안 하지?”
“내가 지켜줄 거야.”
역시 어린애같은 대답에, 위무선이 하하 웃었다.
“남잠, 말도 안 하고 무뚝뚝하게 굴더니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어?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이렇게 친해졌는데 금단이 없어졌으니. 오래도록 너랑 친구할 수도 없겠다.”
이 말에 갑자기 남망기가 팍 하고 위무선의 어깨를 때렸다. 힘조절도 못하는지 꽤 아파서 위무선이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때려!”
남망기는 말없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는 눈빛도 어딘지 귀여운 데가 있어서, 위무선은 어깨를 주무르면서 투덜거렸다. 웃는 것도 노려보는 것도 참 심장에 나쁘네. 그런데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관두자. 취한 사람 상대로 뭘 하겠어.
그는 남망기를 잡아서 침상에 앉혔다.
“자, 이제 마음 풀렸으면 얌전히 누워 잠이나 자, 남잠.”
그러나 남망기는 몸을 꼿꼿하게 한 채 밀어도 밀리지 않고 당겨도 당겨지지 않았다.
“해시가 아니라서 안 자겠다는 거야? 이런, 무슨 힘이 이렇게 세! 아직 밤도 멀었는데 나더러 널 어떻게 감당하라고?”
갑자기 남망기가 손을 뒤집더니 위무선을 끌어당겼다. 동상처럼 앉은 채 손만 당겼지만 강철같은 힘이라 위무선은 남망기의 몸 위로 확 엎어지고 말았다.
위무선이 남망기의 어깨를 짚고 간신히 몸을 가누자 옅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내가 되찾아줄게.”
남망기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금단을 되찾아줄게. 걱정하지 마, 위영.”
혼례 사흘째 되는 날.
정오가 가까워지자 온전히 난릉 금씨의 식구가 되어 새색시의 옷을 입은 강염리와 금자헌이 연회에 나왔다.
부부는 가장 먼저 금광선 부부와 강징 형제에게 예를 올렸고 그 후에도 계속 손님들을 만나며 축하를 받았다.
위무선은 턱을 괴고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슬며시 일어나서 남망기의 곁으로 이동했다.
남망기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사저는 정말로 행복한가 봐.”
“...”
“사저가 좋다면 좋은 거지만... 난 정말 괴로워, 남잠.”
남망기는 차조차 입에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위무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간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 속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반대로 남망기답지 않은 귀여운 짓을 전부 기억하는 위무선은 그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잠시 시름을 잊었다.
“남잠, 너 술버릇 신기하더라.”
이 말에 남망기가 움찔 동요하는 것이 역시 재미있었다.
“기억나?”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진정을 내동댕이치고 부적을 공중에 뿌리던 걸 생각하면 기억 못하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뭔가 아쉬웠다.
“남가 둘째 공자, 다정하기도 하지. 내 손을 이렇게 꼭 잡고...”
위무선이 그렇게 말하며 남망기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흘려넣었다.
“금단을 되돌려줄 테니 자기만 믿으라더라.”
‘요즘 남망기는 내가 손까지 잡아도 가만히 있네.’
위무선이 웃으면서 손을 떼려고 하는 순간, 남망기가 손가락을 오무리며 꽉 붙잡았다.
“위영.”
“...응?”
“금단을 살리고 싶어?”
위무선은 잠시 말이 없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문이었다.
위무선은 천하의 보물인 음호부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주술사로서 달인의 경지에 달해 수백 수천의 망령을 떡주무르듯 할 수 있었고, 또한 수백 수천의 산 사람을 손 끝으로 도륙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문 백가의 사람들이 위무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질투하지만, 그들에게 만약 그 엄청난 힘과 금단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
금단이 없으면 이미 수선인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위무선은 마음 속이 만신창이였다.
그 동안 가슴 상할 일을 수없이 겪었고, 사저마저 떠나보낸 참이었다.
예전엔 남망기도 그 가슴 상할 일 중 하나를 보태 줬었는데. 지금은 뜻밖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위무선에게는 아직 금단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는 강염리 때문에 연화오에 매여 있었더랬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만 지금은 혼자 남을 강징이 마음에 걸렸다. 항상 남을 밀쳐내는 소리만 하지만 외로움을 잘 타는 형제를 위무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 남자가 백골이 될 때까지 한 집에 싸우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강징 녀석도 시집이나 보내버려야지.”
위무선은 풀이 죽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남망기의 다리를 두들겼다.
“고마워.”
“뭐가?”
“내 곁에 있어 줘서.”
그렇게 말하는 위무선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진지했다.
“남잠, 혼례식이 끝나면 고소로 돌아갈 거지?”
“...응.”
“그래...”
연회 마지막 날,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금린대를 떠날 무렵 남망기가 위무선을 찾아왔다.
왠지 남망기와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냥 떠나려던 위무선은 정겨운 목소리가 부르자 하는 수 없이 돌아서서 웃었다.
“이제 돌아가?”
“위영.”
“응?”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연화오에 있어.”
“어디 갈 생각도 없지만... 왜?”
문득 위무선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또 놀러올 거야, 너?”
“아무데도 가면 안 돼.”
위무선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게 심각하게 할 얘기도 아니건만, 남망기도 참. 하긴 그래, 원체 심각한 성격이니까.
어쩌면 그만큼 저에게 놀러오고 싶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가시는 것 같았다.
“알았어. 너도 꼭 와야 돼.”
“...꼭 갈게.”
남망기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마침내 남희신과 함께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무선은 괜시리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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