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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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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심부지처에서 금광요가 무료해 하듯, 연화오에서는 위무선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시내에 나가 술잔만 기울이면서 소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못마땅해 하는 강징과 툭닥거리고, 강염리가 중재하는 일상이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사저와 함께 할 수 있는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는 것이었다.
  위무선은 짧은 시간동안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다 앞으로는 사저마저 마음대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쓸쓸해지고, 금자헌이 더욱 미웠다.
  오늘도 그는 강징에게 걸리기 전에 일찌감치 나가 버리자고 대문을 나서는 참이었다. 일찌감치라 해봐야 주관적인 기준이라 이미 해는 중천에 걸렸지만.
  그런데 뜻밖에 하얀 그림자가 이 편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는 많은 빛깔의 옷이 있지만, 그토록 희디 흰 옷은 드물었다.
  “남잠?”
  하얀 옷만 보고 언뜻 그를 떠올렸는데, 자세히 보니 진짜로 남망기가 아닌가. 
  ‘이럴 수가?!’
  아침(점심)부터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가던 위무선은 대뜸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야아, 이거 남가 둘째 공자님이 아니신가! 나 보러 온 거야, 남잠?”
  남망기는 반색을 하며 달려드는 위무선의 코 앞에 애물단지를 불쑥 내밀었다.
  “선물.”
  “어...”
  하얀 호리병을 뒤집어보던 위무선은 그야말로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솔직히 위무선은 남망기가 저를 보려고 연화오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뭔가 일 문제로 온 것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건넨 것이 천자소이니, 어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남망기가 나를 만나려고 연화오에 왔어??
  그것도 천자소를 들고?!!
  위무선은 멍한 눈으로 술병 두 개와, 남망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암만 봐도 향기로운 천자소가 맞고, 반 마디 말도 아끼는 남망기가 맞았다. 
  “와... 너 못 본 사이에 사람이 다 됐구나. 남잠.”
  위무선은 어서 들어와, 어서, 하고 대문 안으로 넘어가며 남망기를 잡아끌었다. 
  “쓸모 있는 사내 같으니. 네 덕분에 오늘은 시장에 나갈 필요도 없겠다.”
  기분 좋게 떠들며 남망기를 끌고 가던 위무선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남망기가 제 손에 순순히 끌려오는 것도 참 이상했다. 
  위무선은 제가 심심한 나머지 무의식중에 망령이라도 불러낸 게 아닌가, 하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의심스럽게 물었다.
  “말해 봐, 남잠. 너 나를 보러 온 거야?”
  “응.”
  남망기는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위무선을 바라보는 눈길에 약간의 희색이 도는 듯도 했다. 
  “근처에 다른 볼 일은 전혀 없어? 그냥 나만 보러?”
  “그래.”
  의심스러워하던 위무선의 얼굴이 도로 환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너무 기뻐서, 이제까지 못마땅했던 감정들까지 눈녹듯 풀리는 것 같았다.
  “흐흠.”
  위무선은 웃더니 다시 남망기를 끌기 시작했다.
  “잘 왔어.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는데. 강징 잔소리도 지겹고 말이야. 쟤는 종주가 됐으면 얼른 장가라도 가버릴 일이지. 사저가 시집갈 때까지 속을 썩일 요량인가.”
  강염리가 애들 장난에 속 썩을 것 같지는 않고, 만약 썩인대도 대상은 강징이 아니라 위무선일 것 같지만. 위무선은 들뜬 채 마냥 지껄여대었다.
  위무선은 남망기를 데려다 강징과 강염리에게 떠들썩하게 인사를 시켰다.
  점심때가 가까워졌기에 강염리가 손수 식사를 준비하러 나가고 보니 세 사람이 남았는데, 위무선이 보기엔 영 궁합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강징이 연일 잔소리를 해대는데 거기에 남망기까지 숟가락을 얹는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위무선은 임시 방책으로 곁에 앉은 남망기에게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남잠, 요즘 강만음 심기가 아주 불편해. 그러니 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고. 응?”
  남망기는 수긍하는지 마는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대신 강징이 더럭 짜증을 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왜 소근거리는 거야?!”
  “저 봐, 내 말이 맞지?”
  “뭐가 맞는데?!”
  “강종주님, 손님이 오셨는데 체통 좀 지키시지. 함광군께서 귀한 술을 가져오셨으니까 함께 마시고 오늘은 사이좋게 지내 보자고.”
  “한낮부터 술은 무슨 술! 제발 정신 좀 차려!”
  강징은 위무선이 또 술을 마시려고 핑계를 대는 줄 알지, 정말로 남망기가 술을 가져온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정신이 없네. 너랑 그 아까운 술을 나눠 마시다니. 나중에 나 혼자 마셔야지.” 
  어느새 나타난 강염리가 강징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넓은 탁자 위에 수저와 음식을 늘어놓았다. 손님상이 아니라 가족상을 차리려는 듯했다. 강징은 못마땅한 속을 누르며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위무선이나 강징의 눈길이 이렇게 강염리를 따르면서 공기가 어색해졌다. 누구도 말은 안 하지만 그녀가 떠날 날을 사형집행일처럼 마음속으로 세고 있는 것이었다. 
  강염리는 아는지 모르는지 한결같은 태도였다. 상냥하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동생들에게 하듯 남망기의 시중까지 들었다.
  위무선도 손수 남망기에게 연근갈비탕을 떠 주면서 말했다.
  “많이 먹어, 남잠. 너한테 이걸 꼭 맛보여주고 싶었거든. 너 이제 이거 먹으면 남가의 탕약같은 국은 목구멍에 안 넘어 갈 걸?”
  강징이 기다렸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핀잔을 주었다.
  “누가 보면 네가 만든 건 줄 알겠다.”
  곧장 위무선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렇게 말하는 네가 만든 줄 알겠다.”
  강염리가 웃으면서 손을 내젓자 위무선이 남망기에게 말했다.
  “어때, 맛있어?”
  “응. ...맛있어.”
  남망기는 뒷말을 하며 잠시 강염리를 바라보았다. 예의를 표하는 듯한 시선이 위무선에게 돌아온 뒤에는 그가 끝없이 지껄이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강염리는 위무선이 들떠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이제껏 얼마나 적적해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실제로 위무선은 한껏 기분이 고양된 상태였다. 셋이서만 있으면 자꾸 분위기가 가라앉아서 안절부절 못했는데 말없는 남망기라도 와 주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더불어 강징과 강염리가 함께 있으니 제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도 ‘식사시 금언’하고 입을 틀어막지 못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식사 후 위무선은 남망기가 차를 마시는 것도 기다려 주지 않고 잡아당겼다.
  “남잠, 나가자. 내가 구경시켜 줄게.”



  위무선은 나루터에서 전병을 사서 남망기에게 쥐어 준 후 자신도 한 입 물어떼었다. 사실은 입맛이 없었지만 남망기에게 맛을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특정 지역에는 그 일대를 지배하는 선문의 가풍이 스며들게 마련이었다. 연화호의 나루터는 이따금씩 힘찬 고함소리가 튀어오르며 벅적거렸다. 큰 물과 맞닿은 토질이 좋은 풍요로운 지방다운 활기가 물씬 풍겨왔다.
  위무선은 호수를 따라 오래도록 걸었고, 활쏘기를 하는 절벽에도 데려가는 등 하루종일 남망기를 여기저기로 끌고 다녔다. 
  해질 무렵이 되자 위무선은 남망기더러 놀러오라고 했을 때 보여주려던 것들을 실컷 보여 주어 속이 후련해졌으나 한편으로는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남망기가 술을 들고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렇게 순순히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남잠, 너 혹시 죽을 병이라도 걸렸어?”
  “아니.”
  “무슨 바람이 분 거야?”
  “...”
  위무선은 저녁 나절의 바람을 맞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기분 좋다. 네가 나를 다 찾아오고.”
  이 말에 남망기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와서 기분이 좋아?”
  “그래. 그리고 잔소리도 안 하고.”
  그 말에 남망기가 위무선의 허리춤을 주시했다. 패검은 없고, 붉은 술이 달린 검은 피리만 꽂혀있는 것을 진작에 눈여겨 보았다.
  “검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겠지?”
  위무선이 한숨을 쉬었다.
  “남잠. 그런 얘긴 안 하면 안 될까?”
  평소의 습관대로 한 소리 더 얹으려던 남망기는 망설이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것은 위무선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배를 타고 노을을 보자.”
  위무선은 얼른 남망기를 붙들고 나루터로 내려갔다.
  저녁시간이 다가와서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도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고 주변의 소음이 퍽 가라앉았다.
  노를 잡은 위무선은 멀리 호수 한가운데까지 배를 몰아 갔다. 
  마침 해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름답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자, 남망기는 해가 아닌 위무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상했다.
  남망기더러 그렇게 오라고 했지만, 강징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코웃음 쳤지만. 자신은 오고 싶을 거라며 큰 소리를 쳤지만.
  정말로 남망기가 운몽에 와서 제가 노를 젓는 배 위에 앉아 있다니.
  문득 그 때, 남망기를 끌어다 배에 태우곤 연방을 훔치겠다는 소릴 한 게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남잠, 이거 봐.”
  위무선이 몸을 숙여 연줄기를 하나 붙잡았다.
  남망기가 말했다.
  “그거 주인 있는 거 아냐?”
  “그래. 엄청 무서운 할아버지가 있어.”
  “...”
  “여기서 이걸 하나 툭 꺾으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온다?” 
  “그만둬.”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걸 보고 위무선이 짓궂게 웃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걸 꺾으면, 남잠 너 어떻게 할래?”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남망기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역시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저렇게 줄창 쳐다보면 누구든 기분이 이상해지지 않겠는가.
  도대체 뭐야, 하고 뭔지모를 오기가 생긴 위무선도 지지 않고 남망기를 끈질기게 맞받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도 끝내 남망기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돌아갈까.”
  결국에는 위무선이 연줄기를 놓으며 시선을 돌렸다.
  

  위무선은 술안주를 잔뜩 사들이기 위해 상류로 돌아갔다. 시장에 가까워지자 해가 떠 있을 때와는 약간 다르게 기름 볶는 냄새도 어딘가 달콤한 향을 풍기는 것 같았다. 
  위무선이 어느 상인 앞에 멈춰서 주전부리를 주문할 때, 갑자기 벽 근처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위무선!”
  위무선은 초라하고 얇은 행색을 한 여자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온...!”
  머리회전이 빠른 그는 그녀의 이름을 외치려다 말고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위무선의 다리를 덮치듯이 엎어졌다.
  “위무선, 위무선! 위공자, 나 좀 도와줘! 아녕이 없어졌어! 아녕이...!”
  정신없이 외치며 매달리는 온정은 덤불에 빠졌다가 나온 듯 때가 묻고 지쳐 보였다. 위무선은 놀라는 것도 잠시, 우선 온정의 손을 가볍게 떼어놓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감싸주었다. 
  그가 온정을 골목길로 데려가려고 하자 정신이 나간 듯한 온정은 저를 도와주지 않으려는 줄 알고 버티며 울고불고 했다.
  남망기가 말없이 한 발 앞서더니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내어 손짓했다. 그 곳에서 온정은 자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새 온녕과 온 가족들이 어디론가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정신없이 털어놓았다.  
  “너도 알지, 아녕은 완전히 어린애야. 그애 곁에는 절대로 내가 없으면 안 돼. 그런데 난 그 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 제발 도와줘, 위공자! 내가 이렇게 빌게! 난, 우린 너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정말로 아무 방법이 없단 말이야!”
  “걱정 말아요. 내가 온녕을 꼭 찾아줄게요.”
  위무선이 온정이 내민 손을 잡으면서 굳게 다짐을 하는 순간까지도 남망기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남망기의 존재를 알아차린 위무선이 난감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잠. 온낭자와 온녕은 우리... 가문의 은인이야.”
  두 오누이가 강징의 목숨과 금단을 돌려주었고, 강숙부와 우부인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으니 위무선은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남망기는 짧게 대꾸하고, 잠시 후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금린대에 가서 온녕이 어디 있는지 족쳐 봐야지.”
  그렇게 말하는 위무선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것이 익숙하고 불길해서, 남망기의 이맛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남잠, 내가 난릉에 다녀올 동안 그녀를 좀 부탁해도 될까?”
  무리수를 두는 줄 알면서도 위무선은 내친 김에 말해 보았다. 온정을 맡겨도 남망기가 신의를 저버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순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답이 없길래 ‘역시 거기까진 안 되나’하고 체념하려던 찰나,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염방존께서 운심부지처에 와 계셔.”
  “뭐라고? 금광요가 왜?”
  “...형장께서 모시고 왔다.”
  위무선이 한숨을 쉬었다.
  “택무군의 손님인가. 그럼 그를 귀찮게 할 순 없지.”
  그가 온정을 부축해서 일으키고, 밖으로 나가려고 발걸음을 떼는데 갑자기 남망기가 팔을 잡았다.
  “내가 물어볼게.”
  “네가 뭘?”
  “내가 염방존께 물어볼게. 온녕이 어디 있는지.”
  “네가?”
  위무선이 놀라서 반문했다.
  “왜? ...어떻게?”
  “다녀올게.”
  남망기는 위무선의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피진을 꺼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황당해 하던 위무선이 뒤늦게 공중을 향해 외쳤다.
  “객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남잠! 빨리 와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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