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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3 22:43
(1)
기산 온씨가 갖은 패악을 부리다 망한 후.
운심부지처의 재건은 미진한 상태였다. 이제 막 장서각과 생활공간을 복구한 것이 전부였다.
금광요는 자신의 거처에서 고소 남씨와 같은 시간에 아침을 먹었다. 본래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묘시에 일어났고, 잠드는 건 심지어 이곳 사람들보다도 늦었다.
그는 책을 조금 읽다가 덮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백의의 소년들이 수련장을 향해 줄줄이 걸어가다가 금광요를 보고 인사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부정세를 방문하면 금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맺힌 과거가 있어 은근한 눈총을 받았다. 다른 어디를 가도 무언가 떨떠름한 느낌이 항상 따라왔다.
하지만 운심부지처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어린 자제 하나가 인사도 없이 금광요의 요란한 금성설랑포만 쳐다보다가 남망기에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남희신은 건물 공사나 문하생들의 교육 등 할 일이 많았지만 금광요가 그랬던 것처럼 틈날 때마다 찾아왔다. 그것조차 규칙적이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가 올 것이라고 예상도 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난리통에 무너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예의 남희신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금광요는 공손하게 맞이했다.
“한가롭게 있다 보니 게을러질까 염려스럽습니다.”
“바쁜 게 좋으냐?”
금린대에서 금광요는 언제나 바빠 보였다.
금광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
몇 마디가 오가고 나자 그만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전에는 이렇게 어색할 때가 없었는데. 피하는 화제가 있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속을 뻔히 알면서도 묵묵한 시간이 길어졌다.
금광요가 운심부지처에 온 지도 훌쩍 십여일이 흘러갔다. 그래도 남희신이 작정한 듯 입을 닫고 있으니, 금광요도 무언의 압력에 눌려 돌아가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금광요는 너무나도 초조해진 상태였다.
“형님, 저...”
겨우겨우 운은 떼었지만, 말하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이제 그만,”
눈을 살풋 내리깔며 조그맣게 덧붙이고는, 그까지가 한계였다. 그것만으로도 조마조마했다. 염라대왕과 같이 두 눈을 부라리는 섭명결의 앞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남희신이 무겁게 쐐기를 박았다.
“가지 마라.”
금광요는 가지 말라는 말보다도 그의 심란한 말투에 마음이 무거웠다. 언제부터 이 남자의 말이 이만한 무게를 지녔던가 싶었다.
이미 몇 번이나 저 좋을대로 이용한 적도 있는 상대인데도.
“형님...”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거 나도 안다. 그렇지만...”
남희신도 말하기가 쉽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무척 속이 상한 눈으로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금광요는 발길질을 해대는 금광선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뜯어말릴 수 있었지만, 어쩐지 남희신의 그런 시선은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그에게 실수한 일도 없는데 왜인지 몰랐다.
잠시 후, 남희신이 힘겹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묵묵한 공기가 흘렀다.
정말로 가고자 한다면 남희신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금광요도 알기는 했다.
속이 답답한 중에도 교활한 머리는 습관처럼 각본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지는 형님께서도 잘 아시지요. 부친께서 이미 많은 일을 맡겨 주셔서 열심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저 때가 이른 것 뿐이에요. 반드시 가문의 인정을 받겠습니다. 저를 아시잖아요, 형님. 그러니 믿고 돌아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남희신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단지 예의를 갖춰 조리 있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떠나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난릉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한데 이렇게 붙들려서 될 말이냐고, 금광요는 남희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그쳤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어쩌자는 거냐고.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한 사람은 남희신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남희신은 시간이 지나도 화를 풀기는 커녕, 아예 돌아가지도 말라고 그답지 않은 억지를 썼다.
“아요.”
남희신이 달래듯 부르자 금광요는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아서 귀를 막고 싶었다. 본디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남희신의 말투는 유독 별다르게 들렸다. 그런 식으로 불러대면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요, 너는 내 동생이다. 그러니 고소 남씨의 사람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명목뿐이라 해도 핏줄만 할까마는, 남희신은 어린애처럼 우겨대는 것이었다.
남몰래 한숨을 쉰 금광요는 아무래도 조금 더 머무르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버릴 건 버리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 다음 빠르게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의 강점 중의 하나였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마음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게 얼마인데 난릉 금씨가 저를 쉽게 내칠 수 있겠는가 하는 오기로 눌렀다.
마침내 갈등을 끝낸 금광요는 여느 때처럼 공손한 미소가 돌아왔다.
“형님, 그런데 제가 남씨 사람이라면 뭐라도 해야지요. 하지만 제 수준으로 누굴 가르칠 수도 없고, 천상 집 짓고 땅 파는 일이나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금광요는 농담을 던지며 슬쩍 남희신의 눈치를 살폈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 데에는 남희신이 더 이상 제 마음을 헤집는 말을 못하게 하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과연 남희신의 굳어졌던 얼굴이 풀어지며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다.”
“하지만 한식구라고 하셨잖습니까. 이대로는 그저 손님일 뿐인걸요.”
이 때 문득, 금광요의 머리에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은, 순간 금린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중대한 일마저 깡그리 잊혀지게 만들 정도로 번뜩거렸다.
“저는 정말 바보에요.”
“?”
“정말로, 제 주제에 가르칠 생각을 하다니요. 오히려 배움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교육 운운 하다 보니 불현듯 제대로 여물지 못한 자신의 금단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나 공교로우면서도 매혹적인 생각인지, 금광요는 마치 오랜만에 먹이를 발견한 맹수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즉시 눈꺼풀을 내려 날카롭게 기대하는 눈빛을 숨겼다. 순수한 이득을 위한 목적이 생겨나자 별안간 기운이 솟아나며 온통 주의력이 그 쪽으로 쏠렸다.
“형님, 저... 부끄럽지만 제 금단이... 뭐라 설명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큰형님 밑에서 일할 때 외에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거든요.” 남희신이 말했다.
“손을 좀 보자꾸나.”
남희신은 잠시 금광요의 손목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운기를 시키면서 몇 군데의 요혈을 탐색했다.
남희신이 손을 떼자 금광요는 자신이 없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영력이 결코 적지는 않다만, 제대로 통하지 못하고 있구나.”
사실 금광요의 영맥 흐름은 그런 단순한 말로 함축하기엔 턱도 없을 만큼 어지러운 상태였다. 환자도 아닌데 이토록 비틀리고 꼬인 영맥은 처음이었다. 남희신은 이런 금단을 갖고 공을 세운 금광요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 주마.”
그 말에 금광요는 얼른 일어나 남희신에게 절을 올리며 화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기습을 하기 위해 한생같은 괴이한 패검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남희신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금광요는 청하 섭씨를 떠난 후 기산 온씨에서도 검을 배웠다. 하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타고난 교활함으로 뭐든지 해결하는 그도 금단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금단의 연성은 특히 기초 부문에서 노련한 스승의 인도가 필요했으니, 혼자서는 백방으로 노력해 보아도 영혈을 제대로 뚫을 수 없었다. 미숙한 금단은 어떤 방면에서도 남보다 뛰어난 금광요의 유일한 약점이 되어버렸고, 본인도 그에 대해 포기한 지 오래였다.
가문이 어쩌고, 재력이 어쩌고 해도 수선계는 결국 무력이 존중받는 세계였다. 조상이 백정이었던 적봉존도 그토록 존경받게 되었지 않은가. 그런데 중요한 수련력이 부족하니, 금광요가 남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게 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지 몰랐다.
그럴 때 선문 백가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고소 남씨의 택무군이 스승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니, 금광요는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금광요와 이유는 달랐지만 남희신도 기뻐했다. 그를 붙들어 둘 방법이 없어 막막했는데 뜻밖에 문제가 해결된 셈이었다.
금단의 수련은 기초 중의 기초였지만 이 의제처럼 특수한 경우는 애를 먹을 것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미숙한 채로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끈질기게 이 방법 저 방법을 갖다 억지를 부렸기 때문에 영력이 불규칙하게 쌓인데다 끊긴 영맥도 많았다.
바로 그 날부터 두 사람은 수련을 시작했다.
껄끄러운 분위기는 잠시 덮어졌다. 남희신은 시간을 벌어서 안심했고, 금광요는 두 말 없이 새로운 목표에 빠져들었다.
그때까지도 금린대에서는 편지 한 장 날아오지 않고 있었다.
***
운심부지처에 오랜만에 많은 비가 내렸다.
한낮인데도 사방이 해지고 난 직후처럼 어둑어둑하고 산자락에는 평소보다 짙은 안개가 끼었다.
전날 하인에 문하생, 수사들까지 동원해서 나무를 옮긴데다 비가 내렸으므로 검술 수련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놀 수 있는 게 아니라 난실에 잡아 두고 책을 읽혔기 때문에 문하생들은 풀이 죽고 말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기가 쏙 빨린 듯 지친 모습의 아이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가 멀어서 우비를 쓰고 있어도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쉬웠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은 남희신이었고, 주변 사람들을 머뭇머뭇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드는 사람은 남망기가 분명했다.
금광요가 수련을 시작한 후 수십 일이 지난 뒤였다. 난릉으로부터는 씻은 듯이 소식이 없었으나, 그래도 금광요는 주기적으로 안부를 묻는 서신을 띄우는 걸 잊지 않았다.
난릉에 돌아가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요즘은 아이들이 와서 비벼대는 통에 근심도 옅어지는 것 같았다.
남가의 어린 자제들은 처음부터 금광요에게 관심이 많았다. 워낙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지라 다른 가문의 아이들에 비해 호기심이 월등했다. 금광요가 다름 아닌 남희신과 가깝다는 사실이 더욱 친근감을 주는 듯도 했다.
본디 사교성이 좋은 그가 오냐오냐 받아 주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달라붙어왔다.
이따금씩 아이들을 다루기 어려워지면 금광요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했다. 남계인이 들으면 벼락이 떨어질 법한 무시무시하거나 야릇한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어른들에게는 비밀이었다. 남희신이라면 가끔씩 야밤에 아이들이 몰래 오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지만, 남망기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가규를 어긴 걸 들키는 날에는 손윗사람인 금광요조차도 가만두지 않을지 몰랐다.
사람들이 전부 식당으로 들어가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금광요는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뭇가지가 무성해서 비를 많이 가려주었지만 오래 있다 보니 옷자락이 습기를 먹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요.”
저 편에서 남희신이 걸어왔다.
“식사는 했느냐?”
“아니오, 형님.”
“그럼 같이 들어가자.”
남희신은 금광요와 마주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흘긋 쳐다보았다. 화려한 금포가 이질적이었으나 식사를 하는 품은 칼같이 발라서 남계인도 입을 댈 데가 없을 것 같았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운심부지처로 온 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우선 그의 지력은 단순히 영리하다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금광요는 남희신의 가르침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이듯이 습득했다. 만약 서책을 외우거나, 활을 쏘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면 그도 얼마간 삼가하며 자신의 재주를 감추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금단에 대해서만은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에 남희신이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하며, 엄청난 진전에 그가 얼마나 놀라는지도 몰랐다.
또한 남희신은 금광요가 늘상 사람을 대하는 웃는 얼굴이 부자연스러운 방어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린대에서 그는 머리 위로 욕지거리가 쏟아져도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진짜 얼굴일 리가 없었다.
혹여 금광요가 자신에게도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금광요가 문득 고개를 들자 남희신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의아해하며 부르는 말을 듣고서도 남희신은 곧바로 굳은 얼굴을 풀어낼 수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내리깔며 표정을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다.”
식사 후 두 사람은 금광요의 거처로 이동했고, 남희신은 금광요가 옷 갈아입는 것을 기다렸다.
금광요는 간소하게 얇은 중의만 걸치고 양 소매를 걷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남희신과의 수련은 금단을 다스리는 것이 주된 일이었기에 연무장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남희신의 손은 금광요의 손목에서 시작하여 관자놀이까지 타고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목이나 명치, 단전을 비롯해 사지의 요혈을 꼼꼼하게 매만졌다. 그런 식으로 하루에도 수차례 살펴보며 아주 작은 변화까지 파악했다.
“오른팔의 영맥이 상당히 가늘어졌구나. 이 정도면 됐어.”
됐다고 하는 건 오른팔만의 이야기였다. 각지의 영력이 뒤죽박죽인 채로 자리를 잡아버려서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대로 맺기도 전에 기능을 잃은 금단을 다스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무리를 하다 막혀버린 영맥도 뚫어 줘야 했다. 금광요가 피나는 노력을 한 만큼 망가진 것이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남희신은 언제나 잘 되어간다고 격려하는 말만 했다.
한편, 금광요는 영력을 느끼고 조종하는 일에 꽤 흥미를 느꼈다. 수련의 특성상 영력을 감지하는 데에 예민하게 신경을 쏟다 보니 근래에는 남희신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댈 때 그의 영력까지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느낌이 묘하게 마음에 든 금광요는 내친 김에 타인의 영력을 읽는 방법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그것은 아무도 자청해서 배우려 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남희신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금광요가 일어나고 이번에는 남희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남희신은 소매를 걷고 손을 뒤집어서 내밀었다. 남자답게 크고 손가락이 길게 뻗은 손에, 파랗고 굵은 핏줄이 떠오른 피부가 맑았다. 금광요는 그 손목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넓게 감싸쥐고 눈을 감았다.
남희신의 맥과 자신의 맥을 비교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금단의 수련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무엇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급진전을 보기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숙련자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금광요는 고요하고 힘찬 박동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세세하게 감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느낌 자체를 탐미했다. 맥이 사람의 성격까지 대변하는지 모르겠지만, 금광요에게는 아련하게 느껴지는 힘의 근원에서 영력이 퍼지는 모양새가 강할 뿐 아니라 특별한 품위까지 지닌 듯 느껴졌다.
“마치 금이라도 뜯는 듯한 얼굴이구나.”
금광요는 움찔 눈을 뜨면서 남희신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즐거우냐?”
금광요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쩐지 헛점을 보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단중혈로 넘어가자.”
남희신이 자신의 옷깃을 헤치며 손짓하자, 일순 금광요는 겉으로 드러날 만큼 놀랄 뻔했으나 얼른 감정을 감추며 옷자락을 조금 벌렸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양 손바닥으로 두 사람의 단중혈을 동시에 짚게 하고 그 차이를 주지시킨 다음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자신의 손이 남희신의 가슴에 닿은 순간부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를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그의 옷 속에 자신의 손이 들어가 맨살을 누르고 있는 감촉이 심히 거북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느라 온 힘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간신히 그로부터 벗어났을 때, 금광요는 남몰래 한숨을 쉬며 등짝이 서늘했다.
남희신은 의복을 단정하게 여미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오른편은 얼추 정리가 되었으니. 한 줄기라도 똑바로 잡히면, 금단은 모든 영력이 통과하는 창고와 같으니 말이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지나치게 영리하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졌기에 ‘알겠느냐’ 같은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단 한 마디도 귀담아 듣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왜일까.
남희신이 돌아가려고 일어났을 때 금광요는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형님, 내일 금린대로 떠날까 합니다.”
이제껏 기색도 비치지 않다가 기습하듯 말을 하니 놀란 남희신이 돌아보았다. 금광요는 머뭇거리며 눈에 띄게 안면이 굳은 채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잠시만 들렀다가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금광요는 이미 남희신의 억지에 끌려 두 달이나 운심부지처에 머물렀다. 남희신은 여전히 무언으로 고집을 부렸지만 아무래도 본가와 인연을 끊게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다시 오겠다고 하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그에게 금광요가 조심하는 척 핵심을 찔렀다.
“가족과 연을 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남희신이 가장 피하려고 애쓰던 부분을 공격한 셈이었다. 이제까지는 남희신의 기분을 살피느라 조용히 지냈는데 갑자기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남희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금린대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떠올리면 치가 떨렸다. 하지만 금광요를 끌고 온 것은 분명 자신의 독단이었다.
이내 그가 길다란 한숨을 쉬며 금광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금광요는 이렇듯 의기소침해지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덜컥했다.
당황해서 미처 인사도 하지 못하는 새 남희신은 나가 버리고 말았다.
***
난릉 금씨로 들어온 후 금광요는 금린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도맡아 하던 일들을 다 팽개치고 떠났었기 때문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화를 낼 것을 각오했다. 심지어 잠시 들른 거라고 말하면 더 욕을 먹을 터였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남희신이 실망스러워하던 모습만 떠올랐다.
‘그도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렇게 생각해도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금린대에 들어서자 하필 금자훈과 제일 먼저 맞닥뜨렸다. 그는 역시 금광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평을 터뜨렸고, 금광요는 입가에 깎은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던 것만큼 화를 내지는 않았다. 왠지 못마땅한 듯 삐죽거리기만 하던 금자훈이 가버리고, 그러려니 했더니 이후로 스쳐가는 사람마다 태도가 미묘했다.
은근하게 냉담한 태도를 취하던 아랫것들도 마치 처음 보는 손님처럼 금광요를 곁눈질하고 몸을 사리며 수상하게 굴었다.
곧장 금광선을 만나러 갔더니 그마저도 이상하게 변한 것이었다.
지금껏 금광요를 곁눈질로도 보지 않던 사람이 똑바로 눈길을 주며 만면에 웃음까지 띠었다.
금자헌에게 하는 것과 같은 친근한 맛은 없고 마치 사업상의 벽을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하인에게 하듯 함부로 지껄이던 행태는 간 곳이 없었다.
여우 뒤의 호랑이를 보는 것 같은 태도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금광요는 영문을 알았다.
‘형님이로군.’
별안간 남희신이 저를 데려가더니 작당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 추측이 과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금광선은 본디 금광요가 너무 싫어 꼬투리만 잡으면 쫓아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광요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결같이 공손하여 그럴만한 빌미를 손톱만큼도 주지 않았다.
남희신이 금광요를 데려갈 때만 해도, 여자와 놀아날 때마다 눈엣가시같은 녀석이 귀신같이 찾아오는 꼴을 보지 않아서 시원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 보니 상황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남희신이 그답지 않게 남의 가족 싸움에 끼어들었고, 금광요를 감싸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런 다음에는 직접 자신을 찾아와 금광요를 데려가버렸다. 그리고는 하루, 이틀, 한 달에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요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금광요 본인의 의지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희신이 보내 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사일지정 후 섭가, 남가, 금가의 사람들이 의형제를 맺을 때 금광선은 자헌이 아니라 금광요가 선택된 것이 무척 입맛이 썼다. 그도 친자이긴 한지라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성을 내는 금부인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금광선은 금광요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의 장점을 무시했으며, 그가 싫었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택무군 남희신이 금광요에게 그토록 깊은 우의를 보였다고 하니.
금광선에게는 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존경을 받는 고소 남씨가 항상 눈엣가시였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들 가문의 기준에 어긋난다 하면 회유도 협박도 먹혀들지 않았다. 갑자기 눈이 돌아가버린 청형군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혼사도 여간해서 받아들이지 않아 인맥으로 비벼볼 방법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가주인 남희신이 금광요를 각별히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하니, 대수롭게 넘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금광요는 무시못할 뒷배를 가진 존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서신 한 장 보내오지 않았던 건 단순한 금광선의 태만한 습관일 뿐이었다.
금광선은 은근한 말투로 뭘 하다 왔는지를 물으며 속을 떠 보려 했다. 금광요는 그간 미진했던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다고 에둘러 대답한 뒤, 돌아가도 좋으냐는 허락을 받고 싶어하는 의향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본래 선문가에는 운심부지처에 자제들을 보내 수학을 시키는 관습이 있다. 금광요의 경우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으나 고소 남씨의 학문 수준이 높으니 과히 억지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금광요는 주저주저하며 전보다 더욱 눈치를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만족스러워진 금광선은 그가 다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네가 없으니 집안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의뭉스런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어지간한 금광요도 자칫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씻은 듯이 태도를 바꾸는 능력만은 이 남자에게서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금부인은 여전히 쌀쌀맞았지만 다소 말조심을 하는 것 같았다. 금자헌은 강염리에게 푹 빠진 후에는 사람이 달라진 듯 어른스러워졌다.
장시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잘못된 일은 없었는지 둘러보고,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금광요는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그토록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단 한 번 남희신이 분노한 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스스로 해내려 했다면 과연 언제쯤 가서 이만한 대접을 받게 되었을지 모르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목적이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광선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괴상한 인정을 받게 됐으니. 전혀 기쁘지 않고 심지어 한심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날 밤 진짜 자신의 방, 자신의 자리에 누운 뒤에도 금광요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뚜렷한 외길을 달려오던 인생길이 희미해지며 그만 길을 잃고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불안보다도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금광요는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 앉아서 조용히 운기조식을 했다. 차분하게 금단을 운용시키자 오른손까지는 영력이 순조롭게 통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마 새롭게 얻은 것이 있다는 생각에 위로가 되는 것도 잠시, 다음 순간 영력이 가슴으로 모여들자 그만 자세가 틀어지고 말았다.
남희신의 심장 소리, 굵고 진중한 영력의 흐름, 그의 가슴에 손이 닿았던 순간이 떠오르며 금광요는 당시와 똑같이 당혹했다.
저도 모르게 왼쪽 어깨로 손이 가며 만지작거렸다. 떠나기 직전 남희신이 손을 얹었던 사소한 일까지도 별다르게 느껴지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두루뭉술한 기분으로 자리에 눕자, 금방 눈이 갔던 화려한 금박 문양이 눈을 감아도 그대로 떠올랐다.
이 부유하고 세도가 당당한 가문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모르건만,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바로 이 곳에 누워 있는 자신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운심부지처가 편안하다는 것도 아니다.
섭가에 있을 때도, 온가에 있을 때도, 심지어 나고 자란 기루에 있을 때에도. 자신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다음 날 떠나기 직전에 하인이 고운 상자를 가져왔다.
“운심부지처에 가져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상자 안에는 수수하진 않아도 제법 정취가 있어 보이는 다기가 얹혀 있었다.
금광요는 운심부지처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가 장포부터 벗었다. 금성설랑포를 벗고 고소 남씨의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그는 남희신의 풀죽은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진득이 눌러앉을 셈이었다.
기한은 자신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로. 어차피 금단 수련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고, 이제는 서둘러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여유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남희신은 수업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그 동안 늦어진 점심식사를 했다.
한동안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며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하룻밤 금린대의 기름진 밥을 먹은 것으로 유난히 쓴맛이 느껴졌다.
식후에 하릴없이 거닐고 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린 문하생들은 허물없이 금광요를 반기며 그가 옷을 바꿔 입은 것을 신기해했다.
그리고 남희신이 다가왔다.
“아요, 돌아왔구나.”
금광요는 침착하게 행동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멋대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네, 형님.”
남희신의 반가워하는 얼굴에, 금광요가 걱정했던 소침한 기색은 없었다. 마음이 놓였다.
“어째서 옷을 갈아 입었느냐?”
남희신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묵직한 느낌을 주는 오사모도 벗어버리고, 말액은 없지만 대신 붉은 단사가 남아 있고 반짝이는 은으로 된 관을 꽂았다. 금광요의 갸름한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장한 편에 가까웠지만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로 인해 묘한 위엄이 서려 있어 백의도 잘 어울려 보였다.
금광요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미루고 도로 거처로 돌아가, 금광선이 준 선물을 공손하게 바쳤다.
“이게 무엇이냐?”
“늦었지만 수학을 청하는 예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구나... 수학이라.”
금광요는 남희신이 또 씁쓸한 생각을 할새라 급하게 덧붙였다.
“배울 것이 많을 테니 천천히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금광요는 세심하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의 얼굴에 낀 근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더 오래 머물 거라는 말이 기뻤는지 미소를 지으며 금광요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손으로 감싸안듯 가볍게 흔들었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가까이 서서 쓰다듬어 주며 상냥하게 들여다보자 이상하게 속이 근질거렸다. 지금까지도 그가 마음을 써 준 적은 많았지만, 금광요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부드러운 그의 심성이 여과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남희신이 화가 났던 건 금가 사람들이 금광요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랬던 게,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도 그의 덕분으로 험한 대접은 받지 않도록 변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그 사실을 남희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영력을 느끼는 것이 기분 좋아서 배웠던 것처럼, 이번에는 남희신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 좋아서 조금 더 그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수학이라는 명목이 붙어도 금광요는 변함없이 금단의 수련만 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기산 온씨가 갖은 패악을 부리다 망한 후.
운심부지처의 재건은 미진한 상태였다. 이제 막 장서각과 생활공간을 복구한 것이 전부였다.
금광요는 자신의 거처에서 고소 남씨와 같은 시간에 아침을 먹었다. 본래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묘시에 일어났고, 잠드는 건 심지어 이곳 사람들보다도 늦었다.
그는 책을 조금 읽다가 덮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백의의 소년들이 수련장을 향해 줄줄이 걸어가다가 금광요를 보고 인사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부정세를 방문하면 금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맺힌 과거가 있어 은근한 눈총을 받았다. 다른 어디를 가도 무언가 떨떠름한 느낌이 항상 따라왔다.
하지만 운심부지처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어린 자제 하나가 인사도 없이 금광요의 요란한 금성설랑포만 쳐다보다가 남망기에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남희신은 건물 공사나 문하생들의 교육 등 할 일이 많았지만 금광요가 그랬던 것처럼 틈날 때마다 찾아왔다. 그것조차 규칙적이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가 올 것이라고 예상도 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난리통에 무너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예의 남희신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금광요는 공손하게 맞이했다.
“한가롭게 있다 보니 게을러질까 염려스럽습니다.”
“바쁜 게 좋으냐?”
금린대에서 금광요는 언제나 바빠 보였다.
금광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
몇 마디가 오가고 나자 그만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전에는 이렇게 어색할 때가 없었는데. 피하는 화제가 있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속을 뻔히 알면서도 묵묵한 시간이 길어졌다.
금광요가 운심부지처에 온 지도 훌쩍 십여일이 흘러갔다. 그래도 남희신이 작정한 듯 입을 닫고 있으니, 금광요도 무언의 압력에 눌려 돌아가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금광요는 너무나도 초조해진 상태였다.
“형님, 저...”
겨우겨우 운은 떼었지만, 말하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이제 그만,”
눈을 살풋 내리깔며 조그맣게 덧붙이고는, 그까지가 한계였다. 그것만으로도 조마조마했다. 염라대왕과 같이 두 눈을 부라리는 섭명결의 앞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남희신이 무겁게 쐐기를 박았다.
“가지 마라.”
금광요는 가지 말라는 말보다도 그의 심란한 말투에 마음이 무거웠다. 언제부터 이 남자의 말이 이만한 무게를 지녔던가 싶었다.
이미 몇 번이나 저 좋을대로 이용한 적도 있는 상대인데도.
“형님...”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거 나도 안다. 그렇지만...”
남희신도 말하기가 쉽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무척 속이 상한 눈으로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금광요는 발길질을 해대는 금광선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뜯어말릴 수 있었지만, 어쩐지 남희신의 그런 시선은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그에게 실수한 일도 없는데 왜인지 몰랐다.
잠시 후, 남희신이 힘겹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묵묵한 공기가 흘렀다.
정말로 가고자 한다면 남희신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금광요도 알기는 했다.
속이 답답한 중에도 교활한 머리는 습관처럼 각본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지는 형님께서도 잘 아시지요. 부친께서 이미 많은 일을 맡겨 주셔서 열심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저 때가 이른 것 뿐이에요. 반드시 가문의 인정을 받겠습니다. 저를 아시잖아요, 형님. 그러니 믿고 돌아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남희신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단지 예의를 갖춰 조리 있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떠나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난릉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한데 이렇게 붙들려서 될 말이냐고, 금광요는 남희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그쳤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어쩌자는 거냐고.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한 사람은 남희신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남희신은 시간이 지나도 화를 풀기는 커녕, 아예 돌아가지도 말라고 그답지 않은 억지를 썼다.
“아요.”
남희신이 달래듯 부르자 금광요는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아서 귀를 막고 싶었다. 본디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남희신의 말투는 유독 별다르게 들렸다. 그런 식으로 불러대면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요, 너는 내 동생이다. 그러니 고소 남씨의 사람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명목뿐이라 해도 핏줄만 할까마는, 남희신은 어린애처럼 우겨대는 것이었다.
남몰래 한숨을 쉰 금광요는 아무래도 조금 더 머무르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버릴 건 버리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 다음 빠르게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의 강점 중의 하나였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마음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게 얼마인데 난릉 금씨가 저를 쉽게 내칠 수 있겠는가 하는 오기로 눌렀다.
마침내 갈등을 끝낸 금광요는 여느 때처럼 공손한 미소가 돌아왔다.
“형님, 그런데 제가 남씨 사람이라면 뭐라도 해야지요. 하지만 제 수준으로 누굴 가르칠 수도 없고, 천상 집 짓고 땅 파는 일이나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금광요는 농담을 던지며 슬쩍 남희신의 눈치를 살폈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 데에는 남희신이 더 이상 제 마음을 헤집는 말을 못하게 하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과연 남희신의 굳어졌던 얼굴이 풀어지며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다.”
“하지만 한식구라고 하셨잖습니까. 이대로는 그저 손님일 뿐인걸요.”
이 때 문득, 금광요의 머리에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은, 순간 금린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중대한 일마저 깡그리 잊혀지게 만들 정도로 번뜩거렸다.
“저는 정말 바보에요.”
“?”
“정말로, 제 주제에 가르칠 생각을 하다니요. 오히려 배움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교육 운운 하다 보니 불현듯 제대로 여물지 못한 자신의 금단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나 공교로우면서도 매혹적인 생각인지, 금광요는 마치 오랜만에 먹이를 발견한 맹수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즉시 눈꺼풀을 내려 날카롭게 기대하는 눈빛을 숨겼다. 순수한 이득을 위한 목적이 생겨나자 별안간 기운이 솟아나며 온통 주의력이 그 쪽으로 쏠렸다.
“형님, 저... 부끄럽지만 제 금단이... 뭐라 설명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큰형님 밑에서 일할 때 외에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거든요.” 남희신이 말했다.
“손을 좀 보자꾸나.”
남희신은 잠시 금광요의 손목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운기를 시키면서 몇 군데의 요혈을 탐색했다.
남희신이 손을 떼자 금광요는 자신이 없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영력이 결코 적지는 않다만, 제대로 통하지 못하고 있구나.”
사실 금광요의 영맥 흐름은 그런 단순한 말로 함축하기엔 턱도 없을 만큼 어지러운 상태였다. 환자도 아닌데 이토록 비틀리고 꼬인 영맥은 처음이었다. 남희신은 이런 금단을 갖고 공을 세운 금광요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 주마.”
그 말에 금광요는 얼른 일어나 남희신에게 절을 올리며 화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기습을 하기 위해 한생같은 괴이한 패검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남희신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금광요는 청하 섭씨를 떠난 후 기산 온씨에서도 검을 배웠다. 하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타고난 교활함으로 뭐든지 해결하는 그도 금단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금단의 연성은 특히 기초 부문에서 노련한 스승의 인도가 필요했으니, 혼자서는 백방으로 노력해 보아도 영혈을 제대로 뚫을 수 없었다. 미숙한 금단은 어떤 방면에서도 남보다 뛰어난 금광요의 유일한 약점이 되어버렸고, 본인도 그에 대해 포기한 지 오래였다.
가문이 어쩌고, 재력이 어쩌고 해도 수선계는 결국 무력이 존중받는 세계였다. 조상이 백정이었던 적봉존도 그토록 존경받게 되었지 않은가. 그런데 중요한 수련력이 부족하니, 금광요가 남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게 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지 몰랐다.
그럴 때 선문 백가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고소 남씨의 택무군이 스승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니, 금광요는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금광요와 이유는 달랐지만 남희신도 기뻐했다. 그를 붙들어 둘 방법이 없어 막막했는데 뜻밖에 문제가 해결된 셈이었다.
금단의 수련은 기초 중의 기초였지만 이 의제처럼 특수한 경우는 애를 먹을 것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미숙한 채로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끈질기게 이 방법 저 방법을 갖다 억지를 부렸기 때문에 영력이 불규칙하게 쌓인데다 끊긴 영맥도 많았다.
바로 그 날부터 두 사람은 수련을 시작했다.
껄끄러운 분위기는 잠시 덮어졌다. 남희신은 시간을 벌어서 안심했고, 금광요는 두 말 없이 새로운 목표에 빠져들었다.
그때까지도 금린대에서는 편지 한 장 날아오지 않고 있었다.
***
운심부지처에 오랜만에 많은 비가 내렸다.
한낮인데도 사방이 해지고 난 직후처럼 어둑어둑하고 산자락에는 평소보다 짙은 안개가 끼었다.
전날 하인에 문하생, 수사들까지 동원해서 나무를 옮긴데다 비가 내렸으므로 검술 수련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놀 수 있는 게 아니라 난실에 잡아 두고 책을 읽혔기 때문에 문하생들은 풀이 죽고 말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기가 쏙 빨린 듯 지친 모습의 아이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가 멀어서 우비를 쓰고 있어도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쉬웠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은 남희신이었고, 주변 사람들을 머뭇머뭇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드는 사람은 남망기가 분명했다.
금광요가 수련을 시작한 후 수십 일이 지난 뒤였다. 난릉으로부터는 씻은 듯이 소식이 없었으나, 그래도 금광요는 주기적으로 안부를 묻는 서신을 띄우는 걸 잊지 않았다.
난릉에 돌아가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요즘은 아이들이 와서 비벼대는 통에 근심도 옅어지는 것 같았다.
남가의 어린 자제들은 처음부터 금광요에게 관심이 많았다. 워낙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지라 다른 가문의 아이들에 비해 호기심이 월등했다. 금광요가 다름 아닌 남희신과 가깝다는 사실이 더욱 친근감을 주는 듯도 했다.
본디 사교성이 좋은 그가 오냐오냐 받아 주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달라붙어왔다.
이따금씩 아이들을 다루기 어려워지면 금광요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했다. 남계인이 들으면 벼락이 떨어질 법한 무시무시하거나 야릇한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어른들에게는 비밀이었다. 남희신이라면 가끔씩 야밤에 아이들이 몰래 오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지만, 남망기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가규를 어긴 걸 들키는 날에는 손윗사람인 금광요조차도 가만두지 않을지 몰랐다.
사람들이 전부 식당으로 들어가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금광요는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뭇가지가 무성해서 비를 많이 가려주었지만 오래 있다 보니 옷자락이 습기를 먹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요.”
저 편에서 남희신이 걸어왔다.
“식사는 했느냐?”
“아니오, 형님.”
“그럼 같이 들어가자.”
남희신은 금광요와 마주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흘긋 쳐다보았다. 화려한 금포가 이질적이었으나 식사를 하는 품은 칼같이 발라서 남계인도 입을 댈 데가 없을 것 같았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운심부지처로 온 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우선 그의 지력은 단순히 영리하다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금광요는 남희신의 가르침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이듯이 습득했다. 만약 서책을 외우거나, 활을 쏘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면 그도 얼마간 삼가하며 자신의 재주를 감추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금단에 대해서만은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에 남희신이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하며, 엄청난 진전에 그가 얼마나 놀라는지도 몰랐다.
또한 남희신은 금광요가 늘상 사람을 대하는 웃는 얼굴이 부자연스러운 방어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린대에서 그는 머리 위로 욕지거리가 쏟아져도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진짜 얼굴일 리가 없었다.
혹여 금광요가 자신에게도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금광요가 문득 고개를 들자 남희신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의아해하며 부르는 말을 듣고서도 남희신은 곧바로 굳은 얼굴을 풀어낼 수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내리깔며 표정을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다.”
식사 후 두 사람은 금광요의 거처로 이동했고, 남희신은 금광요가 옷 갈아입는 것을 기다렸다.
금광요는 간소하게 얇은 중의만 걸치고 양 소매를 걷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남희신과의 수련은 금단을 다스리는 것이 주된 일이었기에 연무장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남희신의 손은 금광요의 손목에서 시작하여 관자놀이까지 타고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목이나 명치, 단전을 비롯해 사지의 요혈을 꼼꼼하게 매만졌다. 그런 식으로 하루에도 수차례 살펴보며 아주 작은 변화까지 파악했다.
“오른팔의 영맥이 상당히 가늘어졌구나. 이 정도면 됐어.”
됐다고 하는 건 오른팔만의 이야기였다. 각지의 영력이 뒤죽박죽인 채로 자리를 잡아버려서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대로 맺기도 전에 기능을 잃은 금단을 다스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무리를 하다 막혀버린 영맥도 뚫어 줘야 했다. 금광요가 피나는 노력을 한 만큼 망가진 것이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남희신은 언제나 잘 되어간다고 격려하는 말만 했다.
한편, 금광요는 영력을 느끼고 조종하는 일에 꽤 흥미를 느꼈다. 수련의 특성상 영력을 감지하는 데에 예민하게 신경을 쏟다 보니 근래에는 남희신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댈 때 그의 영력까지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느낌이 묘하게 마음에 든 금광요는 내친 김에 타인의 영력을 읽는 방법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그것은 아무도 자청해서 배우려 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남희신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금광요가 일어나고 이번에는 남희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남희신은 소매를 걷고 손을 뒤집어서 내밀었다. 남자답게 크고 손가락이 길게 뻗은 손에, 파랗고 굵은 핏줄이 떠오른 피부가 맑았다. 금광요는 그 손목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넓게 감싸쥐고 눈을 감았다.
남희신의 맥과 자신의 맥을 비교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금단의 수련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무엇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급진전을 보기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숙련자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금광요는 고요하고 힘찬 박동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세세하게 감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느낌 자체를 탐미했다. 맥이 사람의 성격까지 대변하는지 모르겠지만, 금광요에게는 아련하게 느껴지는 힘의 근원에서 영력이 퍼지는 모양새가 강할 뿐 아니라 특별한 품위까지 지닌 듯 느껴졌다.
“마치 금이라도 뜯는 듯한 얼굴이구나.”
금광요는 움찔 눈을 뜨면서 남희신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즐거우냐?”
금광요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쩐지 헛점을 보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단중혈로 넘어가자.”
남희신이 자신의 옷깃을 헤치며 손짓하자, 일순 금광요는 겉으로 드러날 만큼 놀랄 뻔했으나 얼른 감정을 감추며 옷자락을 조금 벌렸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양 손바닥으로 두 사람의 단중혈을 동시에 짚게 하고 그 차이를 주지시킨 다음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자신의 손이 남희신의 가슴에 닿은 순간부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를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그의 옷 속에 자신의 손이 들어가 맨살을 누르고 있는 감촉이 심히 거북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느라 온 힘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간신히 그로부터 벗어났을 때, 금광요는 남몰래 한숨을 쉬며 등짝이 서늘했다.
남희신은 의복을 단정하게 여미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오른편은 얼추 정리가 되었으니. 한 줄기라도 똑바로 잡히면, 금단은 모든 영력이 통과하는 창고와 같으니 말이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지나치게 영리하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졌기에 ‘알겠느냐’ 같은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단 한 마디도 귀담아 듣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왜일까.
남희신이 돌아가려고 일어났을 때 금광요는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형님, 내일 금린대로 떠날까 합니다.”
이제껏 기색도 비치지 않다가 기습하듯 말을 하니 놀란 남희신이 돌아보았다. 금광요는 머뭇거리며 눈에 띄게 안면이 굳은 채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잠시만 들렀다가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금광요는 이미 남희신의 억지에 끌려 두 달이나 운심부지처에 머물렀다. 남희신은 여전히 무언으로 고집을 부렸지만 아무래도 본가와 인연을 끊게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다시 오겠다고 하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그에게 금광요가 조심하는 척 핵심을 찔렀다.
“가족과 연을 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남희신이 가장 피하려고 애쓰던 부분을 공격한 셈이었다. 이제까지는 남희신의 기분을 살피느라 조용히 지냈는데 갑자기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남희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금린대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떠올리면 치가 떨렸다. 하지만 금광요를 끌고 온 것은 분명 자신의 독단이었다.
이내 그가 길다란 한숨을 쉬며 금광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금광요는 이렇듯 의기소침해지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덜컥했다.
당황해서 미처 인사도 하지 못하는 새 남희신은 나가 버리고 말았다.
***
난릉 금씨로 들어온 후 금광요는 금린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도맡아 하던 일들을 다 팽개치고 떠났었기 때문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화를 낼 것을 각오했다. 심지어 잠시 들른 거라고 말하면 더 욕을 먹을 터였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남희신이 실망스러워하던 모습만 떠올랐다.
‘그도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렇게 생각해도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금린대에 들어서자 하필 금자훈과 제일 먼저 맞닥뜨렸다. 그는 역시 금광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평을 터뜨렸고, 금광요는 입가에 깎은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던 것만큼 화를 내지는 않았다. 왠지 못마땅한 듯 삐죽거리기만 하던 금자훈이 가버리고, 그러려니 했더니 이후로 스쳐가는 사람마다 태도가 미묘했다.
은근하게 냉담한 태도를 취하던 아랫것들도 마치 처음 보는 손님처럼 금광요를 곁눈질하고 몸을 사리며 수상하게 굴었다.
곧장 금광선을 만나러 갔더니 그마저도 이상하게 변한 것이었다.
지금껏 금광요를 곁눈질로도 보지 않던 사람이 똑바로 눈길을 주며 만면에 웃음까지 띠었다.
금자헌에게 하는 것과 같은 친근한 맛은 없고 마치 사업상의 벽을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하인에게 하듯 함부로 지껄이던 행태는 간 곳이 없었다.
여우 뒤의 호랑이를 보는 것 같은 태도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금광요는 영문을 알았다.
‘형님이로군.’
별안간 남희신이 저를 데려가더니 작당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 추측이 과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금광선은 본디 금광요가 너무 싫어 꼬투리만 잡으면 쫓아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광요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결같이 공손하여 그럴만한 빌미를 손톱만큼도 주지 않았다.
남희신이 금광요를 데려갈 때만 해도, 여자와 놀아날 때마다 눈엣가시같은 녀석이 귀신같이 찾아오는 꼴을 보지 않아서 시원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 보니 상황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남희신이 그답지 않게 남의 가족 싸움에 끼어들었고, 금광요를 감싸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런 다음에는 직접 자신을 찾아와 금광요를 데려가버렸다. 그리고는 하루, 이틀, 한 달에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요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금광요 본인의 의지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희신이 보내 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사일지정 후 섭가, 남가, 금가의 사람들이 의형제를 맺을 때 금광선은 자헌이 아니라 금광요가 선택된 것이 무척 입맛이 썼다. 그도 친자이긴 한지라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성을 내는 금부인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금광선은 금광요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의 장점을 무시했으며, 그가 싫었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택무군 남희신이 금광요에게 그토록 깊은 우의를 보였다고 하니.
금광선에게는 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존경을 받는 고소 남씨가 항상 눈엣가시였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들 가문의 기준에 어긋난다 하면 회유도 협박도 먹혀들지 않았다. 갑자기 눈이 돌아가버린 청형군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혼사도 여간해서 받아들이지 않아 인맥으로 비벼볼 방법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가주인 남희신이 금광요를 각별히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하니, 대수롭게 넘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금광요는 무시못할 뒷배를 가진 존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서신 한 장 보내오지 않았던 건 단순한 금광선의 태만한 습관일 뿐이었다.
금광선은 은근한 말투로 뭘 하다 왔는지를 물으며 속을 떠 보려 했다. 금광요는 그간 미진했던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다고 에둘러 대답한 뒤, 돌아가도 좋으냐는 허락을 받고 싶어하는 의향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본래 선문가에는 운심부지처에 자제들을 보내 수학을 시키는 관습이 있다. 금광요의 경우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으나 고소 남씨의 학문 수준이 높으니 과히 억지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금광요는 주저주저하며 전보다 더욱 눈치를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만족스러워진 금광선은 그가 다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네가 없으니 집안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의뭉스런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어지간한 금광요도 자칫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씻은 듯이 태도를 바꾸는 능력만은 이 남자에게서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금부인은 여전히 쌀쌀맞았지만 다소 말조심을 하는 것 같았다. 금자헌은 강염리에게 푹 빠진 후에는 사람이 달라진 듯 어른스러워졌다.
장시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잘못된 일은 없었는지 둘러보고,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금광요는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그토록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단 한 번 남희신이 분노한 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스스로 해내려 했다면 과연 언제쯤 가서 이만한 대접을 받게 되었을지 모르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목적이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광선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괴상한 인정을 받게 됐으니. 전혀 기쁘지 않고 심지어 한심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날 밤 진짜 자신의 방, 자신의 자리에 누운 뒤에도 금광요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뚜렷한 외길을 달려오던 인생길이 희미해지며 그만 길을 잃고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불안보다도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금광요는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 앉아서 조용히 운기조식을 했다. 차분하게 금단을 운용시키자 오른손까지는 영력이 순조롭게 통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마 새롭게 얻은 것이 있다는 생각에 위로가 되는 것도 잠시, 다음 순간 영력이 가슴으로 모여들자 그만 자세가 틀어지고 말았다.
남희신의 심장 소리, 굵고 진중한 영력의 흐름, 그의 가슴에 손이 닿았던 순간이 떠오르며 금광요는 당시와 똑같이 당혹했다.
저도 모르게 왼쪽 어깨로 손이 가며 만지작거렸다. 떠나기 직전 남희신이 손을 얹었던 사소한 일까지도 별다르게 느껴지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두루뭉술한 기분으로 자리에 눕자, 금방 눈이 갔던 화려한 금박 문양이 눈을 감아도 그대로 떠올랐다.
이 부유하고 세도가 당당한 가문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모르건만,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바로 이 곳에 누워 있는 자신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운심부지처가 편안하다는 것도 아니다.
섭가에 있을 때도, 온가에 있을 때도, 심지어 나고 자란 기루에 있을 때에도. 자신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다음 날 떠나기 직전에 하인이 고운 상자를 가져왔다.
“운심부지처에 가져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상자 안에는 수수하진 않아도 제법 정취가 있어 보이는 다기가 얹혀 있었다.
금광요는 운심부지처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가 장포부터 벗었다. 금성설랑포를 벗고 고소 남씨의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그는 남희신의 풀죽은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진득이 눌러앉을 셈이었다.
기한은 자신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로. 어차피 금단 수련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고, 이제는 서둘러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여유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남희신은 수업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그 동안 늦어진 점심식사를 했다.
한동안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며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하룻밤 금린대의 기름진 밥을 먹은 것으로 유난히 쓴맛이 느껴졌다.
식후에 하릴없이 거닐고 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린 문하생들은 허물없이 금광요를 반기며 그가 옷을 바꿔 입은 것을 신기해했다.
그리고 남희신이 다가왔다.
“아요, 돌아왔구나.”
금광요는 침착하게 행동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멋대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네, 형님.”
남희신의 반가워하는 얼굴에, 금광요가 걱정했던 소침한 기색은 없었다. 마음이 놓였다.
“어째서 옷을 갈아 입었느냐?”
남희신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묵직한 느낌을 주는 오사모도 벗어버리고, 말액은 없지만 대신 붉은 단사가 남아 있고 반짝이는 은으로 된 관을 꽂았다. 금광요의 갸름한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장한 편에 가까웠지만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로 인해 묘한 위엄이 서려 있어 백의도 잘 어울려 보였다.
금광요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미루고 도로 거처로 돌아가, 금광선이 준 선물을 공손하게 바쳤다.
“이게 무엇이냐?”
“늦었지만 수학을 청하는 예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구나... 수학이라.”
금광요는 남희신이 또 씁쓸한 생각을 할새라 급하게 덧붙였다.
“배울 것이 많을 테니 천천히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금광요는 세심하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의 얼굴에 낀 근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더 오래 머물 거라는 말이 기뻤는지 미소를 지으며 금광요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손으로 감싸안듯 가볍게 흔들었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가까이 서서 쓰다듬어 주며 상냥하게 들여다보자 이상하게 속이 근질거렸다. 지금까지도 그가 마음을 써 준 적은 많았지만, 금광요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부드러운 그의 심성이 여과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남희신이 화가 났던 건 금가 사람들이 금광요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랬던 게,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도 그의 덕분으로 험한 대접은 받지 않도록 변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그 사실을 남희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영력을 느끼는 것이 기분 좋아서 배웠던 것처럼, 이번에는 남희신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 좋아서 조금 더 그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수학이라는 명목이 붙어도 금광요는 변함없이 금단의 수련만 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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