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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7 19:39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마지막 시험을 위해 모인 자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적비성은 줄곧 불편한 심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이유는 방다병 때문이었다. 아니, 이연화 때문인가?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원맹주는 늘 애매모호한 문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연화와 관련된 일들은 무엇 하나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없었다.
어젯밤 방다병을 몇 차례 집어던지고 짐짝처럼 짊어져 배달하면서, 적비성은 내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청년을 보면 이 꺼림칙한 기분이 나아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예상대로 부끄러움에 쪼그라든 방다병을 보면서도 마음이 썩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을 볼수록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짜증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어째서일까? 한참 어린 하룻강아지가 이연화에게 주제넘게 들러붙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이만큼 성날 일이던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이연화는 아마 방다병의 혈도를 짚거나 발길질을 해 그 상황에서 벗어났을 터였다.
그럼 내 기분은 왜 줄곧 이 따위지? 적비성은 종일 펴지 못했던 미간을 조금 더 구기면서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제 보았던 그림이, 그 적나라하게 섞인 체취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청년의 몸에 깔려, 이연화는 상대의 목을 금방 비틀지도 못한 채 난감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비록 희락기를 맞은 방다병만큼은 아니었으나, 이연화 역시 방다병에게 생리적으로 반응했다. 그 낯빛이나 온통 흐트러진 매무새, 숨결에 섞여 있던 연꽃 냄새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연화가 다른 양인에게 흔들렸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한 것인가? 내 호적수가 나보다 격 떨어지는 녀석에게 휘둘렸다는 사실이? 지금껏 이연화의 앞에 당당히 들이밀던 이유였으나, 적비성은 어쩐지 그 이외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한 위화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누군가가 이연화를 아래에 둔 모습을 보았다면 이토록 불쾌하지 않았을까?
잠깐 상상했다가, 적비성은 갑작스레 무언가를 공격하고픈 심정이 되었다. 조금 근질거리는 손을 꽉 주먹 쥐자, 근처에 있던 방다병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다른 이들이 많은데 왜 난데없이 성난 기색을 뿜어내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적비성은 눈에 잠깐 험한 빛을 머금었다가, 이내 내적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네가 방다병이 아니었다면, 내 손에 죽었을 거다."
오늘 아침, 적비성은 자신을 찾아와 우물우물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방다병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단순한 사실이었다. 만일 다른 후보들 중 하나가 이연화를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면, 적비성은 상대가 첩자든 아니든 그 자리에서 목을 꺾어버렸을 터였다. 방다병이 평소처럼 왁왁 떼를 쓰지 않았음에도, 적비성은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어찌 보면 방다병은 참 단순하면서도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아무리 자신을 거슬리게 하더라도, 청년은 적비성이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어제 이연화는 괜찮았어? 오늘 멀쩡해 보이기는 했는데...."
쭈뼛거리던 방다병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적비성이 못마땅한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물론 오래도록 난감하게 미간을 누르며 고민하던 이연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알려주고픈 마음도 들지 않아 침묵을 지키자, 방다병은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저번에 이연화를 건드릴 뻔한 널 짐승 보듯 했는데, 내가 같은 짓을 하다니...."
"그때 내가 건드린 건 귀 정도였다. 넌 그보단 훨씬 많은 곳을 만지고 있던데."
"악! 아악! 더 말하지 마!"
방다병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시뻘겋게 변한 청년은 곧 경공을 펼쳐 날아가 버렸다. 몸에 불이 붙은 닭 같은 모양새였다. 퍽 우스운 꼴이었지만, 적비성은 한쪽 입가를 잠깐 올려 냉소했을 뿐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어젯밤 자신이 이연화에게 건넸던 말은 진심이었다. 만일 이연화가 변변찮은 놈과 각인한다면-그리고 적비성의 눈에, 세상 양인의 9할 9푼 9리는 모두 변변찮은 놈이었다-적비성은 충분히 상대를 죽일 용의가 있었다. 금원맹주는 그 이유로 자신의 명예를 운운했으나, 적비성은 그것이 빙산의 일각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뺀 나머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적비성도 아직 명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싫었다. 이연화가 누군가와 각인하는 상황도, 이연화가 그 상대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처럼 바라보는 상황도 싫었다. 멍청하고 쓸모없을 것이 분명한 그 상대가, 이연화를 홀린 눈으로 바라보며 만지는 상황도 싫었다. 적비성은 순간적으로, 자신과 이연화가 하던 '실험'을 발견하고 무작정 싫다 소리쳤던 방다병을 떠올렸다.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그때의 꼬마도 이런 기분을 느끼고는 그대로 외쳤던 것일까? 알 길은 없었으나 어쩐지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다. 적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점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억하심정이 치밀었다.
문제의 중심에 선 사고문주는, 한 동굴의 아담한 입구를 등진 채 마지막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지막 문제는 천운에 맡겨보고자 합니다." 적비성이 내심 냉소했다. 말이 천운이지, 이것은 숨은 두더지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다. 이연화가 몸을 살짝 틀어 동굴을 가리켰다.
"백천원이 자리한 산의 중턱에는, 깊고 어지러운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이 동굴이지요. 그 내부의 길은 위험하지 않지만 아주 복잡하여,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분명 길을 잃게 됩니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지점에는 맑은 샘이 하나 있으며, 신비하게도 햇빛이 비치는 지점이 있어 흰 나무가 한 그루 자랍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 그곳에서 기다릴 테니, 반 시진 이후 각자 자신의 길을 택해 걸어보시지요. 가장 먼저 저와 마주치는 분을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라 여기고, 이 혼사의 대상으로 정하겠습니다."
후보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와 동굴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경설형이 조금 주저하는 투로 물었다.
"저 안에서 길을 잃게 되면 어찌됩니까?"
"염려하지 마시지요. 저와 백천원주들은 이 동굴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아는 터라, 어디에서 길을 잃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설령 길을 잃으셨다 해도 반드시 저나 백천원 사람들이 인도하러 갈 것입니다. 또한 동굴 중간중간에 작은 야명주들이 놓여 있으니, 위험한 지경은 되지 않을 겁니다."
이연화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경설형은 약간 무안해진 듯했으나,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연화는 앞마당을 산책하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굴 안을 향했다. 그 뒷모습이 동굴의 어둠 안으로 사라진 지 반 시진이 흘렀을 때, 후보들이 동시에 출발했다. 적비성은 서로를 견제하듯 힐끔거리는 이들을 비웃는 심정으로 지켜보며 발을 옮겼다.
동굴 안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높이는 충분했으나 그 폭은 그리 크지 않아, 한 번에 몇 사람이 우르르 이동하기는 어려웠다. 처음 들어갈 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후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둘 흩어져 다른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적비성은 개중 가장 먼저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터벅터벅 걷던 발이 곧 땅을 박찼고, 그 몸은 좁은 동굴을 누비는 화살처럼 정확한 방향을 향했다. 백천원주들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적비성은 동굴 심부까지 향하는 최단 경로를 알고 있었다. 경공을 펼치고서도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금원맹주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땅을 밀어내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이연화의 말대로, 동굴 가장 깊은 곳의 널찍한 공터에는 햇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작고 맑은 샘 옆으로, 외롭게 자란 한 그루 나무가 보였다. 아득히 높은 곳의 작은 구멍에서부터 비쳐 들어온 빛살은, 기이하게도 그 흰 나무와 샘을 정확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 안에 이연화가 서 있었다. 적비성은 동굴의 그늘에서 나가지 않은 채,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이연화의 손에 검은 없었다. 하지만 적비성은 그 손에 들린 검의 형태를 거의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연화는 가상의 소사검을 든 채 검법을 펼치던 참이었다. 적비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참으로 자유로우면서도 간결하고, 강력하지만 유연한 검법이었다. 방다병이 정말 빠른 속도로 고수에 가까워졌다 하나, 상이태검을 만들어낸 사람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연화는 몸을 숙이거나 젖히거나 휘돌면서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희뜩희뜩 넘나들었다. 마지막 절초와 함께 펄쩍 뛰어오른 몸이, 순식간에 흰 나무 꼭대기까지 다다라 가지 하나를 밟고 섰다.
고강한 내력이 섞인 움직임들은 아니었다. 이연화도 정신머리가 있다면 이 밀폐된 공간에서 연꽃 냄새를 뿜어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남자의 동작에는, 어쩐지 눈을 뗄 수 없게끔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적비성은 그 한 호흡, 한 호흡에 자신이라면 어떻게 맞섰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다가, 이연화가 나무 위로 올라섰을 즈음에는 상상을 멈추고 그저 감상하듯이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십 년 전의 이상이에 비해, 이연화는 한층 부드럽고 날카로워졌다. 흰 나무 위에 나뭇잎처럼 고요히 올라선 남자는, 하얀 옷과 분위기 때문인지 사람이 아닌 듯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동굴 밖에서 흘러온 햇빛을 받으며, 이연화는 한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술병을 기울였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적비성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눈썹을 들었다. 아름답다. 그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미추를 식별하는 눈 정도는 있었으나, 미라는 단어는 사실 이상의 힘을 가지고 적비성의 심금을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단어가 마치 마른 흙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자신의 심부를 적시고 있었다. 내가 십 년 전의 이상이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던가? 적비성이 미간을 좁혔다.
"아비. 왜 왔는데 기척을 안 해?"
술병 뚜껑을 닫으며, 이연화는 이편을 보지 않은 채 여상스레 건넸다. 잠시 멈추었던 숨을 한 차례 내쉰 적비성이 공터 안으로 발을 내디디자, 이연화가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구경할 땐 조용하네, 적 맹주."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건넸다. 펄럭이는 옷자락을 신경 쓰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 모습은, 호방한 동시에 단정해 보여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적비성의 눈가가 꿈틀했다. 심장박동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상대는 지금 냄새를 풍기고 있지 않음에도, 가까이 다가온 그 얼굴에 손을 올려보고 싶었다.
왜지? 적비성이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대체 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전,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래?"
"잘 모르겠는데."
"뭐?"
자기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을 중얼거리자, 이연화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이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럼 솔직히 말해, 계획을 수정해야 하니까." 미간을 찌푸린 이연화가 적비성의 이마에 슬쩍 손등을 댔다. 적비성은 잠깐 움찔하고는, 피부가 닿았던 곳에서부터 은은히 느껴지는 열기에 내심 당황했다. 평소 타인과의 친밀한 신체 접촉을 갈구하거나 즐기지 않았기에-적비성이 하는 친밀한 신체 접촉이라고 해봐야 보통 비무뿐이었다-자연스레 색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껏 겪어본 감각 중 가장 순수한 갈망에 가까웠다. 단순히 새롭고 이상한 체취에 끌리는 것이 아닌, 정말 눈앞의 상대를 향해 느끼는 욕구.
적비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무나도 낯선 느낌을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싶었으나, 사실 따지고 들면 거부에 별 의미는 없었다. 현실은 부정한다 하여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고, 적비성은 늘 스스로에게 솔직하며 충실한 편이었다. 하지만 심경이 복잡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적비성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훑어보았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서슴없이 친우, 적수, 대등한 사람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이미 너무도 중요했던 사람에게 새로운 꼬리표 하나가 더해지자, 뭐라 특정할 수 없는 기분이 당혹감과 뒤섞여 치밀었다. 적비성이 낮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때가 좋지 않군."
"뭐야, 불길하게. 이상하게 구는 건 방다병 하나로 족해. 왜 그러는데."
"여기 누가 제일 먼저 도착하리라 생각하나?"
대놓고 말을 돌리자, 이연화는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공터로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괜히 누굴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 셋 중 하나이길 바라야지. 그들이 널 보면 살의를 드러내거나, 뭔가 잔꾀를 부리려 들 확률이 높을 거야."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행동을 하든, 그들에게 살아남는다는 선택권은 없었다.
이연화의 마지막 계획은, 정체를 숨긴 적들이 불순한 행동을 하게끔 몰아가는 것이었다. 적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명문가의 자녀들을 죄인으로 지목하여 심문하거나 숙청할 방법은 없었다. 선제 공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여건-즉 성대경과 뱀, 여우 중 그 누구도 우승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나름대로 공을 들인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이 동굴 안에서든 밖에서든 어떤 움직임을 보일 터였다. 동굴 최심부에 가장 먼저 도착한 적비성은 그 여건을 만들어낼 수단이자, 적의 공격을 떨쳐낼 전력이었다.
팔짱을 낀 채 어두운 통로를 지켜보던 금원맹주는, 문득 떠오른 사실을 뻔뻔한 농처럼 건넸다.
"어찌됐든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 너와 혼인할 권리를 얻은 건가?"
"무슨. 엄밀히 말하면, 넌 편법을 썼으니까 논외지."
이연화가 어이없게 대꾸했다. 적비성이 피식 소리를 냈다. "날 업어 혼방에 데려간 적도 있으면서, 야박하게 말하는군." 그 말이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연화가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우리 혼방도 아니었잖아!" 웃음기가 잔뜩 묻은 눈으로, 그가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적 맹주. 그렇게 나한테 서방 소리를 듣고 싶어?"
그 소리보다는 나와 겨루겠다는 말을 더 듣고 싶다고 대꾸하려다, 적비성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서방 소리라. 이연화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오는 광경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소름이 돋지도 않았다. 적어도 각려초가 자신을 서방이라 부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적비성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연화는 눈을 깜박이며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오, 아비. 귀가 좋네. 누가 오고 있어."
적비성이 퍼뜩 이연화를 보았다. 그런가? 생각에 잠겼던 탓으로, 기감이 잠시 둔해져 있었다. 적비성은 얼른 공터 밖의 기척에 주의를 집중했다. 이연화의 말대로,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지던 참이었다. 두 쌍의 발소리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이 복잡한 동굴에서 거의 동시에 이동하고 있었다. 발소리만으로도 무공을 꽤 오래도록 수련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비성이 슬그머니 손으로 내력을 집중시켰다. 비록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으나, 적비성은 누군가를 제압하거나 죽이는 일에 굳이 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비. 상대가 누구고 어떻게 나오든 바로 죽이면 안 돼, 기억하지?"
"기억은 한다."
"기억만 하지 말고!"
이연화가 곁눈으로 적비성을 보며 힘주어 건넸다. 적비성이 태연한 얼굴로 동굴 입구를 응시했다.
나란히 선 두 남자의 앞에, 곧 가볍게 헐떡이는 두 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마지막 시험을 위해 모인 자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적비성은 줄곧 불편한 심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이유는 방다병 때문이었다. 아니, 이연화 때문인가?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원맹주는 늘 애매모호한 문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연화와 관련된 일들은 무엇 하나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없었다.
어젯밤 방다병을 몇 차례 집어던지고 짐짝처럼 짊어져 배달하면서, 적비성은 내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청년을 보면 이 꺼림칙한 기분이 나아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예상대로 부끄러움에 쪼그라든 방다병을 보면서도 마음이 썩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을 볼수록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짜증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어째서일까? 한참 어린 하룻강아지가 이연화에게 주제넘게 들러붙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이만큼 성날 일이던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이연화는 아마 방다병의 혈도를 짚거나 발길질을 해 그 상황에서 벗어났을 터였다.
그럼 내 기분은 왜 줄곧 이 따위지? 적비성은 종일 펴지 못했던 미간을 조금 더 구기면서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제 보았던 그림이, 그 적나라하게 섞인 체취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청년의 몸에 깔려, 이연화는 상대의 목을 금방 비틀지도 못한 채 난감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비록 희락기를 맞은 방다병만큼은 아니었으나, 이연화 역시 방다병에게 생리적으로 반응했다. 그 낯빛이나 온통 흐트러진 매무새, 숨결에 섞여 있던 연꽃 냄새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연화가 다른 양인에게 흔들렸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한 것인가? 내 호적수가 나보다 격 떨어지는 녀석에게 휘둘렸다는 사실이? 지금껏 이연화의 앞에 당당히 들이밀던 이유였으나, 적비성은 어쩐지 그 이외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한 위화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누군가가 이연화를 아래에 둔 모습을 보았다면 이토록 불쾌하지 않았을까?
잠깐 상상했다가, 적비성은 갑작스레 무언가를 공격하고픈 심정이 되었다. 조금 근질거리는 손을 꽉 주먹 쥐자, 근처에 있던 방다병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다른 이들이 많은데 왜 난데없이 성난 기색을 뿜어내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적비성은 눈에 잠깐 험한 빛을 머금었다가, 이내 내적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네가 방다병이 아니었다면, 내 손에 죽었을 거다."
오늘 아침, 적비성은 자신을 찾아와 우물우물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방다병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단순한 사실이었다. 만일 다른 후보들 중 하나가 이연화를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면, 적비성은 상대가 첩자든 아니든 그 자리에서 목을 꺾어버렸을 터였다. 방다병이 평소처럼 왁왁 떼를 쓰지 않았음에도, 적비성은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어찌 보면 방다병은 참 단순하면서도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아무리 자신을 거슬리게 하더라도, 청년은 적비성이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어제 이연화는 괜찮았어? 오늘 멀쩡해 보이기는 했는데...."
쭈뼛거리던 방다병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적비성이 못마땅한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물론 오래도록 난감하게 미간을 누르며 고민하던 이연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알려주고픈 마음도 들지 않아 침묵을 지키자, 방다병은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저번에 이연화를 건드릴 뻔한 널 짐승 보듯 했는데, 내가 같은 짓을 하다니...."
"그때 내가 건드린 건 귀 정도였다. 넌 그보단 훨씬 많은 곳을 만지고 있던데."
"악! 아악! 더 말하지 마!"
방다병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시뻘겋게 변한 청년은 곧 경공을 펼쳐 날아가 버렸다. 몸에 불이 붙은 닭 같은 모양새였다. 퍽 우스운 꼴이었지만, 적비성은 한쪽 입가를 잠깐 올려 냉소했을 뿐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어젯밤 자신이 이연화에게 건넸던 말은 진심이었다. 만일 이연화가 변변찮은 놈과 각인한다면-그리고 적비성의 눈에, 세상 양인의 9할 9푼 9리는 모두 변변찮은 놈이었다-적비성은 충분히 상대를 죽일 용의가 있었다. 금원맹주는 그 이유로 자신의 명예를 운운했으나, 적비성은 그것이 빙산의 일각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뺀 나머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적비성도 아직 명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싫었다. 이연화가 누군가와 각인하는 상황도, 이연화가 그 상대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처럼 바라보는 상황도 싫었다. 멍청하고 쓸모없을 것이 분명한 그 상대가, 이연화를 홀린 눈으로 바라보며 만지는 상황도 싫었다. 적비성은 순간적으로, 자신과 이연화가 하던 '실험'을 발견하고 무작정 싫다 소리쳤던 방다병을 떠올렸다.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그때의 꼬마도 이런 기분을 느끼고는 그대로 외쳤던 것일까? 알 길은 없었으나 어쩐지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다. 적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점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억하심정이 치밀었다.
문제의 중심에 선 사고문주는, 한 동굴의 아담한 입구를 등진 채 마지막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지막 문제는 천운에 맡겨보고자 합니다." 적비성이 내심 냉소했다. 말이 천운이지, 이것은 숨은 두더지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다. 이연화가 몸을 살짝 틀어 동굴을 가리켰다.
"백천원이 자리한 산의 중턱에는, 깊고 어지러운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이 동굴이지요. 그 내부의 길은 위험하지 않지만 아주 복잡하여,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분명 길을 잃게 됩니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지점에는 맑은 샘이 하나 있으며, 신비하게도 햇빛이 비치는 지점이 있어 흰 나무가 한 그루 자랍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 그곳에서 기다릴 테니, 반 시진 이후 각자 자신의 길을 택해 걸어보시지요. 가장 먼저 저와 마주치는 분을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라 여기고, 이 혼사의 대상으로 정하겠습니다."
후보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와 동굴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경설형이 조금 주저하는 투로 물었다.
"저 안에서 길을 잃게 되면 어찌됩니까?"
"염려하지 마시지요. 저와 백천원주들은 이 동굴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아는 터라, 어디에서 길을 잃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설령 길을 잃으셨다 해도 반드시 저나 백천원 사람들이 인도하러 갈 것입니다. 또한 동굴 중간중간에 작은 야명주들이 놓여 있으니, 위험한 지경은 되지 않을 겁니다."
이연화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경설형은 약간 무안해진 듯했으나,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연화는 앞마당을 산책하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굴 안을 향했다. 그 뒷모습이 동굴의 어둠 안으로 사라진 지 반 시진이 흘렀을 때, 후보들이 동시에 출발했다. 적비성은 서로를 견제하듯 힐끔거리는 이들을 비웃는 심정으로 지켜보며 발을 옮겼다.
동굴 안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높이는 충분했으나 그 폭은 그리 크지 않아, 한 번에 몇 사람이 우르르 이동하기는 어려웠다. 처음 들어갈 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후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둘 흩어져 다른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적비성은 개중 가장 먼저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터벅터벅 걷던 발이 곧 땅을 박찼고, 그 몸은 좁은 동굴을 누비는 화살처럼 정확한 방향을 향했다. 백천원주들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적비성은 동굴 심부까지 향하는 최단 경로를 알고 있었다. 경공을 펼치고서도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금원맹주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땅을 밀어내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이연화의 말대로, 동굴 가장 깊은 곳의 널찍한 공터에는 햇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작고 맑은 샘 옆으로, 외롭게 자란 한 그루 나무가 보였다. 아득히 높은 곳의 작은 구멍에서부터 비쳐 들어온 빛살은, 기이하게도 그 흰 나무와 샘을 정확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 안에 이연화가 서 있었다. 적비성은 동굴의 그늘에서 나가지 않은 채,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이연화의 손에 검은 없었다. 하지만 적비성은 그 손에 들린 검의 형태를 거의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연화는 가상의 소사검을 든 채 검법을 펼치던 참이었다. 적비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참으로 자유로우면서도 간결하고, 강력하지만 유연한 검법이었다. 방다병이 정말 빠른 속도로 고수에 가까워졌다 하나, 상이태검을 만들어낸 사람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연화는 몸을 숙이거나 젖히거나 휘돌면서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희뜩희뜩 넘나들었다. 마지막 절초와 함께 펄쩍 뛰어오른 몸이, 순식간에 흰 나무 꼭대기까지 다다라 가지 하나를 밟고 섰다.
고강한 내력이 섞인 움직임들은 아니었다. 이연화도 정신머리가 있다면 이 밀폐된 공간에서 연꽃 냄새를 뿜어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남자의 동작에는, 어쩐지 눈을 뗄 수 없게끔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적비성은 그 한 호흡, 한 호흡에 자신이라면 어떻게 맞섰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다가, 이연화가 나무 위로 올라섰을 즈음에는 상상을 멈추고 그저 감상하듯이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십 년 전의 이상이에 비해, 이연화는 한층 부드럽고 날카로워졌다. 흰 나무 위에 나뭇잎처럼 고요히 올라선 남자는, 하얀 옷과 분위기 때문인지 사람이 아닌 듯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동굴 밖에서 흘러온 햇빛을 받으며, 이연화는 한 손을 느슨히 뒷짐 진 채 술병을 기울였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적비성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눈썹을 들었다. 아름답다. 그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미추를 식별하는 눈 정도는 있었으나, 미라는 단어는 사실 이상의 힘을 가지고 적비성의 심금을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단어가 마치 마른 흙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자신의 심부를 적시고 있었다. 내가 십 년 전의 이상이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던가? 적비성이 미간을 좁혔다.
"아비. 왜 왔는데 기척을 안 해?"
술병 뚜껑을 닫으며, 이연화는 이편을 보지 않은 채 여상스레 건넸다. 잠시 멈추었던 숨을 한 차례 내쉰 적비성이 공터 안으로 발을 내디디자, 이연화가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구경할 땐 조용하네, 적 맹주."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건넸다. 펄럭이는 옷자락을 신경 쓰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 모습은, 호방한 동시에 단정해 보여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적비성의 눈가가 꿈틀했다. 심장박동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상대는 지금 냄새를 풍기고 있지 않음에도, 가까이 다가온 그 얼굴에 손을 올려보고 싶었다.
왜지? 적비성이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대체 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전,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래?"
"잘 모르겠는데."
"뭐?"
자기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을 중얼거리자, 이연화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이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럼 솔직히 말해, 계획을 수정해야 하니까." 미간을 찌푸린 이연화가 적비성의 이마에 슬쩍 손등을 댔다. 적비성은 잠깐 움찔하고는, 피부가 닿았던 곳에서부터 은은히 느껴지는 열기에 내심 당황했다. 평소 타인과의 친밀한 신체 접촉을 갈구하거나 즐기지 않았기에-적비성이 하는 친밀한 신체 접촉이라고 해봐야 보통 비무뿐이었다-자연스레 색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껏 겪어본 감각 중 가장 순수한 갈망에 가까웠다. 단순히 새롭고 이상한 체취에 끌리는 것이 아닌, 정말 눈앞의 상대를 향해 느끼는 욕구.
적비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무나도 낯선 느낌을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싶었으나, 사실 따지고 들면 거부에 별 의미는 없었다. 현실은 부정한다 하여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고, 적비성은 늘 스스로에게 솔직하며 충실한 편이었다. 하지만 심경이 복잡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적비성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훑어보았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서슴없이 친우, 적수, 대등한 사람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이미 너무도 중요했던 사람에게 새로운 꼬리표 하나가 더해지자, 뭐라 특정할 수 없는 기분이 당혹감과 뒤섞여 치밀었다. 적비성이 낮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때가 좋지 않군."
"뭐야, 불길하게. 이상하게 구는 건 방다병 하나로 족해. 왜 그러는데."
"여기 누가 제일 먼저 도착하리라 생각하나?"
대놓고 말을 돌리자, 이연화는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공터로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괜히 누굴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 셋 중 하나이길 바라야지. 그들이 널 보면 살의를 드러내거나, 뭔가 잔꾀를 부리려 들 확률이 높을 거야."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행동을 하든, 그들에게 살아남는다는 선택권은 없었다.
이연화의 마지막 계획은, 정체를 숨긴 적들이 불순한 행동을 하게끔 몰아가는 것이었다. 적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명문가의 자녀들을 죄인으로 지목하여 심문하거나 숙청할 방법은 없었다. 선제 공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여건-즉 성대경과 뱀, 여우 중 그 누구도 우승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나름대로 공을 들인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이 동굴 안에서든 밖에서든 어떤 움직임을 보일 터였다. 동굴 최심부에 가장 먼저 도착한 적비성은 그 여건을 만들어낼 수단이자, 적의 공격을 떨쳐낼 전력이었다.
팔짱을 낀 채 어두운 통로를 지켜보던 금원맹주는, 문득 떠오른 사실을 뻔뻔한 농처럼 건넸다.
"어찌됐든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 너와 혼인할 권리를 얻은 건가?"
"무슨. 엄밀히 말하면, 넌 편법을 썼으니까 논외지."
이연화가 어이없게 대꾸했다. 적비성이 피식 소리를 냈다. "날 업어 혼방에 데려간 적도 있으면서, 야박하게 말하는군." 그 말이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연화가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우리 혼방도 아니었잖아!" 웃음기가 잔뜩 묻은 눈으로, 그가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적 맹주. 그렇게 나한테 서방 소리를 듣고 싶어?"
그 소리보다는 나와 겨루겠다는 말을 더 듣고 싶다고 대꾸하려다, 적비성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서방 소리라. 이연화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오는 광경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소름이 돋지도 않았다. 적어도 각려초가 자신을 서방이라 부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적비성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연화는 눈을 깜박이며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오, 아비. 귀가 좋네. 누가 오고 있어."
적비성이 퍼뜩 이연화를 보았다. 그런가? 생각에 잠겼던 탓으로, 기감이 잠시 둔해져 있었다. 적비성은 얼른 공터 밖의 기척에 주의를 집중했다. 이연화의 말대로,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지던 참이었다. 두 쌍의 발소리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이 복잡한 동굴에서 거의 동시에 이동하고 있었다. 발소리만으로도 무공을 꽤 오래도록 수련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비성이 슬그머니 손으로 내력을 집중시켰다. 비록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으나, 적비성은 누군가를 제압하거나 죽이는 일에 굳이 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비. 상대가 누구고 어떻게 나오든 바로 죽이면 안 돼, 기억하지?"
"기억은 한다."
"기억만 하지 말고!"
이연화가 곁눈으로 적비성을 보며 힘주어 건넸다. 적비성이 태연한 얼굴로 동굴 입구를 응시했다.
나란히 선 두 남자의 앞에, 곧 가볍게 헐떡이는 두 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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