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hygall.com/593641872



혼돈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지.
아직 이 땅에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 세상은 괴들의 것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어.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들의 먹이였지. 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웠어. 물론, 인간도 예외는 아니었어.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괴들에게 잡아먹혔지. 그렇게 땅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괴들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지.


땅 위의 모든 것은 그들의 먹이.
그렇다면, 저 하늘은 어떨까?
신들이 흘리는 피에서는 어떤 맛이 나지?



괴들은 그렇게 하늘 위의 신들을 향해 그 탐욕을 뻗어내기 시작했어. 몇몇 약한 신들이 괴에게 끌려가 잡아먹혔고, 신을 잡아먹은 괴들은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어. 사태가 이리 번지자, 땅의 일이라며 괴들을 외면했던 신들도 마침내 관망을 거두게 되었지. 땅의 모든 것들과 하늘의 모든 것들은 합심하여 괴들과의 싸움에 뛰어 들었어. 그동안 괴들이 잡아먹었던 모든 것들이 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지.


수천 일에 걸쳐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땅이 뒤집히고 바다가 쏟아졌어. 하늘이 찢기어 날카로운 비명을 천둥과 함께 내려보냈지. 그렇게 세상 전부가 폐허가 되었을 때, 괴들과 신들은 협약을 맺었어. 괴들은 지하로, 신들은 하늘에서 서로의 영역을 접하지 않기로. 땅 위는 중립적인 세계로, 그 증인은 인간들이 되었지. 인간이 이 땅에 머무르는 한 괴들도 신들도 땅의 일에 간섭할 수 없었어. 


그렇게 세상에 평화가 도래했어.
속절없이 흐르는 아득한 세월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괴에 대해 잊어가기 시작했지. 괴는 이제 요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용도로 쓰이는 설화 속의 존재로 변모했지.


그 설화 속의 존재가 클라우스의 앞에 나타났어.


<오늘은 꼭 드시오.>



식사가 담긴 쟁반에 작은 쪽지를 남겨둔 채로 말야.




이곳이 죽은 자의 세계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고, 말도 안 되는 존재가 그를 살렸던 걸 알게 되었을 때, 클라우스의 눈빛은 희미하게 꺼졌어. 차라리 사후 세계라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는 희망이 오롯이 사라져버렸지. 그는 그 이후로 요괴의 도움도 모두 뿌리친 채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어. 의식을 차린 지 수 일 째, 먹을 것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어. 그저, 클라우스는 혼란과 우울 사이에서 깊게 침잠할 따름이었지.

죽어간 가족과 동료들을 떠올리며 끔찍한 슬픔으로 제 목을 조르고 싶다가, 황제와 그 일파를 떠올리며 타는 듯한 증오에 휩싸이기도 했어. 그러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 허망함을 느꼈고, 문득 요괴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의 도움을 받아 살아 숨쉬는 것에 조소했으며 주린 소리를 내는 배를 움켜쥐고 스스로 역함을 느껴 먹을 것을 거부했지. 당장 그 입에 음식을 억지로 밀어넣는다 한들, 클라우스는 모조리 토해낼테지. 


아득한 시간이 흘러, 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어. 비단 옷자락이 사르륵 스치는 소리가 났지. 들어온 이가 들고 온 쟁반을 내려두고 다 식어버린 쟁반에 손을 뻗을 때, 클라우스는 뺨이 패인 마른 얼굴로 말을 건넸지.


…그만 두시오. 
….
나는 죽을 것이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시오. 


음울한 표정 위에는 절망이 얼룩져 있었어. 그러나 요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 그는 쟁반을 정리하는 것을 멈추고, 클라우스의 손을 보았어. 오른 손은 잘리고 왼손은 손가락이 세 개만 남아 있었지. 고문을 당한 흔적이야. 상처가 터졌는지 피가 번졌지. 설화 속 그대로라면 당장에 클라우스를 갈기갈기 찢어 잡아먹어야 할 요괴는, 그 피냄새에 유혹을 느끼는 것조차 마비가 된 모양이야. 그는 담담하게 자개 서랍에서 붕대를 꺼냈어. 클라우스는 제 손에 감긴 붕대를 풀어내는 요괴를 말없이 바라보았어. 차라리 설화 속 괴물들처럼 이 다리를 뜯어내고 몸뚱이를 먹어치웠으면 기분이 나았을텐데. 불현듯 심사가 뒤틀린 클라우스가 입술을 짓이겼어.


왜 날 죽게 두질 않는 것이오.
….
그대의 호의는 감사하게 생각하나, 나는 그저 죽고 싶은 사람이오. 헌데!
책임이오. 
…뭐?


클라우스가 되물었어. 요괴는 담담하게 붕대를 갈며 말했지. 


내가 죽어가는 공을 데려온 책임.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오. 
그대의 책임은 이미 한 번 나를 살린 것으로 충분하오. 
나는 공을 살리지 못했소. 
그게 무슨 소리….
공의 육신은 살려냈어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살려내지 못했지. 


요괴가 이로 붕대를 끊어 묶었어. 그리고 벗겨낸 붕대를 차분하게 정리하여 쟁반 위에 함께 두었지. 요괴가 입을 열었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에게, 죽음은 하나의 방도일 수는 있소. 허나, 죽음에는 무게가 없지. 그저 허망할 뿐. 
…. 
내가 공을 살렸기에, 나의 선행을 증명하려 그대가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오. 그저, 공께서 허망함을 구원으로 삼지는 말았으면 하오.


그날 클라우스는 말없이 모로 누워 생각했어. 여전히 쟁반은 식어갔지. 그는 의식이 가물한 와중에도 그 요괴의 말을 곱씹었어. 그는 클라우스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지 못해. 그는 클라우스가 짊어진 죄책감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지. 그의 말에는 어떠한 가치도 없었어. 클라우스는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 그저 가족과 동료를 지키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보낸 대가를 제 몸으로 치러내고 싶었을 뿐이야. 단지 그 뿐일진대….


허망함. 

그 단어가 뭐라고 머릿속을 자꾸만 헤집는 건지.
클라우스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어. 



그렇게 까무룩 잠들었던 클라우스는 불현듯,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어.
어느새 해가 떴는지 창호문 너머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어. 먕, 먀앙…. 하는 가냘픈 울음 소리가 들렸지. 무겁기만 한 몸을 일으켜 창호문을 응시하는 작은 고양이의 그림자가 보였어. 클라우스가 몸을 끌어 창호문을 열자, 조그만 고양이가 그의 품에 뛰어 들었지. 첫날 보았던 그 요괴의 아이야.클라우스가 놀라 물었어.


네가 여기 어찌….
먀웅?
네 아비가 싫어하지 않더냐. 


어린 고양이는 답하지 않았어. 그 대신 클라우스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머리를 부볐어. 귀가 꾸깃하며 찌그러졌고, 골골 우는 소리가 났어. 결국 클라우스는 이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밀쳐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를 쓰다듬었어. 털이 부드러웠어. 다시 보니 윤기가 흘렀지. 어린 고양이는 아주 작고, 요괴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지. 그리고….


따뜻했어. 
오랜만에 인지해낸 감촉이었어. 문득 고양이갸 먀웅, 하고 울더니 총총 쟁반으로 다가갔어. 쟁반에는 손이 불편한 이도 혼자 마시기 좋도록 묽은 죽이 담겨 있었어. 고양이는 얼른 먹으라는 듯 먕먕, 재촉해댔지. 그리곤 조그만 것이 힘겹게 클라우스의 소매를 물어 당기는 것이 아니겠어. 결국, 클라우스는 조심스럽게 세 개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그릇을 들어올렸어. 그릇마저도 신묘한 것인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지. 클라우스는 입술을 가져다 대었어. 


담백한 풍미를 지닌 묽은 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어. 
오랜만에 들어오는 음식물에 버적버적 말랐던 속이 적셔지는 느낌이었지. 클라우스는 욱, 하고 짐시 헛구역질을 했어. 그러자 고양이가 먀웅, 하고 울었어. 우습게도 그 얼굴이 전전긍긍하는 것만 같았지. 클라우스는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내려둔 채, 고양이를 품에 안았어. 


걱정하지 말렴.
먕….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구나. 


오랜만에 음식을 맛본 배에서 커다랗게 주린 소리가 났어. 고양이가 놀라 펄쩍 뛰었고, 클라우스는 그 모양새에 가볍게 미소를 띠었어. 그러나 곧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졌지. 알아, 그는 이렇게 웃으면 안된다는 걸. 그의 뒤에 쌓인 무수한 죽음을 잊어선 안된다는 걸. 그럼에도… 오랜만에 배에서 주린 소리가 나는 것이 역겹지 않았어. 클라우스는 손 안에 감겨오는 고양이에게 문득 이렇게 물었지.


아가.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니?


갑자기 이 애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어.




#아이스매브 크오 시니어슈슈

 
2024.05.25 00: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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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먹으라고 하는데 당연히 밥 먹어야지ㅠㅠㅠㅠ 이름도 알고 이름 불러주면서 더 친해지고 그렇게 한가족이 되는 거다ㅠㅠㅠ
[Code: 9c03]
2024.05.25 01: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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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센세가 와주시다니ㅜㅜㅜㅜㅜㅜㅠㅠ 애기 고양이 쭈녀 ㄹㅇ 넘 ㄱㅇㅇ
[Code: daac]
2024.05.25 01: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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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센세ㅜㅜㅜㅜㅜㅜㅜㅜㅠ 내 센세가 오셨다ㅜㅜㅜㅜㅜㅜㅜㅠ
[Code: e0ad]
2024.05.25 05: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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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ㅠㅠㅠ 와줘서 고마워ㅠㅠ 사랑해 시니어 다정하다 ㅠㅠ 아가고양이 말할수있겠지? 궁금하다ㅠㅠ 슈슈하고 같이살자ㅠㅠ
[Code: 2c90]
2024.05.25 09: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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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센세가 오셨어 ㅠㅠㅠㅠㅠㅠㅠㅠ센세 사랑해 ㅠㅠㅠㅠ이제 정독하러 간다 ㅌㅌㅌㅌㅌㅌㅌㅌ
[Code: ed60]
2024.05.25 09: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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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같은 이야기야 분위기 미쳤다 ㅌㅌㅌㅌㅌㅌㅌㅌ시니어가 슈슈를 살리고 귀여운 고양이가 슈슈에게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순간들이 너무 좋다 ㅠㅠㅠㅠㅠㅠ
[Code: ed60]
2024.05.29 00:48
ㅇㅇ
아주 먼 옛날 하늘의 신들과 지하의 괴들이 크게 싸운 뒤, 인간들이 사는 땅 위가 중립적인 세계로 정해졌구나.. 그게 수천 년 동안 인간들 사이에서 설화로 전해지며 괴의 이름 앞에 妖(요사할 요, 아리따울 교) 자가 더해져 요괴라는 이름이 되었고..
[Code: 6864]
2024.05.29 00:49
ㅇㅇ
“허망함을 구원으로 삼지는 말았으면 하오”라는 시니어의 말이 너무 멋있다 ㅠㅠㅠㅠㅠ 그런데 요괴가 설화의 내용대로 진짜 인간을 먹는 존재일까? 만약 그렇다면 시니어는 일종의 vegetarian 같은 건가? 궁금해 ㅋㅋㅋ
[Code: 6864]
2024.05.29 00:50
ㅇㅇ
윤기 나는 털을 가진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 요괴 주니어가 큰일 했네 ㅋㅋ 드디어 클라우스가 죽을 먹기 시작했어! 주니어 정말 기특하다 ㅠㅠ 클라우스에게 쓰담쓰담 많이 받았으면 ☺️
[Code: 6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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