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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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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영알못이지만 다 같이 보고 싶어서 번역기 돌림 (문제1시 삭제)
럄스콰 제발 2집 빨리줘ㅠㅠㅠㅠㅠ

(챕터는 그냥 내기준 구분하기 편하게 나눔)

1)
[리암갤러거의 세 번째 활동은 다시는 기타를 치지 않을 줄 알았던 스톤로지스의 천재 기타리스트 존 스콰이어의 3번째 재림입니다. 더불어 영국 인디의 황금기를 풍미했던 밴드의 팬이라면 누구나 바래왔을 밴드입니다. 이에 필요한건 필요한 것은 두 번의 넵워스와 신발 몇 켤레, 그리고 "기타 몇 대"뿐이었습니다. "오아시스의 최고의 비트와 스톤로지스의 최고의 비트가 만났습니다" 테드 케슬러는 확신합니다]

2023년 12월 12일, 런던 스프링 스튜디오에서 리암 갤러거와 존 스콰이어가 돌아옵니다.

[수많은 훌륭한 음악적 파트너십은 서로의 신발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존 스콰이어는 리암 갤러거와의 새로운 콜라보에 대해 "신발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존 스콰이어가 2022년 6월 갤러거의 대규모 넵워스 공연에서 Oasis의 '샴페인 수퍼노바' 앙코르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 후, 리암은 은둔형 전 스톤로지스의 기타리스트에게 스콰이어가 좋아할 만한 새 신발 두 켤레를 선물하며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리암은 신발이 스콰이어의 마음을 움직이는 통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수작업으로 만든, 술이 달린 구두지."라고 리암은 경외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약간 미친 듯 하지만 아름다워"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4년 초였습니다. 오아시스는 영국과 접한 웨일즈의 몬나우 밸리 스튜디오에서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를 녹음하고 있었고, 존 스콰이어는 록필드에서 '어려운 두 번째 앨범'이라는 말을 다시 정의한 스톤로지스 2집 '세컨드 커밍(Second Coming)'을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근 마을인 몬머스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존은 첫 번째 스톤 로즈 앨범의 뒷표지에서 발에 무엇을 신고 있었나요?(리암은 궁금해 했습니다)
존은 "그 이후로 리암은 마주칠 때마다 제 신발에 대해 궁금해했어."라고 말합니다.

"스톤로지스의 Fools Gold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존이 반스를 신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 검은색 슬립온을 신었구나!"라고 생각했어."라고 리암은 열정적으로 말합니다.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그럼 반스 신발 한 켤레를 사야지."
2022년 넵워스 공연 리허설을 마치고 맥클스필드로 돌아오는 길에 존은 갤러거에게 비슷한 맥락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날 오후 리암은 어떤 신발을 신고 있었을까요? "클락스 캐러밴"이라고 갤러거는 회상합니다. "뷰티풀."
그때 리암은 두 켤레의 모카신을 스콰이어에게 선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편 존 스콰이어도 리암 갤러거를 위해 몇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존이 “내가 작곡한 노래 두 곡이 있는데 그 곡을 불러볼래?“ 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해야지 존의 노래는 내가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니까“

하지만 갤러거에게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내인생에 다시 기타가 필요했어. 기타가 부족했거든“
그는 가장 최근 솔로 앨범의 제목이 뭐였는지 고민하는 것 같아. MOJO가 손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C'mon You Know?
"...어 그거. 난 그에게 곡에 기타가 많이 들어가야만 하겠다고 했어“
"다행히도 기타가 많다는 게 내 미들네임이지(전문이지)" 존이 자조적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웃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1988년 맨체스터의 인터내셔널 2에서 16살 리암 갤러거는 스톤로지스의 공연을 보며 처음으로 현대 팝 그룹에서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밴드는 한심해 보였어."라고 리암은 회상합니다. "스톤로지스는 멋졌어. '그래,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날 밤 객석의 다른 곳에서는 그의 형 노엘도 비슷한 계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1년여 전 같은 공연장에서 이안 브라운이 '할리퀸' 의상을 입고 공연하는 모습을 처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헐렁한 스트리트 패션으로 무대에 오른 4인조로 변신한 브라운은 지팡이를 커다란 은색 종으로 바꾸고 공연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냈는데, 그 무심한 가수가 관객과 나눈 유일한 소통은 '좋으면 보고 싫으면 말고' 에티튜드였고 이는 리암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갤러거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음악이었습니다.

"노래가 정말 간단하게 들렸어." 공연 첫곡인 I Wanna Be Adored의 열망적인 갈망을 설명하며 큰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도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겠어." 나중에 노엘은 존 스콰이어에게 오아시스의 모든 존재가 스톤로지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스톤로지스가 없었다면 리암은 본헤드의 밴드에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나도 나중에 리암의 밴드에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갤러거 형제는 1988년과 1990년 여름 사이에 영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것과 같은 마법에 걸려 있었습니다.

1989년 데뷔 앨범인 The Stone Roses만큼 성공적인 밴드의 명성을 쌓은 솔로 앨범도 드물었습니다. 1988년 애시드 하우스 운동에서 흡수한 자유분방한 태도를 만끽하며 60년대 스타일의 자유를 노래하는 곡을 삶을 긍정하는 테라스 찬트로 승화시킨 더 스톤 로즈는 당시 얼터너티브 록 밴드의 전형보다 더 세련된 사운드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밴드의 음악성, 특히 존 스콰이어와 드러머 앨런 '레니' 렌의 폭넓은 연주 덕분이었는데, 그의 파격적인 스타일은 인디 댄스 리코드 열풍을 일으켰고, 스톤로지스 이후 번성했던 (전부는 아니지만) 북서부 밴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는 노엘 갤러거가 로디로 활동했던 인스파이어럴 카펫스도 포함됩니다. 놀랍게도 그는 한때 스톤로지스의 티셔츠를 무대 옆에서 입었다는 이유로 고용주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파격은 스콰이어였습니다. 조니 마나 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피드백에 얽매이지 않는 우아하고 모험적인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동료들과 달리 지미 헨드릭스와 지미 페이지의 화려하고 유려한 스타일을 추구했습니다. 90년대 오아시스의 전성기 시절 노엘은 "그는 항상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스톤로지스가 오아시스에 미친 영향은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두드러졌습니다. 존, 이안, 레니, 매니는 상징적인 사진과 짜릿한 카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세계 지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가장 음침하고 가장 수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해프닝'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1990년 5월, 위드네스 인근의 스파이크 아일랜드에서 3만 명의 팬이 모인 대규모 야외 공연을 열었을 때, 노엘과 귁시, 토니를 비롯한 미래의 오아시스 멤버 몇 명이 이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현지 언론은 Stone Roses의 존 스콰이어의 페인트 스플래터 슬리브 디자인으로 재단장된 밴을 찍었는데 그 주인은 나중에 Oasis의 기타리스트가 될 폴 '본헤드' 아서스였습니다.

1996년 25만 명의 팬들 앞에서 넵워스의 헤드라이너로 공연한 Oasis는 존스콰이어를 샴페인 슈퍼노바의 게스트로 초대하며 영향력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오늘날 스콰이어는 "26년 후 리암이 나를 다시 초대했을 때쯤에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데 익숙해졌어."라고 말합니다. "비록 리암이 나를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라고 소개한 뒤에 무대에 올라가는 것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말이야."

스톤로지스는 훌륭한 앨범 한 장과 실망스러운 후속작 한 장을 만들었지만, 수요에 비해 충분히 많은 음악을 녹음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60년대의 영향을 받은 애티튜드로 가득한 맨체스터 밴드를 위한 청사진을 세웠지만 미완의 과제를 남겼습니다. 오아시스가 그것을 완수했습니다. 노엘 갤러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톤 로즈는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줬고, 우리는 들어와서 그 문을 벽에 못을 박았죠."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적으로 가장 제한적이었던 멤버인 싱어 이안 브라운은 7장의 솔로 앨범을 다시 발매하며 스톤로지스 이후 가장 왕성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매니는 Primal Scream 등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레니와 스콰이어 모두 많은 음악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스톤로지스 이후 밴드인 존스콰이어의 1997년 앨범 'The Seahorses'와 스콰이어 솔로 음반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꾼다(2002)'와 '마샬의 집(2004)' 두장 뿐입니다.
"존 스콰이어의 음악은 세상에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라고 리암 갤러거는 합리적으로 선언합니다.

돌장미와싯
2024.05.22 01: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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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얘기 아 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암 돌장미 공연 갔던 얘기는 언제 봐도 럄스콰 뽕찬다ㅠㅠㅠ
[Code: 167a]
2024.05.22 02:33
ㅇㅇ
모바일
"비록 리암이 나를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라고 소개한 뒤에 무대에 올라가는 것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말이야."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조씨들 영원히 음악해ㅜㅜ
[Code: a8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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